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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복음선교 (Evangelii Nuntiandi)
조회수 | 2,458
작성일 | 07.01.17
교황 바오로 6세의 복음적 권고 / 현대의 복음선교 / 1975. 12. 8.

우리말 번역을 내면서

이 권고서의 공포 일자는 1975년 12월 8일이었으나, 전 세계에 소개된 것은 1976년 1월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5년 성년 폐막에 즈음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0주년을 기념해서 이 권고서를 발표하셨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1974년 10월에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제3차 세계 주교 대의원 총회(시노두스)의 토의 내용에 대한, 교황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세계에 있어서의 복음선교]라는 주제하에 개최되었던 이 시노두스는 토의된 내용을 일괄하여 교황에게 바쳐 그 결론을 일임하고 산회하였었다.

따라서 이 권고서에는 시노두스에서 토의된 여러가지 문제 해결의 내용이 솔직하게 제시되고 있다. 사실 오늘의 사회 상황 속에서 복음화 활동을 펴나가는 교회에서는 신학적으로나 방법적으로나 많은 혼미를 거듭해왔고 아직도 지역에 따라 혼미중에 있는 것이다.

교황께서는 교도의 책임을 느껴 교회가 나가야 할 진로를 제시하고 전세계 교회의 반성을 촉구하고 모든 신자들의 협력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권고서는 이례적인 교황의 서간이며 중요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권고서의 우리 말 번역이 늦었지만 모든 사람이 꼭 읽어야 할 책 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거 있다.

번역에 있어서는 라틴어 원문과 불어판 원문을 사용하였으나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면서 원문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별도로 일본어 번역도 참고하였으나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어 표현에는 참고가 되었으나 원문상으로는 주의를 더해야만 했다는 것을 말해둔다. 그리고 번호에 따라 내용표시가 있는 것은 원문에는 없는 것이고 구라파 번역에만 첨가된 것이기에 이해의 편의를 위해 그대로 채용하였다. 번역중에 가장 고심한 것은 라틴어의 Evangelizatio에 대한 표현이었다. 복음선교, 복음화, 복음선포, 전교, 선교, 복음화 활동 등 우리 말에 있어 미묘한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복음선교(福音宣敎)로 통일하고 부득이한 곳에서만 표현의 융통성을 찾았다. 이 권고서를 통하여 한국 교회에도 새로운 빛이 발견되고 새로운 방향 설정이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

1977. 12. 25 성탄절에 / 한국 주교회의 사무 / 사무총장 이종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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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복음선교를 위한 특별한 책임

1. 현대인들은 희망에 찬 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공포와 불안속에서 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교 공동체 뿐만 아니라 인류공동체에 맡겨진 확실한 책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형제들을 견고케 하는 나의 임무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신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책임이며(루가 22, 32) 매일같이 "걱정에 짓눌리고 있는"(고린 후 11,28) 나의 교황직의 기본적인 의무이기도 합니다.

불안하고 혼란한 오늘의 사회 속에서 복음화의 역군들이 한결같은 사랑과 열성과 기쁨을 가지고 사명을 다하도록 형제들을 격려해야 하는 나의 임무는 필요하고 또 고귀하다고 생각됩니다.

세가지 뜻있는 기회에

2. 먼저 성년폐막에 임하여 이 권고서를 보내는 바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노력하는 교회](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1항)는 성년동안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전달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에 열중하였습니다. 이 기쁜 소식은 "새사람으로 갈아 입으시오"(에페 4,24)와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고린 후 5,20)라고 하신 두가지 기본 명령에 의해서 선포된 것입니다.

다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제1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공의회가 지향했던 여러 가지 목적은 한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20세기 인류에게 복음선포를 하는데 적응할 수 있는 20세기의 교회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끝으로 제3차 시노두스(세계 주교 대의원회)를 마친지 1주년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회의의 주제는 복음선포에 관한 것이었으며, 더욱이 이 회의에 참석했던 주교들이 이러한 나의 권고서를 요망한 바 있었기에 이를 내는 것입니다.

이 기념스러운 회의 끝에 주교들은 보편적 교회의 목자인 나에게 큰 신뢰와 순수한 마음으로 이 회의의 최종 결론을 내려주도록 위임하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성신강림의 끊임없는 작용과 힘에 뿌리박고 있는 교회 내부로부터 복음선포의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활력이 발휘될 수 있기 바란다고 주교들은 그 소망을 나에게 밝혔던 것입니다.

교황 즉위(卽位)이래 강조한 주제

3. 세계 주교 대의원회가 열리기 훨씬 전부터 나는 여러차례 복음선포가 얼마나 증요한지 역설해왔습니다. 1973년 6월 22일 추기경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사회상황은 현대인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할것인지에 대하여 전력을 다하여 연구하고, 복음선포의 방법을 개선하도룩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전달된 메시지를 통해서 현대인들은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고, 인류를 결속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될것입니다." 그밖에 공의회에의 요망에 각별히 순응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전달의 책임을 지고 있는 순수한 신앙의 유산을 우선적으로 보존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현대인에게 이해할 수 있고 설득기킬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1974년의 세계 주교 대의원 총회

4. 복음선포의 핵심은 복음 그 자체와 복음 전달이 될 사람들에게 대한 성실한 자세입니다 이 성실성의 문제는 세 가지 긴박한 물음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며, 바로 1974년의 시노두스가 계속 유념하였던 점이기도 합니다. 그 세가지 문제 제기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양심에 깊이 작용할 수 있는 복음의 숨은 힘이 오늘에 있어서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

복음의 힘으로 어느 정도, 어떤 방법으로 현대인을 참되게 변혁(變革)시킬 수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복음선포 해야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이상의 설문은 바로 오늘의 교회가 자문(自問)하고 있는 것을 명백하게 한것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달리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사에 있어 하느님의 시간과 같았던 공의회 이후, 그리고 공의회에 의해서 과연 교회는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선포를 하였으며 확신과 정신의 자유, 그리고 효능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들 수 있는 복음선포의 자세를 잦추었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아닌가?

반성을 위한 초대

5. 우리는 이와같은 물음에 대하여 성실과 겸허와 용기있는 답을 제시하고, 그 답에 따라 행동해야 할 긴박한 의무를 느끼는 바입니다.

"모든 교회에 대한 관심"(고린 후 11,28)을 가지고 있는 나는 나의 형제들과 신자들이 위에서 말한 물음에 답하시는데 도움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다음에 말씀 드리려는 내용은 시노두스의 풍부한 자료에서 얻은 것으로써 복음선포에 관한 반상입니다. 즉 교회 안에 뭉쳐진 하느님 백성이 같은 반성을 하여, 하느님 백성 전체가, 특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사람들이"(디모 전 5,17) 새로운 열성을 얻고, 각자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일꾼"(디모 후 2,15)이 되며, 복음의 설교자로서의 임무를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은 권고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메시지를 제시하는 일은 교회가 임의적(任意的)으로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이가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의 명에 의해 교회에 맡겨진 의무인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일 ㅜ뿐만 아니라 유일하며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구원과 관계되기에 무관심이 허용될 수 없고, 이설의 혼합이나 개조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니다. 이 메시지는 계시의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고린 전 2,5) 신앙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이며, 복음의 사도가 일생의 전력을 바침은 물론이요 필요하다면 자기 생명을 바쳐도 후회함이 없을 만큼 가치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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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선교자(福音宣敎者)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선교하는 교회에게로

▶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證據)와 사명

6. 주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 루가는 자기의 복음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루가 4,43) 이 말씀은 확실히 중요한 의미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한마디 말로 예수의 전 사명이 집약(集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루가 4,4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앞서서 이사야의 예언을 당신 자신에게 맞추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루가 4,18:이사 61,1). 이 말씀을 위에서 말한 복음서의 말씀과 합하여 생각해 볼때 그 완전한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실 때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허락하신 계약의 완성을 알리는 것이 성부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강생, 영적(靈蹟), 교리, 사도들의 소명, 열 두 사도의 파견,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현존의 영속성등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는 그리스도의 복음선포 활동의 요소였던 것이었습니다.

▶ 최초의 복음선교자이신 예수

7. 시노두스의 회합중 주교들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며(마르 1,1 : 로마 1,1-3) 최초이며 최대의 복음선포자였음을 자주 상기기켰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최후까지, 완전하게 당신의 자상생명을 바치기까지 복음선포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선포자로서의 사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셨는지 그 의미와 내용, 방법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지다. 그러나 몇가지 주요한 점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하느님 나라의 선포

8.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선포자로서 먼저 하느님 나라를 알렸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가장 중요하기에 하느님 나라에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느님 나라만이 절대적인 것이며 다른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것입니다(마태 6,33).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행복은 이 세상이 거부하는 것을 행복하다고 하는 역설적인 행복이었습니다(마태 5,3-12).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조건과 대헌장](마태 5,7),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마태 10장), [하느님 나라의 신비](마태 13장),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마태 18장), [주님의 내림을 기다리면서 모든 사람이 간직해야할 마음의 준비와 성실](마태 24장-25장)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 인간을 해방시키는 구원의 선포

9. 그리스도는 기쁜 소식의 핵심으로서 하느님의 가장 큰 은혜인 구원을 알리셨습니다. 이 구원은 단순히 인간을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만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죄와 악신에게서의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해방에 의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알게되고, 하느님의 눈에 드는 존재가 되며, 하느님을 대면하면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현세에 계시는 동안 시작되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로 결정적인 성취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부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에 가서야(마태 24,36 ; 사도1,7 ; 디모 전 5,1-2)이 모든 것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이며 그때까지 우리는 역사의 흐름속에 인내하면서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 십자가 가치에 대하여

10. 하느님 나라와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선포에 있어 관건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써 모든 이에게 베풀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왔기에"(마태 11,12 ; 루가 16,16) 각 사람이 힘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며, 고통스러운 노력, 복음대로의 생활, 극기와 십자가, 복음적 지복(至福)의 정신으로 추구해야만 합니다. 더 더욱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메띠노이야" 즉 내적 쇄신을 통해서 추구되어야 합니다. 이 쇄신은 바로 근복적 회개, 마음과 정신의 깊은 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태 4,17)

▶ 끊임 없는 설교

11.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마르 1,27).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고, 모두 그분이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저마다 탄복하였다"(루가 4,22) "그분처럼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요한 4,76) 아무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씀으로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지칠 줄 모르는 설교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알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깊은 뜻과, 하느님의 계획과 약속을 계시한 것이며, 인간의 마음과 운명을 바꾸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 복음적인 표지(標識)와 함께

12.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서 이러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감탄하고 그를 보고, 그의 말씀을 듣고, 또 회개하고자 마음에서 그에게 끌리었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고, 물을 술로 변화케 하고, 떡을 많이 많아지게 하고, 죽은 사람을 부활케 하신 일들은 사람들을 감탄케 하고, 그에게 이끌리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기적들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가장 중요시하신 것은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고, 당신을 믿는 사람들로서 큰 공동체를 이루어 [주님의 이름으로]뭉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루가 4,43)하신 예수님은, 바로 복음을 쓰신 요한의 기록대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요한 11,52) 강생(降生)하시고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모든 증거, 당신의 말씀, 당신의 업적, 징표와 영적, 특히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진리의 성령을 파견하심으로 당신의 계시를 완성하기고, 보완과 확증을 하신 것이었습니다(계시헌장 4).

▶ 복음화된 공동체와 복음화하는 공동체

13. 기쁜 소식을 열심히 믿고 받아 들이는 사람들은 받아들인 복음과 서로 나누고 있는 신앙의 힘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구하고 건설하면서 생활해 나갑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는 동시에 복음선포를 위한 것입니다. 열 두 제자들에게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하신 명령은 비록 방법의 차는 있더라도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여러분은 어두움으로부터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주신 하느님을 찬양해야 하는 백성"(베드 전 2,9)이라고 한 것이나, "하느님이 하신 큰 일들을 우리네 말로 듣게 되었습니다."(사도 2,11)한 말은 다 같은 이유에서 였습니다. 결국 이와같이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여 구원의 공동체에 하나가 된 사람들은 역시 그것을 알리고 전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겠습니다.

▶ 복음선교는 교회의 근본적 소명

14.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루가 4,43) 하신 구세주의 말씀을 교회는 잘 알고 있고, 강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내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앙화가 미칠 것입니다."(고린 전 9,16)하고 말한 성 바오로와 교회는 뜻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1974년 10월 시노두스의 최종회의에서 낸 성명에 [우리는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본연의 사명이요, 제일가는 사명임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바이다.](시노두스 주교 성명 옷세르바또레 로마노 1974. 10.27)라고 낸 성명은 나에게는 큰 기쁨과 위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넓고 깊게 변천하고 있는 사회에 있어서 복음선포의 임무와 사명은 매우 절실하다는 것을 이 성명은 뜻하고 있습니다. 만일 복음선포가 교회가 받은 소명이고 은총이라고 할진대는 교회의 본성을 실질적으로 잘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복음선포를 위해서입니다. 즉 하느님 말씀을 설교하고, 은총을 베푸시는 수단이 됨은 물론 죄인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미사 성제(聖祭)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을 영속시키기 위해 교회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 교회와 복음선교와의 상호관계

15. 누구든지 신약성서를 펴서 원시 교회의 생활 및 활동양식은 물론, 각 발전을 주의 깊게 살핀다면 교회와 복음선포의 밀접한 관계를 간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열 두 사도들의 복음선교 활동에서 생겼습니다.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으시오"(마태 28,19). 사실 "하느님 말씀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2.47).

이와같은 사명에서 생긴 교회는,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같은 사명을 진 교회로서 파견되었습니다.

영광의 주님은 성부께로 돌아가셨지만 교회는 지상에 남아 있으면서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불분명하면서도 명백한 표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표징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무엇보다도 복음선포자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계속하여야만 합니다.(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5항 참조) 그리스도 공동체는 결코 스스로 폐쇄적인 것인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밀접한 생활이 [공동기도, 사도들의 가르침과 하느님 말씀의 청취, 실질적 형제애, 떡의 나눔](사도 2,42-46 ; 4,32-35 ; 5,12-16) 그 참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생활이 드러나서 감탄과 회개를 불러일으켜 기쁜 소식의 좋은 선포가 되고 설교가 될 때 입니다. 이와같이 전교회는 복음선교의 사명을 받고 있으며, 신자 각 사람의 활동은 전체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선포자이지만 교회자체가 복음화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 생활과 친교가 가능한 희망의 공동체,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라면 그러한 공동체는 믿고 바라야 할 것과 사랑의 새 계명을 계속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세속사회 속에 살면서 때때로 우상의 유혹을 받고 있기에 주님께 복귀하고 주님께 다시 불러 하나로 뭉치게 해주는 "하느님의 크신 일들"(사도 2,11 ; 베드 전 2,9)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복음선포에 있어, 교회로서 참신한 활력과 힘을 보유하려면 교회자신이 언제나 복음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표명하고(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5항), 1974년의 시노두스에서 재확인된 바이지만 교회가 전세계를 참으로 복음화하려면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으로 교회자체가 복음화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교회는 전해야 할 기쁜 소식의 보관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신약의 약속, 주님과 사도들 가르침, 생명의 말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의 원천, 구원의 길…, 이 모든 것은 교회에 위탁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귀하고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 보존하고 있는 복음서의 내용과 복음선교의 내용은 감추어 두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가 파견되고 복음화된 것이라면, 교회도 복음선포자를 파견해야 마땅합니다. 그러한 교회는 선교사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설명해주고, 이미 받은 선교의 임무를 그들에게 부여하고, 파견합니다. 즉 그들은 자기자신에 관한 일이나, 자신들의 생각하는 바를 알리는 것이 아니고(고린 후 4,5) 복음의 봉사자들로서 맡겨진 복음을 가장 충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교회나 선교사들은 복음의 주인도 아니고 그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는 교회

16.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 및 복음선교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시대](주 그리스도의 승천 후 시기)동안에는 교회만이 복음선교의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 임무는 교회 없이 수행될 수 없고, 더욱 교회를 반대하고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랑하지만 교회는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더라도 확실히 사람들은 이런 정도에서 탈선한 것입니다. 이같은 분리가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는 복음성서의 선언으로 명백해 집니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당신들을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들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입니다."(루가 10,16).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냐고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에페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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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음선교(福音宣敎)는 무엇인가?

▶ 복음선교 활동의 복잡성

17.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 있어서 각별히 유의해야 할 요소와 국면이 있습니다. 그중에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중에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복음화 활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로써는, 복음선교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선교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동적인 참 모습을 부분적 또는 단편적으로 규정할 때는 그것을 빈약하게 하거나 그르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모든 요소를 한가지로 포괄하지 않는다면 복음선교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번 시노두스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깊이 논의되었고 그 자극을 받아 오늘도 계속 연구되고 있습니다. 기쁘게 생각하는 바로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나에게 준 문헌 특히 교회헌장과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의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 인류의 쇄신

18. 교회로서는 복음선교의 기쁜 소식을 인류의 모든 계층에까지 전해주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 고린 후 5,17)라고 한 것과 같이 그 힘으로 인류를 내부로부터 변혁시켜 새롭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을 받고](로마 6,4) [복음적인 생활](에페 4,23-24 ; 골로 3,9-10)로 새로워진 사람들이 없었다면 새로운 인류는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선교의 목적은 이 내적 변화의 성취에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할 때 교회는 복음선교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 인류의 계층

19. 교회로서 복음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 잡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 문화의 복음화

20. 이상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말 할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화에 있어 중요한 것은 복음화가 문화를 마치 겉치장하는 것처럼 장식하는 것이 아니고 문화의 깊은 근원에까지 생명력 있게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나 문화들이라는 것은 [사목현장5항]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넓고 풍부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을 출발점으로하여 인간 관계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귀착되는 것입니다.

복음과 복음선교는 모든 문화에 대해서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문화와 동일시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그러나 복음이 가르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자기 고우의 문화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들이 생활화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있어서 인류의 모든 문화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음과 복음선교가 어떠한 문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문화와 융합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속되지 않으면서, 그 속에 침투작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복음과 문화의 불합관계는 과거와 한가지로 오늘에 있어서도 이롭지 못한 상황입니다. 제 문화를 복음화기키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아 하겠습니다. 복음과 접촉될 때 모든 문화가 재생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촉은 먼저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생활의 증거와 그 필요성

21. 복음은 모든 것에 앞서 증거로서 선포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정으로 한 신자나 적은 신자 단체가 지역사회 안에 살면서 주변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섭할 줄 알고 그들과 행운을 함께 하고 고상하고 선한 일에 협동 단결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밖에 순수하고 자발적인 방법으로 현세가치를 초월하는 가치에 대한 그들의 신앙과 볼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사물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드러내 보인다고 할 때 이와같은 무언의 증거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주위 사람들의 마음에 "어찌하여 저 사람들은 다르며 왜 그렇게 사는 것이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시키는 것일까? 왜 그들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일까?"하는 어쩔 수 없는 의문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없는 증거는 기쁜 소식을 힘 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됩니다. 복음선교는 바로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의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 영세는 하고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교 사회에 살고 있으나 그리스도교적 원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 고통 중에 누구라고 표현은 못하지만 어떤 절대자를 찾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첫 의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깊고 절박한 의문이 이러한 증거로써 제기될 것입니다. 함께 살고 행운을 함께 나누고 합동하는 것은 복음선교의 실천을 위해 필요하고 대개는 제일가는 분야라 하겠습니다(떼르뚤리아노 호교론, 39). 이러한 증거를 하도록 모든 신자들은 불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신자들은 참다운 복음선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민국으로 가는 이민들이 져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각별히 생각하는 바 입니다.

▶ 명시적(明示的) 설명의 필요

22. 그러나 증거(복음적)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증거라 하더라도 설명되고 납득되지 못하면 때로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두시오"(베드 전 3,15)라고 한 성 베드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증거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명백하고 오해될 수 없는 선언으로 명확해져야 합니다. 생활의 증거로서 선포된 [기쁜소식]은 언제인가는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알려져야 합니다. 만일 하느님의 아들 나자렛의 예수의 이름과, 그의 가르침, 그의 생애, 그의 언약, 하느님 나라와 신비가 설교되지 않고서는 참된 복음선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신강림날 베드로가 설교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 또는 복음선포의 역사로 얽혀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새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교회는 전교의 열망으로 하나의 관심과 집념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신비를 전하기 위해 누구를 보낼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이 신비를 설교할 것인가?

듣는 사람이 이해하고 납득하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 전교를 [케리그마](설교 또는 교리교육)라 해서, 흔히 같은 뜻으로 복음선교의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선교의 일면에 불과합니다.

▶ 생활한 공동체에 참여

23. 전교의 능력과 의미가 충분히 발휘되려면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고 음미하고 긍정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 줄 때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에 귀의(歸依)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훨씬 더 복음에 의한 새 생활양식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왕국] [새로운 세계]에 합치하는 것이고, 복음에 의해서 시작된 새로운 상태, 새로운 복음에 의해서 시작된 새로운 상태, 새로운 존재양식, 새로운 생활방법, 새로운 공동체 생활에 참가하는 등입니다. 이러한 귀의는 단순히 관념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신자공동체 안에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참가하므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생활의 변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 변혁의 표지(標識)가 되는 공동체에 가입하게 됩니다.

이 공동체란 바로 교회이며 볼 수 있는 구원의 성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교회공동체에 가입하는 그 자체는 교회가 무엇인지 외부로 알려주는 여러 가지 표지를 통해서 표명될 것입니다. 복음선교의 활력에 의해 복음을 하느님 말씀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은 교회에 귀의하게 되고 성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사는 그 은총으로 이 귀의를 명백하게 해주고 지원해 줍니다.

▶ 새로운 사도직과의 관련

24. 끝으로 복음화된 사람은 또한 남을 복음화토록 합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증거요 복음선교의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할 사람 자신이 복음의 증거자가 되지 못하고 선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복음선교의 의의에 대한 고찰을 끝맺음 하면서, 한가지 더 나의 생각을 말씀드려, 다음 고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복음선교는 여러 가지 요소로 성립되는 복잡한 과정 입니다. 그러한 요소들이란 인류의 쇄신, 복음적 생활의 증거, 명백한 교리전달, 마음의 귀의, 공동체에 대한 참가, 성사배령(Acceptio Signorum), 사도직 활동 등이며, 이 모두는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호 보완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상호관계하에서 각 요소를 고찰해야 합니다. 이번 시노두스의 공적은 이 요소를 대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조화있게 생각하여 교회가 해아 할 복음선교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입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복음선포의 상대는 누구이며 누가 복음선포의 책임을 지는지 등에 대한 전체적 전망을 설명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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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음선교(福音宣敎)의 내용

▶ 본질적 내용과 2차적 요소

25. 교회가 선교하고 있는 메시지 가운데는 확실히 2차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주로 변천하는 상황에 따라 활용되고 그 요소 자체도 변화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요소는 생명적 본체와 같아 만일 그것을 바꾸거나 무시한다면 복음선교 그 자체를 크게 변질시키고 말 것입니다.

▶ 성부의 사랑에 응하는 증거

26. 복음선교는 제일 먼저 단순하고 솔직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령 안에 계시된 하느님을 증거 혹은 하느님계서 성자안에서 세상을 사랑하시었고 사람이 되신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고, 사람을 영원한 생명에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피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이 누구인지 이름조차 모르고 경배할 줄도 모르는 그러한 신, 혹은 허망된 모든 우상의 체험을 하고나서 마음 속으로부터 찾고 있는 "모르는 신"(사도 17,23)을 알려 주는 것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 없이 멀리 있는 어떤 능력처럼 창조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명시하는 것은 훌륭한 복음선교가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실상 우리는 하느님의 저녀입니다"(요한 1서 3,1). 이와같이 우리는 하느님 안에 서로 형제입니다.

▶ 기쁜 소식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27. 복음선교는 역시 기초, 중심, 활동력의 절정으로서 명백한 선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선물인 구원을 모든 이에게 베푸셨다는 선언입니다. 이 구원은 현세에 한정된 물질적 정신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어떤 구원이 아닙니다. 욕망, 소원, 사업, 일시적 싸움, 이같은 것을 충족시켜주는 그런 구원은 아닙니다. 참된 구원은, 모든 한계를 넘어 유일, 절대자이신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채워지는 구원, 현세에서 시작되지만 영원 안에서 완성되는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 희망의 표지 아래

28. 따라서 복음선교는 초자연 생명에 관한 예언적 선포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숭고하고 영원한 소명(召命), 현재 상태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별개인 소명, 시간과 역사, 사라지는 현세사물 비밀이 드러나고 말 현세사건, 현세생명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에서 제시될 운명의 인간 등을 초월하는 생명에 대해서 말입니다(요한 1서 3,2 ; 로마 8,29 ; 필립 3,20-21)(교회헌장 48-51).

복음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느님과의 새로운 약속과 희망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고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계 대한 우리의 사랑, 복음의 중추를 이루는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 사람들에게 선무릉ㄹ 줄 수 있고, 용서하고, 희생하고, 도와 줄 수 있는 사랑, 악의 신비, 선행의 추구, 그밖에 긴급한 것으로는 기도, 경배와 감사, 하느님과의 만남의 가견적(可見的)표지인 교회와의 친교를 통해서 하느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와의 친교는 교회 안에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다른 표지 즉 성사집행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사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챤 생활의 완성을 위한 것으로, 일부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복음화의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완전을 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선포는 복음의 메시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그 땅에 심느데 의미가 있는 만큼, 성체성사에 정점을 둔 성사생활의 힘 없이는 교회건설도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신앙교리 성성의 선언문, 1973. 6.23, 성청관보, 65(1973). 396-408면).

▶ 모든 생활과 관계되는 복음

29. 만일 복음선교가 복음과 인간의 구체적 상활과의 관계, 즉 복음과 개인적 사회적 생활 사이에 지속적으로 있는 상호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복음선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서교에 있어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 인간발존애 없어서는 안 될 가정생활(사목헌장 47-52), 사회 공동생활, 국제관계, 평화, 정의, 개발 등에 대하여 명백한 견해를 표시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다음은 오늘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해방의 메시지에 대하여 언급하겠습니다.

▶ 해방의 소식

30. 최근의 시노두스에 있어서, 전세계에서 모인 주교들, 특히 제3세계의 주교들은 사목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이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습니다. 수백만의 신자들을 포함한 백성들을 대표한 주교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강력한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백성들은 기아, 질병, 문맹, 빈곤, 국제간의 부정, 특히 무역상의 부정, 과거 정치적 식민주의의 잔혹과 같은 경제적 문화적 신식민주의(新植民主義) 등에 의해서 생명의 극한적 상황에로 강요당하고 있기에, 전력을 다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주교들이 거듭 말한것처럼, 교회는 신자들이 포함되고 있는 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해방 시켜 주어야 하고, 이러한 방법이 시작될 수 있게 도와주고, 해방을 위해 증거해주고, 또 성취하도록 해주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복음선교를 위해 무관한 것일 수 없습니다.

▶ 인류의 발전과 필연적 관계

31. 복음선교와 인류발전(개발 또는 해방)이 두가지 사이에는 밀접한 인연이 있습니다. 인간학적 측면에서 볼 때, 복음화 되어야 할 인간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고 사회적 경제적문제와 관련된 존재입니다.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창조계획을 부정과 싸우고 정의를 구체적으로 수립해야 하는 구원의 계획과 분리 시킬 수 없습니다. 복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은 애덕의 관계라고 하겠습니다만 만일 정의와 평화로써 참된 인간발전을 증진기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선교에 있어서는 현대세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의, 해방, 개발과 평화의 여러 문제들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거나 무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나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일 그래야 한다면, 고통과 궁핍 중에 있는 이웃에 대한 복음적 사랑의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 이번 시노두스에 있어서, 해방의 중요성과 그 깊은 의미가 바로 이해 될 수 있도록 명확한 원칙이 제시 되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나자렛 예수님께서 기르치고 실천하신 바이며, 교회 역시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바입니다.

▶ 수정(修正)할 수도 없고 애매(曖昧)할 수도 없다

32. 해방에 관한 문제에 열의를 가진 많은 신자들 가운데, 교회를 해방운동에 개입시키기를 바라면서, 교회의 임무를 오로지 현세사정에만 국한시키려 하거나 또 흔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입니다. 이와같은 사고방식대로 말하다면 교회업무는 인간 중심적인 자문역에 한정되고 교회가 가르치는 구원은 물질적 번영을 위한 것이고 교회가 취하는 활덩은 영적 및 종교적 관심을 뒤에 두고 정치 및 사회적 차원에서 선도역할을 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교회는 자신의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말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해방의 소식은 독자성을 잃을 것이고 이데올로기나 정치단체에 의해서 쉽게 굴복되고 조작될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해방을 선포할 권위를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제3차 시노두스의 개회식사에 있어 같은 말을 다음과 같이 한 바 있습니다. [복음선교의 목적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라는 것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종교적 핵심에서 멀어진다면 자신의 모든 존재의의를 잃고 말 것입니다. 이 종교적 핵심이란 완전히 신학적 의미의 하느님 나라를 뜻합니다.

▶ 복음적 해방

33. 복음선교가 강조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 해방(인간해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해방은 단순히 경제적, 사회적, 혹은 문화적인 영역에 한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참된 인간해방은 모든 차원에 있어 전인격을(integrum hominem) 직시하고, 지향하는 어떤 절대자 즉 절대자 하느님께 대한 관계까지도 포함시켜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해방은 어떤 책략, 관습, 혹은 일시적인 효과의 요청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인간관이나 확실한 인간의 개념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 하느님 나라에 구심점을 두라

34. 그러기에 교회는 인간해방을 말하고 그것을 위해 수고하고 고생하는 사람들과 협력하지만 인간의 현세적 문제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종교적 분야에만 자신의 사명을 국한시키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재확인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사명에 대한 우위성입니다. 그리고 인간해방론의 하느님나라 선포에 대한 대치를 거부합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한( in christo) 구원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인간해방에 관한 교회의 공헌은 불완전하다고 단언합니다.

▶ 복음적인 전망으로 인간을 보라

35. 교회는 인간해방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결합시켜 생각하고 있으나 결코 양자를 동일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계시, 역사적 체험, 신앙적 고찰을 통해서 볼 때, 해방의 어떠한 내용도 필연적으로 인간과 사물과 세상사에 대한 복음적 견해와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교회는 확신합니다. 그 뿐 아니라 인간해방의 실시나 번영과 개발의 건설이 하느님 나라의 내림을 위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교회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 교회가 확신하고 있는 바로서는 현세 사물에 관한 해방이든지 정치적 해방이든지 어떠한 해방이라도 비록 그것이 여기저기 있는 신구약 성서의 구절에 근거를 두었고, 혹은 신학적 원리에 입각한 행동규범의 요청이라도, 또는 신학적 결론에 의해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고, 심지어는 그것이 현대의 신신학이라고 스스로 말하도라도 그것이 만일 동기에 있어서 애덕에 입각한 정의가 아니라면, 그 열성과 애덕에 입각한 정의가 아니라면, 그 열성과 노력이 영성적 차원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그 최종 목적이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구원과 행복이 아니라면 해방 자체 안에 부정의 싹이 내포된 것이기에, 표방하고 있는 목표에서 탈선하는 것이라고 교회는 확신하는 바 입니다.

▶ 필요한 회개가 따라야 한다

36. 교회가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정의롭게, 인권을 보다 존증하는 구조의 필요성을 크게 인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노예시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적이고 지혜를 다하여 구상한 구조라 하더라도 인간의 비인도적인 심향(心向)이 시정되지 않고, 이 구조 안에 살거나 지배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회개되지 않는다면 불원간 그 구조가 비인간화된다는 것을 교회로서 알고 있습니다.

▶ 폭력의 배제

37. 교회는 폭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한 번 방치했을 때 억제할 수 없는 그러한 무력을 승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인간해방의 달성방법으로 어떠한 인간의 살해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폭력은 언제나 폭력을 부르며, 필연적으로 새로운 억압의 형태를 낳게 합니다. 인간을 해방시킨다고 하던 전의 노예 제도보다 더 막중한 굴종의 형태를 생기게 합니다. 나는 콜롬비아로 여행갔을 때 명백히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폭력과 혁명을 신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사고나 행동의 풍토는 그리스도교 정신에 위배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정당하게 노력하고 있는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지연시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폭력이란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아니고 복음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거듭 거듭 강조하는 바입니다. 급격하고 폭력적인 구조의 변화는 그 자체 허구적이고 비효과적이며 의심할 것도 없이 인간의 존엄성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1968, 8.23. 바오로6세의 보고타에서의 강론, 성청관보 60<1968> 627면)

▶ 교회 고유의 공헌

38. 이상과 같이 말한 이후, 나는 교회가 인류해방에 협력하는데 교회 고유의 방법과 근본적으로 복음적인 방법을 더욱 더 생각하게 된 것을 기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는 많은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도록 더욱 겻려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해방자]들에게 신앙정신을 고취시키고 형제애의 근거를 제시해주며, 사회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라이 사회교육을 무시못할 뿐 아니라, 참여와 의무의 행동지침으로 삼는데 그들의 지혜와 경험의 기초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전략적 자세나 어떤 정치체제의 이용물과 혼동되지 않기 때문에 열의에 찬 신자는 독자적인 노력을 표시해야 합니다. 교회로서는 선포하고 있는 구원의 전체적 계획 안에 인류해방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노력을 합하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상 말한 것에 대하여 시노두스는 여러번 논의를 가졌습니다. 그밖에 시노두스 폐회식사때에 이 문제를 명백하게 하고자 보충적인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상의 모든 고찰은 [해방]이라는 말의 애매한 점을 해소시키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해방이라는 말은 종래 정치적 이데올러기나 조직 혹은 정치적 단체에 있어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복음선교가 준비하고 가르치는 해방이란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자신의 희생으로 인류에게 주신 해방입니다.

▶ 종교의 자유

39. 이 정당한 인간해방은 복음선교와 합치되어 인간의 자유로운 위한 조직을 만들고자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기본적 보호를 이 해방에서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인간기본적 중에서는 종교자유가 제일의 위치에 있습니다. 나는 최근 이 문제의 현실에 대하여 명백히 말해 둔 일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오늘도 그들이 그리스도교인이고 가톨릭신자이기 때문에 조직적인 탄압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권과 사회를 위한 선전으로 위장하면서까지 탄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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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복음선교의 방법

▶ 적절한 방법의 탐구

40. 복음선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복음선교의 방법과 수단에 대한 연구도 중요합니다. 어떻게 복음선교를 하느냐의 문제는 시간, 장소, 문화 등의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에 언제나 현실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발견과 적응이 우리의 능력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사목자들인 우리가 먼저 복음선교의 내용에 전적으로 충실하면서 현대인에게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대담스럽게 또 지혜롭게 발견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중요한 몇가지 방법을 다음에 제시하고자 합니다.

▶ 생활의 증거

41.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로서 복음선교를 위한 첫째 방법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봉헌하고 동시에 무한한 열성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생활의 표양은 복음선교의 첫째 수단이라고 인정합니다. 나는 최근 평신도들의 집회에서 "현대인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습니다. 스승의 말을 듣는다면 스승이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께서도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의 훌륭한 모습을 표현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동을 보고 믿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베드 전 3,1)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 하는 것은 말과 행동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충실, 청빈과 희생, 현세권력에 굴하지 않는 자유, 한 마디로 성덕생활의 표양으로 세상을 복음화 할 수 있습니다.

▶ 생명력 있는 강론

42. 다음으로 설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언급하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14.17). 이렇게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원칙은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말로 전한다는 것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현대인을 많은 강연에 지쳐서 흔히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에 대해서 무감각해 지기까지 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이미 실효없고 무익한 언어의 문화시대를 넘어 현대인은 표상의 문화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확실히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현대문명이 낳은 이기들을 사용하도록 우리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사살상 이 방면에 이미 하고 있는 적극적인 노력을 칭찬하고 더욱 더 발전시키도록 격려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공허한 말들과 많은 사회홍보 수단들이 권태감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언어가 가지고 있는 영구적인 힘을 과소평가하거나 신뢰를 잃도록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언어는 언제나 현대적이고 효능적입니다. 더욱 언어가 하느님의 능력을 전달하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고린 전 2,1-5). "들어야 믿을 수 있다"(로마 10,17)고 한 성 바오로의 말씀은 현대에도 살아 있으며, [들려진 말씀]은 곧 신앙으로 인도해 줍니다.

▶ 말씀의 전례

43. 복음을 전하는 이의 설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으며 열심히 연구한다면 무한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사람이 살아가는데 생기는 무수한 일들과 환경 안에는 하느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사정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그 안에서 발견하려면 영적 감수성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이제 공의회 이래 쇄신된 전례에 의해 말씀의 전례가 보다 가치있게 된 오늘날 만일 강론이 복음선교의 가장 중요하고 적절한 수단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큰 잘못일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목적 효과를 충분히 거두기 위해서는 강론이 지니고 있는 힘과 내용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강론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며 모든 성의를 다 기울여아 합니다. 미사정제 가운데 거행되는 강론은 특별한 힘과 위력을 가직 있어 복음선교를 위해 특수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론하는 사람의 깊은 신앙이 표명되고 사랑이 담겨져야 합니다. 신자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의 축일을 지내는 부활의 교회를 이루기 위해 모인 신자들은 강론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고 기쁜 효과를 얻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론은 알아듣기 쉽고, 간결하고도 명료하고 솔직하면서도 시기에 알맞아야하고, 복음정신에 뿌리박고 교회와 교도권에 충실하여 전교열에 찬 것이라야 합니다. 그밖에도 희망에 차 있고 신앙을 복돋아 주며 평화와 일치를 길러주는 것이라야 합니다. 이와같은 강론이 주일마다 행해진다면 본당공동체나 다른 공동체가 얼마나 강론의 덕으로 생생해지고 견고해지겠습니까. 그리고 전례쇄신에 따라 강론은 반드시 미사 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성사를 집행할 때에도 강론은 해야 하며 신심미사와 같은 준전례나 신자들의 집회 때에도 강론은 할 수 있습니다. 강론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고유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 교리 교육

44. 복음선교의 다른 방법의 하나로써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교리 교육입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조직적인 종교 교육에 의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셨고 또 교회가 긴 역사를 통하여 언제나 보다 풍부한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추구해 온 기본적 교리와 진리의 살아있는 내용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교육은 그리스도교적 생활풍토를 조성토록 해야하며 단순히 관념적인 것으로 남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 학교, 그리고 모든 신자 가정에서 실시되고 있는 교리 교육은 복음선교를 위해서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의 교리교재는 주교들의 권한하에 시대에 맞도록 지혜과 능력을 다하여 편집한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교리교수법에 있어서는 연령, 교양, 지능에 상응한 것이어야 하며 동시에 기본적 진리가 기억에 남고 정신과 마음에 깊이 박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훌륭한 교리교사의 양성입니다. 따라서 본당의 교리교사, 학교교사, 부모들과 같은 교리 교육자들에게 종교교육상 절실히 필요한 이 교리 교수법의 교육을 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들의 교육을 등한해서 안괴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밖에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청소년들과 성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헌신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자 교리 교육과 같은 형태의 교리 교육을 시키는 것은 더욱 더 긴급해져 가고 있습니다.

▶ 홍보수단의 이용

45. 현대의 특징을 사회홍보 수단의 발달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복음을 알리고 교리를 가르치고 혹은 신앙을 깊게 하는데 있어서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홍보수단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의해서 하느님 말씁이 범위의 한정없이 전달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인가느이 지성이 날로 발전해가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힘 있는 수단을, 교회가 활용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앞에 죄송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홍보수단에 의해서 교회는 복음을 "지붕 위에서"(마태 10,27 ; 루가 12,3) 설교할 수 있고 보다 새롭고 효과적인 형태의 설교대를 통하여 대중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선교를 위해 사회홍보수단을 이용할 때는 어떤 호소력을 앞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매스 미디어를 통한 복음선포는 일반대중에게 전달 되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각자의 양심을 파고들고 마음속에 남게 해야합니다. 즉 개체적이고 인격적인 그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 스스로 인격적인 승낙을 하고 책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 개인 접촉의 절대적 필요성

46. 따라서 일반적인 복음선포와 병행해서 해야할 것은 개인적 접촉에 의한 전달인 것입니다. 이것은 효과적이면 또한 중요한 다른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컨데 니고데모, 자케오, 사마리아 여인, 바리사이파의 시몬 등과 함께 대화하신 것들입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상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의 신앙체험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대중에게 전하는 것이 급한 것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양심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신기한 말로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언되겠습니다. 고백의 성사 혹은 사목적 지도를 통하여 사제들이 사람들을 복음적 생활로 인도하고, 그들의 노력을 밀어주고 만일 넘어졌으면 일으켜주고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돕고자 하는 훌륭한 공적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 성사의 역할

47. 그러나 복음선교는 단순히 강론과 교리 교육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선교는 자연적 생명과 초자연적 생명에 직결되어 있어 자연 생명에는 복음적 희망과 기대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초자연적 생명에게는 그것이 자연생명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정화시키고 증대케하는 생명이 되게 해줍니다. 이 초자연적 생명의 생활한 표현은 그 성사와 성사의 은총과 성성(聖性)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선교는 이와같이 하느님 말씀과 성사의 밀접한 관계를 실현시켰을 때 그 모든 풍부함을 발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복음선포와 성사사목을 대립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간혹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언어도단입니다. 성사에 대한 확고한 교리 지식과 교리 교육 전반에 관한 기초 없이 성사를 받게 된다면 많은 부분의 효력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화의 역할은 신자들이 수동적으로 성사를 받게하는 것이 아인 신자 각 사람이 신앙의 성사로써 성사를 생활화 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성사를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생활로 옮겨놓을 수 있는 성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민간신앙

48. 다음은 복음선교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한가지 측면으로써 민간신앙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수세기를 통하여 이루어진 가톨릭국가나 다른 포교지역에 있어서 백성들 가운데 신과 신앙을 찾고자 하는 특수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오랜동안 순수한 것이 못된다고 때로는 무시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는 이러한 표현들을 어디서나 다시 생각해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최근의 시노두스에 있어서도 주교들은 사목적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민간신앙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바 있습니다. 민간신앙에 있어서는 확실히 일정한 한계가 있습니다. 종교로써 흔히 기형적이며 미신으로 향하가도 합니다. 신앙심과는 일치하지 않는 저급한 미신행위에 머무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분파를 조성해서 교회공동체를 위태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것들이 적절히 선도되고 특히 복음선교의 방향으로 선도된다면 가치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민간신앙은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헌신과 영웅적 희생더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성, 섭리, 사랑, 현존 등 하느님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예리한 감수성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데서는 보기드문 인내심,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십자가의 의의. 해탈, 귀의심, 신심 들 내적 자세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민중의 종교심이라고 하기보다 민간신앙 즉 민중의 종교라고 기꺼이 부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배치해주신 교회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위태로우면서도 풍부한 결과가 있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목적 사랑으로 행동지침을 내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현실에 민감해야 하고 내면과 확실한 가치에 대하여 통찰할 수 있어야 하며 탈선의 위험을 극복하도록 신속히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도만 잘 된다면 이 대중적 신앙심은 오늘의 일반대중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하느님과의 참된 상봉을 이루게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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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음선교의 대상

▶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선교

49.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마르 16,15).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이 마지막 말씀은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위탁하신 복음선포에 있어서 한계가 없는 보편성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열 두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 말씀과 이와 비슷한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박해로 인해 사도들의 분산은 결과적으로 말씀을 전파하고 멀리 떨어진 지역에 교회를 건설하는데 도음이 된 것입니다. 바오로가 사도의 지위에 들게 된 일이나, 그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교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내림을 설교하였던 그의 특은은 이 보편성을 더 명백하게 해 준 것입니다.

▶ 모든 장애의 극복

50. 20세기 동안의 역사의 흐름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보편적 사명을 수행하는데 그 때마다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딪쳤던 것입니다. 한편 복음의 선교자 자신들은 여러 가지의 이유로 활동하던 지역의 범위를 그들은 줄이고 싶은 유혹도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전교의 대상이 되던 사람들로부터 인간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저항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밖에 슬픈 일이지만 교회의 전교활동은 공권력에 의해서 심하게 방해되거나 반대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믈도 하느님 말씀의 전교자들이 예수 그리사도와 그의 복음을 전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권리가 박탈되고 박해와 협박과 살해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괴로운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활동은 세계 어떤 곳에서든지 종말에 있어서는 결코 헛되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바 입니다.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전세계에] [모든 피조물에게] [땅의 극변까지]라고 말씀하신대로 직접 주님에게서 받은 깊은 정신적 자극을 항상 되살리고 있습니다. 최근의 시노두스에 있어서도 복음선포는 인류의 일부분이거나 사회의 한 계층 또는 일정한 문화권에 한정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 전교는 먼저 미신자에게

51.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것은 성신강림날 아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그 창설자로부터 받은 활동지침처럼 알고 계속해 왔습니다. 신약성서 전체 그중에도 사도행전은 특수한 시기의 교훈을 말해주고 있으며 포교활동의 시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교회사는 특징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복음서포를 다양한 활동으로 실현시켜 나가로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실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때로는 [예비선교]라 하고 있는데, 이 예비선교는 그 초보적인 단계에 있어서 아직 불완전하지만 참된 의미의 복음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예비선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수한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강론은 물론, 예술, 과학, 철학적 연구, 감정에 대한 정당한 호소 등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게 됩니다.

▶ 냉담한 신자들에게

52.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에게 먼저 전교를 해야하지만 현대에 있어 흔히 볼 수 있는 비그리스도교화된 사회인에게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세례는 받았으나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 다소 신앙은 있으나 신앙의 기초지식이 약한 소박한 사람들, 어려서 받은 교육과는 다른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지성인들, 그밖에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 비그리스도교적인 모든 종교

53. 복음은 인류중에 그리스도가 아닌, 타종교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까지도 종교의 대상안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들은 많은 사람들의 심혼에서 발로되는 생활한 표현이기에 교회는 이들 종교를 존중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 천년 동안에 걸쳐 하느님을 추구해온 소리의 반향을 들을 수 있으며 비록 하느님을 추구하는 내용은 불완전하지만 대부분 진지하고 바른 마음으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들은 심오한 경전의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대로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심어져 있는 것과 같아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17항) 바로 [복음화의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인용한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의 말씀이기도 합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16항). 이와는 달리 그렇게 보는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른는 것은 사실입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들이기에 그리스도교적 전통과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비추어 연구하므로써 오늘과 내일의 선교사들이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와 접촉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를 제시해주어야 할 과제입니다. 특히, 우리가 이들의 선교를 존중한다고 해서 또는 제시된 문제가 복잡하다고하여 교회로서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신비의 보화를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을 교회로서 주장하는 바입니다(에페 3,8). 이 신비의 보화에서 인류는 하느님에 대해서,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삶과 죽음, 진리 등에 대해서 모색하고 추구하던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와같은 이유로 자연종교의 제도와 초월성을 평가하더라도 교회는 다음과 같은 고유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자인합니다. 즉 복음선교로써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종교는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생활한 현존, 하느님의 역사에 인간을 결합시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해서 교회는 인간을 굽어 살피시는 하느님 아버지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줍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타종교가 일반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는 구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참되고 생활한 관계는 어느 종교도 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교적 종교만이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교회는 포교적 열성을 언제나 조장시키면서 특히 현대에 있어서 그것을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 대해서 교회는 책임을 느끼고 있고 구세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시대에 따라 새 사도들을 육성해 왔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사도적 열의는 이미 소진되고 포교의 시대는 이미 지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말씀드리는 것은 나로서 다행하게 생각하는 바 입니다. 시노두스에 있어서도 포교는 힘 없이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교회로서 자신의 사명완수를 위해 추진해야 하는 것이라고 표명하였습니다.

▶ 신자들의 신앙의 뒷받침

54. 교회는 이미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과, 또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선대로 부터 복음의 말씀을 들어온 사람들에게 꾸준한 배려도 자신의 의무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미 신자가 되었고 또는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사람들의 신앙심이 깊어지고 견고해지며, 길러지고 더욱 성숙해지도록 더욱 더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현대에 있어서 흔히 세속주의와 전투적인 무신론과 맞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시련과 협박을 받아야만 하고 더 나아가서는 곤경과 싸움을 당해야만 합니다. 만일 신앙을 지속적으로 길러나가지 않고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질식과 쇠약으로 죽어버릴 위험마저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화의 역할은 신자들이 신앙에 필요한 영양과 고무를 제공해주는 일입니다. 특히 복음적 활기에 넘치고 시대와 사람들에게 맞는 말을 갖춘 교리 교육에 의해서 신자들의 신앙을 도와주는 것이라야 하겠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해서도 교회는 같은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그들과의 일치를 준비하는 교회는 진리 안에서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는 계시의 완전무결함을 그들 앞에서 증거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자기의 임무를 크게 그르치는 것이라고 자각하고 있습니다.

▶ 미신자들

55. 시노두스에 참석한 주교들의 같은 관심사는 서로 다른 두가지 영역에 관하여 명백한 취급을 하였습니다. 즉 그것은 인간과 사물의 상황에 관한 것이지만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두가지가 다 복음선교를 대항하는 데 방법을 달리하면서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한가지는 현대 세계에 있어 무신앙적 세력의 증가를 들 수 있습니다. 시노두스에 있어서 현대 세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신앙이라는 공개된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상가들이 내포되고 있으며 참된 가치와 허위적인 가치, 숨은 욕구 아니면 파멸의 씨, 사라져가는 옛 이상과 강요되는 새 이상들이 얼마나 얽켜있는 현대란 말입니까!

영적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세계는 어떤 현대작가가 말한 것처럼 "무신론적 인문주의의 드라마입니다"(앙리 듀박지음, 무신론적 인문주의 드라마, 1945). 다른 한편에는 현대세계의 중신심 자리잡고 있는 세속주의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정당하고 신앙과 종교가 양립하는 세속화의 노력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사물이나 우주의 각 변화속에서 즉 피조물의 세계에 있어서 창조주께서 섭리하신 자율적 지배법칙을 발견하려는 노력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의미로 학문과 문화의 정당한 자립성을 인정하였습니다(현대 사목 헌장 59항).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참된 「세속주의」로서 우주의 개념을 하느님에게 까지 관련시키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신은 무익한 것이고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세속주의는 인간의 능력만을 인정하려는 데서 마침내는 신은 필요 없다고 하고 부인까지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형식의 무신론이 생기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인간중심주의의 무신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이것은 추상적, 혹은 형이상학적 무신론이 아니고 실용적, 조직적, 전투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신론적 세속주의와 결합되어 날로 다양한 형식의 소비문화를 형성합니다. 소비문화에 있어서는 최고가치로서의 쾌락주의, 권세욕, 지배욕, 그리고 모든 종류의 차별 등이 속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비인간적인 인문주의의 경향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같은 현대 세계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참된 유대와 적어도 실현하려고 하는 복음적 가치들이 내재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에 대하여 어떤 공허감이나 기대심에 사로잡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현세를 복음화 하고자 하는 강하고 비통한 호소가 있다고 해서 과장은 아닙니다.

▶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신자들

56. 현대세계의 특징에 대한 둘째 측면으로서는 냉담자의 분야입니다. 오늘날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생활에는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냉담자들의 현상은 교회사적으로도 오래 전부터 있어 온 일입니다. 그것은 자연적 나약이나 항구하지 못한 본성에 기인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특징적 탈선으로 설명됩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무신앙자들을 따라가는 생활을 하고 있고 그들의 영향을 계속 받고 있는데 기인합니다.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신들의 입장을 내적종교나 인격의 자주성 또는 인격에 대한 신뢰라는 미명하에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이와같이 한쪽에는 무신론자와 무신앙자들에게서 또 다른 편에서는 냉담한 신자들한테서 복음선교에 대한 저항을 상당히 받고 있습니다. 무신론자와 무신앙자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신앙을 거부하는 형태로 저항합니다. 그들은 사물의 새로운 질서, 우주의 생명과 역사의 새로운 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절대자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냉담자들은 그들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또 그들은 스스로 잘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다 알고있고, 그리고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 고유의 어떤 적개심을 가지고 저항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적 세속주의와 신앙실천의 결핍은 어른이나 젊은이나 그리고 선발된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또 일반 대중이나 모든 사회문화의 영역, 젊은 교회나 노쇠한 교회등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선교활동은 이 두 개의 세계를 무시할 수도, 중시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시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그들에게 제시 또는 재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충분한 말과 방법을 계속해서 탐구해야 하겠습니다.

▶ 대중을 향한 전교

57. 군중 앞에서 설교하신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성신강림날 아침 열 두 사도들이 행한 것처럼 교회도 복음을 필요로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권리를 갖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디모 전 2, 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말해 주어야 할 의무를 교회는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소수의 특수층이나 혹은 특전을 받거나 선발된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있음을 교회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마태 9,36) 방황하면서 지친 군중을 보시고 "나는 이 사람들이 참으로 가엾소"(마태 15,32) 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걱정을 교회는 자신의 걱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선교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복음을 먼저 대중 속에 있는 신자 공동체에 전하며 신자들을 통하여 다른 이에게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교회의 기초공동체

58. 최근의 시노두스에 있어서 「소공동체」혹은「기초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교회안에서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말이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어떤 것이며, 어찌하여 복음화하면서 동시에 복음화되는 것입니까?

시노두스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한 공동체들이 어떤 교회 안에서든지 번창하고 있으며, 한 지역 안에서도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지역 상호간에도 더 큰 격차가 있드는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 예외는 있겠지만 대체로 이러한 공동체들이 교회생활에 참여하고, 교회의 가르침에서 힘을 얻으며 사목자들과 일치하므로 육성 조장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생기게 되는 것은 교회생활을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것과 혹은 대도시의 교회공동체 같은 곳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인간적인 상호 유대를 추구하는 데서 생긴다고 봅니다. 대도시의 생활은 집단화되고 익명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오로지 자기들 나름대로 하느님 공경과 믿음에 대한 깊은 연구, 형제적 사랑의 실천, 기도 생활, 사목자들과의 일치 등 종교적 영성적인 문제에 관하여 적은 사회단체나 마을 같은 단위에 확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과 성사재령, 사랑의 일치를 위하여 연령, 교양, 직분 혹은 사회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인 부부, 청소년, 직장인의 단체들을 집합시키려고 합니다. 또한, 정의를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인간발전을 위해서 뭉쳐진 사람들을 결속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교회가 인준한 공동체 안에서 더욱 특수 교회나 본당교회내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일부 지역에 있어서는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진 「원초적 공동체(Commuitates primordiales)」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교회를 제도적인 것이라고 반대하고, 조직과 제도에서 해방된 오로지 복음에 의해서 사는 카리스마적 (초대교회적 성령의 특은에 의한) 공동체로서 대립의 자세를 취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교회의 표명이 되는 교계제도와 표지를 드러나게 비난하고 부정합니다. 또 철저한 반교회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노손에서 그들은 이데올로기화(주 : 주장을 위한 주장)하기도 하고, 대체로는 정치노선 조류, 조직, 당파에 휩쓸려 이용당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원초적 공동체는 앞에서 말한 기초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반항의 정신으로 교회에서 이탈하는 이러한 원초적 공동체는 교회일치를 해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기초적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사회학적인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만일 그들이(공동체)교계제도와 적대하면서 기초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의 남용이 될 것입니다. 교회적 기초 공동체라는 명칭은 교회일치와 발전을 위해 교회 안에 서로 모이는 그러한 공동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회적 기초 공동체는 복음선교의 묘자리가 되고, 보다 큰 공동체 특히 지역교회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보편적 교회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나는 시노두스 끝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기초 공동체는 하느님 말씀에서 그 양식을 구하고 인간의 위대한 가능성을 이용하려는 정치적 편향이나, 그때 그때의 이데올로기에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초공동체는 진정성을 찾고 협력한다는 구실로 조직적인 반항과 혹평하려는 태도를 언제나 피해야 합니다.

기초 공동체는 그가 속하고 있는 지역교회와 보편적 교회에 굳게 일치하여 스스로 고립시키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런 일은 너무나 쉽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공동체를 이단시하고 자기들만의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기초 공동체는 하느님이 교회에 주신 사목자들과 그리스도의 성령이 밑겨주신 교회의 교도권에 진정한 일치를 보존하여야 합니다.

기초 공동체는 결코 자기들만이 복음화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자기들만이 복음선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더욱 자기들만이 신앙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교회는 보다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공동체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형식과 표현으로 교회가 구체화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초 공동체는 날로 신심과 포교적 열성에 대한 책임의식이 발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기초 공동체는 언제나 전체를 생각하고 파벌적 행위를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의 조건들은 확실히 어려운 요청인줄 압니다. 그러나 잘 지킨다면 정신을 일깨워줄 것이고, 교회의 기초 공동체들은 자기들의 근본적 소명에 충실할 것입니다. 즉 복음을 잘 듣고, 각별히 복음화를 받아들이며 지체하지 않고 그 자신이 복음의 선포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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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복음선교의 역군

▶ 교회전체가 선교자

56.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들은 구세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은총과 명령에 의해서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파견받지 않고서는 어떻게 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5)라고 하신 바오로는 의심할 것 없이 가장 위대한 선교자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아무도 파견되지 않고서는 그 입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선교의 사명이 맡겨져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명백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 그리스도께로부터 세워지고 전 세계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종교자유에 관한 선언 13항). 「전 교회는 파견된 것이며 복음선포는 하느님의 백성의 근본적인 임무이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35항).

교회와 복음선포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건설하는 교회는 언제나 존속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시로써 또 도구로써 세계 한가운데 스스로 치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이 열 두 사도의 전교 활동에 대하여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여 여러 교회를 낳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뜻 깊은 표현을 공의회는 인용하고 있습니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1항).

▶ 교회적인 행위

60. 복음선교를 교회에 위탁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가지 확신을 일으켜 줍니다. 첫째 확신은 복음선교란 누구에게나 개인적이고 고립적인 행위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교회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진 어떤 벽지에서 홀로 복음을 전하고 적은 공동체를 모으고 성사를 주고 있는 설교자나 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또는 교리교사나 사목자들은 교회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제도적인 유대로써 만이 아니고, 초자연적 은총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유대와 숨은 바탕(뿌리)에 의해서 교회 전체의 복음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 진 (負) 사명이거나 개인적으로 생각해 낸 원의에서가 아니고 교회 직무에 일치하고 교회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2의 확신이 다음과 같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명을 받아 행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이 복음선교를 한다면 그는 그 복음선교 활동에 관해서 절대적 주인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개인의 재질이나 충동에 따라 임의로 행동하거나 수행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교회와 그의 사목자들과 일치하여 행하여야 합니다.

이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 전체가 복음선교를 하는 것이기에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복음선포를 해야 할 책임을 교회는 느끼고 있습니다.

▶ 보편적 교회의 모습

61. 오늘날 매우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전례행사에 참여할 때나, 재판관이나 사형집행자 앞에서 신앙을 증거할 때나 또는 그들이 남긴 호교서(護敎書)안에서나 그들은, 교회는 전세계에 전파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신앙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 않는 큰 공동체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극변까지(사도 1,8), 세상 마칠 때까지(마태 28,20), 의인 아벨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간택자에 이르기까지 영속하는 공동체에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한신 교회의 교회의 모습은 공중의 새가 가지에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마태 13,32), 온갖 물고기를 건져내는 그물(마태 13,47), 백 쉰 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를 잡은 베드로의 그물(요한 21,11), 한 사람의 목자가 치는 양의 무리(요한 10,1-11)와 같은 것이며, 그러한 교회는 국경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보편적 교회입니다. 오로지 있다면 슬픈 일이지만 죄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장벽일 뿐입니다.

▶ 지역교회의 모습

62. 그렇지만 이 보편적인 교회는 사실상 개개의 지역교회 안에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각각 다른 언어, 문화와 전통, 인생관, 역사를 가진 민족들로서 보편적 교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의 그러한 특수성을 살리는 것은 현대인의 감수성에 잘 맞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보편적 교회를 지역교회들의 통합체로 인정한다던가 혹은 서로 다른 지역 교회들의 연합체같이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그 소명과 사명상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국가,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환경 속에 뿌리를 내릴 때에 세상 어디서든지 다양한 모습과 표현을 띠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각 지역교회가 고의적으로 보편적 교회에서 떨어지려한다면 하느님의 계획에서는 멀어지는 것이 되며, 교회로서의 특성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편적 교회도 지역 교회를 통해서 살과 생명을(영양을) 취하지 않는다면 현실에서 유리된 추상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이 양국면을 언제나 고려한다면 보편적 교회와 지역 교회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풍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언어의 적응과 정확성

63. 지역교회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융합한다는 것만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갈망, 재물과 궁핍, 기도하는 방법, 사랑하는 방법, 인생과 세상을 생각하는 방식 등을 고려해서 기본적인 진리를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고 복음의 가르침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표현의 적응에는 분별력, 신중성, 존중심, 상응한 지식 등이 활용되어야 합니다. 특히 전례, 교리교육, 신학교육, 이차적인 교회구조, 교회봉사 같은 분야에 적응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한다]는 표현은 문학적 언어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인류학적, 문학적인 의미로써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까다로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복음선교에 있어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 그들의 언어, 그들의 실생활에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복음선교는 당연히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반면에 만일 표현하고자 하는데서 내용을 변질케 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되게 하면 복음선교는 본질을 상실하고 완전히 효과없는 것이 되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만일 보편적 진리를 한 지역에만 적응시키려 한다면 그 진리를 희생시키고 보편성에 의한 일치를 파괴시키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보편성을 자각하고 자신이 실제로 보편적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일때에 그 교회만이 모든 국경을 초월해서 모든이가 하느님의 소식을 즉시 받아 들일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지역교회에 대한 배려는 급히 꼭 해야 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할 때 그 교회는 발전합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 민족과 인류공동체의 심향에 맞추는 것이 되고, 그들의 본 모습을 한층 더 발견케 해주는 것이될 것입니다.

▶ 보편적 교회와의 일치

64. 이와 같은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는 보편적 교회에 대해서 언제나 개방적이라야 합니다. 극히 순진하면서 복음에 대한 충실한 그리고 교회의 참 뜻에 민감한 신자들은 스스로 보편적에 대해서도 민감합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끼며 또 그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보편성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더불어 감동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납득못하는 이론으로 보편성이 상실된 폐쇄적인 지역교회에 강요 당할 때는 고민하기도 합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지역 교회가 신학, 사회, 정치사목상 문제 또는 어떤 활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보편적 교회와 가견적 생활 중심에서 이탈하게 될 때 두가지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먼저 고립주의에 빠져 고갈되고 마침내는 각 지체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듯이 됩니다. 또 다른 위함은 그가 일치를 통해 활력을 받던 타교회들과 그 중심에서 이탈될 때 그는 자유까지 상실하게 되어 다양한 강제와 이용세력에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확실히 지역교회가 사랑, 성실, 베드로의 교도권, 신앙의 원칙이 되는 기도의 원칙(Lexorandi et lex credendi), 보편성을 이루는 타교회들과의 일치 등 그 안에서 보편적 교회와 굳게 결속될 때 신앙의 보화를 다양성 안에서 드러나게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신앙고백, 기도, 전례, 신앙생활, 영성에 있어 다양성이 생겨 교회는 더욱 참된 복음의 선교자가 됩니다. 동시에 지역 사람들의 경험과 생활을 보편적 교회에 전달하여 전체의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편적 유산을 지역 교회의 신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됩니다.

▶ 변할 수 없는 신앙의 유산

65. 나는 최근 제3차 시노두스의 폐막식에서 모든 교회의 일치와 유일한 교회의 보편성을 위한 볼 수 있고, 살아 있고 활력적 원천인 베드로의 후계자의 역할에 대하여 명백히 말한 바 있습니다. 나에게 부과된 중책에 대해서도 말하였습니다만, 이 책임은 주님이 열 두 사도에게 위탁하신 가톨릭 신앙을 조금이라도 변질시키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형제들인 주교들과 함께 나누어 지는 책임입니다. 그 내용이 여러 가지 언어로 표현될 때나 문화, 사회, 인종의 다양성을 고려한 신학적 설명에 있어서나 가톨릭 신앙의 내용은 교회 교도권이 받아서 전하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 서로 다른 직무

66. 교회 전체는 복음선교의 소명을 받고 있으나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각각 다른 임무를 가지고 그 수행에 응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명에 있어서 봉사의 다양성은 복음선교를 풍부하게 하고 아름답게 해줍니다. 이러한 임무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복음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임무를 사도들에게 위탁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뽑으시고(요한 15,16 ; 마르 3,13-19 ; 루가 6,13-16), 친히 여러 해 동안 교육을 시키시고(사도 1,21-23), 구원의 소식에 대한 권위있는 교사로서 또 증거자로서 정하시고(마르 3,14) 파견하셨습니다(마르 3,15 ; 루가 9,2). 열 두 사도들은 그들의 후계자를 파견하여 복음을 계속 전하게 하였습니다.

▶ 베드로의 후계자

67. 베드로의 후계자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계시된 진리를 가르치는 최고의 임무를 위탁받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가 모든 이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사도 4,8 ; 2,14 ; 3,12).

레오 대성인께서 스스로 사도직의 최고 신자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고 같은 이유에서 리옹 공의회에서도 교황을 사도단의 정상에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모든 피조물에 복음을 전하라는(마르 16,15)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베드로와 더불어 베드로 밑에 먼저 또 직접적으로 주교들에게 의무를 지운다"(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38항)라고 말하므로 교황의 지위를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의 사목적 통치를 위해 당신 대리자에게 주신 권능은 완전하고 최상의 것이면서 보편적인 것입니다. 이 권능은 교황이 구원의 복음을 알리고 또 알리게 하는 활동에 있어서 행사되는 것입니다.

▶ 주교와 사제들

68. 베드로의 후계자와 결합된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주교서품에 의하여 교회 안에 계시된 진리를 가르칠 권한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곧 신앙의 교사들입니다.

복음선포의 임무에 있어서 주교들과 결합되어 복음선포의 권한에 특수하게 참여하는 사람들은 바로 사제서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어 활동하게 됩니다(교회헌장 10,37). 사제들은 서품에 의해 하느님의 백성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교육자, 하느님 말씀의 설교자인 동시에 성체성사와 기타의 성사를 집행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목자들인 우리는 교회의 다른 어떤 지체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책임 의식을 우리안에 불러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사제직의 봉사자가 되게 하고, 일생동안 해야 할 무수한 활동들을 서로 합치하게 하며 우리의 활동성에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복음선포 활동에 일관하고 있는 목적인 것입니다(데살 전 2,9).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의 고유한 자세이며 여하한 의심이나 반대도 이를 손상시켜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사목자들은 최고목자의 자비하심으로 간택된 사람들이며(베드 전 5,4), 비록 부족하나 권한을 가지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흩어진 하느님 백성을 모으고, 성사로써 이 백성들을 양육하고 일치를 보존하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임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 일치를 보존하는 것은 각각 다른 입징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들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뭉쳐진 사제 공동체가 그 내적 소명에 충실하도록 계속 고무케 하는 것도 우리의 임무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과 우리의 할 수 있는 힘을 다한다면 우리는 복음선교의 사업을 완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편적 교회의 사목자인 나와 지역교회의 지도자들인 주교들과, 신품성사와 교회의 사랑에 의한 일치로써 주교들의 협력자가 된 사제들 전체인 것입니다.

▶ 수도자들

69. 수도자들은 하느님께 봉헌된 생활 속에서 복음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특수한 방법을 찾게 됩니다. 수도생활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활동력에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교회는 절대자 하느님을 갈망하고 또 성덕에로 불림을 받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바로 성덕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진복을 추구하고 있는 교회를 실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과 교회와 형제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는 표시가 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수도자들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복음선교의 근본적 요소인 증거를 위해서 각별한 중요성을 띠고 있습니다. 청빈, 정결, 순명의 무언의 증거는 현사회와 교회에 숙고의 기회를 주게 되며, 더 나가서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지만 가치를 추구하고 선의를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웅변적 설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와 침묵, 속죄와 희생의 생활에 존심하고 있는 수사 수녀들은 복음선교에 있어서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음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활동에 헌신하고 있는 활동수도회의 수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선교 활동은 말할 것도 없이 주교들의 지도하에 그리고 사목적 계획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도회의 복음선교를 위한 공헌은 지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낌없는 봉헌으로써 자유롭게 모든 것을 버리고 기꺼이 세상 극변까지 복음을 전하려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활동력, 창의력에 의한 선교활동은 참으로 경탄해 마지 않습니다. 그들은 포교 최전선에서 건강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고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교회가 그들에게 힘 입고 있는 것은 지대한 것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 평신도들

70. 일반사회 속에서 여러가지 직업 생활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특별한 소명을 받고 있어 복음선교에 있어서도 특수한 모양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신자들의 고유한 주 임무는 교회공동체를 설립하거나 발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사목자들의 임무가 되는 것이며 신자들의 임무는 그리스도교적이고 복음적인 모든 능력과 잠재하고 있는 가능성까지도 복음선교를 위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은 이미 사회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자들의 복음선교 활동의 무대는 바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학술, 국제활동, 홍보 등 광범위한 한 마다로 복잡한 현실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밖에 사랑, 어린이 가정 교육, 청소년 교육, 직업훈련, 고뇌 등의 현실도 모두 복음정신에 투철하고 이러한 일들에 책임을 진 신자들이 많아서 그들이 그들에게 저력으로 남아 있는 그리스도교적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럴수록 이 모든 일들은 인간적인 효과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동시에 초자연적 질서에로 향하면서 하느님 나라 건설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기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 가정

71. 신자들에게 있어 복음선교 활동의 장소로써 가정활동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사적으로나 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있어서 가정은 곧 [가정으로서의 교회]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가지게 되었습니다(교회헌장 11). 신자가정에 있어서는 어떤 가정에서든지 교회의 여러 가지 면이 발견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교회처럼 복음이 전달되는 곳이요 거기서 복음이 빛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의식하고 있는 가정에 있어서는 모든 가족이 복음선교를 하는 것이고 동시에 복음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생활의 체험을 통해서 자녀들로부터 복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은 다른 많은 가정과 이웃에게 복음선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타교파 신자와 관면혼인을 한 가정은 그들이 받은 같은 세례성사에 의하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야 하며, 어려운 일이지만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 청년들

72. 청년들에 대해서도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청년들의 수가 증가되고 사회적 지위도 향상되어 그들을 문란케하는 문제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성의와 지혜를 다하여 알아야하고 생활해야 할 이상으로써 복음을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더 나가서 청년들로서는 신앙과 기도로써 교육되어 더욱 청년들의 사도가 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청년들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고 있으며 나 자신도 그들에 대한 나의 큰 신뢰를 자주 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 다양한 역할

73. 이상 사회의 실생활 가운데 신자활동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다른 역할의 분야가 있다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즉 그들은 사목자들의 협력자로서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소명을 받고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은총과 특은에 따라 공동체의 활동과 성장을 위해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나는 많은 사목자들과 수도자, 평신도들이 복음선교의 열성을 가지고 언제나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하며 오늘의 교회가 이와 같은 방향과 생각에 대하여 개방적 활동을 취하고 있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것에 앞서 반성하려 하고 복음선교의 본연의 활동력을 생생하게 하고 강화하는데 가능한 교회직무에 대해서 개방적 행동을 취하려는 것입니다.

서품에 의해서 사목자들과 같이 공동체 안에서 특수한 봉사직을 맡은 사람(예 : 부제)외에 서품되지 않은 평신도로서 서품의 직무와는 관계 없이 교회의 특수직을 수행하는 것을 교회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보더라도 이와 같이 신자들의 도움으로 교회직무에 있어 교회가 견고해지고 성장하고 확대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천적인 고찰은 인류와 교회가 요구하는 대적 필요에 따라 별도로 보완되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원천적인 데서 근거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보존하면서 근거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보존하면서 현대적 요구와 필요에 적응한다는 것은 바로 현명한 방법을 가증케 하고 교회에 필요한 직무가 무엇인지 밝혀주는 핵심이 될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교회 공동체의 보다 큰 활력을 위해서 그러한 직무를 기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평신도의 직무는, 교회일치의 책임자이며 실행자인 사목자의 방침과 그 일치를 보존하는 한 확실히 사목적 가치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직무는 현재 새로운 것 같으나 사실은 교회의 오랜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리교사, 기도와 성가의 선창자, 성서낭독자,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자, 소공동체의 지도자, 사도직의 책임자 등은 교회를 그 지역에 심고 키우는데 귀중한 것이며, 교회로 하여금 주위에 영향을 주위에 영향을 주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직부에 봉사하기 위해 생활의 일부나 때로는 전부를 바치고 있는 신자들에게 나는 각별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선교의 일꾼들을 위해서는 진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특히 하느님 말씀에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위대함과 풍부함에 확신을 가져야 하겠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가 명료하고 품위있고 상대방에 맞는 것이라야 하겠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 화술은 매우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강론하는 사람이나 교리교사로서 어찌 이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각 지역교회에 있어 하느님 말씀의 선교를 맡는 사람들을 위해서 충분한 교육을 하도록 나는 마음으로부터 주교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진지한 준비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데 필요한 자신과 열성을 그들에게 보장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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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복음선교의 정신

▶ 절박한 호소

74. 나는 이 권고를 끝맺기 전에 복음선교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의 내적 태도에 대해서 긴급한 호소를 하지 않고는 넘길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 베드로, 바오로의 이름으로 나는 성령의 특은과 교회의 위임으로 참된 복음선교자가 된 사람들이 그 서명에 합당하게 의심과 두려움이 없이 복음선교가 활기 있고 실효 있는 것이 되도록 해달라고 마음으로부터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조건 몇 가지를 제시하겠습니다.

▶ 성령의 작용 아래

75. 성령의 작용 없이는 복음선교는 불가능합니다. 나자렛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 오시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성부의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이 때에 성령은 외면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의 선택과 그 사명을 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명으 시작하기 전에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의 시련을 당하려 가셨습니다(마태 4,1). "성령의 능력"(루가 4,15)에 의해 예수님은 갈릴래야로 돌아오시어 나자렛에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성서의 이 대목은 오늘 여러분이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루가 4,18-21).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 "성령을 받으시오"(요한 2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도들이 교회의 복음선교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 만방으로 향해 떠난 것은 성신강림 이후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나는 모든 인간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주어라"(사도 2,17)라고 말한 요엘 예언자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대해서 말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가득차 있었다(사도 4,8). 바오로도 사도직에 헌신하기 전에 "성령을 가득히 받았습니다"(사도 9,17). 이와 같이 스테파노가 부제직에 선정되고 그 후 순교하던 때도 그와 같았습니다(사도 6,5-10).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열 두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말할 것을 가르치신 성령은 "모든 청중에게 내려오셨다"(사도 10.44).

"성령의 인도를 받아" 교회는 점점 성장하였습니다(사도 9,4). 성령은 교회의 혼입니다. 신자에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신비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입니다. 성령은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다 같이 성령이 인도하시는대로 의지하는 선교자 안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스스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이 바른 말을 말하게 하고 동시에 듣는 사람의 마음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도록 그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복음선교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 것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은밀한 활동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완전한 준비라도 성령이 없이는 아무 효과도 없습니다. 설득력 있는 화술이라해도 성령이 없이는 무력합니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으로 세밀하게 세운 이론이라도 성령이 없이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령께서 특별히 교회 안에서 작용하시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신자들은 성령을 더 잘 알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 모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교회활동의 모든 면에서 작용하신다면 특히 복음선교 사업 안에서 더욱 작용하십니다. 복음선교가 시작된 것이 성신강림날 아침이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복음선교 활동의 주동은 성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선교를 위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분도 그 분이고, 사람의 깊은 양심 속에서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4항). 그러나 동시에 성령은 복음선교의 목적이고 종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인류를 일으키시고 복음을 전해주십니다. 복음선교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필연적으로 바라는 다양성에 대하여 일치를 도모케 하시는 것도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복음은 세계 속에 지속하게 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증표이며 시대의 표지가 되기에 복음선교는 이 표지에 의해서 인간생활을 비추어 줍니다.

1974년에 개최되었던 시노두스에 있어서 복음선교를 위한 성령의 지위를 강조하였습니다만 사목자, 신학자, 평신도들의 오늘의 복음선교를 위해 활동하기는 성령의 성격과 상태를 보다 철저하게 연구하기 바란다는 소망도 표명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로서도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복음선교자들이 신앙과 열의로써 끊임 없이 성령께 기도하고, 그들의 계획과 창의와 복음선교 활동의 결정적 인도자이신 성령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도록 권고하는 바입니다.

▶ 참된 증거

76. 복음선교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현대인들은 [진정한 것]에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가짜]나 [거짓]을 싫어하고 진실과 정직을 찾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표지(標識)]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참으로 믿고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든지 않하든지 상관없이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믿고 있는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까?][당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말로 알리고 있습니까?] 생활의 증거는 선교의 참된 효과를 거두는데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하겠습니다. [공의회가 지난지 10년이 되는 오늘, 교회의 상태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라고 나는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과연 교회는 세계 속에 튼튼히 자리잡고 세계의 주목을 이끌만큼 자유롭고 독립된 것입니까? 교회는 사람들과 동시에 하느님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관상이나 신심에 있어 지난날 보다 열심하며 포교활동, 애덕사업, 해방활동에 열성을 다하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교인들의 일치를 위해서 보다 촉진적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믿기 위해서"(요한 17,21) 이 일치에 의한 공도의 증거는 중요합니다. 이상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를 다스리게 하기 위해 성령에 의해서 정해진 주교들, 주교들의 협력자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고 지역교회에 영적 활력을 주는 사제 및 부제들에게 이 권고를 보내는 바입니다. 다음에는 성덕에 불림을 받고 복음의 진복을 증거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수도자들, 현세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신자들과 그 가정, 지도층, 젊은이들, 어른들, 가난하지만 신앙과 희망에 가득찬 분들, 교회와 사회 속에서 복음선교의 역할을 자각하고 있는 신자들에게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복음선교의 열성은 거룩한 생활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한 것처럼 [선교자는 선교하므로 성덕에 도달해야 합니다. 성덕은 기도와 특별히 성체성사의 사랑으로 배양됩니다](사제의 직무와 생롸에 관한 교령 13항).

역설적이지만 현대 세계는 무수한 형태로 신을 거부하면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신을 탐구하며 신의 필요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신에 대해서 말해주는 선교자를 찾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본듯이…"(히브 11,27)선교자들은 신을 알고 있고 신과 가깝게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단순 소박한 생활, 기도하는 정신, 모든 이에게 대한 사랑,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 순명, 겸손, 해탈, 극기 등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덕의 표시없이는 우리의 말이 현대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 일치의 중요성

77. 만일 복음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선교의 효과는 매우 감소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것이 오늘의 복음선교에 있어서 크나큰 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 교리상의 논쟁이나 그리스도교 신자들간의 극한적 의견의 대립이나 상호불목으로 상처를 입는다면 어찌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되지 않겠으며 오류와 악한 표양을 받지 않겠습니까? 복음선교자들은 그리스도론이나 교회론에, 사회관이나 제도면에 있어서 견해를 달리하는 것처럼 복음선교자들이 대립하거나 불목해서는 않되겠습니다.

주님은 당신 유언으로 당신 제자들의 일치가 단순히 당신을 따른다는 증거만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성부께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치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를 믿는 신자들에게 해당하는 신앙의 강한 증거가 됩니다. 복음선교자들인 우리들은 신자들에게 아무런 건설을 주지못하는 분쟁으로 분열되고 헤어진 인간의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논쟁을 초월해서 공동으로, 그리고 성실하게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복음선교의 운명을 교회가 보여주는 일치의 증거와 직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책임의 원천인 동시에 위안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는 모든 신자들의 일치가 복음선교의 길이요 수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사업 자체를 방해하는 중대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강력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분열은 모든 피조물에 복음을 전하여야 할 가장 성스러운 사명에 손해를 끼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6항). 그 때문에 성년을 공포하게 될 때 나는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화해하는데 먼저 신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해방자로서 인정하고, 사랑과 진리의 성령 안에 사람들을 일치시켜 주시는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일치가 회복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완전한 일치를 회복하는 노력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이루어지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성 바오로는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로마 5,5)라고 보장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일치를 달성하기 위해서 더욱 더 많은 기도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나는 시노두스의 제3총회에서 교부들이 표명한 것과 같이 아직 완전한 일치에 도달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세례와 같은 신앙의 유산을 가진 우리의 형제들과 보다 큰 성의를 가지고 협력하고자 한 표명을 나의 원의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복음선교의 활동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보다 큰 증거를 세계 앞에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우리에게 내려져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라는 의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 진리의 봉사자

78. 우리에게 위탁된 복음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요한 8,3) 진리요, 그것만이 마음의 평화를 주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사람들이 찾는 것은 이 진리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관한 진리, 인간과 그 신비의 운명에 관한 진리. 우주에 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서 어려운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결코 진리의 주인도 아니고 소유주도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의 보관자요 전달자이며 봉사자들인 것입니다.

복음선교자는 진리에 대해서 경건하기를 바랍니다. 선교자가 연구하고 전하는 진리는 계시된 진리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에게서 오는 첫째가는 진리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어떠한 자기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남에게 전해야 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경탄케하기 위해, 또는 독창이나 자만을 과시하기 위해 진리를 배반하거나 가장해서는 안됩니다. 진리를 거부하거나 게으른 탓으로 진리탐구를 소홀히 하거나 혹은 자기의 편리나 두려움 때문에 계시된 진리를 흐리게 해서도 안됩니다. 선교자의 할 일은 진리탐구를 열심히 하고, 아낌없이 진리에 봉사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목자인 우리들이 할 일은 진리를 보존하고 보호하며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탁월하고 거룩한 많은 목자들이 이 진리에 대한 사랑의 모범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웅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주의 깊게 진리를 옹호하고 충실히 선교하는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신학자, 성서학자, 역사학자 여러분 복음선교의 사업을 위해서는 여러분의 쉴 새 없는 연구와, 그 진리 전달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 진리 전달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 진리는 바로 하느님의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언제나 능가하는 것입니다.

부모되는 분과 교사 여러분, 오늘날 많은 의견의 대립이 여러분이 맡은 임무를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자녀들과 학생들에게 종교적 영성적 진리를 포함한 진리를 발견케 하는 데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 사랑의 정신에서

79. 복음선교 사업에 있어 선교자는 선교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날로 증가되는 형제적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선교자의 모범인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데살 전 2,8). 이러한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었겠습니까? 이 사랑은 교육자의 사랑 그 이상의 것이고, 바로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복음선교자나 교회 건설자에게 이러한 사랑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사랑의 표시는 진리를 주고 싶고, 일치에로 인도하고 싶은 마음의 표시입니다. 사랑의 표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 남김없이 자기를 바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랑의 표시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복음선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종교적 정신적 환경을 존중하고 생활양식에 대하여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양심과 확신을 존중하여 험하게 대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는 신앙이 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토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고린 전 8,9-13 ; 로마 14,15). 이미 굳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신앙심이 얕은 사람에게는 동요를 일으키고 마음의 상처를 주는 악한 표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하느님 말씀에 튼튼히 뿌리를 내린 굳은 신앙을 신자들에게 심어주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실치 못한 지식에서 생기는 의심스러운 것이나 주저되는 것을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위해서는 확실한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신자라면 그러한 확신을 얻을 권리가 있습니다.

▶ 성인들의 열성을 본받아

80. 나의 호소는 사도직 생활에 일생을 바친 위대한 복음선교자들이 열심에서 암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이번 성년동안 새로 시복(諡福) 시성(諡聖)된 분들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선교를 위해 많은 장애를 극복한 분들입니다. 이러한 장애는 오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인 열성의 부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내면에서 생기는 것인 만큼 중대한 장애가 됩니다. 즉 피로, 권태, 타협, 무관심 같은 형태로 나타나 특히 기쁨도 희망도 없는 상태의 표시가 됩니다.

복음선교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마음의 복음선교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열성을 기르고 그것이 커지도록 노력하기를 권고합니다(로마 12,11). 이러한 열성으로 먼저 복음선교의 장애가 되는 구실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가장 나쁜 핑계는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핑계의 구실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강제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한다던가, 모든 사람은 바른 마음만으로 구원될 수 있는데 어찌하여 복음을 가르쳐야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과 역사는 [말씀의 씨]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하느님 자신이 뿌린 씨 안에 이미 복음이 들어 있어서 다시 복음을 심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 문헌을 잘 연구하는 사람은 이상 말한 것과 같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의 양심에 무엇인가를 강제로 요구한다면 확실히 잘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에 복음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대방의 자유선택을 존중하여 [강제적 혹은 부당하고 정당치 못한 설득이라고 생각되는 온갖 종류의 행위](신앙 자유애 관한 선언 4항)를 하지 않고 알린다면 종교자유의 침해라가보다 완전한 자유의 존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알게된 기쁜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 타인의 자유를 해치는 죄가 되겠습니까?(신앙의 자유에 관한 선언 9-14항) 어찌하여 허위, 오류, 타락, 외설만이 사회 홍보 수단의 파괴적 선전과, 입법에 의한 허용, 착한 사람들의 비겁, 악한 사람들의 뻔뻔한 자세로 사람들에게 억지로 주입 선전하도록 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경건스럽게 알리는 것은 복음선교의 권리이며 의무이기도 합니다. 또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권리입니다. 이 구원은 하느님만이 원하시고 아시는 방법으로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7항) 그러나 성자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의 말씀과 생애를 통해 구원의 보편적 방법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신의 권위를 가지고 이 계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복음선교를 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말을 기도하면서 음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여도 하느님의 자비하신 은덕으로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게으르고 겁이나고 부끄러워서"(로마 1,16)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때 과연 우리 자신이 구원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복음의 씨가 선교자의 입을 통해 결실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배반하는 것입니다. 씨가 나무로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열렬한 정신을 가지도록 합시다.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전교의 기쁨을 간작하기로 합시다. 요한 세자, 베드로, 바오로 기타 다른 사도들을 위시하여 교회사 안에서 볼 수 있는 무수한 복음의 사도들의 놀라운 내적 정열과 기쁨은 어떤 사람이나 사정으로 꺼지게 할 수 없는 내적 동력이였습니다. 그것으로 봉헌된 우리 생애의 큰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불안 속에서, 때로는 희망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현대 세계가 하느님의 기쁜소식을 받아들이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과 슬픔 속에 잠겨있는 선교자한테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기쁨 속에 열성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복음 선교자에게서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을 누리는 선교자일 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세계속에 교회를 건설하고자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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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 성년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

81. 이상 마음 속으로부터 드린 나의 호소는 바로 제3차 시노두스에 참가했던 나의 형제 주교들의 목소리에 대한 반향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년을 마지막 보내면서 보내면서 드리고 싶었던 부탁이기도 합니다. 성년에 있어서 나는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호소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신자나 비신자 할 것 없이 그들은 교회에 대해서 구원의 말씀을 기대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라건대 지방 교회에 있어서나 로마에 있어서나 하느님과 화해한 무수한 사람들로서 생긴 성년의 빛이 성년이 지난 후에도 사목 활동계획 안에서 계속 빛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세기의 전야이며,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30세기의 전야가 되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 복음선교의 기본 과제인 사목 활동의 계획을 통하여 계속 빛나기를 축원합니다.

▶ 복음선교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

82.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라아께 봉헌된 오늘 이 축일에,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지 10주년 되는 오늘 우리의 소망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라아의 마음과 손에 위탁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성신강림날 아침 성모님은 성신의 작용에 의한 복음선교의 시작을 기도하며서 지켜보셨습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새로운 복음전파의 별이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명령에 충실한 교회는 역경과 아울러 희망에 찬 오늘에 복음전파를 촉진하고 완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공동체, 가정, 여러분과 가까운 분들에게, 성 바오로께서 필립비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축복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협력해온 것을 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기쁜 소식을 수호하고 입증할 때에 나와 은총을 나누며 고생해온 여러분은 모두 항상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 지를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필립 1,3-4, 7-8)

▶ 1975년 12월 8일 |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축일에

▶ 교황 제위 13년 | 로마 성베드로 좌에서 | 교황 바오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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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자비로우신 하느님 (DIVES IN MISERICORDIA / 1980.11.30)  [10] 4133
25   가정교서 Gratissimam Sane  [5] 4095
24   베네딕토 16세 : 교황들(Summorum Pontificum)  6168
23   베네딕토 16세 : 교황 선출 규정의 일부 변경에 관하여  4146
22   베네딕토 16세 : 1970년 개혁 이전의 로마 전례 사용에 관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  [2] 2982
21   베네딕토 16세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3] 3209
20   구원에 이르는 고통 (Salvifici Doloris)  [7] 2377
19   가정 공동체  [11] 2109
18   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5] 2037
17   성체의 신비와 흠숭에 대하여  [3] 2639
16   그리스도교적 지혜 (Sapientia Christiana)  [3] 2316
15   인간의 구원자 (Redemptor Hominis)  [3] 2711
  현대의 복음선교 (Evangelii Nuntiandi)  [9] 2458
13   마리아 공경 (Marialis Cultus)  [5] 4651
12   팔십주년 (Octogesima Adventiens)  [4] 2388
11   사제 독신생활에 관한 회칙  [9] 3058
10   민족들의 발전 (POPULORUM PROGRESSIO)  [5] 2525
9   신앙의 신비 (Mysterium Fidei)  [7] 2532
8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  [5] 2596
7   어머니요 스승 (MATER ET MAGISTRA)  [7]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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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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