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구약성경

신약성경

성경의 형성사

성경의 용어

성경의 인물

성경속의 세상

질문 101

♣ 현재위치 : 홈 > 성경의 세계 > 신약성경

신약성경(한글)

신약성경(영어)

불가따

입 문

해 설

해 설 ≫ 복음서                                                                                 l 복음서 l 사도행전 l 서간서 l 요한묵시록 l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요한 복음서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13 46.8%
[4] 죄 없는 아기들 죽음의 의미는?
조회수 | 988
작성일 | 13.06.24
점성가들이 떠나간 뒤에 마침 꿈에 주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당신에게 일러줄 때까지 거기 있으시오. 헤로데가 아기를 없애려고 그를 찾을 것입니다” 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으니,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때에 헤로데는 점성가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했다. 그는 (사람들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배기와 그 아래 아이들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이는 점성가들에게 정확히 알아본 시각을 계산했던 것이다. 그때, 예레미야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리니, 울음과 통곡이 애절하구나. 제 자식들 때문에 우는 라헬, 위로받기조차 마다하니 그들이 없어졌음이라.”

헤로데가 죽은 뒤 마침 꿈에 주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오.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습니다” 했다. 요셉은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가 자기 아버지 헤로데에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갔다. 나자렛이라는 도시로 가서 살았으니 예언자들을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리리라.” (마태 2,13-23)

해설

헤로데가 죽기(기원전 4년) 전 예수가 이미 태어났음을 짐작하게 하는 단락이다. 이집트로 피신, 베들레헴의 유아 살해, 갈릴래아로 이사―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다. 헤로데의 포악함과 요셉의 의로움이 대비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집트는 고향에서 목숨이 위협받는 사람들이 피신하는 곳으로 나타난다(신명 23,8; 1열왕 11,40; 즈카 10,10). 아기를 죽이려는 헤로데는 바리사이파(마태 12,14), 대제관들과 원로들(마태 27,20)의 행동을 미리 보여주는 셈이다. 아기 예수를 이집트에서 불러낼 때 호세아 에언서 11,1이 인용된다. 아버지와 아들을 비유로 이집트 억압에서 해방되는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한 호세아 예언자다.

마태오에게 예레미야 에언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미리 예고하는 사람이다. 구원을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자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신약성서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마태오를 제외하면 그 이름이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는다(마태 16,14). 사무엘기 상권 10,2와 다르게 창세기 35,19; 48,7 이후 라헬 무덤이 베들레헴 근처 라마에 있다는 전승이 생겼다. 야곱의 아내 라헬은 해외로 끌려간 아들들 때문에 통곡한다(예레 31,15). 마태오에게 라헬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한탄하는 역할로 인용된다.

유아 살해는 예루살렘에 닥친 심판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이다. 헤로데 통치 시대에 실제로 그런 유아 살해가 있었다고 기록한 역사기록은 없다. 예수가 이집트에서 주술을 배웠느니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느니 하는 랍비 문헌은 여럿 있었다. 갓난 아이 예수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자렛을 그리스어로 polis(도시)라고 기록한 마태오는 이스라엘 지리를 잘 모르는 듯하다. 마태오가 도시에 거주했기 때문에 예수도 도시에 거주한 것으로 당연히 생각한 것일까.

나자렛은 마태오에게 기초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서 오늘 단락의 23절 “나자렛 사람”은 마태오에게 중요한 해석도구(crux interpretum)다. 나자렛 사람이란 단어는 마태오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 13번 보인다(루카 · 요한 복음, 사도행전).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지칭하는 호칭으로 퍼졌음을 가리킨다. 예수의 제자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용하던 호칭이라는 사실이 눈에 띈다. 예수 추종자들을 나자렛 사람들이라고 언급된 구절이 신약성서에 한 군데 있다(사도 24,5).

나자렛은 공동성서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나자렛 사람을 뜻하는 단어 nazoraios의 의미도 그리 뚜렷하지 않다. 나자렛이란 단어의 발음과 어원을 자세히 분석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는 하느님의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판관 13,7)라는 구절이 있다. 어떤 사본에는 이 구절이 “하느님의 거룩한 자”라고 읽힌다. 마르코 복음서 1,24는 나조르인, 나자렛 사람, 하느님의 거룩한 자를 동등한 의미로 보는 것 같다. nazoraios와 비슷한 발음을 지닌 히브리 단어가 보이는 구절도 있다. “파수꾼”(예레 31,6), “왕”(창세 49,26), “새싹”(이사 11,1),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자”(이사 49,6).

그 단어를 메시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유력한 듯하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이사 11,1). 메시아 “새싹”(neser)을 마태오 복음에서 중요한 예언자인 이사야가 선포하는 것이다. 비슷한 뜻을 가진 히브리어 semah(새싹)도 메시아와 관련된다(이사 4,2; 예레 23,5). 공동성서에 전혀 언급되지도 않은 나자렛에서 무슨 구세주가 나오겠느냐 비꼬던 유다인들과 맞서는 유용한 해석도구겠다. 마태오 복음이 쓰일 당시 nazoraios가 그리스도교인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아기가 대량 학살된 사건은 일그러진 정치권력의 악독함을 잘 나타낸다. 모세를 이은 새로운 해방자인 예수의 모습과 대조되는 악한 통치자로 헤로데가 나타난다. 여기서 헤로데는 로마 군대를 은근히 빗대는 계기로 언급된다. 메시아 아기 예수를 구출하기 위해 죄 없는 많은 아기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언급된다. 하느님의 선하신 능력과 세상의 악의 존재를 해명하는 문제(Theodizee)가 간접적으로 제기된다. 마태오 자신은 여기서 이 문제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것 같다. 마태오에게 헤로데와 예수의 대결 구도가 우선 주요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레오 대교황은 죄 없는 아기들은 피의 세례로써 원죄에서 해방되며 예수의 고통을 나눈다고 해설하였다. 사람은 언젠가 죽어야 하니 그리스도를 위해 복된 상태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루터는 해설하였다. 억울한 죽음에 아무리 고귀한 의미를 부여하는 설교라 하여도, 몹시 어색한 설명들이다. 인간을 훈계하려는 교육적 의도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셨다고 해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유대인 학살, 1 · 2차 세계대전 후에 온전한 정신으로 그렇게 해설하는 신학자는 보기 드물다. 그런 해설을 하기보다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낫다. 신학이 침묵하는 자리가 분명히 있다. 변신론(辯神論, Theodizee) 문제에서 “나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신학자는 고백해야 한다. 문제도 모르면서 답을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신학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신학자라도 정직해야 한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 전설에 가까운 오늘 이야기는 어떤 가르침을 담고 있는가. 부모의 현명함 덕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도로 예수는 구출되었다는 것이다. 방랑의 운명을 예수는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런 하느님의 배려로 예수는 이집트에서 살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조들이 치험한 이집트 억압에서의 해방사건을 예수도 다시 체험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민족의 억압을 다시 경험하고 다시 탈출하여 새로운 해방자의 면모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모세의 운명과 예수의 운명을 연결시켜 예수를 새로운 해방자로 부각시키려는 마태오의 의도다. 모세와 맞서는 파라오와 대응하여, 예수와 맞서는 헤로데라는 대결 구도가 드러난다. 파라오와 헤로데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억압세력의 전형이다. 헤로데는 자기 정체를 폭로했다.

억압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해방자는 없다. 방랑하지 않은 해방자는 없다. 갈등 속에 살지 않은 해방자는 없다. 해방자는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오늘 단락은 보여준다. 또한 어둠의 세력이 누구인지 자세히 보여준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처신하는지 보여준다.

독재자는 자기 정체를 스스로 폭로하는 법이다. 역사의 희생자가 생기는 동시에 가해자는 밝혀지는 것이다. 가해자가 하늘 아래 숨을 곳은 없다. 역사의 교훈이지만 또한 성서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성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명히 알려준다. 오늘 누가 모세이고 누가 예수인가. 오늘 누가 파라오이고 누가 헤로데인가. 오늘 누가 로마 군대인가. 성서를 보면 세상을 읽을 수 있다. 창조에서 종말까지 아우르는 성서다. 성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6   [6] 나의 죄도 남에게 떠미는 세상이지만  804
5   [5] 설교자여, 먼저 회개하라!  795
  [4] 죄 없는 아기들 죽음의 의미는?  988
3   [3] 폭군과의 갈등은 예수의 아기 시절부터 시작됐다-3  860
2   [2]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위한 헌사  1115
1   [1]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책.  1437
1
 

 

신약성경(한글)

신약성경(영어)

불가따

입 문

해 설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2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