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교회법

교회사

공의회

문   헌

담화문

사목교서

♣ 현재위치 : 홈 > 문헌 자료 > 문 헌 > 교황 문헌

교황 문헌

교황청 문헌

주교회의 문헌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2 59.2%
자비로우신 하느님 (DIVES IN MISERICORDIA / 1980.11.30)
조회수 | 3,708
작성일 | 08.02.07
차 례

I. 나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1. 자비에 대한 계시
2. 자비의 강생
II. 메시아의 메시지
3. 그리스도께서 행적과 가르침을 시작하셨을 때에
III. 구약성서
4. 자비의 개념
IV. 탕자(蕩子)의 비유
5. 하나의 유비(類比)
6. 인간 존엄성에 집중
V. 파스카의 신비
7.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자비
8.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사랑은 죄보다 강하다
9. 자비로우신 어머니
VI. 대대로 자비를
10. 우리 세대의 모습
11. 불안의 원천
12. 정의로만 충분한가?
VII. 교회 사명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자비
13.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그 자비를 선포한다
14. 교회는 자비를 실현하고자 힘쓴다
VIII. 현대 교회의 기도
15.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한다
452 59.2%
I. 나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요한 14,9 참조)

1. 자비에 대한 계시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1)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로 계시하셨습니다.하느님을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의 친아드님이셨습니다.2)이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낸 순간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필립보가 그리스도께 몸을 돌려 “주님,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간청한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3) 이 말씀은 파스카 만찬 끝에 있었던 고별 연설에서 하신 말씀입니다.뒤이어 일어난 며칠간의 거룩한 사건들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함께 다시 살려주셨다.”4)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증해 보이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현 시대에 특별히 필요한 것을 자세히 살펴본 끝에,저는 저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를 인간에 대한 진리에 바쳤습니다.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하고 깊이 계시된 것입니다.이 중대하고도 험난한 시기에 이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필요성을 보고서저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 안에서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5)께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계시로써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주십니다.”6)제가 인용한 이 구절은 인간이 - 관념상으로만이 아니라 온전한 실존적 차원에서 - 하느님과 결부되지 않으면 자기 본성의 완전한 존엄성을 드러낼 수 없다는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해 줍니다.그리고 인간과 그의 고귀한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계시를 통해서 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신비를 묵상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매우 적절합니다.이것은 교회의 여러 경험과 현대인의 다양한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필요한 것이요,수많은 인간들 마음의 호소, 고통과 희망, 그들의 불안과 희망으로 보아 당연히 요구되는 것입니다.저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말했듯이 인간 개개인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길입니다.그러나 동시에 복음서와 성전(聖傳) 전체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우리는 개개인과 더불어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통하여 성부와 그분의 사랑을계시하시면서7)걸으셨던 발자취를 따라서 걸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인간에게 이르는 모든 길은 곧 성부와 그분의 사랑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변천하는 시대 안에서 오래도록 교회에 지정되어 있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현대인에게 이 진리를 다시 확인시켰던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인간을 중심으로 삼을수록,다시 말해서 더욱 인간 본위가 될수록 그 사명은 하느님 본위로 강화되고 실현될 것입니다.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향하는 사명이 될 것입니다.과거에 인간의 여러 사조(思潮)는 신본사상(theocentrism)과 인본사상(anthropocentrism)을 분리시키고 심지어는 두 사상을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그리고 지금도 같은 상황입니다.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깊숙이 그리고 유기적으로 이 두 가지를 인간 역사 안에 결합시키고자 합니다.이 작업은 이 공의회의 근본 원칙 가운데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그러므로 교회사의 현시점에서 우리는, 이 위대한 공의회 교리의 시행을 첫째가는 과업으로 삼고,믿음과 열린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위에서 언급한 회칙에서 저는 공의회에서 비롯된 교회의식이 깊어지고 여러 각도로 풍부해진 결과,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그리스도께 더욱 폭넓게 열렸음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세상의 구원자로서“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여는 이 개방이 완전히 성취되려면 언제나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성부와그분의 사랑에 결속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2. 자비의 강생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지만”8) 삼라만상을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보이시어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9) 보이는 세계의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을찾는 이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오성(悟性)으로는 ‘아버지를 뵙기’에 부족합니다.성 요한도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드님께서 ……,하느님을 알려주셨다.”10)는 진리를 강조하는 말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이 ‘알려주심’으로 하느님을 그분의 본질의 가장 깊은 신비까지 계시해 주십니다.한 분이시고 삼위이시며, “가까이 갈 수 없는 빛”11)에 둘러싸여 계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알게 된 하느님은 그분께서 인간을 위하시는 사랑의 관계,그분의 “인간애호(philanthropy)”12)에 비추어서 아는 하느님이십니다.여기에서 ‘그분의 보이지 않는 본성’이 특수한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보이게 됩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게 됩니다.그분의 행적과 말씀을 통하여, 끝으로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말미암아 각별히 잘 보이게 되십니다.다시 말해서 구약성서가 여러 개념과 어휘로써 ‘자비’라고 이미 정의한 바 있는 하느님의 속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구약성서의 전승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십니다.그분께서는 비유와 비교로 자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설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몸소 자비를 인간이 되게 하시고인격화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 자신이 곧 자비이십니다.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보고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시며,“한없이 자비로우신 ……”13) 아버지로 나타나십니다.

현대의 사고방식은 과거의 사고방식보다 훨씬 더 자비의 하느님에 대립되는 듯하며,자비라는 이념 자체를 생활에서 배제하고 인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역사상 알려지지 않았던(알지 못하던) 과학과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땅의 주인이 되고 땅을 굴복시켜 다스리게 된14) 인간에게는 “자비”라는 말과 개념이 매우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땅에 대한 이 지배를 흔히 일방적이고 피상적으로알아들음으로써 거기에는 자비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서론에 묘사된 현대 세계의 인간 상태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거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 세계는 강하면서도 약하고,최대의 선을 다할 수도 있고 최대의 악을 저지를 수도 있으며,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사랑과 증오의 문이 동시에 열려있습니다.그러나 인간이 발굴한 힘들이 인간을 괴롭힐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으므로이런 힘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됩니다.”15)

현대 세계는 지상의 인간에게 더 나은 미래라는희망의 터전이 되는 변혁을 일으키고 있고, 동시에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여러 가지 위협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교회는 여러 기회에(국제연합 총회,유네스코 회의,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와 기타 기구에서 한 연설들에서) 이 위협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지적한 바 있지만,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께 받은 진리의 빛으로 이 위협들을 검토해야 합니다.

“인자하신 아버지”16) 하느님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인간과 각별히 가까운 분으로 ‘보게’ 하며,특히 인간이 고통을 당할 때와, 인간의 존재와 존엄성이 위협을 당할 때에 하느님을 가까운 분으로 보게 합니다.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산 신앙의 정신으로 움직이는 많은 인간들과 집단들이 교회와 현대 세계의 상황을 보고거의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충동을 받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왜냐하면 인간에게 닥치고 있는 현대의 위협들로 미루어 볼 때에,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인자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신비야말로 교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유일한 호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 회칙에서 저는 이 호소를 받아들이고자 합니다.저는 영원하고도 동시에 그 단순함과 깊이에서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계시와 신앙의 언어를 이끌어내고자 합니다.바로 이 언어를 통해서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인류 앞에서 이 시대의 커다란 불안들을 표현해 보려는 것입니다.

사실 계시와 신앙은 우리에게 ‘인자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신비를추상적으로 묵상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 자비에 하소연하라고 가르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17)우리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당신께 하소 연하기를 늘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가 당신의 신비,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18) 깊이 탐구하기를 늘 기다리신다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고찰이 누구나 이 신비를 더욱 가까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아울러 이러한 고찰이 교회가 자비를 비는 진심어린 호소가 되기 바랍니다.이 자비는 인류와 현대 세계가 너무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 02.07
452 59.2%
II. 메시아의 메시지

3. 그리스도께서 행적과 가르침을 시작하셨을 때에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9)

루가복음서에 따르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최초의 메시아 선언입니다. 이 선언에 뒤이어 이미 복음서를 통하여 알려진 행적과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행적과 말씀으로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를 모셔오십니다. 그런데 그때 모인 사람들이 특히 가난한 사람들, 생계 수단이 없는 사람들,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 창조계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눈먼 사람들, 마음이 상한 사람들, 또는 사회 불의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 깊습니다. 메시아께서는 특히 이 죄인들을 위해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분명한 표지, 아버지를 보여주시는 표지가 되셨습니다.

이 보이는 표지 때문에 우리도 그 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뵈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사람들을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20) 하고 묻게 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설교를 시작하실 때 쓰셨던 같은 증언을 인용하셨습니다. 이것도 뜻깊은 일입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그리고 다음 구절로 말씀을 맺으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21)

예수님께서는 특히 당신의 생활양식과 행적을 통해서 사랑이 세상에 와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힘있는 사랑, 인간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그의 인간성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다 포용하는 사랑이 와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과 불의와 빈곤에 접했을 때, 인간의 물리적 도덕적 한계와 취약성을 여러 가지로 드러내 주는 역사적 ‘인간 조건’, 전체에 접했을 때입니다. 이 사랑이 자체를 드러내는 모습 또는 영역을 가리켜 성서상의 용어로 ‘자비’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 요한이 첫째 서간에서 표현한 대로, ‘사랑’이신 하느님이십니다.22) 또 그리스도께서는 앞서 인용한 바오로의 서간대로, 하느님을 “한없이 자비로우신”23)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이 진리는 단지 가르침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와있는 실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자아의식으로 본다면, 아버지를 사랑과 자비 그 자체로서 현존하시게 해드리는 일이 메시아 사명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나자렛 회당에서 최초로 하신 말씀으로 확인되었고, 나중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와 당신 제자들 앞에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아버지이시며 사랑이시며 자비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이런 방식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설교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시던 대로 먼저 ‘비유’로 자비를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는 사물의 핵심을 더 잘 표현하는 까닭입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24)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25)가 있으며, 대조적인 내용으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6)도 꼽을 만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새로운 각도로 ‘자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27)라든가 잃었던 은전 한 닢을 찾아 집 안을 온통 쓰는 여자28)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이 주제를 각별히 많이 다루는 복음사가는 루가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자비의 복음서’라는 명칭을 얻었을 정도입니다.

설교에 대해 논할 때 용어의 의미와 개념의 내용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 특히 자비의 개념의 내용(그리고 ‘사랑’의 개념과 갖는 관계)이 그렇습니다. 이 개념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자비의 실재 내용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용어의 의미와 “자비”라는 개념의 고유한 내용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다음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자비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면서 사람들도 사랑과 자비에 따라 살도록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요구는 메시아의 메시지의 본질을 이루며, 복음 정신(ethos)의 핵심을 구성합니다. 스승께서는 이것을 두 가지로 표현하셨는데, 하나는 당신께서 “가장 크다”고 하신 계명을 통해서이고, 29)또 하나는 산상 설교에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30)라고 선포하신 축복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비에 대한 메시아의 메시지는 특이하게 신적이며, 인간적인 차원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아 예언의 성취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이 되셨고, 고통받는 사람들, 불운한 사람들, 죄인들에게 그 큰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아버지이시요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현존하시게 만드셨고 더 완전하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타인을 위하는 자비로운 사랑의 귀감이 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말씀보다는 행동으로 자비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자비는 과연 복음 정신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그것은 어떤 계명의 준수나 도덕적 성격을 띤 의무를 다하는 문제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 자비를 입을 것이다.”는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자비로우신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게 만드는 요건을 갖추는 길이기도 합니다.
  | 02.07
452 59.2%
III. 구약성서

4. 자비의 개념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자비’의 개념은 오래고도 풍부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자비를 더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비를 계시하실 때에, 그분께서 대하시던 사람들은 자비의 개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에서 하느님 자비에 관한 각별한 체험을 이끌어낼 줄 알았습니다. 이 체험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었지만, 이 백성은 그 계약을 여러 번 깨뜨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그들의 불성실을 깨우쳐주는 예언자들과 그 밖의 인물들이 있었으며, 따라서 백성은 스스로 불성실을 자각할 때마다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구약성서가 참으로 많은 사례를 제공해 줍니다. 중대한 사건들과 성서 본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대목을 들 수 있습니다. 판관(判官) 역사의 첫머리,31) 성전 봉헌 때에 바친 솔로몬의 기도,32) 미가의 예언 활동의 일부,33) 이사야가 제시한 위로에 대한 약속,34) 유배지에서 유다인들이 울부짖은 호소,35) 유배지에서 돌아온 뒤의 계약 갱신36)…….

예언자들은 설교 중에 백성의 죄 때문에 자비를 자주 언급했는데, 그 자비를 하느님 편에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이미지와 날카롭게 연결시켰습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남편의 사랑과 매우 흡사하게,37) 특별히 선택하신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심지어 배반과 부정(不貞)까지도 용서하십니다. 당신 백성에게서 후회와 진정한 회개를 보시면 은총으로 다시 이끌어주십니다.38) 예언자들의 설교에서 자비란 선택된 백성의 죄와 불신앙을 덮어주는 사랑의 특유한 힘을 뜻합니다.

이처럼 범위가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자비는 개인의 내적 체험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죄의 상태에서 괴로워하는 인간, 온갖 고통과 불행을 겪는 인간의 내면 체험과 연결됩니다.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 곧 죄는 둘 다 이스라엘의 아들딸들을 주님께 돌아서서 그분의 자비를 빌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죄가 무거움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39) 욥도 한참 반항을 한 끝에 자신의 엄청난 불운 속에서 주님께 향했습니다.40) 에스델 역시 자기 겨레에게 닥친 전멸의 위협을 알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41) 구약성서에서는 그 밖의 예화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42)

이 다각적인 신념, 집단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신념, 세기를 두고 구약 전편에서 엿볼 수 있는 신념의 바탕에는 출애굽 때에 겪은 선민(選民) 체험이 깔려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노예로 전락한 당신 백성의 환난을 보셨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으며, 그들의 고통을 아시어 그들을 해방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43) 주님의 이 구원 행위에서 예언자들은 그분의 사랑과 동정심을 깨달았습니다.44) 백성과 각개인이 하느님의 자비를 분명히 믿게 된 근거가 여기에 있으며, 그래서 비극이 덮쳐올 때마다 그 자비를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죄가 인간의 비참을 이룬다는 사실도 들 수 있습니다. 구약의 백성은 출애굽 때에 황금 송아지를 만듦으로써 이 비참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는 백성이 계약을 깨뜨렸을 때에도 스스로 이겨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45)라고 엄숙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핵심적인 계시로, 선택된 백성과 각개인은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께 돌아갈 힘과 용기를 얻었으며, 주님께서 일찍이 당신을 두고 계시하신 바를 주님께 상기시켜 드리면서46) 그분의 용서를 빌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몸소 한 백성을 택하신 때부터 행위와 말씀으로 당신의 자비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백성은 불행에 짓눌릴 때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마다 끊임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의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께 속한 그 백성에게 쏟으신 주님의 자비에서 사랑의 절묘한 면모가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아버지47)이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맏아들48)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이스라엘의 신랑이셨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예언자들은 ‘루하마(Ruhamah)’ 곧 ‘귀염둥이’ 또는 ‘연민을 받아온 여자’라는 새 이름49)을 붙여주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거듭되는 부정(不貞)에 환멸을 느끼시고 손을 끊기로 하셨다가도 당신의 분노를 이겨내신 것은 당신께 속한 그 백성에게 기울어지는 애정과 어지신 자비 때문이었습니다.50)따라서 시편 작가들이 주님께 최고의 찬미를 바치고자 할 때마다 사랑과 애정, 자비와 성실로 하느님께 찬미가를 바친 것은 당연합니다.51)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면 자비는 하느님의 개념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그 아들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특색을 부여하는 것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자비는 그들이 주님과 맺은 친밀을 나타내는 핵심이며, 그들이 주님과 나누는 대화의 핵심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구약의 각 성서에 자비가 참으로 풍부한 표현을 담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들 성서에서 자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순수하고 이론적인 해답을 찾아내기는 힘들지만 거기에 쓰이는 용어들은 이 질문에 대해 무엇인가 말해 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52)

구약성서는 의미가 비슷한 여러 단어를 써서 주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고유한 의미들은 각기 다르지만 그 단어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단일한 근본 내용에 집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없이 풍부한 내용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다른 측면에서 그 내용을 인간과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불행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죄악에 짓눌린 사람들, 그리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전체에게 자비에 호소하고 그 자비에 의지할 수 있게 합니다. 성서는 실패의 순간과 믿음을 잃은 시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백성의 역사와 개개인의 생활에 그 자비가 드러날 때마다 그 자비에 대해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어느 의미에서 자비가 하느님의 정의와 대조되기도 하고, 여러 경우에는 자비가 정의보다 더 강할 뿐 아니라 더 깊은 것으로 나타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구약성서도 정의가 인간에게는 본연의 덕목이며 하느님께는 초월적 속성이기는 하지만 사랑이 정의보다 ‘더 크다’고 가르칩니다. 사랑이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더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정의를 좌우하고, 궁극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정의가 사랑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정의에 대한 사랑의 수위권(首位權)과 우선권 - 이것이 계시 전체의 표지입니다 - 은 자비를 통해서 명확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시편 작가들과 예언자들에게는 이것이 무척 분명하였기 때문에 ‘정의’라는 단어 자체가 주님과 그분의 자비가 이룩하신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정도였습니다.53) 자비는 정의와 구별되지만 정의와 상반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가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한다면 이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각별한 사랑으로 당신 피조물과 결속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 본질상 한번 자기를 바친 대상에게 증오와 악의를 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만드신 그 어느것도 미워하시지 않는다.”54)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세계를 상대로 하시는 정의와 자비의 관계, 그 본바탕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태초로’, 창조의 신비 자체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이 관계, 생명을 주는 뿌리와 이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옛 계약을 배경으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완전하게 계시되리라는 예고가 됩니다.55)

창조의 신비와 연결되어 선택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선택의 신비는 믿음의 덕으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는 백성의 역사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통틀어 이 백성을 통한 선택의 신비는 남녀 모든 인간, 인류 대가족 전체에 미치는 것입니다.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56)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주는 평화의 계약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57) 이 진리는 이스라엘에게 일단 선포됨으로써 인류 역사 전체의 전망이 되었습니다. 현세적이고도 종말론적인 전망이 되었습니다.58)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전망에 비추어서, 구약성서의 무수한 구절에 나와 있고 이미 바탕이 닦인 토대에서 아버지를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그 계시를 끝맺는 자리에서, 그분께서는 필립보 사도에게 잊혀지지 않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59)
  | 02.07
452 59.2%
IV. 탕자(蕩子)의 비유

5. 하나의 유비(類比)

신약성서 첫머리 루가복음에 구약 전체의 전승을 강렬하게 반영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독특한 조화를 이루는 두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은 각각 구약의 다른 용어와 연결되는 어의적(語義的) 요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시면서 ‘주님의 자비’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대대로’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바로 뒤에 마리아께서는 이스라엘의 선택을 되새기시면서, 마리아를 선택하신 그 자비가 주님께서 영원토록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신’ 것이라고 공언하십니다.60) 얼마 뒤에 같은 집에서 세례자 요한이 출생하자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베푸시며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61)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는 구약성서로부터 내려오는 이 전승이 더 단순해지고 더 깊어집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집니다.62) 이 비유에는 ‘자비’라는 말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참으로 명백하게 하느님의 자비의 진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서들처럼 용어 덕분이라기보다는 자비의 신비를 더 완전히 알 수 있게 하는 유비(類比) 덕분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방탕과 죄악 사이에 빚어지는 심각한 극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그 진수가 표현되는 것입니다.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아버지에게서 받은 아들은 먼 고장으로 떠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마구 뿌립니다. 어느 의미에서 이 아들은 은총과 원초적 정의를 상실한 첫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유비는 대단히 폭이 넓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간접적으로 사랑의 계약에 대한 각각의 파기, 은총의 상실, 죄 하나하나에 두루 해당됩니다. 탕자의 유비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불성실에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예언자 전승만큼 백성의 불성실에 크게 역점을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그 아들은 “알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찾아갔던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그는 아무것으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고”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더부살이를 하면서 자기가 치던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그는 거절당했습니다.

유비는 드디어 인간의 내면으로 초점을 돌립니다.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재물은 막대했지만, 그 재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던 아들로서의 품위였습니다. 재물을 잃은 처지에서 그는 그 품위도 잃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라고 말하는 투로 보아 지금 와서도 자기의 품위를 의식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가 잃어버린 재물, 지금은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재물, 그러나 아버지의 집에 있는 일꾼들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 말이 재물에 대한 그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말 뒤에는 품위를 잃은 비애, 아들의 실추된 신분에 대한 각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63) 이 구절은 근본 문제를 더 깊숙이 드러내 보이는 말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 때문에 탕자가 처한 복잡한 물질적 상황은 그에게 품위를 상실했다는 느낌이 들게 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아들의 자격이 아니고 품꾼으로 써달라고 청하기로 결심한 일이 얼른 보기에는 자기가 처한 굶주림과 가난 때문에 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동기에는 깊은 상실감이 깃들여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요 굴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탕자는 그 수치와 굴욕을 감수할 각오가 서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 들어가는 길말고는 더 이상 다른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의 결심은 정의에 입각해서 과거에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바가 무엇이었고 지금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의식한 데서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추론을 통해, 탕자의 의식 한가운데에는 자기가 상실한 품위에 대한 깨달음이 새삼 솟아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맺는 혈연에서 오는 그 품위에 대한 깨달음이 새삼 솟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심에 힘입어 그는 떨치고 일어섰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정의’라는 단어는 한 번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원본에 ‘자비’라는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사랑의 관계, 자비로 나타나는 그 관계가 복음서의 비유 내용에 참으로 정확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정의의 엄밀한 규범, 엄밀하고 흔히 너무도 편협한 규범을 능가해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 사랑이 자비로 변모되었음이 분명합니다. 탕자도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날려보냈지만, 집으로 돌아온다면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라도 들어가 생계를 이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또 잘만 되면, 비록 자기가 탕진한 재산에는 절대 못 미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모아 상당한 재산을 이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에 입각한 요청입니다. 아들로서 그는 자기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탕진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또한 그 행동으로 아버지를 상심시키고 괴롭혔던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그런 행실이 아들로서의 자격을 빼앗아 갔으며, 따라서 그 행실이 아버지에게 무관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괴롭혔음에 틀림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에게 누를 끼쳤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탕자는 자기의 아들이며, 이 부자 사이의 관계는 어떤 행동 때문에 달라지거나 끊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탕자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사실이었고, 이 깨달음이 자기가 잃어버린 품위를 똑똑히 보게 만들었으며, 자기가 아직도 아버지의 집에서 차지할 만한 자리가 무엇인지 솔직히 따져보게 만들었습니다.

6. 인간 존엄성에 집중

탕자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이러한 정확한 묘사는 하느님의 자비가 무엇에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합니다. 이 단순하고도 뜻깊은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보여줌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행동과 그의 모든 처신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속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무척 새롭고도 참으로 단순하고 깊이있게, 구약의 자비 사상을 세밀한 부분까지 보여줍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버지 된 도리에 성실합니다. 늘 아들에게 쏟아오던 그 사랑에 끝까지 성실합니다. 이 성실함이 이 비유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들이 유산을 다 날려버리고 돌아오는데도 서슴없이 집 안에 맞아들이는 행동만이 아닙니다. 탕자가 돌아온 것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그 잔치가 하도 푸짐한 것이어서, 여태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곁을 멀리 떠나거나 집에서 뛰쳐나간 일이 없던 큰아들의 반발과 미움까지 삽니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성실함 - 구약의 용어 헤세드(hesed)로 알려진 특성 - 은 정(情)을 보이는 모습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읽은 바에 따르면,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64) 아버지는 깊은 정에서 우러나 이렇게 행동했음에 틀림없으며 이것은 아들에게 기우는 그의 어진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 어진 성품이 큰아들을 몹시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애정의 이유는 더욱 깊은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근본적인 선(善), 곧 자기 아들의 인간성의 선함이 살아남았음을 간파하였던 것입니다. 아들이 비록 재산을 날렸지만 그의 인간성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면에서 그 인간성을 다시 찾은 셈입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한 말에 그 점이 잘 나타납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65) 같은 루가복음 15장에는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가 나오고,66) 잃었던 은전의 비유도 나옵니다.67) 그리고 그 두 비유에서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 ‘기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성실함은 잃었던 아들의 인간성, 그의 존엄성에 온전히 집중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아들이 돌아온 순간에 아버지가 보였던 기쁜 감정을 설명해 줍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아들에 대한 사랑, 부성(父性)의 본질에서 솟아나는 사랑이 어느 면에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존엄성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배려가 바로 아버지 사랑의 척도이며, 이 사랑을 두고 성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리고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68) 그리스도께서 탕자의 비유에서 보여주신 자비는 신약성서에서 아가페(agape)라고 부르는 사랑의 내면적 형태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탕자에게 미칠 수 있고, 비참한 모든 인간에게 미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온갖 형태의 윤리적 비참, 곧 죄에 미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미칠 때에 자비의 대상이 된 사람은 모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찾았고 ‘가치를 되찾았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그에게 반가움을 나타냅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고’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을 보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이 기쁨은 선(善)이 그 아들에게 본래대로 남아있음을 가리킵니다. 비록 방탕한 사람이었지만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친아들임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 기쁨은 다시 찾게 된 선(善)이 있음도 가리킵니다. 방탕한 아들의 경우,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진리로 되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외면상으로’ 일어난 것으로 평가하면 안됩니다. 자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거의 외면상으로만 당사자들을 평가하는 데서 옵니다.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비라고 하면 자비를 베푸는 사람과 자비를 받는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가 그것을 받는 사람을 낮추게 만들며 따라서 인간 존엄성이 손상된다고 섣불리 생각합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는 사실이 이와 다름을 보여줍니다. 자비의 관계도 인간이라는 선한 존재의 공통된 체험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 그것에 대한 공통된 체험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이 공통된 체험 때문에 탕자는 자기 자신과 자기 행동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진실로 이 안목은 하나의 순수한 겸손입니다). 또 한편,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탕자는 자기 아버지 눈에 참으로 귀한 선(善)으로 비쳐진 것입니다. 아버지는 진리와 사랑에서 오는 신비스러운 비추임 덕택에 아들에게서 일어난 선(善)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회개의 실재를 단순하고도 깊이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인간 세계에서 사랑의 작용과 자비의 출현을 보여주는 제일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제아무리 시선이 깊고 동정에 가득 찬 것이라 할지라도 윤리적, 물리적 또는 물질적 악(惡)을 기만하는 데에 자비의 참뜻이 있지는 않습니다. 세계와 인간에게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악(惡)으로부터 자비가 선(善)을 이끌어내고 선을 촉진하고 회복시켜 줄 때에, 자비는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비야말로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메시지의 근본 내용을 이루며, 그리스도 사명의 본질적 능력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추종자들도 자비를 똑같이 이해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행실에서는 언제나 자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악에 굴복하지 않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려는”69) 사랑, 이 사랑의 증거로서 그들은 언제나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 자비의 본모습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선입견이 있겠지만 우리 시대야말로 자비를 특별히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 02.12
452 59.2%
V. 파스카 신비

7.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자비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메시지와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신 활동은 십자가와 부활로 끝났습니다. 이 최종 사건을 공의회 용어로는 파스카 신비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구원 역사에 깊숙이 계시된 그대로, 자비에 대한 진리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최종 사건을 깊이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다시 가까이에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속(救贖)의 내용이 과연 ‘인간적 차원’에서, 그처럼 위대한 구세를 얻게 된(qui talem ac tantum meruit habere Redemptorem),70) 인간의 놀라운 위대함을 계시해 준다면, 동시에 구속의 신적 차원은 저 위대한 사랑의 깊이를 우리에게 가장 체험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계시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속의 신적 차원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만드셨고 당신 친아드님 안에서 은총과 영광을 받기로 ‘태초부터’ 뽑힌 인간들을 향하여 창조주인 아버지로서 당신의 성실함을 다하시고자 당신 아드님의 엄청난 희생까지도 주저하지 않으신 그 사랑을 감지할 수 있게 합니다.

성금요일의 사건들, 아니 그보다 앞서 게쎄마니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에서 사랑과 자비를 계시하던 과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고쳐주시고”71)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시던”72)분께서 이제는 가장 큰 자비를 입어야 할 분이 되시고 자비를 호소하는 처지가 되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체포되고 모욕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을 쓰실 때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고통 중에 몸부림치며 돌아가실 때에,73) 그분께서는 자비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당신께서 이제껏 선을 베푸신 사람들에게서 자비를 입으실 만한 때였지만 결국 그분께서는 자비를 입지 못하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그분을 보호해 드리지 못하고 압제자들의 손에서 그분을 빼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의 메시아 활동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예언자들이 한 말, 특별히 이사야가 주님의 종을 두고 한 다음 말이 그리스도께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구나!”74)

참으로 고통받는 인간, 올리브 동산과 갈바리아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설교해 오셨고, 당신의 모든 활동을 통해서 아버지의 자비를 증언하고자 세상에 태어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 그분조차도 -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고통을 면하시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다.”75)는 성 바오로의 말씀은 심오한 의미를, 동시에 구속 실재의 신적 차원을 단 몇 마디로 간추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속이 바로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계시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성이 충만한 분이시며,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분이십니다. 정의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고 사랑에서 흘러 나오고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서, 아버지께서 당신 친아드님의 목숨을 살려주시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다.”76)는 사실은 절대정의(絶對正義)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 때문에 수난과 십자가형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정의가 ‘흘러 넘친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인(神人)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가 ‘보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 참으로 ‘하느님의 척도에 맞는’ 이 정의는 전적으로 사랑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랑 안에서 결실을 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신적 정의가 ‘하느님의 척도에 맞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정의가 사랑에서 우러나고 사랑 안에서 성취되고 구원의 열매를 맺는 까닭입니다. 구속의 신적 차원은 죄 위에 정의를 부과함으로써만 효험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창조적 능력을 사랑으로 회복시켜 줌으로써도 실효를 거둡니다. 그 덕분에 인간은 다시 한번 하느님에게서 오는 충만한 생명과 거룩함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속은 자비를 충만하게 계시하는 것입니다.

파스카 신비는 이처럼 자비가 계시되고 효험을 내는 절정입니다. 파스카 신비는 인간을 의화(義化)시킬 능력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인간에게, 또 인간을 통해서 세상에 바라시던 구원질서에 정의를 회복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고통받는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신앙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각별히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비신자도 그분에게서 대다수 인류와 운명을 함께하는 연대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을 위한, 또 진리와 사랑에 바친 사욕없는 헌신이 그분에게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파스카 신비의 신적 차원은 이보다 훨씬 깊어집니다. 갈바리아에 세워진 십자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최후의 대화를 나누신 십자가는 사랑의 핵심에서 솟아오르는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서 선물로 받았던, 바로 그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요 존재의 궁극적 원천으로서 세계와 긴밀한 연결을 맺는 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도 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결속되어 계시며, 창조보다 더 친밀한 인연으로 인간을, 보이는 세계에 존재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선한 것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생명에 참여하는 특권까지 주시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자기를 내주고 싶어하는 까닭입니다.

갈바리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감탄할 거래(admirabile commercium)가 이루어지는 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놀라운 자기통교(自己通交)를 해주시는 길 옆에 서있습니다. 이 거래와 통교에는 인간에게 건네시는 부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바치고 더불어 눈에 보이는 세계 전체를 바침으로써 신적 생명을 나누어 누리라는 부름입니다. 양자(養子)가 되어, 하느님께 있고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사랑을 나누라는 부름입니다. 역사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는 곳은 인간이 하느님의 양자라는 존엄한 품위로 영원한 선택을 받는 길 옆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77)으로서,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놀라운 계약, 하느님께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과 맺으시는 계약을 최종적으로 증언하려고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길 옆에 서있습니다. 이 계약은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서 창조의 신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뒤로 또 하나의 선민(選民)과 하느님 사이에 여러 차례 갱신되었습니다. 갈바리아에서 체결된 대로 새롭고도 완결된 이 계약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백성에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개방된 계약입니다.

그 밖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십자가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메시지와 사명의 마지막 말씀이라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 주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십자가는 아직 계약의 하느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여인 몇 명이, 그뒤에 사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가는 새벽에야 울려퍼질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고 최초로 “그는 살아나셨다.”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그들은 이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주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도 십자가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 위에서 고난을 받고 돌아가신 분, 사람이신 성자께서 메시아로서 남기신 증언을 통해서 십자가는 여전히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기우는 당신의 영원하신 사랑에 절대적으로 충실하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 따라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습니다.”78)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을 믿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79) 것입니다. 사랑이 세상에 와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개인과 인류 또는 세계가 연루되는 모든 악보다 강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믿는 것은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자비는 사랑 가운데 꼭 있어야 할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자비는 사랑의 별명입니다. 악이 세상에 있고 인간을 좌우하고 사로잡으며 인간 마음속에 스며들어가 인간을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80) 수 있는데, 바로 이 악의 실재 앞에서 사랑이 자태를 드러내고 효력을 미치는 특수한 양상이 곧 자비입니다.

8.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사랑은 죄보다 강하다

갈바리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위력이 하느님의 아들에게까지 미쳤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아들들 가운데에서 본성상 홀로 절대 죄없으시고 죄에서 자유로웠던 분, 이 세상에 오시면서도 아담의 불순종과 원죄의 유산에서 때묻지 않았던 분에게까지 악이 얼마나 맹위를 떨쳤는지 그 위력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 그리스도에게서 죄에 대한 정의(正義)가 구현되었습니다. 그분의 희생을 대가로, “죽기까지” 한 그 순종을 대가로81) 죄에 대한 정의가 실현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죄가 없으셨는데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습니다.”82) 또한 죽음, 인류 역사 시초부터 죄와 결부되어 내려온 죽음에도 정의가 구현되었습니다. 죄가 없는 분, 홀로 돌아가심으로써 죽음을 죽이실 수 있었던 분83)의 죽음을 대가로 해서 죽음은 응분의 정의를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신 아들이 하느님께 온전한 정의를 이루어드린 곳이며, 동시에 자비가 철저히 계시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인간 역사에서 악의 뿌리를 이루는 것, 곧 죄와 죽음에 항거하는 사랑의 계시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시고, 인간이 어렵고 괴로운 순간이면 자신의 불행한 운명이라고 한탄하는 그 경지까지 내려오신 가장 심오한 겸손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현세적 실존의 가장 쓰라린 상처에 영원한 사랑으로 와닿는 어루만짐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나자렛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표명하셨고84) 뒤에 세례자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다시 공표하신85) 메시아 계획의 완전한 성취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말씀에 따르면86) 이 계획은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고 갇힌 사람들, 눈멀고 압제받고 죄많은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사랑’을 계시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파스카 신비에서 인간이 지상의 실존을 계속하는 한 반드시 나누어 겪게 되는 다변적인 악의 울타리가 무너졌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깊은 뿌리를 깨닫게 하였으니 악은 죄와 죽음에 그 뿌리를 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종말론적 표지가 됩니다.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과 결정적 쇄신이 올 때에야 비로소 사랑은 선택받은 사람들 속에서 악의 가장 깊은 원천을 완전히 섬멸하게 될 것이고, 그 완숙한 열매로써 생명과 거룩함과 영광스러운 불사불멸의 나라를 이룩할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완성의 바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87)는 사실은 메시아적 사명의 최종 표지가 됩니다. 악에 예속된 세상에서 자비로운 사랑을 드러내 주는 계시 전체를 완결시키는 표지가 됩니다. 아울러 이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88)을 예고하는 표지도 됩니다. 그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89)

종말론적 완성이 오면 자비는 드디어 사랑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현대적 과정, 인간의 역사는 또한 죄와 죽음의 역사이기 때문에 사랑이 자비로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고 또한 자비로서만 실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아 계획, 자비의 계획은 당신 백성이 물려받는 계획이 되었고 교회의 계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비로운 사랑이 나타나는 계시가 절정을 이룬 곳이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것들이 다 사라져버릴 때까지”90) 십자가가 다른 모든 말씀의 지표가 될 것입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도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91)라는 요한 묵시록의 말씀까지도 십자가를 지표로 해서 알아듣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를 특별한 양식으로 드러내시는 때가 있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분 안에서 자비를 받으라고 초대하실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 다름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서 - 사라지지 않는 ‘말씀’이십니다.9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문 밖에 서서 각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93) 그렇다고 해서 그분께서 사람의 자유를 억누르시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바로 인간의 자유에서 사랑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십니다. 따라서 이에 호응하는 인간의 자유 행사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들”과 연대감을 갖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에게 보여드리는 일종의 ‘자비’도 됩니다. 그리스도의 이 메시아 계획에서, 십자가를 통한 자비의 계시에서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 더욱 높이 존중되고 고상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거기에서 자비를 받음으로써 동시에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는 까닭입니다.

달리 말해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94)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바로 그런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95)라는 산상 설교의 말씀은 어느 의미에서 기쁜 소식 전체를 종합한 말씀이요, ‘감탄할 거래’ 전체를 간추린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 ‘거래’가 구원 계획을 지배하는 법이요, 단순하고 강력하고 또한 ‘쉬운’ 법인 것입니다. ‘사람 마음[人心]’이 (자비를 베풀) 여지가 있음을 처음부터 입증함으로써 산상 설교의 이 말씀은 같은 입장에서 하느님의 깊은 신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불가사의한 일치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신비 속에서는 사랑이 정의를 내포하고 자비를 움직이며, 자비 또는 정의의 완전함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파스카 신비란 하느님의 불가사의한 신비가 계시되는 절정에 서계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다락방에서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6)라고 공표하신 말씀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바로 파스카 신비에서입니다.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97) 아버지께서는 굳이 그리스도의 목숨을 살려내지 않으셨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인간적인 자비를 입지 못하셨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부활로써 당신에게 품고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 당신을 통해서 만민에게 품고 계시는 사랑의 충만함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98)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에 이르는 길로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부활로써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느님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그리고 죽음을 회상할 때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부활하신 분께 집중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있던 다락방에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99) 바로 이 그리스도께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에서 당신께서 철두철미하게 쏟아주신 자비를 체험하셨습니다. 곧 죽음보다 더 강한 아버지의 사랑을 체득하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끝내시면서, 아니 끝낸 뒤에도, 당신 자신이 무궁무진한 자비의 원천이시라고 계시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뒤이어 전개되는 구원의 역사에서 죄보다 더 강함이 영원토록 증명될 그 사랑의 원천이시라고 계시하십니다. 구세사에서나 종말론에서나 파스카의 그리스도야말로 자비의 완결된 강생이시며 자비의 살아있는 표지이십니다. 바로 그런 정신에서 부활절 전례는 우리 입술로 시편의 다음 구절을 노래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자비를 영원히 노래하리이다(Misericordias Domini in aeternum cantabo).”100)

9. 자비로우신 어머니

부활시기에 교회는 마리아께서 즈가리야의 아내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하신 말씀을 다시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101) 강생이 일어날 즈음에 이 말씀은 구세사의 새 전망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이 전망은 역사적 차원과 종말론적 차원에서 다시 새로워졌습니다. 그 시기 이후로 거대한 인류 가족에서, 갈수록 확대되어 가는 제반 영역에서는 연달아 새 세대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새 세대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이 백성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지를 달고 있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의 표지로 ‘날인되어’ 있습니다.102) 파스카 신비는 절대 경지에 이른 자비의 계시이며, 마리아께서 친척의 집 문앞에서 “주님께서는 ……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103)라고 노래하신 것도 이것을 가리킵니다.

마리아께서는 일찍이 아무도 받아본 적이 없는 특수하고 예외적인 방식으로 자비를 입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동시에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희생시키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 보여주는 일에 예외적인 방식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희생은 당신 아들의 십자가와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으며, 마리아께서는 갈바리아에서 십자가 바로 밑에 서계셨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희생은 자비의 계시에 특수하게 참여하는 희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의 사랑에 기울이시는 절대적 성실함 - 당신께서 영원으로부터 바라고 계셨던 때가 되어 인간과, 한 백성과, 인류와 맺으신 계약에 대한 절대적 성실함 - 에 참여하는 희생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완결된 그 계시에 참여하는 희생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어머니를 제외한 그 누구도 십자가의 신비, 하느님의 초월적 정의와 사랑 사이에 이루어진 불가항력적 대면, 자비가 정의에게 준 ‘입맞춤’104)을 생생하게 체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마리아만큼 저 신비, 갈바리아에서 성자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구속의 신적 차원을 마음속에 철저히 받아들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구속에는 모성애에서 우러난 마리아의 희생과 “이루어지이다(fiat)”라는 마리아의 단호한 말씀이 곁들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에 대하여 가장 깊은 지식을 갖고 계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자비의 대가가 무엇인지 아시고 그 자비가 얼마나 위대한지 아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리아를 자비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자비의 성모, 신성한 자비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 칭호 하나하나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칭호들은 마리아의 영혼, 나아가서 그분의 전인격의 특별한 준비 자세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리아께서는 복잡한 많은 사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그 어느 개인이나 전체 인류보다도 먼저 자비를 감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사람들이 “대대로”105) 누리게 되는 그 자비를 마리아께서는 최초로 체득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우리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 드린 칭호들은 여러 가지 의미를 띱니다. 제일 먼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의 어머니로서 이 칭호를 받으십니다. 또한 예외적인 방식으로 이 자비를 입으신 분, 또 그만큼 예외적으로 지상생활과 아드님의 십자가 발치에서 이 자비를 입을 ‘공(功)’을 세우신 분으로서 이 칭호를 받으십니다. 끝으로 마리아께서는 누구와도 비할 데 없이 당신 아드님의 메시아 사명에 숨은 모양으로 깊이 참여하심으로써, 아드님께서 계시하러 오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가까이 느끼게 하신 분으로서 이 칭호를 받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나자렛 회당에서 인용하셨고106) 세례자 요한이 보낸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여 다시 인용하신107) 이사야 예언 그대로, 그 사랑은 고통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 눈먼 사람들, 압제받는 사람들과 죄인들을 상대로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마리아께서 동참하신 것은 바로 이 ‘자비로운’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의 어머니이신 그분께서 특수하고 예외적으로 동참하신 것이 바로 이 ‘자비로운’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무엇보다도 윤리적 물질적 악과 부딪쳤을 때에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마리아 안에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사랑은 교회와 인류의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이 계시는 마리아께서 각별히 좋은 결실을 내시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주의 성모님에게서는 이 계시가 그분의 어머니로서의 특유한 촉감에, 그분의 특히 예민한 감수성에, 어머니의 그 자비로운 사랑을 가장 무난히 받아들였을 만한 사람들에게 두루 힘을 미칠 수 있는 그분의 적격(適格)에 토대를 두고 내린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생명감있는 커다란 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생의 신비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신비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은총의 계획 속에서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알림에 충실히 동의하신 -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없이 지속되었습니다 - 그 순간부터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뒤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주십니다.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을 지상 여정의 위험과 고통 가운데서 돌보시어 행복한 고향으로 이끌어주십니다.”108)
  | 02.12
452 59.2%
VI. 대대로 자비를

10. 우리 세대의 모습

천주의 성모께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신다고 칭송하신 말씀에는 우리 세대도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전적으로 믿습니다.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는 예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스라엘 과거사에만 해당되지 않고 지상에 있는 하느님 백성의 미래 전체에 해당됩니다. 사실상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세 번째 천년대(千年代)가 다가옴을 느끼는 세대이며 역사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심각하게 느끼는 세대입니다.

현세대는 자기들이 특권적 위치에 있음을 압니다. 진보는 수십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헤아릴 수 없는 가능성들을 현세대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 활동과 지능과 업적은 과학과 기술 분야와 사회 및 문화생활 분야에 깊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대자연 위에 자기 능력을 크게 확장하였고 사회적 행동 법칙에 대한 좀더 깊은 지식을 획득하였습니다. 보편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증진됨으로써, 인류의 단일성을 더 분명하게 깨달음으로써, 참다운 연대감 속에 상호 의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인위적인 지리적 분할과 국가적 인종적 한계를 초월하여 형제자매들과 접촉을 갖고 싶어하는 소망과 그 가능성이 많아짐으로써 개인이나 국가 사이의 거리가 해소되거나 아예 제거되고 있음을 현대인은 목격해 왔습니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새로운 물질적 재화만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식을 폭넓게 나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예컨대 정보 교환과 정보처리 분야의 탁월한 발전은 인간의 창조적 역량을 신장시키고 타국민들의 지성적 문화적 부(富)에 협조할 수 있게 합니다. 새로운 홍보 기술들은 사건들에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폭넓은 사상 교환을 촉진합니다. 생물학, 심리학, 사회과학의 업적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부요함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진보가 공업화된 국가들만 누리는 특권이 되다시피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의욕이 실제로 있기만 하다면 모든 국민, 모든 국가가 이 진보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이제는 단순한 이상이 아님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과 병행해서 또는 이 현상의 일부로서, 성장이 있을 때마다 그만큼 곤란도 발생합니다. 인간이 심각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거기에 대해서는 불안과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의 세계 양상은 피상적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들과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이 세대의 생활상을 다루는 유일한 문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비중있는 큰 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현대 세계가 고민하는 불균형은 인간 마음속에 뿌리박힌 좀더 근본적인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과연 인간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여러 욕망들을 제한받지 않을 뿐더러 좀더 고차적인 생명에 불렸음을 느낍니다. 인간은 또한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선택을 강요당합니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죄인이므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고,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수도 드물지 않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미 분열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109)

이 헌장 서론의 끝부분에서는 다른 말이 나옵니다. “세계의 현 발전을 직시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위대한 발전을 이루었는데도, 아직도 존재하는 고통과 분쟁과 죽음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승리는 또 무슨 소용인가 ……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하거나 새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110)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후 15년의 세월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이 긴장과 위협의 양상을 조금이라도 감소시켰습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공의회 문서에는 윤곽만 나와 있고 그 속에 숨겨진 위험들이 - 현저하지 않았던 그 긴장과 위협이 - 이 세월 동안에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험을 여러 가지 양상으로 확인시키며 과거의 환상에 젖어들게 허용하지 않습니다.

11. 불안의 원천

현대 세계는 위협에 처해 있다는 느낌이 더해 갑니다. 저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피력했듯이, 현대의 원자무기 비축에 견주어볼 때에 알력은 곧 인류의 부분적 자멸을 의미한다는 안목에서 인류가 존재하느냐 망하느냐에 대한 공포가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협은 단순히 인간이, 병기 기술공학이 제공한 수단으로 인간들에게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유물론적 사회가 ‘인본주의적’ 선언문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물질의 우위성을 인정함으로써 야기되는 다른 위험들도 무수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그러한 사회 형태가 창안해 낸 수단이 사용됨으로 말미암아, 개인과 환경과 공동체들,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다른 개인과 환경과 사회의 권력 남용에 희생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금세기의 역사는 이에 대한 수많은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인적 차원에서, 곧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존재에 대해서 인권선언이 나오고 있음에도, 이러한 사례들이 단순히 과거의 일이라고만 단언할 수는 없는 실정입니다.

인간은 다행히 압제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압제는 인간 내면의 자유를 박탈하고, 자신이 확신하는 진리를 표현할 가능성을 빼앗으며,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을 앗아가고, 올바른 것을 따르라고 말해 주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하는 능력마저 제거합니다. 현대 사회에 맡겨진 기술적 수단들은 무력 충돌에 의한 자멸의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필요한 수단들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분별없이 그 수단들을 휘두르겠다는 각오를 가진 자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기 마음에 들지만 않는다면 개인과 환경과 전체 사회 또는 국가들을 ‘평화적으로’ 예속시켜 버릴 가능성마저 안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존재하는 고문을 예로 들 수 있는데, 당국자들이 지배와 정치적 억압의 수단으로 이 고문을 조직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당국자들의 하수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서 이 고문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생리적 위협의 자각과 더불어 또 다른 위협에 대한 자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간다운 것을 더욱 파괴시키는 위협이요, 진리와 자유를 누릴 남녀 인간의 권리와 인격의 존엄성과 관련되는 위협입니다.

이 모든 일의 이면에는 크나큰 양심의 가책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유하고 포만한 인간들과 사회들이 풍족하게 살고 소비 풍조와 쾌락에 빠져있는데, 바로 곁에서는 똑같은 인류 가족의 인간들과 집단들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양심의 가책입니다. 어머니의 눈앞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기들이 있습니다. 세계 여러 지역 가운데는, 사회 경제 체제의 여러 분야에서 전체가 빈곤과 결핍과 저개발에 시달리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개인들 사이, 국가들 사이의 불평등 상태가 ‘아직까지’ 존재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날로 증가’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부유하고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 바로 곁에서 궁핍하게 살고 비참에 시달리며 심지어 실제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숫자가 천만대 심지어 억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도덕적 불안이 갈수록 심해질 따름입니다. 근본적인 결함, 또는 일련의 결함들, 또는 결함이 있는 기계 장치가 현대 경제와 유물론적 문명의 밑바탕에 자리잡고 있음이 분명하며, 그 때문에 인류 가족이 현저하게 불의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대 세계의 이 양상, 물리적 윤리적 악이 팽배하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가 대립과 긴장으로 얽혀있고, 아울러 인간 자유와 양심과 종교에 대한 위협으로 가득 찬 세계 양상이 현대인의 불안을 설명해 줍니다. 이 불안은 불리하고 압제받는 사람들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부와 진보와 권력의 특권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의 원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기술과 부와 권력에서 오는 현세적 수단으로 이에 대처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인간 정신의 저 밑바닥에서는 이 불안이 현세적 수단 전부보다 더 강력함을 어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정확하게 분석하여 지적했듯이, 이 불안은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들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사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결부된, 인간과 온 인류의 장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것은 철두철미한 해결을 요구하며 지금의 인류에게 그 해결을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2. 정의로만 충분한가

현대 세계에서 정의감이 광범위하게 재각성되어 왔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과 사회 집단과 ‘계급’들 사이에, 개개 국민과 국가 사이에, 나아가서는 전체 정치 체제들 사이에, 또는 ‘제0세계’라고 부르는 세계들 사이에 정의에 위배되는 점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심각하고도 다채로운 방향, 현대의 인간 양심을 정의의 바탕으로 삼는 이 방향은 세계를 뒤덮고 있는 긴장과 갈등이 ‘도덕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교회는 모든 면에서 정의로운 생활을 바라는 현대인의 깊고도 열렬한 소망을 함께 나누며, 인간과 사회 생활에 요구되는 정의의 여러 측면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습니다. 이는 지난 한 세기 동안 크게 발전한 가톨릭 사회교리 분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의 노선에 입각하여 정의의 정신에 따른 인간 양심의 교육과 형성이 촉진되고, 같은 정신으로 전개되고 있는 개별 활동, 특히 평신도 사도직 영역의 활동이 촉진됩니다.

그러나 정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개인들 사이에 그리고 집단들 사이와 인간 사회 사이에 정의 구현을 도모하는 프로그램들이 왜곡당하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 또한 쉽사리 눈에 띕니다. 경험에 따르면 정의 사상을 계속 내세우면서도 다른 부정적인 세력들이 정의 위에 우세를 떨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증오와 야만성까지 보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적을 말살시키려는 야망, 적의, 자유를 제한시키고 적을 완전한 예속에 강제로 몰아넣으려는 야망이 행동의 근본 동기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의의 본질과 극히 상반됩니다. 정의는 본성상 알력을 빚는 두 당사자 사이에 평등과 조화를 도모하려는 경향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정의 사상의 악용과 정의 실천의 왜곡은 인간 행동이, 비록 정의의 이름으로 수행될지라도, 정의 자체로부터 얼마나 크게 빗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교리에 충실한 당신의 청중들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111)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들의 태도를 두고서 이의를 제기하신 것도 까닭이 없지 않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것은 당대에 정의가 왜곡된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정의 형태들도 곧잘 이 형태를 본보기로 삼고 있습니다. 이른바 정의의 이름으로(예를 들어 역사적 정의 또는 계급 정의라는 이름으로), 이웃 사람이 파멸되고 살해되고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간 기본권을 빼앗기는 일이 흔합니다. 과거와 우리 시대에 걸친 이 같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인생의 제반 차원에서 사랑이라는 저력 깊은 힘이 인간 생활을 형성해 나가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정의라는 것이 곧 정의 자체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그래서 역사적 경험으로 “최고의 정의는 최고의 불의다(summum ius, summa iniuria).”라는 격언이 나오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 격언이 정의의 가치를 손상시키거나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질서의 의의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의 질서 자체를 좌우하는 정신의 힘, 좀더 깊이있는 힘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리킬 따름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대의 양상을 눈앞에 두고서 현대의 그 많은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불안을 함께 나눕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여러 기본 가치들의 하락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가치들은 그리스도교 윤리뿐만 아니라 인간 윤리, 그리고 윤리 교육에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선(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본 가치에는 수태의 순간부터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 불가해소한 단일성 안에서 혼인에 대한 존중, 가정의 안정성에 대한 존중 등이 포함됩니다. 윤리에 대한 지나친 관용은 생명과 사회의 이러한 가장 민감한 영역에 특히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 이에 병행해서 인간 관계에서 진실의 위기, 자기 발언에 대한 책임 결여, 개인과 개인 사이에 순전히 실용을 본위로 하는 인간 관계, 참다운 공동선에 대한 감각 상실, 공동선을 대수롭지 않게 유린하는 작태가 연달아 발생합니다. 끝으로 ‘비신성화(非神聖化)’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자칫 ‘비인간화’로 귀결됩니다. 도대체 ‘신성한’ 대상을 전혀 갖지 못하는 인간과 사회는 외양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반드시 도덕적 부패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 02.12
452 59.2%
VII. 교회 사명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자비

우리 세대의 이 모습,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모습을 목격할 때에, 하느님 아들의 강생을 맞아 마리아께서 노래하셨던 “대대로 자비를 베푸신다”는 말씀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현대의 교회는 영감을 받은 이 말씀의 힘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거대한 인류 가족이 받는 고통에 이 말씀을 적용시키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교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해야 할 필요성을 각별히 깊이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전통을 뒤따르는 길이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되고 또 메시아로서 그분의 사명 전체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선 하느님의 자비가 구원을 주는 신앙의 진리임을, 신앙과 조화된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신자들의 생활에, 또 가능하다면 선의의 모든 인간의 생활에 하느님의 자비를 이끌어들이고 구체화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끝으로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언제나 그 자비에 충실함으로써, 하느님 자비를 상기시킬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물리적 윤리적 악의 모든 출현 앞에서, 오늘날 인류생활의 지평선을 덮고 있는 온갖 위협 앞에서, 하느님 자비를 부르짖어야 합니다.

13.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그 자비를 선포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계시로 우리에게 전수된 그대로 자비의 진리 전부를 고백하고 선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본 문서의 앞 부분에서 우리는 성서와 성전에 그토록 풍부한 표현을 담고 있는 이 진리를 윤곽이나마 파악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교회의 일상생활을 보면 성서에 표현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진리가 성전례(聖典禮)의 여러 독서를 통해서 영구히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갖는 올바른 신앙 감각으로 이 진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개인과 공동체의 신심에서 오는 다채로운 표현으로 이 진리가 나타납니다. 물론 신심의 표현들을 열거하거나 간추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대부분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생생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자비가 하느님의 속성과 완전성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속성이며, 성서와 성전과 하느님 백성의 신앙생활이 이를 입증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는 신성(神性)의 신비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불가해한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 존재의 내밀한 진실을 안은 채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특히 가까이서 또 특히 빈번히 만나 뵙게 만드는 속성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필립보에게 하신 말씀에 맞추어,112) “아버지를 보는 것”, 믿음으로 하느님을 보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만날 때에 참으로 단순하고도 진실하게 이루어집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입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113)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합니다. 교회는 자신의 광범위한 신앙 체험에서도, 자신의 가르침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우러러보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애와 복음,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그분의 신비 전체에 시선을 집중합니다. 교회의 산 신앙과 가르침 속에서 그리스도를 뵙게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당신 자비의 거룩함 속에 계시는 ‘아버지를 뵙는’ 길에 가까워지게 만듭니다. 교회가 각별히 하느님 자비를 고백하고 그 자비를 공경하는 모습을 보일 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심(聖心)을 향할 때입니다. 그리스도 성심의 신비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접근하는 이 길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의 계시, 사람의 아들께서 수행하신 메시아적 사명의 중심을 이룬 계시의 핵심이 무엇인지 헤아리게 해줍니다. 그 핵심은 어느 의미에서는 하나의 구심점이며 인간적 차원에서 가장 접근이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할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비가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구세주의 자비의 샘에 가까이 가게 만들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자비의 관리자요 분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하느님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고 성체성사와 고해 또는 화해의 성사에 의식적이고 성숙하게 참여하는 일이 크나큰 비중을 갖습니다. 성체성사는 죽음보다 더 강한 그 사랑에 좀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영광 중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구세주의 죽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활도 선포하는 까닭입니다.114) 우리는 메시아적 사명을 수행하시면서 당신의 말씀과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신 분을 기념하여 성찬례를 거행합니다. 바로 이 성찬례가 우리에게 끝없는 사랑을 입증하는데 그 까닭은 성찬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와 일치하여 계시고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에 만나러 오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고해 또는 화해의 성사는 각 사람에게, 심지어 큰 죄과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준비를 시킵니다. 이 성사에서 인간은 참으로 특유하게 자비를, 곧 죄보다 강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이에 대하여 이미 분명히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근본 주제로 다시 한번 되돌아가는 것도 적합할 듯합니다.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115)하셨는데도 세상에 죄가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이신” 하느님116)께서 당신을 ‘자비’로 드러내실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라는 그 사랑의 가장 깊은 진리와도 같고 인간의, 또 인간의 현세적 고향인 세상의 내면적 진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자비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속성이기에 또한 무한합니다. 따라서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맞아들이시려는 아버지의 마음도 무한하고 다할 줄을 모릅니다. 아들의 희생이라는 놀라운 가치에서 끊임없이 흘러 나오는 이 용서하려는 마음과 용서하는 힘 또한 무한합니다. 어떠한 인간 죄악도 이 힘을 누를 수 없고 제한하지도 못합니다. 인간 측에서 선의가 없을 때에, 뉘우치고 회개하려는 마음이 없을 때에, 달리 말해서 완고하게 버틸 때에만, 은총과 진리에 맞서고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거 앞에서 버틸 때에만 용서의 힘을 가로막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회개를 고백하고 또 선포합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는 반드시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곧 창조주시요 아버지께서만 보여주실 수 있는 사랑, 오래 참고 친절한 사랑117)을 발견하는 데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118)께서는 이 사랑에 충실을 다하시어 인간과 맺으신 계약의 역사에서 참으로 극단적인 결과들을 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심지어 아들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까지 빚어내셨습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이 아버지를 ‘다시 알아뵙는’ 결실이기 마련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자애로우신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항구하고 끝없는 회개의 원천이 됩니다. 순간적인 내적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자세가 되고 정신 상태가 되게 하는 원천이 회개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 이런 식으로 하느님을 ‘뵙게’ 된 사람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여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는 상태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회개하는 상태야말로 길 가는 나그네 상태에 있는 남녀 모든 인간의 순례의 가장 내밀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함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백성 전체의 깊고깊은 생활의 맥박을 통해서 그 자비를 고백합니다. 이러한 생활의 증거를 통해서 교회는 하느님 백성에게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란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고, 어느 의미에서 그 사명의 연장(延長)입니다.

현대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에 기초를 두어야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을 모두 하나 되게 하려는 교회 일치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음을 깊이 의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방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인간적 분열의 약점보다 강한 그 사랑만이 결정적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음을 교회는 겸허하게 고백합니다. 이 일치는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 애원하신 것이며, 성령께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119)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14. 교회는 자비를 실현하고자 힘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체험한다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은 남에게 ‘자비를 행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고도 가르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120) 교회는 이 말씀에서 ‘행동으로 부름’을 발견하며 자비를 실천하고자 힘씁니다. 산상 설교의 ‘참된 행복’ 전부가 회개와 생활 쇄신의 길을 가리키고 있지만, 자비를 베푸는 사람에 대한 말씀은 이 점에서 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 곧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 이 사랑의 정신으로 변모되어 자기 이웃을 대할 때입니다.

복음에 정법(正法)으로 나오는 이 과정은 일시에 완결되는 영적 변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일체의 생활양식이며 그리스도인 소명의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특성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심리적 사회적 본성의 온갖 곤란에도, 일치시키고 고양시키는 능력임을 깨닫고 꾸준히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자비로운 사랑 - 본질상 창조적인 사랑 - 의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서 자비로운 사랑은 절대로 일방적인 행위 또는 과정일 수 없습니다. 매사에 한쪽에서만 주고 베풀며 다른 쪽은 입고 받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예를 들어 치료를 베푸는 의사, 가르치는 교사, 자녀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부모, 곤궁한 사람을 돕는 은인)라 할지라도, 사실 베푸는 사람은 반드시 수혜자이기도 합니다. 어떻든 베푸는 사람 역시 자기가 받는 사람, 은혜를 입는 사람, 자비로운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의 위치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기도 자비의 대상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극히 고귀한 귀감이시며 영감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을 편하지 않게 충동하는 이 귀감에 바탕을 둔다면 우리는 참으로 겸허하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비가 당신에게 베풀어진 것처럼 거두어주시리라는121) 점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귀감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자비를 일방적으로 남에게 베푸는 선행이라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우리의 행동과 의도를 전적으로, 계속해서 순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자비로운 사랑의 행동을 하는 순간에 우리 또한 그것을 받는 사람한테서 자비를 입는다는 깊은 신념을 갖고 행동할 때에, 자비로운 사랑의 행동은 참다운 본연의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쌍방적이고 상호적인 성격이 결여된다면, 우리 행동은 아직까지 진정한 자비의 행동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말씀과 십자가에까지 이른 행동으로 보여주신 회심(回心)이 우리에게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자비로운 사랑의 놀라운 원천에 우리가 아직도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께서 산상 설교 중에,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의 행복을 두고 말씀하신 방식은 자비에 대한 보통의 인간적인 견해보다 훨씬 내용이 풍부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과 입는 사람 사이에, 선을 행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어떤 거리를 전제하고 그 거리를 두는 인간적인 견해는 자비를 일방적인 행동 또는 과정으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인간 관계나 사회적 관계를 자비라는 것에서 분리시켜 정의에만 입각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비에 대한 이 같은 견해는 성서 전승 전체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이 천명하는, 자비와 정의 사이의 근본적인 연관을 지나쳐버리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진정한 자비는 정의의 가장 깊은 원천인 것입니다. 만일 정의가 객관적인 선익을 공평하게 상호 분배하는 데 대한 인간들 사이의 ‘중재’에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자비’라고 일컫는 온화한 사랑을 비롯한) 사랑은, 또 사랑만이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 복귀시킬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적인 자비는 인간 ‘평등’의 가장 완벽한 체현(體現)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정의가 그 나름대로 같은 목적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자비는 정의의 가장 완벽한 체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의에서 오는 행동은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선익에만 국한됩니다. 그에 비해서 사랑과 자비는 인간이라는 가치,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두고 인간들이 서로 만나게 해줍니다. 아울러 “오래 참고 친절한” 사랑122)을 통해서 오는 인간의 ‘평등’은 차이를 말살하지 않습니다. 베푸는 사람은 자기 선심을 받는 사람에게서 혜택을 입고 있음을 느낄 때에 그만큼 더 관대해집니다. 그 반대로 선심을 받는 사람 역시 자기가 그것을 받는 가운데 자기 나름대로 선을 행한다는 의식을 갖고서 받아들이면 상대방 인간의 존엄성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 자비는 좀더 깊은 양상으로 인간들을 융화시키는 데 이바지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것을 정말 깊이 존중하는 정신에 따라, 상호 박애의 정신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상호 관계를 형성할 때 자비는 불가결한 요소가 됩니다. 사람들이 만일 정의의 척도에만 의거하여 상호 관계를 정립하고자 한다면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유대는 절대 성립되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는 정의가 사랑을 통해서 상당한 정도로 ‘교정’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사랑은 성 바오로께서 공언하시는 대로 “오래 참고 친절하며”, 달리 말하자면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이루는 자비로운 사랑의 특성들을 띱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을 기억합시다. 자비로운 사랑은, 탕자의 비유123)와 잃었던 양과 잃었던 은전의 비유124)에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듯이 온정과 감수성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비로운 사랑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친구들 사이에 ‘자비로운’ 사랑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교육과 사목 활동에 이것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행동이 여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바오로 6세께서는 여러 번 “사랑의 문명”125)을 주창하시면서, 문화와 사회 분야, 경제와 정치 분야의 모든 노력이 지향해야 할 목표로 이 “사랑의 문명”을 내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 사회의 광범위하고도 복잡한 모든 영역에 대한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126)라는 기준에 그친다고 합시다. 이와는 전혀 다른 정신으로 이 법칙을 보완하거나 본질적으로 이 법칙을 변혁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사랑의 문명”이라는 선(善)은 결코 달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분명히 우리를 훌륭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공의회는 좀더 인간다운 세계를 만들 필요성을 누누이 반복하였고127) 그 과업을 성취하는 것이 곧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사명이라고 천명한 것입니다. 사회가 좀더 인간다워지려면 다각적인 인간 관계와 사회 관계에 정의만이 아니라 ‘자비로운’ 사랑을 도입해야만 합니다. 자비로운 사랑은 복음에 나오는 메시아적 메시지의 기본 요소인 것입니다.

사회가 ‘좀더 인간다워지려면’ 사회의 윤리적 성격을 정하게 되는 모든 상호 관계 속에 ‘용서의 계기’를 도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용서의 계기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용서는 세상에 죄보다 강한 사랑이 현존한다는 증명입니다. 용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인간들의 관계에서도 화해의 기본 요건이기도 합니다. 용서가 배제된 세계는 냉혹한 정의의 세계일 것이며, 거기에서는 인간 개개인이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들에 대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것입니다. 인간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갖가지 이기심이 인생과 인간 사회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체제로 변모시킬 것이고, 한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에 영구적인 투쟁이 벌어지는 격투장으로 변질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최고로 계시된 자비의 신비를 선포하고 생활에 옮기는 일을 교회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것이며, 어느 시대에나 그렇지만 특히 이 현대에 그렇게 여깁니다. 자비의 신비는 신앙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인간이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생활의 원천이 됩니다.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삼중의 욕정이라는 억압적인 세력 앞에 놓여있는 것입니다.128)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언제나 용서해 주라고 가르치시는 것도 이 신비의 이름으로 하십니다.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기도문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외우고 있습니까!129) 우리에게 잘못한 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해악을 끼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말이 담고 있는 자세의 깊은 가치를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말이 각자에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까! 각자가 남에게 ‘잘못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형제적 유대를 호소하게 합니다. 성 바오로께서는 이것을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130)는 간결한 권고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말에는 인간을 대하는, 이웃과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대하라는 교훈이 얼마나 강하게 담겨있습니까? 인간 실존의 모든 여건에서 일상생활을 선의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교훈을 무시한다면 ‘인본주의적’ 생활 계획과 교육에서 과연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남을 용서해야 할 필요성을 극구 강조하셨으며, 베드로가 도대체 몇 번이나 이웃을 용서해야 하느냐고 여쭙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로 대답하셨습니다.131) 누구든지 언제나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관대한 용서를 요구한다고 해서 객관적인 정의의 요구를 말살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만 알아듣는다면 정의는 용서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어느 구절도 용서, 또는 용서의 원천인 자비가 죄악에, 악한 표양에, 불의와 모욕에 대해 방관하는 관용이라는 메시지는 없습니다. 오히려 악과 악표에 대한 속죄, 불의에 대한 보상, 모욕을 끼친 데 대한 배상은 용서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요건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영역에는 반드시 정의의 기본 구조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정의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 새로운 내용이 가장 단순하고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정의에 고유한 ‘배상’과 (가해의) ‘중단’이라는 과정 외에도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사실 그래야만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 수긍하기에 이릅니다. 사랑이 그 고유한 본성을 드러낼 수 있으려면 정의의 요건을 채우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우리는 용서하는 이와 용서받는 이가 근본적인 핵심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 두었습니다. 그 핵심이란 인간의 존엄성이나 본질적 가치이며 그 핵심은 상실될 수도 없고 그 핵심의 인정 또는 재발견이 커다란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132)

교회는 생활과 행동에서, 교육활동과 사목활동에서 용서의 본연성을 수호하는 일이 교회의 임무이며 교회 사명의 목적이라고 옳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원천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하느님 자비의 신비를 지킴으로써 용서의 본연성을 수호합니다.

교회 사명의 바탕에 대해서는 최근 공의회의 여러 발언에 나와 있고 십수세기에 걸친 사도직의 경험으로도 다각도로 언명되어 있듯이, “구세주의 샘에서 물을 긷는 일”133)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인 개인의 생활과 개개 공동체의 생활,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생활에서 교회의 사명을 보여주는 지침이 나옵니다. “구세주의 샘에서 물을 긷는 일”은 주님의 모범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34)는 말씀에 따라 우리가 취해야 할 가난의 정신을 취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직무자들과 청지기들의 복음적 가난, 그리고 주님의 ‘위대한 업적’을 증언하는 모든 백성의 복음적 가난을 통해서 교회의 생활과 봉사직무의 모든 면에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더욱더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 02.12
452 59.2%
VIII. 현대 교회의 기도

15.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한다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느님 자비의 진리를 선포하며, 여러 가지로 이 진리를 고백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이 실천이 오늘과 내일의 좀더 낫고 ‘좀더 인간다운’ 세계를 위하여 연대감을 갖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인류를 덮어누르면서 인류를 위협하는 여러 형태의 일에 에워싸여 있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외치는기도를 한시도 잊지 않습니다. 역사상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지금같이 위태로운 시대에는 더구나 그 기도를 잊지 않습니다. 인간 양심이 심하게 속화될수록, ‘자비’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될수록, 하느님에게서 떠나 자비의 신비에 거리를 두면 둘수록, 교회는 “큰소리로”135) 자비의 하느님께 호소할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큰소리”는 현대 교회의 특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부르짖어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현현을 빕니다. 교회는 그 자비와 현현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게서, 곧 파스카 신비에서 이미 왔다고 믿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파스카 신비는 자비에 대한 가장 완전한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죄와 그 어떤 악보다 강한 사랑, 인간이 심연에 떨어질 때에 그 인간을 끄집어 올려주며 말할 수 없이 큰 위협에서 인간을 구해 주는 사랑이 파스카 신비에서 가장 완전하게 계시되었습니다.

현대인은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개략(槪略)에 불과합니다. 현대인은 세계에 이미 구축되어 있고 인류를 얽혀들게 만든 저 무서운 긴장을 해결하는 방도가 과연 있을까 의심하면서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자비’라는 말을 꺼낼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면, 또는 충고하는 내용이 비어있는 현대인의 양심이 평온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 교회가 이 말을 꺼내야 할 필요는 훨씬 큰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이름으로만 아니라 현대 남녀 모든 인간의 이름으로 자비라는 말을 꺼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본 문서에서 말한 내용은 모두 열렬한 기도로 바뀌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현대 세계에 사는 인간의 필요에 맞추어 자비를 호소하는 부르짖음으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이 자비에 대한 진리에 가득 찬 부르짖음이 되기 바랍니다. 이 자비는 성서와 성전에,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그 많은 세대들이 영위해 온 참다운 신앙생활에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서 저자들이 하던 그대로,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겠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은 아무것도 멸시하지 못하시는 하느님,136) 당신 자신에게, 당신의 부성(父性)에, 당신의 사랑에 성실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하던 그대로 모성을 띤 사랑, 어머니처럼 자녀 하나하나 뒤를 따라가고 잃어버린 양 하나하나를 찾으러 다니는 사랑에 호소해야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양이 수백만이 될지라도, 세상에서 악이 선을 이기고 있을지라도, 현대 인류가 일찍이 노아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그 죄로 미루어 보아서 ‘대홍수’를 당할 만한 처지일지라도, 우리는 그 사랑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메시아적 사명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아버지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이른 아버지 사랑에 하소연해야 하겠습니다. “대대로” 자비를 베푸신다고 하신 마리아의 노래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하소연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대를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애원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를 본받아 인류의 영성적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교회는 이 기도로 교회 자신의 어머니다운 염려를 표현하고, 아울러 교회의 신뢰 깊은 사랑, 기도에 대한 더없이 뜨거운 필요성을 느끼게 만드는 사랑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의 청원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 태도가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현대인이 자기에게서 멀리 떼어버리고 하느님을 곧잘 ‘잉여 존재’라고 떠들면서 자기와 무관한 분으로 대하는 하느님을 향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태도는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현대인의 무도한 배척을 우리는 깊이 통감하고 있으며,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대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137)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아울러 이 태도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일체의 예외와 구분 없이, 인종과 문화, 언어나 세계관의 차별 없이, 친구와 원수를 구분함 없이 모든 남녀 인간을 향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 태도는 인간에 대한 사랑, 어떤 예외도 없는 인간 각자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 각자에게, 각각의 인간 공동체와 가정과 국가와 사회 집단에게, 젊은이들과 성인 부모들과 노인들에게 참다운 선이면 무엇이나 기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개인에게 참다운 선이면 무엇이나 이루어주고, 일체의 악을 다 제거하고 몰아내고 싶어하는 사랑 또는 심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이며 하느님 신비의 청지기인 저를 이끄는 믿음과 희망을 같이하지 않는 이가 이 시대 사람들 가운데 있다면,138) 역사의 이 시점에서 인류를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애원하도록 우려하는 사유만은 적어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그 사유란 인간을 위하는 사랑에서 오는 명령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것, 많은 현대인들이 예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거대한 위험으로 위협당하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아끼는 사랑에서 오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한 소명을 드러내 보여주며, 저를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인간의 견줄 데 없는 존엄성을 강조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의 신비가 자비를 선포하라는 의무를, 그것이 같은 신비에서 계시된 자비로운 사랑임을 선포하라는 의무를 저에게 지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 자비에 호소하라는 의무를 지우며, 이천년대가 끝나 가는 교회와 세계의 역사에서 이 험난하고도 위급한 시점에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라는 의무를 지우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의 메시아적 사명의 정신으로 인류 역사에 임하고 있는 우리는 소리 높여 기도합니다. 아버지 안에 계시는 사랑이 역사의 이 시점에 다시 한번 계시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들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그 사랑이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에 현존함을 보여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악보다 강함을, 죄와 죽음보다 강함을 보여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라고 끊임없이 고백하시는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139)라는 산상 설교의 말씀을 그대로 이룬 분들의 전구를 통해서 이 기도를 올립니다.

교회의 자아실현의 새로운 국면에 해당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이행하는 중대한 과업을 계속하면서, 또 우리가 살도록 정해진 이 시대와 보조를 맞추면서, 교회는 어떠한 이유가 있더라도 자기 자신 속으로 폐쇄되어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명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뵙게 해주신 아버지140) 하느님을 계시하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저항이 제아무리 거셀지라도, 현대 문명의 상이함이 제아무리 두드러진다 할지라도, 인간 세계에 하느님에 대한 부인(否認)이 제아무리 심할지라도, 교회는 이 신비와 그만큼 더 친근해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 신비는 수십세기 동안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가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저의 사도적 축복을 보냅니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교황 재임 제3년
1980년 11월 30일
대림 제1주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02.12
452 59.2%
주석

1. 에페 2,4.
2. 요한 1,18; 히브 1,1 이하 참조.
3. 요한 14,8-9.
4. 에페 2,4-5.
5. 2고린 1,3.
6.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 22항: AAS 58(1966), 1042면.
7. 사목헌장, 22항.
8. 1디모 6,16.
9. 로마 1,20.
10. 요한 1,18.
11. 1디모 6,16.
12. 디도 3,4 참조.
13. 에페 2,4.
14. 창세 1,28 참조.
15. 사목헌장, 9항.
16. 2고린 1,3.
17. 마태 6,4.6.18.
18. 에페 3,18;루가 11,5-13 참조
18. 에페 3,18; 루가 11,5-13 참조.
19. 루가 4,18-19.
20. 루가 7,19.
21. 루가 7,22-23.
22. 1요한 4,16.
23. 에페 2,4.
24. 루가 15,11-32.
25. 루가 10,30-37.
26. 마태 18,23-35
27. 마태 18,12-14; 루가 15,3-7.
28. 루가 15,8-10.
29. 마태 22,38.
30. 마태 5,7.
31. 판관 3,7-9 참조.
32. 1열왕 8,22-53 참조.
33. 미가 7,18-20 참조.
34. 이사 1,18; 51,4-16 참조.
35. 바룩 2,11--3,8 참조.
36. 느헤 9 참조.
37. 호세 2,21-25; 15; 이사 54,6-8의 예 참조.
38. 예레 31,20; 에제 39,25-29 참조.
39. 2사무 11; 12; 24,10 참조.
40. 욥기 여러 군데.
41. 에스 14,1 이하(공동번역).
42. 느헤 9,30-32; 토비 3,2-3.11-12; 8,16-17; 1마카 4,24의 예 참조.
43. 출애 3,7 이하 참조.
44. 이사 63,9 참조.
45. 출애 34,6.
46. 민수 14,18; 2역대 30,9; 느헤 9,17; 시편 86(85); 지혜 15,1; 집회 2,11; 요엘 2,13.
47. 이사 63,16 참조.
48. 출애 4,22 참조.
49. 호세 2,3 참조.
50. 호세 11,7-9; 예레 31,20; 이사 53,7 이하 참조.
51. 시편 103(102); 145(144) 참조.
52. 구약의 성서들은 자비를 표현하는 데 특히 두 가지 표현을 많이 쓴다. 둘 다 어의상의 뉘앙스는 다르다. 먼저 헤세드(hesed)라는 말이 있는데 참으로 '선량함'에서 오는 은근한 자세를 가리킨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관계가 성립되고 나면 서로 상대방이 잘되기 바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내면의 허심(許心)으로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신의(信義)로 상대방에게 신의를 지키게 된다. 헤세드가 '총애' 또는 '사랑'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이 신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문제의 허심 또는 서약(誓約)이 도의적 성격만 띠지 않고 법률적 성격을 띤다고 해도 다를 바는 없다. 구약성서에서 주님을 두고 헤세드가 쓰일 때에는 반드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과 결부되어 쓰인다. 하느님 편에서 이 계약은 이스라엘에 대한 호의요 거저 주시는 선물이었다. 그렇지만 당신께서 맺으신 계약에 조화를 이루시려는 뜻에서 하느님께서 그 계약을 존중하기로 언명하신 이상, 헤세드는 어느 의미로 법적인 내용을 갖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깨뜨리고 그 조건을 존중하지 않을 때마다 하느님 편에서도 법률상의 이행 의무가 소실된다. 그러나 이 지점에 오면 헤세드는 법률상의 의무가 되지 않고 더 심원한 면모를 드러낸다. 본래의 의미 곧 거저 베푸는 사랑, 배반보다 훨씬 강력한 사랑, 죄보다 훨씬 강한 은총으로 나타난다.

당신 백성, 부정한 딸(애가 4,3.6 참조)에게 쏟으시는 이 성실함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상대로 하시는 성실함"인 것이다. 일종의 중언법(衆言法)이라고 할 헤세드와 에메트(hesed we'e met), 일종의 성실함이 번번이 함께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 이것은 한층 분명해진다(예: 출애 34,6; 2사무 2,6; 15,20; 시편 25[24],10; 40[39],11-12; 85[84],11; 138[137],2; 미가 7,20).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내 이름 때문에 행동할 것이다"(에제 36,22).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계약을 파기한 죄 때문에 (법률상의) 정의를 내세워 하느님의 헤세드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렇지만 계약 상대방인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에는 책임이 있으시니까" 그 헤세드를 얻으리라고 기대하고 믿을 수가 있으며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 사랑에서 오는 열매는 용서이고, 은총의 회복이며, 내면의 계약의 갱신이다.

구약성서가 자비를 정의하는 데 쓰는 다른 용어는 라하밈(rahamm)이다. 이 용어는 헤세드와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헤세드가 자신에 대한 성실함, "자기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데 비해서(그 점에서 어는 의미로 남성적 성격을 띤다), 라하밈은 그 어근(語根)으로 보더라도 러험(rehem=어머니의 태) 곧 '어머니의 사랑'을 가리키고 있다. 어머니를 아이와 맺어주는 깊고도 본연적인 끈 - 하나의 일치 - 에서부터 아이에게 기우는 특별한 관계, 특별한 사랑이 우러난다. 이 사랑에 대해서 말하자면 권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거저 주는 사랑이라 하겠고, 그런 면에서 내면적인 필연성을 이루다고 하겠다. 마음의 절박한 사정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라하밈은 헤세드로 표현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남성적인 성실함을 '여성적으로' 변조시킨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배경으로 라하밈은 선함과 애정, 참을성과 이해심 곧 용서하려는 마음 등 모든 감정을 총망라한다.

구약성서가 주님께 라하밈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이 모든 속성을 주님께 귀속시키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모성의 신비로운 힘에서 오는 이 성실하고도 굽힐 줄 모르는 사랑이 구약성서에는 여러 양식으로 구구절절이 나와 있다. 위험 특히 원수들로부터 벗어나는 구원, 개개인과 온 이스라엘이 지은 죄의 용서, 인간이 불성실하더라도 당신께서는 반드시 (종말론적) 약속과 희망을 성취시키시키겠다는 각오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나를 배신하였다가 병들었으나 나는 그 병든 마음을 고쳐주고 사랑하여 주리라"(호세 14,5). 구약성서의 용어에는 같은 내용을 달리 나타내는 표현들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두 표현이 각별히 주의를 끈다. 두 용어는 순수한 의인화 성격을 띠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술하면서 설서 저자들은 당대 인간들의 의식(意識)과 경험에 상응하는 용어들을 쓰고 있다. 어쨌든 신약성서는 구약에 이미 나타난 풍부하고도 깊은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구약성서로부터, 하느님의 자비를 규정하고자 성서가 사용하던 풍부한 표현들을 물려받았들 뿐만 아니라 특수하고도 의인화된 하느님의 심리학'도 물려받았다. '하느님의 애타는 사랑의 이미지']를 배웠다. 악과 부딪칠 때, 특별히 당신 백성과 개개인의 죄와 부딪칠 때는 그 사랑이 '자비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하난(hanan)이라는 동사의 일반적인 내용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헤세드와 라하밈의 내여?도 담고 있다. 하난이라는 단어는 폭넓은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은총의 발로(發露)'를 의미하는데 끊임없이 관대하고 어질고 자비로워지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러한 근간이 되는 요소에 덧붙여 구약성서의 자비 개념은 동사 하말(hmal)에 포함된 내용도 담고 있다 동사 하말은 문자 그대로는 (패배한 적의) "목숨을 살려주다)"라는 뜻이지만 "자비와 동정심을 보이다"라는 뜻도 되며 따라서 죄과의 용서와 사면을 의미한다. 후스(hus)라는 단어도 있는데 불쌍히 여김과 동정 특히 감정적 의미의 동정을 나타낸다. 이런 몇몇 단어는 자비를 나타내면서도 성서 본문에는 상당히 드물게만 모습을 보인다. 그 밖에 앞서 는 언급한 에메트('emet)라는 단어도 기억해 둘 것이다. 일차적인 의미는 '견고함, 안전'(희랍어 70인역에는 '진리')이고 이차적으로는 '성실함'을 뜻하여 헤세드라는 말에 고유한 어의적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53. 시편 40(39),11; 98(97),2 이하; 이사 45,21; 51?5.8; 56,1.
54. 지혜 11,24.
55. 1요한 4,16.
56. 예레 31,3.
57. 이사 54,10.
58. 요나 4,2.11; 시편 145(144),9; 집회 18,8-14; 지혜 11,23 -12,1.
59. 요한 14,9.
60. 두 구절 다 헤세드(hesed)에 해당하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기울이신 당신의 사랑에 대해 보여주시는 성실함, 당신의 약속에 대한 성실함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서 드디어 어머니가 됨으로써 주님의 약속은 완벽한 실현을 보게 된다(루가 1,49-54 참조).
61. 루가 1,72 참조. 여기서도 헤세드의 의미로 '자비'라는 말을 썼다. 아래 구절에서 '우리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라는 말을 하는 것은 두 번째 의미 라하밈(rahamim)이 틀림없다(라틴 말 번역은 자비심[viscera misericordiae].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어머니의 사랑과 동일하게 본 것이다.
62. 루가 15,14-31 참조.
63. 루가 15,18-19.
64. 루가 15,20.
65. 루가 15,32.
66. 루가 15,3-6.
67. 루가 15,8-9.
68. 1고린 13,4-8.
69. 로마 12,21 참조.
70. 부활성야의 부활찬송(Exsultet) 참조.
71. 사도 10,38.
72. 마태 9,35.
73. 마르 15,37; 요한 19,30 참조.
74. 이사 53,5.
75. 2고린 5,21.
76. 2고린 5,21.
77.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78. 요한 3,16.
79. 요한 14,9.
80. 마태 10,28.
81. 필립 2,8.
82. 2고린 5,21.
83. 1고린 15,54-55 참조.
84. 루가 4,18-21 참조.
85. 루가 7,20-23 참조.
86. 이사 35,5; 61,1-3 참조.
87. 1고린 15,4.
88. 묵시 21,1.
89. 묵시 21,4.
90. 묵시 21,4 참조.
91. 묵시 3,20.
92. 마태 24,35 참조.
93. 묵시 3,20 참조.
94. 마태 25,40.
95. 마태 5,7.
96. 요한 14,9.
97. 로마 8,32.
98. 마르 12,27.
99. 요한 20,19-23.
100. 시편 89(88),2.
101. 루가 1,50.
102. 2고린 1,21-22 참조.
103. 루가 1,50.
104. 시편 85(84),11 참조.
105. 루가 1,50.
106. 루가 4,18 참조.
107. 루가 7,22 참조.
108.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62항: AAS 54(1965), 63면.
109.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 10항: AAS58(1966), 1032면.
110. 사목헌장, 10항.
111. 마태 5,38.
112. 요한 14,9-10 참조.
113. 요한 14,9.
114. 1고린 11,26; 로마 미사 전례서에 나,오는 신자들의 환호 참조.
115. 요한 3,16.
116. 1요한 4,8.
117. 1고린 13,4 참조.
118. 2고린 1,3.
119. 로마 8,26.
120. 마태 5,7.
121. 마태 25,34-40 참조.
122. 1고린 13,4 참조.
123. 루가 15,11-32 참조.
124. 루가 15,1-10 참조.
125. [바오로 6세의 가르침], XIII(1975), 1568년(성년 폐막연설, 1975년 12월 25일).
126. 마태 5,38.
127. 사목헌장, 40항: AAS 58(1966), 1057-1059면; 바오로 6세, 교황권고 [자부적 호의](Paterna cum Benevolentia), 1-6항: AAS 67(1975), 7-9.17-23면 참조.
128. 1요한 2,16 참조.
129. 마태 6,12.
130. 에페 4,2; 갈라 6,2 참조.
131. 마태 18,22.
132. 루가 15,32 참조.
133. 이사 12,3 참조.
134. 마태 10,8.
135. 히브 5,7 참조.
136. 지혜 11,24; 시편 145(144),9; 창세 1,31 참조.
137. 루가 23,34.
138. 1고린 4,1 참조.
139. 마태 5,7.
140. 요한 14,9 참조.
  | 02.12
김분다 [비회원]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로 공부에 좋은 보탬으로 삼겠습니다.
삭제 | 03.30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자비로우신 하느님 (DIVES IN MISERICORDIA / 1980.11.30)  [10] 3708
25   가정교서 Gratissimam Sane  [5] 3758
24   베네딕토 16세 : 교황들(Summorum Pontificum)  5818
23   베네딕토 16세 : 교황 선출 규정의 일부 변경에 관하여  3815
22   베네딕토 16세 : 1970년 개혁 이전의 로마 전례 사용에 관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  [2] 2645
21   베네딕토 16세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3] 3022
20   구원에 이르는 고통 (Salvifici Doloris)  [7] 2202
19   가정 공동체  [11] 1933
18   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5] 1863
17   성체의 신비와 흠숭에 대하여  [3] 2431
16   그리스도교적 지혜 (Sapientia Christiana)  [3] 2127
15   인간의 구원자 (Redemptor Hominis)  [3] 2399
14   현대의 복음선교 (Evangelii Nuntiandi)  [9] 2233
13   마리아 공경 (Marialis Cultus)  [5] 4218
12   팔십주년 (Octogesima Adventiens)  [4] 2205
11   사제 독신생활에 관한 회칙  [9] 2745
10   민족들의 발전 (POPULORUM PROGRESSIO)  [5] 2335
9   신앙의 신비 (Mysterium Fidei)  [7] 2334
8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  [5] 2405
7   어머니요 스승 (MATER ET MAGISTRA)  [7] 2176
1 [2]
 

 

교황 문헌

교황청 문헌

주교회의 문헌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