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완서 작가 삶과 신앙
작성자 : ocatholic 조회수 : 2250



▲ 박완서 작가의 빈소에는 그가 생전에 '가난한 문인에게 조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며 조의금을 받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을 향한 배려를 알 수 있다

‘못 가본 길’이 정말 ‘더 아름다우셨나요’
‘국민 작가’ 박완서씨 지난 22일 투병 끝에 하느님 곁으로…
마흔살 ‘늦깎이’ 나이로 등단
단호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질주의 세속적 탐욕에 일침
본지 칼럼 통해 신앙 소통

한국 문단의 거목이 하늘로 돌아갔다. 진솔한 삶과 소박한 글로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것들을 위로해주던 작가였다. 그가 떠난 빈 자리에는 그의 환하디 환한 미소만이 여운을 남겼다.

국민 누구에게나 언니, 누나, 엄마, 할머니가 되어주었던 소탈한 작가,‘안티’ 혹은 ‘비호감’이라는 수식어는 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작가 박완서(정혜 엘리사벳·1931~2011)씨의 빈자리다.

그의 빈소에는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어 있었다. 평소 가족들에게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는 자녀들의 설명이다. 생전에 그러했듯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은 이들을 배려하며 자신을 낮췄다. 세상에 이별을 고하면서도 최고의 글과 훈훈한 인간애를 남긴 그로 인해 이 겨울, 한국사회가 또 한번 들썩였다.

■ 가장 좋아한 수식어 ‘영원한 현역’

‘작가 박완서’의 삶을 되돌아볼 때 빠트릴 수 없는 부분이 늦깎이 데뷔다. 하지만 그가 문단의 거목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다섯아이를 키우던 전업주부가 마흔 나이에 등단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 40년간 한치의 흔들림없이 써온 그의 글은 박씨를 ‘영원한 현역’으로 만들었다. 작은 체구에 어떻게 그런 힘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단호하고 날카로운 시선, 내면을 드러내는 그의 글은 1970년대를 풍미한 작가도, 80년대 인기 절정의 작가도 아닌 평생 우리 곁에 남는 작가로 만들었다.

누구보다 대중적인 사랑을 많이 받은 작가였지만, 그 삶의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서울대 국문과에 진학했지만 한국전쟁의 북새통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남편을 먼저 보내고 생떼같은 외아들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맺힌 가슴속 응어리는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욱 불을 지폈다. 야멸차고 냉정한 시선으로 물질주의, 허위의식, 세속적 탐욕에 일침을 가했다. 그의 작가적 시선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들의 일상을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갔다. 세태를 슬쩍 비틀어 보여주지만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이 무엇인지 자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시선을 닮아 사람들을 보았으리라.

무엇보다 떠나기 바로 전까지도 손에서 종이와 펜을 놓지 않았다. 데뷔작 「나목」 이후 전쟁의 상처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에 이어, 여성의 억압문제를 건드린 작품들, 묵상집, 소설집, 산문집 등을 끊임없이 내놓으며 세상과 소통했다. 여느 작가들이면 펜을 진작 놓았을 시기인 70대에 들어서 펼쳐낸 창작활동은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 가을엔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내놓았다. 생전의 마지막 책이었다.

■ 누구보다 큰 사랑을 펼친 작가

1982년 세례를 받았다. 세례도 늦깎이였다. 하지만 한국 문학사의 맥락과 연대표를 갱신하는 것 이상으로 매일매일 탄탄한 신앙을 쌓아갔다.

아들을 잃었을 때는 십자가를 내던지고 몇달을 극도로 화를 내며 싸웠다. 상대는 하느님이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길어올린 박씨는 스스로의 삶과 신앙에 대해 고백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신문 문화 및 시사칼럼 등을 통해서도 신앙적 소통을 이어왔다. 서울주보에 연재한 글은 묵상집으로도 엮어 냈다.

그의 주변에 있던 가톨릭 문인들은 한결같이 박씨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너무나 솔직한 특히 하느님께 너무나 솔직한 딸이었다고 전한다. 평소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선배들과도 자주 교류하며 내면을 성찰하는데 쉼없이 내달린 작가였다.

“내 눈으로 보고 어떻게 돕지 않을 수가 있냐”며 누구보다 먼저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이였다. 한국유니세프의 첫 친선대사로 위촉된 후 그의 활동은 20년간 꾸준히 이어졌다.

오랜 시간 친동생처럼 친분을 나눴던 이해인 수녀는 선종 직후부터 장례일까지 내내 빈소를 지켰다. 이 수녀는 “박선생님은 크나큰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았던 분이었기에, 하느님 곁에서도 큰 사랑을 받으며 머물러 계실 것”이라고 전했다.

박씨는 암투병으로 힘겨워하던 이 수녀를 위해 구리에서 부산까지 깜짝 방문도 마다하지 않았고, 수녀들에게 자장면 100그릇을 내며 한껏 웃는 순박하고 사려깊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

신앙 안에서 승화된 그의 내면은 농담처럼 그러나 투철하게 삶을 관조하는 역량을 갖게 했다. 가장 최근에 쓴 ‘내 식의 귀향’이란 글에서 박씨는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를 다녀왔다 … 멀지 않은 곳에 김수환 추기경의 묘소가 있는게 저승의 큰 ‘빽’이다. … 실없는 농담 말고 후대에 남길 행적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썼다.

지상에서의 글쓰기는 끝났다. 그의 말을 빌리면 섬칫하도록 공평하신 하느님 곁에서 이미 세상을 위해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 추모의 마지막 길… 장례미사

박완서 작가의 장례식은 문인장 등을 고사한 고인의 평소 바람대로 소박한 장례미사로 봉헌됐다. 25일 오전 10시 의정부교구 토평동성당에서 봉헌된 미사에는 가족들과 지인, 성직·수도자와 가톨릭문인 500여 명이 참례했다.

이날 강론에 나선 김성길 신부(의정부교구 덕정본당 주임)는 “참으로 큰 분이었지만 모든 요란하고 화려한 장례식을 마다하시고 당신께서 신앙의 여정을 걸었던 이곳 토평동본당에 소박한 영결미사를 맡기셨다”며 “죽을 때 우아하게 죽고 싶어서, 행복할 때 감사하고, 불행할 때 기도하고 싶어서, 자신의 존재가 불안하게 흔들릴 때 의지하고 싶어 그리스도를 찾아오셨다고 했던 박완서 선생님은 이제 죽음과 부활을 믿었던 한 신앙인으로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뵈러 못 가본 길을 떠나셨으니 고대하셨던 주님 만나시어 천년만년 행복 누리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날 미사에서는 문학평론가 유종호씨의 추모사와 시인 정호승씨의 추모시에 이어 이해인 수녀의 추모기도가 봉헌됐다.

한편 이에 앞선 22일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박씨의 선종 소식을 접하고 “박완서 작가님은 우리나라의 대표작가일 뿐 아니라 가톨릭 신앙인으로서도 훌륭한 모범을 보이신 분이셨다”며 유족을 위로하고 애도를 표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