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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서 Gratissimam Sane
조회수 | 3,757
작성일 | 07.09.29
가정교서 Gratissimam Sane

가정에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교서

차 례

1. 서론
2. 가정 - 교회의 길
3. 가정의 해
4. 기도
5. 가정을 위한 사랑과 관심

I 사랑의 문화

6.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
7. 혼인 계약
8. 두 사람의 일치
9. 인간의 출생 계통
10. 혼인과 가정의 공동선
11.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줌
12.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
13. 두 가지 문화
14. 사랑은 커다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15. 제4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16. 교육
17. 가정과 사회

II 신랑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18.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19. 위대한 신비
20. 순결한 사랑의 어머니
21. 출생과 위험
22. “너희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23. “굳센 내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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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친애하는 가정들이여!
1. 가정의 해 거행은 저에게 여러분 가정의 문을 두드려 깊은 애정으로 여러분과 인사를 나누고 여러분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고마운 기회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교서로써 그렇게 하고자 하며,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본인의 직무를 시작하던 초기에 발표한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 나오는 말씀으로 이 교서의 출발점을 삼고자 합니다. 거기에 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은 교회의 길이다.1)

이 말씀으로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이 따라 걸어가고 있는 수많은 길들을 상기시키고 또한 동시에 인간이 지상 생활의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바로 인간의 편에 서고자 하는 교회의 깊은 열망을 강조하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일상의 나그네 길에서 만나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함께 나누며,2) 그리스도 친히 교회를 이 모든 길 위에 놓아주셨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교회의 사명과 봉사의 “길”인 인간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1.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년 3월 4일), 14항 참조.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에 있어서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1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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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친애하는 가정들이여!
1. 가정의 해 거행은 저에게 여러분 가정의 문을 두드려 깊은 애정으로 여러분과 인사를 나누고 여러분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고마운 기회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교서로써 그렇게 하고자 하며,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본인의 직무를 시작하던 초기에 발표한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 나오는 말씀으로 이 교서의 출발점을 삼고자 합니다. 거기에 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은 교회의 길이다.1)

이 말씀으로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이 따라 걸어가고 있는 수많은 길들을 상기시키고 또한 동시에 인간이 지상 생활의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바로 인간의 편에 서고자 하는 교회의 깊은 열망을 강조하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일상의 나그네 길에서 만나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함께 나누며,2) 그리스도 친히 교회를 이 모든 길 위에 놓아주셨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교회의 사명과 봉사의 “길”인 인간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2. 이 수많은 길 가운데, 가정이 첫째가는 길이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가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길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개별적이고도 독특한 길이며, 모든 개인이 반복되지 않는 일회적인 것처럼 가정도 되풀이되지 않는 길입니다. 가정은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길입니다. 참으로 한 인간은 정상적으로 한 가정 안에서 세상에 태어나며, 바로 한 개인의 실존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가정의 덕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가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고통과 상실감의 고뇌를 느끼며 평생을 두고 내내 괴로워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처지를 체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교회는 가정이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그 근본 역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가정으로부터 나와 새로운 가정 안에서 자기 인생의 구체적인 소명을 실현한다는 사실을 교회는 알고 있습니다. 누가 독신으로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가정은 여전히 그 실존의 지평, 말하자면, 기본 공동체가 됩니다. 가정은 가장 가깝고도 친밀한 사람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사회 관계의 조직망 전체가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기본 조직입니다.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는 흔히 “인류 가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가정은 창조주께서 창조된 세상을 품어 안으시는 저 사랑, 창세기의 “한 처음”(1,1)에 이미 드러난 저 동일한 사랑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지고의 확인을 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요한 3,16). 독생 성자, “천주로부터 나신 천주시요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며 성부와 일체이신 외아드님께서 가정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사실 당신의 화신(化身)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참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를 빼고서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하셨습니다.”3)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신다”4)고 한다면, 그분은 당신이 거기서 태어나 자라기로 선택하신 그 가정에서부터 그렇게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구세주께서는 “사람의 아들”로서 그 어머니 마리아와 목수 요셉에게 “순종”(루가 2,51)하시며 그분 생애의 대부분을 나자렛의 그늘 속에서 드러나지 않게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자녀다운 “순종”은 하느님 아버지께 “죽기까지”(필립 2,8) 순종하시어 세상을 구원하셨던 저 순종의 첫번째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 육화의 신비는 이처럼 인간의 가정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하느님의 아들에 관하여 진술하며 그 육화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셨다”5)고 한 말을 유추하여 보면, 이 육화의 신비는 한 가정, 나자렛의 성가정만이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모든 가정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섬기러 오신”(마태 20,28) 그리스도를 따라, 교회는 가정에 대한 봉사를 자신의 근본 의무의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과 가정은 모두가 다 “교회의 길”입니다.

가정의 해

3.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1994년을 세계 가정의 해로 선포한 국제연합의 결정을 기꺼이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 결정은 국제연합 회원국들에게 가정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활동에 참가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모든 나라”(마태 28,19 참조)에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교회가 국제연합의 국제적인 활동을 자기 자신의 일로 삼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그저 1985년의 세계 청소년의 해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또한 교황 요한 23세께서 간절하게 바라신 소망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에 영감을 불어넣었던 그 열망을 실현시켜, 세계 안에 자기 자신을 현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교회(全敎會) 공동체는 1993년 성가정 축일에 “가정의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 제2천년대를 마감하고 제3천년대를 시작하게 되는 2000년의 대희년을 준비하는 길로 나아가는 중대한 조치의 하나입니다. 가정의 해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을 나자렛으로 향하게 할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지난해 12월 26일 교황 사절이 주재하는 장엄 미사 중에 가정의 해가 공식적으로 개막되었습니다.

이 가정의 해 내내 가정에 대한 교회의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는 수많은 표징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한 사랑과 관심은 “가정 교회”라는 뜻깊은 말이 가정에 적용되었던 바로 초기의 그리스도교에서부터 드러났습니다. 바로 현시대에서도 우리는 공의회가 채택하였던 “가정 교회”6)라는 말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 말의 뜻이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소망은 현대 세계에서 가정의 변화된 상황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결코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까닭은 바로 현재의 상황에서 교회가 하여야 할 일 곧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 증진”7)을 가리키기 위하여 공의회가 사목헌장에서 선정한 그 칭호가 계속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공의회 이후의 또 다른 중요한 참고 문헌은 1981년의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입니다. 이 권고서는 다양한 민족들과 국가들 사이에서 언제 어디서나 계속하여 “교회의 길”이 되어야 할 가정에 관한 방대하고도 복합적인 경험을 숙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가정이 내적 위기에 놓여 있거나 가정의 내적 일치와 역량을 위협하고 심지어는 가정 형성 그 자체를 가로막는 전도된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영향에 노출되어 있는 그러한 곳에서 더 더욱 들어맞는 것입니다.

기도

4. 이 교서에서 저는 “추상적인” 가정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 살든 그 문화와 역사의 다양성과 복합성이 어떠하든, 세계 도처의 구체적인 모든 가정을 향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요한 3,16) 그 사랑,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신 그 사랑이 인류의 거대한 세계 “가정”의 살아 있는 “세포”인 하나하나의 가정에 이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합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인류의 구원자이신 육화된 말씀은 서로 형제 자매들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 세계적 개방성의 원천이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부드러운 말로 시작되는 기도 안에서 우리가 모든 형제 자매들을 끌어안도록 재촉하십니다.

기도는 성자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도록 만들어줍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이 가정 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인류 가정 그 하나하나 안에 그리스도께 바치는 기도가 항상 머무르기를 바랍니다. 또 이 교서는 부모들과 자녀들이 사는 작은 가정 안에서 그 가정을 통하여 모든 나라의 커다란 가정 안에 그리스도께서 머무르시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으로 “우리 아버지”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가정이 바치는 기도, 가정을 위하는 기도, 가정과 함께 드리는 기도는 교회 안에서 가정의 해에 두드러진 요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바로 기도 안에서 기도를 통하여 인간은 매우 간단하고도 심오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독특한 주체성을 찾게 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인간인 “나”는 인간이 된다는 깊은 뜻을 더욱더 쉽게 깨닫는 것입니다. 가정은 또한 사회의 기본 “세포”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특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가정의 진실입니다. 바로 가족들이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공통의 기도 속에서 만날 때 이러한 주체성은 그 최초의 근본 확인을 발견하게 되고 또 그 주체성이 강화됩니다. 기도는 가정이 하느님의 “힘”을 나누어받도록 도와줌으로써 가정의 힘과 정신적 일치를 증대시켜 줍니다. 혼인 예식 중의 장엄한 혼인 강복에서 주례자는 주님께 이러한 간청을 드립니다. “성령의 은총을 내리시고 주님의 사랑을 이들(신랑 신부) 마음에 부어주시어 부부의 신의를 항구히 지키게 하여주소서.”8) 성령의 이러한 “방문”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가정을 일치시킬 수 있는 힘은 물론 가정의 내적 힘을 불러일으켜 줄 것입니다.

가정을 위한 사랑과 관심

5. 가정의 해는 모든 “가정 교회들”이 바치는 조화로운 보편적 기도,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바치는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이 기도가 또한 곤경과 위험, 불신과 분열을 겪고 있는 가정들, 그리고 「가정 공동체」가 진술하는 대로 “비정상적”9)인 상황에 놓여 있는 가정들에게 가닿기를 바랍니다. 모든 가족들이 그 형제 자매들의 따뜻한 사랑과 보호의 포옹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가정의 해 동안, 기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의 친교 안에서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소명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가정들이 보여주는 고무적인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나라와 교구와 본당에 그러한 가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가정들이 바로 “규범”을 이룬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닙니다. 극소수만이 아닌 “비정상적인 상황들”의 실존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도덕 규범을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가 하는 것은 경험으로 아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가정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사람은 언제나 그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선의 길로 주저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요즈음 매우 강력한 자원을 배후에 둔 여러 가지 계획들이 가정의 파괴를 그 목표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로 “비정상적”인 상황들을 “정상적”이거나 매력적인 상황으로 제시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그렇게 현혹시키려고 하는 치밀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남녀 관계를 북돋아주고 이끌어가야 할 “사랑과 진실”을 부정하며, 그럼으로써 특별히 어린이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가정의 긴장과 분열을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도덕적 양심이 어두워지고,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일그러져 가며, 자유는 사실상 예속으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자유와 죄로 야기된 노예 생활에 관하여 사도 바오로께서 하신 말씀(갈라 5,1)은 얼마나 적절하고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까!

이제 가정의 해는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시의적절하고 또 필요하기까지 한 것인가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루하루 자신의 소명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모든 가정들의 증언이 얼마나 긴요합니까! 진실한 사랑과 “성령의 은총을 부어주심”,10)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계시는 그리스도 곧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참조) 신랑이시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감사를 드리는 가정의 기도, 그러한 가정 기도의 증대와 전세계적인 확산이 얼마나 절실합니까!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1고린 13,13 참조)는 이 사실을 우리 깊이 확신합시다. 사랑은 참으로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믿읍시다.

올해 내내, 교회의 기도, “가정 교회”인 가정들의 기도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게 되기를 빕니다! 그 기도가 먼저 하느님께 들리고 그 다음에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들리게 되기를 빕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의혹에 빠지지 않게 되고,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흔들리는 모든 사람들이, 온갖 유혹이 다 그러하듯, 단순히 그럴듯한 겉모양으로 이끌어들이는 현혹에 넘어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으셨을 때에 함께 계시던 그분의 어머니께서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지금 가정의 해를 지내는 우리에게 성모 마리아께서 하시는 말씀 또한 똑같은 말씀입니다. 역사의 이 특별한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가정과 함께 가정을 위하여 바치는 위대한 기도에 대한 강력한 촉구입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모든 가정을 하나하나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마음에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라고 권유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자로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시며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성화하시는 현존으로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현존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가정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에페 3,15),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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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사랑의 문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

6. 우주, 사실 광활하고 다양한 우주와 온갖 생물들의 세계는 바로 그 근원인 하느님의 부성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에페 3,14-16 참조). 이것은 물론 유비를 기초로 하여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 유비에 힘입어 우리는 바로 창세기의 시작에서 부성과 모성의 실재 그리고 거기서 귀결되는 인류 가정의 실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식별을 가능케 하는 해석의 열쇠는 성서 본문(창세 1,26)이 강조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닮음”이라는 원리에 의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생겨라”(예컨대, 창세 1,3) 하시는 당신 말씀의 힘으로 창조를 하십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인간의 창조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이렇게 이어집니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이를테면 당신 자신 안으로 들어가시어, 여기서 이미 신적인 “우리”로 밝혀진 당신 존재의 신비 안에서 그 원형과 영감을 찾고자 하십니다. 이 신비에서부터 인간 존재가 창조 행위로 생겨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창세 1,27).

하느님께서는 새로이 창조된 이 존재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 창세기는 일찍이 다른 생물들의 창조에서 사용하였던 “번성하여라”는 똑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유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여기에 전체 상황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는 출산의 유비, 부성과 모성의 유비가 있지 않습니까? 인간을 제외하고서는 땅 위에 사는 그 어떠한 생물도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부성과 모성은, 자연 안에서 다른 생물들의 그것과 생물학적으로 유사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이고도 독특한 방법으로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생활의 공동체이며 사랑 안에서 일치된 인격 공동체(인격의 친교)인 가정의 토대이십니다.

신약성서에 비추어, 가정의 원초적 전형을 바로 하느님 자신 안에서, 하느님 생명의 신비인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찾아야 하는 방법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신적인 “우리”는 인간적인 “우리”, 특별히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우리”의 영원한 원형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바로 인류의 경험으로 확인되는 인간에 관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한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작은 공동체이든 사회 전체이든 전인류의 생활은 이러한 원초적인 이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원성으로부터 개인의 “남성”과 “여성”이 나오는 것이며, 바로 거기에서 모든 공동체는 인격의 상호 완성 안에서 자신의 독특한 부요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창세 1,27)는 창세기의 말씀이 뜻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남자와 여자는 모두 똑같이 인간이다고 하는, 남녀의 평등한 존엄성에 대한 최초의 언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조는 그 구조에서 파생되는 특유의 존엄성과 더불어 “한 처음부터” 생활의 모든 차원과 모든 환경에서 인간 공동선의 특성들을 밝혀줍니다. 이러한 공동선에 남자와 여자는 각기 특유의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인간 사회의 기원에서 친교와 보완성의 특성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혼인 계약

7. 가정은 언제나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드러내는 최초의 기본적 표현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물을 보는 이러한 관점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가장 작고 가장 기본적인 인간 공동체인 가정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인격적 공헌에 얼마나 많이 매여 있는가를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정은 실제로 인격 공동체이며, 그 실존과 공동 생활의 고유한 방법은 친교 곧 인격의 친교(communio personarum)입니다. 여기서는 또한,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절대적 초월을 언제나 인정하지만, 우리는 신적인 “우리”에 대한 가정의 궁극적 관계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인격만이 “친교 안에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신을 서로에게 주고 서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계약”으로 기술되는11) 혼인의 친교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혼인을 통하여 세워지는 가정에 대한 언급에서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었다”(창세 2,24)고 말할 때에 바로 이러한 진리를 인식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토론하시며 이 말씀을 인용하신 다음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마태 19,6).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마태 19,8) 존재하는 혼인 유대의 내용을 새롭게 계시하여 주셨으며, 혼인은 언제나 그러한 유대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지금”도 그렇다고 확인하시는 것이라면, 그분은 새로운 계약의 여명에서 가정 공동선의 토대인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고 확실하게 해두고자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일치하여 우리가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페 3,14-15 참조), 우리는 이미 혼인의 부부 계약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완전하고 독특한 의미에서”12) 가정이 되는 사건은 바로 부모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모성은 필연적으로 부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거꾸로, 부성은 필연적으로 모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처음부터” 부여하신 이원성의 결과입니다.

저는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지만 똑같지는 않은 두 가지 개념, 곧 “친교”의 개념과 “공동체”의 개념에 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친교”는 “나”와 “너”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에 관련되는 것입니다. 한편 “공동체”는 이러한 구조를 초월하여 사회 곧 하나의 “우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인격 공동체인 가정은 따라서 최초의 인간 “사회”입니다. 가정은 부부들에게 사랑과 생명의 지속적인 친교를 열어주는 혼인의 부부 계약이 맺어질 때마다 생겨나며, 가정은 자녀 출산으로 완전하고 고유하게 완성되는 것입니다. 즉, 부부의 “친교”가 가정 “공동체”를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 “공동체”는 “친교”의 본질 그 자체로 완전히 충만되어 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태중에 아기를 지니고 다니다가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와 아기 사이의 “친교”에 비할 수 있는 또 다른 친교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이루어진 가정 안에서는 부모 사이의 “친교”의 관계가, 충만한 완성에 이르는 새로운 일치가 드러납니다. 이러한 완성은 하나의 과업이요 도전이라는 사실을 경험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과업은 부부들이 그들 본래의 계약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삶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여기에 바로 도전이 있습니다─은 그 계약을 튼튼하게 해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 친교를 풍요롭게 하고 심화시켜 줍니다. 자녀가 태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이기심이, 악으로 기우는 인간적인 경향의 결과로서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까지 숨어 있는 이기심이 이러한 사랑보다 더 강력한 것이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들은 이것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맨 처음부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여, 그들의 부성과 모성이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힘을 그 원천에서 이끌어내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성과 모성은 그 자체가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드넓은 폭과 원초적인 깊이를 발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맡겨진 하나의 과업입니다. 남편과 아내 모두의 삶에서, 부성과 모성은 그와 같이 드높은 “새로움”과 “슬하에” 거둘 수 있는 풍요로움을 드러내 줍니다.

자연적으로 부성과 모성을 지향하는 인간 사랑은 흔히 커다란 위기에 부딪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압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혼인과 가정 상담소들에서 도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여러 가지 도움 중에서도 특수 훈련을 받은 심리학자들과 심리치료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동시에 바오로 사도께서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립니다”고 하신 말씀의 영원한 유효성을 망각할 수 없습니다. 혼인의 성사인 결혼은 사랑으로 맺는 인격의 계약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오로지 사랑으로써만,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주신”(로마 5,5) 저 사랑으로써만 심화되고 보존될 수 있습니다. 가정의 해에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부부 사랑에서부터 임신으로 그리고 부성과 모성으로 나아가는 길목의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으로 집중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혼인성사의 전례적 거행에서 간청하는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은총”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께서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신자들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주시기를”(에페 3,16) 간청합니다. 이러한 “내적인 힘”은 가정 생활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히 혼인 동의를 하는 전례 예식에서 “나는 평생 동안 언제나… 신의를 지킬 것을 약속합니다”고 표명하였던 사랑이 어려운 시험을 당하게 될 때에 그러한 내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의 일치

8. 오로지 “인격”을 지닌 사람만이 그러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인격을 지닌 사람만이 완전한 의식과 자유를 가지고 또는 가져야 하는 상호 선택을 바탕으로 하여 “친교”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남자가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결합한다(창세 2,24 참조)고 하면서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한 가정의 아들을 남편으로 만들고 한 가정의 딸을 아내로 만드는 혼인을 이루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에 관한 충만한 진리를 고려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러한 상호 선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께 대한 유사성을 말하면서 극히 중대한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공의회는 모든 인간이 이미 지니고 있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만이 아니라 또한 “하느님의 삼위일체와, 사랑과 진리 안에서 결합된 하느님의 자녀들의 일치 사이의 어떤 유사성”13)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이 풍요롭고 의미심장한 신앙 규정은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지닌 신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 신원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신원은 인격 생활의 본질적 차원인 진리와 사랑의 요구 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진리와 사랑에 대한 요구는 하느님과 피조물 모두에게 인간을 개방시켜 주며, 인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친교”의 생활에, 특히 혼인과 가정에 개방시켜 줍니다. 공의회의 말을 빌리자면, 인격의 “친교”는 어떤 의미에서 삼위일체의 “우리”의 신비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부부의 친교” 또한 이 신비에 귀착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 그 기원을 두는 가정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신비에서 나옵니다. 이 가정은 남자와 여자의 내밀한 존재를 따르며, 인격체로서 천부의 진정한 존엄성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혼인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창세기의 말씀대로 “한 몸”(창세 2,24)이 되도록 견고하게 결합됩니다. 신체적 구조를 지닌 남자와 여자는 두 인격 주체로서 비록 신체적으로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진리와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똑같이 나누어받았습니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 존재의 특성인 이러한 능력은 동시에 정신적 차원과 신체적 차원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또한 신체를 통하여 혼인 안에서 “인격의 친교”를 이루도록 미리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혼인 계약으로 결합되어 “한 몸”(창세 2,24)을 이루게 될 때에, 그들의 결합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격체 고유의 성숙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은 그리스도께서 성사로 들어높이신 부부 사이의 계약으로부터 그 내적인 유대를 이끌어냅니다. 가정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 고유의 특성과 “친교”의 자취를, 그 자녀들 안에서 연장되는 부부의 근본적인 친교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혼인 예식 중에 주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두 분은 하느님께서 주실 자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을 키우겠습니까?”14) 신랑 신부가 하는 대답은 그들을 결합시켜 주는 사랑의 가장 심오한 진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합은 그들 자신 안에 스스로를 폐쇄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새로운 인격체를 향하여 그들을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그들은 다만 그들의 뼈에서 나온 뼈요 그들의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 참조)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인 한 인격체로서 그들 자신을 닮은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기꺼이… 하겠습니까?” 하고 물을 때에, 교회는 신랑 신부에게 그들이 하느님의 창조력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되도록, 생명의 전수에서 하느님과 협력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협력하여 새로운 인간 존재를 실존으로 부른다는 것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의 전수에 기여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출생 계통

9. 혼인으로 생기는 인격의 친교를 통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는 하나의 가정을 꾸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개인의 계보 곧 인간의 계통은 가정에 매여 있습니다. 인간적인 부성과 모성은 생물학에 그 뿌리를 박고 있으나, 동시에 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사도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부성(과 모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정신적 존재에서부터 지상의 물질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피조물의 세계 전체를 바라보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출산 행위는 하느님의 부성 안에서 그 원초적인 모형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경우에는 하느님께 대한 유사성의 이 “우주적” 차원만으로 부성과 모성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부부 결합에서 새로운 사람이 태어날 때에, 그는 자신과 함께 바로 하느님 자신을 닮은 구체적인 모습을 세상 안으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인간의 계통은 바로 생식 생물학 자체에 새겨져 있습니다.

부부가 부모로서 새로운 인간의 잉태와 출산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할 때에,15) 우리는 단순히 생물학의 법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하느님 친히 인간의 부성과 모성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지상의” 다른 모든 생식의 경우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홀로 인간이 창조 때에 부여받은 인간 고유의 저 “닮은 모습”의 근원이십니다. 출산은 창조의 계속입니다.16)

그렇게 하여, 새로운 아기의 잉태와 출생에서, 부모들은 “위대한 신비”(에페 5,32 참조)에 직면해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부모들처럼, 새로운 인간 또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으며, “진리와 사랑”의 삶에 부름받았습니다. 이러한 소명은 시간 속의 실존에 개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그 소명은 또한 영원으로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 가정의 의미에 복음의 빛을 비추시어 결정적으로 계시하여 주신 인간 출생 계통의 차원입니다.

공의회가 천명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17)입니다. 인간의 출생은 오로지 생물학적 법칙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또한 직접적으로, 인간 가정의 자녀들이 태어나는 출생 계통에 관련되는, 하느님의 창조 의지를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한 처음부터 인간을 “원하셨으며”, 모든 인간의 잉태와 출산의 모든 행위 안에서 인간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인간, 모든 인간은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질병이나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맞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그 자신을 목적으로 삼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모든 인간 존재의 인격 구조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그 자신에게 맡기시어, 인간 가정과 사회가 인간을 책임지도록 하셨습니다. 부모들은 새로운 인간 존재를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이 개인을 “그 자체를 위하여 원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되며, 또 그리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 간결한 표현은 매우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잉태의 순간부터, 그리고 출생의 순간부터, 새로운 인간 존재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을 발견”18)하고 자신의 인간성을 완전히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만성 질환자나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참입니다. “인간이 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소명입니다. 타고난 자질에 따라, 바로 인간성 자체인 천부의 재능에 따라,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다른 역량에 따라, “인간이 되는 것”이 소명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모든 인간을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러나 인간의 소명은 시간의 경계를 초월합니다. 그 소명은 사람이 되신 말씀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에게 당신 자신의 신적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인간의 궁극 운명에 대한 긍정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 자체를 위하여” 원하신다는 진술과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이 신적 생명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면, 인간은 참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 지상 생활의 시작과 그 마침에서 모두 다 커다란 뜻을 지닌 중요한 물음입니다. 그것은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물음입니다. 신적 생명을 위하여 인간의 운명을 지으시면서 하느님께서는 결정적으로 “그 자체를 위한”19) 인간 실존을 없애버리신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생명에 대한 인간의 참여와 인간의 생활 사이에 있는 관계는 무엇입니까? 아우구스띠노 성인께서는 저 유명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대답을 해주십니다. “님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20) 이 “불안한 마음”이 그 두 목적 사이에는 실제로 어떠한 모순도 없으며 도리어 하나의 관계, 보완성과 일치가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도록 도와줍니다. 인간의 계통 그 자체에 의하여,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며 바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완성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입니다(요한 6,37-4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가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되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마르 10,45 참조).

혼인한 부부들이 자녀를 원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서 그들 서로에 대한 사랑의 화관을 봅니다. 그들은 가정을 위하여 고귀한 선물21)인 자녀들을 원합니다. 이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부부 사랑 안에 그리고 부성애와 모성애에 새겨진 진리, 공의회가 하느님께서는 “그 자체를 위하여 인간을 원하셨다”고 한 진술에서 명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하였던, 인간에 관한 그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부부들은 분명히 창조주께서 인간을 원하시는 것과 똑같이 “그 자체를 위하여” 새로운 인간을 원하여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는 항상 또 불가피하게 시간과 변화의 법칙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지는 영원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서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예레 1,5). 인간의 출생 계통은 이처럼 하느님의 영원성에 결합되어 있으며, 오로지 그런 다음에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부성과 모성에 결합되는 것입니다. 바로 잉태의 그 순간에 인간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영원을 향해 운명지어집니다.

혼인과 가정의 공동선

10. 혼인 동의는 혼인과 가정에 공통된 선익을 규정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나 (긿)는 당신을 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병들거나 성하거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22) 혼인은 인격의 독특한 친교이며, 바로 이러한 친교의 토대 위에서 가정은 인격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랑 신부가 서로 혼인 동의를 교환하기 전에 주례자가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하느님 대전과 교회 앞에서” 맺는 약속입니다.23) 혼인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가정이 살아가고 커나갈 환경인 사회와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이 약속의 증인이 됩니다.

혼인 동의의 말은 부부와 가정의 공동선을 규정합니다. 먼저 부부의 공동선은 사랑과 신의와 존경, 죽을 때까지 “일생 동안” 계속되는 그들 결합의 영속성입니다. 두 사람의 선익은 동시에 각자의 선익이 되고 또 그 다음에는 자녀들의 선익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선은 그 본질상 개인들을 결합시켜 주고 또 각자의 진정한 선익을 보장하여 줍니다. 교회가 (그리고 혼인에 관하여 국가가) 위에 인용된 말로 표현하는 신랑 신부의 동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동의가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져”(로마 2,15)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 신부는 엄숙한 약속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동의를 하는 것이며, 하느님 대전에서 그 동의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랑 신부는 교회 안에서 혼인성사의 집전자들이 됩니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부부의 이러한 상호 약속을 “위대한 신비”(에페 5,32 참조)라고 가르치십니다.

혼인 동의의 말은 그런 다음 부부의 공동선에 본질적인 것을 표현하며, 미래 가정의 공동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가리켜줍니다. 이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하여, 교회는 신랑 신부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녀를 받아들이고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키울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러한 물음은 미래 가정의 공동선을 상기시켜 주며, 혼인과 가정 그 자체의 구조의 일부인 인간 출생 계통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자녀와 그 교육에 관한 질문은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겠다는 엄숙한 약속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혼인 동의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근본 목적의 두 가지 곧 자녀의 수용과 교육은 저 엄숙한 약속이 어떻게 이행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부성과 모성이란 본질상 육체적인 책임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책임까지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책임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 그 영원한 시작이 있고 또 반드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도록 이끄는 인간의 출생 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이 특별한 기도를 바치는 가정의 해에, 모든 가정은 각기 이러한 진리에 대한 각성을 새롭게 하고 심화시켜야 합니다. 성서 묵상이 지닌 부요는 가정 기도를 얼마나 풍요롭게 합니까! 성서의 말씀과 함께 하는 이 묵상 기도는 언제나 부부와 부모, 자녀와 후손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포함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출생 계통을 통하여 부부의 친교는 출산의 친교가 됩니다. 하느님 대전에서 맺은 계약으로 봉인된 두 배우자의 성사적 결합은 출산이 이루어질 때에 지속되고 또 더욱 강해집니다. 그것은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정의 해에 명백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각 가정의 일상 생활에서 기도를 규칙적인 습관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이며, 간청과 청원이고, 용서를 구함입니다. 이 모든 형태의 기도 가운데서, 가정 기도는 하느님께 드려야 할 말씀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가정 기도는 또한 가정의 유대로 묶여 있는 사람들의 상호 친교를 비롯 다른 사람에게 해야 할 많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편 작가는 묻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시편 8,5). 기도는,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하느님의 창조와 부성에 대한 기억이,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기억만이 아니라 특별히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기억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하여 공동체인 가정의 기도는 공통된 상호 기억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즉, 가정은 실제로 출산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기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현존하여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과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두 현존하여야 합니다. 가정은 각개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선이고 각개인은 가정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관점에서, 가정은 모든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는 이러한 선을 바로 가정의 공동선으로서 강화시켜 줍니다. 더 나아가서, 기도는 이러한 선을 전혀 새롭게 창조합니다. 기도 안에서 가정은 그 자체를 최초의 “우리”로서 발견하며,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우리” 안에서 “나”와 “너”입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아버지든 어머니든, 아들이든 딸이든, 형제든 자매든, 조부모든 손자녀든,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은 다른 가족들을 위한 존재입니다.

이 교서를 보내는 모든 가정이 바로 이와 같지 않습니까? 분명코 많은 가정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가정 단위를 두 세대만으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흔히들 주택을 구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 세대가 함께 살면 사생활을 침해당하고 삶 그 자체가 너무나 어려워진다는 신념에서 기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참으로 문제가 놓여 있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많은 가정들은 오늘날 “인간적”인 생활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동선을 창조하고 함께 나눌 사람이 가정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선은 그 본질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루는 창조와 분여를 요구합니다. “선은 그 자체로 확산적이다”(bonum est diffusivum sui).24) 선은 공동으로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더 자기 자신의 것이 되어, 나의 것─너의 것─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선을 따라 살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 이면의 논리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참으로 “아낌없이 주는 선물”이 됩니다.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줌

11. 인간은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이라고 단언한 다음, 공의회는 곧바로 이어서 말하기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다”25)고 합니다. 이것은 모순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모순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실존의 놀라운 역설, 사랑 안에서 진리에 봉사하도록 부름받은 실존의 역설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 자기 완성을 발견하게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사고 팔 수 없고 오로지 서로 거저 줄 수밖에 없는 것을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인격의 증여는 그 본질상 취소 불능의 지속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성은 맨 먼저 그러한 인격의 증여 곧 한 인격을 다른 인격에게 내어주는 증여의 본질 자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 자기 증여는 사랑의 배우자 본질을 보여줍니다. 신랑 신부의 혼인 동의에서 그들은 서로 이름을 부릅니다. “나 ( )는 당신 ( )을 아내로(남편으로) 맞아들여,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와 같은 증여는 어떤 방법으로 어떤 가격을 치르고 “구입”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더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의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성과 모성이 나오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미래의 부모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엄청난 값으로 하느님께 팔린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는 대가로써, 성사를 통하여 그들이 나누어받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혼인 예식의 전례적 절정은 성찬례입니다. “내어주는 몸”과 “흘리는 피”로써 드리는 이 희생 제사는 어느 모로 신랑 신부의 혼인 동의에서 그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혼인을 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일치 안에서 서로를 서로에게 주고받을 때에,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논리는 그들 생활의 한 부분이 됩니다. 이 논리가 결여된 혼인은 공허할 것입니다. 그 반면에 이러한 논리 위에 세워진 인격의 친교는 부모의 친교가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생명을 전해줄 때에, 새로운 인간인 “너”는 부부의 “우리”라는 지평의 한 부분이 되며, 부모는 그를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 딸 (누구), 우리 아들 (누구)”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첫번째 여인 하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사람을 낳았구나”(창세 4,1). 처음으로 아홉 달 동안을 기다리던 끝에 부모와 형제 자매들에게 나타난 한 인간을 낳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되어 자라나고 출생에 이르는 과정은 새로운 인간이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선물”로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의 창조를 가능하게 합니다. 새로운 인간은 태초부터 그러했듯이 참으로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이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 그 부모에게 전적으로 예속되어 있고 완전히 위탁되어 있는 이 존재가 어떻게 달리 보일 수 있겠습니까? 새로 태어난 아기는 자기가 실존하게 된 출생 그 자체로써 부모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 실존은 이미 하나의 선물, 그 인간에게 주는 창조주의 첫번째 선물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서 가정의 공동선이 실현됩니다. 부부의 공동선이 언제나 새로운 생명을 주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부부 사랑 안에서 성취되는 것과 같이, 가정의 공동선 또한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서 구체화된 저 동일한 부부 사랑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인간 출생 계통의 한 부분이 가정의 계통 곧 족보입니다. 이 족보는 단순히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요한 16,21 참조)는 사실의 사회적 귀결이라 하더라도, 교회의 세례대장에도 기재되어 후손들을 위하여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난 인간이 참으로 그 부모를 위한 선물이라는 것이 참입니까? 사회를 위한 선물입니까? 그 어느 것도 이것을 분명하게 가리켜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한 아기의 출생은 인구 기록의 다른 수많은 자료들처럼 등록되는 하나의 단순한 통계 사실로 나타납니다. 부모들에게는 한 아기의 탄생이 더 많은 노동과 새로운 재정 부담과 한층 더 많은 불편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아기의 출생을 바라지 말자는 유혹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26) 일부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서 이러한 유혹은 매우 강력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 아기가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그 아기는 아무것도 주지는 않고 오로지 받으려고만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피하기가 어려운 난처한 질문의 일부입니다. 세상에서 갈수록 방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은 때에, 한 아기는 방을 차지하려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한 아기가 가정과 사회에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옳은 말입니까? 모든 아기는 공동선의 한 “분자”가 아닙니까? 그 공동선이 없으면 인간 공동체는 파괴되고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아기는 그 형제 자매와 부모 그리고 온 가정에 주는 선물이 됩니다. 아기의 생명은 바로 생명을 준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며, 그 아기의 현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됩니다. 바로 그들의 생활에 참여하고 그들의 공동선과 가정의 공동선에 공헌하는 아기의 현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심리 구조가 지닌 병리 가능성이나 그 복합성이 어떠하든, 이 단순하고도 심오한 진리는 명백합니다. 사회 전체의 공동선은 바로 인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상기하였던 것과 같이, 인간은 “교회의 길”27)입니다.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이레네오 성인의 저 유명한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Gloria Dei vivens homo).28)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가장 고귀한 정의를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실존하는 모든 것의 공동선이며, 인류의 공동선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공동선입니다. 인간은 가정과 인류의 공동선이며 개별 집단과 다양한 공동체들의 공동선입니다. 그러나 이에 관한 정도와 양상에는 중대한 구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은 그가 속한 민족의 공동선이며, 그가 국민으로 있는 국가의 공동선입니다. 그러나 더욱더 구체적으로, 독특하게 또 일회적으로, 인간은 그 가정의 공동선입니다. 인간은 인류 다수의 일부인 한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바로 유일한 “이 인간”으로서 공동선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그 자신을 위한” 실존으로 부르시며,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가정 안에서 그의 “위대한 모험”, 인생의 모험을 시작합니다. “이 인간”은 모든 경우에서 인간 존엄성을 토대로 하여 자기를 완성할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가정 안에서 한 인간의 위치를 확립하는 것은 바로 이 존엄성입니다. 가정은 참으로, 다른 어떤 인간 현실보다도 더,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 “그 자신을 위하여” 존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가정이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사회 제도로서 남아 있는 까닭입니다. 가정은 “생명의 성역”29)입니다.

한 아기가 태어난다는 사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요한 16,21)는 사실은 파스카의 상징입니다. 요한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당신이 떠나는 슬픔을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에 비교하시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요한 16,21).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요한 13,1 참조)는 여기서 여인이 해산의 진통을 겪는 “때”에 비교됩니다. 새로운 아기의 출생은 전적으로, 주님의 부활로써 성취된,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는 우리에게 묵상의 자료를 제공하여 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생명의 현현인 것과 똑같이, 한 아기의 탄생 또한 생명의 현현입니다. 그 생명은 바로 하느님 자신 안에 있는 저 “충만한 생명”을 향해,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항상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레네오 성인이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Gloria Dei vivens homo)이라고 한 표현의 심오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여에 관한 복음의 진리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 증여가 없이는 “자기를 완전히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진리는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이 선물”이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은총(선물) 안에, 혼인 예식 중에 주례자가 신랑 신부에게 내려주시도록 기도하는 “성령의 은총”(선물) 안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게 해줍니다. 성령께서 그러한 은총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인간의 소명으로서 이를 실천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습니까!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으며, 오로지 이 진리 안에서만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가 없으면, 부부 생활과 가정 생활은 완전히 인간적인 의미를 성취하는 데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가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이 진리를 가르치고 증언하는 까닭입니다. 모든 인간의 도덕적 나약성에 관한 이해는 물론 가정에 관련된 복합적이고도 수많은 위기 상황에 대한 어머니다운 이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편, 교회는 인간 사랑에 관한 진리에 절대적으로 충실하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자기 기만에 빠지고 맙니다. 이 구원의 진리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마음의 눈”(에페 1,18 참조)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은 인간사를 비추는 복음의 빛에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2디모 1,10 참조). 인간이 “자기를 찾는” 진지한 자기 증여의 의식은 심각한 반대에 직면하더라도 끊임없이 수호하고 쇄신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발전의 거짓 문명을 선동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반대에 부딪치고 있습니다.30) 가정은 언제나 인류를 위한 선의 새로운 차원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책임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선익과 가정 공동체의 모든 가족의 선익을 다 포함하는 구체적인 공동선의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코 “힘이 드는 선”(bonum arduum)이지만, 그것은 또한 매력적인 선입니다.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

12. 가정에 보내는 이 교서에서, 이제 서로 밀접히 관련된 두 가지 문제를 다루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문화”에 관한 좀더 일반적인 문제이며, 둘째는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을 다루는 좀더 구체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혼인은 먼저 부부의 공동선과 다음에는 가정의 공동선에 관한 구체적인 책임을 낳습니다. 이 공동선은 인간에 의하여, 인간의 가치에 의하여, 인간 존엄의 크기를 드러내는 모든 것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실재는 모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일부입니다. 혼인과 가정의 영역에서, 이러한 책임은 여러 가지 이유로 더 더욱 “요구”되고 있습니다. 「사목헌장」은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 증진”을 올바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공의회는 이러한 존엄성 “증진”을 교회와 국가에 지워진 의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문화에서 이러한 의무는 맨먼저 혼인으로 결합되어 개별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책임으로 남아 있습니다.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은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무는 현대 세계에서 새로운 특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자신들을 “한 몸”으로 결합시켜 부모가 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은 그들의 인격적 관계를 위하여 또 생명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인간에게 생명을 전달함으로써 부모─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일치와 출산이라는 부부 결합의 두 가지 차원은 부부 행위 그 자체의 심오한 진리를 손상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31)

이것은 교회의 끊임없는 가르침이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시대의 징표”들은 그 가르침을 강력하게 재확인시켜 주는 새로운 근거들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스스로 당시의 사목적 요구에 매우 세심한 배려를 하셨음에도,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한다”(2디모 4,3 참조)는 사실에 위축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가르쳐야”(2디모 4,2 참조) 할 절박한 필요성을 명백하게 또 확고하게 지적하셨습니다. 현시대의 사건들에 대한 심오한 통찰로써 교회가 “건전한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새로운 힘으로 강력하게 선포하면서 오늘날의 “시대의 징표”들 안에서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열의와 통찰력을 찾아내기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의 일부는 인간학의 앞선 연구로부터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과 그 관련 분야 등의 다양한 전문 과학으로 전개되어 나간 바로 그 과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과학은 인간의 생명과 건강에 봉사하는 과학이요 기술[仁術]인 의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통찰들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나옵니다. 인간 경험은 그 모든 복합성 안에서 어떤 의미로는 과학을 앞서기도 하고 과학을 뒤따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부부들은 그들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의 의미를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또한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부부들의 체험에서 이를 배우며, 다양한 과학의 여러 발견에 더욱더 개방적이 됩니다. “전문가”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부부들한테 배움으로써 이제 기혼 부부들에게 책임있는 출산의 의미와 그 성취의 방법을 가르치는 더 좋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을 비롯 회칙 「인간 생명」, 1980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건의안”,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 그리고 신앙교리성의 훈령 「생명의 선물」에 이르기까지 다른 여러 문헌들에서 광범위하게 다루어왔습니다. 교회는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에 관한 윤리적 진리를 가르치고 또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그릇된 관념과 경향으로부터 그 진리를 수호합니다. 왜 교회는 끊임없이 그리하고 있습니까? 이 분야에서 교회의 양보를 얻어내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심지어 위협은 아니라 해도 부당한 압력으로써 교회를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교회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의 가르침은 흔히 시대의 뒷전에 서서 현대의 정신 사조에 폐쇄된 채로 인류는 물론 교회 자체에도 유해한 행위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난을 사기도 합니다. 교회는 자신의 주장만을 완고하게 고수함으로써 마침내는 인망을 잃어버리고 더 더욱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서 떨어져나갈 것이라는 말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교회가, 특별히 교황과 일치하는 주교단이, 이토록 중대하고도 긴급한 문제에 그리도 무감각하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교황 바오로 6세께서 회칙 「인간 생명」을 발표하시도록 이끌었던 것이 바로 이 중차대한 문제였습니다.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에 관한 교회 가르침의 토대는 극히 광범위하고도 확고합니다. 공의회는 인간에 관한 가르침에서 그 무엇보다도 이 교리를 천명하며, 인간은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이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32)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신 독생 성자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특별히 인간과 그 소명에 관한 문제를 의식하여, 부부 결합 곧 성서의 “한 몸”은 오로지 “인간”과 “내어줌”의 가치에 의지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는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자기를 완전히 실현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들에게는 부부 결합의 순간이 바로 이러한 자기 증여의 특별한 표현입니다. 그때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그들 남성과 여성의 “진리” 안에서 서로에게 서로 내어주는 상호 증여가 됩니다. 모든 혼인 생활은 내어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배우자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한 몸”(창세 2,24)이 되는 저 만남을 이룰 때에 가장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때 특별한 책임의 순간을 체험합니다. 그것은 물론 부부 행위에 연계된 출산 가능성의 결실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부부들은 새로운 인간 생명의 과정을 시작시킴으로써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그때 여인의 태중에서 전개될 것입니다. 아내가 먼저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자기와 “한 몸”을 이루었던 남편에게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줄 때에, 남편은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의 가능성에 책임을 지며, 나중에는 실질적인 부성과 모성의 책임을 집니다. 남편은 물론 자기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결과를 알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난 모른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 “그걸 원했던 사람은 당신이다”와 같은 표현 뒤로 숨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경우에서 부부 결합은 남자와 여자의 책임 곧 상황에 따라서는 현실적인 책임이 되는 가능성의 책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남자에게 그렇습니다. 남자가 생물학적으로는 발생 과정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여인 안에서 그 과정이 전개된다 하더라도, 남자는 또한 그 발생 과정의 시작에 관여하였습니다. 남자가 어떻게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자와 여자는 자기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생겨나게 한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러한 결론은 바로 인간 과학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인간”과 “내어줌”의 가치라는 관점에서 부부 행위의 의미를 더욱 깊이 분석하고 연구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 항구한 가르침에서 해왔던 일이며,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부부 행위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혼인 계약으로 서로 약속한 상호 자기 증여를 책임 있게 확인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서로 내어주는 전적인 자기 증여의 논리는 출산에 대한 가능성의 개방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여 혼인은 하나의 가정으로서 더욱더 큰 성취를 이루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분명히 남편과 아내의 상호 증여는 자녀 출산만을 그 유일한 목적으로 하지는 않으며, 그 자체로 사랑과 생명의 상호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여의 내밀한 진리는 언제나 수호되어야 합니다. “내밀한”이라는 말은 여기서 “주관적”이라는 말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은 자기를 내어주는 남자와 여자의 객관적인 진리와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 무엇보다도 “쾌락”을 위한 도구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바로 모든 행위의 목적이고 또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비로소 모든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이 중대하고도 민감한 주제에 관한 성찰을 마치면서, 저는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기혼 부부 여러분에게 그리고 혼인은 물론 책임있는 모성과 부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여러분을 도와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한 격려를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특별히 문화 순응의 강력한 경향을 거부해 왔고 용기있게 “흐름을 거슬러 헤엄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목자들과 수많은 학자들, 신학자들, 철학자들, 저술가들과 언론인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 증진을 필생의 중대한 과업으로 삼는 진정한 평신도 사도들로서 그 숫자가 증대되고 있는 전문가들과 의사들과 교육자들에게 그러한 격려를 드립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저는 이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없다면, 신부들과 주교들이 또 베드로의 후계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사제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이러한 확신을 지니게 되었으며, 고해소에 앉으면서부터 수많은 기혼 부부들의 관심과 두려움과 희망을 함께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반항과 거부의 어려운 사례들에 부딪치기도 하였지만, 또한 동시에 놀라운 책임감과 관대함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 모든 부부들을 마음에 두고 이 교서를 쓰면서, 저는 따뜻한 사랑과 기도로써 그들을 껴안고 있습니다.

두 가지 문화

13. 친애하는 가정들이여, 책임 있는 부성과 모성의 문제는 이제 제가 여러분과 함께 논의하고자 하는 “사랑의 문화”에서 결코 없어서는 아니될 필수 부분입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가정은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일컬으셨던 “사랑의 문화”33)에 대한 토대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랑의 문화”(civilization of love)는 그분이 교회의 가르침에 도입하시어 이제 친숙하게 된 표현입니다. 오늘날 “사랑의 문화”를 언급하지 않는 교회나 교회의 언명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표현은 초대 교회의 “가정 교회” 전통에 이어져 있으며, 현시대에서도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원으로 보아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말은 “시민”(civis)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모든 개인 생활의 시민적 또는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명”이라는 말의 심오한 의미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 문화(culture)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문명은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므로, 문명은 인류의 역사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창조주의 손에서 세상을 부여받고, 자기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세상을 가꾸라는 과업도 함께 받았습니다. 이 과업의 성취가 문명을 일으키는 것이며, 문명은 결국 다름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인간화”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문명은 “문화”와 똑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의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으며, 이제는 더욱 친숙한 표현으로 더 잘 쓰이고 있습니다. 현재 쓰이고 있는 의미에서, 사랑의 문화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주신다”34)고 한 공의회 「사목헌장」의 말씀에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사랑의 문화는, 요한이 기록한 대로(1요한 4,8.16),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고 한 계시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나오는 사랑의 송가(13,1-13)에서 바오로에 의해 효과적으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문화는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주시는”(로마 5,5) 사랑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문화는 끊임없는 계발의 결과로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계발을 복음서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유비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요한 15, 1-2).

신약성서의 이 대목이나 다른 본문에 비추어, “사랑의 문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왜 가정이 사랑의 문화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교회의 길”이 가정이라면, 사랑의 문화 또한 “교회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통하여 나그네 길을 걸으며 가정들을 교회의 길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또한 가정 때문에 그리고 가정을 통하여 다른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제도들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가정은 실제로 사랑의 문화에 의존하고 있으며, 바로 거기서 가정으로서 그 존재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정은 사랑의 문화의 중심이요 핵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다”는 사실─그리고 인간은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실존으로 부르신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결코 진정한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진지한 증여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온전히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인격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가정 안에 “인격의 친교”가 없다면, 결코 사랑의 문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문화가 없다면 인간과 인격의 친교에 대한 그러한 개념을 지닐 수 없습니다. 가정은 사회의 근본 “세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포가 안팎으로부터 올 수 있는 일종의 문화적 근절 위협에 노출되지 않으려면, 그 “가지”들이 영양분을 끌어올리는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참으로, 한편에 “사랑의 문화”가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에는 파괴적인 “반문화”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수많은 경향과 상황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현시대가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진리의 위기”로 드러나고 있는 커다란 위기의 시대라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의 위기란 무엇보다도 먼저 “개념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 “자유”, “아낌없이 내어줌”, 그리고 심지어는 “인격”, “인간의 권리”라는 말들이 참으로 그 본질적인 의미대로 쓰이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가 교회와 세계를 위하여 특별히 서방에서 매우 의미 심장하고 중요한 문헌으로 입증된 이유입니다. 혼인과 가정 안에서 자유와 인격의 친교에 관한 진리가 그 광채를 다시 찾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의 문화 건설이 참으로 시작될 것이고 또 공의회가 그러하였듯이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 증진”35)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진리의 광채」가 그토록 중요하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먼저, 대비하여 보자면, 현대 문명의 발전은 흔히 한쪽으로만 치우쳐 이루어진 과학 기술의 진보와 연계되어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실증주의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실증주의는 이론적인 불가지론과 실천적 윤리적인 공리주의로 귀착되고 맙니다. 바로 우리들의 시대에, 역사는 어느 모로 그렇게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공리주의는 생산과 실용의 문명이며, “인간”의 문화가 아닌 “사물”의 문명입니다. 사물이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간이 이용되고 있는 문명입니다. 실용 문명의 맥락 속에서 여자는 남자를 위한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한갓 장애물이 되며, 가정은 가족들의 자유를 가로막는 하나의 제도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부모들의 이견이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도입된 일부 성교육 프로그램들만 보아도, 또는 두 배우자가 특별히 여자 편에서 이른바 “선택의 권리”(pro-choice)라는 허울 뒤에 부질없이 숨으려고 하는 낙태 지지 경향들만 보아도 그러한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두 가지의 예일 뿐이며, 수많은 예들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화 상황 속에서는 가정이 그 근본부터 뒤흔들리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문화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인간에 관한 진리 전체에 반대되는 것이며, 인간에 대한 위협이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발견을 허용하지 않고, 또 인간이 배우자로서, 부모로서, 자녀로서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술 문명”이 주창하는 이른바 “안전한 성”(性)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인간의 전반적인 요구로 보아, 결단코 안전하지 못하며 정말이지 극도로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가정을 모두 위험으로 몰아넣습니다. 이 위험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 위험은 인간 자신과 가정에 관한 진리의 상실이며, 자유의 상실과 거기서 귀결되는 바로 사랑 자체의 상실에 대한 위험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진리가 또 오로지 진리만이 여러분을 위하여 “지순한 사랑”(집회 24,18 참조)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랑을 마련하여 줄 것입니다.

현대의 가정은, 모든 시대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지순한 사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순결하지” 않은 사랑, 한갓 정욕의 만족(1요한 2,16 참조)이나 남자와 여자의 상호 “이용”으로 전락하고 마는 사랑은 인간을 그들 약점의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현대의 일부 “문화적 행태”가 이러한 예속으로 나아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바로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행태들이 있고, 따라서 그러한 행태는 인간을 점점 더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사랑의 문화는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요한 16,21 참조), 그리고 결과적으로 배우자들이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사랑의 문화는 “옳은 일을 보고 기뻐하는 것”(1고린 13,6 참조)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소비주의와 반출산 사고에 젖은 문명은 사랑의 문화가 아니며, 결코 사랑의 문화가 될 수도 없습니다. 가정이 사랑의 문화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은 가정 안에서 사람과 세대 사이를 묶어주는 유대, 특별히 긴밀하고도 강력한 그 유대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여전히 상처받기 쉬운 존재입니다. 가정을 약화시키거나 실제로 그 일치와 안정성을 파괴하는 위험에 쉽게 희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의 결과로서 가정은 사랑의 문화에 대한 증언을 중지하고 일종의 역표징으로서 그에 대한 부정이 될 수 있습니다. 파괴된 가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특수한 “반문명” 형태를 고착시킬 수 있으며, 사회 생활 전체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사랑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커다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14. 사도 바오로께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찬양하시는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 사랑(1고린 13,4.7)은 분명히 커다란 노력을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며, 그것은 인간의 참된 선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을 비추어주게 합니다. 성 토마스의 말대로, 선은 그 본질상 “확산적”36)입니다. 인간의 선과 공동체의 선을 창조할 때에 사랑은 비로소 참된 것입니다. 사랑은 그러한 선을 창조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 선을 줍니다. 오로지 사랑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에게 커다란 노력을 요구하는 사람만이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커다란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사랑은 모든 인간 상황 안에서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복음에 개방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도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계명으로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까? 요즈음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요구하는 사랑을 재발견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은 참으로 견고한 가정의 토대가 되고, “모든 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따르자면, 사랑이 “시기”를 낳거나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례”하다면, 그러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낼” 수 없습니다(1고린 13,4-7 참조). 성 바오로 사도께서 가르치시는 참 사랑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1고린 13,7). 이 참 사랑이 바로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 사랑입니다. 내면에서 움직이는 사랑은 바로 “사랑이신”(1요한 4,8.16) 하느님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내면에서 움직이는 사랑은 또한 인간의 구원자요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내신 첫째 편지의 제13장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사랑의 문화에 관한 완전한 진리를 신속하고 명확하게 깨닫도록 이끌어주는 길을 따라나섭시다. 사랑의 송가처럼 그토록 단순하게 그토록 심오하게 이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성서 구절은 없습니다.

사랑이 부딪치는 위험은 또한 사랑의 문화가 부딪치는 위험입니다. 그 위험들은 실질적으로 사랑의 문화를 반대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기주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주의만이 아니라 부부의 이기주의, 더 넓게는 사회적 이기주의, 이를테면 계층이나 민족의 이기주의(민족주의)가 사랑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온갖 형태의 이기주의는 직접적으로 근본적으로 사랑의 문화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은 단순히 “반이기주의”로 정의되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극히 빈약하고도 순전히 부정적인 정의입니다. 사랑과 사랑의 문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온갖 형태의 이기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의 반대인 “이타주의”라고 해야 더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 바오로 사도께서 밝혀주신 사랑의 개념은 한층 더 풍부하고 더욱 완전한 것입니다. 고린토 전서에 나오는 사랑의 송가는 사랑의 문화의 대헌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개인의 행동만이 아닙니다.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자기를 찾는” 인격체인 인간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수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어줌은 분명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입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에 관한 복음 진리의 바로 핵심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전적으로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하나의 면허로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자유란 자기를 내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유는 내어줌의 내적 규율을 의미합니다. 내어줌의 관념은 주체의 자유로운 활동만이 아니라 또한 의무의 측면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격의 친교” 안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 가정의 한복판에서 우리 자신을 거듭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노선을 계속 따라가면, 우리는 개인주의와 인격주의의 정반대 명제를 만나게 됩니다. 사랑은, 사랑의 문화는 인격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 인격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겠습니까? 그리고 왜 개인주의는 사랑의 문화를 위협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열쇠를 공의회의 표현인 “아낌없이 내어줌”에서 찾고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그 주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그가 즐겁거나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신이 그것을 “진리로 세우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자유의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누가 객관적인 진리의 이름으로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원하거나” 요구한다는 사실을 결코 용인하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를 토대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낌없이 내어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개인주의는 이처럼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인격주의 사이의 진정한 정반대 명제는 이론의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ethos)의 차원에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인격주의 정신은 이타적인 정신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주는 선물이 되도록 사람을 움직이고, 자기를 내어줌에서 기쁨을 발견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입니다(요한 15,11; 16,20.22 참조).

이제 인간 사회에 필요한 것은, 그리고 그 사회 안에서, 흔히는 사랑의 문명과 그 적들 사이의 투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정들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인간관 안에서 또 그 인간성의 완전한 “실현”을 규정하는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관점 안에서 가정과 사회의 건실한 토대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문화에 반대되는 것은 이른바 “자유로운 사랑”의 현상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흔히 자기의 “솔직한” 느낌을 따르는 길로서 제시되지만 실제로는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위험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자유로운 사랑” 때문에 파괴되어 왔습니까! 온갖 조절 장치로부터 “해방된” 사랑을 염원하여 모든 경우에 “솔직한” 감정의 충동만을 따른다는 것은 다만 개인을 인간 본능의 노예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본능을 성 토마스는 “영혼의 열정”37)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유로운 사랑”은 인간의 약점을 남용하고, 여론의 유혹과 축복의 도움으로 일종의 체면 “치레”를 하게 합니다. 그와 같이 “도덕적인 핑계”를 만들어 양심을 “달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결과들을 다 고려하지 않더라도, 특별히 다른 배우자와 떨어져 살며 생활비나 양육비를 지불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경우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빼앗긴 자녀들은 실제로 부모가 살아 있는 고아로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윤리적 공리주의의 바탕에는 “최대”의 행복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갓 쾌락에 지나지 않는 “공리주의적 행복”입니다. 그것은 참된 선의 객관적 요구를 외면하거나 반대하는, 개인의 배타적인 행복을 위한 즉각적인 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유에 대한 개인주의적 이해 곧 책임 없는 자유를 기초로 한 공리주의 강령은 사랑의 적입니다. 비록 그 전체로 보아 인류 문명의 한 표현이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사회가 받아들일 때에, 그러한 개념은 온갖 형태의 인간 약점과 재빨리 결합하여 곧바로 가정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위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누구든 저 비참한 수많은 결말들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의 가슴속에 고통스럽고도 생생한 상처로 감추여 있기는 하지만, 그 엄청난 숫자는 통계로써 확인되고 있습니다.

부부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은 그러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상처를 생겨나게 한 위험들도 인간 공동체에 그토록 유익하고 건강한 힘인 재생력을 박탈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힘은 용서와 화해의 신적인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은총은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영신적 힘을 보장하여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가족들은 참회와 화해의 놀라운 성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우리는 가정을 위하여, 특별히 파탄의 위협에 직면한 가정을 위하여, 가족들과 함께 바치는 가정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길이 험하고 비좁고 가파르며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혼인한 부부들이 자신의 소명을 사랑하게 되도록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과 맺은 그들의 계약에 충실해지도록 기도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은 교회의 길입니다.” 이 가정 교서에서 우리는 부부 생활과 가정 생활을 통하여 하늘 나라로 나아가는 이 길(마태 7,14 참조)을 고백하고 또 선포하고자 합니다. 가정의 “인격의 친교”가 “성인들의 통공”을 위한 준비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1고린 13,7) 사랑을 믿고 선포하는 까닭이며, 성 바오로 사도와 함께 사랑 안에서 “가장 위대한”(1고린 13,13 참조) 덕행을 인식하는 이유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그 누구에게든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으십니다. 배우자들과 가족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은 완전한 성덕(마태 5,48 참조)에 이르도록 똑같이 부름받고 있습니다.38)

제4계명:“부모를 공경하라”

15. 십계명 중 제4계명은 가정과 그 내적인 일치 곧 가정의 연대성에 관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문구만을 보면, 제4계명은 가정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가정은 제4계명의 실질적인 주제입니다. 세대간의 친교를 이루기 위하여 입법자 하느님께서는 “…공경하라”(출애 20,12)는 이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또 다른 표현 방법을 만나게 됩니다. 이 문구는 어떤 “인위적인” 방법으로 가정을 들어높이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주체성과 거기서 나오는 권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특별히 인격체 간의 강렬한 관계입니다. 즉, 부부 간의 관계,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 세대 간의 절친한 관계입니다. 가정은 특별한 방법으로 수호되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공경하라”는 이 말보다 더 좋은 보호 장치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주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출애 20,12). 이 계명은 개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 대한 관계에 관련되는 세 가지 기본 계명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신명 6,4).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출애 20,3). “다른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첫째가는 계명이요 가장 큰 계명입니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신명 6,5; 마태 22,37 참조) 사랑하여야 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제4계명이 이 특별한 맥락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여러분에게 부모님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대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신 분들이고 특별한 가계와 민족과 문화 속에서 여러분들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분들입니다. 하느님 다음으로, 부모님은 여러분의 첫번째 은인들이십니다. 하느님 홀로 선하시고 참으로 선 그 자체이시지만, 부모님 또한 이 지고한 선에 독특한 방법으로 참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하십시오! 여기에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와 어떤 유비가 있습니다.

제4계명은 사랑의 계명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경”과 “사랑” 사이의 유대는 깊숙한 것입니다. 공경은 바로 그 중심에서 정의의 덕행과 연결되어 있으며, 정의는 그 나름으로 사랑에 대한 언급 없이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가정의 가족들, 부모와 자녀들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4계명이 지시하는 인간 관계의 체제는 일방적인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부모 공경만을 강요하는 것입니까? 글자 그대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우리는 부모들이 해야 할 자녀 존중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공경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계명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너희 스스로 인간에 대한 확고한 인정, 그 누구보다도 먼저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 대한 확고한 인정에 따르도록 하여라.” 공경은 본질적으로 이기심이 없는 몰아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성실한 증여”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공경은 사랑과 더불어 한데 모이는 것입니다. 제4계명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공경을 드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면, 그 계명은 가정의 선익을 위한 관심에서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 계명은 부모 자신들에게도 요구를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 부모들은 너희들의 삶이 마땅히 너희 자녀들의 공경(과 사랑)을 받을 만하게 되도록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너희가 공경을 받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계명이 공허한 도덕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여라! 궁극적으로 이제 우리는 상호 공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간접적으로 부모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 자녀들을 존중하여라.” 자녀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바로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잉태되는 최초의 순간부터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4계명은 그처럼 가정을 일치시키는 내밀한 유대를 표현함으로써 가정의 내적 일치의 토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계명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너희는 너희 주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그래야”라는 접속사는 거의 “공리주의”적인 계산이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릅니다. 장수를 하기 위하여 부모를 공경한다는 그런 계산 말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든, 이것이 “공경하라”는 명령법의 근본 의미를 축소시키지는 못합니다. 공경한다는 것은 그 본질상 몰아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공경한다는 것은 결코 이익의 계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정 공동체 구성원들의 상호 존중 태도가 또한 어떤 이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참된 선이 “유익한” 것이듯이, “공경한다”는 것은 분명코 유익한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은 “공동 존재”의 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인(여기서는 그 불가해소성)과 가정 공동체의 가장 탁월한 선입니다. 그것은 또한 바로 주체 그 자체의 선으로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의 주체인 것과 똑같이, 가정 또한 하나의 주체입니다. 가정은 친교의 심오한 유대로 함께 결합되어 하나의 단일한 공동 주체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정은 다른 어떠한 사회 제도보다 더 나은 주체입니다. 즉, 민족이나 국가보다 더 나은 주체이고 어떠한 사회와 국제 기구보다 더 나은 주체입니다. 이러한 사회들은, 특별히 민족은 개인으로부터 그 가정으로부터 주체성을 부여받는 그만한 정도의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일반 여론 앞에서 가정을 “찬양”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낸 “이론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가정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또 다른 표현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제4계명으로부터 추론해 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강조되어야 하고 또 더욱 깊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그 진리는 현대의 인권 제도를 위하여 제4계명의 중요성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제도와 법적 체제는 법률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경하여라.” “인권”은 그 근저에 “공경하라”는 계명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단순히 개인이기 때문에 바로 “이” 개인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는, 개인에 대한 인정이 결여되어 있다면, 모든 인권이란 결국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권리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민족과 국가와 국제 기구의 생활이 가정을 거쳐 “통과되고” 또 십계명 중 제4계명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재천명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문서로 작성된 수많은 법률적 선언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외”로 인하여 심대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몽주의” 전제의 결과입니다. 그 전제에 따르자면, 인간은 “오로지” 인간일 뿐임에도, 인간 “그 이상”의 것이 됩니다. 인간의 풍요에 여러 모로 속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소외가 우리 시대를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가를 목격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소외는 가정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인간에 대한 긍정은 그 대부분이 가정에 대한 긍정으로, 따라서 제4계명에 대한 긍정으로 귀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가정은 여러 가지로 인간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입니다. 인간이 되어라! 이것은 가정 안에서 전해지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아들딸로서, 국가의 한 시민으로서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세계의 한 시민으로서 인간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인류에게 제4계명을 주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인자하신 분”(그리스 말로 하자면, “박애”: philanthropos)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사랑과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대로(요한 10,10 참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으로 인해 생명을 얻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랑의 문화”가 완전히 가정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의 문화는 여전히 순전한 이상향입니다. 참으로, 사랑은 어느 누구로부터 요구될 수 없고 또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으며, 사랑은 사람들이 가지거나 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말에는 진리가 일부 들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고 명령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남겨주셨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제 이상향이 아닙니다.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으로 수행하여야 할 하나의 과업으로서, 사랑이 인류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사랑은 혼인성사 안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 “의무”의 기본 원리로서 맡겨져 있으며, 또한 사랑은 먼저 부부로서 다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져야 할 그들 상호 책임의 토대가 됩니다. 혼인성사를 거행하면서, 배우자들은 각자 서로를 주고받으며, 자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교육하겠다는 각오를 선언합니다. 바로 이러한 중심축 위에서 인류의 문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사랑의 문화”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은 이러한 사랑의 표현이요 원천입니다. 가정을 통하여 사랑의 문화의 최초 흐름이 전해지며, 사랑의 문화는 바로 가정 안에서 그 “사회적 토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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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신랑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18. 어느 날 요한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신랑이 그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과 함께 있다고 하십니다.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다”(마태 9,15 참조). 이렇게 하여 그분은 당신 자신의 인격 안에서 성취된 신랑이신 하느님의 표상을 가리키셨습니다. 이 표상은 사랑의 신비인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계시하기 위하여 이미 구약성서에서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일컬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본질을 계시하시며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의 선택은 또한 간접적으로 부부 사랑의 심오한 진리에 빛을 비추어줍니다. 하느님께 관한 말씀을 하시려고 이 표상을 선택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부성과 사랑이 혼인으로 결합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안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실 때에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성모 마리아와 함께 최초의 제자들과 더불어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2,1-11 참조). 그럼으로써 그분은 가정에 관한 진리가 어느 정도는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하셨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그리고 특별히 예언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수없이 아름다운 표현들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처럼 온화한 사랑이고, 자기 신부에 대한 신랑의 사랑처럼 온유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은 그와 똑같이 강렬하게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징벌하는 사랑이 아니라 오직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인간을 맞으러 뛰어나오시는 사랑입니다. 인간을 들어높여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모든 이교도 세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사랑입니다.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혼인에 관한 신적 진리의 선포자가 되셨습니다. 그 진리는 인간 가정이 의지할 수 있고 삶의 온갖 시련 속에서도 자신을 얻게 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심으로써 또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최초의 “표징”(기적)을 이루심으로써 이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랑 곧 온유한 부부 사랑이 얼마나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요구를 하고 있는가를 설명하시면서, 혼인에 관한 진리를 거듭 선포하십니다. 모세는 이혼장을 써주도록 허용함으로써 비교적 가벼운 요구를 하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들의 강력한 논거로 모세를 걸고 들어올 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마태 19,8). 그리고 그분은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으며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도록”(창세 2,24)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논리적인 일관성을 갖고 그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마태 19,6). 모세의 율법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반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마태 19,8).

예수님께서는 바로 창조의 기원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깨달아 “처음”을 내세우십니다. 가정은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토대로 삼고 있으며, 가정을 통하여 인류 역사 전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혼인은 그 본질상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봉인된 새로운 계약의 참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부들과 가정들이여, 하느님께서 어떤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는가”를 기억하십시오!(1고린 6,20 참조).

그러나 이 놀라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모세가 자기 동포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끈질긴 요구 앞에서 뒤로 물러섰다는 것은 제자들의 대꾸를 들어볼 때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바로 사도들은 스승의 그러한 말씀을 듣고서 이렇게 대꾸하였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 1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의 선익, 가정과 사회 전체의 선익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정해 놓으신 요구를 확인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그 기회를 빌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결혼하지 않는 결단의 가치를 긍정하십니다. 이러한 선택 역시 그 방법은 다르더라도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선택 안에서 우리는 축성 생활의 기원을, 동방과 서방의 수도회와 수도 단체의 기원을, 라틴 교회의 전통 안에 있는 사제 독신제 규율의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를 위한 사랑은 한 사람을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택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마태 19,12 참조).

혼인은 그러나 하느님 백성 대다수가 받아들이고 있는 보통의 인간 소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1베드 2,5 참조), 바로 가정 안에서 산 돌들이 신령한 집을 짓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입니다(1고린 6,19 참조). 신적인 생명의 전수는 인간 생명의 전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혼인은 인간 자녀의 출생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받은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입양된 하느님 자녀의 출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친애하는 부부들과 부모 여러분, 이것은 바로 신랑이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신랑이 착한 목자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그분의 목소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어디로 인도하고 계시는지, 여러분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풀밭을 마련해 주시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계시는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양떼를 약탈하는 이리떼를 그분이 어떻게 막아주시는지 여러분은 압니다. 그분은 언제 어느 때나 당신 양떼를 곧 모든 남편과 아내를, 모든 아들과 딸들을, 여러분의 모든 가족들을 구해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착한 목자로서 자기 양떼를 위하여 당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를 하고 계신다는 것(요한 10,11 참조)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오늘날의 수많은 이념들이 제시하는 위험한 변절의 길이나 낭떠러지가 아닌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나눈 대화에서 또 사도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러하셨듯이, 오늘날의 세계에 완전한 진리를 거듭 선포하고 계십니다. 사도들은 땅 끝에 이르기까지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은 물론 그 당시의 모든 백성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새로운 인간”이 되어,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몸”을 이루고(갈라 3,28 참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의 존엄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인간은 위로자시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곧 교회의 시작이었으며,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참조)의 예시였습니다.

사도들은, 혼인과 가정에 대해서도 처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용기있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혼인과 가정이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진정한 소명이며 하나의 사도직 곧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은 지상의 변모와 세상의 혁신, 창조와 전인류의 쇄신에 기여하여야만 합니다.

친애하는 가정들이여, 여러분 또한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언제나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1베드 3,15 참조)을 증언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착한 목자께서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속에 저 희망을 심어두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따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몸소 마련해 두신 생명의 초원을 향하여 나아가십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힘은 언제나 여러분의 어려움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교부들이 “제2의 세례”라고 올바로 일컬었던 화해의 성사의 힘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죄악보다 훨씬 더 큽니다. 세례를 성숙하게 하는 견진성사의 신적인 능력이 세상에 현존하는 부패보다 훨씬 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힘은 그 어디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합니다.

성체성사는 참으로 놀라운 성사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원 능력의 원천으로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과 음료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누리도록(요한 10,10 참조)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성령의 은총으로써 우리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생명은 바로 우리를 위한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여러분, 친애하는 가정들과 부모 여러분, 그 생명은 바로 여러분을 위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중에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식사하러 모일 때에, 화목하게 함께 모일 때에, 바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십니다. 또한 더 큰 공동체에서 성찬의 식탁에 나아갈 때에도 그렇습니다. 엠마오에서 그러하였듯이,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루가 24,35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오랫동안 문을 두드리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문이 열리면 들어오시어 우리와 함께 잡수시려고 문 밖에 기다리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묵시 3,20 참조). 최후의 만찬과 거기서 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지닌 모든 능력과 지혜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구원을 도울 수 있는 다른 힘과 지혜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모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 자신을 교육할 수 있는 다른 힘과 다른 지혜는 결코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교육적인 힘은 세세대대로 세기를 이어오며 입증되었습니다.

어디서나 착한 목자는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신랑 신부가 서로의 평생을 서로에게 위탁할 때에 그 신랑 신부 가운데 ‘신랑’이 계셨던 것과 같이, 착한 목자 또한 그렇게 오늘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희망의 연유로서, 우리 마음을 위한 힘의 원천으로서, 한층 더 새로운 열정이 솟아나오는 샘으로서, “사랑의 문화”의 승리에 대한 표징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오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사람들이 당신을 죽음에 부쳐 당신이 다른 여느 사람과 같이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확신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복음사가는 “그분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고 말합니다.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존재이신 당신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죽으셨지만 살아계시고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실 것입니다(묵시 1,17-18).

위대한 신비

19.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가정 생활에 관하여 언급하시며 “위대한 신비”(에페 5,32 참조)라는 간결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사도께서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신비”에 관하여 쓰셨던 것은, 비록 창세기와 구약성서의 전통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교회의 교도권 안에서 드러나게 될 새로운 접근법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계약의 성사인 혼인을 “위대한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혼인은 당신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배우자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쓰셨습니다. “남편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에페 5,25-26). 사도께서는 여기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길게 설명하였던 세례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로마서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참여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참여라고 설명하십니다(로마 6,3-4 참조). 이 세례성사 안에서 신앙인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세례성사는 바로 하느님의 생명인 새로운 생명을 전수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인(神人)의 신비가 세례의 사건 안에서 어느 정도 새롭게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이레네오 성인이 동서방의 다른 많은 교부들과 더불어 이렇게 말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44)

신랑은 이제 사람이 되신 바로 그 동일한 하느님이십니다. 구약성서에서 야훼는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신랑은 다정하면서도 많은 요구를 하고 질투가 심하면서도 충실한 신랑이십니다. 예언자들이 그토록 강력하고도 절절한 어휘로 진술하는 이스라엘의 배반과 탈주와 우상 숭배의 순간들도 “끝까지 사랑하시는”(요한 13,1 참조) 신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결코 식어버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배우자 관계에 대한 확인과 성취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계약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랑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증하여 주십니다(마태 9,15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교회와 함께 계십니다. 교회는 신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이 신부는, 에페소서에서 말하는 대로, 세례받은 사람 각자 안에 현존하며, 마치 신랑 앞에 나서는 신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티나 주름이나 그 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페 5,25-27). 신랑이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은, 교회가 비록 죄인들의 교회로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교회의 성덕을 그 성도들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합니다. 죄인들도, “세리와 창녀들”도, 그리스도 친히 복음서에서 천명하신 대로, 성덕으로 부름받고 있습니다(마태 21,31 참조). 모든 사람은 거룩하고 흠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1베드 1,16 참조).

이것이 바로 “위대한 신비”의 심오한 의미이며, 교회 안에 있는 성사적 은총의 내적 의미이고,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가장 심오한 의미입니다. 그 성사들은 신랑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의 결실이고, 끊임없이 확산되어 나가 사람들에게 더욱 커다란 초자연적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사랑의 결실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남편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라고 하신 다음에 이렇게 단호히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남편된 사람들도 자기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기르고 보살펴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기르시고 보살펴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에페 5,28-30). 그리고 사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부부들을 격려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에페 5,21).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혼인과 가정에 관한 영원한 진리를 신약의 빛 안에서 새롭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 안에서 갈릴래아의 가나에 현존하심으로써, 십자가의 희생 제사와 당신 교회의 성사들로써 이 진리를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남편들과 아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 사랑의 준거를 발견합니다.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하여 말씀하시는 가운데,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창세기를 인용하여 부부 사랑의 유비를 사용하십니다.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이것은 창조 때에 이미 현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어 교회에 맡겨진 저 영원한 사랑의 “위대한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참으로 심오한 진리입니다.” 사도께서는 거듭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신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에페 5,32).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의 창조 안에 내포된 이 “위대한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부부 사랑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소명과 부성과 모성에 대한 그들의 소명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상징으로서 또는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와 인간성의 “위대한 신비”는 “한 몸”(창세 2,24; 에페 5,31-32 참조) 안에서, 즉 혼인과 가정의 실재 안에서 표명된 “위대한 신비”를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정 그 자체가 하느님의 위대한 신비입니다. “가정 교회”로서, 가정은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보편 교회는, 그리고 보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개별 교회들은 “가정 교회” 안에서 또 그 사랑의 체험 안에서, 즉 부부 사랑, 부성애와 모성애, 형제애, 인격 공동체의 사랑, 세대간의 사랑에 대한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가장 내밀하게 계시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없는 인간 사랑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신랑이 먼저 끝까지 사랑하였던 그 사랑을 신랑 없이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그 사랑에 또 그 “위대한 신비”에 참여할 때에 비로소 그들은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신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무엇이 참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고 또 그 요구가 얼마나 철저한 것인가를 모르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코 그들에게 매우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에페소서의 가르침은 그 도덕적 가르침의 권위와 그 깊이에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주는 “위대한 신비”로서 혼인을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가정을 지적하시면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일찍이 남편들에게 하신 말씀을 재확인하십니다. “남편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내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 5,33).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이제는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남편을 존경합니다. 이 사랑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기를 내어주는 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인간 존엄성과 그의 절대적인 유일성에 대한 인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부는 각기 하나의 인간 존재로서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입니다.45) 그러나 부부는 각기 의식적이고 책임있는 행위로써 상대방에게 또 하느님께 받은 자녀들에게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 제4계명을 반향시켜 자신의 권고를 계속하신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자녀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계명은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그 약속은,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고 땅에서 오래 살리라는 것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에페 6,1-4). 사도께서는 그렇게 하여 제4계명 안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상호 존경과 부모와 자녀 사이의 상호 존중에 대한 묵시적인 약속을 보고 계시며, 바로 그 안에서 안정된 가정의 원리를 인식하고 계십니다.

“위대한 신비”에 관한 성 바오로 사도의 훌륭한 종합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하느님과 인간에 관한 가르침의 요약 또는 개요로 드러납니다. 불행하게도 서구 사상은 근대 합리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이러한 가르침에서 점차 멀어져 갔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원칙을 수립한 철학자는 또한 인간의 근대 개념에 특유의 이원론적 성격을 부여하였습니다. 인간 안에서 영과 육, 신체와 정신을 철저하게 대비시키는 것은 합리주의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영과 육의 단일체 안에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46) 육체는 결코 단순한 물질로 격하될 수는 없습니다. 육체는 정신화된 육신입니다. 마치 인간의 정신이 육체와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인간을 육신화된 정신이라고 기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에 대한 지식의 가장 풍부한 원천은 육화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인간 자신에게 계시하십니다.47) 어떤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러한 언명은, 교회가 근대 합리주의에 대하여 대답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답변입니다.

이러한 답변은 가정에 대한 이해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미 언급한 대로, 많은 경우에 “사랑의 문화”를 포기한 것같이 보이는 오늘날의 문명을 배경으로 하여 가정을 이해할 때 그렇습니다. 현시대는 물질 세계와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에서 모두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차원과 관련하여,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대단히 무지한 채로 머물러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 또한 모르는 실재로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저 “위대한 신비”로부터 멀어진 결과입니다.

인간의 영과 육에 대한 분리는 하느님을 닮은 그 특유한 유사성의 범주 안에서 인간의 육신을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계 안에 있는 다른 온갖 육체들, 인간이 소비재 생산을 위한 원료로서 이용하는 육체들에 대한 유사성을 토대로 인간의 육신을 고려하고자 하는 점증하는 경향으로 이끌려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인간에 대한 그러한 기준의 적용 뒤에는 얼마나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를 즉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정신이나 생각과는 별개로 간주되는 인간의 육신이 동물들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료로서 이용되게 될 때에, 이러한 이용은 예컨대 인간 배자와 태아 실험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시무시한 윤리적 파탄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인간학적 전망 안에서, 인간 가정은 새로운 마니교의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마니교는 영과 육이 철저하게 대립되어 있으며 육은 영으로부터 생명을 받지 않고 영 또한 육에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한 인격체로서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에 반대되는 모든 지향과 선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은 단순히 하나의 객체가 됩니다. 이러한 신마니교 문화는, 예를 들자면, 창조의 아침에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하고 아담이 하와 앞에서 외치게 된 저 원초적 경탄의 토대로서가 아니라 조작과 착취를 위한 영역으로서 간주되고 있는 인간의 성(性)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담의 그와 같은 경탄은 솔로몬의 아가에서도 반향되고 있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는 넋을 잃었다. 그대 눈짓 한번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아가 4,9). 현대의 일부 관념들은 하느님의 계시 안에서 발견되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심오한 이해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습니까! 계시는 우리가 인간의 성에서 인간 고유의 보화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그 보화는 가정 안에서 진정한 성취를 찾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과 독신 안에서도 그 심오한 요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합리주의는 신비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합리주의는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의 신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인간에 관한 완전한 진리를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에페소서에서 천명된 “위대한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를 철저히 반대합니다. 그 사상은 모호한 이신론(理神論)의 맥락 속에서 최고 존재나 신적 존재의 가능성과 필요성까지도 인정할는지 모르지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에 관한 관념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합리주의에 있어서 하느님이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부부간의 인간 사랑의 원초적이고 유일한 원천인 “신랑”이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합리주의는 창조와 인간 실존의 의미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안에서 당신과 함께 살아가도록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대한 시선을 한번 잃어버리기 시작하면, 그리고 언젠가 가정이 “위대한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이상 지니지 못하게 되면, 순전히 현세적인 삶의 차원 이외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상 생활이란 생존을 위한 투쟁, 필사적인 이익의 추구, 그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익 추구의 각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창조와 구원으로 시작되고 그리스도를 그 궁극적인 보증인으로 삼고 있는 사랑과 생명의 성사인 “위대한 신비”의 깊숙한 뿌리는 사물을 바라보는 현대적 관점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위대한 신비”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가정의 해를 지내는 교회의 활동이 남편들과 아내들로 하여금 저 위대한 신비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힘과 용기와 열정으로 그 신비에 재투신하는 풍부한 기회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순결한 사랑의 어머니

20. “순결한 사랑”의 역사는 주님의 탄생 예고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마리아께 요청하는 천사의 저 놀라운 말씀에서 그 역사는 시작됩니다. 마리아의 “예”로써, “천주로부터 나신 천주시요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십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분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러나 그이는 계속하여 “남자를 모르는” 동정녀로서 머물러계십니다(루가 1,34 참조). 어머니요 동정녀이신 마리아께서는 순결한 사랑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이 진리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말씀에서 이미 계시되었지만, 그 완전한 의미는 성모 마리아께서 신앙의 나그네 길을 걸으며 당신 아드님을 따르실 때에 점점 더 분명해지고 명확해져 갔습니다.48)

“순결한 사랑의 어머니”께서는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라 이미 이 지상의 남편이었던 다윗 가문의 자손 요셉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를 자기 아내로서 또 자기 자녀의 어머니로서 인정할 권리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혼인 계약 안에 몸소 개입하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요셉은 자기 눈으로 보고서야 마리아에게 자기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구약의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혼의 의무가 강요되는 자신의 처지에서 그는 사랑스러운 방법으로 그의 혼인을 해소하고자 하셨습니다(마태 1,19 참조). 주님의 천사는 그에게 나타나 그의 소명에 어긋나는 이 일을 알려줍니다. 참으로 그 일은 마리아에게 그를 결합시키는 부부 사랑에 모순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순결한 사랑”이어야 하는 이 상호 부부 사랑은 그가 마리아와 그 아들을 나자렛의 자기 집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분부에 순종하여 명령받은 모든 것을 그대로 행하십니다(마태 1,24 참조). 그리하여, 또한 요셉 덕분에, 육화의 신비는, 그리고 그 신비와 더불어 성가정의 신비는 남편과 아내의 부부 사랑 안에 깊숙이 새겨지게 되고, 또 간접적으로는 모든 인간 가정의 발생 안에 새겨집니다. 나중에 성 바오로 사도께서 “위대한 신비”라고 부르게 될 그 사랑은 성가정 안에서 가장 드높은 표현을 찾았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참으로 새로운 계약의 바로 그 핵심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순결한 사랑”의 역사는 어느 면에서 아담과 하와라는 인간 최초의 부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굴복한 유혹과 거기서 결과된 원죄도 그들에게서 “순결한 사랑”의 능력을 완전히 빼앗아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컨대 토비트서를 읽어보면 분명해집니다. 토비아와 사라 부부는 그들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를 들어 자기네 결합의 의미를 정의합니다(토비 8,6 참조). 신약에서도,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를 새 아담이라고 말씀하시며 이를 증언하여 주십니다(1고린 15,45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첫 아담과 첫 하와를 단죄하러 오시지 않고, 오직 그들을 구원하러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모든 선물, 인간 안에 있는 영원히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 “순결한 사랑”의 토대를 이루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려고 오십니다. “순결한 사랑”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 구원의 역사입니다.

“순결한 사랑”은 언제나 인간의 자기 계시로 시작됩니다. 창조 때에 아담이 하와에게 자신을 보여준 것과 같이 하와도 아담에게 자신을 열어 보여줍니다. 그 역사의 과정에서 신혼 부부들은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인생 길을 함께 걸으리라.” 가정은 이처럼 두 사람의 결합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시작합니다. 사랑이 참으로 순결하게 되려면, 그 사랑은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부어주시고 거기서 끊임없이 키워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어야만 합니다(로마 5,5 참조). 이것을 온전히 의식하고 있는 교회는 혼인성사에서 인간의 마음을 찾아주십사고 성령께 간청합니다. 사랑이 참으로 “순결한 사랑”이 되려면, 서로를 내어주는 선물이 되려면, 그 사랑은 모든 은총의 원천이시요 은총 그 자체이신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대로, 신약으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솔로몬의 아가가 노래하는 “순결한 사랑”의 체험을 새롭게 하셨던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아가 4,9)라는 말씀에서 요셉은 마리아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복음서가 “위대한 신비”의 맥락 속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아놓은 “순결한 사랑”의 기원이신 바로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잉태를 하십니다.

“순결한 사랑”에 관하여 말할 때에, 우리는 또한 아름다움에 관하여, 사랑의 아름다움과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령의 힘으로 그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움, 곧 형제나 자매로서, 이제 혼인하려고 하는 한 쌍의 짝으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지니는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순결한 사랑”의 신비만이 아니라 사랑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아름다움의 심오한 신비에 빛을 비추어줍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며, 두 사람은 상호 증여의 선물이 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성령의 원초적인 은총으로부터 남편이나 아내라는 존재의 상호 증여가 생겨나며, 마찬가지로 거기서 형제나 자매의 상호 증여도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은 육화의 신비에 의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신비는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어왔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술 걸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어 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표상으로 새겨 묘사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신명 4,15-20 참조)한 이후, 그리스도 시대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성모 마리아, 성 요셉, 신구약의 성인들과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은 창조된 세계 전체를 예술로 묘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 시대는 문화계와 예술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과 그 미래의 심오한 차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 새로운 예술 규범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에 그 기원을 두고, 그분 생애의 신비, 즉 베들레헴의 탄생, 나자렛의 사생활, 그분의 공생활, 해골산, 부활과 영광스러운 재림의 신비들에서 그 영감을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현대 세계에서 드러내는 자신의 현존, 그리고 특별히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 증진에 기여하는 자신의 공헌과 후원이 문화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으며, 이 문화 발전을 위하여 올바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 방대한 수용자들에 대한 정보 제공은 물론 양성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회 홍보 수단들이 취하는 방향에 교회가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입니다.49) 대중 매체의 광범위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을 알고 있는 교회는 커뮤니케이션 종사자들에게 진리의 조작에서 야기되는 위험들을 줄기차게 상기시켜 왔습니다. 참으로, 외설과 폭력이 판을 치는 영화, 연극,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안에 어떠한 진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정말로 인간에 관한 진리에 도움이 됩니까?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과 매체 작품들을 제작하고 보급하는 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물음들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비판적인 반성은 우리 사회가, 분명히 그 소재나 문화적인 차원에서 긍정적인 많은 측면들을 지니고는 있지만,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보아, 인간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조장하고 있는 병든 사회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끌어가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인간에 관한 완전한 진리로부터, 남자와 여자가 실제로 인격체라는 진리로부터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혼인 안에서 인격의 증여에 대한 진정한 의미, 부성과 모성에 봉사하는 책임있는 사랑, 출산과 교육의 참된 위대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대중 매체가 건실한 윤리 원칙에 따라 인도되지 않을 때에 그 근본 차원에서 진리에 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과장이겠습니까? 현대의 홍보 수단들이 메시지를 조작하여 인간에 관한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유혹을 받고 있다는 이 사실은 현실의 비극입니다. 인간 존재는 현대의 대중 매체가 보여주고 광고가 제시하는 영상들과 동일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체적 심리적 단일성 안에서 영과 육의 합성체요 바로 인격체인 인간은 그러한 영상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서 그들을 “위대한 신비”의 구조로 이끌어들이는 사랑에 대한 그들의 소명 때문에 훨씬 더 우월한 존재들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이 신비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신 최초의 인간이셨으며, 그분은 당신의 남편 요셉을 그 속으로 이끌어들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들은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남편과 아내들에게, 가정들에게 끊임없이 간청하는 저 “순결한 사랑”에 대한 최초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젊은이들, 부부들과 가정들은 스스로 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늙은이든 젊은이든 순례자의 무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 성지들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은 하느님 어머니의 얼굴을, 성가정의 얼굴들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사랑의 충만한 아름다움이 거기에서 반사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제6계명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마태 5,27-28). 십계명과 관련하여, 혼인과 가정의 전통적인 유대를 수호하려는 그 목적과 관련하여, 이 말씀은 전향적인 거보를 내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내밀한 마음속에 들어 있는 간음 죄의 근원 그 자체에 다가서십니다. 그 죄의 근원은 욕정에 찬 시선과 생각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욕정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인간 존재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루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어떤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모든 시대 모든 세대의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특별히 소비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져버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의 세대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왜 그토록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엄격한 요구를 하시겠습니까?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혼인과 가정의 성덕을 보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과 그 존엄성에 관한 완전한 진리를 수호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로지 이 진리의 빛 안에서만 가정은 “끝까지” 위대한 “계시”가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한 최초의 발견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남편과 아내의 상호 발견이 이루어지고, 그런 다음,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딸 하나하나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약속한 모든 것,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로 약속한 모든 일은 오로지 “순결한 사랑”이 현존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인간은 오늘날 현대의 대중 문화가 전해주는 이야기에서는 결코 이러한 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 “순결한 사랑”은 무엇보다도 기도 안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는 실제로, 성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따르자면,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어드는 내적 은둔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골로 3,3). 오로지 이러한 은둔 안에서만 우리는 “순결한 사랑”의 원천이신 성령의 활동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속에만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자(루가 8,15 참조) 노력하는 모든 부부들의 마음속에도 순결한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모든 가정 단위체의 미래는 각기 이 “순결한 사랑”, 곧 남편과 아내의 서로 사랑, 부모와 자녀의 서로 사랑, 모든 세대를 끌어안는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가정의 일치와 힘의 원천입니다.

출생과 위험

21. 예수님의 유년기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가 그분의 탄생과 그 즉시 맞부딪치는 위험을 실제로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루가는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이 지나 성전에서 예수 아기를 주님께 봉헌할 때에 나이 많은 시므온이 한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빛”에 대하여 그리고 “반대를 받는 표적”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는 마리아에 대해서도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예리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꿰뚫을 것입니다”(루가 2,32-35 참조). 마태오는, 그 나름대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로데의 음모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새로 태어나신 왕을 경배하러 동방에서 온 박사들(마태 2,2 참조)에게 소식을 들은 헤로데는 자기의 권력에 위협을 느끼고, 동방 박사들이 떠난 다음,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과 요셉의 아버지다운 보호로 헤로데의 손에서 벗어나십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그 어머니를 에집트로 데리고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사셨습니다. 그들의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온 성가정은 여러 해 동안 드러나지 않는 숨은 생활을 시작하시어, 충실하고도 너그럽게 일상의 과업을 수행하십니다(마태 2,1-23; 루가 2,39-52 참조).

예수님께서 바로 그 탄생에서부터 위험과 위협에 직면하셨다는 사실은 어떤 예언적인 웅변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아기 때부터 예수님은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십니다. 헤로데의 명령으로 학살된, 베들레헴의 무죄한 어린이들이 당한 참극 또한 예언적인 웅변입니다.50) 교회의 고대 전례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하시는 수난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들 자신의 “수난”을 통하여,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로 1,24)을 채우고 있습니다.

유년기 복음 안에서, 구세주의 탄생에서 놀라운 방법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선포는 생명에 대한 위협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육화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신인적(神人的) 실재의 신비 그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혈육을 취하시고(요한 1,14 참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교부들은 자주 이 지고의 신비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51) 이 신앙의 진리는 또한 인간 존재에 관한 진리입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아기의 생명에 대한 모든 시도들의 중죄성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순결한 사랑”에 정반대되는 모든 것을 만나게 됩니다. 한 개인이 배타적으로 그 “이용”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는 사랑의 열매를 살해함으로써 살해하는 사랑의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용의 문화에 있어서 “축복받은 태중의 열매”(루가 1,42 참조)는 어떤 의미에서 “저주받은 열매”가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수많은 나라에서 이른바 법치 국가가 용인해 온 탈선들을 어찌 상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 생명의 존중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법은 명확하고도 단호합니다. 하느님께서 명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출애 20,13 참조). 그러므로 인간 입법자는 그 누구도 “너희는 살인하여도 좋다, 너희는 살인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 너희는 살인하여야 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비극이지만, 금세기의 역사에서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특정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잡았다 하더라도, 우생학적 인종적 이유나 다른 구실을 내세워 모든 인간의 생명의 권리에 반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현상은, 여론의 광범위한 묵인이나 동조를 받는 것으로서, 바로 잉태의 순간부터 생명의 권리를 존중하지 못하는 법률 현상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어머니의 태중에 살아 있는 인간의 살해를 허용하는 법률을 어느 누가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생명에 대한 권리는 자기네 계획을 이행하고 자기네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입법 기구를 조종하는 어른들의 배타적인 특권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엄청난 위협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생명만이 아니라 문명 그 자체의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일부 영역에서 “죽음의 문명”이 되어버렸다는 진술이 당혹스럽게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분의 생명에 대한 위험을 수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예언적인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의 아들이요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의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태어나시자마자 바로 위험에 빠지셨지만, 다만 기적으로 죽음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지성인들 사이에서 또 여론 그 자체에서 양심의 각성을 드러내는 어떤 위안이 되는 표징들이 나타났습니다. 특별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잉태의 첫 순간부터 생명을 존중하는 의식이 새롭게 증대되고 있습니다. “생명 존중”(Pro-life) 운동들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정의 미래와 전인류의 미래를 위한 희망의 누룩입니다.

“너희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22. 전세계의 기혼 부부들과 가정들이여, 신랑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국제연합과 교회가 가정을 위해 바치기로 결정한 올해에 교황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너희는 새로 나야 된다…”(요한 3,6-7). 너희는 “물과 성령으로”(요한 3,5) 새로 나야 된다. 사랑하는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여, 여러분 자신이 바로 성령 안에서 새로 나는 이 재생에 대한 최초의 증인들이며 봉사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지상에서 자녀를 낳을 때에, 여러분은 또한 하느님을 위하여 자녀를 낳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태어나는 그들의 출생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요한 1,12)을 우리에게 주신 독생 성자 안에서 그들을 당신 자녀로 입양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구원 활동은 지상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교회를 통하여 수행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 아버지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고 당신 제자들인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고 알려주신 분, 신적인 신랑이신 하느님 아들의 활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말해 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요한 3,17 참조) 세상에 파견되셨다는 것을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확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심판이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요한 3,19.21). 최근의 회칙 「진리의 광채」도 이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52) 그때 그리스도께서 재판관이 되십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진리의 빛 안에서, 여러분 자신의 행위가 여러분을 심판할 것입니다. 아버지들과 어머니들, 아들들과 딸들이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계명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계명에는 우리가 이 교서에서 논의하였던 제4, 제5, 제6, 제9 계명들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계명의 요체요 그 심오한 의미인 사랑 위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인생이 저물 때 우리는 사랑 위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53) 인류의 구원자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나셨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듣습니다”(요한 18,37 참조). 그리스도께서 재판관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에서 당신 친히 지적하셨던 그러한 모양의 재판관이 되실 것입니다(마태 25,31-46). 그분의 재판은 사랑에 관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우리가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신랑이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재판관은 교회의 신랑이시요 인류의 신랑이십니다. 이것은 바로 그분이 판결을 내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까닭입니다. “오라,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4-36). 이 목록은 물론 계속 길어질 수 있으며, 혼인 생활과 가정 생활에 관련되는 수없이 많은 다른 문제들이 덧붙여질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은 선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였을 때에 나를 태어나게 하고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내가 버림받은 아기였을 때에 너희는 나의 가정이 되어주었다”, 또 거듭하자면, “너희는 못된 압력에 시달리며 불안에 떨고 있는 어머니들을 도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따뜻이 받아들이고 또 태어나게 하였다”, 그리고 “너희는 많은 가정들을 도와주었으며,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녀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사랑이 표현되는 온갖 종류의 진정한 도덕적 인간적 선익을 포함하여 더 길고 또 상세한 목록을 계속하여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심판을 위임받은 구세주께서 거두시게 될 위대한 추수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세상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서 신랑의 숨결에 의해 무르익은 은혜와 선행의 추수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온갖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께 우리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는 또한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이 또 다른 목록, 엄정하고도 무서운 목록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에게서 떠나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 이 목록에도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각각의 경우에 거절당하는 분으로 현존하시는 다른 행위들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분은 버림받은 아내나 남편 또는 잉태되었지만 거절당한 아기와 동일시됩니다. “너희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심판은 또한 우리 가정들의 역사 전체에 걸쳐 찾아볼 수 있으며, 우리 민족과 전인류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또한 사회 단체들과 각국 정부 그리고 국제 기구들에 대해서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고뇌하실 것이다.”54) 게쎄마니의 고뇌, 해골산의 고뇌는 사랑에 대한 계시의 절정입니다. 그 두 장면은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를 언제나 새롭게 사랑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요한 13,1 참조) 신랑을 계시하여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개인이나 가정의 역사가 지닌 한계를 넘어 그분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은 인류 역사 전체의 한계를 넘어 흐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러한 반성을 끝마치며, 가정의 해에 여러 가지 강령들이 선포되리라고 보아, 베드로 사도께서 예수님께 드렸던 신앙 고백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요한 6,68). 우리 모두 함께 말씀드립시다. “주님,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3,31 참조). 이 기다란 가정의 해 묵상을 이제 끝마치며, 여러분을 위하여 교황이 지닌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모두가 “영이요 생명”(요한 6,63)인 이 말씀에 동의하게 되기를 염원하는 그의 기도입니다.

“굳센 내적 인간”

23. 저는 모든 부성과 모성에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6). 저는 이 교서의 첫 부분에서 언급하였던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으로 기꺼이 돌아가고자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가정 그리고 부성과 모성은 모두 동행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저 “내적 인간”이 형성되는 최초의 인간 환경입니다. 강인하고도 활기찬 내적 인간의 성장은 성령 안에서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선물입니다.

가정의 해는 교회 안에서 우리 앞에 거대한 과업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가정들이 해마다 날마다 직면하는 과업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해라는 맥락에서, 그 과업은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가정 축일에 나자렛에서 가정의 해를 개막하였습니다. 올해 내내 우리는 인류 역사 안에서 성가정 성당이 되어왔던 그 은총의 자리를 향한 순례의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보화가 되어왔던 가정에 관한 저 진리의 유산을 다시 한 번 깨닫기 위하여 그러한 순례를 하고자 합니다. 구약의 풍요로운 전통에서 자라나 신약에서 완성된 그 보화는 하느님이신 신랑이 모든 가정에 구원을 가져다 주신 성가정의 신비 안에서 가장 충만한 상징적 표현을 발견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은 “가정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이 교서에서 그들의 가르침을 매우 자주 인용하였던 사도들을 비롯 그리스도 제자들의 모든 세대는 이 진리의 보화에 의지하여 왔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시대에서도 이 보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서 깊숙이 음미되어 왔습니다.55) 신혼 부부들에게 하신 교황 비오 12세의 많은 연설들에서,56)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에서, 가정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1980년)에서 이루어진 많은 발언들에서,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 통찰력을 지닌 명민한 분석들이 전개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이러한 교도권의 가르침들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제가 지금 이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가정에 관한 그리스도교 진리의 보화가 얼마나 방대하고 또 풍요로운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기록된 증언들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증언들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렇게 통찰하셨습니다. “현대인들은 교사들보다는 증인들의 말에 더 잘 귀를 기울입니다. 교사들의 얘기를 듣는다면, 그것은 그 교사들이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57) 교회 안에서 가정의 보화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증인들에게 위탁되어 있습니다. 그 증인들이란 가정을 통하여 그들의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소명의 길을 찾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내적 인간”(에페 3,16)의 차원을 발견하며 또 그럼으로써 성덕을 닦아온 바로 그 아버지들과 어머니들,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성가정은 다른 무수한 성가정들의 시작입니다. 공의회는 성덕이 세례받은 모든 사람들의 소명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었습니다.58) 과거에는 물론 우리 시대에도, 비록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고 교회가 성인으로 선포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지만, “가정의 복음”에 대한 증인들이 많습니다. 가정의 해는 그 수많은 증인들의 실존을 더 많이 깨달을 수 있는 적절한 기회입니다.

인류의 역사, 구원의 역사는 가정의 길을 따라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사랑과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투쟁의 한복판에 가정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근원을 두고 있는 선의 세력을 해방시키도록 분투하는 과업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가정에 맡겨져 있습니다. 모든 가정 단위체는 이 선의 세력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폴란드 그리스도교 일천주년 기념에서 나온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가정은 “하느님의 힘으로 강해질”59)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 교서가 바오로 사도의 글(1고린 7,1-40; 에페 5,21-6,9; 골로 3,25 참조)과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의 편지(1베드 3,1-7; 1요한 2,12-17 참조)에 나오는 사도적 권고에서 영감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던 이유입니다. 그 역사적 문화적 상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과 가정들의 체험은 그때나 지금이나 얼마나 유사합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은 하나의 초대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에게, 사랑하는 남편들과 아내들에게,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에게, 아들들과 딸들에게 전하는 초대입니다. 그것은 사도적 진리의 가르침 안에 일치하여 있는 모든 지역 교회들에 보내는 초대입니다. 그것은 주교직에 있는 저의 형제들에게, 사제들에게, 수도 가족들과 축성된 사람들에게, 평신도 운동 단체들에게 보내는 초대입니다. 그리고 구세주께서 염원하신 완전한 일치에는 아직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 신앙으로 결합된 우리의 형제 자매들에게,60) 아브라함의 신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처럼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거대한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61) 다른 정신적 종교적 전통의 상속자들에게,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는 초대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히브 13,8) 똑같으신 분 그리스도께서 모든 부성과 모성에 모든 인간 가정에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에페 3,14-15 참조)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의 말씀 안에서, 그분이 “끝까지”(요한 13,1)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증언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의 힘으로 저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혼인과 가정과 생명의 위대한 선을 존중하십시오. 이러한 실재들이 존중되지 않을 때에, 가정과 인간 존엄성의 토대에 있는 드높은 가치들이 무시될 때에 따라나오는 엄청난 위험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힘과 지혜로써 우리에게 이 진리를 거듭 가르쳐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전인류가 “거짓말의 아비”(요한 8,44)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짓말의 아비는 넓고 쉬운 길로, 겉으로는 평탄하고 즐거운 길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함정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길로 사람들을 이끌어들이려고 끊임없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을 따를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인 가정의 과업으로 삼고, 오묘하신 하느님의 은총이 풍부하게 내리는 이 가정의 해에 교회의 선교적 관심의 대상이 되도록 합시다. 모든 인간 가정의 성화(聖畵)요 모범이신 성가정이 모든 개인을 도와, 모두가 나자렛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빕니다. 성가정이 모든 개별 가정을 도와, 가정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기도로써, 형제적 나눔의 생활로써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그 특별한 사명을 더 잘 이해하게 되기를 빕니다. “순결한 사랑”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와 구세주의 보호자이신 성 요셉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어 항구히 보호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염원을 안고, 저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가정을 축복합니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교황 재위 제16년,
1994년 2월 2일, 주의 봉헌 축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02.12
452 59.2%
주석

1.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년 3월 4일), 14항 참조.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에 있어서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1항 참조.
3. 사목헌장, 22항.
4. 상동.
5. 상동.
6. 교회헌장, 11항 참조.
7. 사목헌장, 제2부 제1장.
8. 로마 예식서, 「혼인 예식」, 74항, 제2 표준판, 1991년, 26면.
9.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1981년 11월 22일), 79-84항 참조.
10. 「혼인 예식」, 74항 참조.
11. 사목헌장, 48항 참조.
12. 가정 공동체, 69항.
13. 사목헌장, 24항.
14. 「혼인 예식」, 60항.
15. 가정 공동체, 28항 참조.
16. 비오 12세, 회칙 Humani Generis(1950년 8월 12일), AAS 42(1950년), 574면 참조.
17. 사목헌장, 24항.
18. 사목헌장, 24항.
19. 상동.
20. 「고백록」, I,1: CCL 27,1.
21. 사목헌장, 50항 참조.
22. 혼인 예식, 62항.
23. 상게서, 61항.
24. 성 토마스 데 아퀴노,「신학대전」, I, q.5, a.4, ad 2.
25. 사목헌장, 24항.
26. 회칙 「사회적 관심」(1987년12월 30일), 25항 참조.
27. 회칙 「인간의 구원자」, 14항; 회칙 「백주년」(1991년 5월 1일), 53항 참조.
28. 이단 반론, IV,20,7: PG 7,1057; SCh 100/2, 648-649.
29. 회칙 「백주년」, 39항.
30. 회칙 「사회적 관심」, 25항 참조.
31. 바오로 6세, 회칙 「인간 생명」(1968년 7월 31일), 12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2366항 참조.
32. 사목헌장, 24항.
33. 성년 폐막 강론(1975년 12월 25일), AAS 68(1976), 145면 참조.
34. 사목헌장, 22항.
35. 사목헌장, 47항 참조.
36. 「신학대전」, I, q.5, a.4, ad 2.
37. 「신학대전」, I-II, q.22.
38. 교회헌장, 11.40.41항 참조.
39. 혼인 예식, 제60항.
40. 교회법 제1055조 제1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1601항.
41. 사목헌장, 74항 참조.
42. 회칙 「백주년」, 57항 참조.
43. 회칙 「노동하는 인간」, 19항 참조.
44. 이단 반론, III, 10,2: PG 7,873; SCh 211,116-119; 성 아우구스띠노, 말씀의 육화, 54: PG 25,191-192; 성 아우구스띠노, 강론 185,3: PL 38,999; 강론 194,3,3: PL 38,1016 참조.
45. 사목헌장, 24항 참조.
46. “영과 육의 단일체”(Corpore et anima unus)라고, 공의회는 극히 분명하고도 적절하게 언명하였다: 사목헌장, 14항.
47. 상게서, 22항.
48. 교회헌장, 56-59항 참조.
49. 교황청 사회홍보위원회, 사목 훈령 「새로운 시대」(1992년 2월 22일), 7항 참조.
50. 5세기부터 지내기 시작한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의 전례에서, 교회는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을 향하여 시인 프루덴시우스(+ 405년경)의 말씀으로 기도를 드린다. “순교의 꽃들이여, 절하나이다. 못다핀 장미꽃이 폭풍에 지듯, 예수님 죽이려고 쫓던 무리에 세상 빛 보자마자 지고 말았네.”
51. 성 아타나시오, 말씀의 육화에 관하여, 54: PG 25, 191-192.
52. 「진리의 광채」(1993년 8월 6일), 84항 참조.
53. 빛과 사랑의 말씀, 59항.
54. B. 파스칼, 「팡세」, 예수의 신비, 553(ed. Br.).
55. 특별히 사목헌장, 47-52항 참조.
56. 특별히 흥미있는 연설은 이탈리아 가톨릭부인협회 전국대회 참가자들에게 하신 연설(1951년 10월 29일)이다: 연설 및 라디오 담화, XIII, 333-353.
57. “평신도위원회” 위원들에게 하신 연설(1974년 10월 2일), AAS 66(1974), 568면 참조.
58. 교회헌장, 40항 참조.
59. 스테판 비진스키 추기경, Rodzina Bogiem slina, 야스나고라에서 한 강론(1961년 8월 26일) 참조.
60. 교회헌장, 15항 참조.
61. 상게서, 16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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