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작성자 : ocatholic 조회수 : 2249

나에게 죽은 뒤 묘비명을 무엇으로 하겠느냐고 물으면,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로 하고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지나온 일생을 돌아보면서 보이지 않는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인도하고 계셨음을, 무엇 하나 채워지지 않은 것 없는 감사로운 삶이었음을 고백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지난주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양과 목자의 이미지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주님의 의지를 보게 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10,27ㄱ) 온갖 소리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거리에서도 집안에서도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없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처럼, 서로 목청을 돋웁니다. 소리는 많으나 의미 없는 말만 공허하게 떠돌아다니는 듯합니다. 이 안에서 어떻게 주님의 소리를 분별할 수 있을까요? 엘리야 예언자가 호렙산 동굴에서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은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뒤의 불속에도 계시지 않았으며, 불이 지나간 뒤에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듣습니다. 향심기도의 선구자 토마스 키팅 신부님은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데, 그 목소리가 침묵이라니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느님의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라.” 하신 것은 내면으로 알아듣는 인식능력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귀를 대고 마음의 소리를 듣듯이. 침묵의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실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소리인 자신은 작아지고 의미인 예수님은 점점 커져야 한다고 합니다. 시끄러운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이 되려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된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10,28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9,41)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나를 얼마나 잘 압니까? 어떨 때 나는 파도 파도 길이 안 보이는 거대한 미궁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귀한지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루카 12,7)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아신다(마태 6,`8 참조)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또 시편은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뱃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139,13) 하며 속속들이 그리고 낱낱이 나보다 훨씬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나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며, 나를 아시는 목자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일인지 분명하게 됩니다.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그분의 막대와 지팡이가 나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10,28)

신앙은 하느님과 나의 1대 1의 관계입니다. 교회는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이지만 그 부르심은 개별적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이름을 부르고 응답함으로써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이 됩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주시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 여기 있습니다.” 하며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하느님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하느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며 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또 있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함으로써 사무엘과 하느님과 관계도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지어주시며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바오로에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방인 선교의 큰 소명을 주셨지요. 부활하신 주님은 또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의 이름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오늘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돈해야겠습니다. 가능하면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물러남도 좋습니다.
‘주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기 전에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시자 나는 비로소 그분께로 가서 그분의 꽃이 되었습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