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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주년 (Octogesima Adventiens)
조회수 | 2,263
작성일 | 06.01.26
교황 바오로 6세의 교서 / 팔십주년(OCTOGESIMA ADVENIENS) / 1971. 5. 14. / 김남수 주교 번역

「새로운 사태」반포 80주년을 맞이하여 평신도위원회 및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로이 추기경에게 보낸 교서


서론

1. 팔십주년(Octogesima Adveniens)을 맞이하는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반포를 기념하면서, 지금까지 사회 정의 구현의 행동을 촉진시키고 있는 선임 교황들의 가르침을 다시 계속 강조함으로써 변천하는 세계의 새로운 요청에 대답하고자 한다. 사실 교회는 인류와 함께 진보하며 동일한 역사의 운명을 함께 나누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본 사명으로 자각하고 있지만 동시에 교회는 복음의 빛으로 사람들의 현세 활동을 비추어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 지극하신 하느님의 계획을 충실히 실현하도록 도와주며 사람들의 소망을 풍부히 충족시켜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더 나은 정의의 보편적 호소

2. 주님의 성령께서 현세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계속 활동하시며 가는 곳마다 사회 안에서 스스로의 책임을 자각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해 주신다는 사실을 본인은 굳게 믿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종이나 민족이나 문화 형태나 생활 조건의 차이 없이 어디서나 주님께서는 복음의 진정한 사도들을 불러일으켜 주신다.

본인은 최근의 여행을 통해서 그들을 만나보고 탄복하고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었다. 본인은 많은 군중을 가까이할 수 있었고 그들의 소망과 호소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호소는 참혹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내포한 것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현대가 당면하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각 지역에 고유한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류 전체에 관계되는 문제들이다. 인류는 스스로의 장래 운명과 현재에 진행되는 각종 변화의 과정과 그 뜻에 대하여 자문하고 있다.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경제, 문화, 정치 발전의 명백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민족은 이미 최고도로 기계화되었는데 다른 민족은 아직도 농업 일변도의 경제 속에 살고 있다. 어떤 지방은 재화의 풍요함을 마음껏 누리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굶주림에 신음하고 있다. 어떤 백성은 고도의 문화를 누리고 있는데 다른 백성은 이제야 겨우 문맹 퇴치에 착수했을 뿐이다. 사방에서 한층 나은 정의를 희구하고 있으며 인간과 인간, 백성과 백성 사이의 상호 존경에 바탕을 둔 더욱 튼튼한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환경의 다양성

3. 여러 지역과 문화와 사회 정치 조건이 다양하므로 좋든지 나쁘든지 그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고 있는 환경은 틀림없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침묵 중에 살고 있으며 감시의 대상이 되고 그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당하여 국가의 절대 주권 밑에서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다. 또 어떤 지역에서는 수가 너무 적어서 그리스도인의 주장이 들리지도 않을 정도이다. 또 어떤 지역에 있어서는 교회가 떳떳한 입장에 서 있고, 때로는 공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런 지역에서는 교회도 그 사회가 당면한 위기에서 오는 저항을 크게 받는다. 거기서 어떤 신자들은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해결책의 유혹을 받으며 그런 방법으로써만 더욱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현존하는 불의에 무관심하고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하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혁명적 이념에 사로잡혀 결정적으로 개선될 세계를 약속하지만 그것은 가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4. 이같은 복잡한 상황 앞에서 각 지역에 알맞는 보편적이고 획일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본인은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은 본인의 사명도 아니다. 각 지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영원 불변한 복음의 말씀으로 비추어주고,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서 반성 원리와 판단 기준과 행동 지침을 발견하는 일은 각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책임인 것이다.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역사 과정에 있어서 특히 근대 공업화 시대에 더욱 깊어진 것이다. 이같이 깊은 연구가 시작된 것은 바로 레오 13세가 "노동자들의 상황"에 관하여 메시지를 반포한 그 시점부터였다. 그러기에 그 메시지의 80주년을 오늘 지내는 것이 본인에게는 무한한 자랑이요 기쁨인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책임진 주교들과 함께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사회, 정치, 경제 면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고 긴급한 변형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과 보장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명이다. 촉진되어야 할 사회 변혁을 찾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먼저 복음이 말해 주는 요청의 힘과 그 특수성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해야 하겠고, 복음이 현재와 전혀 다른 사회적 내지 문화적 환경 속에서 전파되고 기록되고 생활화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옛 골동품으로 여겨질 수는 없다. 복음이 가르치는 내용은 세기를 통하여 계속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생한 경험으로 더욱 풍요해지는 것이므로 사람들의 회심과 사회 생활의 진보를 위해서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보편성과 영구성을 무시하고 복음의 내용을 어떤 시대적 환경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1)

교회의 특수 메시지

5. 현대의 혼란과 불안 속에서 스스로의 장래를 좌우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는 지침과 도움을 제공하기 위하여 특수한 메시지를 보내는 바이다. 교회는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가 반포될 때부터 공업화 시초에 일어난 노동 조건의 문제점을 강력히 고발하였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사회 정의의 다른 면과 다른 길을 사람들에게 깨우쳐주었던 것이다. 회칙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2)과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3)에서도 이미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최근의 공의회는 특히 "기쁨과 희망"이란 말로 시작되는 사목 헌장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본인 자신도 이미 「민족들의 발전」이란 회칙을 통하여 같은 내용을 더욱 광범위하게 취급하였다. 본인은 거기서 "오늘에 와서는 이 사회 문제가 인류 전체에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모든 이가 인식해야 하겠다"4)고 강조하였다. "교회는 여기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명백히, 더욱 깊이 자각하였으므로, 이 문제의 심각함을 각 방면으로 연구 파악하고 이 같은 위기에 처하여 모든 이의 공동 노력이 긴급히 요청된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사람들을 힘껏 도와줄 의무감을 느끼는 바이다."5)

오늘 본인은 이런 의무감을 자각하고 현대 세계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의견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6. 또한 다음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도 "세계 정의" 구현에 관한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교회가 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 더욱 상세히, 한층 더 깊이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태」 반포 8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이 문제에 관한 본인의 걱정과 의견을, 존경하는 형제 로이 추기경에게 전달하게 되는 것은 로이 추기경이 '정의평화위원회'와 '평신도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좌의 이러한 기구들이 인류에 봉사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변천의 넓은 범위

7. 선임 교황들이 이미 연구한 문제들이 아직도 영구히 계속되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본인은 오늘 좀 다른 문제를 취급하려 한다. 문제가 긴박하고 광범하고 복잡한 까닭에 신자들이 앞으로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에 대해서, 인류의 장래 운명을 위태롭게 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결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하고자 한다. 현대 경제 원리가 야기시킨 사회 문제, 즉 생산의 인간 조건, 상품의 교역이나 재화의 재분배 등의 균형, 날로 늘어나는 소비 수요의 의의, 책임의 분담 등의 문제들을 새로운 문명의 광범한 종합 속에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심각하고 신속한 변화 속에서 인간은 날마다 자신을 재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 의의와 인류의 공동 운명에 대해서 자문하게 된다. 스스로 너무나 엉뚱하고 이미 과거지사라고 판단하는 옛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는 주저하면서도, 스스로 불확실하고 변화 무상하리라고 여기는 미래의 자기 운명을 불변의 영원한 진리로 비추어보려는 욕망을 느끼고 있다. 이 같은 불변의 진리는 의심없이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6)

주석

1. 사목 헌장, 10항 참조. [△]
2. 「사십주년」:AAS 23(1931), 209면 이하. [△]
3. 「어머니요 스승」:AAS 53(1961), 429면. [△]
4. 「민족들의 발전」, 3항:AAS 59(1967), 258면. [△]
5. 「민족들의 발전」, 1항:AAS 59(1967), 257면. [△]
6. 2고린 4,17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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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새로운 사회 문제

도시화 현상

8. 공업화된 지역에 있어서나 발전 도상 국가에 있어서나 한결같이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중대한 현상은 바로 도시화 현상이다. 오랜 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농업 문화는 이제 약세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농촌 생활의 개선을 위해서 충분한 관심을 가지는가 자문해 보아야 하겠다. 농촌 경제는 뒤떨어졌을 뿐 아니라, 때로는 비참할 정도로 전락하는 까닭에 농민들은 직업도 주택도 얻지 못하는 도시 변두리로 집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끝없는 이농 현상, 기계 공업의 증대, 계속적 인구 증가, 대도시의 매력 등이 사람들을 대도시로 집결시키고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도시는 비대해 가고 있다. 벌써 수천만의 인구를 가지는 대도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아직 인구의 균형을 더욱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중도시도 있다. 이런 중도시들이 농업의 발전으로 이농하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인구를 조절하여 무산 대중의 팽창과 타도시의 과도한 인구 증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9. 무모한 도시 비대는 공장들의 지나친 팽창을 동반한다. 기술의 탐구와 자연의 변형에 바탕을 둔 공업의 기계화 작업은 날로 발전하여 무한대의 생산을 꾀하게 된다. 어떤 기업체는 날로 발전하며 서로 제휴하는가 하면, 다른 기업체는 자취를 감추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새로운 사회 문제를 야기시킨다. 직업적 내지 지역적 실업 현상, 근로자들의 직업 전환과 이동, 기술공들의 계속적 적응, 여러 생산 분야의 불균형 등을 초래하게 된다. 현대화된 선전 방법을 이용하여 과도한 경쟁으로 새로운 생산품들을 선전함으로써 소비자들을 매혹시키는 까닭에 아직도 정상적으로 생산에 유용한 옛 공장 시설이 무용지물로 전락하고 만다.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본 수요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편에서는 사치성의 수요를 자극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간은 그렇게 많은 소득을 성취하고서도 자기 활동의 성과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해야 하지 않는가?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면서도1)자기가 만들어낸 생산품의 노예가 되지 않겠는가?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

10. 공업의 기계화를 동반하는 도시 문화는 인간의 지혜, 인간의 조직력, 인간의 선견지명을 자극하는 것이 사실이다. 공업화되는 사회 안에서 도시화 현상은 생활 양식과 관습적 존재 구조를 뒤집어엎는다. 가정과 이웃 사이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마저 뒤엎어놓는다. 인간은 새로운 고독을 느낀다. 수세기를 두고 정복하려고 노력한 자연 때문이 아니고 무명의 대중 속에서 스스로 낯선 사람으로 소외당하는 고독이다. 대도시의 인구 증가는 분명 인류 사회 발전의 한 과정이며 막을 길 없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인구 증가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그 조직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시민들에게 어떻게 공익 정신을 박아줄 것인가? 이 같은 혼란 속에서 가끔 새로운 무산 대중이 형성된다. 부자들이 버리고 간 도시 중앙지에 그들이 몰려들거나 도시 변두리에 집결하여 참혹한 환경 속에서 비록 아직은 침묵의 시위이기는 하지만 도시의 지나친 사치와 낭비에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는 형제적 유대나 상호 협조를 촉진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분열과 무관심을 조장하고 있다. 거기서 새로운 형태의 이익 추구와 지배를 자극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타인의 수요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보고 있다. 정문 안에는 무수한 참상이 숨어 있지만 가장 가까운 이웃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 또 다른 형태의 비극은 인간의 품위를 모독하는 각종 범죄와 죄악과 마약과 도색 등인 것이다.

11. 서민들은 비인간적 생활 조건의 희생물이 되어 양심이 어두워지고 가족 제도마저 해를 받게 된다. 근로자들의 합숙 생활은 가족적 친근감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다. 신혼 부부는 적절한 가격의 마땅한 주택을 마련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만 실망하고 만다. 그들의 결합마저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남녀 어린이들은 너무나도 협소한 제 집을 뛰쳐나와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스스로의 보상의 방법을 취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감독해 줄 사람이 없다. 책임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조절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할 중한 의무감을 느껴야 하겠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특히 도시의 도로, 구역, 주택 등을 잘 조정해야 하겠다. 또한 단체나 본당 단위로 취미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관을 마련하고 발전시켜야 하겠다. 거기서 여러 모양의 모임을 갖고, 휴식도 취하고, 단체적 정신 수양도 시도함으로써 각자의 고독을 풀어주고 형제적 관계를 맺게 해야 하겠다.

12. 사람들과 인간 공동체의 거처로서 날로 확대되어 가는 도시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이웃 관계와 인간 관계를 수립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을 모색하며, 미래의 공동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수락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합숙소 같은 혼란한 도시 생활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활화된 형제애와 구체적 정의를 보여줌으로써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야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사명을 자각하고 도시의 한계도 특징도 없다 하여 실망하지 말고 일찍이 예언자 요나가 큰 도시 니느웨를 꾸준히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자비를 설파하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의 인간적 약점을 보강한 것은 다만 하느님의 말씀뿐이었다. 성서에도 도시가 가끔 죄악과 교만의 장소로 표현되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때로는 하느님보다 인간이 더 능하다고 우쭐대는 그 따위 교만의 곳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란 거룩한 도시도 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곳,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시라고 언약된2)그 도시다.

젊은이

13. 도시 생활과 기계 문명의 변화는 지금까지 잘못 이해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새로이 밝혀주고 있다. 예컨대, 눈앞에 형성되어 가는 이 사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어떨 것이며 또 젊은이들의 위치는 어떨 것인가? 가는 곳마다 소망의 소유자요 혁신의 원동력이며 장래가 불안한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 사이의 대화는 어려워지고 있다. 여기 가정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겪어야 할 심각한 갈등과 분열과 방종의 근원이 있다. 여기서 권위의 사용과 자유에 대한 교육, 전통적 가치 전승 등에 큰 문제점을 던져준다. 이 모든 것은 사회 구성의 깊은 뿌리 역할을 하는 것들이다.

여성의 지위

1. 또한 여러 국가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법을 제정하여 온갖 부당한 차별 대우를 없애고 권리의 동등과 여성 품위의 존엄성을 구현하자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강력한 요구로 나타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평등은 창조주 친히 박아주신 특이성, 즉 가정과 사회 안에서 여성이 수행해야 할 근본적으로 중대한 고유 기능까지를 부정하는 거짓 평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입법의 발전은 오히려 여성의 고유 사명을 보호하고 동시에 인격의 독립성과 문화, 경제, 사회, 정치 생활 참여의 동등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자

14. 최근 공의회에서 교회가 다시 장엄하게 주장한 것처럼 "모든 사회 제도의 근원도 주체도 목적도 인간이며 또 인간이 아니어서는 안된다."3)각 사람은 노동권을 가지고 직업을 통하여 자기 능력과 자기 인격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정당한 보수를 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다. 정당한 보수란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을 정도"4)라야 하고 또 누구나 다 질병과 노년기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런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민주주의 사회라면 노동 조합 구성권의 원리를 인정하고는 있지만 이런 권리 행사가 언제나 허용된다고는 볼 수 없다. 노동 조합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노동 조합들은 각 분야의 노동자들을 대표하고, 그 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단체적 협력을 보장하고, 공익을 도모할 노동자들의 책임감을 북돋아주는 것을 목적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활동에는 그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다. 때에 따라서는 여기 저기서 힘의 지배를 시도해 보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특히 파업과 같은 방법으로 지배욕을 드러낸다. 이런 방법은─물론 파업은 권익 보장의 최후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다고는 하지만─경제계 전체를 위해서나 사회 공동체 자체를 위해서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고 또는 정치 질서를 평온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에 큰 지장을 준다. 특히 전체 국민의 일상 생활에 필수적인 공공 봉사 분야에 있어서는 넘어서는 안될 한계를 자각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변화의 희생자

15. 발전은 이미 어느 정도 성취되어 인간 관계에 더욱 완전한 정의와 더 넓은 책임감을 강조해야 할 만큼 되었다. 그러나 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태산같다. 그러므로 현실을 반성하고 탐구하고 실험하는 데에 항구히 노력해야 하겠지만 노동자들의 정당한 소망을 너무 늦게까지 뒤로 미루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그들의 교육과 자기 존엄성의 자각과 조직의 힘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들의 정당한 요구도 더욱 강조되게 마련이다.

맹목적 이기심과 지배욕은 인간에게 계속되는 유혹이다. 따라서 불의한 조건을 근본적으로 파악하도록 사태 파악에 주력하며 점진적으로 이런 불의를 감소시켜 나가야 하겠다. 기계화의 공업 발전은 계속 급격한 적응을 요구하므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그들은 자신들의 언권이 무력해짐을 느끼게 된다.

육체의 건강을 상실했거나 적응의 능력을 잃었거나 이미 늙었거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소외당하는 새로운 "빈민"들에게 교회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도와주고 사회 안에서 지녀야 할 그들의 마땅한 위치와 품위를 보호하도록 해야 하겠다. 사회는 지금 지나친 경쟁과 성공욕 때문에 인간성을 아주 상실한 상태에 있다.

차별 대우

16. 불의한 환경 때문에 희생당하는 사람들 중에는─불행히도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종족, 국적, 피부색, 문화, 성별, 종교 등 때문에 이론적으로나 실제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모든 사람도 포함된다. 종족적 차별 대우는 오늘날 더욱 심각한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같은 국가 안에서나 국제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민족적 차별을 묵인하거나 인정하는 법을 유지하거나 새로 제정하거나 민족적 선입견에 의거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절대로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극력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동일한 본성을 가졌고, 따라서 같은 존엄성과 같은 권리와 같은 기본 의무를 지니고 있으며 동일한 초자연적 목적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조국이 같은 사람들끼리는 누구나 다 국법 앞에 온전히 평등해야 하고, 경제, 문화, 정치, 사회 생활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고 국가적 재화의 재분배를 공평하게 누릴 자격을 가지고 있다.

이주권

17. 또한 외국에 이주한 많은 노동자들의 불안한 상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 곳에서 그 나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으면서도 외국 사람이란 이유 때문에 사회 보장을 받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 이들에게 대한 지나친 민족주의적 자세를 없애고, 그들의 이주권을 인정하며 자기 기능 완성의 기회를 제공하며 그들의 직업적 승진을 용이하게 하며, 마땅한 주택을 제공하며 자기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입법 조치가 긴급히 요청된다.5)

또한 일터를 찾기 위해서나, 어떤 재앙과 일기의 악조건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 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될 민족들도 생각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진정한 정의와 항구적 평화의 기초로서 보편적 형제애를 되찾기 위하여 진력해야 할 의무는 모든 사람의 의무이겠지만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6)"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감히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이웃 형제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이처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니, 성서가 말해 주듯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1요한 4,8)."7)

직장 문제 해결

18. 인구 증가에 따라 특히 신생 국가에 있어서 직장을 얻지 못하고 불쌍하게 사회의 기생충 같은 생활을 해야 할 사람들의 수가 머지않아 더욱 증가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마음과 힘을 다해서 투자, 생산 조직, 상업, 교육 면의 효과적 정책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제적 기구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은 이런 기구들이 선언한 그것을 속히 실천에 옮겨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이 분야에 있어서 일종의 숙명론적 필연성을 위정자들 자신까지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숙명론은 드디어 맬서스의 해결책을 수락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즉, 피임이나 인공 유산의 방법으로 인구 증가를 감소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견이 여론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어려운 환경에 오히려 사회 구성의 기본이 되는 가정이야말로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겠다. 이미 「민족들의 발전」이란 회칙에서 말한 대로 "의심없이 국가는 맡겨진 권한 내에서 국민을 계몽하며 적절한 수단을 이용하여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률에 부합하고 부부의 정당한 자유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는 수단이라야 한다. 결혼과 산아의 불가침적 권리가 손상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란 이미 사라지고 만다."8)

19. 오늘과 같이 사회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일찍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기에 이 문제 탐구와 해결을 위해서 군비나 기술 개발에 소요되는 그만큼의 재능과 재화를 투입해야 할 것이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적절한 시기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지나칠 정도까지 심각한 문제로 확대될 것이다.

홍보 수단

20. 현대의 주요한 변화를 열거하면서 묵과할 수 없는 것은 날로 증가되는 홍보 수단의 중대성과 정신 자세, 사물의 인식, 인간 조직, 사회 자체 변혁에 끼치는 그 영향력이라 하겠다. 물론 홍보 수단의 적극적인 면도 많기는 하다. 홍보 수단을 통해서 세계 방방 곡곡에서 일어나는 일을 즉각 알 수 있고, 그로써 거리의 격차를 극복하고 서로 교류할 수 있으며, 인간들 사이의 일치를 촉진하고, 교육과 문화의 광범한 전파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홍보 수단은 그 나름대로 차차 하나의 새로운 권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권력을 실제로 장악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가지는 목적과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 마침내 정치적 내지 이론 분야와 사회, 경제, 문화 생활 속에서 누려야 할 개인 자유 향유에 미치는 홍보 활동의 결과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홍보 수단의 권력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책임이 무겁게 지워져 있다. 그들이 전파하는 사건의 진리성, 그들이 야기하는 요구와 반응, 그들이 제시하는 가치에 대해서 그들이 책임져야 한다. 더구나 텔레비전은 특수한 인식 방법으로 등장하고 하나의 새로운 문화의 형태를 소개해 준다. 즉, 환상의 문화라는 것이다.

물론 국가의 책임자들은 날로 증대되는 홍보 수단의 위력도 알아야 하겠고, 홍보 수단이 국가 사회의 건전한 발전과 진보에 이바지하면서 동반하는 이익과 위험도 몰라서는 안되겠다. 국가 권력의 책임은 우선 홍보 수단이 공익에 적극적으로 봉사하며 건설적인 계획에 활력을 제공하고 각 국민과 단체를 도와 인간 개인과 국가 공동 생활의 기본 가치를 옹호하도록 해야 하는 그것이다. 또 한편 국가는 적절한 방법으로 진정한 사회 발전의 바탕이 되는 전통적 가치를 홍보 수단이 파괴하는 본질적 요소를 제거하도록 노력할 것이다.9)

자연 환경

21. 인간의 시계(視界)는 스스로 선택한 환상에 적응되지만 다른 또 하나의 변화도 느낄 수 있으니 그것은 뜻밖에 극적으로 따라오는 인간 활동의 결과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갑자기 의식하게 되었다. 스스로 자연을 불법 사용함으로써 자연을 파괴할 위험에 직면하고 인간 스스로가 도리어 이런 타락의 희생물이 될 위험도 없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의 타락과 폐물, 새로운 질병과 전면적 파괴력 등과 같은 물질적 환경의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체계마저도 이제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여서 감당할 수도 없는 내일의 생활 조건을 스스로 장만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이것은 전인류 가족에 관계되는 광범한 사회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새로운 전망에 관심을 모으고, 이제 공동 운명이 되어버린 이 상황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하겠다.



주석:

1. 「민족들의 발전」, 25항:AAS 59(1967), 269-270면. [△]
2. 묵시 3,12;21,2 참조. [△]
3. 사목 헌장, 25항. [△]
4. 사목 헌장, 67항. [△]
5. 「민족들의 발전」, 69항:AAS 59(1967), 290`?291면 참조. [△]
6. 마태 25,35 참조. [△]
7. 비그리스도교 선언, 5항. [△]
8. 「민족들의 발전」, 37항:AAS 59(1967), 276면. [△]
9. 매스 미디어 교령, 12항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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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기본 소망과 현대 사조

22. 학술적 및 기술적 발전이 인간 세상을 급격히 변화시키고 인식과 노동과 소비와 인간 관계의 새로운 방법을 제공하고 있는 오늘의 생활 조건 속에서 인간은 정보와 교육의 진보와 더불어 두 가지 노력에 주력하게 된다. 즉, 평등의 소망과 참여의 소망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두 가지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적 인정의 장점과 한계

23. 이 두 가지 소망을 실제로 사회 구조 안에서 실현시키기 위하여 인권 선언과 그 실현을 위한 국제 조약의 진보는 이미 이루어졌다.1)그래도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으로 불의한 차별 대우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사실 인권이 비록 무시당하지는 않는다 해도 너무나 자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거나 인권 존중이란 외형에 불과한 수가 많다. 자주 현실적 상황에 비해서 입법 조치가 너무 지연되고 있다. 입법 조치가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정의와 평등의 인간 관계를 수립하기에는 극히 불충분하다. 복음의 교회는 우리에게 애덕을 가르치면서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존경하라 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사회 안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남보다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일정한 자기 권리를 양보해야 한다. 따라서 만일 법적 규제를 초월해서, 남에게 대한 더 깊은 존경심과 봉사 정신이 없다면,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것도 결과적으로는 명백히 불의한 차별 대우와 계속적 착취와 현실적 천대의 구실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인간 사이의 연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이 없다면 지나치게 역설되는 법적 평등은 각자가 공동선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개인주의에 떨어지기 쉽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이 사랑을 받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소망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현세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인간애야말로 우리의 보편적 형제애를 주장하며 사회적 내지 국제적 평화의 조건들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2)

정치 사회

24. 위에서 말한 평등과 참여의 소망은 하나의 민주주의 사회 형태를 요구한다. 여러 형태가 이미 제시되었고, 어떤 형태는 이미 실천에 옮겨졌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도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 못되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탐구의 여유는 아직 넓게 열려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탐구와 조직과 정치 생활에 참여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까닭에 각 단체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형성해 가야 한다. 이런 단체를 완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보편적 성격의 더욱 광범한 사회가 요청되는 것이니, 그것이 정치 사회인 것이다. 각 사람의 개별적 노력은 이 정치 사회 안에서 전개되어야 하며 또 그 때문에 공동선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3)이것은 사회 생활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뜻하는 것이다. 사회 생활을 잘하려면 각자의 권리를 아는 동시에 그 필연적 상호 관계를 알아야 한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의무의 자각과 실천은 특히 자아 조절과 책임의 수락과 개인과 단체에 제시된 자유 사용의 한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25. 정치 활동은─여기서 이론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선 행동에 대해서 말한다고 못박을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계획된 사회상을 반영하여야 하고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인간 사명의 개념과 다양한 사회적 표현에서 계속 찾아내야 할 것이다. 국가나 자기 안에 폐쇄된 정당이 어떤 이념(이론)을 가장 나쁜 전제적 방법으로 정신에 박아주려고 해서는 안된다. 다만 문화적 내지 종교적 단체만이 그 단체인들의 참여 자유를 인정하면서 자기 이해 관계를 초월해서 인간과 사회의 본질, 기원, 목적에 대한 확신을 각기 고유한 방법으로 사회 안에서 길러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원리를 다시 강조하게 된다. 즉, "진리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정신에 침투하는 그 진리 자체의 힘으로써가 아니면 결코 인간에게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4)

이념과 자유

26. 그러므로 자기 신앙을 따라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은 정치 활동을 남들의 이익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느니 만큼 스스로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자기 신앙과 인간 개념에 근본적으로 본질적 요소에 있어서 반대되는 이념 체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즉, 마르크시즘의 이론과 그 무신론적 물질주의와 폭력의 변증법과, 개인의 자유를 집단 속에 말살하고 온갖 초월적 인간 가치와 개인이나 집단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하는 방법에 그리스도인은 동의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개인의 자유를 무제한 격찬하는 자유주의에도 동의할 수 없다. 자유주의는 자기 이익과 권력만을 찾으라고 충동하며 사회적 유대는 개인의 노력으로 쉽게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사회 조직 가치의 목적과 규범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까닭이다.

27. 온갖 사회 이론이 내포할 수 있는 모호한 용어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정치 내지 사회 활동을 순 이론적인 추상적 이념의 단순한 적용으로 규정하고, 때로는 그 사상이 활동을 위한 도구가 되어 전략의 단순한 방법에 불과하다. 두 경우 다 인간이 소외당해 버릴 위험에 직면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이런 이론을 초월할 뿐더러 때로는 반대 입장을 취한다. 만물을 초월하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인정하며 하느님을 창조의 각 수준에서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을 부르시고 인간에게 이야기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28. 또한 진정하고 조직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삼지 못하는 어떤 이념에 의거하여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넉넉하다고 주장할 위험도 없지 않다. 이로써 경우에 따라서는 온전히 무의식적으로 수락하는 어떤 새로운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전체주의적이며 강박적인 위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마저도 정당화하고 봉사의 관대한 소망도 충족시켜 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봉사의 너그러운 소망이 있기는 한데, 이 소망은 어떤 공상적 이념에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구체적 방법도 제시하기는 하나 결과적으로는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마는 것이다.

29. 오늘날 이 같은 이론들이 물러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구체적 초월주의로 다시 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이 새로운 실증주의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뜻할 수도 있다. 널리 일반화된 기술만이 인간 노력의 가장 지배적 형태요, 생활 안식이며 언어 노릇까지도 하게 되어 그 깊은 뜻을 물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역사적 운동

30. 실증주의 인간의 일면만을 강조하므로 그 면이 현대에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결국 인간을 찢어놓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실증주의를 제쳐놓고서도 자기 사명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몇 가지 일들이 전에 형성된 이론에 근거를 두면서도 부분적으로는 그 이론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미 본인의 선임자인 요한 23세가 「지상의 평화」에서 이런 구별의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우주와 인간의 목적, 기원, 본질에 대한 거짓 철학적 학설들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목적들에 관한 사항들을 동일시할 수 없다. 이런 움직임들이 그들 학설에서 시작되고 촉진되었다 해도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 이미 한번 규정된 교의는 항상 그대로 남아 있으나, 이미 언급한 사항들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역사적 상황 위에 존재하기에 심각한 변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바른 이성의 명령에 합치하고, 인간의 정당한 열망을 해결하는 척도가 있다면 인정해야 하는 그 적극적 요소를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5)

사회주의 사조의 매력

31. 현대에 와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 이론과 역사적 과정에서 생겨난 그 여러 가지 형태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마음속에 간직하게 되는 몇 가지 소망의 충족을 사회주의 안에서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또 스스로 그 사조에 끼여 어떤 행동을 전개하려 한다. 그런데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서 이 사조는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한다. 이런 이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앙과는 공존할 수 없는 이론에 그 바탕을 두었던 것이며 아직도 그러한 것이다. 아주 섬세한 구별이 필요하다. 너무나 자주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사회주의에 매혹되어 매우 일반적인 술어로써 그것을 실현시켜 보려 한다. 즉, 정의와 연대성과 평등을 실현하려는 운동으로 착각한다. 따라서 원천적 이론에 기인하는 폭력적 강요라는 사회주의의 역사적 운동의 필연적 조건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더욱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는 소망, 정치적 목적과 조직에 의한 역사적 운동, 인간의 전체성과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학설 등등의 사회주의 표현의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것을 택하게 되든 차이점을 발견해야 하겠다. 그러나 차이점 자체 때문에 위에 열거된 각종 방법이 온전히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전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다. 환경에 따라 이런 여러 방법들 사이에 개재하는 결정적 연관성을 명백히 알아내야 하겠다. 그것을 명백히 알아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의 전체적 발전을 보장해 주는 자유와 책임과 영신 생활의 여유 등의 가치를 견지하면서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정도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시즘의 역사적 발전

32. 어떤 신자들은 마르크시즘의 역사적 발전 과정으로 보아 이미 신자로서 어느 정도 가까이 할 수 있을 정도로 변천하지 않았느냐고 자문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전인류와 우주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일방적 학설로서 무신론이라고 여겨왔던 마르크시즘이 이미 어느 정도 파괴되었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들이 그 원조의 사상을 달리 해석하며 싸우는 이론적 논쟁이나, 이런 사상을 답습하는 정치 체제의 명백한 대립을 제쳐놓고서도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시즘 표현의 여러 방법을 구별하고 있다.

33. 어떤 사람은 마르크시즘을 본질적으로 계급 투쟁의 능동적 실천 형태라고 본다. 지배층의 횡포와 쓰라림, 인간들의 불의한 욕심 등을 계속 체험하고 있으므로 마르크시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기에 대한 피치 못할 투쟁이며, 따라서 계속적으로 촉진하고 일으켜야 할 투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마르크시즘은 무엇보다도 일당 독재의 정치적 경제적 집단 권력의 행사로서 개인이나 다른 단체들의 행동과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고 전체의 이익만을 표방하고 보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마르크시즘은 권력 행사야 있든 없든, 역사적 물질주의에 바탕을 두고 온갖 초월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적 학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침내 어떤 사람은 마르크시즘이 현대 정신을 매혹하는 학술 활동, 사회적 내지 정치적 현실의 엄격한 분석 방법, 역사적으로 실증된 혁명의 이론과 실천의 합리적 결속의 한 가지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분석이 비록 현실의 다른 면을 무시하고 어떤 면만을 두드러지게 하며 그 면을 마르크시즘 이론에 따라 설명한다고는 하겠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는 활동의 도움을 주고 행동에 필요한 확신을 보장해 주고 있다. 즉, 인간 사회의 발전력을 과학적으로 촉진시킨다는 구실로 삼는다.

34. 생활화된 마르크스 이론 속에서 위에 열거한 여러 면과 문제들이 구별되고 그리스도인들의 숙고와 행동까지 충동하고 있다고 해서 이 여러 면을 본질적으로 묶어주는 연관성을 망각하고 그 분석의 요소들을 그 이론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받아들이거나, 계급 투쟁의 실천과 이론적 논쟁에 말려들어 이런 과정이 최종적으로 출현시킬 사회의 전체성과 폭력성을 도외시한다는 것은 위험 천만의 자아 기만일 것이다.

자유주의 이론

35. 또 한편 이른바 자유주의란 이론의 재현도 발견된다. 이 운동은 경제적 효율성이란 명목이나 개인의 방어책, 날로 확장되는 조직적 위력에의 저항, 정치 권력의 전체주의 경향에의 저항이란 구실로 강조되고 있다. 물론 개인의 기업을 유지시키고 발전시켜야 하겠지만, 이런 운동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나름대로 자유주의를 이상화하고 자유를 격찬하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 시대에 적응하는 새로운 자유주의를 원하지만 철학적 자유주의는 그 기원에 있어서 개인의 활동과 동기와 자유 행사의 자율성에 관한 그릇된 주장이었음을 잊어버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자유주의 사조에 대해서도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교적 식별

36. 여러 가지 학설이 새로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원천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원리와 필요한 행동 규범을 찾아냄으로써 어떤 학설 체계에 매혹되어 폐쇄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 그 체계의 한계와 전체주의적 권력을 그 근원부터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을 모면하기에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는 온갖 학설의 체계를 초월하면서도 그 때문에 형제들에게 봉사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이 자기 소망의 중심으로서 적극적 사회 개혁을 위한 그리스도교적 공헌의 특수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6)

유토피아의 재현

37. 오늘날에 와서 여러 학설들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여러 체계들을 보고 그 학설의 약점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관료 위주의 사회주의, 기술자 위주의 자본주의, 권력 위주의 민주주의 등은 모두 다 정의와 평등 속에서 공존해야 한다는 중대한 인류 문제를 해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유물주의, 이기주의, 폭력주의 등을 어떻게 모면할 수 있으랴? 이것이 도처에서 깊은 불안의 표지로 일어나는 반항의 원인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이른바 유토피아란 것이 재현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것이 많은 학설보다도 현대 사회의 정치 문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것은 가끔 현실적 의무를 저버리고 환상적 세계로 도피하려는 사람들의 구실임을 인정치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가상적 미래 세계에 산다는 것은 현재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가장 쉬운 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 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가끔 선견지명을 자극하고 아직 모르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며 동시에 사람들을 더 나은 미래의 새 세상으로 이끌어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인간 정신과 마음의 발명력을 신뢰함으로써 사회의 활력을 뒷받침할 것이며, 만일 모든 것에 넓게 문을 열어놓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호소에도 호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재생된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주님의 성령은 인간 지성이 안정을 찾아 정지하려는 수평선을 넘고 인간 노력이 스스로 폐쇄되려는 한계를 계속 뛰어넘게 한다. 즉, 그리스도교 안에는 온갖 체계와 학설을 극복하도록 재촉하는 그 무슨 힘이 널리 번져 있다. 세계 안에는 인간의 신비가 내포되어 있으니, 그 인간은 압박과 자유, 죄와 성령의 대결 속에서 갈등을 겪는 역사적 과정과 심리 과정 속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활력은 드디어 어리석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승리할 것이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께 힘을 얻어 희망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평화롭고 정의롭고 형제다운 인간 사회를 건설하여 하느님이 즐겨하시는 선물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7)

과연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키는 것이니, 이 지상에서 이미 새로운 세대를 어느 정도 암시해 주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8)

인간과학의 문제점

38. 오늘의 세계는 학문과 기술의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이 학문과 기술은 이 세계를 새로운 실증주의 방향으로 끌고 갈 염려가 있으므로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사람은 자기 지성의 한계 속에 갇히게 됨을 발견한다. 여기서 인간 자체가 학문의 대상이 되고 만다. 오늘날 "인간과학"이란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인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있으니, 그것은 지나치게 사실적(寫實的)이거나 지나치게 이론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편으로는 인간과학은 방법론적 필연성과 선입견적 이론 때문에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인간의 몇 가지 면만을 분리시켜 설명하려 하며 오로지 물량적 내지 현상학적 견지에서 이 설명이 보편적이며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적 인간을 말해 준다고 결론한다. 학문적으로 모든 것을 한 가지 면으로 축소시키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주장을 낳고 있다. 즉, 이 같은 인간 분석의 일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을 반쪽으로 갈라놓는 것이며 학문을 가장하여 인간 전체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39. 인간과학에서 이루어지는 결과에도 적지 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그것은 인간학에서 기인된 사회 제도를 학적으로 증명된 행동 규범인 듯이 강요하겠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소망과 필요를 조절하고 행동 규범과 가치 체계마저 변화시키는 물질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속에는 내일의 인간 사회와 인간 자체를 위하여 중대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음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참으로 인간에게 공헌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하더라도 우선 어떤 인간에게 공헌할 것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40. 인간과학의 문제점은 그 누구에게보다도 그리스도 신자에게 심각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앞에 무력하지는 않다. 이미 우리가 「민족들의 발전」이란 회칙에서 말하였듯이 교회는 온갖 문명에 교회 나름으로 특수한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보람 있는 희망을 함께 품고 있으며, 때때로 그들의 희망이 허사로 돌아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는 동시에 그들이 충분한 진보를 성취하도록 도와주려 한다. 이 때문에 교회는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인간관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바이다."9)교회가 인간과학의 진보를 저지하거나 그 자율성을 배척할 수는 없다. 교회는 일반 자연과학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과학에 대해서도 충분한 신뢰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탐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라고 권고하는 바이다.10)그러므로 연구의 필요성과 인간을 더 잘 알아보려는 의욕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신앙의 빛을 받아 인간과학에 투신함으로써 교회와 이 새로운 탐구에 전념하려는 사람들과의 유익하리라고 예견되는 대화를 추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학문이든지 그 학문의 고유성 때문에 인간의 일부분밖에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그 부분이 비록 옳은 것일지라도─ 따라서 모든 부분들의 종합과 의의는 개별 학문 밖의 것이다. 이런 정도의 한정된 범위 내에서는 인간과학도 유익한 적극적 역할을 다하고 있으므로 교회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하는 바이다.

인간과학은 현재 조건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 인간의 자유를 더욱 광범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인간과학은 또한 그리스도교 사회 윤리에도 공헌할 수 있다. 사회 윤리란 일정한 사회 형태에 관한 것이므로 그 범위도 한정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그와 반대로 비판과 극복의 역할은 더욱 강해질 것이니, 일정한 사회 형태가 완전하고 인간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여주던 행위 규범과 가치가 얼마나 상대적인 것이었는가를 지적하겠기 때문이다. 이런 학문이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밝혀주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의 조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불충분한 조건이다. 마치 날로 더욱 복잡해지는 언어와 같이 인간 마음의 신비를 풀기보다는 넓혀줄 뿐,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는 소망에 넉넉한 대답을 줄 수 없다.

진보라는 개념의 애매함

41. 이같은 더욱 완전히 인간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현대 사회의 근원이요 규범이요 목표인 "진보"라는 개념을 더욱 낫게 검토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벌써 19세기부터 서양 사회들과 또 그와 관계를 맺은 다른 여러 사회들이 무한정 계속되는 진보에 희망을 걸었다. 이런 진보는 자연과 사회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그 진보의 조건과 규범은 인간의 자유 그것이었다. 홍보 수단의 전파와 알려는 의욕과 날로 광범해지는 소비욕으로 말미암아 "진보"는 이제 세계적인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진보의 가치와 성과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미 진보했다고 생각하면 곧 사라져버리는 끝없는 진보의 노력은 과연 무슨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진보는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의심없이 순물량적 경제 발전의 한계와 해독을 단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질적 질서의 목표도 달성하려는 소망이 강조되고 있다. 내일의 사회를 위해서는 생산재와 소비재의 양과 다양성에 못지않게 인간 관계의 방법과 진실성, 참여와 책임의 정도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모든 것을 경제성과 상업성, 힘과 유익성으로만 측량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현대인은 이미 물량적인 이런 표준 대신에, 재화의 교류, 지식과 문화의 보급, 상호 봉사, 공동 목표 달성을 위한 공동 노력 등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참된 진보와 발전은 인간에게 더 넓은 사회적 연대성을 자각시키고 자유로이 자신을 이웃과 하느님에게 열어줄 수 있는 윤리관을 수립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보는 죽음의 종말적 신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주의 성령이 자극하시는 은총을 힘입어 인간은 자기의 창의적 자유를 참된 진보와 속지 않을 희망에만 집중시킨다.11)



주석:

1. 「지상의 평화」:AAS 55(1963), 261면 이하 참조. [△]
2. 세계 평화의 날 담화(1971):AAS 63(1971), 5-9면 참조. [△]
3. 사목 헌장, 74항 참조. [△]
4. 종교 자유 선언, 1항. [△]
5. 「지상의 평화」, 57항:AAS 55(1963), 300면. [△]
6. 21. 사목 헌장, 11항 참조. [△]
7. 로마 15,16 참조. [△]
8. 사목 헌장, 39항. [△]
9. 「민족들의 발전」, 13항 이하:AAS 59(1967), 264면 이하. [△]
10. 사목 헌장, 36항 참조. [△]
11. 로마 5,5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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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새로운 문제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

42. 무수한 문제들이 새로이 제기되고 있으므로 교회는 교회의 고유한 활동 분야에서 인간들의 기대에 충분한 대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비록 오늘날의 문제들이 유달리 광범하고 긴급한 해답을 요구하고는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과연 이 문제 해결에 인간이 무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노력에 활력을 주고 있다. 교회가 어떤 사회 구조를 권위로 규정짓거나 인위적 표본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어떤 일반 원리를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현세의 변천하는 상황에 대처하여 쇄신의 원천인 복음에서 자극을 받고 전체 복음의 요청에 따라 계속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고유한 시대 감각, 가난한 사람들을 사심 없이 도와주려는 의욕과 관심에서 솟아오르는 시대 감각으로 더욱 발전하고 있다. 교회는 여러 세기를 통하여 체험한 경험에서 힘을 얻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현상황이 요구하는 담대한 창의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완전한 정의

43.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재화의 재분배에 있어서 더 완전한 정의를 구현해야 하겠다. 국가간의 통상 관계에 있어서도 공동 이익을 위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선 힘의 관계를 극복해야 하겠다. 힘에 근거를 둔 상호 관계는 때에 따라서 그 입장이 서로 바뀜으로써 가끔 상호 대화를 더욱 쉽게 만들 수 있을지라도 그것으로써 항구하고 진정한 정의를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폭력의 사용은 반대 세력을 자초하며 투쟁 사태를 유발하게 되며 극단의 폭력과 폭력의 남용을 초래하게 된다.1)이미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정의 구현의 가장 중대한 의무는 각 민족이 온갖 경제적 내지 정치적 지배욕에서 해방되어 진정 서로 협력함으로써 스스로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있다. 현실적인 상호 관계가 매우 복잡하므로 이 점에 있어서 복잡한 난관이 무수히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생산의 국제적 분포, 통상 구조, 수익의 감독, 화폐 체계 등에 있어서 인류의 연대성을 감안하여 국제 관계를 재검토할 용기를 가져야 하겠다. 또한 부유 국가의 재화 증가를 문제삼고, 사람들의 정신을 쇄신하여 국제적 의무를 선행시키도록 하고, 여러 국제 조직을 더욱 효과적으로 재정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44. 생산 방법의 혁신으로 국경을 초월하는 일종의 경제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즉, 여러 국가들이 함께 투자하여 모든 것을 생산함으로써 이런 생산 방법은 어느 국가의 정치 권력에도 매이지 않고 공익이란 견지에서 아무런 감독도 받지 않게 된다. 이런 활동이 확대됨으로써 이 같은 사조직이 사회, 문화, 정치 면에서 경제적 지배의 새로운 남용 형태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재화와 권력의 지나친 집중 현상은 「새로운 사태」 반포 40주년에 즈음하여 교황 비오 11세가 이미 단죄한 바 있으나, 이제 새로운 결정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정신 자세와 구조의 변화

45. 현대에 와서 인간은 필요와 타 권력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한다. 이런 해방은 각 사람이 자기 재산과 자기 능력에 대한 내적 자유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봉사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서는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혁명적인 이념도 결국 지배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그치고 새로운 지배자들이 차차 지배력을 강화하고 특권을 누리며 자유를 제한하고 새로운 불의의 형태를 조성하게 될 것은 너무나 명백한 귀결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표본적인 사회 제도를 갈망하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경쟁심에 사로잡혀 서로 반대되는 투쟁으로 기술, 경제, 군사 면의 세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야심은 더 완전한 정의의 요청대로 발전 과정을 조정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실천에 옮기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차별을 더하고 불신과 투쟁의 분위기를 초래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계속 위협하고 있다.

정치 활동의 그리스도교적 의의

46. 여기서 경제 활동의 근본적 한계성이 발견되지 않는가? 필요한 경제 활동은 인간에게 봉사하기만 한다면 "형제적 사랑이 꽃피어 하느님의 섭리를 표현할 수 있게"2)될 것이고 인간들 사이의 구체적 교류를 촉진하고,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고, 서로 혜택을 주고받으며, 노동의 인간 품위를 주장할 기회가 될 것이다. 경제 분야는 비록 주권 대결의 전장과 같지만 대화를 촉구하고 서로의 협력을 촉진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게 힘과 자유를 빼앗아버릴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3)이것이 바로 경제가 정치로 넘어가야 할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정치"란 용어의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혼란이 생기기 쉬우므로 "정치"의 개념을 규정해야 하겠다. 그러나 국내적 또는 국제적 사회 경제 분야에서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정치 권력임을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다.

정치 권력은 사회 공동체의 단합을 보장하기 위한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요소인 한, 그 목적은 공동선의 실현이어야 한다. 정치 권력은 개인, 가정, 보조 단체 등의 정당한 자유를 존중하며, 인간의 진정하고 완전한 선, 즉 초자연적 목적까지를 포함한 충족선을 얻기에 필요한 생활 조건을 효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마련해 주어야 한다. 정치 권력의 활동 분야는 제한되어 있으며 그 제한은 각 국가와 민족에 따라 다를 것이다. 즉, 언제나 정의를 보장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에 간섭하고 그 최종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공동선 실현에 함께 이바지하는 개인과 중간 단체의 활동 분야와 책임을 빼앗지 않는다. 과연 "모든 사회 활동은 그 본성상 사회 구성체의 구성원에게 도움을 주어야지 그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하여서는 안된다."4)

정치 권력은 그 과업 수행에 있어서 특수층의 이익 추구에서 손을 떼야 하고 그 대신 국경을 넘어서까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정치를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분야에서 엄격히 규정지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과 같으니, 자기 도시와 국가와 전인류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각 사람에게 부여된 자유 선택의 가치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중대한가를 강조하는 것과 일반이다. 정치 기술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의무를 실천하는 한 가지 필연적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물론 아니다. 정치 기술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인간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한다. 정치 분야와 그 한계가 매우 광범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분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전부라고 절대시하는 경향은 중대한 위험을 내포한다. 정치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정치 활동에 간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정치 활동을 복음과 부합시키도록 노력해야 하고, 여러 가지 정당한 제도와 여론 가운데서도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사심없이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실성을 증거해야 하겠다.

책임의 분담

47. 정치 분야로 넘어가는 것은 인간의 현실적 요청이기도 하다. 즉, 책임과 결정의 더욱 광범한 분담을 뜻하는 것이다. 문화 수준이 높아지고 자유의 개념이 성숙하고 사람들이 미래의 불안한 세계를 예견하며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생활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더 잘 깨달을수록 정치 참여의 정당한 소망은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선임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어머니요 스승」5)에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기본 소망이요, 자유의 구체적 행사이며 자아 발전의 길이라고 지적하였고, 또한 경제 생활, 특히 생산 업체에서 이런 책임 분담을 어떻게 보장해야 할 것인지 그 방법을 제시하였다.6)오늘날 그 분야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사회 정치 분야에 이르기까지 동등한 책임과 결정의 참여를 가능케 하고 더욱 증대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 결정지어야 할 소망은 날로 더욱 복잡하고 유의해야 할 점도 많고, 비록 새로운 학문이 이 중대한 시점에서 자유를 해명해 보려 애쓰고 있지만 그 결과를 예견하는 일은 도박같이 위험한 일이다. 그러기에 비록 일정한 제한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필요한 더욱 광범한 참여를 지연시킬 수는 없다. 기술자 위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현대 생활에 알맞는 민주 체제를 발견하고 각 사람에게 정보 수집과 의사 표시의 권리를 보장할 뿐 아니라 공동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겠다.

이렇게 인간 단체는 차츰 참여와 생활의 공동 운명체로 전환될 것이다. 이로써 너무나 자주 다른 사람의 자유에 대립시켜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이 자유라고 주장되어 온 그 자유도 더 깊은 인간성에 뿌리박힌 자유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각자가 활동과 생활의 연대성을 형성하기로 노력하기 위한 자유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그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쳐버려야만 비로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회복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주석:

1. 「민족들의 발전」, 56항 이하:AAS 59(1967), 285면 이하 참조. [△]
2. 「민족들의 발전」, 86항:AAS 59(1967), 299면 참조. [△]
3. 사목 헌장, 63항 참조. [△]
4. 「사십주년」, 35항:AAS 23(1931), 203면;「어머니요 스승」:AAS 53(1961), 414.428면;사목 헌장, 74.75.76항 참조. [△]
5. 「어머니요 스승」:AAS 53(1961), 420-422면. [△]
6. 사목 헌장, 68.75항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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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행동하라

행동의 필요성

48. 사회 분야에서 교회는 항상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사람들에게 빛을 제공함으로써 진리를 발견하고 매력적인 여러 학설 가운데서 안전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효과적 봉사를 통하여 복음의 위력을 전파하는 역할이다. 이런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교회는 사도직 수행을 위해 노동자들 가운데로 사제들을 파견하여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조건을 함께 감수하며 교회의 관심과 노력을 증거하게 한 것이 아닌가?

이제 본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한번 속히 행동에 나서라고 요청하는 바이다.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도 이미 모두 행동을 시작하라고 강조하였다. "평신도들은 현세적 질서의 쇄신을 자신들의 의무로 여겨야 한다. 이 일에 있어서 따라야 할 윤리 법칙을 가르치고 유권적 해석을 내리는 것은 성직계의 의무이겠지만 평신도들은 피동적으로 지침이나 명령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구상과 계획으로 사람들의 정신과 풍습, 사회 공동체의 법제와 조직을 그리스도화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해야 하겠다."1)그러므로 각자는 스스로 그 동안에 한 것이 무엇이며 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반성해 보기 바란다. 원칙을 상기하거나, 뜻을 굳히거나, 비참한 부정을 단죄하거나, 예언자적 용기로 비판을 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모든 것이 각자의 절실한 책임감과 확실한 구체적 행동과 결부되지 않는다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현재의 부정을 남에게 탓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부정의 탓을 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따라서 각 개인이 회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하겠다. 이렇게 겸손되이 생각할 수만 있다면 행동의 어려움이나 당파심 같은 것도 극복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할 일이 무진장이란 이유로 용기를 잃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따라서 전인류 안에서─일하시며, 십자가상 제사로 시작되어 부활날 아침에 완성된 구원을2)계속 성취하신다는 사실에서 굳은 희망을 가지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정의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음을 아는 까닭에 희망은 확실해진다. 무관심한 것 같지만 각 사람의 가슴 속에는 형제같이 살려는 욕망과 정의와 평화에 대한 갈증이 숨어 있으므로 그것을 꽃피게 해야 하겠다.

49. 그러므로 환경과 역할과 조직은 달라도 각 사람은 자신의 책임감을 느끼고 착한 양심을 따라 맡겨진 활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서로 다른 이론이 전개되고 정당한 소망과 함께 불투명한 경향이 엿보일 때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혜롭게 행동할 것이니, 비록 그것이 연대성에 바탕을 두었다고 믿어지더라도 조건 없는 협력이나 진정한 휴머니즘의 원리에 어긋나는 협력은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에 따라 고유한 역할을 다하기를 원한다면─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만─그 행동에 있어서 자신의 활동 동기를 명백히 하고, 객관적 목적을 초월해서 더욱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기적 개인주의와 자유를 무시하는 전체주의의 위험을 피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생활 양식의 다양성

50. 구체적 환경 속에서 각 신자가 체험하는 연대성을 감안하면서도 정당한 길을 선택하는 방법의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동일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임무를 맡길 수 있다.3)교회는 모든 신자들을 불러 두 가지 임무를 다하라고 맡겨준다. 즉, 세상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박아주고, 세상 구조를 현대 요청에 응하도록 더 완전한 형태로 혁신하는 임무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교우들이 얼른 보면 서로 대립하는 듯하지만, 교회는 그들에게 서로의 의견과 서로의 생활 양식을 사랑과 존경으로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각자의 행동 방법과 그 정당성을 성실히 살펴본다면 각자는 더욱 깊은 사랑의 자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며 비록 서로의 상위성을 인정하더라도 의견의 접근과 일치의 성취를 믿을 수 있으리라. "신자들을 갈라놓는 요인보다 신자들을 일치시키는 요인이 훨씬 강한 것이다."4)

현대 생활의 구조와 조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신 상태와 그 역할에 의해서─부분적으로는 물질적 이해 관계로─좌우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러 계급과 여러 문화 사이의 연대성이 환경에 따라 모든 사람이 아무 예외도 없이 동일한 의견과 행동 방법을 가지게 될 만큼 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5)그러므로 각기 깊이 반성함으로써 비록 특수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보편적인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도록 되어야 하겠다.

51. 그리스도인들의 조직도 서로 형태는 다르지만 단체 행동의 책임을 지고 있다. 스스로 세속 조직으로 전환됨이 없이 자기 나름대로 그러나 각 조직의 고유성을 초월해서 그리스도인 신앙이 사회 혁신을 위해 요구하는 필요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다.6)그 어느 때보다 오늘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을 통해서 형제들의 존재와 장래 운명이 흔들리고 있는 면에서 봉사를 제공하는 성령의 증거 없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지도 못하고 받아들여지지도 못한다.

52. 추기경 그대에게 이 같은 반성을 촉구하면서도 오늘날 신자들과 모든 선의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사회 문제를 전부 취급하지는 못하였음을 알고 있다. 최근의 여러 선언문과 또 그대가 발표한 "인간 발전"의 20주년 메시지는 아직도 사람들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연대적 발전 촉진에 대한 여러 국가들의 공동 의무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설명된 것을 그대에게 보내는 것은 평신도위원회 및 정의 평화위원회에 새로운 연구 재료를 제공하고 동시에 "하느님 백성에게 현대 사명을 충분히 깨우쳐주고 국제적으로 사도직을 수행할 의무를 재강조하기 위해서이다."7)

이런 뜻으로 그대에게 사도적 축복을 보내는 바이다.



주석:

1. 「민족들의 발전」, 81항:AAS 59(1967), 296-297면. [△]
2. 마태 28,30;필립 2,8-11 참조. [△]
3. 사목 헌장, 43항 참조. [△]
4. 사목 헌장, 93항 [△]
5. 1데살 5, 21 참조. [△]
6. 교회 헌장, 31항; 평신도 교령, 5항 참조. [△]
7. 자의 교서 Catholicam Christi Ecclesiam:AAS 59(1967), 27. 26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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