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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1) 글을 시작하며
조회수 | 3,818
작성일 | 09.02.18
유대인 '약속의 역사' 찾아 떠나는 여행

아브람 결단에서 시작된 유대인의 역사 / 민족사가 아닌 인류의 구원사로 재조명 / ‘새 계약’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

"먼 길을 가야 한다…."

75세의 한 노인이 천막 안에서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 “분명히 들었다 그분의 말씀을….” 노인은 며칠 전 기도 중에 하느님의 ‘생생한’ 음성을 들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 1). 한참동안 고민하던 노인이 양 팔을 무릎에 짚고 일어섰다. 결심이 선 듯했다. 천막 입구에 드리운 휘장을 걷고, 밖으로 큰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그리고 아내 사라와 조카 룻을 비롯해 거느린 종들을 불러 세우고 말했다.

“이제 떠난다. 먼 길을 가야 한다. 짐은 가능한 줄이고,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라. 내 앞길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다.”

4000년 전, 작은 한 부족을 이끌던 노인, 아브람이 아시아의 서쪽 끝, 유럽의 동쪽 끝에서 내린 결단 하나가 오늘날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가능케 한다. 특히 유대인의 역사는 이렇게 한 노인이 가족과 거느리던 부족을 이끌고 번성하던 도시를 떠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브람의 결단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한 마리아의 순명을 닮았다. 노구(老軀)를 이끌고 미지의 땅으로 향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그렇게 그는 모든 하느님 백성의 맨 앞줄에 우뚝 선다.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한민족의 조상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면, 유대인들의 조상은 아브람이다. 2009년이 단기 4342년이니까 유대인과 한민족의 역사는 비슷한 시점에 출발하는 셈이다. 유대인과 한민족은 출발에서도 그렇지만 살아온 모습도 닮은꼴이다. 두 민족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대국들이 주위에 둘러선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수많은 침략을 받았고, 실제로 오랜 이민족의 지배도 받아야 했다.

다른 민족에게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풍부한 종교적·영성적 성향도 비슷하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전쟁 나간 아들과 남편의 무사 귀환을 위해, 늘 장독 위에 정화수 떠 놓고 두 손 비비며 천지신명께 빌었고, 유대 어머니들도 늘 하느님의 계약을 믿고 기도했다.

우리가 유대인들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를 향한 긴 여정을 떠나려는 것은 그들의 역사가 단순히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닌 인류의 구원사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온통 나자렛 예수가 구약성경에 예고된 약속을 성취한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끊임없이 배반하고 돌아서는 유대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새 계약’(예레 31, 31~34)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유대인 이야기가 ‘지금 여기서’(hic et nunc) 필요한 이유다.

‘유대인 이야기’를 기획하면서 용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 ‘유다인’인가 ‘유대인’인가하는 문제였다. 대부분 가톨릭교회 학자는 ‘유다’라는 낱말을 아무런 구분 없이 국가명, 지방명, 민족명, 인명, 종교로 두루 적용해 왔다. 야곱의 아들 유다, 통일 왕국 분단 이후의 북 이스라엘과 구분되는 의미의 유다 왕국, 팔레스티나 남쪽을 의미하는 지방 이름 등으로 유다가 함께 사용되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유다주의’ ‘유다를 넘어서’등의 의미가 모호해진다. ‘유다가 유다에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유다 왕국과 유다 지역을 배경으로 글 쓰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와 관련, 가톨릭대 하성수 박사(고대교회사, 교부학)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다. 신약성경과 그 이후에 사용된 지방명은 유대아, 인명은 유다스가 주로 사용되었다. 하 박사에 따르면 이 명칭은 오늘날 각국의 현대어와 우리나라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굳이 가톨릭교회만 이 용어를 게토화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역사를 다루는 이 글에서는 새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명은 ‘유다’ 및 ‘유다스’, 지역명은 ‘유대아’, 민족명은 ‘유대인’, 종교명은 ‘유대교’로 사용키로 했다.

하느님은 유다인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 33). 그 ‘약속의 역사’로 이제 긴 여행을 떠나려 한다.

"먼 길을 가야 한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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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2) 문명의 시작

“하느님 약속 믿고 문명 떠나 미지의 땅으로”

유대민족 조상 이해하기 위해선 우르 문화(수메르 문명) 살펴야 / 바빌로니아의 수메르 침공… 우르 지역 거주 유대인들 집단 이주

1억5000만년 VS 350만년. 공룡이 이 땅에 존재했던 시간과 인류가 지금까지 생존해온 시간을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350만년이라는 인류 존재 시계로 볼 때 공룡이 존재한 시간 1억5000만년은 영원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앞으로 1억4650만년을, 아니 100만년을 더 존재할 수 있을까. 많은 환경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은 그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앨빈 토플러 (Alvin Toffler)는 “인류 미래는 앞으로 1만년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했고,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는 “세계 3차 대전은 어떻게 전개될지 예언할 수 없지만, 세계 4차 대전은 예언할 수 있다. 아마 그 때는 돌도끼를 들고 싸울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인류가 지금껏 이룩한 성취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류는 하느님 창조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 짧은 350만년 동안 공룡이 상상도 못하던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 그럼 인류는 언제부터 이 땅에 존재했을까. 30여 년 전만 해도 세계사 교과서는 ‘아담 창조 시기’(인류 조상이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시기)를 약 200만년 전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1974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하다드 사막에서 ‘루시’(Lucy)가 발견되면서 그 기원은 350만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갔다.

루시는 신장 1m 가량의 20세 전후 여성으로 직립 보행을 했으며, 뇌 용적은 작고(400ml) 약 350만년 전에 생존한 것으로 추정됐다. 루시라는 이름은 발견된 날 밤 조사대의 캠프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비틀즈 곡명에 유래한다고 한다. 창세기에서는 아담(남성)이 먼저지만, 고고학에선 최초 인류가 하와(여성)인 셈이다.

루시 이후, 인류는 아프리카를 떠나 아시아와 유럽, 오세아니아까지 퍼져 나간다. 하지만 문명의 첫 불씨가 당겨진 곳은 아프리카도, 유럽도, 오세아니아도 아니었다. 350만년의 끝자락에 문자를 쓸 줄 아는 인간이 살았던 곳은 아시아의 서쪽 끝, 유럽의 동쪽 끝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지금의 이라크, 이란이 위치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살던 인간들이 일을 냈다. 문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학자들 마다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이곳에서 인류 최초 문명이 탄생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3500~3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문명을 세운 이들이 수메르인(Sumerians)들이다. 이들은 당시 세계의 중심 도시, 우르(Ur)를 건설한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은 이들이라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이다. 우르라는 도시는 창세기, 역대기 상권, 느헤미야기 등에 총 5회 나타난다. 우르는 하느님이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면서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끌어 낸 이다”(창세 15, 7)라고 말한 그 우르이며, 동시에 아브람의 고향이기도 하다(창세 11, 31; 느헤 9, 7 참조).

따라서 아브람, 유대민족의 조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우르의 문화(수메르 문명)를 들어다 볼 필요가 있다. 우르 사람들은 인류 최초의 문자, 설형문자(cuneiform, cuneus는 라틴어로 쐐기라는 듯)를 사용했다. 아브람도 아마 이 문자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곱셈과 나눗셈법은 물론이고, 심지어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구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숫자 체계와 도량형법은 60을 단위로 사용하는 12진법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이 12진법을 시계를 통해 사용하고 있다. 수메르인들은 기하학 분야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원을 360도로 표현했다. 이들은 또 물시계와 태음력을 고안해 냈으며, 다리 건설에 필수적인 아치와 볼트도 만들어 사용했다. 지붕을 둥글게 만드는 돔도 수메르 인들이 처음으로 사용한 건축기법이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수메르 건축물로 지구라트(ziggurat)가 있다. 높은 땅 위에 계단이 딸린 탑을 쌓고 그 위에 신전을 올린 피라미드 형 건축물인데, 지금까지도 우르 지역에 남아있어 그 웅장함을 자랑한다. 많은 이들이 이 지구라트를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으로 해석하고 있다. 수메르인들은 이밖에도 이름과 개성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세계 최초의 문학 「길가메시 서사시」등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어떻게 인류가 이렇게 갑작스레, 폭발적으로 지적 능력을 향상시켰는지는 아직도 의문점으로 남는다.

하지만 오르막길, 내리막길 세상사가 그렇듯 수메르 문명도 1500년을 넘기지 못한다. 수차례 북방민족(셈족)의 습격을 받고 다시 일어섰지만, 결국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바빌로니아에 무너졌고, 이들의 흔적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수메르인들의 종교다. 놀라운 사실은 수메르 문명의 혜택을 듬뿍 받았을 아브람의 종교가 수메르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아브람이 믿었던 하느님과 당시 수메르인들이 믿었던 신은 성격이 전혀 달랐다.

수메르 인들의 종교는 농업과 전쟁 등을 위한, 현세적인 종교였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의 종교에선 영적 내용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수메르 인들은 ‘위안’‘삶의 의미’‘영혼의 고양’‘최고신과의 합일’ 등과 같은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들은 영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과 열정을 지닌 존재였다.

수메르 문명이 바빌로니아에게 무너진 것은 대략 기원전 2000년경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아브람 가족은 우르를 떠난다. 우르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집단 이주는 어쩌면 바빌로니아의 수메르 침공에서 촉발되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기원전 2000년경 한반도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은 당시 인류 최초 문명을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유대민족의 조상, 믿음의 조상은 인류 최초의 문명세계에서 살았고, 그 문명의 혜택을 듬뿍 받았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은 ‘하느님 약속’ 하나만 믿고, 그 문명을 등진다. 문명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간다. 가라는 곳으로 간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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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3) 아브람, 하느님 역사의 시작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하란에서 가나안 땅까지 3000㎞ 거리 / 말씀 따라 고향 떠나 머나먼 여정 시작 / “두려워 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참으로 아름다운 미소다.

‘사라이’가 잠들어 있는 남편 ‘아브람’(뒷날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라이는 사라로 개명된다, 창세 17, 5; 17, 15)을 미소 가득 머금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미소와 행복한 웃음은 훗날 창세기에 ‘역사상 최초의 웃는 인간에 대한 기록’으로 묘사될 정도로(창세 18, 12; 21, 6) 황홀했다. 나이 70세를 훌쩍 넘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숙한 아름다움 속에 배어나는 지순함이 사람들을 경외감에 고개 숙이게 했다.

사라이는 지금 과거를 생각하고 있다. 50년….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고향 우르(Ur)를 떠나온 후 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다. 한 가정의 맏 여인으로서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남편 아브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평생을 함께해온 남편…. 그 남편이 지금 옆에 잠들어 있다. 사라이의 얼굴에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배어나온다. “참으로 매력적인 분이다….” 남편 아브람은 외부의 침략에는 굳건히 맞섰지만,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했으며(창세 13, 8-9),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창세 14, 17-24).

피가 다른 외국인(이방인)을 극진히 대접했고(창세 18, 1-5), 이웃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창세 18, 16-33). 무엇보다도 사라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남편이 하느님을 경외 했으며, 늘 하느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창세 22, 12; 26, 5)는 점이다.

남편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았으며(시비지심, 是非之心), 어렵고 불쌍한 이웃을 보면 가만히 있지 못했고(측은지심, 惻隱之心), 항상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겼으며(수오지심, 羞惡之心), 겸손했다(사양지심, 辭讓之心). 우르에서 하란으로, 또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오는 동안 많은 토착민들이 아브람에게 보여준 호의는 바로 그러한 인간적 매력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이는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시아버지 테라에게는 맏아들인 아브람과 둘째 아들 나호르, 셋째 아들 하란이 있었다. 막내 아들 하란은 아들 롯과 두 딸 밀카와 이스키를 낳았으나 젊은 나이에 죽었다(창세 11, 28). 그러자 둘째 아들 나호르가 하란의 맏딸 밀카와 결혼해 분가했다.

롯의 큰아버지인 남편은 자녀가 없었기에 죽은 막내 동생의 아들과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 테라가 남편을 비롯한 가족을 이끌고 우르를 떠났다. 바빌로니아 왕국이 우르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버지를 모실 필요가 없는 독립심이 강한 둘째 아들 나호르는 우르에 남았고 남편과 조카 롯 등만 먼 길을 나섰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하란(현재의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고대도시)이다(창세 11, 31).

사라이는 더 이상 유랑생활이 싫었다. 하란에서 정착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하는 유랑생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하란에서 아버지를 땅에 묻은 남편은 다시 길을 나섰다(사도 7, 4).

남편은 하느님께서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 1)라고 말씀 하셨다고 했다. 이때 남편의 나이는 벌써 75세 였다(창세 12, 4). 남편의 말을 믿고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가능하면 기쁜 마음으로 따르려 했다. 억지로 따라다녔다면 하란에서 가나안 땅까지 이르는 3000km 넘는 거리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도 고통을 그치지 않았다. 대 기근이 들어 식량을 찾아 이집트까지 가야 했고(창세 12, 10) 여러 작은 전쟁과 다툼도 버텨내야 했다(창세 14, 13-16).

하지만 사라이는 지금 남편을 따라온 여정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가나안 땅이야 말로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온 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한 이 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수없이 들었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서는 금속, 향신료, 사치품, 향수, 고무, 약품 노예 등의 국제 거래가 있었다(1열왕 10, 28-29; 이사 43, 24; 아가 3, 6).

게다가 남편이 늘 믿고 따르는 유일신 하느님께서 남편에게 해주신 약속도 있지 않는가. 하느님은 언젠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 15, 1).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 5).

남편이 하느님과 대화한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하느님과의 대화라니…. 하지만 지금까지의 충격은 아무것도 아니다. 최근에는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라이는 급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느님 맙소사!”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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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4) 영원한 계약 그리고 이사악

“너와 후손들의 영원한 하느님이 되겠다”

아브람, 민족들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 하느님,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요구

아내 사라의 속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느님께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하느님의 딸이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을 믿지 않고 고집 피울 때도 많다.

10년 전 일만해도 그렇다. 아내는 하느님께서 아이를 주시겠다는 말을 하셨는데도 믿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창세 18, 12)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느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여라. 나는 그의 뒤에 오는 후손들을 위하여 그와 나의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겠다.”(창세 17, 19)

물론 나와 아내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 힘든 말씀이었다. 그러나 하느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느님은 아들 이사악을 예고하실 즈음 나와 아내의 이름을 바꾸도록 하셨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창세 17, 5) “너의 아내 사라이를 더 이상 사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사라가 그의 이름이다.”(창세 17, 15)

참으로 송구스러운 일이다. ‘아브라함’에서 ‘아브’는 아빠, 아버지라는 뜻이고 ‘함’은 백성, 민족이라는 뜻이다. 곧 나를 민족들의 아버지, 백성의 아버지로 세우신 것이다. 아내의 새 이름 ‘사라’도 ‘여왕’이라는 뜻이니, 영광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더 나아가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 7) 고 약속하셨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의 말씀이 있을까. 하느님은 또한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창세 17, 8)고 하셨다. 실제로 하느님은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아비멜렉이 보낸 장수 피콜과의 평화 계약(창세 21, 22-34)을 성사시켜 주시는 등 당신 약속을 하나하나 실현해 보이셨다.

이 같은 모든 계약의 증표로 하느님은 ‘할례’(포경절제수술)를 요구하셨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창세 17, 11). 그래서 나는 하느님 말씀대로 할례를 했다.

몸종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우리 가족들만의, 독특한 소속감을 드러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할례는 하느님께 대한 복종이었고, 순명이었다. 언제까지 하느님의 할례 명령이 이어질지 모르지만 당분간 이 할례는 하느님 백성을 드러내는 표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이사악도 태어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도록 했다(창세 21, 4).

이사악은 나의 삶의 전부다. 이사악으로 인해 인생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사악이 웃을 때 나도 웃었고, 이사악이 울 때 나도 울었다. 이사악이 태어나기 전, 몸종 하가르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낼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하지만, 그들 또한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은 모두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창세 21, 8-21).

인간은 여정의 동물, 길 위의 동물(Homo Viator)라고 했던가. 돌이켜 보면 참으로 험난했던 일생이었다. 고향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이곳까지 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혹독한 기근에 시달려야 했고, 낯선 이방인들과의 수많은 다툼도 거쳐야 했다. 나의 인생은 그렇게 길 위에서 시작했고, 또한 그 길 위에서 막을 내릴 것이다. 이사악은 그런 고난의 여정 끝에 다가온 행복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하느님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은 나에게 사형선교나 다름없었다. 나를 데려가신다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그 어떤 형벌도 달게 받을 것이다. 하느님 명령이라면 마른 짚을 등에 지고 불에 뛰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들을 요구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 2)

어쩔 수 없다. 하느님은 분명 계획이 있으실 것이다. 아들은 지금 번제물을 태울 장작을 등에 지고 옆에서 함께 걷고 있다. 아들이 묻는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세 22, 7)

마음이 찢어진다. 하지만 슬픔을 드러낼 순 없다. 아이가 내 뜻을 알고 도망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 8)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었다. 그런 후, 재빨리 아들을 묶어 장작 위에 올렸다. 아들이 새파랗게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럴수록 꽁꽁 묶은 줄은 아들을 더욱 옥죌 뿐이다. 아들의 눈을 차마 쳐다볼 수 없다.

한쪽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들었다. 그리고 칼을 아들의 목에 가져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다급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 22, 11)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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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5) 이사악의 우울증?

하느님-인간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나에게 순종했으니 세상 모든 민족들이 너희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천사가 말하였다.‘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창세 22, 12).

아브라함은 그제야 칼을 땅에 떨어트리고 긴 숨을 토해낸다. 아들을 죽이려는 섬뜩한 눈빛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영문도 모른채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아들 이사악도 숨을 ‘하악하악’내쉬고 있다. 목에는 아직도 서늘한 칼날의 기운이 남아있다. 아버지는 잠시 후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발견하고,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세계 어느 문학도 이렇게 인간과 신의 사랑을 극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신이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너의 목숨을 바쳐라”라고 말하고, 아브라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이 이야기는 훗날의 무수한 순교자 이야기들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아들을 요구했고,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려 했다. 일반적으로 모든 아버지들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도 버릴 수 있다.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에도 스스럼없이 물에 뛰어든다. 부성(父性)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신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죽이려한 것이다.

이 이야기가 주는 극적 효과는 훗날 수많은 철학자 및 종교인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유대교 랍비 나흐마니데스(Nahmanides, 1194~1270)는 인간 자유 의지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극찬했고,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는 아브라함의 이삭 봉헌을 둘러싼 신앙의 여러 문제에 대해 성찰한 연구서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윤리적 이상뿐 아니라 아들과도 결별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성경은 제물 당사자였던 이사악의 입장은 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사악의 심정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사악은 평생 동안 오늘날의 ‘명절 증후군’ 비슷한 이른바‘제사 증후군’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제사 때 번제물로 불태워지는 양을 볼 때 마다,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자신의 죽이려던 아버지의 서늘한 눈빛도 영원히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적의심을 가득 품은 채 성장했을 수도 있다.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윤리성에 상당한 의심을 갖게 한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가.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 윤리와 배치되는가. 최고의 윤리 그 자체인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비윤리적인 것을 명령하는가. 이에 대해 대부분 유대교 및 가톨릭 윤리 신학자들은 하느님 의지와 보편 윤리의 갈등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신앙의 절대성만 강조하는 일부 해석들을 경계하고 있다.

이사악이 제물로 선택된 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가장 귀중한 소유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선물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선물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희생(경배)의 완전한 목적, 즉 인간이 소유한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며 그렇기에 마땅히 온 곳으로 돌려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실제로 죽였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 희생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이사악의 희생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경배의 모델로 유효하게 남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희생의 보답으로 아브라함은 하느님 선택과 약속이 단순히 유대 민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보편적’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하느님은 단지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의 번성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 17-18) 하느님은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니었다. 미국인, 유럽인,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에게도 복을 내리는 하느님이다.

이러한 약속은 별로 한 일이 없는, 적어도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지 않은 이사악에게도 훗날 이어진다.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불어나게 하고,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6, 4)

이사악 제물 사건 이후, 유대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이 또 하나 생긴다. 가나안 땅을 최초로 ‘공식적으로’획득한 사건(창세 23장)이 그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자 그 매장지로 사용하기 위해 헤브론의 막펠라 동굴과 그 주변 땅을 흥정해 구입한다. 땅을 구입하는데 사용된 돈은 은 400세켈(약 4.5kg)이었다. 이 돈을 지불하는 과정 역시 지역 사회 유지들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당시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무게를 추로 달아 공식적으로 이뤄진다.

이 내용은 유대인 입장에서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당시까지 아브라함은 자신의 땅이 없는 나그네요 떠돌이였다(창세 23, 4). 하지만 신중하고도, 힘들게 성사된 이 거래로 드디어 땅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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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6) 새로운 민족의 탄생

“이스라엘이 이제 너의 이름이다” / 야곱에 새 이름 주고 새 민족 탄생 예고 / ‘이스라엘’은 하느님 약속 성취의 장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Joseph Hitchcock, 1899~1980) 감독의 1940년 영화 ‘레베카’(Rebecca)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독특한 소재로 당시 평단의 주목을 끌었다. 영화는 세상을 떠난 레베카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

3800~4000년 전 이사악의 아내 이름도 레베카다. 레베카는 이미 죽고 없지만 마치 영화 속 레베카처럼, 오늘날까지도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만약 그녀가 둘째 아들 야곱이 아닌, 첫째 에사우를 더 사랑했더라면 지금의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 명백한 이사악은 아내 레베카를 통해 특별한 위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악과 레베카, 야곱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25장에 자세히 나온다. 40세의 늦은 나이에 레베카와 혼인한 이사악은 20년이 지나 노인이 될 때까지 아이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날 아이를 얻게 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한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레베카가 임신을 했다. 그것도 그동안 마음고생을 덜어주기라도 하듯, 아들 둘(쌍둥이)이 한꺼번에 들어섰다. 세상에 먼저 나온 이가 에사우이고, 둘째가 야곱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영어 이름에서 제이콥(Jacob) 잭(Jack) 혹은 재키(Jake)로 아직도 살아있다. 요한이 존(John), 베드로가 피터(Petre), 바오로가 폴(Paul), 마리아가 메리(Mary), 안나가 앤(Anne)인 것과 마찬가지다. 남자 이름과 관련한 미국인들의 ‘야곱’ 선호도는 요한과 베드로, 바오로보다 크게 앞선다. 미국의 한 단체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에서 남자아이 이름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 이름이 야곱(Jacob)이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남의 발 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다. 야곱이 태어날 때 형 에사우의 발 뒤꿈치를 잡고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90년 케빈 코스트너(Kevin Michael Costner, 1955~)가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은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도 ‘주먹 쥐고 일어서’ 등과 같은 재미있는 이름들이 나오는데,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 사람의 특징을 이름으로 불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늦게 본 아들과 딸의 이름을 ‘막둥이’‘말순이’라고 지었었다.

어쨌든 비슷한 DNA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쌍둥이 형제면 성격도 비슷할 법한데, 에사우와 야곱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라서, 에사우는 솜씨 좋은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다.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우를 사랑하였고, 레베카는 야곱을 사랑하였다”(창세 25,27-28).

에사우는 활달한 성격으로 모험심과 도전정신이 강했고, 야곱은 지적이고 사려가 깊으며 차분한 성격이었다. 당연히 체격도 형 에사우가 더 좋았을 것이다. 따라서 야곱은 늘 에사우의 그늘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레베카가 야곱을 더 사랑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성격이 전혀 다른 쌍둥이 형제. 성경을 전혀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큰 일이 벌어진다.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 에사우에게 주어질 맏아들의 권리와 축복을 빼앗는다. 당연히 형은 화를 냈고, 놀란 야곱은 일단 가나안을 떠나 하란을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몸을 피한다(창세 27,1-44).

오랜 세월 타향살이를 통해 큰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된 야곱은 어느 날 형에게 돌아가 예전의 잘못을 빌고 깨진 우애를 되살리기로 마음 먹는다. 그래서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서 역사적인 사건이 생긴다. 야곱이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땅에 대한 약속, 하느님에 대한 순명, 믿음의 중요성 등 인간이 신을 섬기는 원리들을 확정했다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그 약속이 이뤄질 장(場)을 마련했다. 인류사에 큰 주춧돌을 놓는 이스라엘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창세 32,29) “이스라엘이 이제 너의 이름이다”(창세 35,10).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새로운 민족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유대인,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모두 똑같은 말일까. 다르다면 왜 그럴까. 각자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하느님은 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을까.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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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7) 하비루, 히브리, 이스라엘

“나그네살이 하던 민족의 투쟁 역사”

하느님 백성 지칭하는 ‘히브리’ / ‘하느님과 겨룬 사람’이란 뜻의 ‘이스라엘’은 투쟁적 의미 담겨

고대 중국인들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들의 조상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직역하면 ‘동쪽 오랑캐’라는 뜻이다. 인터넷 위키백과사전에 따르면 동이는 중국역사에서 중국 사학자들이 중국 북동쪽과 한국, 일본 또는 그곳에 사는 종족을 이른다고 여겨지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동이뿐 아니라 서쪽에 사는 오랑캐를 서융(西戎), 남쪽 오랑캐를 남만(南蠻), 북쪽 오랑캐를 북적(北狄)이라고 불렀다.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주변에 살고 있는 민족들을 모두 오랑캐로 인식한 것이다. 남말 할 수 없다. 우리도 중국과 일본인들을 낮잡아 ‘되놈’과 ‘왜놈’으로 불렀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 시대에도 당시 문명지역(이집트, 메소포타미아)에서 주변 지역 사람들을 경멸적 의미로 지칭하던, ‘오랑캐’와 유사한 명칭이 있었다. ‘하비루’(Habiru)가 그것이다.

1887년 이집트에서 발굴된 아마르나 문서(기원전 14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에 따르면 ‘아삐루’(Apiru) 또는 ‘하삐루’(Hapiru)라고도 불렸던 하비루들은, 기원전 2000년경 안정된 사회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떠돌던 하층민 및 평화의 교란자들이었다. 주로 팔레스티나 지역에 살던 무법자, 범법자, 용병, 노예, 반란자 등이 이 부류에 속했다.

이 하비루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히브리어’‘히브리민족’‘히브리인’의 ‘히브리’(Hebrews)를 떠올릴 수 있다. 어쩌면 이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 하비루와 히브리에서 모음을 빼면 ‘ㅎ’‘ㅂ’‘ㄹ’, 같은 자음만 남는다.

그래서 과거에는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의 어원을 하비루에서 찾기도 했다. 하지만 고대 근동 여러 지역에서 더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하비루인들은 히브리인 처럼 고정된 혈통과 언어, 문화를 갖춘 민족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비루는 특정 사회 계층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던 용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집트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하비루라는 이름을 히브리인을 지칭할 때 간혹 사용하기도 했다. 히브리인이 곧 하비루인은 아니었지만, 하비루인으로 불리는 사람 중에 히브리인들도 섞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히브리인들은 당시 강대국(이집트, 바빌로니아 등)들의 용병으로 고용돼 전쟁에 가담하기도 했고,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으며, 특히 이집트에서는 다른 하비루들과 함께 피라미드를 쌓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히브리’(Hebrews)는 어떤 표현일까. 히브리는 하느님 백성을 지칭하는 말로, 탈출기 5장 1-3절에서는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을 동일시한다. 아브라함에게도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창세 14,13). 적장을 목 베기 위해 적진으로 들어간 유딧도 스스로를 ‘히브리 여자’라고 말한다(유딧 10,12). 이후 기원전 2세기 경에 히브리는 구약성경의 언어와, 이 언어로 기록된 작품들을 의미하게 된다. 그 영향으로 우리는 오늘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히브리어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19세기에는 히브리라는 용어가 세속주의를 극복하는 쇄신운동의 용어로 정착되는데, ‘히브리 유니온 대학’(Hebrew Union College), ‘미국 히브리 총회연합’(the Union of American Hebrew Congregations)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원래 히브리라는 명칭은 광범위하게,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말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으로 자청해 부른 일이 거의 없었다. 주로 이방인이 이스라엘인들에게 관해 말할 때(창세 39,14;탈출 2,6;1사무4,6)나, 혹은 이방인에게 신원을 밝히려고 했을 때(창세 40,15;탈출 3,18;유딧10,12) 간헐적으로 쓰이고 있다.

사실 유대인들은 히브리라는 용어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더 익숙하게 사용한다. 놀라운 점은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담고 있는 의미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종종 거론된다는 점이다.

야곱이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고 얻은(창세 32,29 참조) 이스라엘이라는 이 이름은 ‘하느님과 겨룬 사람’‘하느님께서 싸우신다’‘하느님께서 싸워주시기를’‘신들과 싸우는 사람’‘하느님을 위해 싸우는 사람’‘하느님의 정직한 종’‘하느님의 지배로 움직이는 사람’등 다양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해석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함의가 있다. ‘싸우다’가 그것이다.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 자체가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지금도 싸우고 있다.

척박한 자연환경과 강대국들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했던 유대인들로서는 ‘싸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세계사 안에서 볼 때 그 싸움의 틈바구니 속에서 사라져간 민족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주인공, 야곱이 처한 환경도 그러했다. 야곱에게 있어서 가나안땅은 나그네살이를 해야 하는 이방인의 땅이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나그네살이하던 땅’, 곧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았다”(창세 37,1).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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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8) "인류 역사와 함께해온 12의 법칙

12진법·12음계·십이지
수수께끼 같은 12 법칙
인류 구원사 속에서도
12지파·열 두 제자 뽑아

만약 아들 귀한 집 가장이 성경을 읽는다면, 맘 상할 부분이 있다. 바로 야곱이 아들을 ‘줄줄이’낳는 장면이다.

“이번에도 아들이에요”(창세 35,17).

아들, 아들, 아들, 또 아들이다. 야곱은 그렇게 아들을 무려 열둘이나 낳는다.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이 르우벤, 시메온(레위), 레위, 유다, 이사카르, 즈불룬이고,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 요셉과 벤야민,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낳은 아들이 단과 납탈리, 레아의 몸종 질파에게서 낳은 아들이 가드와 아세르이다(창세 35,22-26 참조).

이들은 각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된다. 한 민족을 열두 지파로 나누는 것은 기원전 2000~1600년경 당시 지중해 동부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12’였을까.

오늘날 유전학자들은 인류 생존의 수수께끼 속에는 ‘12의 법칙’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인간 스스로도 모르게 그 몸속에 ‘12’라는 숫자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12의 법칙 균형이 깨지면 인류는 멸망한다. 유전학자들은 확률적으로 오늘날 왼손잡이는 전제 인구의 12분의 1(8.3%)이라고 말한다. 또 12명 중 한명은 색맹이고, 또한 대머리이다. 과거에 인간은 12명을 기본 단위로 사냥을 했으며, 그 중 대머리와 왼손잡이, 색맹이 포함된 그룹이 가장 사냥을 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른손잡이 열한 명이 동물을 오른쪽으로 몰 때 한명은 왼쪽으로 몰아야 했으며, 관찰을 위해 동물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대머리였으며, 동물들의 보호색 위장을 판별해내는 색맹도 반드시 열두 명중 한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실제로 대머리와 색맹, 왼손잡이 비율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에도 0.83%(1/12)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유독 12라는 숫자에 집착한다. 인류 최초의 문명, 수메르인들이 사용한 것은 12진법(duodecimal, 十二進法)이었다. 우리는 이 12진법을 오늘날 시계를 통해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을 오전과 오후 12시로 나눈다. 1년 또한 열두 달이다. 올림푸스의 주축이 되는 신도 열둘이었다. 아서왕의 전설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도 열두 명이다.

동양에서도 12는 무시하지 못할 수였다. 십이지(十二支)는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말한다. 오늘날에도 음악에서 한 옥타브는 12개의 반음 간격이며, 컴퓨터 키보드에도 F1에서 F12까지 12개의 기능키가 있다. 물론 연필 한 다스도 12자루다.

구원사 속에서도 12는 위력을 발휘하는데, 예수는 제자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도 열두 성문, 열두 초석으로 이뤄져 있다(묵시 21,12-14 참조).

아무튼 이스라엘(민족)은 이스라엘(야곱) 이후 그의 열두 아들을 머리로 하는 12부족동맹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민족은 훗날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단결이 그리 쉽게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판관 5장 참조). 게다가 이들 부족들끼리의 영토에 대한 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훗날 가나안 정복 후, 소위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은 납탈리, 이사카르, 아세르 등에게만 돌아갔을 뿐이었다.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이러한 반목을 아예 피하려 했던 기록도 있다. 열두 지파의 막내격인 가드와 르우벤 지파는 아예 약속의 땅을 거부하겠다고 모세에게 말했고(민수 32,1-20 참조), 시메온 지파도 이집트와 인접한 오늘날 가자 지구 남쪽 땅을 분배 받았다. 12지파 이야기는 뒤에 다시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고, 그 조상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열두 아들, 즉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성경은 특히 요셉에 주목하고 있다. 성경이 주목한다는 것은 그에 의해 하느님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의미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스라엘)에 이은 4대손 요셉은 배다른 형제들의 질투로 인해 이집트로 가는 상인에게 종으로 팔리게 된다. 이후 요셉은 감옥에 갇히는 등 고난을 겪지만 타고난 지혜와 재능을 바탕으로 파라오의 눈에 들어 이례적으로 출세했고(이집트의 재상이 됐고), 아버지 야곱을 비롯한 형제들을 모두 이집트로 불러온다.

마치 먹고 살기 힘들어 미국으로 입양 보낸 아들이 미국 부통령이 되어 한국의 가족들을 초대하는 격이다. 아무튼 야곱 가족들은 조금은 얼굴이 두꺼운 편이었던 것 같다. 요셉에게 의지해 이집트로 건너간 가족(열두 지파의 조상 포함)이 하나 둘도 아니고 무려 70명에 이른다(창세 46,8-27 참조).

이때가 기원전 1600년경이었다. 이들은 이후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그 자손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집트인들은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탈출 1,14).

그래서 람세스 2세 통치기간(기원전 1304~1237)에,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다시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애초에 요셉에 의해 이집트에 간 사람의 수는 70명이었다. 그런데 400여년 후, 이집트를 탈출하는 사람은 20세 이상 남자만 60만 3550명(탈출 38,26)이다. 아무리 자손을 많이 낳는다고 해도 불가능한 수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집트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3-01 [제26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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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9)창세기의 끄트머리에 서서이집트 힉소스 왕조·이스라엘은 같은 혈통

기원전 1550년 이집트 18왕조 연 아모세 왕
제국주의 태도로 돌변 이스라엘 민족 학대

이집트 역사를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 나가다 보면, 성경과 관련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래서 아버지 야곱을 비롯한 가족들을 이집트로 이주시켰던 시기는 기원전 1600년 경이다. 하지만 당시 그곳에는 이집트가 없었다.

역사는 당시 이집트에 있었던 지배 세력을 ‘힉소스 왕조’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집트인들이 아니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역(현재의 이란, 이라크가 위치한 지역)에 거주했던 이들은 당시로서는 최신식 무기인 2~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로 무장하고 이집트를 침공, 기원전 1680년께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를 식민통치 했다.

힉소스 왕조는 이집트에 있었던 왕조였지만, 실질적으로 이집트 직계 왕이 다스린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힉소스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유대인들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은 앞에서 밝혔다. 힉소스 왕조와 이스라엘 민족은 혈통으로 볼 때 사촌뻘인 셈이다.

이제야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이 파라오의 궁궐에 전해지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좋아하였다”(창세 45,16)는 구절이 이해된다. 같은 계통의 민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 요셉이 친족들을 불러들여 쉽게 정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탈출기 첫머리에 나오는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탈출 1,8)는 말도 힉소스 왕조를 염두에 둘 때만 이해할 수 있다.

새 임금이 힉소스 왕조를 잇는 왕이었다면, 선왕들이 존경했던 위대한 지도자 요셉을 모를리 없었다. 여기서 ‘새 임금’이란 바로 새로운 왕조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힉소스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이집트 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그래야 엄청난 수의 인원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유가 명확해 진다.

여기서 이집트 역사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 보자. 고대 이집트 파라오 왕조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30개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는데(그래서 이집트 역사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복잡하다), 간단히 고왕조 시기(1~10왕조, BC 3100-2040 약 1000년간), 중왕조 시기(11~17왕조, BC 2040-1567 약 500년간), 신왕조 시기(18~30왕조, BC 1567-332 약 1200년간)로 구분한다.

힉소스의 침략으로 이집트 왕조가 남쪽으로 밀려나 힘을 쓰지 못하던 시기가 대략 중왕조 시기 후반이었다.

이때 이집트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마 마음속에 칼을 갈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아시아에서 온 침략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주해온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톡톡히 앙갚음을 해 주고 말겠다.”

그들의 꿈은 현실로 이뤄진다. 기원전 1550년 경. 이집트 제18왕조(신왕조 시대의 첫 왕조) 시대를 연 아모세 왕은 마침내 힉소스 왕조를 무너트린다.

아시아인들의 침략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일까. 이전까지 평화주의를 고수하며 주변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던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갑자기 제국주의적 태도로 돌변한다. 도읍을 새로이 건설하고, 주변국들을 침략하기 시작했으며, 노예를 학대하고,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킨다. 이 상황은 탈출기 첫머리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탈출 1,11)

이스라엘인들은 탈출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민족 자체가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시기는 정확히 언제일까. 많은 학자들은 대체로 그 연대를 그리스도 탄생 1200년전, 람세스 2세 통치기간(BC 1304~1237)인 기원전 122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참으로 아득히 먼,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직 로마 민족이 지구상에 나타나지도 않았던 시기의 일이다.

아무튼 ‘아브라함→이사악→야곱→요셉 및 12형제’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시대’(Patriarchal Age)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그와 함께 구약성경 창세기도 끝난다.

이제부터 구약성경의 탈출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엄청난 한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어쩌면 창조 사건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다. 설화는 더더욱 아니다. 유대인들은 3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에서 한 유대인 아기가 태어난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발행일 : 2009-03-15 [제26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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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0)인간(人間) 모세관념 타파한 획기적 영도자 ‘모세’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 불의를 미워하고 하느님의 법 세우고자 노력

파라오가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너희는 히브리 여자들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밑을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탈출 1,16)

이른바 산아제한 조치다. 이집트인들은 잡초처럼 생명력 질긴 유대인들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누구인가. 히브리 산파들은 파라오의 명령을 귓등으로 흘린다.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과는 달리 기운이 좋아, 산파가 가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탈출 1,19)

“지긋지긋한 히브리 여자들….” 결국 파라오는 최후 통첩을 내린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 1,22)

얼마 후 아므람의 아내 요케벳은 예쁜 남자아기를 낳는다. “이 아기는 죽일 수 없어!” 요케벳은 3개월 동안 아기를 숨겨 키운다. 하지만 우렁찬 아기 울음은 그마저도 힘들게 했다. 집에서 키우다가는 아기가 언제 끌려가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왕골상자에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나일강가 갈대숲에 놓는다(탈출 2,3). 여기서 ‘역청’(瀝靑)은 타르를 가열 증류할 때 남겨지는 검은색의 끈적끈적한 물질로 아스팔트와 유사한, 당시로서는 아주 귀한 것이었다. 바벨탑 및 노아의 방주를 만들 때도 사용된 것으로 보아(창세 11,3 6,14 참조) 역청은 당시 중요한 방수용 물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청과 송진을 함께 왕골상자에 발랐다는 것은 그만큼 아기에 대한 부모의 애정이 남달랐음을 의미한다. 그 정성이 하늘을 움직였을까.

강변을 거닐던 이집트 공주가 아기가 들어있는 상자를 발견한다. 공주는 예쁜 아기 모습에 한눈에 반했다. 결국 아기는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공주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이 아기가 바로 ‘모세’다. 드라마 같은 모세의 삶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모세는 어느날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욱’하는 성질 때문에 살해했고, 결국 도망자가 된다. 히브리인으로서 모세가 느꼈을 정체성의 혼란이 묵상되는 대목이다.

결국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피신하는데, 그 곳에서 사제 이트로의 딸 치로라와 결혼, 게르솜이라는 아들을 낳는다. 그렇게 한동안 평온하게 지내던 모세에게 어느 날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도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호렙산(오늘날의 시나이산)에서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 때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불꽃이 솟아오른다.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인류 역사안에서 이처럼 감동적인 장면도 없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10) 하지만 여기서 모세는 참으로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 4,10)

백성을 이끌어야 할 정치가 혹은 지도자가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치명적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모세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광개토대왕과 같은 정복자도, 세종대왕과 같은 지혜로운 영도자도 아니었다. 성경을 읽다보면 모세는 우물쭈물하고 결단력이 없는 인물로 자주 묘사된다.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고집이 세고, 쉽게 흥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약점을 이겨내려고 고군분투한다. 탈출기 18장에는 동틀 무렵부터 해가 지기까지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판결을 내리는 모세의 열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역사는 반드시 작은 여러 사건들이 쌓여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때때로 위대한 인물의 카리스마 및 재능에 의해 거대한 도약을 이뤄낸다. 인류는 위대한 몇몇 철학자, 탐험가, 발명가, 시인 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생활의 편리함도, 높은 지적 수준의 향유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류의 비약적 도약을 가능케한 인물 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바로 모세다. 모세는 단순한 한 민족의 영도자가 아니었다. 인류는 그에 의해서 “아하~.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배웠다.

모세는 이 땅위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다. 불의를 미워하고, 하느님의 법을 세우고자 했다. 우상 숭배 등 오랜 세월동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관념을 극복,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영적 진보를 이뤄냈다. 당시까지 인류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한 것이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이제 가거라”(탈출 4,12). 이에 소명받은 ‘인간’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이집트로 돌아가는 그는 손에는 지팡이 하나가 들려있었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4-05 [제26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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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1) 탈출 그리고 파스카파라오 강압에 정면으로 맞선 모세

억압에서 벗어난 유대인의 해방절 파스카 /하느님이 제시한 새로운 영적 세계로 탈출 / 탈출 후 갖가지 불평에도 함께하신 하느님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불꽃 튀는 설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달라이 라마의 “제발 부탁합니다” 요청에 중국은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모세는 파라오 람세스 2세에게 유대인들이 광야로 가서 제사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한다(탈출 5,2). 모세는 이어지는 담판(탈출 7,10-13)에서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부터 모세는 모든 방법을 동원, 파라오와 정면으로 맞선다. 열 가지 재앙 이야기가 그것.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소동이 일어나고, 모기와 등에가 들끓고, 가축병과 피부병이 만연하고, 우박이 쏟아지고, 한바탕 메뚜기 소동이 일어나고, 세상이 어둠으로 변한다(탈출 7,14-10,29).

하지만 파라오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에게서 썩 물러가라.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 너는 죽을 것이다.”(탈출 10,28) 하지만 모세가 누구인가. 만만하게 물러설 인물이 아니다. 최후통첩으로 맞선다. “말씀하신 대로, 저도 임금님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않겠습니다.”(탈출 10,29)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이집트 모든 맏아들의 죽음이었다. “이집트에 큰 곡성이 터졌다. 초상나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탈출 12,30) 이집트 맏아들이 죽어나가던 그날 밤, 유대인 맏아들은 모두 무사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 지시대로 어린양의 피를 대문에 칠했고, 이 집들은 천사가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파라오는 결국 유대인들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린다(탈출 12,31 참조).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대민족 최대 축제가 탄생한다. 과월절 축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어로 파스카(Pascha)로 발음되는 과월절 축제는 당초 고대 근동지방의 봄 축제였다. 모세는 이 기간을 이집트 탈출 기회로 삼았고, 결국 성공한 것이다. 당연히 파스카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억압에서 벗어나는 해방절이 된 셈이다. 이 해방은 단순히 육체적 노예상태에서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숨막힐 것 같은 영적 감옥으로 부터의 탈출이었다. 더 나아가 유대인들의 탈출은 유일신 하느님이 제시하는 새로운 영적 세계로의 탈출이었다. 이는 훗날 유대인 역사 속에서 한층 명확하게 드러난다.

탈출의 긴박함 속에서 유대인들은 먹을 때도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야 했다(탈출 12,11 참조). 이를 볼 때 당시 유대인들은 상당히 서두른 듯하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 없는 과자를 구웠다. 반죽이 부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쫓겨 나오느라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 여행 양식도 장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탈출 12,39)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그 이듬해, 시나이 광야에서 첫 번째 파스카 축제를 지낸(민수 9,1-14) 이후 지금까지 파스카 축제 때 허리에 띠를 매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쥐고, ‘누룩 없는 빵’을 먹는다.

도시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파라오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상황. 유대인들은 부지런히 걸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하는 장정만도 60여 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탈출 12,37)인 만큼 이동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파라오의 추격이 시작됐다. 정예부대가 이끄는 병거만 600여 대에 이를 정도로 대부대였다(탈출 14,7).

하지만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대로 지팡이를 내려치자 갈대 바다가 갈라졌고, 유대인들은 무사히 바다를 건너 이집트 병사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탈출 14,15-31). 완전한 자유의 세계로 들어간 유대인들은 기쁨에 휩싸인다. 드디어 완벽한 해방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발 구르며 환호한다(탈출 15,1-21).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유대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막막한 현실 앞에서 말을 잃게 된다. 물과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때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되지만) 유대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울면서 매달리는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심지어는 분노를 터뜨리고 저주하고 위협까지 한다.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이집트를 나오지 않았을 거야. 돌아가잔 말이야, 돌아가!”(탈출 15,24 16,2-3 17,2 참조)

하지만 하느님은 늘 유대인들과 함께 하신다. 유대인들의 불평이 터져 나올 때 마다 물을 주고 먹을 것을 주신다(탈출 15,22-17,7 참조).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지금 갈대바다를 빠져나온 유대인들은 광야 위에 홀로 서 있다. 머리 위에선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다. 유대인들은 우왕좌왕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다. 뭔가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법’(法)이 필요했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4-19 [제26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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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2) 율법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법중의 법’

유대인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 강조 / 민족 헌법인 십계명, 파생된 모든 법전의 모태 / 인내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민족적 힘의 원천

유대인들이 시나이산 밑에 모여 있다. 우왕좌왕하고 있다. 규율도 없고, 질서도 없다. 이때 유대인들의 희망,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법(法)중의 법’을 받는다. 십계명(十誡命)이 그것이다.

십계명의 원형은 탈출기 20장 2-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나타난다. 가톨릭교회는 이를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라틴 교부들의 전통에 따라 ①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탈출 20,2-6) ②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20,7) ③주일을 거룩히 지내라(20,8-11) ④부모에게 효도하여라(20,12) ⑤사람을 죽이지 마라(20,13) ⑥간음하지 마라(20,14) ⑦도둑질을 하지 마라(20,15) ⑧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20,16) ⑨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20,17) ⑩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20,17)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랍비들의 전통에 따라 ①나는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②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20,3-6) ③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20,7) ④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20,8-11) ⑤부모에게 효도하여라(20,12) ⑥사람을 죽이지 마라(20,13) ⑦간음하지 마라(20,14) ⑧도둑질을 하지 마라(20,15) ⑨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20,16) ⑩남의 아내와 재물을 탐내지 마라(20,17)로 나누고 있다. 유대인들의 십계명은 가톨릭교회 십계명과 달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안식일 규정’을 첨부하는 반면, ‘남의 아내와 재물에 대한 욕심’은 한 계명으로 묶었음을 알 수 있다.

유대민족의 헌법인 이 십계명은 이후 파생되는 모든 세부 법전들의 모태가 된다. 유대인들에게 이 법률(율법)은 곧 하느님의 법이었다. 따라서 율법을 위반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법이 혹독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법은 ‘그 정도 죄는….’이라는 정상참작이 가능하지만 율법에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모세 시절, 다른 민족들의 법전에는 남편이 간통한 아내를 용서할 수 있었지만, 율법에서는 여자는 물론이고 여자와 간통한 남자도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신명 22,22-24레위 20,10).

그런데 경제사범의 경우는 정반대다. 당시 다른 민족들의 법은 경제 관련 사범에 대해 가혹한 처벌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관대했다. 예를 들면 ‘밤손님’은 다른 민족들의 법에선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율법은 재산권만 박탈당했다. 사람의 생명은 신성한 것이기에 경제적 문제로 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할례’다. 훗날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문제를 놓고 베드로 사도와 대립각을 세울 정도로 할례는 유대인들의 표지였고, 그 자체였다. 할례는 당시 가나안 토착민족을 비롯한 인근 다른 민족들에겐 없었던 풍습이다. 일부 이집트인들이 위생 문제로 인해 할례를 하기는 했지만 유대인들처럼 할례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할례의 방법에서도 유대인들은 돌로 만든 칼로 시행하는 전통, 곧 아브라함까지 소급되는 전통을 고수했다(탈출 4,25여호 5,2-3).

할례와 함께 유대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게 하는 뚜렷한 또 하나의 표지가 ‘안식일 규정’이다. 안식일 규정의 배경을 놓고 학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당시로선 휴식의 날을 별도로 정해 하루 종일 쉰다는 것은 획기적 발상이었다. 유대인들이 인류에게 ‘휴식의 날’이라는 개념을 선물한 것이다.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민족적 통일성을 상실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저력의 원천으로 율법을 꼽고 있다. 유대역사가 살로 배런(S. Baron)은 이렇게 말했다. “확장과 정복이라는 정치적인 힘보다는 인내라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힘이 유대인들의 신앙과 관습의 시금석이 되었다.”

당시 다른 민족들은 싸움과 정복, 강력한 무기 등을 통해 스스로의 강한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인내를 바탕으로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힘을 발휘, 생존에 성공했다. 그 힘의 원천이 바로 율법이다.

일부에서 율법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예수도 율법을 없애려 하지 않았다. 다만 율법을 완성하려했을 뿐이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예수는 또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바리사이파의 질문에 ‘율법의 통합’을 말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6-40)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4-26 [제264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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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3) 아! 모세“하느님과 마주보고 사귀던 사람”

모세에 의해 시작된 ‘신정정치’는 영원한 최고의 법이자 최상의 헌법
모세오경은 평등에 관한 최초 선포


산줄기는 으레 파도를 타듯 높은 봉우리가 낮은 봉우리를 거느리면서 뻗어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한 번도 그런 산을 만나지 못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시나이 반도 광야의 산들은 느닷없이 땅에서 불끈 솟아오른 것처럼, 낮은 봉우리들을 거느리지 않았다. 깎아지른 급경사에 억센 주름들만 수없이 아래로 뻗어 내리고 있었다. 그 억센 생김만큼 사람의 접근을 꺼리는 듯했다.

하지만 느보산(현 요르단 왕국의 마다바 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지점에 위치한 산)은 달랐다. 편안했다. 삼형제가 서로 의지하고 서 있는 형상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니바(Niba)로 높이 835m이고, 두 번째 높은 봉우리는 높이 790m 무카야트(Mukhayyat),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는 높이 710m의 시야가(Siyagha)다. 물줄기가 흐르듯, 높은 봉우리가 낮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뻗어나가는 편안한 모습이다.

지팡이에 의지한 백발의 한 노인이 느보산의 막내 봉우리인 시야가(성경에는 피스가-신명 34,1) 정상에 서서 가나안 땅을 내려 보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가 오히려 더 야속했다. 보지 않았으면 이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을 텐데….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사해(死海)와 그 서북쪽에 위치한 쿰란동굴, 오아시스 도시 예리코와 요르단강, 요르단강과 예루살렘 사이의 유대사막, 그리고 예루살렘의 동부 구릉에 있는 올리브산 정상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곰곰이 되짚어 본다. “너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을 멀리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는 못한다”(신명 32,52).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과 자신의 죄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민수 20,2-13 27,12-14 신명 1,37 4,2 32,48-52 참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이제 유대 후손들의 몫이 될 것이다.

모세는 하르르 긴 한숨을 내쉰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는 하느님과 함께한 지난 세월을 천천히 정리할 시간이다.

“37년…. 많은 일들이 있었지….” 모세 자신과 유대인들은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창조했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새로 세웠다. 그것은 반항과 저항의 결과였다. 나라 없는 노예민족이었던 유대민족이 지배민족이었던 이집트에 항거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회유와 협박 저지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도주했다. 세상의 질서(힘과 강자의 질서)를 초월하는 유일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윤리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 유대 민족은 그 어떤 문명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법률을 수여받았다. 그 중심에 모세가 있었다.

모세는 훗날 자신으로부터 기원을 두는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유대민족의 신앙, 사회, 정치 제도의 모든 틀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상상했을까. 유대민족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중요한 사실은 모세에 의해 유대민족이 자신들만의 새로운 정치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기원 후 66년경, 로마에 대항해 반란군을 지휘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100?)는 모세 당시 유대 정치체제를 ‘신정정치’(Theocracy)라고 불렀다. “모든 통치권을 하느님의 손 안에 맡겨드리는 정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느님은 모세를 매개체로 법률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법률이 이행되도록 끊임없이 모세에게 개입하셨다. 하지만 여기서 신정정치는 단순히 강압의 정치가 아니었다. 법 앞에서는 모든 이들이 평등했다. 초세기 디아스포라 유대인 학자 필로(Pilo)는 이를 가리켜 ‘민주주의’(Democracy)라고 불렀다. 그리고 “영원한 최고의 법이자 최상의 헌법”이라고 했다. 많은 유대학자들은 모세의 법이 인류 최초의 권리장전이라고 말한다. 모세오경, 즉 율법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모세오경은 평등에 관한 최초의 선포였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며, 동시에 법률 앞에서도 평등했다. 훗날에는 혹시 나타날 수 있는 사회 속 불평등을 위해 정의라는 안전장치도 만들어진다.

모세는 지팡이를 돌려 서서히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곧 쓰러져,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성경은 모세의 죽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주님께서 얼굴 마주보고 사귀시던 사람’, 모세를 잃은 유대민족은 큰 슬픔에 휩싸인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신명 34,8). 그 곡성이 요르단 강 건너 가나안 땅에까지 울려 퍼졌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5-03 [제264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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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4) 폭풍전야"주사위는 던져졌다"

최초 군사령관 여호수아의 가나안 진격
요르단강 건넌 뒤 할례·파스카 축제 지내
“힘·용기를 내어라 하느님이 함께 있겠다”


기원전 49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라틴어 : alea iacta est).

기원전 1200년 경, 유대인들은 주사위를 던진다. 유대민족 최초의 군사령관인 여호수아가 군사를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진격한 것이다.

이번 전쟁에 유대민족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 칼자루를 움켜 쥔 여호수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 아버지 이름은 ‘눈’, 지파는 에프라임이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상당히 총애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호수아는 시나이산에서 모세의 경호를 담당하던 호위대장이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도 모세가 지었다(민수 13,16 참조). 모세는 광야에서 아말렉족과의 전쟁으로 유대인들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여호수아에게 군대를 주고 싸움에 임하도록 한다. 이 전쟁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탈출 17,8-13 참조). 결국 모세는 죽기 전 유대민족의 새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다(신명 34,9 민수 27,15-23 참조).

드디어 요르단강 도하작전이 시작됐다. 문제는 거센 물살이었다. 백성들이 거센 물살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가나안 민족이 공격해오면 문제가 심각했다. 신속하게 강을 건너는 것이 중요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계약궤를 멘 사제들이 강가에 이르러 발을 담그자 갑자기 물이 멈춰선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갈대바다를 무사히 건넜듯, 그렇게 요르단강도 안전하게 건넜다(여호 3,14-17 4,1-11 참조).

여호수아는 강을 건넌 뒤, 백성들에게 첫 파스카 축제를 지내도록 했다. 또 모든 백성이 하느님과의 계약의 표시로 할례를 하도록 했다(여호 5,2-12 참조). 이는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수많은 전투가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르단 강을 건너자 예리코성이 나타났다. 예리코 공격은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닮았다. 오랜 유목 생활을 해온 유대인들로선 농경 정착생활을 해온, 그래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가나안 남부 토착민들과 정면대결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가나안 남부를 우회,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의 허리를 동쪽에서부터 자르고 들어가는 작전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예리코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캐슬린 캐니언 박사가 1952~58년 발굴한 결과에 따르면 예리코의 역사는 기원전 7000년까지 올라간다. 예리코는 초기 청동기시대부터 완벽한 성읍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좋은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여호수아는 마치 삼국지의 유비가 조자룡을 얻듯 뛰어난 장수를 얻었으며(여호 5,13-15), 예리코 내부로부터의 협조자도 얻었다(여호 2,1-24 참조).

유대인들의 침략 소식을 접한 예리코 사람들은 철저한 수성(守成) 작전으로 대응했다. 성문을 열고 벌판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공성전을 택한 것이다. 면밀한 대응이 필요했다. 어설픈 공격은 피해만 부를 뿐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 이미 예리코에 두 명의 척후병을 파견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사실마저 예리코의 정보망에 발각됐다. “예리코 임금에게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이 이 땅을 정찰하려고 오늘 밤에 이곳으로 왔습니다’라는 보고가 들어왔다”(여호 2,2).

예리코 임금은 비상령을 내리고 스파이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특수 검거조가 편성됐다. 궁지에 몰린 두 척후병은 성벽과 붙어있는 집에 사는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에 숨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라합은 척후병들을 숨겨주는 것은 물론, 탈출까지 돕는다. 그리고 “내가 당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당신들도 호의를 베풀겠다고 맹세해 주십시오”(여호 2,12)라고 말했다. 이에 두 척후병은 집 창문에 진홍색 줄을 매달아 놓으면 예리코 성이 함락되더라도 라합의 집은 무사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무사히 여호수아 진영으로 돌아왔다.

여호수아는 조금 전 예리코 성 내부의 정황을 자세히 살피고 돌아온 두 척후병의 보고를 받았다. 여호수아는 크게 숨을 들이킨다. 민족의 미래가 걸려있는 중요한 결전의 날이 밝아오고 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예리코를 공격할 것이다.

“달빛은 어둠을 제대로 사르지 못했고, 어둠은 달빛을 마음대로 물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달빛과 어둠은 서로를 반반씩 섞어 묽은 안개가 자욱이 퍼진 것 같은 미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예리코는) 켜켜이 싸인 묽은 어둠의 장막에 가려 자취가 없었다”(조정래 「태백산맥」 1부 1권 11쪽).

그 어둠 속에서 여호수아가 하느님의 계시를 기억해낸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명령한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여호 1,9).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5-10 [제26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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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5) 진격, 진격, 또 진격“총공격이 시작됐다”

유대인 보병·기병·투석대, 7일만에 예리코 함락
참상 목격한 기브온 사람들 스스로 찾아와 항복
기브온 탈환 나선 가나안 다섯 왕들도 죽임 당해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총공격이 시작됐다. 군인들의 키보다 두 배나 더 긴 그림자가 먼저 예리코로 달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그렇게 등으로 태양을 받으며 예리코로 돌진했다. 유대 민족의 모든 역량을 하나로 모아 쏟아 붇는 엄청난 기세였다.

여기서 당시 유대인들의 전투 방식 및 전투 대형에 대해 살펴보자. 고대 유대인들의 전투에 대해선 근세기까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의 구약성경 사본 및 주석, 유대교 관련 문서(사해문서)가 1947년부터 사해 서쪽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그 비밀이 풀렸다.

사해문서에 따르면 고대 유대인들의 전투 대형은 대체로 보병, 기병, 투석대로 구성됐다. 보병은 거울처럼 광택을 낸 청동 방패로 무장했다. 방패의 높이는 약 2.5암마, 너비는 1.5암마였다. 1암마는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까지 거리로, 대략 45~50cm로 보면 된다. 방패는 금과 은, 구리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등 천사들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보병이 들고 있던 창의 길이는 7암마(약 3m)였고, 칼은 1.5암마(약 1~1.5m)였다. 반면 기병대의 창은 이보다 1암마가 더 긴 8암마(약 3.5m)였다.

완전히 정비된 유대군의 경우 전체 기병수가 6000명, 보병이 약 2만8000명이었다. 기병대대는 700명 단위로 구성됐으며, 리베로 200 기병이 별도로 조직돼 전장을 누볐다.

당시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나이는 40~50세였으며, 밥을 짓고 말에게 먹이를 먹이는 등 허드렛일을 하는 보조 전투인력은 50~60세 연령층이 맡았다. 다만 순발력과 뛰어난 승마술이 필요했던 기병의 경우, 보병과 달리 30~45세로 규정됐다. 20대 청년들이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것이 이채롭다. 이들은 다만 군수품을 조달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소년이나 여성도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다.

전투 방식 또한 독특했다. 사해 문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뿔 나팔을 불었다. 나팔은 군대 소집, 적에 대한 경고, 공격, 추적, 재소집 등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도록 했다. 경고 및 공격 나팔 소리는 높고 끊어지는 소리였고, 후퇴 나팔 소리는 낮은 저음의 긴 울림이었다.

나팔 소리를 통한 이러한 부대 지휘는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한 성경에서도 자세히 드러난다.

“숫양 뿔 나팔을 하나씩 든 사제 일곱 명이 주님의 궤 앞에 서서 가며 줄곧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무장을 갖춘 이들이 그들 앞에 서서 걸어가고 후위대가 주님의 궤 뒤를 따라가는데, 뿔 나팔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여호 6,13)

유대 보병들의 창과 칼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엄청난 나팔 소리가 예리코 성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예리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6일 동안이나 계속된 공격에도 예리코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매서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7일째가 되는 날 결국 함락되고 만다.

승세를 타기 시작한 유대인들의 기세는 무서웠다. 가나안의 관문 도시, 예리코를 함락시켜 내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여호수아는 곧이어 아이를 점령했고(여호 8,1-29),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기브온 마저 평화협상을 통해 손에 넣게 된다.

사실 여호수아는 전쟁광이 아니었다. 여호수아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항복을 받아 내거나 동맹 및 협상을 체결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 결과가 기브온과의 평화 협상으로 나타났다. 예리코와 아이의 참상을 목격한 기브온 사람들은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스스로 여호수아를 찾아와 항복의 뜻을 표한다.

“이제 저희는 나리의 손안에 있습니다. 나리의 눈에 좋고 옳게 보이는 대로 저희 일을 처리하십시오.”(여호 9,25)

여호수아는 손에 피한망울 묻히지 않고 기브온을 차지한 것이다. 포도생산의 중심지였던 기브온은 성경에 45회나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도시다. 지형적으로도 가나안 땅의 중심부에 위치할 뿐 아니라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차지했다는 것은 가나안 토착민들의 남북 연락망을 끊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기브온을 잃은 가나안 왕들의 충격은 컸다. 예리코와 아이, 기브온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이제 모든 가나안 땅이 바람 앞 등불 신세가 된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가나안 토착세력들이 연합 작전을 통해 기브온 탈환에 나섰다.

“우리 함께 기브온을 칩시다”(여호 10,4).

다섯 왕이 힘을 모았다. 예루살렘의 아도니 체덱, 헤브론의 호암, 야르믓의 피르암, 라키스의 야피아, 에글론의 드비르 왕이 바로 그들이다. 유대인들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지금까지의 전투가 도시국가들과의 개별 전투였다면 이제는 연합 세력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정면대결은 위험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역시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빠른 기동성을 앞세운, 치고 빠지는 게릴라 작전을 펼친 것이다. 연합 군대는 여호수아의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다섯 왕도 잡혀서 죽임을 당한다(여호 10,1-27).

여호수아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가나안 중부 중심 지역을 평정한 여호수아는 말머리를 남부 쪽으로 돌린다. 본격적인 가나안 정벌이 시작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5-17 [제26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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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6) 전쟁 그 후…

가나안에 휘몰아친 전쟁의 소용돌이
가나안 토착민보다 건축·농경 등에 열등했던 유대인
침략·약탈로 성장… 생존자 남기지 않는 잔혹함 보여


잔잔하던 찻잔이 심하게 요동치는 모습이다. 가나안 중부 지방을 점령한 유대인들은 이제 가나안의 남부와 북부를 종횡무진 오가며 휘젓기 시작한다. 가나안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하초르의 왕, 야빈과의 전투다. 야빈은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평화 파괴자이자 침략자였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주변국들과 정치적 연합을 결성, 유대인들에게 공동 대응한다. 연합세력의 초반 기세는 대단했다.

“병사들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고 군마와 병거도 아주 많았다”(여호 11,4). 하지만 이미 상승세를 타고 있는 유대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초르를 점령하고 그 임금을 칼로 쳐 죽였다 … 또한 그 성읍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칼로 쳐 죽여 완전 봉헌물로 바쳤다. 이렇게 그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하초르는 불에 태워버렸다”(여호 11,10-11).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고 전후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추적해 보면, 전쟁을 치른 민족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가나안 침략 전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잔혹성이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북부의 하초르를 유린하는 것에 앞서, 남부에서도 비슷한 잔혹성을 보인 바 있다.

“여호수아는 온 땅, 곧 산악 지방, 네겝, 평원 지대, 비탈 지대, 그리고 그곳의 임금들을 모조리 쳐서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여호 10,40).

이는 훗날 로마가 정복 전쟁을 하면서 타민족에 대한 포용정책을 취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os)는 자신의 저서 「영웅전」에서 이렇게 썼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하지만 유대인은 달랐다. 대항하는 세력을 방화하고 파괴하고 약탈했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부족 전체를 살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유대인들이 가나안 정착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경기술 등 생활 문화가 열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성경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여호 24,13)

유대인들이 가나안 토착민보다 건축, 토기, 농경기술에 있어서 열등했다는 점은 지난 100년 동안 이뤄진 수많은 고고학적 발굴들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인류 역사적으로 볼 때 문화적으로 열등한 민족은 침략과 약탈을 통해 성장한다. 13세기의 몽골이 그랬고, 기원전 390년 북부 유럽의 켈트족(로마인들은 그들을 갈리안이라고 불렀다)이 그랬다. 켈트족은 당시 높은 수준의 정치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문명국 로마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도시 파괴 행위의 또 다른 원인은 정치체계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509년 이후의 로마가 법이 지배하는 공화정이었다면, 당시 그리스는 민의가 중요시되는 민주정이었다. 로마가 공익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다면 그리스는 개개인의 이익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화정과 민주정은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체제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유대민족이 선택한 정치체계는 공화정도, 민주정도 아니었다. 유일신 하느님에 의한 신정체제였다. 신의 명령은 인간의 잔학성을 희석시킬 수 있다. 인간의 판단에 따른 살인은 불의하지만,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전쟁은 성전(聖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문화적 열등감을 상쇄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신의 명령으로 정당화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평화롭게 살던 가나안 토착민들의 비참한 운명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유대인들의 자부심 ▲오랜 광야 생활로 체득된 유대인들의 잡초같은 근성 ▲쇠퇴하는 이집트 등 당시 국제정세 등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바탕 전쟁의 참혹함이 휩쓸고 지나간 뒤, 가나안 땅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그대로 모든 땅을 정복하였다. 그러고 나서 지파별 구분에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땅을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었다. 이로써 전쟁은 끝나고 이 땅은 평온해졌다”(여호 11,23).

하지만 수많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죽을 때까지도 가나안땅의 정복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유대인들의 가나안 땅의 최종 정복은 통일 왕국이 성립하는 기원전 1000년대 말에 가서야 볼 수 있다.

이제 여호수아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유대 민족도 세계사에 ‘잘되는 민족’중 하나로 명함을 내밀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잘되는 민족’의 첫 번째 조건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잇달아 나타난다는 점이다. 여호수아의 뒤를 잇는 지도자들이 그랬다.

성경은 그 여호수아의 후계자들을 ‘판관들’이라 부른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5-24 [제26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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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7) 판관시대가난뱅이·천민 출신의 판관 등장

출신·성향에 상관없이 지도자 추대하는 열린 포용성
200년 동안 12명의 판관들이 유대12지파 동맹 이끌어


유대민족이 낳은 걸출한 명장, 여호수아가 죽었다(여호 24,29-33).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색다른 정치체제를 도입한다. 이른바 판관들의 등장이다. 판관이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신라시대부터 조선까지 이어 내려왔던 관직으로서의 판관을 떠올리기 쉽다. 신라 경덕왕 때의 판관은 감찰의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었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지방 장관 밑에서 민정을 보좌하던 벼슬아치였다. 현재의 법률용어로는 재판관 혹은 심판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의 판관은 군대를 지휘하는 통치자, 지도자, 구원자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해하기 쉽게 ‘유대 12지파 동맹 체제의 조정자’로 보면 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유대민족 스스로 선택해서 이러한 판관 지도 체제를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나안 지역은 비록 좁기는 하지만 40개 이상의 지리와 기후로 구분되는 다양성을 지닌 지역이다. 당연히 곳곳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 12지파의 전통과 기질,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유대 민족 12지파는 수직 관계가 아닌 자존심 강한 평등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각 지파들은 억압적인 중앙집권식 지도체제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두된 것이 바로 판관에 의한 지도 체제였다.

이런 판관 지도 체제는 기원전 1200년대부터 1000년대까지 200년 동안 지속됐다. 등장한 판관은 모두 12명이다. 여기에는 유명한 ‘판관 삼손’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이러한 판관들은 권력을 세습하는 국가 차원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유대민족 전체의 진두에 서서 명령을 내리는 절대 권력의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오히려 판관은 카리스마적 성격이 강하다. 오늘날의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하면 된다. 뛰어난 능력과 지도력으로 모든 지파의 존경을 받았던 정신적 지도자였던 것이다. 판관들은 일반적으로 한 지파를 이끌었다. 몇몇 판관들은 동시대의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판관들의 출신이다. 가난뱅이에다 천민 출신이 대부분이다.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적응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여성도 있었고, 매춘부의 아들도 있었다. 판관은 누구나 될 수 있었다. 능력만 있다면 출신과 성향에 상관없이 지도자(판관)로 추대하는 열린 포용성은 고대 유대 사회가 가나안 지역에서 빠르게 정착하고 융성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모압 왕이었던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의 자손들을 모아 유대민족(베냐민 지파 일부 지역으로 추정)을 침략, 야자나무 성읍이라고 불리는 곳을 차지했다. 오아시스가 있었던 중요한 요충지가 이민족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의 일부는 이후 18년 동안 모압 임금 에글론을 섬겨야 했다. 이때 에글론 왕을 대담하게 암살하고 모압 민족을 물리친 장수가 바로 판관 에훗이다(판관 3,12-30 참조). 그런데 이 에훗은 왼손잡이였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왼손잡이는 빈약한 사람을 지칭했으며,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많은 차별을 받았다. 그런 그가 유대 민족의 판관이 된 것이다.

판관 중에는 여인도 있었다. 드보라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여성도 드물다. 그녀가 야자나무 밑에 앉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찾아가 재판을 받곤 했다. 이 신비스런 여인은 가나안의 강력한 왕이었던 야빈에게 대항할 연합군을 구성, 그 군대를 격퇴한다(판관 4,1-24 참조).

판관 입타는 매춘부의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직업 때문에 형제들에 의해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난 그는 이후 건달패를 이끌며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입타가 장사였던 모양이다. 암몬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을 때, 유대인들은 입타를 기억해냈고, 그를 암몬과 싸울 장수로 추대한다. 이때 입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도자의 자리를 보장받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에 참여해 승리한다. 마치 중국 고전 수호지(水湖志)의 양산박 도적 무리들이 송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정규군으로 편성돼 외적과 싸우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판관 시대의 이야기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손과 들릴라를 묘사한 판관기 13-16장이다. 삼손은 참으로 복잡한 인물이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폭력을 즐기는 듯한 인상도 보인다. 또 종교적으로 볼 때 금기인 환락에 푹 빠지는가 하면, 아름다운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적 분위기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은 이런 인물조차 판관으로 인정한다. 바로 삼손의 회개 때문이다. 유대인의 하느님은 돌아오는 아들을 늘 넓은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머리카락이 깎여 힘을 잃고 체포된 뒤, 두 눈까지 잃은 삼손의 절규 기도는 오늘날 까지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주 하느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저에게 다시 힘을 주십시오.”(판관 16,28)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5-31 [제26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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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8) 맞수가나안 정복 전쟁서 만난 다윗과 골리앗

유대 역사 크게 바꾼 필리스티아인 등장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왕정 도입


지금까지의 상대와는 그 격이 다르다. 유대인들이 모처럼 맞수다운 맞수를 만났다. 단순한 선의의 경쟁자로서의 맞수가 아니다. 맞수라기보다는 악연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악연도 이런 악연은 없다.

‘필리스티아’로 불리는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것이다. 오늘날 팔레스티나는 바로 이 필리스티아에서 유래한다. 고대 유대인들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고, 3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지역에 여전히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사악 시기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고 있던 필리스티아 사람들(창세 26,1 참조)을 옛 성경에선 ‘블레셋 사람들’이라고 번역했다. 훗날 다윗과 싸우는 블레셋 거인 장수 골리앗이 바로 필리스티아 사람이다.

한 민족의 역사는 때때로 예기치 않은 맞수 민족을 만날 때 새로운 물줄기를 탄다. 뒤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등장은 유대 역사를 크게 바꾸는 촉매제가 된다.

여기서 필리스티아 사람들에 대해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유대인들의 역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고향은 크레타 섬이다. 크레타 섬은 오늘날 그리스 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기원전 3000~2600년 경 유럽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꽃피운 곳이다. 역사가들은 이 문명을 미노아 문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기원전 1500년경 크레타 섬에 큰 지진이 발생했고, 찬란했던 문명도 함께 스러졌다.

이때 미케네인 이라고 불리는 그리스 본토 거주민들이 크레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고, 새롭게 미케네 문명을 열게 된다. 유명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영웅들이 바로 이 미케네 사람들이다. 이들은 훗날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 갈대바다를 건너는 그 즈음에 소아시아의 맹주 트로이를 침략해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미케네 민족 중 일부 분파(고대시대에는 이들을 바다 민족이라고 불렀다)는 이후 크레타 섬을 떠나 이집트를 침략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영웅, 람세스 2세에 의해 실패하고, 다시 여러 갈래로 나눠 동부 지중해 연안 해안 곳곳에 정착한다. 이때 가나안 남쪽 해안 평야 지대에 정착한 이들이 바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갈등을 벌이는 가자지구도 고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한 곳 중 하나다.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놓고 정착하는 시기가 묘하다. 유대 민족 입장에서는 아직 가나안 정복을 미처 다 끝내지도 못했는데 엄청난 맞수를 만난 것이다. 좁은 지역에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두 민족이 만났으니 충돌이 일어날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필리스티아와 유대민족의 군사력의 차이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유럽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크레타 섬에서 온 민족답게 당시로서는 최신식 무기인 철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당시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윗이 필리스티아 장수 골리앗을 대적할 때 돌팔매를 사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철제 무기를 사용하는 골리앗에게 청동제 무기로 어설프게 덤벼드는 것 보다는 돌팔매가 더 유용했을 것이다. 물론 유대 민족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해양 민족이었던 만큼 해상 전투는 뛰어났지만, 육상 전투에는 상대적으로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쨌든 유대인 입장에서는 호락호락하게 가나안 땅의 지배권을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내어줄 수 없는 처지였다. 가나안이 어떻게 정복한 땅인가. 200여년 가까이 전쟁을 통해, 수많은 피와 희생을 통해 간신히 손에 넣은 땅이다.

유대인으로서는 아직도 가나안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민족들로부터 확실한 복종을 받아 놓지 못한 상황이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격퇴시키지 못한다면 가나안 지역에서 어렵게 확보한 우위성이 흔들릴 수 있었다. 만약 유대인들이 조금이라도 밀리는 눈치를 보인다면 지금까지 고개 숙이고 복종하던 민족들이 모두 등을 돌릴 수도 있었다.

필리스티아는 유대인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문제는 필리스티아가 지금까지 가나안 정복전쟁을 통해 만났던 상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산이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판관 삼손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

삼손이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 죽자, 삼손을 따르던 ‘단 지파’는 해체됐다(판관 18,1-31 참조). 삼손 시대 당시 이미, 유다 지파는 필리스티아에 종속되어 있었다(판관 15,11 참조).

더 이상 밀려서는 곤란했다. 민족 전체가 필리스티아 사람들 발아래 놓일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제 유대인들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생각해낸다. 보다 강력한 지도 체제가 필요했다.

지금까지 유대 민족 12지파는 외부에서 적이 침략해 들어 왔을 때만 일시적으로 판관이라는 지도자 밑에서 동맹을 맺고 싸웠다. 물론 전쟁이 끝나면 동맹은 다시 흐지부지됐다. 사실 이 동맹 체제도 그리 굳건한 것이 아니었다.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일도 있었다(판관 19,1-21,25 참조). 이렇게 느슨한 동맹 체제로는 강한 왕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치르는 필리스티아를 대적하기 어려웠다.

이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항구적으로 통치하고 전쟁을 지휘해줄 왕을 요구하게 된다. 필리스티아의 등장으로 인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왕정을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불필요하지만, 만약 맞수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가나안 이주가 없었다면 유대 민족의 왕정은 나타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시기가 늦춰졌을 것이다.

최초의 왕은 벤야민 지파 출신, 사울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6-07 [제26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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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19) 왕의 등장, 최초의 왕 사울

“우리에겐 임금이 꼭 필요합니다”
가장 작은 지파인 벤야민 기브아서 탄생
사무엘 견제·우려 넘어 연전연승 하기도
점점 고립에 빠져서 의지·판단력 잃어가


노회한 사무엘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미간에 패인 굵은 주름이 고통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평생 유대민족을 이끌어 온 지도자인 그를 사람들은 예언자로, 사제로, 판관으로 존경해 왔다. 그러던 백성들이 최근 돌변했다. 외적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왕(王)을 모시게 해달라는 것이다(1사무 8,6 참조).

‘왕? 왕이 왜 필요하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나를 배신하다니…. 평생 헌신해온 보답이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이냐. 왕은 안 돼, 절대 안 돼!’

흔들리는 지파 동맹 체제를 바로 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판관직을 요엘과 아비야,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선 그는 최근까지도 예언자 겸 제사장으로 유대민족을 이끌어 왔다. 그런데 백성들은 두 아들을 미덥지 않아 했다. 더 이상 판관에 의한 지도체제가 아닌 왕정제도의 도입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사무엘은 왕정제도 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사무엘은 지파 지도자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왕정제도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밝히기 시작했다. 왕정제도로 인한 예상되는 폐해는 직업 군인의 등장, 가혹한 조세부과, 강제 노역 등 수없이 많았다(1사무 8,11-18 참조).

하지만 백성들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1사무 8,19). 사무엘은 더 이상 반대만 계속할 수 없었다. 주님께서도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임금을 세워 주어라”(1사무 8,22)고 하셨다.

사무엘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사무엘은 미츠파의 총회(1사무 10,17-27 참조)를 주관, 뛰어난 전투 지휘 능력을 갖춘 사울을 왕으로 선출했다. 사울이 유대민족의 사상 첫 번째 왕으로 간택된 것이다. 사울은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1사무 9,2 참조).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1사무 10,1).

하지만 유대인들 중에는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도 있었다. “하필이면 사울이냐”는 것이었다. 이는 사울이 벤야민 지파였기 때문이다. 지파 동맹 중에서도 벤야민은 가장 작은 지파로 분류되었다.

게다가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는 한때 동족을 대상으로 반란 전쟁을 일으킨 전력이 있었다(판관 19,1-2125 참조). 민족을 위기에 빠트린 벤야민의 기브아에서 탄생한 사울이 이제는 지파들을 권력으로 억압할 수 있는 왕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선 북쪽 지역 지파들의 우려가 특히 컸다.

일부 역사가들은 사무엘이 왕의 권한 약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벤야민 지파에서 초대 왕을 선출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지지기반이 약한 허수아비 왕을 내세우고, 자신은 섭정을 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사무엘이 등 떠밀려 왕정 수립에 동의하고, 또한 왕을 세운 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울을 견제하는 정황은 성경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사울은 사무엘을 비롯한 백성들의 우려를 깨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모압, 암몬, 에돔, 초바 임금들 및 필리스티아인, 아말렉과 싸워 연전연승했다(1사무 14,47-48 참조). 대 암몬 전쟁 직후 길갈에서 공식적 즉위가 다시 이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1사무 11,14-15 참조).

하지만 사무엘과 사울의 삐걱거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사무엘 상권 15장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전리품을 챙긴 사울을 다그치는 늙은 예언자 사무엘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드디어 사무엘은 완전히 등을 돌렸고, 사울은 애걸하며 매달린다. 사울이 얼마나 매달리며 애원했는지, 돌아서는 사무엘의 옷자락까지 찢어질 정도였다(1사무 15,23-27 참조).

불쌍한 사울…. 사울은 점차 고립의 늪에 빠진다. 왕다운 의지와 판단력도 잃어간다. 강박관념에 의한 일종의 정신착란 증세 혹은 조울증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고,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그를 괴롭혔다”(1사무 16,14). 가중되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압력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왕권을 인정해주지 않는 유대 지도자들의 보이지 않는 도전도 힘들었을 것이다.

사울이 이렇게 몰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판단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판관이자 예언자로서 왕의 배후에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사무엘이 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한동안은 사무엘과 손잡을 필요가 있었다.

“안되겠어. 왕을 바꿔야겠어.” 사무엘은 사울의 대안을 모색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이 다윗이다(1사무 16,6-13 참조).

하지만 초창기의 다윗은 오히려 사울의 총애를 얻는다. 특히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그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했다. 요나탄은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심지어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주었다(1사무 18,2-5 참조). 다윗 입장에서는 왕과 왕자로부터 대단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훗날 사울과 원수가 된다.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6-21 [제26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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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0) 사울 VS 다윗

다윗의 성장에 두려워진 사울 / 거인 골리앗 죽인 후 전쟁영웅이 된 다윗을 사울은 위험한 존재로 여겨 제거에 나서는데

성경에서 사울과 다윗의 권력 투쟁에 대한 내용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드물다. 모험과 도전, 사랑, 권모술수, 삼각관계, 좌절, 의심, 모함 등 흥행 필수 요소를 두루 갖춘, 한편의 완벽한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완벽한 드라마가 대부분 그렇듯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극적 반전이 있다.

드라마의 첫 장면에선 근엄하고 엄숙한 모습의 사울이 등장한다. 유대민족 최초의 왕, 사울은 인물을 쓰는데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용감하고 힘센 사람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에게 불러 모았다”(1사무 14,52).

다윗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에 대해 상반된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사울이 갑옷과 투구를 주자 다윗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무장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이대로는 나설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갑옷과 투구를 벗어 버렸다(1사무 17,39). 다윗은 무장 경험조차 없었던 풋내기였던 것이다.

반면 같은 사무엘 상권의 16장 18절에는 “그는 비파를 잘 탈 뿐만 아니라 힘센 장사이며 전사로서, 말도 잘하고 풍채도 좋다”고 나온다. 이를 볼 때 다윗은 초창기부터 완벽한 전사는 아니었으나, 전문적 군사 훈련을 통해 차츰 완벽한 군사 지도자로 변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은 다윗이 필리스티아(블레셋)와의 에페스담밈 전투에서 거인 전사 골리앗을 죽인 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사무 17장 참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방법은 무릿매질이다. 많은 이들이 돌팔매(돌을 던지는 행위)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다윗은 손으로 돌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무릿매(돌을 끈에 맨 후 끈의 양 끝을 잡고 휘두르다가 한쪽 끝을 놓아 던지는 팔매)를 사용했고, 따라서 무릿매질이 정확한 표현이다.

무릿매는 당시 목동들의 중요한 호신용 무기였지만, 전투용 무기로도 흔히 사용됐다. 무릿매를 사용하는 부대가 별도로 있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훗날 분열왕국 시대에 북이스라엘의 왕 요람과 남유다 왕 여호사팟 연합 부대의 모압 정벌에도 무릿매부대가 크게 활약했다(2열왕 3,25). 900여년 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자신의 전쟁담을 다룬 「갈리아 전쟁기」에서 무릿매부대가 중무장 및 경무장 보병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어쨌든, 대 골리앗 전투의 승리로 다윗은 이제 유대민족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전쟁 영웅이 됐다. 필리스티아와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유대인들에게 심어준 것이다. 이에 사울 왕가는 처음에는 다윗을 통해 필리스티아 대응 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왕자 요나탄은 심지어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주었다(1사무 18,2-5 참조). 사울도 다윗을 사위 삼기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황은 엉뚱한 곳에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다윗이 대 필리스티아 전투를 주도하면서 연전연승을 거두자 백성들의 관심이 다윗에게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울은 점차 다윗을 경계하게 된다. 다윗의 승승장구를 방치했다가는 자칫 왕조의 기반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다윗을 위험스런 존재로 인식한 사울은 집요할 만큼 다윗 제거 노력에 나선다. 사울은 왕이었다. 이제 막 정치적 상승세를 타고 있던 다윗으로서는 정면 대응이 불가능했다. 좀 더 힘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사울 입장에서 다윗의 망명은 다윗을 더욱 위험스런 인물로 간주하는 촉매제가 됐을 것이다.

사울은 결국 친위대를 동원, 다윗 세력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여기서 사울은 무리수를 둔다.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놉의 사제들을 몰살하기도 했다(1사무 22,6-23). 이는 사울 자신의 종교적 기반마저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사무엘과 연대하지 못해 정치적 고립을 자초했던 사울의 정치적 미숙함이 또다시 드러나는 대목이다.

다윗은 다윗대로 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결국 다윗은 지금까지 칼끝을 마주하고 싸웠던 필리스티아와 전략적으로 손을 잡게 된다(1사무 21,11-1627,1-12). 필리스티아 입장에서도 다윗과의 동맹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는 유대민족과 필리스티아 2파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제3의 친 필리스티아 유대 세력이 새롭게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싸움은 복잡하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든든한 지원 세력을 얻은 다윗은 이제 마음 놓고 아말렉 등 가나안 남부지역 세력을 정벌, 전리품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간다(1사무 30,1-31 참조).

다윗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구축에 몰두하던 그 시간. 필리스티아는 드디어 눈에 가시였던 사울 왕가에 대한 대대적 공세에 나선다. 사울은 연합세력을 모아 대항해 보려 했지만 그 노력도 실패로 끝나고, 결국 길보아 산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 전투에서 사울왕과 요나탄 왕자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울 왕가 사람들이 전사했다. 성경은 그 비참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울 가까이에서 싸움이 격렬해졌다. 사울이 (적의)궁수들에게 큰 부상을 입었다. 사울이 자기 무기병에게 명령하였다.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나 무기병은 너무 두려워서 찌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졌다. 사울이 죽는 것을 보고, 무기병도 칼 위에 엎어져 그와 함께 죽었다”(1사무 31,3-5).

유대 민족 최초의 왕이 죽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의 주요 거점들이 대부분 필리스티아 점령 하에 들어갔다. 가나안에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대적할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이때 다윗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가톨릭신문 우광호 기자 : 2009-06-28 [제26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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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1) 영웅으로 떠오르다

정적(政敵)의 죽음에 옷을 찢고 울부짖다
필리스티아 망명으로 사울 위협에서 탈출
지도자적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다윗
민심잡기에 나서며 뛰어난 정치감각 보여

인기와 정치적 지지도는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는다. 인기 연예인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인기는 호감이지만, 지지는 신뢰다. 인기가 지지로 이어지기 위해선 호감이 신뢰로 바뀌어야 한다. 그 촉매제는 감동이다.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는 지도자만이 단순한 호감을 전적인 지지로 바꿀 수 있다.

대 골리앗 전투 이후 다윗의 대중적 인기는 급상승했지만, 이것이 곧 다윗의 정치적 지지도 상승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윗 입장에선 사울의 방해 노력으로 정치적 신뢰를 쌓을 기회조차 없었다. 사울과 대적하기 위해선 탄탄한 지지기반이 필요했다.

유대 민족의 원수였던 필리스티아(블레셋)와 전략적 제휴에 나선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필리스티아 망명을 통해 다윗은 비로소 사울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맘껏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드러낼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윗은 이제 자신의 지도자적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가나안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아말렉족을 쳐부순 후 그 전리품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다윗은 수준 높은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다윗은 유다 원로들에게 전리품의 일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주님의 원수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 일부를 어르신들께 선물로 드립니다”(1사무 30,26).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과거에 사울이 전쟁에 이긴 후 전리품을 독차지한 것과 대조적이다(1사무 15장 참조). 다윗은 사울과 의식적으로 다른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점에서 다윗은 고대 사회에서는 드물게 ‘백성의 민심’에 눈뜬 뛰어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렇게 다윗이 민심 확보에 주력하고 있던 어느 날 다윗은 사울이 필리스티아와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때 다윗의 행동이 의외다.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울며, 저녁때까지 단식하였다”(2사무 1,11-12). 다윗은 더 나아가 사울을 애도하는 노래(2사무 1,17-27)까지 짓는다.

이러한 다윗의 반응은 사울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다윗의 태도 자체도 정치적 이유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전 유대 민족을 이끌겠다는 야심이 이때부터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울에 대한 다윗의 애가(哀歌)는 30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당연히, 사울을 추모하는 다윗의 일련의 행동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목숨을 위협하던 정적은 사라졌고, 더 이상 필리스티아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필리스티아의 영향력을 벗어나 유다 지파 성읍들 가운데 한 곳인 헤브론으로 간다(2사무 2,1). 헤브론은 가나안 남부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다. 한반도 남쪽의 대전쯤에 위치한 도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윗은 이 헤브론에서 큰 정치적 도약을 이뤄낸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2, 4).

다윗이 그동안 공들인 정치적 노력이 가시적 성과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물론 여기에는 필리스티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던 유다 지파의 성향도 한몫했다. 필리스티아에 망명한 경력이 있는 다윗이라면 적어도 필리스티아와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다윗이 왕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유대 민족의 왕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은 아직 ‘단에서 브에르세바까지’(한국식 표현으로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모든 가나안 땅의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대 민족이 여러 지파로 나눠져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유다와 이스라엘, 유대의 구분을 어려워한다. 학자들마다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긴 하지만 이 글 맨 처음에 밝힌 대로 이 글에선 유다는 가나안 남부 지역 즉 사해 서쪽을, 이스라엘은 사울왕이 기반으로 두고 있었던 예루살렘 이북, 즉 북부 가나안을 일컫는다. 이 글에서 쓰고 있는 ‘유대 민족’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칭하는 말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남부 다윗이 승승장구 하던 그때 이스라엘(가나안 북부)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사울은 죽었지만 사울군은 아직 미력하나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과거 사울군의 사령관을 지내던 아브네르의 보호로 왕가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부 다윗왕이 탄탄한 지지기반 속에서 날로 성장세를 보인 반면, 북부에선 거듭된 정치적 혼란을 보인다. 왕을 배반한 북부 이스라엘군의 최고 사령관은(2사무 3,6-11), 다윗과의 밀약을 추진하다(2사무 3,12-21), 결국에는 다윗의 본거지에서 다윗 부하에게 살해당한다(2사무 3,22-39). 군 사령관을 잃은 북부 이스라엘에선 설상가상으로 왕이 암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2사무 4,1-12).

가나안 남쪽은 현재 다윗이 다스리고 있다. 북쪽을 다스리던 왕조는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무너졌다. 누가 보아도 이어지는 결과는 뻔해진다. 백성들의 눈이 향한 곳이 어디겠는가.

다윗은 민족을 이끌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2009-07-05 [제26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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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2) 예루살렘 점령

민족의 영웅, 유일신 신앙의 수호자.사울 왕조가 무너지고 왕으로 추대된 다윗. 난공불락의 전략 요충지 예루살렘을 정복

학자들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즉 유대 민족이 수천 년 동안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현실적 이유를 두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나의 판단으로는 단언하건데 가장 유력한 이유, 가장 깊은 뿌리는 바로 ‘다윗’에 있다.

유대 민족이 만약 국가를 만들지 않고 단순한 종교 연합 공동체 형태를 유지했다면 오래지 않아 그 공동체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해체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유일신 하느님도 다른 민족들의 수많은 그저 그런 신들 중 하나로 전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일신 하느님은 유대 민족의 해체를 원하지 않으셨던 듯하다. 다윗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우선은 뿌리가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했다. 아직 유일신 신앙은 뿌리가 약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 입장에서 다윗은 유대교의 영웅일 뿐 아니라 하느님 유일신 신앙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다윗이 있었기에 통일 왕국이 가능했고, 일체감과 소속감, 민족의식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실제로 다윗은 당시까지만 해도 근동지방에서 별로 주목 받지 못했던 하느님 백성, 유대 민족을 단숨에 ‘잘 나가는 민족’으로 바꿔 놓는다. 고대에는 드물게 유일신 신앙을 가진 민족이 신흥 강국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제 그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자.

가나안 남부에서 세력을 쌓던 다윗은 가나안 북부의 사울 왕조가 무너진 후, 이스라엘 지파들의 원로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다. 지파 별로 갈려 반목하고 경쟁하던 유대 민족이 다윗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다윗)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하고 (다윗)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2사무 5,1-2)

이때가 기원전 1000년경이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로부터 인정받은 왕, 다윗은 이제 뭔가 보여주어야 했다. 그 첫 번째 행동이 바로 예루살렘 점령이다(2사무 5,6-12 1역대 11,4-9 참조).

예루살렘 점령만큼 유대 민족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건도 드물다. 그래서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은 가나안 내륙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의 개성 혹은 서울과 비슷한 지역에 위치한 도시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민족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발을 들인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점령하지 못한 땅이었다. 남북을 잇는 연결 고리가 끊어졌기에 남북의 유대 민족은 거리가 자연히 멀어졌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주요 거점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 남과 북의 별개의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두 그룹은 훗날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갈라지는 씨앗이 된다.

그만큼 예루살렘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전설의 장수 여호수아도, 쟁쟁한 판관들도 정복하지 못했던 땅이다. 그만큼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는 여부스족은 자부심이 컸다. 여부스족이 다윗에게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2사무 5,6)고 큰소리 친 것은 단순히 호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윗은 예루살렘 없이는 통일 유대 왕국 또한 없다고 생각한 듯 보인다. 예루살렘 점령은 정치 종교적 수도의 확립을 의미한다. 이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으며, 다윗은 이를 통해 분열된 남과 북의 두 그룹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윗은 지파들의 도움 없이 자신이 개인적으로 지휘하던 군대만 동원, 예루살렘 정복에 나선다(2사무 5,6 참조). 다윗은 예루살렘 정복은 유대 민족 지파 연합군의 승리가 아닌 자신의 개인 공적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목소리에 힘이 더 실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도 예루살렘성은 영어로 ‘다윗성’으로 불린다.

예루살렘 공략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수로(水路)를 통한 다윗의 기습 공격에 무너졌다(1역대 11,4-9). 그 선봉에는 요압장군이 있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비로소 유대인들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

지난 6월 예루살렘에서는 기념비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이뤄졌다. 예루살렘성의 수로가 론 베리(Ron Beeri) 박사팀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예루살렘에 어떻게 물이 공급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됐다. 이번에 발굴된 수로는 6~7세기와 16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지만,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의 수로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성경 말씀대로 예루살렘에는 수로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예루살렘 정복 후 다윗은 명실상부한 유대민족의 왕으로 우뚝 선다. 그가 도읍으로 정한 예루살렘은 유대 민족이 도약을 이루는 땅이었다. 하느님의 궤도 예루살렘으로 옮겼다(2사무 6,1-23 참조).

하지만 출발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반발도 심했다. 한 베냐민 지파 출신의 말에서 다윗이 처한 당시 분위기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얻을 몫도 없고, 이사이의 아들에게서 물려받을 유산도 없다. 그러니 이스라엘아, 저마다 제집으로 돌아가라.”(2사무 20,1)

다행히 반란은 진압됐지만 그 통치가 편안할 리 없었다. 후궁들로 인한 폐해도 컸다. 외적으로부터의 위협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없었다.

다윗이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았다.

가톨릭신문 2009-07-12 [제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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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3)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나

꿈꾸던 신앙 왕국을 이루다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탈환한 다윗
십계명 담은 계약의 궤를 성막에 안치

“이제 다 이뤘다.” 다윗 왕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평생소원을 이룬 모습이다.

오늘은 그동안의 숱한 우여곡절을 딛고 ‘계약 궤’를 드디어 예루살렘의 성막으로 옮겨 안치한 날이다. 다윗은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사무엘 하권은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2사무 6,14), 역대기 상권은 “껑충껑충 뛰며 춤추었다”(1역대 15,29)고 표현하고 있다. 다윗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모든 군중에게 빵 과자 하나와 대추야자 과자 하나, 그리고 건포도 과자 한 뭉치씩을 나누어 주었다”(2사무 6,19).

무엇이 다윗을 이토록 들뜨게 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우선 ‘계약 궤’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아직도 많은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계약 궤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여기서 궤(櫃)는 ‘물건을 넣도록 나무로 네모나게 만든 그릇’을 의미한다. 그냥 ‘상자’라고 해도 될 텐데 굳이 ‘궤’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과 관련된 것인 만큼 좀 더 품위 있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계약 상자’혹은 ‘계약 그릇’보다는 ‘계약 궤’라고 쓰는 것이 왠지 품위가 있어 보인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계약 궤’에 대해 확실히 알고 넘어가자.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에서 집단 탈출에 성공한 것이 기원전 1250년경이다. 하느님은 이후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유대민족에게 십계명을 새긴 돌판을 내린다. 모세는 그 십계명 돌판을 넣은 궤를 ‘주님의 궤’혹은 ‘계약 궤’라고 불렀다. 이후 유대민족은 자신들이 이동할 때마다 이 계약 궤 및 계약 궤를 보관한 성막(성스러운 천막)을 함께 모시고 다녔다. 계약 궤는 이처럼 유대 민족과 늘 함께했다. 계약 궤는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존재 그 자체며, 민족의 결속을 가능케 하는 끈이었다. 동시에 계약 궤는 유대민족 정통 신앙을 상징한다.

인간이기에 나약했던 다윗은 남의 아내와 재물을 탐내는 등 많은 실수도 저질렀지만(2사무 11,1-27 12,1-12 참조),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탁월한 왕이기도 했다. 그는 유대민족이 하느님 신앙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참으로 종교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전략적 종교적 정치적 요충지인 예루살렘을 손에 넣자마자,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계약 궤의 예루살렘 안치는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유대민족의 정치 종교적 수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다윗의 업적 중에는 군사적 업적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로선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필리스티아를 제압, 가나안 남서부의 길고 좁은 해안지역에 가두어 버렸다. 여담이지만, 이스라엘은 고대 필리스티아인들을 몰아넣었던 그 땅에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있다. 다윗은 이 밖에 암몬, 모압, 시리아족, 에돔족, 아람 등과 싸워 승승장구 했다(2사무 8,1-14). 참으로 “주님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도와주셨다”(2사무 8,1410). 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은 다윗 때문에 대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윗에게서 단지 ‘힘’을 읽는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전성기의 왕이다. 단지 ‘힘’이 세다고 해서 전성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왕정제도 자체가 종교적 의무를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에게 있어서 ‘왕’은 유대민족이 신앙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는 도구적인 인물에 불과했다.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다윗은 단순히 이스라엘 왕국의 창건자가 아니었다. 그가 꿈꾸는 것은 신앙 왕국이었다. 그에게 왕관이 필요했던 것은 신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로마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복 전쟁을 통해 기틀이 다져졌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었다. 지금도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카이사르가 그랬던 것처럼 다윗은 전사였던 동시에 음악, 저술, 춤 등을 이용하여 종교적 행위에 참여한 감성적 스타일의 남자였다. 다윗이 음악가이자 시인이며 「시편」의 저자라는 전승은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인되기 힘들다.

다윗은 왕국의 존속이 하느님 신앙을 수호하는데 있다고 믿었다. 다윗은 자신의 이러한 신념이 후계자 솔로몬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훗날 솔로몬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하느님 품에 안긴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2열왕 2,2-3)

다윗의 유언은 다윗의 삶, 그 자체였다.

가톨릭신문 2009-07-26 [제26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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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4) 왕자들의 암투, 솔로몬의 등장

다윗 왕국판 ‘왕자의 난’
무자비한 정적 제거로 왕권 강화한 솔로몬
정치 안정 바탕으로 막대한 경제 이익 남겨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솔로몬이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을 보면, 조선왕조 초기에 왕자들이 벌인 왕위 다툼과 판박이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왕 뒤에는 항상 권력욕에 사로잡힌 말썽꾸러기 왕자들이 있다. 솔로몬은 그 ‘왕자의 난’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았고, 결국에는 왕위에까지 오른다.

다윗 왕국판 ‘왕자의 난’의 씨앗은 맏아들 암논 왕자에 의해 뿌려진다.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암논 왕자가 이복 누이동생 타마르 공주를 성폭행하는 패륜을 저지르자(2사무 13,1-14), 타마르의 친오빠 압살롬 왕자가 형 암논을 죽인다(2사무 13,23-30). 이후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려 했지만 성공 직전에 실패하고 살해된다(2사무 15,1-18,17). 이후 넷째 아도니야 왕자도 왕권에 도전했지만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와 그 측근들의 발 빠른 움직임 덕분에 실패했고, 결국 솔로몬이 후계자로 지목된다(1열왕 1,5-53 참조).

이후 솔로몬은 무자비한 정적 제거 작업에 나섰다. 형 아도니야를 죽였고(1열왕 2,13-25), 사제 에브야타르를 귀양 보내는 한편 개국공신인 요압 장군도 살해했다(1열왕 2,26-35). 지금으로 말하면 왕이 되자마자 차기 대권주자와 군 장성, 고위 성직자를 모두 숙청한 것이다.

“이리하여 솔로몬의 손안에서 왕권이 튼튼해졌다.”(1열왕 2,46)

솔로몬은 정적 제거 작업을 마치자마자 주변 정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솔로몬 당시 고대사회는 철기사회로 진입하고 있었다. 철제 농기구 사용으로 농작물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었고, 광산 개발도 한층 탄력을 받았다. 세계는 부유해지고 있었고, 가나안 땅은 당시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집트에서 아시리아를 가려고 해도, 또 아시리아에서 이집트를 가려고 해도 모두 솔로몬의 땅을 통과해야 했다. 막대한 통행세가 솔로몬의 수중으로 흘러들어왔다.

솔로몬은 또 ‘무역은 아내가 성사시킨다’는 기치를 내걸고 주변 제후국들의 공주들과 정략결혼에 본격 나선다. 성경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솔로몬 임금은 파라오의 딸뿐 아니라 모압 여자와 암몬 여자, 에돔 여자와 시돈 여자, 그리고 히타이트 여자 등 많은 외국 여자를 사랑하였다.”(1열왕 11,1) 이렇게 해서 맞아들인 왕비와 후궁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한다.

“솔로몬에게는 왕족 출신 아내가 칠백 명, 후궁이 삼백 명이나 있었다.”(1열왕 11,3)

정략결혼의 결과는 일단 처음에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 가서는 이 여자들 때문에 솔로몬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지만, 솔로몬은 일단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항구에는 연일 조공과 무역 상품을 실어 나르는 배로 가득했다(1열왕 9,26-28). 이를 위해 솔로몬은 대규모 상선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돈이 쌓이면 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 법이다. 솔로몬은 대대적인 토목 및 건축 사업도 함께 벌인다(1열왕 9,15-25).

권력 장악 초기에 보인 잔혹성과 달리, 정권 안정기의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었다. 솔로몬은 전쟁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굵직한 전쟁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치러냈기 때문에 솔로몬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놓으면 됐다. 솔로몬은 전쟁터를 누비는 그런 근육질의 남자가 아니었다. 솔로몬은 오히려 냉철한 지성을 지닌 호리호리한 학자형에 가깝다. 소위 꽃미남의 두뇌형 인간이다.

어느 날 솔로몬의 꿈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신다. 그리고 묻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솔로몬이 대답했다.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1열왕 3,5-15 참조)

솔로몬은 지혜로웠다. 지혜를 청했기에 지혜를 포함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치 “쇠도끼가 제 도끼입니다”라고 말해서 금도끼 은도끼를 모두 얻은 나무꾼처럼, 솔로몬은 ‘겸손히’ 지혜를 청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었다.

솔로몬의 꿈은 현실이 된다. 다윗의 힘과 감성에 의해 싹트게 된 유대민족 통일 왕국은 솔로몬의 지혜와 이성에 의해 만개하게 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강력한 중앙정부와 이웃나라가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은 오직 솔로몬 시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영토도 가장 넓었다. 유대인들이 마음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영유할 수 있었던 시기도 솔로몬 시대가 유일하다.

바야흐로 유대인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참 얄궂다. 역사는 시기와 질투 가득한, 살아있는 생명체다. 한창 상승기류를 타는 민족이 있으면 어김없이 뒤에서 붙잡아 끌어내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대민족의 황금기도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솔로몬 몰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발행일 : 2009-08-02 [제26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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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5)끊이지 않는 망치소리

“우린 더 이상 떠돌이 민족이 아니다”
7년에 걸쳐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 완성
호화로운 왕궁생활로 재정 위기 앞당겨

솔로몬은 중대 결심을 한다. 성당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당시까지 유대인들은 성당을 갖지 못했다. 사실 성전 건립 프로젝트의 시안을 처음 만든 것은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이었다. 다윗은 왕국을 세우자마자 성전 건립에 대한 강한 원의를 드러냈다. 그래서 차곡차곡 돈도 모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 왕국의 기틀을 다지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성전 건립의 꿈은, 아버지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놓으면 됐던 솔로몬에 의해 달성된다. 예루살렘에 드디어 망치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솔로몬 통치 4년째인, 기원전 959년경의 일이다.

성전 건립은 유대민족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사였다. 열왕기 상권 5장을 보면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레바논에서 운반해 오는 일에만 3만 명이 동원됐다. 또 돌을 캐고 다듬고 운반하는 데는 8만 명의 석공과 7만 명의 인부가 동원됐다. 이들을 관리하는 인부만 3300명이었다고 하니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대공사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악물고 꿈을 이뤄낸다. 공사 시작 7년 만인 기원전 952년경, 드디어 웅장한 모습의 성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야에서 떠돌며 천막에 하느님을 모셔야 했던 유대민족으로서는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성경은 당시 성전의 규모와 모습, 내부 장식 및 성전에 들어간 기물 등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1열왕 6장 참조). 석조로 이뤄진 성전은 대략 길이 28m, 폭 10m, 높이 14m 규모였다.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이 길이 69m, 폭 28m, 지붕 높이 23m, 종탑 높이 45m 이니까, 솔로몬 성전은 명동대성당의 약 3분의 1 규모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전 내부는 순금 등잔대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1열왕 7,13-50 참조). 성전에는 가로 세로 약 9.5m 규모의 지성소도 마련했는데, 역시 향백나무에 금을 입혀 화려하게 장식했다. 탈무드 전승에 의하면 이 지성소에는 계약궤와 모세의 지팡이, 아론의 막대기, 만나가 담긴 항아리, 야곱이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 꿈을 꾸었을 때 베고 잤던 돌 베개 등이 보관됐다. 하지만 훗날 예루살렘 멸망(기원전 587년) 이후 모두 사라져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성전 축성식이 열리던 날, 백성들은 기뻐하고 환호했다. 유대민족은 이제 더 이상 떠돌이 민족이 아니었다. 번듯한 성전을 가진 아시아의 유력 민족으로 거듭난 것이다. 백성들은 솔로몬에게도 환호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의 위업을 이룬 지혜로운 재판관이자 민족을 이끌어갈 영도자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돈이 많으면 욕심도 함께 커진다. 욕심은 파멸을 낳는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이 끝나자마자 자신과 왕비들, 후궁들이 살 왕궁도 짓겠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왕궁의 규모였다. 솔로몬이 계획한 왕궁은 성전보다 30% 정도 더 큰 규모였다. 당연히 왕궁 건축 기간도 성전 건축 기간의 두 배 가까운 13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됐다. 성전 건축보다 훨씬 많은 인력이 투입됐음은 물론이다.

백성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솔로몬의 지갑도 얇아졌다. 성전 건축을 포함, 21년간 계속된 대형 토목 공사로 인해 국고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늘어난 관료 계급, 솔로몬의 대규모 식솔과 그들의 호화로운 왕궁 생활도 왕실 재정의 위기를 앞당겼다.

여기서 솔로몬은 또다시 실수를 저지른다. 재정 적자가 늘어나면 토목 사업을 줄이고 왕궁 소요경비를 절감하는 등 긴축재정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솔로몬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지출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수입을 늘리는 것이었다. 정복 전쟁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수입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바로 세금을 늘리는 것이다.

솔로몬은 왕국을 12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눈다. 그리고 한 구역에서 한 달씩 돌아가며 왕궁 생활 유지비를 부담케 했다(1열왕 4,7-19). 또 가나안 사람들(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궁과 성, 요새 건축 등에 투입했다(1열왕 9,15-25).

그럼에도 재정 적자는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솔로몬은 여기서 또다시 유대인들이 경악할 일을 저지른다. 다윗이 어렵게 획득한 영토를 헐값에 팔아넘긴 것이다. 솔로몬은 성전과 왕국 건립에 사용할 나무와 금을 제공한 이방인 왕에게 갈릴래아 땅의 성읍 20개를 넘긴다(1열왕 9,11). 이쯤 되면 솔로몬의 재정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솔로몬의 잘못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솔로몬은 파라오의 딸을 비롯한 자신의 여인들에게 그들을 위한 궁전과 이방인 신전을 지어주고 이방인들이 모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허용했다.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1열왕 11,8)

예루살렘은 이제 하느님의 성읍이 아니었다. 지중해 연안 모든 민족의 신들의 집합장소가 됐다. 결국 하느님은 솔로몬에게서 등을 돌린다(1열왕 11,1-13).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너에게서 떼어 내어 너의 신하에게 주겠다. 다만 네 아버지 다윗을 보아서 네 생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1열왕 11,11-12)

주변국들이 서서히 그의 권력을 넘보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도 강력한 경쟁자(여로보암)가 등장했다. 솔로몬 왕국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발행일 : 2009-08-16 [제26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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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6) 왕국의 분열

남북으로 갈라진 유대인의 꿈
백성들 강제 노역·과잉 세금에 불만
솔로몬 죽음 후 참고 있던 욕구 분출
아들 르하브암은 강경노선을 선택

삼국지를 읽다보면 적어도 세 번은 책을 던졌다가 다시 집어 든다고 한다. 첫 번째는 관우가 죽을 때요, 두 번째는 유비가 죽을 때고, 마지막은 제갈공명이 죽을 때라고 한다. 성경도 읽다보면 던질 정도는 아니지만 마음이 아련해져서 큰 한숨을 내쉬게 하는 부분이 몇 곳 있다.

그 중 한 장면이 바로 솔로몬의 죽음이다. 솔로몬 자체에 대한 애상 때문이 아니다.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분열은 훗날 강대국들에 의해 유대민족이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는 단초가 된다. 하느님만 따르며 하느님 왕국을 꿈꾸었던 유대인들이 더 이상 하느님을 모실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남북으로 갈라져 반목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도 기원전 924년 유대민족의 남북 분열을 한층 안타깝게 보게 하는 이유다.

우리가 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분열은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반목이 쌓이고 쌓이면 그 결과가 분열로 이어진다. 왕국의 분열도 솔로몬이 생존해 있을 당시부터 그 조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솔로몬의 신하 중에 예로보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예로보암은 왕궁을 건설하는 등 대형 토목공사를 담당하던 감독자였다. 그런 그가 솔로몬의 학정으로 힘들어하던 백성들을 대변하며 솔로몬 왕권에 도전한다. 하지만 이 도전은 실패했고 예로보암은 이집트로 피신했다(1열왕 11,26-40 참조).

반란이 시도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지혜의 왕 솔로몬의 명성과 권위는 타격 받았다. 하이에나는 사자가 지칠 때를 기다렸다가 집단으로 공격한다. 아무리 힘센 사자라도 하이에나들의 집단 공격에는 당해낼 수 없다. 그동안 솔로몬 왕국의 위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주변 소수 부족들도 솔로몬 왕국이 지친 기색을 보이자 자주 도발을 감행한다(1열왕 11,14-25 참조). 민족의 결속이 견고하다면 이런 소수 부족들의 공격도 쉽게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사정은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백성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됐고, 세금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었다. 12지파 지도자들의 마음도 서서히 솔로몬을 떠나기 시작했다. 솔로몬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행정구역을 인위적으로 12개로 나눔으로써,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이스라엘 12지파의 독자적 권위를 부정한바 있다(1열왕 4,7-19 참조).

하지만 아직도 솔로몬이 눈 시퍼렇게 뜨고 호령하는 시점이었다. 솔로몬이 누구인가. 왕국을 동방의 선진 교역국으로, 명실상부한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패권국으로 올려놓은 장본인이 아닌가. 솔로몬의 권위가 워낙 컸던 탓에 솔로몬 생존 시에는 결정적 위기가 찾아오지 않았다. 문제는 솔로몬의 사후였다.

솔로몬이 죽자 백성들은 그동안 참고 있었던 욕구들을 한꺼번에 분출해내기 시작한다. 솔로몬의 왕위를 이은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에게 세금 및 부역 경감을 요청한 것이다.

“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멍에를 힘겹게 하셨습니다. 이제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지우신 힘겨운 일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1열왕 12,4)

하지만 솔로몬의 아들은 아버지가 넘겨준 나라를 통치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원로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젊은 신하들이 제시한 강경노선을 선택한다.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1열왕 12,14)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판 하나가 통일 왕국을 파괴하고 말았다. 강경노선을 선택하려면 그만큼 군사력이 강했어야 했다. 무력은 잠시나마 불만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하브암에게는 그런 힘조차 없었다.

가만히 있을 백성들이 아니다. 북쪽 10개 지파가 르하브암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독자적인 왕조를 출범시킨다. 우리는 이 왕국을 ‘북 이스라엘’로, 다윗 왕조를 계승하는 르하브암의 남쪽 왕국을 ‘남 유다’라고 부른다. 남 유다에는 유다와 벤야민 2개 지파만이 남게 된 것이다.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솔로몬 왕이 살아있던 당시 반란을 꾀하다 이집트로 피난했던 예로보암이었다.

남 유다의 르하브암은 처음에는 북 이스라엘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르하브암은 온 유다 집안과 벤야민 지파에 동원령을 내려 정병 십팔만을 모았다. 이스라엘 집안과 싸워 왕권을 되찾으려는 것이었다.”(1열왕 12,21)

하지만 당시 가나안 북쪽은 남쪽 보다 경제력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인구도 더 많았다. 남 유다의 군사력으로는 북 이스라엘을 물리적으로 제압하기 힘들었다. 북 이스라엘도 정통성을 지닌 다윗 왕조를 힘으로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 자연히 분단은 고착화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아쉬운 점은 왕국이 분열된 시점이다. 당시는 아시리아와 이집트 등 강대국들이 부흥을 꿈꾸며 가나안으로 눈을 막 돌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유대 민족은 힘을 모아야 할 시기에 둘로 갈라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되돌릴 수 없었다.

남서쪽의 호랑이(이집트 22왕조 파라오 시삭)와 북동쪽의 사자(아시리아 왕 아슈르 단 2세)가 거의 동시에 먹이 냄새를 맡았다.

가톨릭신문 : 2009-08-23 [제26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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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7) 북 이스라엘의 방황

솔로몬 선종 후 쇠락의 길로 …
이집트의 침공에 유린당한 남 유다
종교혼합주의에 빠진 북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골은 깊어져만 가는데

“솔로몬이 죽었다고? 그리고 왕국이 둘로 갈라졌다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동안 솔로몬에게 눌려 살던 분풀이를 해야겠다.”

이집트의 왕 시삭이 분열된 왕국의 남쪽(남 유다)을 침공했다. 솔로몬이 죽고 난지 5년째가 되던 해였다. 이집트군 주력은 병거 1200대와 기병 6만이었다. 병거 1대에 딸린 병사를 4명으로 계산하고, 기록되지 않은 보병 및 보조군 수를 감안하면 동원된 병력은 총 15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이집트의 동맹인 아프리카 리비아와 수키군, 에티오피아군 등도 다수 참전했다(2역대 12,2-3 참조). 남 유다로선 이런 대군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남 유다 왕국은 별다른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왕국 내 대부분의 도시와 요새를 이집트에 내주게 된다. 심지어는 철옹성 예루살렘까지 유린당했다.

“르하브암 임금(솔로몬의 아들) 제 오년에 이집트 임금 시삭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주님의 집에 있는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가져갔다. 모조리 가져가 버렸다. 또한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모두 가져갔다.”(1열왕 14,25-26)

다윗과 솔로몬이 애써 쌓아 놓았던 왕국의 부(富)가 대부분 이집트의 창고로 옮겨졌다. 국제 무역의 유통망도 대부분 이집트 왕 시삭의 손에 넘어갔다. 남 유다는 무장 해제됐다. 다행히 시삭은 남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지 않고 철군했다. 남 유다 왕국을 멸망시켜 직접 지배하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조공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남 유다 왕국과 북 이스라엘은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남 유다 왕국과 북 이스라엘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분쟁은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됐다. 이집트가 남쪽 유다를 침공한 틈을 타고 북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코앞까지 진군해 요새를 건설했으며, 이에 남 유다 왕국은 이웃 나라인 아람에 원병을 청해 대치했다. 남과 북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북 이스라엘은 당초 남 유다의 과중한 세금 부과에 반대해 갈라진 나라다. 그런데 정작 갈라진 이후 세금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 유다 왕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북 이스라엘의 독립을 지지했지만 북 이스라엘 왕의 억압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렇게 억압 받을 줄 알았다면 남쪽의 유다와 갈라질 이유가 없었잖아. 게다가 남쪽에는 하느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도 있는데….”

이혼한 후 후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백성들의 원망이 커져갔다. 북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정신적 수도는 여전히 예루살렘이었다. 실제로 북 이스라엘 건립 후 북쪽에 살던 제사장 대부분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거처를 옮겼다.

북 이스라엘 왕국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책은 남 유다와 화해하는 것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북 이스라엘 초대 왕 예로보암은 최악의 선택을 한다. 베텔과 단(오늘날 북한 지도에서 개성과 신의주 위치에 해당)에 산당을 만들고 여기에 주님의 상징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안치했다. 예로보암의 심정은 이해가 된다. 남 왕국에는 예루살렘이 있었다. 북쪽에도 뭔가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했을 것이다. 북쪽 왕의 입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백성들의 눈과 귀, 발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금송아지는 바알 신앙의 한 단면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이건 아니다’다.

“하느님의 계명을 모두 저버린 채, 자기들을 위하여 쇠를 녹여 부어 송아지 형상을 두 개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며, 하늘의 모든 군대를 예배하고 바알을 섬겼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 아들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고, 점괘와 마술을 이용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는 일에 자신들을 팔아 주님의 분노를 돋우었다.”(2열왕 17,16-17)

남 유다는 달랐다. 3대 왕인 아사는 이교 신전을 폐쇄하고 전통적 하느님 신앙으로 돌아섰다. 아사 왕은 철저히 이교 신앙을 배척했으며, 심지어는 이교도였던 대왕대비마저 폐위시켰다.

이와 달리 북 이스라엘은 종교 혼합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다. 북 이스라엘에선 유대인 특유의 하느님 유일신 신앙이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등 북 이스라엘의 타락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이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예언자 아모스의 입을 빌려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슬픈 노래를 들어보자.

“이스라엘 집안아, 이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를 두고 부르는 이 애가를.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구나. 제 땅에 내던져졌어도 일으켜 줄 사람 하나 없구나 … 이스라엘 집안에서 천 명이 출정하던 성읍은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출정하던 성읍은 열 명만 남으리라.”(아모 5,1-3)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평온하지 않았다. 쿠데타와 내란, 왕권 도전이 그치지 않았다(2열왕 9,1-13 참조). 조선왕조 500년 동안 27명의 왕이 등극했지만, 북 이스라엘에선 200년 동안 무려 20명이 왕위에 올랐다. 왕조도 9번이나 교체됐다. 재위기간이 1년도 채 안되는 왕이 7명에 달한다.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0년에 불과했다. 반면 350여년 동안 존속한 남 유다 왕국에서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7년이었다.

예언자들의 애끓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은 하느님 유일신 신앙으로부터 그렇게 점차 멀어져 갔다. 그 결과는….

가톨릭신문 : 2009-08-30 [제26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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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8) 아! 북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북 이스라엘
아시리아에 멸망한 북 이스라엘
강제 이주정책에 모두 흩어지고
민족의 혈통과 순수성 잃어버려

그야말로 ‘요지경’이다.

북 이스라엘의 왕 즈카르야는 통치 6개월 만에 살룸에게 살해됐다(2열왕 15,10). 살룸도 한 달 후 므나헴에게 암살됐다(2열왕 15,14). 북 이스라엘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실제로 북 이스라엘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므나헴 시대에 이미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므나헴은 아시리아 임금에게 주려고, 모든 부자에게서 은을 쉰 세켈씩 거두었다.”(2열왕 15,20)

이런 상황을 주먹으로 가슴 치며 바라본 사람이 있었다. ‘페카’는 유대 민족이 강대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프카흐야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대 강경 아시리아 정책을 표방한다.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선 남 유다와의 연대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서 남 유다의 왕 ‘아하즈’(2열왕 16,1-20 참조)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힘을 모아 아시리아에 대항하자.”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남 유다의 왕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오히려 친(親) 아시리아 정책을 편다.

북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혹을 떼려다 붙인 꼴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유다 왕국을 놔둘 경우, 아시리아와 유다로부터 동시에 협공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유다에 반(反) 아시리아 성향의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이사 7,1-9 호세 5,8-6,6).

이런 상황에서 남 유다 왕국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아시리아에 원군을 청하는 것이다.

“아시리아 임금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임금님의 종이며 아들입니다. 저를 공격하고 있는 이스라엘 임금의 손아귀에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2열왕 16,7)

아시리아로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다. 남 유다 왕국의 원군 요청은 그렇지 않아도 이스라엘 침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아시리아에게 전쟁의 명분을 준 꼴이 됐다. 아시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즉각 군사행동을 시작한다. 당시 고대 근동의 최강 군사력을 자랑하던 아시리아군은 순식간에 다마스쿠스를 장악하고, 북 이스라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다.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가 와서, 이욘, 아벨 벳 마아카, 야노아, 케데스, 하초르, 길앗, 갈릴래아와 납탈리 온 지역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다.”(2열왕 15,29)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만 간신히 살아남아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북 이스라엘 왕 ‘페카’는 이미 정치적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페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예언자 호세아와는 동명이인이다)다.

호세아도 허리 굽히기를 싫어했던 인물이다. 겉으로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척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는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 아시리아에 대항한다. 아시리아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대군을 몰고 와서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숨통이었던 사마리아마저 함락시켰다(기원전 722년). 그리고 북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아시리아 임금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서 하라와 고잔 강 가 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이주시켰다.”(2열왕 17,6)

아시리아는 원래 다른 민족들을 정복한 후 ‘이주’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초기 상황을 보면, 유대인들과의 전투에서 이긴 후에도 친화 정책을 우선시했다. 하지만 다른 민족과 달리 유대인들은 쉽게 아시리아에 동화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봉기하고 반항했다. 제국을 유지해야 했던 아시리아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분명 다루기 힘든, 골칫덩어리 민족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시리아는 ‘강제 이주’라는 극약 처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이 떠난 도시에는 아라비아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아시리아 임금은 바빌론과 쿠타와 아와와 하맛과 스파르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들에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성읍들에서 살았다.”(2열왕 17,24)

유대 역사상 최초의 엄청나고도 거대한 비극이 발생했다. 유대민족의 북쪽 10지파는 이제 역사와 신화 속으로 사라졌다. 언어와 신앙도 모두 사라졌다. 극적으로 사마리아에 남을 수 있었던 행운을 가진 유대인들도 이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결혼하는 동안 혈통을 상실했다. 오늘날 유대인이라고 할 때, 소위 순수 혈통을 유지하는 것은 남 유다 왕국의 후손들뿐이다.

남 유다 왕국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 북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의 인식 속에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선민이 아니었다. 사마리아인들과는 더 이상 약속받은 땅을 공유할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요한 4,1-42 참조).

북 이스라엘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유대인들의 나라는 남쪽 유다 왕국만 남았다.

가톨릭신문 2009-09-06 [제26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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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29) 순망치한(脣亡齒寒)

유일신 신앙, 아시리아를 막아내다 / 남 유다로 뻗친 아시리아의 야욕에 강경책 펴며 개혁 단행한 히즈키야 기적처럼 예루살렘을 위기서 지켜

영웅들이 패권을 다투던 춘추시대 말엽(기원전 655년)의 일이다. 당시 5대 강대국 중 하나였던 진(晉)나라가 우나라 임금에게 사신을 보냈다. “괵나라를 공격하려 하니 길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달라.” 우나라 임금이 어전 회의를 열었다. 한 신하가 임금에게 충언한다. “길을 빌려 주면 안 됩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립니다(순망치한). 괵나라와 우나라는 입술과 이의 관계입니다. 진나라가 괵나라를 멸망시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우리나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우나라 임금은 신하의 말을 듣지 않고 진나라에게 길을 빌려 준다. 결국 진나라는 쉽게 괵나라를 정벌했으며, 돌아가는 길에 우나라까지 함께 멸망시켰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진나라가 괵나라와 우나라를 멸망시키던 그 시기, 가나안 땅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후, 홀로 남게 된 남 유다 왕국이 바람 앞 등불의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 성벽 위에 선 히즈키야 왕은 밀려오는 아시리아 대군을 바라보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죽을 각오로 싸울 작정이었다. 그 순간 히즈키야는 아버지 아하즈를 떠올려 본다.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는 참으로 못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북 이스라엘이 함께 손잡고 아시리아에 대항하자고 했을 때, “NO”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몰락을 팔짱끼고 지켜본 사람이다. 심지어는 아시리아에 예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 “저희 나라를 보호해 주십시오.”(2열왕 16,7 참조)라고 애걸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는 곧 남 유다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 유다는 그야말로 입술 없는 이 신세가 됐다. 다급해진 아버지는 아시리아 왕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예루살렘 성안에 아시리아 신들을 위한 제단을 세우기까지 했다(2열왕 16 참조).

히즈키야가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은 때 쯤 유다 왕국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영토는 줄어들었고, 경제는 붕괴됐으며, 하느님 신앙은 사라져가고, 민심은 흉흉했다. 죽어가는 왕국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개혁을 선언했다. 개혁의 골자는 두 가지다. 아시리아로부터의 독립과 유일신 하느님 신앙으로의 복귀가 그것이다. 히즈키야는 아시리아 임금에게 대항하여 그를 섬기지 않았다(2열왕 18,7). 성전을 정화하고(2역대 29,3-36), 파스카 축제를 열었으며(2역대 30장), 종교개혁을 단행했다(2역대 31장). 예루살렘에 있던 아시리아 신들을 위한 제단이 파괴됐고, 정기적으로 아시리아에 바쳐야 했던 공물 상납도 중단됐다. 아시리아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에 대비해 성 밖 기혼샘에서 성 내부로 물을 끌어들이는 지하수로(525m)도 만들었다. 이렇게 생겨난 연못이 유명한 실로암 연못이다.

자주국방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허물어진 성벽들을 모두 쌓고 탑들을 높였으며, 성 밖에 또 다른 성벽을 쌓았다. 그는 다윗 성 안에 있는 밀로 궁을 보수하고 표창과 작은 방패도 넉넉하게 만들었다.”(2역대 32,5)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점진적으로가 아니라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그 일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2역대 29,36) 히즈키야의 이러한 급진적 개혁은 제사장 계급에서부터 하층 민중들에 이르기까지 큰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2역대 31,21)

하지만 유다 왕국의 개혁 움직임을 간과할 아시리아가 아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쳐들어왔다.”(2역대 32,1)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 사르곤 2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시리아 왕 산헤립은 뛰어난 전략과 용병술로 고대 근동 지방을 초토화시킨다. 히즈키야가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남 유다 왕국의 수많은 성읍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동맹을 약속한 바빌론도 이미 무너졌고, 이집트는 국경선 방어조차 힘겨워하는 상황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아시리아 대군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밀려들고 있다. 유다 왕국을 도와줄 지원군은 없다. 절체절명의 위기다. 히즈키야 왕이 백성과 군사들 앞에 서서 외친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아시리아 임금과 그가 거느린 모든 무리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당황하지도 마라. 그보다 더 크신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2역대 32,7)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아시리아 병사들이 저절로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이 모두 죽어 주검뿐이었다.”(1열왕 19,35 2역대 32,21)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집트, 바빌론도 벌벌 떨게 했던 아시리아가 유다 왕국에게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 마이클 비디스 등 의학자들은 「질병의 역사」에서 “아시리아 진영에 페스트가 유행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페스트는 고대 사회에서 가장 전염속도가 빠르고 치사율이 높았던 전염병 가운데 하나였다.

어쨌든 예루살렘은 살아남았다. 이사야의 예언은 정확했다. “만군의 주님이 시온 산과 그 언덕에 내려와 싸워 주리라. 둥지 위를 맴도는 새들처럼 만군의 주님이 예루살렘을 지켜 주리라. 지키고 건져 주며 감싸고 구원해 주리라.”(이사 31,4-5)

유다 왕국은 일단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가톨릭신문 2009-09-13 [제2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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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30) 유대인들, 나라를 잃다

왕국의 멸망에 민족은 절망하고 …‘동네 북’ 신세로 전락한 유다 왕국 / 바빌론의 침공에 철저히 파괴 당해 모든 것 잃어버리고 포로로 끌려가

구약성경 열왕기 혹은 역대기, 예언서들을 읽다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수없이 많은 왕들의 이름 때문이다. 아하즈, 히즈키야, 므나쎄, 아몬…. 솔로몬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잇달아 등장하는 왕들의 이름은 발음하는 것조차 어렵다. 게다가 당시 고대 근동의 역사적 사전 지식이 없으면 성경의 맥락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관련 참고 서적들도 왜 그렇게 읽기 어려운지….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그냥 성경을 덮어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남 유다 왕국 몰락 및 바빌론 유배와 관련한 내용은 구약성경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다. 큰 틀을 중심으로 그 맥락을 잡아 보자. 왕들의 이름을 모두 외울 필요는 없다. 4~5명만 알고 있어도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히즈키야 왕(2열왕 18-19장)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심장이 2개였던 왕이 아니었나 싶다. 간이 부어도 심하게 부었던 왕이다. 고양이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아시리아에 정면으로 대적, 승리를 이끌어 냈다(1열왕 19,35 2역대 32,21). 이후 아시리아는 내부 혼란 및 바빌론 등장 등 악재가 겹치면서 쇠퇴한다. 유대인들은 아시리아의 약화 이후 비로소 ‘음메~ 기죽어’에서 ‘음메~ 기살어’의 시기를 맞게 된다.

요시아 왕(2열왕 22-23장)이 그랬다. 대대적인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점쟁이와 영매와 수호신들과 우상들과 온갖 혐오스러운 것들을 치워 버렸다.”(2열왕 23,24) 수많은 이방 신전을 폐쇄했으며, 우상 숭배 사제들을 추방했다. 잡신들을 위한 모든 전례들이 중단됐다. 남창들의 집들을 허물었고,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유다 왕국에도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이집트가 다시 유다 왕국을 넘보기 시작했다. 호랑이 굴(아시리아)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왔는데, 여우(이집트)를 만난 격이다. 요시아 왕이 침공한 이집트에 맞서기 위해 전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요시아는 정치 종교적 차원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전투적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아는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과 맞선 므기또 전투에서 사망하고 만다(2열왕 23,29). 이로써 남 유다 왕국에 모처럼 일던 희망의 불씨는 제대로 피워 보지도 못하고 한순간에 꺼지고 말았다.

유다 왕국을 무릎 꿇게 만든 이집트는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킴을 왕으로 세운다. 이제 유다 왕국은 이집트의 속국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때 이집트로 볼 때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제 막 먹이를 사냥해서 맛있게 먹으려하고 하는 그 순간, 사자(바빌론)가 나타나서 먹이를 내놓으라고 한다. 바빌론이 아시리아를 제압하는 등 그 세력이 급부상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래저래 동네 북 신세다. 이집트에 보낼 조공을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며 뻘뻘 땀 흘리던 여호야킴 왕은 이제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조공을 보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여우 이집트는 사자 바빌론의 기세에 눌려, 자기네 땅에서 꿈쩍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기저기 눈치 보기 바빴던 불쌍한 왕 여호야킴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킨이 임금이 됐다.

그런데 이 임금이 사고를 친다. 바빌론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자존심이 강했거나, 세상 물정을 몰랐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무리였다. 먼저 국가의 내실을 다지고, 국제 정세를 면밀히 살폈어야 했다. 반역의 기미를 눈치챈 바빌론은 여호야킨 왕 등극 3개월 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 점령한다.

여호야킨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치드키야(1열왕 24,8-17,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다. 이 왕이 또다시 바빌론에 항거한다. ‘살기 위한’‘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유대인들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바빌론의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소멸시킨다. 분노한 바빌론은 “더 이상 유대인들을 봐줘선 안 되겠다”며 다시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철저히 예루살렘을 파괴한다. 왕은 인질로 끌려갔으며 성전과 예루살렘은 페허가 됐다(2열왕 24,20-25,7). 기원전 586년, 400년을 이어오던 유대인들의 나라는 이렇게 무너졌다.

대부분 신앙인들은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가슴이 아련해진다.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됐다. 남 유다 왕국 멸망은 그동안 쌓아올린 유대인들의 모든 것이 사라짐을 의미했다. 선민의식, 하느님과의 계약, 율법, 예루살렘 성전, 땅에 대한 약속…. 무엇보다도 희망이 사라졌다. 이후 유대인들은 2500년 가까이 자신들의 나라를 갖지 못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이 있다. 유다 왕국이 무너진 이 시기를 즈음해, 인류가 동시에 엄청난 영적·정신적 진보를 이뤄낸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에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중국에서 공자가, 그리스에서는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가 활동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유대인들도 나라를 잃은 후 바빌론 유배시기를 거치면서 엄청난 영적 도약을 이뤄낸다. 유대인들의 몰락이 역설적으로 인류가 새로운 빛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동, 중국, 인도, 그리스를 오가며 인류에게 영적·정신적 빛을 제시하고 계시하셨다. 기원전 6세기, 하느님은 참으로 바쁘셨다는 생각이 든다

가톨릭신문 2009-09-20 [제2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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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31)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절망 속에서 더욱 깊어진 유일신 신앙 / 민족의 시련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스라엘 재건의 희망을 싹 틔워

가을이다. 푸를 ‘청’(靑)보다는 짙푸르다는 의미가 강한 ‘창’(蒼)으로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하늘이 높고 맑다. 하지만 기원전 586년 가나안의 가을 하늘은 아마도 흑빛이었을 것이다. 비록 하늘이 높고 맑았다고 해도 그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늘이 암흑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재앙이었다.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폐허가 됐다. 약탈과 방화 속에서 여자들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고,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함께 울었다. 예루살렘의 모든 보물은 약탈당했으며, 반항하는 모든 사람은 모두 학살됐다. 주님의 집과 왕궁을 비롯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큰 집들이 불타 없어졌다. 예루살렘 성벽도 허물어졌다. 예루살렘은 죽음의 도시가 됐다(2열왕 25,8-10 참조).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 중 대부분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2열왕 25,21). 역사상 이렇게 철저히 한 민족의 수도가 유린당하고 민족 전체가 이산(離散)되는 일은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 유럽 혼란기를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다.

바빌론을 욕할 일이 아니다. 바빌론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대민족은 유난했다. 다르게 대접할 필요가 있었다. 보통 한 민족이 정복당하면 대개 정복 문화의 높은 문명에 안주하고 흡수된다. 다른 민족들은 생명과 안보만 책임져 준다면 언제든지 바빌론에 협력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달랐다. 수없이 회유하고 달래보았지만 유대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정신 차렸겠지’라고 생각할 때마다 유대인들은 다시 일어나 저항했다. 이는 바빌론 유배가 한번이 아닌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이유이기도 하다. 바빌론으로선 어쩔 수 없이 유대인들을 흩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민족을 한곳에 살게 놔뒀다간 언제 또다시 골머리를 앓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비탄에 잠겼다(시편 137,1-4 하까 2,3 즈카 1,12). 바빌론의 신(神) 마르두크 신전은 웅장했다. 예루살렘에서 보았던 하느님의 집은 마르두크 신전에 비하면 초가집에 불과했다. 유대인들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예루살렘의 하느님은 바빌론의 신보다 힘이 약한 것일까. 왜 하느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신 것일까. 당신의 신전이 무너지는 것을 왜 지켜만 본 것일까. 하느님은 과연 신들 중의 최고의 신인가. 왜 우리를 버린 것일까. 바빌론 민족이 선택받은 것인가 우리 민족이 선택받은 것인가. 우리의 하느님은 여전히 건재하신가. 잃어버린 하느님은 어디에서 다시 찾아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 속에서 놀라운 영적 비약이 이뤄진다. 바빌론 유배 이전까지 유대인들이 생각해온 하느님은 유일하신 하느님이기보다는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세계에는 수많은 신이 있는데 그 신들 중 하느님이 으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즈음하여 하느님 이 외의 모든 다른 신들이 부정된다.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예언도 이 시기에 집중된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인식이 비로소 자리하게 된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했으며, 역사를 완성한다. 이스라엘은 그의 계획의 일부이며 그 계획은 바빌론 유배라는 고통 속에서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아시리아와 바빌론이 침공한 것도 모두 하느님의 뜻이다. 바빌론으로 끌려온 것도, 바빌론 땅에서 우리가 울부짖는 것도 모두 하느님 섭리의 과정이다.

유대인들은 이마를 ‘탁’치며 “이제 알았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광야에서 터득한 투박한 하느님 신앙이, 세련된 세계적 지평을 지닌 고등 신앙으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유대인의 성찰을 통해 비로소 유일신 하느님 신앙이 전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회당’(시나고그)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뿌리내린다. 포로로 끌려온 이들은 소공동체 단위로 정기적으로 특정한 장소(회당)에 모여 율법을 듣고 배웠다. 이 회당은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의 종교 문화적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회당을 허용했다는 것, 유대인들의 소공동체 모임을 허락했다는 것 자체에서 우리는 바빌론의 관용을 읽을 수 있다. 바빌론은 아시리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잔인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배 중에서도 자유롭게 모임을 갖고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바빌론 왕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여호야킨도 후대했다(2열왕 25,27-30 참조).

더 나아가 바빌론은 예루살렘 성도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식민정책을 실시하지 않았다. 아시리아는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후 그 수도인 사마리아에 다른 민족을 이주시켰지만, 바빌론은 예루살렘에 다른 민족을 이주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예루살렘에는 이방인들의 신전이 난립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희망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좌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그런 민족이 아니었다. 재앙은 그 재앙을 맞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재앙 앞에서 좌절하고 주저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에게 재앙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빌론 유배는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우는 시간이었다.

흰 수염이 인상적이다. 머리에 두른 푸른색 천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색깔도 하얗다. 연한 붉은색의 옷에선 강한 열정과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 열정을 감추려는 듯 어깨에는 은근한 회색빛 천을 둘렀다(미켈란젤로 천지창조에 묘사된 모습). 육중한 모습의 제사장 에제키엘이 지금 팔짱 끼고 바빌론의 이방인 신전을 올려 보고 있다. 그가 중얼거린다. 목소리가 들릴 듯 말듯하다. “하느님의 집을 다시 지어야 하는데….”

가톨릭신문 2009-10-04 [제26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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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32) 유대교의 정착과 발전

유대교, 제도적·종교적 기틀 갖추다. / 모든 것 잃고 남은 것은 오직 신앙 뿐 / 역경속에도 믿음 체계화·규격화하고 예언자들로부터 희망의 메시지 받아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에는 빚 20원에 하와이 역부로 팔려간 방영근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욕설과 채찍질을 당하며 노예 같은 생활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낯선 하와이의 바다를 보며 한국의 바다를 그리워한다.

“참 바닷물도 징허게 넌 푸르고 맑네.”(10권 16장)

한국 바다보다 더 아름다워 오히려 낯선, 그 바닷가에서 방영근은 매일 고국으로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하와이 이민 1세대의 남다른 귀향의식을 읽을 수 있다.

바빌론으로 강제로 끌려간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나안 땅에서는 하느님 말씀을 거스르고, 때로는 우상도 숭배했던 유대인들이 유배지 바빌론에선 놀라울 정도로 강한 신앙심을 드러낸다. 50년이라는 짧은 포로기 동안 유대인은 신앙적 차원에서 놀라운 창조적 힘을 발휘한다.

“우린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유대 민족이야. 민족의 뿌리를 잃으면 안돼.”라는 집단 위기 의식이 발동한 것으로 보여진다. 사람은 위기가 닥치면 어딘가에 매달리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이 시기에는 민족을 이끌 나라도, 다윗과 같은 지도자도, 민족을 대표해 하느님께 제사드릴 제사장도 없었다. 그동안 백성들의 여론을 모으는 등 구심점이 되어 오던 12지파도 모두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이제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었다. 믿을 것은 오직 신앙이었다. 유대인은 과거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하느님께 ‘올인’(다걸기) 한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유대교로 부를 수 있는 제도적 종교적 틀이 이 시기에 형성된다. 일부 학자들이 유대교의 실질적 탄생과 형성을 아브라함 시대가 아닌 바빌론 유배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대를 이어 전수되는 유대인 종교 교육의 형태가 최초로 나타난다. 할례는 가나안 땅에 있었을 때보다 더 엄격히 시행되었고, 안식일 개념도 강화되었다. 또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정기적인 축제를 통해 매 절기들을 엄격하게 기념했다. 유대민족의 확립을 기념하는 과월절(파스카, 유월절)도 이 시기부터 정확히 지켜졌다. 정결법 식사법 등 신앙의 규칙들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율법들이 낭독되고 암기되었다.

신명기의 다음과 같은 명령이 제대로 모습을 갖춘 것도 아마 이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신명 6,6-9) 유대인들은 이 신명기 말씀을 지금까지도 실천하고 있다.

법치주의는 국가가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국가를 잃은 유대인들이 점점 종교적 법치주의자들이 되어 갔다.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하느님 유일신 신앙은 하나의 종교(유대교)로 정착, 발전, 정제되어 간다.

여기서 하나의 도식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유대인들의 신앙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 4개를 꼽으라면 ▲아브라함 ▲모세 ▲바빌론 유배기 ▲제 2성전 파괴 이후를 들 수 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대에는 유일신 하느님 종교가 탄생했고, 뒤의 두 시대를 통해서는 유대교로의 발전과 정제가 이뤄졌다. 문제는 이 중요한 네 시기에 유대인들은 국가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가를 운영했을 때는 오히려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유대민족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급속히 부패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유대 민족의 최대 부흥기였던 솔로몬 시대에도 나타났다.

유대민족이 하느님 신앙을 발전시키는 시점은 민족의 발전기가 아닌, 역경기였다. 신비스럽게도 유대 민족은 역경에 처할 때마다 단호하게 스스로의 하느님 유일 신앙을 고수했으며 유대교 특유의 독특한 체제를 발전시켰다.

바빌론 유배 이전 유대인들의 단순한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유배를 거치면서 체계화되고 규격화된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유대인들은 예언자들로부터 희망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6,26-28)

하느님은 이제 죽은 자들의 마른 뼈가 다시 이어져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인 뒤 생기가 들어가 되살아나는 놀라운 섭리를 일으키실 것이다(에제 37,1-14 참조).

그 희망은 오래 지나지 않아 성취된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군이 바빌론을 무혈점령한다. 이제 주인이 바뀌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새로운 제국 페르시아가 등장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이 세상이 깜짝 놀랄 발표를 한다.

가톨릭신문 2009-10-18 [제2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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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33) 귀향반세기 만의 귀향

그러나 고향엔 …키루스 포고령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만 다윗왕국 재건은 갈등·분열로 어려움 겪어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키루스 대왕, 혹은 고레스)는 바빌론 점령 1년 뒤, 중대 선언을 담은 포고령을 낸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여기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주요 내용을 모두 소개하기로 한다. 유대인 역사에서 이처럼 감격적인 순간은 드물기 때문이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에즈 1, 2-4)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드디어 유대인들의 귀향이 가능해졌다. 당시 키루스 대왕의 이 해방령은 대단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엄청난 뉴스였다. 키루스의 이 해방령은 19세기 바빌론 궁전 유적지에서 발굴돼,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키루스 대왕 비문에도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이제 유대인들은 국가 재건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이어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귀향 작전이 전개됐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귀향을 ‘작전’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귀향이 산발적이고 개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키루스는 다윗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세스바차르(에즈 5,14)를 유다지역 총독에 임명, 기원전 538년 귀환 작전을 지휘토록 한다. 이 때 귀향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바빌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배 2세대였다. 유배 1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아버지가 살던 땅으로 귀향에 나선 이들은 바빌론의 생활 기반을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에 가면 무엇이 기다릴지 아무도 몰랐다. 그저 새 공동체 실현과 새 땅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바빌론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서 있는 예루살렘이었다. 성벽조차 제대로 없는 예루살렘은 온전한 집 한 채 남아있지 않은 폐허 그대로였다. 과거 솔로몬의 영화를 드러내던 남 유다 왕국의 땅은 이제 버려진 땅이었다. 북 이스라엘의 도읍 사마리아도 더 이상 유대인들의 땅이 아니었다. 이방인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들은 지역 종교와 혼합된 하느님 제의를 바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첫 귀향자들은 실망하지 않고 본격적인 성전 재건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데서 발생한다. 성전 재건을 위해 제공하겠다던 키루스 왕의 재건 비용이 지속적으로 조달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마리아인들의 갈등도 격화됐다. 심지어 가난하고 무식했다는 이유로 바빌론 유배에서 제외돼 현지에 남았던 토착 유대인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바빌론에 끌려가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갑자기 바빌론에서 밀려오는 유대인들의 물결이 달갑지 않았다.

역사는 유대인들을 떠난 자, 남겨진 자, 혼혈이 된 자로 나눠 놓았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살아온 과정이 달랐으며 현재의 처지가 달랐다. 서로를 이해할 수도,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갈등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에는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첫 귀향자들의 성전 재건 노력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 대대적인 귀환은 첫 번째 귀향자들이 출발한지 8년 뒤인 기원전 530년 이뤄진다. 지휘관은 신임 유대 총독 즈루빠벨이었다. 성경은 당시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의 인도로 귀향한 유배자들을 정확히 4만236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에즈 2,64). 여기에 남녀 종이 7337명이었고 이동과 수송에 사용한 말과 노새, 낙타, 나귀가 각각 736마리와 245마리, 435마리, 6720마리였다.

대규모 이주였던 만큼 성전 재건의 열기도 그만큼 높았다. 그 결과 작은 성전 하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역사는 이 성전을 두고 재건된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제2성전이라고 부르는 예루살렘의 성전 건립은 70여 년 후에 이뤄진다). 그 규모와 기능상 성전이라고 부르기에는 미흡했기 때문이다. 당시 초라한 성전의 모습은 성경에도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마나 하지 않느냐?”(하까 2,2). 대성전을 건립할 자리에 초라한 단칸 목조 공소 건물을 세운 격이다.

게다가 이번 귀향자들도 배타성이 강했다. 가나안 땅에 남아있던 유대인을 비롯해 다른 모든 이민족들과 융화되지 못했다. 그들은 성전 건축에 토착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배제시킨다(에즈 4,3 참조).

예루살렘은 아직도 폐허 그대로였다. 민족간 지역간 갈등으로 정세는 항상 불안했다. 다윗 왕국 재건의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대 공동체의 분열 조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첫 귀향 후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제2의 다윗 왕국을 꿈꾸던 유대 귀향 공동체는 점차 활기를 잃어 갔다. 하느님 신앙도 점차 시들해져갔다.

하지만 큰 무리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을 향한 산발적 귀향의 물결은 그치지 않았다. 스스로를 정화된 남은 자라고 여기는 이들의 용감한 여행이 계속됐다. 바빌론에서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희망을 가슴에 품은 많은 이들이 미지의 땅 예루살렘으로 밀려들었다.
염원이 쌓이고 쌓이면 결실을 맺기 마련이다. 성전 건립의 염원도 서서히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 2009-10-25 [제2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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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33) 귀향

반세기 만의 귀향, 그러나 고향엔 …키루스 포고령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만 다윗왕국 재건은 갈등·분열로 어려움 겪어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키루스 대왕, 혹은 고레스)는 바빌론 점령 1년 뒤, 중대 선언을 담은 포고령을 낸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여기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주요 내용을 모두 소개하기로 한다. 유대인 역사에서 이처럼 감격적인 순간은 드물기 때문이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에즈 1, 2-4)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드디어 유대인들의 귀향이 가능해졌다. 당시 키루스 대왕의 이 해방령은 대단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엄청난 뉴스였다. 키루스의 이 해방령은 19세기 바빌론 궁전 유적지에서 발굴돼,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키루스 대왕 비문에도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이제 유대인들은 국가 재건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이어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귀향 작전이 전개됐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귀향을 ‘작전’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귀향이 산발적이고 개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키루스는 다윗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세스바차르(에즈 5,14)를 유다지역 총독에 임명, 기원전 538년 귀환 작전을 지휘토록 한다. 이 때 귀향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바빌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배 2세대였다. 유배 1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아버지가 살던 땅으로 귀향에 나선 이들은 바빌론의 생활 기반을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에 가면 무엇이 기다릴지 아무도 몰랐다. 그저 새 공동체 실현과 새 땅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바빌론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서 있는 예루살렘이었다. 성벽조차 제대로 없는 예루살렘은 온전한 집 한 채 남아있지 않은 폐허 그대로였다. 과거 솔로몬의 영화를 드러내던 남 유다 왕국의 땅은 이제 버려진 땅이었다. 북 이스라엘의 도읍 사마리아도 더 이상 유대인들의 땅이 아니었다. 이방인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들은 지역 종교와 혼합된 하느님 제의를 바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첫 귀향자들은 실망하지 않고 본격적인 성전 재건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데서 발생한다. 성전 재건을 위해 제공하겠다던 키루스 왕의 재건 비용이 지속적으로 조달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마리아인들의 갈등도 격화됐다. 심지어 가난하고 무식했다는 이유로 바빌론 유배에서 제외돼 현지에 남았던 토착 유대인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바빌론에 끌려가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갑자기 바빌론에서 밀려오는 유대인들의 물결이 달갑지 않았다.

역사는 유대인들을 떠난 자, 남겨진 자, 혼혈이 된 자로 나눠 놓았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살아온 과정이 달랐으며 현재의 처지가 달랐다. 서로를 이해할 수도,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갈등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에는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첫 귀향자들의 성전 재건 노력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 대대적인 귀환은 첫 번째 귀향자들이 출발한지 8년 뒤인 기원전 530년 이뤄진다. 지휘관은 신임 유대 총독 즈루빠벨이었다. 성경은 당시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의 인도로 귀향한 유배자들을 정확히 4만236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에즈 2,64). 여기에 남녀 종이 7337명이었고 이동과 수송에 사용한 말과 노새, 낙타, 나귀가 각각 736마리와 245마리, 435마리, 6720마리였다.

대규모 이주였던 만큼 성전 재건의 열기도 그만큼 높았다. 그 결과 작은 성전 하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역사는 이 성전을 두고 재건된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제2성전이라고 부르는 예루살렘의 성전 건립은 70여 년 후에 이뤄진다). 그 규모와 기능상 성전이라고 부르기에는 미흡했기 때문이다. 당시 초라한 성전의 모습은 성경에도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마나 하지 않느냐?”(하까 2,2). 대성전을 건립할 자리에 초라한 단칸 목조 공소 건물을 세운 격이다.

게다가 이번 귀향자들도 배타성이 강했다. 가나안 땅에 남아있던 유대인을 비롯해 다른 모든 이민족들과 융화되지 못했다. 그들은 성전 건축에 토착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배제시킨다(에즈 4,3 참조).

예루살렘은 아직도 폐허 그대로였다. 민족간 지역간 갈등으로 정세는 항상 불안했다. 다윗 왕국 재건의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대 공동체의 분열 조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첫 귀향 후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제2의 다윗 왕국을 꿈꾸던 유대 귀향 공동체는 점차 활기를 잃어 갔다. 하느님 신앙도 점차 시들해져갔다.

하지만 큰 무리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을 향한 산발적 귀향의 물결은 그치지 않았다. 스스로를 정화된 남은 자라고 여기는 이들의 용감한 여행이 계속됐다. 바빌론에서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희망을 가슴에 품은 많은 이들이 미지의 땅 예루살렘으로 밀려들었다. 염원이 쌓이고 쌓이면 결실을 맺기 마련이다. 성전 건립의 염원도 서서히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다.

▶ 가톨릭신문 발행일 : 2009-10-25 [제2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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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34) 느헤미야

성벽 재건 공사 주도한 느헤미야 공동체의 결집과 안정 이루어내

부푼 기대를 안고 다시 찾아온 예루살렘은 꿈속에서 그리던 그런 낙원이 아니었다. 돌아온 자들과 밥그릇 나눌 생각이 없었던 토착 유대인들의 박해, 이민족들의 침략, 사마리아인들의 냉대 등으로 인해 많은 귀향 유대인들이 고통 속에 지내야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바빌론에 사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 결국 바빌론으로의 유턴 현상이 일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빌론으로 다시 돌아간 인물 중에 ‘하나니’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니는 친척 느헤미야를 찾아가 예루살렘의 처참한 상황을 전한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불에 탔습니다.”(느헤 1,3)

느헤미야는 주저앉아 통곡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서 모든 고통을 종식시킬 것을 다짐한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을 따르는 시종이었다(느헤 1,11 참조). 시종이라고 해서 단순한 종의 신분으로 생각해선 곤란하다.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왕의 독살이 빈번히 일어났다. 당연히 왕의 술을 담당한 시종은 왕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 중의 측근이어야 했다. 페르시아 왕에게 있어서 유대인 느헤미야는 없어서는 안되는 소위 왼팔이었던 셈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갈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느헤미야가 왕 앞에 가서 아뢴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리고 이 종을 곱게 보아 주신다면, 저를 유다로,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느헤 2,5)

왕은 느헤미야에게 유대 총독의 지위를 내리고, 예루살렘행을 허락했다. 왕은 주판알을 튕겼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혼란은 페르시아 왕실로서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유대인들의 귀향을 통해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려 했지만, 정작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선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지닌 인물이 필요했다. 그 적임자가 느헤미야였다. 특히 느헤미야의 청렴함은 왕의 결정을 더욱 쉽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12년간 급여를 전혀 받지 않았으며, 자신의 종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직접 투입할 정도로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느헤 5,14-19 참조).

호위 병사들까지 내어준 왕의 배려로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여장을 풀 여유도 없이 곧바로 성벽 재건 사업에 뛰어든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읽을 수 있다. 도시가 안정을 찾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치안 확립이 중요하다. 백성들은 정권이 가족의 안전을 지켜 주고 재물을 보호해 준다고 믿을 때만 충성을 바친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안정을 찾기 위해선 유대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 보호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사업은 곧 암초를 만났다. 성벽 재건은 유대인들의 무장을 의미했다. 성벽이 재건될 경우 유대인 정착촌을 대상으로 하는 약탈과 방화 및 노예 사냥은 어려워진다. 결국 아라비아인들과 암몬인들을 비롯해 예루살렘 및 인근 지역에 정착해 살고 있던 사람들이 성전복구 사업을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나섰다(느헤 3,34-35 참조).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을 둘러보는 작업도 밤에 비밀리에 행해야 했다(느헤 2,11-16 참조). 성벽 재건 작업도 무장을 한 상태에서 진행할 정도였다. 짐을 져서 나르는 이들은,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무기를 잡았다. 성벽을 쌓는 이들은 저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성벽을 쌓았다. 비상사태 발생을 신속히 알리기 위해 느헤미야의 옆에는 늘 나팔수가 동행했다.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의 어려움을 이렇게 고백한다.

“내 형제들도, 내 수하 젊은이들도 나를 따르는 경비병들도, (성벽 공사기간동안) 그 누구도 옷을 벗거나 오른손에서 무기를 놓는 일이 없었다.”(느헤 4,17) 그렇게 작업은 매일 “동이 틀 때부터 별이 나올 때까지”(느헤 4,15) 진행됐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52일 만에 드디어 성벽이 완성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민족 멸망의 조짐은 대형 토목 건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가 그랬고, 만리장성을 쌓은 진나라가 그랬다.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즈음해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개혁의 압력을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이후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국력 쇠퇴를 경험했고, 결국 나라까지 잃었다.

하지만 느헤미야 주도로 이뤄진 기원전 440년경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는 완전히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쇠퇴가 아니라 융성이다. 성벽 재건 공사는 그 자체로 유대인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유대 민족의 도약을 가져오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페르시아 궁정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하늘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법의 학자, 에즈라 사제’(에즈 7,12)에 의해 율법이 공포됐으며(느헤 8,1-12 참조), 초막절 등 각종 민족 절기가 지켜지기 시작했고(느헤 8,13-16 참조), 종교 제의도 틀을 갖추었다(느헤 12,44-47 참조). 다양한 개혁을 통해 공동체의 안정도 이뤄졌다(느헤 13,4-31 참조).

귀향 유대인들은 비로소 튼튼한 성벽 안에서 다리 뻗고, 편히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100~200여 년의 공간은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빈 공간으로 남는다. 여기서 ‘빈 공간’이라고 표현한 것은 큰 재난과 재앙이 없었다는 의미다.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허락했으며, 예루살렘 재건도 적극 지원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향인 가나안 땅을 비롯해 페르시아 제국 어느 곳에서든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의 친구였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 변화의 물결은 페르시아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알렉산더 대왕(BC 356~BC 323)의 4~5만 정예 병력이 가나안 땅 입구인 ‘이수스’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15만 대군을 격파한 것이 기원전 333년이다.

▶ 가톨릭신문 : 2009-11-01 [제2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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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35) 뒤바뀐 세계 판도

안정도 잠시 뿐, 페르시아 멸망시킨 새로운 패권자 마케도니아의 등장에 유대 민족은 다시 혼란에 빠져들어

미국이 멸망했다. 중국이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권자로 우뚝섰다. 든든한 울타리였던 미국은 이제 사라졌다. 세계의 경제, 정치, 문화는 중국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그동안 미국에 의지하던 이스라엘은 당황해 한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상상? 아니다. 기원전 300년경, 유대인들이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페르시아는 오늘날 미국과 같은 존재였다. 페르시아의 종교관용 정책 아래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다시 세웠으며, 율법 공동체를 재탄생시킬 수 있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부(富)를 쌓을 수 있었으며 능력있는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중앙 정계까지 진출했다. 자연히 유대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높았다. 유대인들은 아마도 “이대로 쭈~욱”을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던 페르시아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에 의해 무너진다. 유대인들은 오늘날 미국이 멸망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그러한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 성경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를 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치르고 요새들을 점령하고 세상의 임금들을 죽였다.”(1마카 1,1-2)

여기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패권 다툼에 대해 잠깐 짚어보고 넘어가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불과 300~400년 전, 당시 세계정세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기원전 500년경 근동의 최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페르시아는 세계 통일의 야망을 불태운다. 소아시아 지방(현재의 터키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페르시아는 곧바로 그리스 본토 침공을 시도했다. 첫 번째 침공(기원전 492년)에서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페르시아는 2년 후 다시 1만5000여 명의 대군을 동원, 그리스 공략에 나선다. 이때 페르시아는 상륙작전을 선택했다. 그 상륙지점이 유명한 ‘마라톤’이다. 페르시아는 이 전투에서 밀티아데스가 지휘하는 아테네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군 전사자는 6400명에 이르렀으나 그리스군은 192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 마라톤 전투는 전쟁사에서, 소수의 병력으로도 전술이 뛰어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 최초의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한 병사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약 40km를 달린 사실은 유명하다. 오늘날 마라톤 대회도 여기서 유래한다.

페르시아는 마라톤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정복을 단념하지 않았다. 그래서 10년 후 다시 그리스를 침공한다. 지난번 마라톤 상륙 작전 실패를 경험한 탓인지, 이번에는 육로를 통해 그리스로 진격했다. 처음은 화려했다. 스파르타군을 무찌르는 등 파죽지세로 그리스 본토의 도시들을 점령했지만 결국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군에게 무릎을 꿇는다. 이 전쟁이 오늘날 전세계 해군사관학교 교과목에 빠지지 않는 ‘살라미스 해전’이다. 이후 페르시아는 다시는 그리스를 넘보지 못했다.

전쟁에서 이긴 그리스도 평온하지 못했다. 그리스 전체가 아테네 동맹과 스파르타 동맹으로 갈라지는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약 30여 년간(기원전 431~404년) 이어진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의 급격한 쇠퇴를 가져왔다. 힘 빠진 그리스는 이후 북쪽에서 침공한 마케도니아에 의해 어이없이 무너지게 된다. 그리스 침공이라는 대업을 달성한 마케도니아 왕이 필리포스 2세이며, 그의 아들이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다.

알렉산더에게 그리스는 좁았다. 알렉산더는 ‘세계의 왕’을 꿈꿨고 결국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와 격돌하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4만~5만 정예 병력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는 입구인 ‘이수스’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15만 대군을 대파한 것이 기원전 333년이다. 이후 가나안 땅과 이집트가 모두 마케도니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으며, 뒤이어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알렉산더 수중에 떨어졌다. 동쪽으로 패주하던 페르시아의 왕은 알렉산더 군대에 쫓기다 결국에는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멸망했다.

유대인들에게 알렉산더 대왕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지금까지 동양과 서양은 따로따로 살았다. 하지만 알렉산더로 인해 이후 동서양은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흐름 속에서 하나로 묶이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이 오래 생존했다면 상황은 좀 더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뜻밖에도 323년 6월 32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다. 이후 알렉산더가 건설한 왕국은 네 조각,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유대인들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의 보호를 받다가 갑자기 중국의 통치권 안으로 흡수되는 충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국이 다시 네 조각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기원전 300년경 유대인들은 국제 정세의 혼란 속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술잔이 흔들리면 술잔 안에 들어있는 술도 함께 흔들리기 마련이다. 흔들리는 술잔이 기원전 300년경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던 국제 정세라면, 그 안에 들어있는 술은 유대인 사회였다.

▶ 가톨릭신문 : 2009-11-08 [제2671호]
  |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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