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참평화를 얻으려면
작성자 : ocatholic 조회수 : 185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루카 12,49-­53)

우리가 살아가는 녹색별 지구가 마치 거대한 용광로가 된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오염의 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더운 여름날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ㄱ)고 하시니, 그럼 예수님이 방화범?

예수님은 책임 의식 없이 재미삼아 불장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불을 지르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 불은 집을 태우고 산을 태우고 사람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냉랭하고 무심한 마음에 지피는 불이므로 ‘자나 깨나 불조심’ 하며 방화범 예수님을 겁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를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시편에 기록된 말씀을 떠올렸다고 요한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2,13-­17). 이렇게 혁명적인 불을 일으키시는가 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루카 15,3-­7) 비상식적인 불이기도 합니다. 미쳤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마르 3,21) 하느님 나라 일에 몸 바치다가 결국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 제자들 마음속에 불씨를 당긴 뜨거운 불입니다.

불은 세상을 밝혀줍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불의와 억압이란 어둠의 실체는 빛 속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한 1,5) 그리하여“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의 무딘 양심을 예민하게 만들어 어둠에 타협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고뇌와 갈등을 일으키십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편했을 텐데 예수라는 사람을 알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더 많이 받아 갈등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에페 5,7-­9)

빛의 자녀답게 뜨거운 마음의 불을 지니고 살았던 두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제1독서에서 전쟁이 무용하다며 진실을 외치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대신들은 구덩이에 처넣어 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ㄴ-9)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ㄴ)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분열이 좋은 것은 분명 아니지만 정의와 진실이 아닌 것으로부터는 갈라서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계층이 다르다고 갈라서고 싸우면 안 됩니다. 올바르고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는 모두가 내 형제이며, 같은 종교를 믿고 있다 하더라도, 어머니나 아버지라도 진리가 아니요 의롭지 않으면 그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타협이 아니요, 진실을 은폐하여 그저 ‘좋은 게 좋은 것’도 아닙니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 3,16)라고 하셨습니다. “정녕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정한 이득만 챙긴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한다.”(예레 6,13-­14)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ㄱ) 선과 정의와 진리와 사랑이 승리할 때 이루어지는 평화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ㄱ)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0.21)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과 권력과 치부를 위해 불을 태웁니다. 모차르트·베토벤·반 고흐같이 예술에 불을 태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주독립을 위해,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을 유린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생태계 보호를 위해, 농민들의 생존과 자주경제를 위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며 자신을 불사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계 곳곳의 긴급구호 현장을 찾아가 고통 받는 이들을 보듬어 안는 한비야씨는 “재미있는 세계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혼자 애쓴다고 세상이 변하나요?”라는 질문에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라이베리아를 떠나기 전 열다섯 살 모모가 “나는 그동안 미쳐 있었어요. 전쟁이 나를 미치게 했어요!”라고 한 것이 자꾸 목에 걸려 “나는 모모와 같이 미칠 뻔한 소년병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고 싶다. 그 기회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무거운 총 대신 무거운 책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것, 옆집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겨 밤잠을 설치며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 십대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이런 일상을 돌려주고 싶다.”(「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라고 했는데, 자! 그렇다면 나의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하는 불은 무엇인지요?

예수님이 당겨주시는 불은 이른바 명예와 부와 권력의 습지 안에서는 잘 타오를 수 없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시편 42,2­3ㄱ)라고 말하는 가난한 영혼 안에서 잘 타오릅니다. 그리고 지펴진 불길은 하얀 재가 될 때까지, ‘나’가 없어질 때까지 활활 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방화범 예수님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탈대로 다 타시오.…`타다가 남은 동강은 쓰일 곳이 없느니다.”(가곡 ‘사랑’ 중에서)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