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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느 공의회
조회수 | 2,343
작성일 | 10.08.16
시기 1311. 10. 16 ∼ 1312. 5. 6 / 클레멘스 5세 재위시(1305-1314)

배경

중세 마지막 공의회인 이 비엔느 공의회는 보니파시우스 8세(1294-1303)의 후계자인 클레멘스 5세 교황이 소집해 비엔느에서 개최되었다. 그 당시 프랑스 왕 필립 4세가 교황에 대해 '성전기사수도회’의 폐지를 주장했으므로, 이에 대해 공의회 교부들의 의견을 묻기 위해 1311년 10월16일에 약 180명의 주교들의 참석 하에 열렸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성전기사수도회’의 문제해결, 성지회복, 교회개혁 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함이었다.

과정

교부들은‘성전기사수도회’의 폐지 요청의 근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투표를 행했다. 그러나 교황은 왕의 압력에 굴복해 기사수도회를 폐지시켰다. 1312년 3월 6일의 제3총회에서 교부들은 성서 해석을 더욱 잘 행하기 위한 것과 또 비신자들의 개심에 대한 것과 주요한 여러 대학에서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칼데아어 등의 강좌를 개설 할 것을 결정하였다.

결과 및 의의

공의회 결과 주요 결정 사항으로 공의회는 성전기사수도회 해산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프란치스코회의 페르루스 올리비의 3명제를 배척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1) 그리스도의 옆구리는 십자가상에서‘구세주가 죽으신 후’에 군인의 창에 의해 열렸다.

2) 이성적 혹은 지성적 영혼은 본질적으로 신체의 형상이다.

3) 세례 때 어린이는 어른과 같이 성성의 은총과 모든 주입덕(注入德)을 받는다.

교회개혁령 반포.

프란치스코회의 청빈 논쟁.

이 공의회는 중세의 마지막 공의회였으며, 교황에 의해 소집된 공의회였다. 공의회의 중심 의제는 대부분 교회의 개혁에 관한 것으로서, 교회를 세속의 권력에서 벗어나게 하고, 성직자들의 풍기를 정화하고, 규정 반포로서 교회의 규율을 부흥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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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308년 8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는 프랑스 남서부 푸아티에에서 칙서를 발표, 2년 후인 1310년 10월 1일 비엔에서 보편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공포했습니다. 비엔은 프랑스 중서부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성전 기사단 폐쇄 문제와 선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위 1294~1303)에 대한 사후 재판 등이 주요 안건이었습니다. 왜 이 문제들이 공의회 안건으로 올랐을까요?
 
1. 성전 기사단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5년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한 이후 많은 나라들이 십자군에 참가했습니다. 십자군이 활기를 띠면서 이른바 '기사 수도회'들이 생겨났습니다. 수도자들과 똑같이 청빈ㆍ정결ㆍ순명을 서약하면서도 기사들처럼 직접 전투를 치르고 가난한 이와 병자들을 돌보며 특히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주요 임무로 수행했습니다.
 
1100~1300년 사이에 이런 기사 수도회들은 12개 정도가 활약하고 있었는데 성전 기사 수도회(줄여서 성전 기사단)은 요한 기사 수도회(몰타 기사단), 독일 기사 수도회 등과 함께 대표적 기사 수도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119년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에서 기사 8명이 예루살렘 총대주교 앞에서 청빈ㆍ정결ㆍ순명을 서약함으로써 탄생한 성전 기사단은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과 그리스도의 가난한 형제 군인들'이라고 불리던 성전 기사단은 특히 당대 유명한 성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1153)에게서 격찬을 받은 후 급속도로 커졌습니다.
 
12세기 중반이 되면서 유럽 곳곳에 지회들이 생겨났습니다. 또 교황을 비롯해 군주들과 귀족들, 후원자들에게서 토지나 재산을 기증받으면서 성전 기사단은 유럽 도처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됐을 뿐 아니라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부에서는 불화가 생기고 심지어 수도원들끼리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1291년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던 십자군 최후의 보루 아크르 요새가 사라센에 의해 함락된 이후 성전 기사단은 파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는데 당시 프랑스 왕은 미남 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였습니다.
 
필리프 4세는 야심이 있는 왕이었습니다. 프랑스 땅에서는 왕이 교회보다 우위의 권력을 지녀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또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자 한 그는 남부 기옌 지방을 차지하고 있는 영국을 몰아내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처남이기도 한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와 7년 동안 두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성직자들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고 금융업을 하는 유다인들에게도 많은 빚을 졌습니다.
 
재정이 바닥이 나고 달리 빚을 갚을 길이 없자 필리프 4세는 1306년 유다인들을 체포해 재산을 몰수하고 모두 추방해 버리는 비상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막대한 부를 지닌 성전 기사단으로 눈을 돌립니다. 기사단 일부에서 문제가 있는 것을 트집 삼아 1307년 8월에는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성전 기사단에 대한 조사를 하라고 요구합니다. 교황이 미적거리자 그해 10월 13일 금요일에 필리프 4세는 프랑스에 있는 성전 기사단 회원을 모두 체포해 그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는 혹독한 고문을 가합니다.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성전 기사단을 해체하도록 계속 압박을 가합니다.
 
2. 보니파시오 8세 교황
 
1294년 12월 10일 교황 첼레스티노 5세가 재위 3개월 열흘 남짓 만에 사임을 발표합니다. 곧 이어 콘클라베가 열리고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인 베네딕토 가예타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는데 그가 보니파시오 8세(재위 1294~1303) 교황입니다.
 
1300년에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년을 선포한 교황으로도 유명한 보니파시오 8세는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전공했으며 영국과 프랑스 대사를 지내는 등 교황 사절로서 활동했습니다. 30년 이상 교황청에 몸 담아 있으면서 세속 권력에 휘둘리곤 하는 교황들을 본 보니파시오 8세는 세속 권력을 능가하는 절대 권위를 지닌 교황권이 필요함을 절감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교황으로서 영적 분야에서 전권을 갖고자 한 보니파시오 8세,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통해 프랑스 영토 안에서는 성직자들에 대해서도 왕의 권한을 앞세우려 한 필리프 4세. 두 사람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왕이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교황이 금지시키고,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프랑스 왕이 첩자 혐의로 체포하는 등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의 대결 구도는 악화일로를 걷습니다. 마침내 교황은 1302년 11월 18일 칙서 '하나이고 거룩한 교회'(Unam Sanctam)를 발표합니다. 교황의 영적 권위가 모든 세속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자 필리프 4세는 측근을 통해 교황을 비방하고 모독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교황이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를 암살했으며, 영혼 불멸을 부정했다는 비난 등이었습니다.
 
결국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를 파문키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파문 교령을 발표하기 전날 교황은 필리프 4세 측근인 기욤 노가레 등이 이끄는 폭도들에게 체포되고 구타당하기까지 합니다. 교황은 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후 선종합니다. 1303년 10월 11일이었습니다.
 
보니파시오 8세 후임 교황 베네딕토 11세(재위 1303~1304)는 필리프 4세와는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전임 교황을 모독한 이들을 단죄하는 일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그는 재위 8개월 만에 선종하고 맙니다.
 
이후 콘클라베가 열렸으나 추기경단의 분열로 후임 교황을 근 1년 가까이 선출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필리프 4세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후임 교황이 선출되는데 그가 클레멘스 5세 교황이었습니다.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대관식을 로마에서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교황 거처를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겨 버립니다. 세계사에서 흔히 말하는 '아비뇽 유수' 혹은 '교황의 바빌론 유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교황 스스로 결정한 일이기에 유수 또는 유배라는 표현은 적절치가 않습니다.
 
한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로서는 보니파시오 8세 사망과 관련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어떻게든 모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비난과 고발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해 보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사후 재판을 열도록 클레멘스 교황을 압박했고 결국 이것이 공의회 주요 안건에 포함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1. 09. 11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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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 개최와 과정

가톨릭교회 역사상 15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비엔 공의회는 당초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발표한 1310년 10월 1일보다 1년 이상 늦은 1311년 10월 16일 비엔 주교좌성당에서 개회합니다.
 
개회가 늦은 이유는 성전 기사단에 대한 재판 때문이었습니다. 1307년 10월 13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성전 기사단을 일제히 체포한 후 갖은 고문을 다해 거짓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이에 놀란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자신이 직접 나서 기사단 지회가 있는 교구마다 특별 법정을 설치토록 합니다. 그리고 기사단원들에 대한 마지막 재판은 관구 회의에서 주교들이 결정토록 하면서 공의회에서는 성전 기사단 폐지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는데 그 과정이 늦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은 1310년 4월에 다시 칙서를 발표해 공의회 개회 일정을 1년 후로 늦췄습니다. 그 결과 실제 개막일은 1311년 10월 16일이 된 것입니다. 참석자는 추기경 20명을 비롯해 대주교와 주교가 합쳐서 122명, 수도원장 38명이었습니다. 그 밖에 왕들이 보낸 사절들, 주교좌성당 참사 대표들과 기타 보조자들을 포함하면 300명 정도가 됐습니다.
 
어쨌든 클레멘스 5세는 비엔 주교좌 성당에서 개회식을 직접 주재합니다. 개막 연설에서 교황은 공의회 의제를 성전 기사단 문제, 성지 탈환, 교회 내부 개혁 등 3가지로 제시합니다. 교황은 또 이 문제들을 다룰 특별 소위원회들을 구성토록 합니다. 소위원회가 조사를 마친 후 해결책을 마련해 교황과 추기경단에게 제출하고 교황과 추기경단이 승인하면 공의회 전체 회의에서 통과시키는 형태로 일이 추진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개회식에서 다음 전체 회의 일정을 공지하지 않았습니다.
 
안건 가운데는 아무래도 성전 기사단 문제가 핵심이었습다. 해당 특별 소위원회는 자체 조사 결과 성전 기사단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해결 가닥을 잡았습니다. 필리프 4세와 그 측근들이 성전 기사단에 대해 한 비난과 고발은 상당 부분 허위라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필리프 4세의 거듭된 압력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굴복하고 말지요. 그리하여 1312년 4월 제2차 전체회의에서 성전 기사단을 폐지한다는 교황 칙령이 선포됩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성전 기사단 폐지가 판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황의 행정 명령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교황은 이어 한달 후 성전 기사단 재산에 대해 일부를 제외하고는 요한 기사 수도회(몰타 기사단)에 넘긴다는 칙령을 발표합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자신이 차지하려고 했습니다만 뜻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지요. 그뿐 아니라 공의회는 필리프 4세가 요구했던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사후 재판 건에 대해서는 논의를 중단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다른 안건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십자군 원정 문제와 관련해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약속합니다.
 
비엔 공의회는 사실 십자군 원정보다 교회 개혁에 대해 더욱 관심을 쏟았습니다. 교회 개혁과 관련해서 교황은 주교들에게 자기 교구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의견을 내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주교들이 제출한 문건들에 대한 심의가 2차 회의 때 집중적으로 논의돼 많은 법령들이 마련됐습니다.
 
공의회는 이 밖에도 당시 엄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던 프란치스코회 내부 분열 문제를 논의하고,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여성 공동체인 베긴회와 남성 공동체 베가르회의 문제들도 다뤘습니다.
 
비엔 공의회는 1312년 5월 6일 제3차 전체회의를 열어 모두 38개 법령을 채택하고 폐막합니다.
 
공의회 결과와 그 이후
 
이전 공의회들 예컨대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나 제1차 리옹 공의회(1245), 또 2차 리옹 공의회(1274)의 경우 공의회가 끝난 후 교황이 법령을 정리해 법령집으로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클레멘스 5세 교황은 비엔 공의회에서 승인한 법령들을 엮어 법령집으로 발표하는 일을 마무리짓지 못한 채 1314년 4월 20일 선종합니다. 공의회 법령들은 후임 교황 요한 22세(재위 1316~1334)가 교회 개혁에 관한 법령을 일부 수정해 1317년 공포합니다. 이로써 비엔 공의회의 결정들이 비로소 법적 효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요한 22세 교황이 공포한 이 법령을 「클레멘스 법령집」이라고 부르지요.
 
비엔 공의회에서는 38개 법령을 채택했다고 하는데 「클레멘스 법령집」에는 그 절반만 수록돼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우선 공의회가 당시 프란치스코회 내분을 화해시키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란치스코회는 설립자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후 엄격한 회칙 준수와 특히 극단적 청빈을 주장하는 엄격파와 이를 융통성 있게 적용하려는 온건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공의회는 두 파의 화해를 모색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의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두 파의 대립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클레멘스 법령집」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여성 평신도 공동체인 베긴회와 이와 유사한 남성 공동체인 베가르회에 대한 공의회의 단죄입니다. 이들은 정규 수도자들이 아니지만 공동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금욕과 청빈을 실천했는데 일부 공동체들에서 기도와 성사를 부정하는 등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이들 문제가 있는 일부 공동체들에 대해서 단죄합니다. 베긴회와 베가르회 전체를 단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클레멘스 법령집」은 이 밖에도 공의회가 교회 개혁과 관련해 고리대금 문제, 성직자에 대한 폭행, 이단심문의 폐해 같은 문제들을 다뤘음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공의회 때 십자군 원정에 나서겠다고 약속했습니다만, 이 약속은 빈말이 되고 맙니다. 필리프 4세는 클레멘스 5세 교황이 선종하고 나서 그해 1314년 11월에 사망합니다.
 
필피프 4세는 죽기 전에 한 가지 일을 더 마무리 짓습니다. 자신이 눈엣가시처럼 여긴 성전 기사단 마지막 대원장 자크 드 몰레(1244~1314)를 제거한 것입니다. 그 전해인 1313년 몰레는 기사단의 다른 세 고위 지도자와 함께 재판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집니다. 물론 몰레는 재판관들이 기사단에 씌운 혐의들을 모두 부인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얼굴이 잘 생겨서 미남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필피프 4세는 얼굴 값과는 달리 1314년 3월 8일 파리에서 몰레를 비롯해 동료 회원들을 화형에 처합니다. 이로써 성전 기사회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됩니다.

평화신문 2011. 09. 25발행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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