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깨지고 금간 항아리
작성자 : ocatholic 조회수 : 1909



후원회 피정 강사로 오신 신부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가 오래도록 제 마음 안에 남아있습니다.

큰 장독대 위에 많은 물 항아리들이 줄지어 서있었습니다. 큰 항아리, 작은 항아리, 투박한 항아리, 맵시 나는 항아리 그리고 ‘깨지고 금간 항아리!’ 그런데 주인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쁘고 성한 항아리들도 많은데, 하필 물 길으러 갈 때 마다 ‘깨지고 금간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두 번이면 모르겠는데, 매번 ‘깨지고 금간 항아리’와 함께 하니, ‘깨지고 금간 항아리’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깨지고 금간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 돌아오는 주인을 향해 참다 참다 못한 ‘깨지고 금간 항아리’가 따졌습니다.

“주인님, 왜 하필 나입니다. 저 많은 쌩쌩한 항아리들 다 놀고먹는데, 왜 꼭 깨지고 금간 저만 이렇게 부려 먹으십니까?”

그때 주인은 ‘깨지고 금간 항아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 뒤를 한번 돌아 보거라!”

깨진 항아리가 뒤를 돌아보니 아주 특별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다른 곳은 다 황무지인데, 주인과 ‘깨지고 금간 항아리’가 늘 물을 흘리며 다니던 그 길에만 예쁘고 앙증맞은 들꽃들이 무수히 피어있었습니다.

주인은 다정한 목소리로 ‘깨지고 금간 항아리’를 향해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애야, 보거라. 깨지고 금간 네 상처 사이로 뿌려진 물들이 저토록 많은 생명들을 싹트게 했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결코 밑진 장사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예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가끔씩 하느님 앞에 ‘깨지고 금간 항아리’와 똑같은 투정을 늘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왜 하필 저입니까? 건강하고 능력 많고 훌륭한 사람들 저렇게 많은데, 저 사람들, 저렇게 하루 종일 놀고먹는데, 그 사람들 놔두고 왜 하필 저입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몸도 성치 못하고, 능력도 없습니다. 시간도 부족하고, 자신감도 없습니다. 있는 죄 없는 죄 다 짓고 살고, 도무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저입니까?”

우리의 하느님, 참으로 신비스런 분이십니다.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부여하십니다. 때로 불공평해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키실 만하니 시키시는 것입니다. 맡길만하니 맡기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서 관상가의 대명사인 마리아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활동가, 언니 마르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마르타처럼 온몸으로 뛰는 역할을 하고 계시는 분들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분들이 하시는 ‘작은 일들’, 하느님 앞에 절대로 작은 일들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무대 위에서 각광과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우아한 주연배우로 존재할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세상과 완벽히 격리된 봉쇄 수도원에서 하루 온종일 거룩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관상생활에만 전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프 연주자라고 하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신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우아하고 부드럽게 하프 줄을 뜯는 부드러운 손놀림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긴 드레스 자락에 감춰진 발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관객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손놀림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치마 밑에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발동작은 더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발’ 없이 아름다운 하프 연주는 불가능합니다.

정성껏 가족들의 식탁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모습과도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때로 귀찮고, 때로 지긋지긋한 일상의 모든 작은 일들이 결국 생명과 사랑, 하느님께로 연결되는 은총의 끈이며, 성화(聖化)의 장이며, 기도 중의 기도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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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