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작성자 : ocatholic 조회수 : 2683



“내 어린 양 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을 시작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유별나게 부르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점점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지엄하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전제 군주들과 같이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과 같이 인권이 소중하고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높고 무서운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언어는 과거 봉건시대나 전제 군주시대에 통용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에, 오늘도 하느님은 높고 두려운 분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 언어가 복음적 체험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느님을 지극히 높고 심판하실, 무서운 분으로만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야 세상에서 잘 살고 죽어서도 내세를 보장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그런 분이면 오늘 복음의 말씀,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은 신앙 진리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생각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받아 삽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라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현대인에게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명을 이어받았지만 독자적으로 사는 생명체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반대되는, 엄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당신 자녀로 키우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오늘 우리를 위해서는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어야 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예수님이 하셨듯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자상한 생명을 살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꺼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 혹은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다음 만나는 환상적인 내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인 우리의 삶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높고 무서운 분으로 믿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입니다. 높고 무서운 사람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무서운 존재입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은 높고 무섭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군 지휘관이나 재판장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분으로 가르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고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나라 혹은 그분의 ‘함께 계심’을 은혜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뜻을 받들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그분의 자녀답게 변하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혹은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 ‘함께 계심’을 철저히 사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은혜롭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베풀어서 은혜로움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인을 향해 서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기 위해 준비된 모습으로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재물이나 지위를 자기가 누리는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해 사치스럽게 살기도 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재물과 지위는 자기 한 사람이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재물을 사용하고 지위가 요구하는 봉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지만, 또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한 사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가 아버지 앞에서 가지는 자세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 백석을 바쳐야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심청전의 용왕과 같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부모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하여 이루어드리는 것이 자녀 된 사람의 기쁨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는 곳에서도 부모의 뜻을 삶으로 실천하여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자기의 삶 안에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의 삶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베푸심은 은혜로우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높고 무서워서 빌고 바치지 않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베푸시기에 우리도 베풀고, 그분이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고치고 살리기 위해 힘씁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실현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사는 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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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