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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대주교 [사회 운동가]
조회수 | 2,357
작성일 | 06.10.05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대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부하라!”

1980년 3월 24일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병원에 있는 천주의 섭리 소성당에서 거행된 미사를 거행하던 오스카 로메로(Romero, Oscar Arnulfo, 1917~1980) 대주교는 “폭력이 숨쉬기처럼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1979년 5월 13일 미사 강론 중)의 불의에 대항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 대가는 잔인했다. 강론을 마치고 미사를 마저 거행하던 대주교에게 4명의 무장 괴한으로부터 총격이 가해졌다. 이미 예견되던 일이었다. 수시로 그를 향해 협박과 위협을 가하던 불의의 세력들에게 로메로 대주교는 말했다.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는 엘살바도르 민중 안에서 부활할 것이다. 한 주교는 죽지만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 세상 복음화에 앞장 서

불의한 사회 구조에 대항해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의 가르침을 국가와 사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이들의 대변자로 살다가 희생된 로메로 대주교. 그에게 참된 복음의 선포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모든 면에서 나라 전체를 복음화’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복음화란 현세적 측면과 초월적 측면,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전례적 측면과 교육적 측면 등 모든 면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교회의 전체적인 삶을 통해서 표현돼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선포,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기쁜 소식을 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 자체를 기쁜 현실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예언자적인 고발, 악을 거부하고 악을 공공연하게 탄핵하고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을 강력하게 요구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고,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명령을 내리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 것을 요구했다. '하느느님의 이름으로’ 불의를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 현실 참여적 삶으로 전향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 산 미구엘의 치우다드 바리오스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유아 세례를 받고 1930년 글라라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소신학교에 입학, 1937년에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산 살바도르의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1942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사제로 서품된 뒤 귀국해서는 산 미구엘 교구의 교구장 비서로 임명돼 이후 23년 동안 교구 신문의 편집장, 주교좌 성당의 주임 신부, 소신학교 교장 등의 소임을 받아 활동했다.

1967년에 주교로 서품돼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총장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중앙 아메리카 주교회의 사무국의 상임이사로 선출, 1970년에는 산 살바도르의 보좌주교가 됐고, 1974년에는 산티아고 데 마리아 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됐다.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당초 그의 성향은 결코 진보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았다. 그는 보수적이었으며 이른바 현실 참여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977년 2월 22일 산 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삶의 커다란 전기를 맞는다. 산 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착좌하던 바로 그해 엘살바도르는 정치적 억압, 특히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극에 달해 있었고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교구장으로 착좌한지 불과 20여일이 되던 3월 12일, 예수회 소속의 신부 한 명과 농민 2명이 피살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이른바 ‘회개’ 혹은 ‘전향’의 계기를 맞게 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이러한 전향이라는 말에 대해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공의회 문헌과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문헌, 그리고 메델린 선언(1968), 푸에블라 선언(1979), 바오로 6세 교황의 사도적 권고인 ‘현대의 복음선교’ 등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부당한 것으로 지적하기 시작했고, 사회적 폭력이 증가하자 주일 미사 때마다 그 주에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자연스럽게 권력과 무력을 지닌 이들로부터 격렬한 반감을 불러왔고 결국은 그를 살해하고야 말았다.

그의 복음적이고 사목적인 활동은 공의회 정신과 각종 사회 문헌들, 그리고 특별히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현실을 복음적 가르침과 실천으로 해석한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구원을 추구함에 있어 우리는 현세적 임무를 성덕 및 성화에서 분리시키는 이원론을 피해야 한다”는 메델린 문헌의 지적에 주목하고 “죽음 저편뿐만 아니라 여기 땅위에서도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교회”를 그는 부르짖었다.

▶ 가톨릭 신문 : 200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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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영화 로메로 감상문

‘로메로’라는 영화는 ‘오스카 로메로’(Archbishop Oscar Romero)라는 대주교의 자유와 평등을 향한 희생정신에 대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그는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El Salbador) 동부 산미겔 지역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1977년 2월 산살바도르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80년 3월에 미사를 집전하던 중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져 순교하였다. 이 영화는 억압받는 현실에서 자유를 향한 인간의 몸부림을 그리고 있는데 영화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이렇다. 1977년 엘살바도르라는 남미의 작은 국가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외치며 엠베르토(General Humberto) 장군이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이 시기에 로메로는 대주교로 임명되는데 어느 날 그의 동료인 그란테 신부(Father Rutilio Grande)가 저격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에 서있던 이 대주교는 나라 안의 분쟁에 대해 적극적 입장을 취하기로 결심한다. 그란테 신부의 성당에 들어간 주교는 성당을 점거하던 군인들에 의해 수모와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만 끝까지 미사를 거행한다. 한편 정부는 자유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염원을 점점 더 강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군사정권은 로메로 주교를 암살 할 것을 지시한다. 로메로 주교 역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지만 끝까지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로메로 주교가 성찬식을 거행하던 중에 정부군 저격수에 의해 그는 사살 당한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엘살바도르의 그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할 것이란다. 1881년부터 귀족들이 토착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커피를 재배하는 대지주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하면서 엘살바도르에는 토지를 두고 갈등이 시작된다. 가난한 이들의 땅을 강탈해 부호들의 토지에 보태는 도둑질은 그 뒤로도 계속되어서 로메로가 대주교로 임명될 당시 엘살바도르는 불과 14개의 가문의 사람들이 경작지의 60퍼센트 이상을 소유하는 기이한 상황을 맞게 된다. 그 결과 대다수의 농민들은 소작농 신세로 전락하고 식량을 배급받아서 겨우 끼니를 이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대 지주들은 대통령을 위시하여 군인 정치인 경찰 등 모든 권력자들을 등에 업고 있었고 심지어 주교단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에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 해피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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