성 프란치스코, 빛이신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신 분
작성자 : ocatholic 조회수 : 412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1. 또 다른 그리스도 -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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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곧 성덕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난하게 되신”(2코린 8,9) 그리스도를 따르며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동화시키는 것이다. 이 가난을 통해 행복의 자비를 입고 평화를 누린 이가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이번 호부터 가난보다 부귀에, 헌신보다 명예에, 희생보다 개인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인에게 삶의 경종을 울려줄 프란치스코 성인과 그의 제자들의 삶을 알아본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호명환 신부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을 제목으로 현대 세계와 교회의 복음적 징표로 다시 떠오르고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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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클라라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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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프란치스코(1181/1182~1226) 성인과 클라라(1194~1253) 성녀, 두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에 대해 짧은 나눔을 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단테는 자신의 명작 「신곡」에서 아시시를 ‘동방’으로 표현하고 있고, 프란치스코 성인을 ‘떠오르는 태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단테가 묘사하고 있는 이 중세 세계관은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지닌 유럽 역사 안에서의 중요성을 매우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중요성을 지니게 된 것은 그들이 가졌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라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실 ‘태양’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데, 단테가 프란치스코를 태양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인격적으로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는 점을 암시해주는 내용이다.

일전에 어떤 미국인 사제가 주일학교에서 초등학생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체험했던 내용을 나눈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신부님이 어느 날 아이들에게 ‘성인(聖人)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를 물었더니, 10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빛을 통과시켜주는 사람입니다.”

참 대단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영성가는 “‘누가 성인인가’에 있어서의 관건은 그 사람의 도덕적 됨됨이가 아니라 하느님을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투명성”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선과 사랑과 자비, 즉 하느님 존재 자체가 드러난다면 그는 성인인 것이다. 단테가 프란치스코를 ‘태양’으로 표현하고 아시시를 ‘동방’이라고 묘사한 것은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을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칭한 클라라 성녀 역시도 프란치스코에게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지닌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기에 프란치스코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시작한 복음적 삶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서 떠나올 무렵에는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몇몇 형제들을 주신 후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한 복음의 양식(樣式)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몇 마디 말로 그리고 단순하게 기록하게 했고 교황님께서 나에게 확인해 주셨습니다.”(1-3절; 14-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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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과 세상 권력에 휩싸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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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서 듣고, 보고, 계시받아 세상에 드러내셨다고 말씀하시는 요한 복음의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며 하느님을 세상이 볼 수 있게 해준 사람, 즉 빛이신 분, 태양이신 분을 통과시켜 세상에 드러낸 성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유언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시지만, 또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도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결국 우리가 당신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시대는 유럽 역사 안에서 가장 급격한 변화를 겪은 시대였다. 이 시대는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중 거의 중심에 위치하는 시기이며 다양한 집단과 무리 간의 다툼과 분쟁이 있었다. 또 농업과 목축업을 위한 도구와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인류의 식량 증가, 이로 인한 새로운 자본주의와 도시들의 탄생과 인류의 대이동 등이 특징을 이룬 시대이다. 전체는 아니지만, 교회 역시도 세상의 권력에 휩싸여 교회가 하느님을 드러내 주기보다는 권력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사건 중 하나가 무려 200여 년간 지속한 십자군 전쟁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힘의 대결 구도가 하느님을 드러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맨몸으로 제6차 십자군 원정 중인 십자군과 이슬람군 진영에 가서 이 잔인한 싸움을 중지시키고자 하였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증언해준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비트리의 야고보 주교(1160/70~1240)인데, 그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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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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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곳을 떠나 페루지아에 도착했다. 거기서 나는 죽어있는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발견했는데, 그 시신이 아직 매장되지 않은 채 있었다. 야밤에 도둑들이 와서 그 시신과 함께 매장하려고 시신에 입혀놓은 값비싼 옷을 다 약탈해 가서 그 시신은 실제로 완전히 벌거벗겨진 상태였고, 이미 부패가 시작되었다. 나는 교회로 가서 온전한 믿음의 눈으로 이 세상의 기만적이고 헛된 영광이 얼마나 무상하고 공허한지를 보았다.… 나는 잠시 교황청에 머문 후 내게는 참으로 혐오스러운 큰 무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세상 것들과 통치자 왕국, 재판과 기소 등에 너무도 집착하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영적인 말을 거의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와중에서도 위로의 원천 하나를 발견하였다. 재속의 많은 남녀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 살고 있었다. 그들은 ‘미천한 형제들(lesser brothers)’과 ‘미천한 자매들(lesser sisters)’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교황 성하와 추기경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현세적인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매일 멸망해 가는 세상의 영혼들을 그 공허에서 빼내 자신들의 삶에 합류하게 하기 위한 열정적인 갈망과 지대한 열의를 지니고 일하였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그들은 이미 열매를 풍부히 맺었으며 많은 이들을 회두시켰다.… 그들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한마음이었다고 묘사되는 초기 교회 생활양식을 따라 살았다. 낮에는 도시와 마을로 나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활동적인 삶을 살았으며, 밤에는 자기들의 은수처 혹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관상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런 세상의 흐름 가운데서 프란치스코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이 모든 것에 함께하며 당신의 뜻으로 세상을 이끌어가시는 하느님, 모든 이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보고(관상), 또 그가 본 바를 세상에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오늘날의 상황처럼 세상이 ‘하느님이 어디 있는가!’라고 외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하느님’을 보고, 자신의 삶으로 세상에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소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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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12일 발행 [1572호]
작은 형제회 호명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