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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구원자 (Redemptor Hominis)
조회수 | 2,713
작성일 | 07.01.1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回勅) | 인간의 구원자 | 1979. 3. 4.

I. 위대한 유산

2천 년대를 마치면서

1.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와 역사의 중심이시다. 교회와 현대 인류의 전가족이 지금 살아가는 세계의 이 엄숙한 순간에 나의 생각과 마음은 그분께로 향하고 있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겨진 계획으로나의 경애하올 선임자 요한 바오로 1세의 뒤를 이어 로마 성 베드로의 좌에 맡겨진 보편적 봉사의 직무를 나에게 지우신 이 시기는 사실상 이미 서기 2천 년에 매우 가깝다. 미래를 예측하려는 상당한 노력이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시점에서 그 해가 인류사의 표면에 무엇을 남기게 될는지, 각 민족과 국가, 나라와 대륙에 무엇을 초래할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비록 고르지는 않으나 지구 극변까지 두루 퍼져있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게는 그 해가 대 경축년(慶祝年)이 될 것이다. 연대상의 정확성을 찾아 갖가지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고 여기는 선입견을 일단 젖혀 둔다면, 우리는 성 요한이 그의 복음 서두에 표현한 신앙의 근본 진리, 곧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1)는 말씀과 다른 대목에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2)는 말씀을 각별히 상기시키고 다시 깨우쳐 줄 그 날을 향해서 이미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어느 면에서 새로운 대립(待臨)의 계절, 기다림의 계절을 맞고 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3) 아들을 시켜, 사람이 되시고 동정 마리아께 태어나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구속행위(救贖行爲)는 하느님의 애정 깊은 계획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역사의 정점(頂點)을 기록했다. 하느님이 인류의 역사 속에 들어오셨고 인간으로서 그 역사의 배역(配役)이 되신 것이다. 그 배역은 수십억 인간 중의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전혀 유일무이한 배역이었다. 강생(降生)을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초부터 갖추어 주고자 뜻하셨던 그 비중(比重)을 인생에 부여하셨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고 당신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에 어울리며 당신의 온전한 자유에 부합한 방법으로 그 비중을 결정적으로 부여하셨다. 그리고 원죄와 인류의 죄악으로 점철된 전 역사를 돌이켜 볼 때에, 인간 지성과 의지와 마음의 오류들을 생각할 때에, 우리로서는 오로지 탄복하며 거룩한 전례에 나오는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4)는 말씀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만큼 풍성하게 부여하셨다.

▶신임 교황직의 첫 발언

2. 작년 10월 16일, 교회법상의 선출이 있은 뒤 "수락하겠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나의 감정과 생각은 다름 아닌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쏠렸다. 그리하여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께 신앙으로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께 의탁하면서 크나큰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락합니다"고 대답하였다. 오늘 나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이에게 나의 그 대답을 공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위에 언급한 강생이라는 첫째가는 근본 진리와, 내가 로마의 주교요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뽑힌 선거 결과를 수락함으로써 베드로의 좌에서 나의 특별한 임무로서 수행하게된 봉사직무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친애하올 선임자 요한 바오로 1세께서 택하신 같은 이름을 택하였다. 사실 1978년 8월 26일에 그분이 당신은 요한 바오로하고 하겠다는 말씀을 추기경단에게 하시자, 교황직의 역사상 그같은 이중 칭호를 사용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새 교황직에 대한 은총의 전조를 분명히 보았었다. 그 교황직이 불과 33일만에 끝났으므로 단순히 그 직위를 계속한다는 뜻만이 아니고 똑같은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뜻에서 그 직책이 나에게 지워졌다. 나의 존경하올 선임자께서 하신 대로 두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그분처럼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께서 교회에 남기신 위대한 업적에 갱애를 표하고 하느님의 보우를 입어 그 유산을 발전시키겠다는 나의 개인 자세를 표명하고자 한다.

나는 이 두 이름과 구 분의 교황직을 통해서 사도좌(使徒座)의 모든 전통과 20세가와 그 이전의 세기에 봉직하신 나의 선임자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나는 여러 시대를 차례로 거슬러 올라가 가장 멀리는, 교회 안에서 베드로의 좌에 전혀 특수한 위치를 부여한 사명수임(使命受任)과 봉사직무(奉仕職務)의 대열에 연결되는 것이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는 내가 직접 계승하여 일을 시작하려는 발판이 되산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언약하시고 또 보내신 성령께 한없는 신뢰와 순종을 바침으로써, 요한 바오로 1세와 함께 장차 이 두 분의 유업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수난하시기 전날 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사실은 내가 떠나 가는 것은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 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5)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와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이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7)

진리와 사랑의 성령께 대한 신뢰

3. 그러므로 나는 진리의 성령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림으로써 최근의 교황직들이 이룩한 풍부한 유업에 몸을 담는 바이다. 이 유업은 과거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형태로 새로운 교회의 의식(意識)에 깊이 뿌리를 박은 것이다. 이것은 요한 23세께서 소집하여 개막하시고 뒤에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성공리에 폐막되고 꾸준히 실천에 옮겨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분이며, 그동안 나는 바오로 6세의 활동을 매우 가까이서 지켜 볼 수 있었다. 나는 공의회 이후의 어려운 교황 재위 기간중 바오로 6세께서 보이신 심원한 지혜와 용기에 끊임없이 경탄하였고 그분의 꾸준함과 인내에도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그분은 베드로의 배[舟]인 교회의 키잡이로서 교회가 안으로부터 가라앉을 것 같던 가장 위태로운 순간까지도 하늘이 내려주신 침착과 균형을 취할 줄 아셨고 교회의 견고함을 믿는 주저할 줄 모르는 희망을 항상 보전하셨다. 성령께서 우리 시대의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에 말씀하신 바와 이 교회를 시켜 모든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은,8) 일시적으로 여의치 않는 점이 없지 않으나, 필히 갈수록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성숙하고 견고하게 만들며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세적 사명을 의식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바오로 6세께서는 [당신의 교회](Ecclesiam Suam)라는 말로 시작되는 기조 회칙(基調回勅)에서 교회의 현대적 의식(現代的意識)을 첫째 주제로 선정하셨다. 본인은 교황직의 서막을 장식하는 본 문서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이 회칙을 참조하고 이 회칙과 나를 연결시켜 보고자 한다. 교회의 의식(意識), 성령께 비추임받고 격려받으며 자신의 신적 신비와 자신의 인간적 사명과 심지어 자신의 인간적 약점까지 갈수록 깊이 헤아리는 의식, 이 의식이 교회가 지닌 사랑의 첫째 가는 원천이며 또 그래야 마땅하다. 몰론 반대로 사랑이 교회의 의식을 강화하고 심화함도 사실이다. 바오로 6세께서는 그처럼 극도로 명료한 의식을 우리에게 증거물로 남겨주셨다. 그분의 교황직을 장식한 많은 것들, 때로는 고통을 야기한 것들을 통해서 그분은 교회에 대한 사람, 공의회가 일컬은 대로 "성사와 비슷하여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標識)이요, 도구(道具)"9)인 교회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는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바오로 6세의 첫번 회칙에 대한 언급

4.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의 의식(意識)은 보편적 개방(普遍的開放)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이방인의 사도가 말한 대로 만인이 교회에서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10)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개방은,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11)라고 하신 그대로, 교회의 진리에 관한 확신 및 교회의 본질에 관한 인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사도적 활력(活力),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위촉하신 진리 전체를 온전하게 고백하고 선포하는 선교사적 활력을 주는 것도 바로 이 개방이다. 동시에 교회는 대화(對話)를 꾸준히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오로 6세께서는 회칙 [당신의 교회]에서 대화를 수행할 분야들을 명백히 구분하시면서 이것을 일컬어 "구원(救援)의 대화(對話)"라고 하셨다.12) 바오로 6세의 교황직의 프로그램을 제시한 이 문헌을 오늘 언급하면서, 나는 나의 아버지시기도 한 이 위대한 선임자께서 공의회 이후에 교회를 괴롭힌 여러 가지 내부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ad extra) 교회의 참다운 면모를 보여주실 줄 알았다는 사실을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바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인류 가족의 상당수가 인간실존의 여러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사명과 그 봉사가 인류에게 얼마나 필요한가를 깨닫게 된 것 같다. 때로는 외부에서 오는 이러한 의식이 내부에서(ab intra) 교회의 제도나 구조, 성직자들과 그들의 활동을 공격하는 비판적 태도보다 훨씬 강력했었다. 점증하는 이 비판이 여러 이유에서 기인했으며, 나아가서 그것이 반드시 교회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결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시인한다. 그 동향 중의 하나는 공의회에서 논란이 심했던 소위 개선주의(凱旋主義)를 극복하는 것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제로 교회가 "마음이 겸손하신"13) 스승의 본을 받아 겸손을 근본으로 삼아야 마땅하며, 교회의 인간적 특성과 활동을 과시하려는 모든 것에 비판적 감각을 지녀야 하며, 항상 자기를 극구 삼가야 한다는 말은 옳다. 그렇지만 비판도 정당한 한계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비판은 건설적이 못되고, 우리가 주로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충만히 누려온 진리와 사랑과 은총을 감사할 줄 모르는 소행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비판은 봉사의 자세가 아닌, 자기 의사에 따라 타인들의 의견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폭로하는 것으로서, 때로는 너무나 무분별하게 횡행한다.

바오로 6세께서 천차만별한 인간적 의견에 깃들어 있는 진리의 편린(片鱗)들을 존중하시면서도 이 배의 키잡이로서 하늘이 내리신 조화를 아울러 유지하셨다는 것은 감사드릴 일이다.14) 요한 바오로 1세를 통해서 또 그분의 뒤를 바로 이어 나에게 맡겨진 교회는 당연히 내부적 곤란과 긴장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교회는 과도한 자기비판에 대해 내면상으로 훨씬 강해져 있다. 여러가지 무사려한 비판에 대해 보다 비판적이 되었고, 각종 "신기한 것"에 대해서도 훨씬 저항적이 되었으며, 분별(分別)의 정신도 더욱 성숙해졌고, 교회의 영구적인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낼"15)줄 알게 되었으며, 자기의 고유한 신비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으며, 이상의 모든 사실로 미루어 만인의 구원을 위하는 자기의 사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16)

공동성(共同性)과 사도직

5. 표면상으로야 어떻든 간에 교회는 봉사에 대한 협력에 있어서도 사도직에 대한 각성에 있어서도 전보다 훨씬 일치되어 있다. 이 일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언급한 공동성(Collegiality)의 원리에서 비롯한다. 그리스도 친히 이 원리를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열 두 사도단(師徒團)의 바탕으로 삼으셨고, 성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하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전세계에 널리 퍼져 갈수록 수가 증가하는 주교단(主敎團)안에서 이원리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신다. 공의회는 공동성의 원리를 말로 언급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공의회는 공동성의 상설 기구(常設機構)가 설립되기 바란다는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굉장한 활력을 새로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바오로 6세께서는 주교 시노드를 설립함으로써 이 기구를 발족시켰으며, 주교 시노드의 활동은 당초부터 그분의 교황직에 새 차원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요한 바오로 1세의 교황직과 나아가서는 그분의 부당한 후계자인 나의 교황직에까지 선명하게 부상되었다.

공의회 이후의 어려운 시기에 주교단 -주로 시노드를 통해서 베드로의 후계자와의 일치를 드러냈다- 의 한 마음으로 일치된 입장은 의혹을 물리치고 전세계적 차원에서 교회를 쇄신하는 올바른 길들을 제시함으로써 이 공동성의 원리가 특히 과시되었다. 그리하여 시노드는 다른 것보다도 복음선교(福音宣敎)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에 나타나 있으며17) 이 문헌은 사도적 사목적 쇄신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서 기꺼운 환영을 받은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서거하시기 1년 전에 개최된, 교리교육(敎理敎育)을 주제로 다룬 주교 시노드의 작업에서도 같은 노선이 취해졌다. 이 작업의 결과는 아직 사도좌에 의해서 정리되어 반포될 예정으로 있다.

주교 공동성(主敎公同性)이 어떤 형태로 표시되고 발달되어 왔는가를 논하는 이 마당에서 교회 전체에 걸쳐 각국 주교회의(各國主敎會議)가 강화된 과정과 국제적 또는 대륙적 성격의 여타 공동적 기구들이 강화된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수세기에 긍한 교회의 전통을 살피건대 교구, 관구, 전국 시노드의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의 시험을 거친 이 기구들이라든가., 각 개별교구는 말할 것도 없이 수도대주교좌(首都大主敎座) 기구 같은 주교들에 의한 다른 공동적 협조의 형태들이 자체의 동질성(同質性)을 온전히 가각함과 동시에 교회의 세계적 일치 안에서 자체의 고유한 원형(原型)을 의식하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공의회의 사상이었으며 바오로 6세께서 부단히 실현하시려는 이념이었다. 이같은 협력과 책임분담의 정신이 사제들에게도 퍼지고 있으니, 공의회 이래로 생겨난 여러 사제 회의(司祭會議)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같은 정신이 평신도들에게도 확산되어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기존 단체들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흔히 전과는 다른 노선과 탁월한 활력을 갖춘 세 단체들을 출현시키고 있는 중이다. 나아가서 교회에 대한 자기 책임을 의식하는 평신도들은 교구 시노드와 본당 교구 사목회의(司牧會議) 분야에서 사목자들이나 봉헌된 생활을 하는 단체 대표들과 협력하는 데 기꺼이 투신해 왔다.

나는 나의 교황직을 시작함에 있어서 이 모든 일들을 염두에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형제 자매들을 따뜻이 격려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업적과 교회에 이 생명의 새 물결, 의혹과 부패와 위기라는 증상보다 훨씬 강력한 움직임을 일으키신 나의 위대한 선임자들의 업적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자 한다.

그리스도교 일치에 이르는 길

6. 교회일치의 새 방향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창의적 노력에 관해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잊을 수 없는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그리스도교 일치의 문제를 복음적 명료성에 입각하여 우리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서 오는 단순한 귀결로 제시하셨다. 이 뜻은 예수께서 여러 기회에 공표하신 바 있거니와 당신이 죽으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올리신 기도에서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8) 라는 말씀으로 각별히 표명하신 바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으로 이 요청에 정확하게 응답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리스도교 일치 추진 사무국]의 활동을 이용하여 이 일치를 성취하는 어려운 첫 발을 내디디셨다. 우리는 그 길을 상당히 멀리까지 간 것일까? 상세한 답변을 할 뜻은 없지만 우리는 실제적이고 중대한 진전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도 다음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항구하고 인내롭게 일해왔고 다른 그리스도교회들과 공동체들의 대표자 역시 우리와 더불어 함께 수고해 왔다. 이 일에 대해 우리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세계가 처한 현재의 역사적 상황하에서는 일치 운동의 문제를 두고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보는 유일한 방도는 솔직하고 꾸준하게, 겸허하고 또한 과감하게 보다 가까워지고 일치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뿐이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친히 모범을 남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거나 도중에 발생할 만한 곤란 때문에 용기를 잃지 말고 꾸준히 일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성실하지 못하게 되며 그분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를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곤경에 부딪쳤거나 최초의 일치운동노력이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여기기 때문에 원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이러한 노력이 복음에 해를 끼치며 교회 내의 균열을 더 크게 만들고 신앙과 윤리문제에 사상적 혼란을 가져오며 특정한 무관주의(無關主義)로 끝나고 만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의견들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자기네 우려를 기탄없이 발표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 만 이 면에서도 정당한 한계가 지켜야만 한다. 교회 생활의 이 새로운 단계가 우리에게 특히 주의깊고 심원하고 책임있는 신앙을 요구함이 사실이다. 참다운 일치 운동은 개방된 자세와 가까워지려는 노력과 대화를 할 줄 아는 능력과 진리의 복음적이고 그리스도교 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노력을 뜻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꾸준히 고백해 왔고 가르쳐 온 신적 진리의 보고(寶庫)를 포기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가모시키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뜻도 없다. 어떤 동기로든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신자들의 보편적 일치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이 질문을 다시 제기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인간적 약점이 많고 과거 수세기의 과오가 아무리 심하다 할지언정, 최근에 성령께서 말씀하셨고 공의회동안 우리가 들은 바를 통해서 밝혀진 주님의 은총을 우리가 감히 불신할 수가 있을까?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도께서 우리를 두고 "내가 오늘의 내가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19)고 하신 웅변 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방금 이야기 한 바는 비록 정도와 양상이 다르게라도 비그리스도교적 종교대표자들과 가까워지려는 활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대화와 접촉, 공동 기도, 인간 영성( 性)의 보고(寶庫)를 추구하는 노력을 모색하고 있다. 아다시피 이 종교들에는 인간 영성의 보고가 없지 않다. 사실 비그리스도교적 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의 확고한 믿음 -신비체의 볼 수 있는 경계 밖에서 역사하시는 진리의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믿음-이 그리스도 신자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 종종 있지 않은가? 그들의 믿음을 보고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들에 대해, 하느님이 계시하시고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에 대해 그토록 빈번히 의심에 빠지고 윤리 원칙에 그토록 이완되어 있으며 도덕적 유약(道德的柔弱)의 소지를 남기고 있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는 심성, 모든 제도를 분석하려는 심성, 옳은 것을 인정하려는 심성을 갖추는 이은 고귀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잃는다거나,20) 윤리원칙들이 약화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윤리원칙들이 결여될 경우에는 전체 사회의 생활에 곧 영향을 미치고 개탄할 결과들을 초래하게 된다.

주석

1. 요한 1,14. [△]
2. 요한 3,16. [△]
3. 히브 1,1-2. [△]
4. 부활성야의 [부활 찬송(Exsultet)]. [△]
5. 요한 16,7. [△]
6. 요한 15,26-27. [△]
7. 요한 16, 13. [△]
8. 참조 : 묵시 2,7. [△]
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1항. [△]
10. 에페 3,8. [△]
11. 요한 14, 24. [△]
12. 교황 바오로 6세, 회칙 [당신의 교회(Eccesiam Suam)]AAS 56(1964) 650ff. [△]
13. 마태 11,29. [△]
14. 여기서 바오로 6세 교황 재임기의 중요한 문헌들을 열거할 필요가 있겠다. 1978년 성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미사 강론중 바오로 6세 친히 열거하신 바 있다. 회칙 [당신의 교회(Ecclesiam Suam)](AAS 56 <1964> 609-659); 사도 서한 [그리스도의 무궁한 부(富)(Investigabiles Divitias Christi)] (AAS 57 <1965> 293-301); *[사제 독신생활에 관한 회칙(Sacerdotalis Caelibatus)](1967); [장엄 신앙고백](AAS 60 <1968> 435-445); *[산아조절에 관한 회칙(Humanae Vitae)](<1968> 사도직 권고 [공의회 폐막 5주년에 즈음하여(Quinque jam Anni)](AAS 63<1971> 97-106); *사도적 권고 [수도생활의 쇄신(Evangelica Testificatio)](1971); 사도적 권고 [자부적 호의(Paterna cum Benevolentia)](AAS 67 <1975> 5-23; *사도적 권고 [크리스찬의 기쁨(Gaudelte in Domino)](1975); *사도적 권고[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1976). (*한국어 번역본<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이 발간되어 있는 문헌; 역주) [△]
15. 마태 13,52. [△]
16. 디모 전 2,4. [△]
17. 교황 바오로 6세,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 [△]
18. 요한 17, 21. 참조 : 17,11.22-23; 10,16; 루가 9,49,50,54. [△]
19. 고린 전 15,10. [△]
20. 참조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 (Dei Filius)], 제3장 신앙(De fide), 규정 6. [△]
460 76%
II. 구속(救贖)의 신비


▶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7. 금세기의 공의회가 교회가 나갈 길로 설정하였고, 고 교황 바오로 6세께서 그분의 첫 회칙에서 지적하신 길은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길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이 새로운 단계에서 우리는 마땅히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방도로 이 길을 계속 나아가야 하는가? 다가오는 2천년대의 종막과 연관된 교회의 이 새로운 대림절(待臨節)에 우리는, 성서가 "영원한 아버지"(Pater futurisaeculi)1)라고 일컬은 분에게 보다 가까이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몇번이나 내리신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2) -이 말씀은 나의 양떼의 목자가 되라는 뜻이다-는 명령과 다시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 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3)하신 명령에 해당하는 부르심을 입어 새 교황이 신앙과 순종의 정신으로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마당에서 필히 자신에게 제기해야 하는 근본되는 질문이다.

사랑하는 형제들과 자녀들이여, 이 질문에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대답은 이러해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마음이 향할 유일한 방향은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 외에는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4)라는 말씀을 거듭하면서 그분을 향하여 서고자 한다. 교회의 의식(意識)을 통해서, 이 자기의식(自己意識)의 모든 지맥(支脈)을 통해서, 교회가 자신을 표현하고 발견하고 확인하는 모든 활동 분야를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을 목표로 삼아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분은 "머리"이시며,5)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며"6) "길이요 진리"7)이시자 "부활이요 생명"8)이시며, 그분을 뵈오면 곧 아버지를 뵙는 것이요,9) 협조자가 우리에게 오시어 진리의 성령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기 위하여10) 십자가상의 죽음과 하늘로 오르심으로 떠나 가셔야 했다.11) 그분에게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고가 감추어져 있고"12) 교회는 바로 그 분의 몸이다.13)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와 비슷하다. 즉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표지이요 도구인 것이며14) 이 일치의 원천이 그분, 바로 구원자이신 그분이다.

교회는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여 듣기를 그치지 않는다. 교회는 그 말씀을 끊임없이 재독(再讀)한다. 교회는 크나큰 신심을 갖고서 그분의 생애의 세밀한 면을 일일이 복원(復元)시킨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베드로와 함께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5)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건넨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인간으로서도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의 생애, 그분의 인간성, 진리에 대한 충실, 만인을 포용하는 사랑이 말을 한다. 나아가서 십자가상의 그분의 죽음 -그분의 고난과 자기포기의 불가사의한 발자취- 이 말을 한다. 교회는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을 회상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그것을 교회의 일상생활의 내용으로 삼는다. 또한 끊임없이 성찬(聖餐)을 거행하고 거기서 "생명과 거룩함의 샘"16)을, 은총과 하느님과의 화해의 표지를,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보증을 발견하는 것도 교회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친명(親命)을 받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살며, 지칠 줄 모르고 그 신비에 부착하며, 자기의 스승이시오 주님이신 분의 이 신비를 인류, 즉 민족들과 국가들, 연이은 세대들과 인간 개개인에게 가져다 줄 방도들을 모색한다. 이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17)고 한 사도의 말씀을 다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교회는 교회의 생활과 사명의 근본원리가 되어 온 구속(救贖)신비의 테두리를 떠나지 않는다.

▶ 구속은 새로운 창조


8. 세상의 구원자! 창세기에서 천지창조에 관해서 이야기하며 몇번이나 거듭하여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18)고 하던 창조의 근본 진리가 그분에게서 새롭고 훨씬 놀라웁게 계시되었다. 선(善)은 지혜와 사랑께 기원을 두고 있다. 하느님이 사람을 위해 만드신 세계,19) 죄가 들어오자 "제 구실을 못하게 된"20) 가견적(可見的) 세계는 본래 지녔던 지혜와 사랑이신 신적 원천과의 유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회복하였다. 참으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21) 이 유대가 인간 아담에 의해서 끊어졌듯이, 이 유대가 다시 이어진 것도 인간 그리스도에 의해서였다.22) 20세기에 사는 우리야말로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23)과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24)과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 사도의 웅변적인 말씀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특별히 금세기에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영역에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거창한 진보가 또한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밝혀보이고 있지 않은가? 급속한 공업화 분야에서 빚어지는 자연 환경 오염의 위협이라든가, 끊임없이 거듭거듭 발생하는 무력 충돌이라든가, 원자탄, 수소탄, 중성자탄 및 이와 유사한 무기들의 사용으로 자멸(自滅)할지도 모르는 전망 등 몇가지 현상들만 지적해도 충분하다. 새 시대를 맞는 세계, 우주 여행의 세계, 과학과 기술공학상으로 미증유의 성과를 달성한 세계는 동시에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25) 세계,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26) 세계가 아닐까? "현대세계"(現代世界)를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인간이라는 가견적 세계의 가장 중요한 핵심에 도달하였다. 그리스도처럼 인간의식의 심층에 뚫고 들어가서 인간의 내면에 접함으로써, 성서와 성서 외의 용어로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그 실재에 도달한 것이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인 방법으로인간의 신비 속에 들어가신 분이시다. 그래서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음 가르침은 참으로 옳은 것이다.

"사실, 혈육을 위하신 '말씀'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는다. 첫째 인간 아담은 미래의 인간, 즉 주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로마 5, 14). 새 아담 그리스도는 성부(聖父)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그 계시(啓示)로써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주신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골로 1,15)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아담의 후손들에게 최초의 범죄 때부터 이지러졌던 하느님의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지만 소멸시키지 않으셨으므로 우리 안에서도 인간 본성은 자동적으로 고상한 품위에까지 들어 높여졌다. 성자(聖子)께서는 당신의 화신(化身)으로 어떤 의미에서 당신을 모든 사람들과 일치시키신 것이다.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저력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意志)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참으로 우리 중의 한사람이 되셨으며 죄를 빼고서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비슷하셨다."27) 그분이 바로 인간의 구원자이시다.

▶ 구속 신비의 신적 차원


9.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뽑은 이 놀라운 문구를 다시 한번 음미하면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하게 해 주신 분이심을28) 잠시도 잊지 않는다. 그분이 화해하게 해 주셨고, 그분만이 화해하게 해 주실 수 있었다. 그분만이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채워드릴 수 있었으며, 태초부터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세상의 온갖 부(富)를 주시며 "하느님의 모습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29) 사람을 만드셔서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심으로써"30) 밖으로 표명하신 아버지의 부성(父性)을 채워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첫 계약을 깨뜨리고31) 하느님이 "또한 여러 번 사람들과 맺으신"32) 훗날의 계략들을 깨뜨림으로써 어느 면에서 인간에게 거부당했던 하느님의 사랑과 부성을 그분이 채워드렸고 또 그분만이 채워드리실 수 있었다. 세상의 구속 -창조를 새롭게 한 위대한 사람의 신비33)- 은 그 가장 깊은 뿌리에 들어가 보면 인간 "마음" -"맏아들의 마음"- 안에 이루어진 정의(正義)의 충만한 실현이다. 이것은 그 정의가, 영원으로부터 맏아들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로 예정되었고34) 은총에 불리고 사랑에 불림 받은 많은 인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기 위함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시오 나자렛의 요셉의 아들로 여겨지시던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하직하신" 갈바리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영원한 부성의 또 하나의 참신한 발로(發露)였으니, 이로써 하느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진리의 성령"35)을 주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와 다시 가까워지시고 각 사람과 다시 가까워지셨다.

구속의 신비에 지울 수 없는 도장을 찍는, 아버지의 계시와 성령의 부어주심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를 설명한다. 거기서 창조(創造)의 하느님이 구속(救贖)의 하느님으로 계시되신다. "진실하신"36) 하느님, 창조의 날에 드러내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 성실하신 하느님으로 계시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정의가 요구하는 바는 무엇이나 다 이루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다."37) 성자께서 죄라면 아무것도 모르시면서도 "죄있는 분으로 여겨지셨다면", 그것은 오로지 항상 창조계 전체보다 위대한 사랑, 하느님 자신인 그 사랑을 계시하기 위함이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38) 무엇보다도 우선 사랑은 죄보다, 약점보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39)보다 위대하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사랑은 항상 일어나 달려 갈 준비가 되어 있고, 방탕한 아들을 맞으러 달려 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40)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41)에로 불리움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42) 항상 기다리며 찾는다. 이 사랑의 계시를 자비(慈悲)라고도 일컫는데43) 인간의 역사에서 이 사랑과 자비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형상과 이름을 취했던 것이다.

▶ 구속 신비의 인간적 차원


10.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불가해(不可解)한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生)은 무의미하다.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 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이것이 구속 신비의 인간적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에 깃들어 있는 위대함과 존엄성과 가치를 다시 발견한다. 구속의 신비 안에서 인간은 새로 "표현되며" 어느 면에서 새로 창조된다. 인간이 새롭게 창조된다.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44) 무릇 인간으로서 자신을, 자기 존재의 즉각적이고 부분적이며 때로는 피상적이고 심지어 가공적(架空的)이기까지 한 척도와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안정과 불확실, 자신의 약함과 죄많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그대로 안고 그리스도께 다가가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 전체로 그리스도께 몰입하여야 한다.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강생(降生)과 구속(救贖)의 실재 전부를 "자기것으로 삼고" 거기에 동화(同化)하여야 한다. 만일 인간 내면에 이 깊은 진전이 이루어진다면 그 결실로 인간은 하느님을 흠숭할 수 있을뿐더러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깊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인간이 그토록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다면,45)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느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시었다면"46) 창조주의 눈에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이겠는가!

사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그 깊은 경탄을 일컬어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달리는 그리스도교라고도 일컫는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이 경탄이야말로 세계 안에서 행하는 교회의 사명, 더더욱 "현대 세계 안에서" 행하는 그 사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경탄이야말로 그리스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이 경탄은 동시에 하나의 신념이자 확신이기도 한데, 이 확신은 그 근본이 신앙에서 비롯되는 확신이지만, 실상은 신비롭고 드러나지 않는 양상으로 진정한 인본주의(人本主義)의 모든 부면에 생기를 주고 있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이 경탄은 인간과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위치-말하자면 그분의 특정한 시민권(市民權)-를 확고히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부단히 관조함으로써,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속(救贖)이 인간에게 그의 존엄성이 결정적으로 회복시켜 주었음을 신앙의 확신으로 깨달아 안다. 또한 그 구속이 세계 안에 사는 그의 인생에 의미를, 죄 때문에 상당한 범위까지 손상되어 있던 의미를 되돌려 주었음을 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구속이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는 빠스카 신비 속에서 성취되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도 그렇지만 특히 현대에 교회가 할 근본 역할은 인류의 시선(視線)을 똑바로 돌리는 것, 전인류의 의식(意識)과 경험을 하느님의 신비로 향하여 방향잡아 주는 것, 만인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구속의 심연(深淵)에 친근해지도록 돕는 것이다. 동시에 안간의 가장 깊은 영역, 즉 인간의 마음과 양심과 사건들의 영역에 관여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신비는 교회 사명과 그리스도교의 기초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지녀야 할 본격적이고 보편적인 의식(意識)을 형성키 위해 굉장한 작업을 하였고 그것을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당신의 첫 번 회칙에 기술한 바 있다. 교회에 의한 이 의식(意識) 또는 교회의 자기의식(自己意識)은 "대화를 통해서" 형성된다. 그리고 이 대화가(對話)가 일종의 객담(客談)으로 변하기 전에"타자(他者)들" 즉 우리가 말을 나누고자 하는 상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적절하고도 시의 에 맞게 공의회는 이 지구(地球)를 여러 종교(宗敎)들로 분포된 한 편의 지도(地圖)로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자기 의식을 형성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데 세계 종교들의 분포를 알려주는 이 지도에는 이 시대만의 특색을 이루는 전대미문의 현상이 두껍게 채색되어 있으니, 계획되고 조직적이고 정치체제로서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무신론을 위시해서 각양각색의 형태를 띠고 있는 무신론(無神論)의 현상이 그것이다.

종교에 관하여 말하게 된다면 우선 태초부터 인간의 역사와 직결된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종교를 말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 여러 가지 비(非)그리스도교 종교들을 다루게 되며, 끝으로 그리스도교를 논하게 된다.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문헌을 보면 위대한 정신적 가치들에 대해서와 정신의 우위성(優位成)에 대해서 깊은 존경을 표하고 있다. 이 정신적 가치들과 정신의 우위성이 인류 생활에 있어서 종교로 표현되고 나아가서는 도덕으로 표현되며 문화전반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 교회의 교부(敎父)들이 여러 종교가 하나인 진리를 여러 가지로 반영하고 있으며, "말씀의 씨앗들"47)을 안고 있다고 본 것은 참으로 옳았다. 그 동정(道程)이야 각기 다르지만 인간정신의 깊은 염원이 추구하는 단일한 목적이 거기에 나타나 있으니,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감으로써 인간성의 완전한 차원 또는 달리 말하여 인생의 완전한 의미를 찾는 노력으로 그 염원이 표현되어 있다. 공의회는 유다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그리스도신자들에게로 신앙이 거슬러 올라가는 이슬람의 신도들에게도 존경을 표하였다.48)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문호개방은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비, "과거의 모든 세대에 (하느님께) 감추어져 있다가"49) 때가 되어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되고 그 뒤 모든 시대에 계속해서 계시되기로 예정되었던 신비를 보다 오나전히 깨닫게 만들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을 인류에게 완전히 계시하셨고 인류와 결정적으로 가까워지셨다.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과 자기가 들어 올려진 그 높은 경지와 자기 인간성의 탁월한 가치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둘렝에 모여 단결하여야 한다. 각개의 그리스도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의 생활과 전통, 구조와 규율이 다채로운 만큼 이 모든 분야에 일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잘 알고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길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려는 효과적인 작업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에 있어서는 즉각 단결하고 우리의 일치를 과시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우리는 일치 단결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해야 한다. 구속의 신적 차원 및 인간적 차원을 밝혀 보여야 한다. 지칠줄 모르는 끈기로,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달성하였고 계속해서 달성할 수 있는 존엄성을 위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이 존엄성은 인간이 하느님의 양자(養子)로 입양된 은총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또한 인간성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진리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인간성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진리는 현대 세계의 공통된 의식에서 근본적으로 중요시되어 온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재의 비추임을 받음으로써 우리에게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친히 인간에게 위탁하신 사명(使命)에 대하여 확고한 원리이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신다. 우리는 모두 이 사명을 짊어지고 우리의 모든 역량을 여기에 쏟아야 한다. 이 일은 어느 때보다도 현대의 인류에게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 사명이 오늘날 과거 어느 때보다 커다란 반대에 부딪치고 있는 것으로보인다면, 그것은 이 사명이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욱 필요하고,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더욱 기대되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과 은총을 십자가에 연결시키신 하느님의 "경륜"(經綸)의 신비와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50)고 하신 말씀과 한 걸은 나아가서 "세속의 자녀들이 ‥‥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51)고 하신 말씀에는 까닭이 없지 않다. 우리는 이 꾸지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서, 교회사(敎會史)에 수시로 나타났었고 오늘날도 볼 수 있는 "하느님의 줄기찬 백성"처럼 되고자 하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서로 돕고, 현세대의 형제자매들, 나라와민족들, 국가와 인류, 개발 도상국가들과 풍요한 나라들을 돕는 위대한 사명에 의식을 갖고서 가담하고자 하는 바이다. 간단히 말해서 누구나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52)을 알도록 돕는 사명을 다하고자 하느니, 이 복음은 모든 이를 위해 있는 것이요 모든 사람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 교회의 사명과 인간의 자유


12. 사명을 함께 하는 이 일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결정하신 원칙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 일치로 말미암아, 완전무결한 상통(相通)이 이루어지기 전에라도 자기들을 이미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사도적(使徒的)이고 선교적(宣敎的)인 일치, 선교적이고 사도적인 일치이다. 이 일치 덕분에 우리는 모든 종교들에게 나타나는 인간 정신의 위대한 유산에 함께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이 천명한 그대로다.53) 또한 이 일치 덕분에 우리는 모든 문화, 모든 이데올로기상의 개념,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존경과 존중, 그리고 사도들의 시대 이래로 선교자세와 선교사의 자세의 특징을 이루어 온 분별심(分別心)을 갖고서 거기에 접근한다. 이것은 성 바오로와 특히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에서 행한 연설54)만 예서(例擧)하는 것으로 족하리라고 본다. 선교적 자세는 항상 "사람의 마음 속"55)에 있는 것, 인간이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들을 두고 자기 정신의 심부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깊이 존중하는 데서부터 비롯한다. 이것은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56) 성령께서 인간 안에 이룩해 오신 것이면 모두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선교사명(宣敎使命)은 결코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우는 것이요 참신한 건설이다. 실제로는 언제나 이 고귀한 이념에 온전히 부합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사명 수임(使命受任 : missio)으로 비롯되는 회개(悔改)라는 것이어디까지나 은총(恩寵)의 역사(役事)라는 것과 인간은 바로 회개함으로써 자신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현대의 교회는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제 1 부와 제 2 부에서 천명한 모든 사항을 극히 중대시한다.57)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가 우리에게 일종의 의무를 부과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해서 각별히 책임감을 느낀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법도에 따라 교회는 이 진리의 수호자이자 교사이다. 이것은 교회가 이 진리를 가장 정확하고 순수하게 수호하고 가르칠 수 있기 위해서 성령의 전혀 특수한 보우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58) 이같은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최초의 복음선포자(福音宣布者)59)이신 그리스도를 우러러보며, 그분의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증거가들을 우러러본다. [종교 자우에 관한 선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뒤를 이은 사도들이, 인간으로부터 오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온 이 진리-"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가르침"60) 곧 아버지의 가르침이다-를 선포할 때에, 온전히 자신의 정신력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인간을 존중하고 그의 지성과 의지, 그의 양심과 자유를 깊이 존중하셨다는 것을 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61) 그리하여 인격의 존엄성이 진리 선포의 내용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반드시 말로 명시되지는 않지만 인간 존엄성에 대한 태도로 미루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특별한 요구에 매우 부합한 것으로 보인다. 각양각색의 제도나 개개인이 자유라고 믿고 선전하는 것이 모두 인간의 참다운 자유는 아니므로, 교회는, 자기가 받은 바 신적 사명에 의해서, 더욱더 이 자우의 수호자로서 처신하게 된다. 참다운 자유야말로 인격의 진정한 존엄성의 조건이자 토대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현대를 포함해서 각 시대의 인간을 만나실 때마다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62) 이 말씀에는 근본되는 요구와 경고가 둘 다 들어있다. 진정한 자유의 조건이 되는 진리에 대해서 정직한 관계를 가지라는 요구가 들어있고, 일체의 환성작 자유, 일체의 피상적이고 일방적인 자유, 인간과 세계에 관한 온전한 진리에 접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유를 피하라는 경고가 들어 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진리에 기초를 둔 자유를 주시는 분, 인간의 영혼과 마음과 양심에서 이 자유를 빼앗고 위축시키고 뿌리채 뽑아버리는 사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스도 덕분에 또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자우에 도달했고 외적인 속박에 처해서까지 이 자유를 과신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 사실이 놀랍게 확인되어 왔고 지금도 확인되고 있는 중이다.

예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죄수로 나타나셔서 산헤드린의 대표자들이 예수를 거스려 제기한 고소에 대해 심문을 받았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던가?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63)고 대답하시지 않았던가? 결정적인 순간에 재판관 앞에서 하신 이 말씀은 그분이 일찍이 하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는 말씀을 재차 확인하신 것 같다. 사도들 이래로 그 많은 세기를 두고 그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진리 때문에 심판을 받는 사람들의곁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계시지 않았던가? 그리고 진리 때문에 단죄받은 사람들과 더불어 죽음의 길을 가시지 않았던가? 그분이 "영적으로 참되게"64) 사는 사람들을 위해 꾸준히 대변하시고 변호하시는 일을 중단한 적이 있던가?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그치지 않고 대변하시고 변호하시듯이, 인간의 역사 앞에서도 결코 중단하지 않고 대변하시고 변호하신다. 그리고 교회도, 교회의 인간적 역사의 일부를 이루는 온갖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뒤를 따라 같은 말을 그치지 않는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65)

▶ 주석


1. 이사 9,6. [△]
2. 요한 21,15. [△]
3. 루가 22,32. [△]
4. 요한 6,68. 참조 : 사도 4,8-12. [△]
5. 참조 : 에페 1,10-22;4,25; 골로 1,18. [△]
6. 고린 전 8,6. 참조 : 골로 1,17. [△]
7. 요한 14,6. [△]
8. 요한 11,25. [△]
9. 참조 : 요한 14,9. [△]
10. 참조 : 요한 16,7. [△]
11. 참조 : 요한 16,7.13. [△]
12. 골로 2,3. [△]
13. 참조 : 로마 12,5 ; 고린 전 6,15; 10,17; 12,12.27; 에페 1,23;2, 16;4,4 ; 골로 1,24; 3,15. [△]
14. [교회헌장] 1항. [△]
15. 마태 16,16. [△]
16. 참조 : 예수 성심 호칭기도. [△]
17. 고린 전 2,2. [△]
18. 참조 : 창세 1장 여러군데. [△]
19. 참조 : 창세 1,26-30. [△]
20. 로마 8,20. 참조 : 8,19-2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세계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2,13항. [△]
21. 요한 3,16. [△]
22. 참조 : 로마 5,12-31. [△]
23. 로마 8,22. [△]
24. 로마 8,19. [△]
25. 로마 8,22. [△]
26. 로마 8,19. [△]
27. [사목헌장], 22항. [△]
28. 로마 5,11; 골로 1,20. [△]
29. 시편 8,6. [△]
30. 참조 : 창세 1,26. [△]
31. 참조 : 창세 3,6-13. [△]
32. 참조 : [성찬기도] 제4양식. [△]
33. 참조 : [사목헌장], 37항; [교회헌장], 48항. [△]
34. 참조 : 로마 8, 29-30; 에페 1,8. [△]
35. 참조 : 요한 16, 13. [△]
36. 참조 : 데살 전 5,24. [△]
37. 고린 후 5,21. 참조 : 갈라 3,13. [△]
38. 요한 1서 4,8.16. [△]
39. 참조 : 로마 8,20. [△]
40. 참조 : 루가 15,11-32. [△]
41. 로마 8,19. [△]
42. 참조 : 로마 8,18. [△]
43. 참조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II, q.46, a.1, ad4. [△]
44. 갈라 3,28. [△]
45. 부활성야 [부활 찬송(Exsultet)]. [△]
46. 참조 : 요한 3,16. [△]
47. 참조 : 성 유스띠노, [호교론 1권(I Apologia)]46,1-4; [호교론 2권(II Apologia)] 7(8), 1-4; 10,1-3; 13,3-4;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 [양탄자(Stromata)] I,19,91.9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11항; [교회헌장], 17항. [△]
48. 참조 :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11항; [교회헌장], 17항. [△]
49. 골로 1,26. [△]
50. 마태 11,12. [△]
51. 루가 16,8. [△]
52. 에페 3,8. [△]
53. 참조 : [비그리스도교 선언], 1-2항. [△]
54. 사도 17, 22-31. [△]
55. 요한 2,26. [△]
56. 요한 3, 8. [△]
57. 참조 :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58. 참조 : 요한 14,26. [△]
59. [현대의 복음 선교], 6항. [△]
60. 요한 7,16. [△]
61. 참조 :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11항. [△]
62. 요한 8,32. [△]
63. 요한 18,37. [△]
64. 참조 : 요한 4,23. [△]
65. 요한 4,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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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구속받은 인간과 현대세계 내의 인간 상황


▶ 그리스도는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셨다.


13. 끊임없이 또 급속하게 증가하는 인류 가족의 경험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찰할 때에, 우리는 현대의 교회가 따라가야 할 이 모든 길이 있다고 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지혜로운 가르침1) 을 명명백백하게 깨닫는다. 이 길은 수세기의 시험을 거친 길이며 미래의 길이기도 하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이 길을 분명히 가르켜 보이셨다. 공의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자께서는 사실 당신의 화신(化身)으로 어떤 의미에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킨 것이다."2)

그러므로 교회는 이 일치를 이룩하고 끊임없이 갱신하는 일을 교회의 근본 과업으로 여긴다. 교회는 다만 하나의 목적에 봉사하고자 한다.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생(生)의 여정(旅程)을 함께 걸으시면서 강생과 구속의 신비에 담겨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리의 힘과 그 진리에서 비추어 나오는 사랑의 힘을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증가일로에 있는 역사 과정들이 현시점에서 각양각색의 체제들과 이념적인 세계관과 사회조직들의 영역에 결과들을 현저하게 빚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표면상으로 그리스도께서 부재(不在)하시는 것 같고 교회의 현존과 제도적 활동이 온갖 제약을 받는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 어느 면에서 전혀 새롭게 현존하시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와 사람의 힘을 갖고 현존하시게 된다. 지상에서의 그분의 생애가 비록 짧았고 더구나 그분의 공적 활동(公的活動)은 더욱 짧았지만, 그 진리와 사랑이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으로 그분에게서 충만하게 표출(表出)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따라야 할 한 길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의 집"3)에 이르는 길이시며 각 사람에게 도달하는 길이시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당신을 각개 인간과 일치시키시는 이 길에서 교회를 멈추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의 이 길은 인간의 현세적 복지와 영원한 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보아서도 교회의 생명을 이루는 신비를 보아서도, 교회는 인간의 참다운 복지에 보탬이 되는 것이며 무엇이나 무감각할 수 없으며, 더욱이나 인간의 복지를 위협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모른 체 할 수 없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러 문헌에서, 모든 면에서 "세계를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에 더욱 부합시키어"4) 이인간의 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5) 일에 대한 교회의 근본적 관심을 여러 가지로 표명했었다. 이것은 만인의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관심사이다. 공의회의 사목헌장에 나오듯이, 이 관심의 명분으로 "교회는 절대로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아무런 정치 체계에도 얽메이지 않는 동시에 인격의 초월성의 표지(標識)요 수호자인 것이다."6)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자체, 그의 진리 전체로 본 인간, 그의 위대함 그댈 본 인간이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인간이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인간 각자이다. 왜냐하면 개개 인간이 구속의 신비에 포함되며 그리스도께서 이 신비를 통해서 당신과 영원히 일치시키신 것은 개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각자는 자기 어머니의 모태에 잉태되어 세상에 온다. 그와 똑같이 인간 각자는 구속의 신비에 의해서 교회의 염려에 맡겨져 있다. 교회의 염련느 전인(全人)을 대상으로 하며 전혀 특수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기울여진다. 교회의 보살핌의 대상은 유일무이하고 반복될 수 없는 인간 실재,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인간이다.7) 공의회가 이 유사성을 논하면서 인간을 가르켜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8)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원하시고" 하느님이 "선택하신" 인간, 은총과 영광에로 부름받고 예정된 인간은 다름 아닌 이 "각" 인간. "가장 구체적인" 인간, "가장 현실적인" 인간이다. 이 인간은 온갖 신비로 가득차 이으며 그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고 있다. 지구상의 40억 인간 개개인이 자기 모친의 태중에 수태되는 순간부터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

▶ 교회로서는 모든 길이 인간에게로 통한다.


14. 교회는 인간을 저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운명" 즉 그의 선책과 불리움, 출생과 죽음, 구원 또는 멸망이 그리스도와 떨레야 뗄 수 없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 각자이다. 이 지구는 창조주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온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9)고 말씀하시며 첫 인간에게 주신 땅이다. 각 인간은 그가 타고난 것, 그가 행하는 것, 그의 정성과 의지, 그의 양심과마음에 있어서 전혀 일회적(一回的)인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人格體)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생명의 역사가 있고, 가장 중요한 자기만의 영혼의 역사가 있다. 인간은, 내면에서부터 정신이 개방되어 있고, 그의 육체와 시간 안의 존재에서 오는여러가지 다른 필요들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기만의 것인 이 개인적 역사를 기록하되 지상에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수태와 출생 순간부터 자기를 타인들과 이어주는 수많은연대, 접촉, 상황, 사회적 구조들을 거치면서 이 역사를 기록해간다. 인간은 그의 실존에 관한 지리, 그의 인격적 존재와 그의 공동체와 그의 사회적 존재에 관한 진리를 충만히 갖추고 있다. 그의 사회적 존재라면 그의 고유한 가정의 영역, 사회와 대단히 다양한 맥락들의 영역, 자기 나라나 민족(때로는 아직 종족과 부족에 국한된)의 영역, 나아가서 전인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인간이다. 이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겅어야 하는 첫째가는 길이다. "인간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이다." 그리스도 친리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속을 거쳐가는 길이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염두에 둔 것도 다름 아닌 이 인간, 생의 온갖 진리와 양심과 끊임없이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과 동시에 진선미 및 정의와 사랑을 향하는 부단한 염원을 갖춘 이 인간이었다. 공의회는 현대 세계에 처한 인간의 상황을 개괄함에 있어서 항상 이 상황의 외면적 요소들에서 출발하여 인간성 안에 깃들어 있는 진리에 도달하였다. :과연 인간 내부에서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제 욕망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않을뿐더러 보다 고차적인 생명에로 불리었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한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선택(取捨選擇)을 강요당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죄인이므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일을 행치 않을 수도 드물지 않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미 분열(分裂)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의 많은 불화(不和)도 생겨난는 것이다.10)

이 인간이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길이다. 어느 면에서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다른 모든 길들의 바탕이 되는 길이다. 인간은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께 구속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심지어 본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에게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각자에게 또 누구에게나 "빛과 힘을 주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셧다"11)

이 인간이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길, 교회의 일상생활과 체험, 교회의 사명과 노고를 기울여야 할 길이기 때문에 오늘의교회는 늘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상황"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교회가 인간의 가능성(可能性)들을 감지하여 본연의 취지에로 돌이키고 또 이를 천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인간에 대한 위협들, "인간의 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고"12) 현세 생활의 모든 요소가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에 맞갖게 만들려는 노력에 상반되어 보이는 모든 것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마디로, 그 과정에 상반된 모든 것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 현대인이 두려워 하는 것


15. 그러므로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통찰력과 권위를 가지고 그려낸 묘사를 우리 기억에 생생히 보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것을 "시대의 표징"과 부단히 변화하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의 요청에 적용해 보고자 시도할 것이다.

현대의 인간은 어느 때보다 자기가 만들어낸 것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듯하다. 즉 인간의 손 나아가서는 인간 지성과 의지의 성향이 만들어ㅈ낸 작업의 결과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인간의 이 다양한 활동이 빚어내는 산물이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의 손을 벗어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도대체 너무나 빨리 그리고 때로는 도저히 예측 못할 방식으로 "소외"(疏外)를 빚어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되돌아 오는 간접적인 결과를 통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에게 역행(逆行)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거스리고 있거나 거스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것이 광범위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간 실존의 현대적 드라마에서 본장(本章)을 차지하는 현상인 듯 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갈수록 두려움 속에 살게 된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들 -몰론 전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지만 그 일부, 특히 인간의재능과 창의성을 각별히 쏟은 것들-이 인간 자신에게 철저하게 반역(反逆)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것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자기파멸을 몰고 오는 수단이자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때의 파멸에 비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모든 이변과 파국은 시시해질 정도이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 태초부터 땅을 복종시키라고13)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어떻게 해서 인간에게 반역하게 되는가? 어떻게 해서 그 능력이 불안과의식적 무의식적 공포와 위협이 되어 현대 인간 가족 전체에 침투하고 갖가지 측면에서 자태를 나타내게 되는가?

인간이 만든 것으로부터 인간이 위협받는 이 상태는 여러 방면으로 또 여러 가지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위성인 지구의 개발(開發)이 합리적이고 솔직한 계획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점차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울러 산업상의 목적 뿐만 아니고 군사상의 목적으로이루어지는 지구의 개발, 장기적이고 진정 인본주의적인 계획의 범위를 이탈한 기술공학의 통제불가능한 발전이 인간의 자연환경을 흔히 위협하고,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며,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있다. 인간은 자연 환경을 놓고서 즉각적 이용과 소비에 유익한 것 말고는 다른 의미를 발견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창조주의 뜻은 인간이 현명하고 기품있는 "주인(主人)이자 "보호자"(保護者)로서 자연과 통교(通交)하는 것이지 "착치자"나 "파괴자"로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공학의 발달과, 기술공학의 향상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문명의 발달은 윤리 및 도덕의 조화있는 발달을 아울러 요청한다. 현시점에서는 불행하게도 후자의 발달이 항상 뒤에 처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놀라눈 진보에도 불구하고, 이 진보가 크게 불안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 인간 진보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이는 참다운 표지, 창세기 첫 머리에 인간의 창조를 논하는 대목14)에서부터 우리에게 창조적 씨앗처럼 계시된 바 있는 그 표지를 보기 힘들다는 데 이유가 있다. 불안의 첫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다. 인간을 장본인이며 주동자로 하고 있는 이 진보가 지상의 인간 생활을모든 면에서 "보다 인간답게" 만들고 있는가? 그것이 인간 생활을 더욱 "인간에게 가치있는" 생활로 만드는가? 여러 면에서 사실 그렇다고 하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이 질문은 원상으로 되돌아와 버린다. 이 진보의 맥락에서 보건대 인간이 인간으로서 정말 더 좋아지는가? 말하자면 영성적으로더욱 성숙하며, 자기 인간성의 품위를 더욱 ㅇ의식하며, 보다 책임감이 생기며, 타인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빈궁하고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을 열며, 주려는 마음과 모든 이를 도우려는 마음이 더 생기는가?

이 질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 신자들이 스스로 제기해야 마땅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인간의 문제에 전반적으로 예민하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같은 질문이지이 만인에 의해서, 그중에서도 현대 개발과 진보에 능동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사회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어야 한다. 이 진보의 과정을 관찰하거나 참여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저 도취감에 빠져서도 안되고 우리의 성과를 두고 일방적인 열광에 사로잡혀서도 안된다. 오히려 절대적 솔직과 객관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갖고 현대와 미래에 있어서의 모든 성과와 미래에 기술공학에 기대하는 계획들이 과연 인간의 상황에 관한 근본 의문들을 스스로 제기하지 않으면 안되다. 지금까지 달성한 모든 성과와 미래에 기술공학에 기대하는 계획들이 과연 인간의 윤리적 영성적 진보와 부합하는가? 이 과정에서 과연 인간이 인간으로서 발전하고 진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퇴보하고 그의 인간성에 있어서 타락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들 안에, 그리고 "인간의 세계" -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안에서 과연 선이 악을 제압하고 있는가? 인간 내부에,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사회적 사랑이 증가하고 타인들 -각 인간, 국가 및 민족- 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증가하고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각종 이기심, 진정한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국수주의(國粹主義), 자기의 합법적 권리와 공적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타자들을 지배하려는 악습, 물질적인 진보 전체를 장악하려는 악습, 타자들을 지배하고 이러저러한 제국주의(帝國主義)를 비호하려는 배타적인 목적에서 생산기술을 장악하려는 성벽 등이 횡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교회가 스스로 제기해야할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들은 현재 지구상에 사는 수십억 인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명백하게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개발과 진보라는 주제는 모든 사람의 입술에, 모든 신문의 기고란에, 현대 세계의 모든 언어로 나오는 간행물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이 주제는 긍정적이고 확실한 요소들만이 아니고 의혹과 괴로운 불안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후자가 전자보다 덜 심각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사실은 인간 지식의 변증법적 성격과 들어맞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그의 인간성을 위한, 지구상의 인류의 미래를 위한 염려가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요청과 부합된다. 종말론적 신앙에서 영감을 받는 교회는, 인간을 위한 인간성을 위한, 지구상의 인류의 미래를 위한, 따라서 개발과 빈보의 전체 과정을 위한 염려가 교회 사명의 본질적이고 떼낼라야 떼낼 수 없는 요소라고 간주한다. 교회는 이 염려의 원리원칙을 복음이 증언하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낸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이 염려를 부단히 증진시키고자 하며,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표징들에 입각하여 현대 세계에 처한 인간의 상황을 해독하기에 힘쓴다.

▶ 진보냐 위협이냐?


16. 그러므로 우리 시대가, 우리 세대의 시대가, 그리스도교 연대로 2천 연대의 종막이 다가오는 이시대가 위대한 진보의 시대라고 한다면 인간에게는 여러 양태로 위협의 시대로 보이기도 한다. 교회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위협에 관해서 발언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 문제를 두고 그들과 항상 대화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 세계의 인간의 상황은 참으로 윤리질서의 객관적 요구에서 멀리 떨어진 듯 하다. 우리는 여기서 창조주께서 따을 사람에게 맡겨진 순간에 그에게 건네주신 최오의 메시지, 곧 "땅을 정복하여라"15)는 말씀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최오의 메시지는 주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신비를 통하여 확인하신 바 있다. 그 내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인간의 "왕직"(王職),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왕다운 직분(munus regale)에 참여하라는 부르시에 관해서 논한 아름다운 장(章)에 표현이 되어 있다.16) 이 "왕직", 가견적 세계 위에 행사하는 인간의 "주권"(主權)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사명으로 부여하신 것으로서, 그 본질적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기술(技術)에 대한 도의(道義)의 우위성, 사물(事物)에 대한 인격(人格)의 우선, 그리고 물질(物質)에 대한 정신(精神)의 우월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현시대의 진보의 모든 단계들이 주의 깊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 진보의 각 단계가 이 관점에서 일일이 투시(透視)되어야 한다. 문제는 인격들의 진보발달이지 단순히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의 증가가 아니다. 어느 현대 철학자가 말한 바 있고 공의회가 주장한 바 있거니와, 이것은 "무엇을 가졌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어떤 인간이냐"는 문제이다.17) 사실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이 엄청난 진전을 가늠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지배권의 본질적인 맥(脈)들이 끊길 위험이 현실적으로 피부에 느껴진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인간이 자기의 인간성의 조직 전체를 통해서나 생산제도를 통해서나 사회홍보수단의 압력을 통해서나 여러 방도로 자신을 조종(操縱) -비록 흔히들 그 조종이 직접 감지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에 맡겨버릴 위험이 대두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유기(遺棄)할 수도 없으려니와 자기에게 속하는 가견적 세계 내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위치를 유기할 수도 없다. 그는 사물의 노예, 경제 체제의 노예, 생산의 노예, 자기 손으로 만든 사물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순전히 유물론적인 문명은 인간을 그러한 노예 처지에로 몰락시키고 만다. 때로는 이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결국 그렇게 귀결된다. 현시점에서 인간에 대한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이 문제에 근간을 둔 것일 것이다. 이는 여기서 인간이 누구냐는 질문에 추상적인 답변을 내놓을 그런 문제가 아니다. 생명과문명의 활력(活力) 전체가 달린 문제이다. 일상생활의 갖가지 창의적 노력의 의미가 걸린 문제이며, 수많은 문명 계획, 정치 계획, 경제 계획, 사회 계획, 그밖의 많은 계획의 대전제들이 좌우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감히 현대 세계에 처한 인간의 상황이 윤리질서의 객관적 요구에서 멀고 정의의 요청과 멀며 심지어 사회적 사랑과도 멀다고 말한 것은, 잘 아는 사실들과 대조(對照)하며 그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대 교황들의 문서와 공의회와 시노드의 문서에 여러 기회에 이미 지적된 것들이다.18) 확실히 오늘날 인간의 상황은 획일적이 아니고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역사에 원인이 있지만 그 도덕적 결과는 강력한 것이다. 실살 누구나 소비문명(消費文名)의 상(像)과 친숙해져 있다. 소비문명이란 인간에게나 전사회에 필수적인 제화의 어떤 잉여분(剩餘分) -우리가 말한는 것은 부유한 고도 선진 사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에 의해서 성립이 된다. 그동안 다른 사회들 -적어도 상당히 큰 부분- 은 기아에서 시달리고 무수한 인간들이 매일같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한 무리는 가면 갈수록 자유의 상당한 남용 -이 남용은 도덕의 통제를 받지 않는 소비적 태도와 결속된 것임이 분명하다-을 하고, 그대신 다른 이들은 그 무리에 의해서 자유의 결핍에 시달리고 극도의 비참과 빈곤의 처지에 몰려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현상과 현격한 대조는 금세기 역대 교황들, 최근의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가르침이 담긴 제반 문헌에서 지적된 바 있으며,19) 이것은 잔치를 벌이는 부자와 불쌍한 라자로의 성서 비유를20) 극대화(極大化)한 것처럼 보인다. 이 현상은 너무도 크게 만연되어 있어서, 각종 정치적 압력하에 시행되고 있는 재정, 금융, 생산과 상업 등의 구조들이 도대체 세계 경제에 기여가 되고 있는 지를 의문스럽게 한다. 이 구조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불의한 사회 상황들을 치유할 능력도 없으려니와 현재의 시급한 문제제기와 도덕적 요망에 대응할 능력도 없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 구조들은 인간 스스로 조장한 긴장 속에 인간을 가둬놓고, 원자재와 동력자원을 급속한 속도로 고갈시키며, 지구물리학적 환경을 해침으로써, 비참한 영역을 부단히 확대시키고 있으며 번민과 좌절 그리고 슬픔을 자아내고 있다.21)

여기서 우리는 아무도 방관할 수 없는 대 극적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 최대의 이익을 올리려고 애쓰는 이들이나, 다른 편에서 손해를 보고 상해를 입으면서도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이들이, 늘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 극적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것은 특권적 사회계층들과 부강국들이 긴밀히 밀착해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극도에까지 부(富)를 축적하고 악용하여, 그들에게는 흔히들 부(富)가 각종 병폐의 원인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통화팽창(通貨膨脹)의 열기와 실업(失業)의 전염병이 휩쓴다. 이러한 현상들은 세계의 현황에서 현저하게 감촉되는 윤리적 무질서의 증후(症候)들이며, 따라서 인간은 참다운 존엄성에 부합한 과감한 창조적 대책이 요구되는 증거라고 하겠다.22)

그같은 과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넓은 의미의 연대성(連帶性)의 원리에서 영감을 받아 적절한 기관들과구조들을 효율적으로 모색할 수 있겠다. 무역의 분야에 건전한 경쟁의 법칙이 통용될 수 있게 한다든가, 부(富)를 시급하게 또 폭넓게 재분배(再分配)하고 그것을 통제한다든가 하여, 경제적으로 개발도상인 민족들이 자기네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만 급급하지 않고 점차적으로, 효과적으로 향상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생활구조의 변혁이라는 불가결하고도 어려운 도정은, 인간의 정신과 의지 그리고 마음의 개과천선이 없이는 진척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성격의 것이다. 이 과업은 자유롭고 또 연대의식(連帶意識)으로 결속된 개인들과 민족들 편에서의 과감한 투신을 요한다. 무릇 자유라는 것이 개인적 집단적 이익을 추구하는 본능으로 혼동되거나 쟁투와 지배를 탐하는 본능 -그것을 감싸는 이데올로기적 색채야 어떻든 상관없다- 으로 혼동되는 일이 너무나도 흔하다. 이런 본능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현저하게 활동하고 있으므로, 진정 인간다운 경제가 운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 안에 있는 심원한 능력들에 의해서 이런 본능이 제어되고 계도되고 지배되어야 한다. 실상 이 능력들이 민족들의 참다운 문화를 결정한다. 이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표시하고 경제 분야에도 그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노력에 원천이 된다. 경제발전과 그 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요인은 각개 인간과 민족의 전반적이고 연대적인 발전이라는 전망에 비추어 계획되고 시행되어야만 하는데, 이것은 나의 선임자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Populotum Pregrssio)에서 설득력 있게 천명하신 바이기도 하다. 그렇지 못할 때에 "경제적 진보"라는 범주가 독자적으로 상위범주(上位範疇)가 되어 인간 실존 전체를 국소적 요구에 종속시켜 버리고, 인간을 질식시키며, 사회를 붕괴시키고, 그것 자체의 긴장과 과도한 횡포에 스스로 얽혀드는 파국을 초래할 것이다.

이 과업을 수행하는 일은 가능하다. 여기서 일일이 분석하여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성취된 몇몇 사실과 결과로 보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입증되었다. 적어도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경제라는 거대한 분야의 토대로서 윤리적 책임감을 조성하고 받아들이고 심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책임은 인간이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이며, 거듭 또 언제나 인간이 져야 하는 책임이다.

이 책임은 누구보다고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특히 명료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 실린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거한 최후심판의 장면을 상기할 때에23) -우리는 언제나 이 장면을 상기하고 있어야 한다- 이점은 명백하다.

이 종말론적 장면은 인간의 역사에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 인간 행위를 재는 "척도"로 삼아야 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양심을 성찰하는 데 근본 개요로 삼아야 한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감옥에 갇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24) 우리가 독립 생활에 눈뜨기 시작한 신생국가들과민족들에게 빵과 문화적 원조를 베푸는 대신에 때로는 넘칠 정도로 무력충돌과 전쟁에 쓰이는 현대 무기와 파괴 수단들을 제공하는 사실을 살기할 때에 위의 말씀은 더욱 강력한 경고를 띠게 된다. 이들 무력 충돌과 전쟁은 자국의 정당한 권리와 주권을 수호하는 요청에서 오는 것이기보다는, 형태가 다른 국수주의, 제국주의 및 신식민지주의의 책동인 경우가 더 많다. 전쟁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엄청난 군비(軍備)의 투자가 만일 생명을 지키는 식량의 투자로 전환되다면, 전세계의 비참과 기아의 지대(地帶)가 단시일에 비옥한 지대로 변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상과 같은 고찰이 부분적으로 "추상적인" 것으로 머물지도 모른다. "양측"(兩側)이 각자의 과오는 망각하고 서로 상대방을 규탄하는 구실을 줄지도 모른다. 또 교회에 대한 새로운 고발을 야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비록 영(靈)과 말씀과사랑의 무기 외에는 달리 쓸 무기가 없지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말씀을 전파"25)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이유에서 교회는 양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애원하며, 하느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으로 모든 이에게 다음과 같이 애걸하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인간의 파괴와 전멸을 초래하는 일을 삼가라! 기아와 비참으로 시달리는 이들을 여러분의 형제요 자매로 생각하라! 각 사람의 존엄성과 자유를 존중하라!

▶ 인권(人權) : "문자"(文字)인가 "정신"(精神)인가?


17. 금세기는 인간에게 대 재난의 세기, 대 파멸의 세기가 되어 왔다. 그것도 단지 물질적 파멸만이 아니고 도덕적 파멸, 참으로 무엇보다도 도덕적 파멸의 시기다. 이 면에서 한 시대나 세기와 비교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음을 인전한다. 왜냐하면 그 비교가 변천하는 역사적 기준들을 표준으로 하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이런 비교들을 내세우지 않고 보더라도 금세기가 인간들이 서로에게 수많은 불의와 고통을 끼쳐온 세기 중의 하나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 형세가 결정적으로 제어되었는가? 우선 이 점에서 우리는 국제연합을 탄생시킨 위대한 노력, 인간의 객관적이고 불가침한 권리들을 정의하고 확립하여 회원국들이 철저히 그 인권을 옹호하도록 의무를 지우려는 노력을 상시하면서, 존경심과 미래에 대한 깊은 희망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의는 현대 국가 거의 전부가 채택하고 비준하였으며, 이것은 앞으로 전세계를 통해서 인권이 인간의 복지를 위한 활동의 기본 원칙이 되리라는 하나의 보증이라고 여겨진다.

교회로서는 이 문제가 현대 세계 내의 교회의 사명과 얼마나 긴밀히 직결되는지 재론할 여지가 없다. 요한 23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근자에는 바오로 6세께서 상세한 문헌을 통해서 선언하신 바 있거니와, 참으로 인권이야 말로 사회 평화와 국제 평화의기반이 된다. 무엇보다고 평화는 인간의 불가침한 권리에 대한 존중으로 귀착된다(Opus justitiae pax). 그대신 전쟁은 이 권리의 유린에서부터 초래하고 아울러 이 권리를 더 심하게 유린하는 결과를 빚는다.

평화시에 만일 인권이 유린되다면 그것은 특히나 고통스러운 일이며, 진보라는 견지에서 볼 때에 그것은 인간을 거스르는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불가피하게 폭로하는 것으로서, 소위 "인도주의"(人道主義)를 자처하는 강령(綱領)과는 도무지 상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강령, 경제 강령, 정치 강령 또는 문화 강령 치고 인도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강령이 어디 있는가? 물론 그 강령의 정강(政綱)이 수립되는 단계에서는 세계관(世界觀)의차이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알력이 있게 마련이지만, 현대 세계에서는 어느 강령치고, 비록 차이는 있더라도, 반드시 인간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는 강령은 없다.

그런데 이런 전제(前提)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온갖 양태로 인권이 유린되고 있다면, 눈앞에 강제수용소, 폭력, 고문, 테러, 그리고 각종 차별과 실제로 일어 나고 있다면, 이것은 인도주의와는 다른 전제에서 오는 결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현대 강령(綱領)들과 체제(體制)들이 내세우는 인도주의적 전제(人道主義的 前提)를 훼손시키거나 때로는 거의 무화시켜 버리는 다른 전제들에서 오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강령들을 객관적이고 불가침한 인간의 권리의 견지에서 부단히 수정할 의무가 반드시 따른다.

국제 연합의 창설과 연관된 인권선언(人權宣言)은 분명 그 목적이 단순히 지난 세계 대전의 가공할 경험을 벗어나자는 데만 있지 않고, 온갖 강령과 체제와 제도들을 이 단일한 기본관점에서 부단히 수정할 토대를 구축하자는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복지, 혹은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공동체내의 인격체의 복지가 공동선(公同善)의 기본 요인으로서 일체의 강령과 체제와 제도의 근본 규범을 이룬다는 주장이었다.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질 때에, 비록 평화시라도 인간 생명이 갖가지 고통을 강요당하게 되고 이 고통에 수반하여 온갖 형태의 압제와 전체주의와 신식민지주의 및 제국주의가 발달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한결같이 국가들의 조화있는 공존(共存)을 위협하는 것들이다. 인간 권리의유린이 필히 국가의 권리와 유린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의미있는 사실이며 역사의 경험으로 누누히 확인된 사실이다. 인간은 마치 보다 큰 가족과 결속되듯이 유기적인 고리로 국가에 귀속된다.

이미 금세기 전반기에 온갖 국가전체주의(國家全體主義)들이 팽배할 때에 -그것들이 결국 전쟁의 파국으로 끝장났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교회는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 이 정권들이 모두 표면상으로 보다 높은 선(善) 소위 국가의 선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역사의 문제와 그 선이 국가와 동일시 되고 있는 일부 집단의 선이라는 것을 반드시 폭로되리라고 언명한 바 있다.26) 실제로 그 정권들은 시민들의 권리를 제약하였으며 불가침한 인권을 인정하기를 뚜렷이 거부하였다. 불가침한 인권이 국제적 차원에서 성문화(成文化)된 것은 금세기 중엽이었다. 교회는 "문자"(文字)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느나 "정신"(精神)은 사람을 살린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27) 그래서 교회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 진정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 성과를 함께 기뻐하면서 이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다음 질문을 부단히 제기하여야 하는 것이다. 세계 인권선언과 그 "문자"의 채택이 과연 어디서나 그 "정신"의 실현을 의미하는가? 사실 상당히 근거있는 두려움이 일고 있으니, 곧 우리가 거의 다 그 실현과는 아직도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과, 때로는 사회생활과공민생활의 정신이, 선언된 인권의 "문자"에 배치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당사자인 그 사회에도 괴로운 부담이겠지만 인권의 확립에기여하고 있는 인사들에게 그 사회와 인간 역사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지운다.

정치공동체로서의 국가의 본질적 의의는 국가를 구성하는 사회와 국민이 자기들의 운명의 구인(主人)이자 주권자(主權者)라는 사실에 있다. 그런데 사회와국민의 도의적인 참여에 의거해서 권력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일부 집단이 사회의 다른 모든 성원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듯이 해서는 국가의 의의가 실현을 보지 못한 채 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들의 사회의식(社會意識)이 놀랍게 증가하고, 각 국민의 실제 여건과 공공 당국의 구속력을 고려하는 가운데 시민이 공동체의 정치생활에 참여할 권리가 절실해지는 만큼, 이 문제는 참으로 중대한 것이다.28)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진보나 그의 인간성의 총체적 발전에서 볼 때에 이 문제는 첫째가는 비중을 차지한다.

교회는 공동선을 위해서 행동할 의무를 언제나 가르쳐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각 국가에 선량한 시민들을 교육해 냈다. 나아가서 교회는 권력의 기본 의무는 사회의 공동선을 염려하는 일이라고 항상 가르쳐 왔다. 공동선이야 말로 권력에 기본 권리를 부여하는 명분이다. 객관적 윤리 질서의 이 대전제들로 미루어 본다면 권력은 인간의 객관적이고 불가침한 권리들을 존중하는 한에서만 그 권리를 인정받는다. 국가 공권력이 봉사하는 공동선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시민이 그들의 권리를 확고히 보장 받을 때이다. 그것이 결여될 때에 사회는 붕괴하고 시민들이 공권력에 저항하며 압제와 협박, 폭력과 테러가 발생한다. 금세기의 전체주의들은 그 무수한 선례들을 남긴 바 있다. 이리하여 인권(人權)의원리(原理)는 사회정의(社會正義)의분야에서 뜻깊은 관심사이며 정치 단체들의 생명을 측정 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이 권리들은 양심의 자유에 관한 권리와 아울러 종교 자유의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문제에 관해서 상당히 긴 선언문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이라는 문헌이다.29) 이 문헌에는 이 문제의 신학적 개념은 물론, 자연법(自然法)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인간의 경험과 이성,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감각을 전제로 하여 "순전히 인간적인" 입장에서 도달한 개념들도 표명되어 있다. 분명히 개인과 공동체들의 종교 자유의 박탈은 다만 고통스러운 체험에서 그치지 않고, 그 개인과 공동체들의 세계관이나 신봉하는 종교가 어떤 것이냐에 상관없이,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 자체에 대한 침범이다. 종교 자유의 박탈과 침해는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객관적 권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위에 언급한 공의회 문헌은 종교 자유의 박탈과 침해가 어떤 것이냐에 관해서 충분히 피력한 바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각별히 인간 내부의 심원한 문제, 진정 인간다운 것을 유린하는 근본적인 불의와 부딪치게 된다. 참으로 불신앙(不信仰), 무종교(無宗敎) 및 무신론(無神論)의 현상까지도 인간적인 현상으로서는, 종교와 신앙과 결부시켜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무신론에만 공공생활과 사회생활에서의 시민권(市民權)을 부여하고 그대신 신앙인들은 원칙상으로나마 그저 눈감아 준다거나 이급(二級) 시민으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시민권을 전적으로 박탈하는 -이런 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입장을 수긍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는 간단하라도 취급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현대 세계에 처한 인간의 복잡한 상황과 연관이 있고, 그 상황이 갖가지 선입견과 불의에 어느 정도 짓눌려 있는가를 상세하고 철저히 규명하는 일은 우리의 특별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일을 삼사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차별의 형벌과 박해를 받는 이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능력(救贖能力)을 믿는 신앙에 인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직무 때문에 나는, 어느 모로든 사회 생활과 공공생활의 조직을 책임진 이들에게, 전 세계 모든 신앙인의 이름으로 호소하며 종교 신봉의 권리와교회의 활동의권리를 존중하도록 진지하게 요청하는 바이다. 이무런 특권도 요청하지 않으며 오로지 기본적인 권리를 존중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어느 정권, 어느 사회, 어느 체제와 환경에서도 이 권리의 신장은 그곳에 진정한 인간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본적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 주석


1. 참조 : 바오로 6세, [당신의 교회]. [△]
2. [사목 헌장], 22항. [△]
3. 참조 : 요한 14,1 이하. [△]
4. [사목 헌장], 91항. [△]
5. 상게서, 38항. [△]
6. 상게서, 76항. [△]
7. 참조 : 창세 1,26. [△]
8. [사목 헌장], 24항. [△]
9. 창세 1,28. [△]
10. [사목 헌장], 10항. [△]
11. 상동. [△]
12. 상게서, 38항; 교황 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방전 촉진에 관한 회칙(Populorum ProGressio)], 21항. [△]
13. 참조 : 창세 1,28. [△]
14. 참조 : 창세 1-2장. [△]
15. 창세 1,28. 참조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메스 메디아에 관한 교령(Inter Mirfica)], 6항; [사목 헌장], 74, 78항. [△]
16. 참조 : [교회 헌장], 10, 36항. [△]
17. 참조 : [사목 헌장], 35항; 교황 바오로 6세, [외교 사절단에게 행한 연설](1965년 1월 7일자);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14항. [△]
18. 참조 : 교황 비오 12세, [레오 13세의 노동 헌장(Rerum Novarum) 반포 50주년 기념 라디오 메시지](1941년 6월 1일자: AAS 33 <1941> 195-205); [성탄 라디오 메시지](1941년 12월 24일자: AAS 34 <1942> 10-21); [성탄 라디오 메시지](1942년 12월 24일자: AAS 35 <1943> 9-24);[성탄 라디오 메시지] (1943년 12월 24일자: AAS 36 <1944> 11-24); [성탄 라디오 메시지] (1944년 12월 24일자 ; AAS 37 <1945> 10-23); [추기경들에게 행한 연설] (1945년 12월 24일자 : AAS 38 <1946> 15-25); [추기경들에게 행한 연설] (1946년 12월 24일자 : AAS 39 <1947> 7-17); [성탄 라디오 메시지] (1947년 12월 24일자 : AAS 40 <1948> 8-16. 교황 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AAS 53 <1961> 401-464);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AAS 55 <1963> 257-304). 교황 바오로 6세, 회칙 [당신의 교회]; [유엔 총회에서 행한 연설](1965년 10월 4일자 : AAS 57 <1965> 877-885.);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콜롬비아 농민들에게 행한 연설] (1968년 8월 23일자 : AAS 60 <1968> 619-623); [라틴 아메리카 주교 연합회 총회 연설] (1968년 8월 24일자 : AAS 60 <1968> 639-649); [유엔 식량 농업기구(FAO)회의 연설] (1970년 11월 16일자 : AAS 62 <1970> 830-838); 사도 서한 [노동헌장 반포 80주년을 맞이하여(Octogesima Adveniens)] (AAS 63 <1971> 401-441); [추기경들에게 행한 연설] (1972년 6월 23일자 : AAS 64 <1972> 496-50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라틴 아메리카 주교연합회 제 3 차 총회연설] (1979년 1월 28일자 : AAS 71 <1979> 187ff.); [쿠일리판 인디안들에게 행한 연설] (1979년 1월 29일자 : l. c 221 ff.); [몬테레이 노동자들에게 행한 연설] (1971년 1월 31일자 : l. c 240-242).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Gaudum et Spes)]. 주교 시노드, [세계 정의에 관하여(De Iustitia in Mundo)]: AAS 63 (1971) 923-941. [△]
19. 참조 : 교황 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와 교사]; [지상의 평화]; 교황 바오로6세,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
20. 참조 : 루가 16,19-31. [△]
21. 참조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산토 도밍고에서의 강론](1979년 1월 25일자: AAS 71 <1979> 157ff.); [와하카의 농민들과 인디안들에게 행한 연설](1979년 1월 30일자 l.c. 207ff.) ; [몬테레이 노동자들에게 행한 연설](1979년 1월 31일자: l.c. 242). [△]
22. 참조 : 교황 바오로 6세, 사도 서한 [노동헌장 반포 80주년을 맞이하여], 42항.
23. 참조 : 마태 25,31-46. [△]
24. 마태 25,42.43. [△]
25. 디모 후 4,2 [△]
26. 교황 비오 11세, 회칙 [노동헌장 반포 40주년을 맞이하여(Quadragesimo Anno)](AAS 23 <1931> 213ff.); [가톨릭 액숀에 관한 회칙(Nonabbiamo bisogno)](AAS 23 <1931> 285-312);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Divini Redemptoris)](AAS 29 <1937> 65-106); [독일교회에 관한 회칙(Mit brennender Sorge)](AAS 29 <1937> 145-147); 교황 비오12세, [현대 세계의 국가의 역할에 관한 회칙(Summi Pontificatus)](AAS 31 <1939> 413-453). [△]
27. 참조 : 고린 후 3,6 [△]
28. [사목 헌장], 31항. [△]
29. 참조 :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AAS 58 <1966> 929-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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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교회의 사명과 인간의 운명


▶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의 소명(召命)을 염려한다


18. 이상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했던 현대 세계의 인간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의 신비에로 생각과 마음을 향하게 한다. 구속의 신비에는 인간의 문제가 특별한 진리와 사랑의 강도(强度)를 띠고 부각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1) 것이 사실이라면, 교회는 이 신비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이 신비의 풍부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새겨 들음으로써 교회의 본성과사명을 보다 깊이 생활에 옮기게 된다. 사도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관해서 하시는 말씀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2)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성서와 교부(敎父)의 전통 자체를 근거로 하여 언명한 대로 그리스도의 이 신비체(神秘體)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 신비체 내의 각 사람이 자기 내부에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길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과 그의 현실 문제, 그의 희망과 고뇌, 그의 성공과 실패를 돌이켜 봄으로써 몸이요 유기체이며 사회 단위인 교회로 하여금 똑같이 신적인 영향력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빛과 힘을 감지하게 만든다. 또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 생명을 살아가는 명분(名分)이기도 하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뿐이니 교회의 배필이시오 주님이신 분꼐서 교회에 주신 그 생명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신비로 교회를 당신에게 일치시키셨으므로 교회는 모든 사람과 단단히 일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인간과의 이 일치는 그 자체 하나의 신비이다. 그 신비에서 "새로운 인간"[新人間],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기로 된 인간,3)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게 새로 창조된 인간4)이 탄생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인간과의 일치는 하나의 능력이며 능력의 원천이니, 성 요한이 그의 복음서 서문에서 "(말씀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능력)을 주셨다."5)고 예리하게 주장한 말 그대로다. 인간은 새 생명의 원천인 이 능력에 의하여 내부에서부터 변혁된다. 그 새 생명은 사라지거나 지나가는 법이 없어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6) 아버지께서 언약하신 바 있고, 당신의 영원하시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때가 찼을 때"7) 강생하시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 그 생명이야말로 인간 소명(召命)의 최종적 실현이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 하느님의 영원으로부터 인간을 위해 말씀하신 "운명"의 실현이다. 이 "신적 운명"(神的運命)은 시간의 세계속에서 전개되는 "인간적 운명"(人間的運命)의 온갖 수수께끼와 불가사의와 우여곡적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앞으로 뻗어나간다. 그런데 생명이 제아무리 풍부한 것일지라도 조만간에 이 모든 것이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게 죽음의 경계선, 인간 육체의 파괴라는 목적지로 귀착하는데 비해서 우리는 그 너머 게시는 그리스도를 뵙는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지 사람은 ……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8) 인간이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물질을 예속시키고 있고 또한 보이는 모든 피조물과 인간이 함께 겪어야 하는 그 필연(必然)을 향해 그 길을 함께 겪어야 하는 그 필연(必然)을 향해 그 길을 갈 때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무덤에 붇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이 싹텄고 …… 장차 불멸의 생명을 얻으리라는 약속"9)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구원자께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10)는 구절에 간직해 두신 진리의 언어를 보다 깊이 헤아리고자 노력해 왔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겉으로야 어떻든 이 말씀은 인간에 대한 최고의 긍정, 영( )에 의해서 육체에 생명이 부여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교회는 바로 이 실재들을 삶에 옮기고 있다. 교회는 인간에 대한 이 진리에 의거하여 산다. 이 진리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성(時間性)의 테두리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며, 아울러 이 시간성의 차원 내에서 인간의 생명과 인간 정신의 생명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물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을 수 있게 해준다.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11)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에 담겨진 그칠줄 모르는 불안정(不安定)이 거기에 표명되어 있다. 이 건설적인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가장 인간다운 충동이 고동치고 맥박을 뛰게 하느니, 진리를 좇는 탐구, 선을 향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갈증, 자유에 대한 주림, 아름다움에 대한 행수(鄕愁), 양심의 소리 등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눈"을 갖고 인간을 탐구할 때에 교회는, 자기가 위대한 보물(寶物)의 수직자(守直者)라는 각성이 갈수록 더해가며 그 보물을 함부로 써버려서는 안될뿐더러 부단히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참으로 예수께서도 "나와 함께 모아 들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12)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인간성(人間性)의 이 보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13) 형언할 수 없는 신비에 의해서, 또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통해서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14)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녀로 입양(入養)하시는15) 은총에 의해서 더욱 부요해졌다. 그런데 인간성의 이 보물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내부적으로 교회를 단결시키는 강력한 힘이요, 교회의 모든 활동에 의의를 부여하는 힘이다. 이 힘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령께 일치힌다. 성령은 구원자께서 언약하셨고 끊임없이 나누어 주시며, 오순절에 명백히 나타난 성령의 강림은 끝없이 계속된다. 그리하여 영의 능력,16) 영의 선물,17) 성령의 열매18)가 인간들에게 밝히 나타난다. 오늘의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더한 열심과 경건한 고집으로 "오소서, 성령이여!"라는 외침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다. 오소서! 오소서! "더러운 것 씻으소서, 마른 것 물 주소서, 병든 것 낫우소서, 굳은 것 굽히시고, 찬 것은 덥히시고, 빗근 것 잡으소서."19)

성령께 드리는 이 간청(懇請)은 영을 모셔들이려는 데에 뜻이 있는 것으로서 우리 시대의 모든 "유물론"(唯物論)들에 대한 답변이하 하겠으니, 인간 마음에 수많은 형태의 불만족(不滿足)을 발생시키는 것이 바로 이들 유몰론이다. 이 간청이 여러 방면에서 이미 성취되고 있고 여러 양상으로 이미 결실을 거두고 있다. 교회만이 이 간청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영적인 것에 대한 "필요"는 교회의 눈에 보이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토로되고 있기 때문이다.20) 이 사실은 최근의 공의회가 극구 강조한 교회에 관한 진리로도 확인된 바 있지 않은가?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에서 "교회는 성사(聖事)와 비슷하다. 즉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標識)요 도구(道具)인 것이다"21)고 가르쳤다. 영을 모셔 들이기 위해 영께 올리는 이 기원(祈願)은 구속의 신비라는 위대한 세계 속으로 항구하게 자신을 몰입(沒入)시키는 것이며, 구속의 신비 속에서 아버지와 일치시키고 각 사람과 일치하여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영을 나누어 주시는데, 우리 내심에 아드님의 감정(感情)을 심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로 향하게 만드시는 분은 바오 이 영이시다.22) 현대는 유난히 영에 주린 시대이다. 이 시대가 정의, 평화, 사랑, 선, 용기, 책임,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주린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 시대의 교회가 구속의 신비에 시선을 집중하고 그 신비 주의에 모여 거기서 자기 사명을 다하는데 불가결한 빛과 힘을 찾아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만일 인간이 교회의 일상생활의 표준이 되는 길이라면, 교회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그 품위23)와 은총과 영광을 받기로 되어 있는 인간 운명의 존엄성24)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5)고 하신 말씀대로 교회는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주 그리스도께 부름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위에 말한 모든 사실을 늘 새롭게 반성함으로써, 갈수록 의식이 뚜렷한 신앙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갈수록 굳건한 사랑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에 대한 봉사에 더욱 적합해진다. 교회는 교회의 스승이시고 구원자이신 분에게 딸린 "삼중 직분"(三中職分)을 나누어 짐으로써 이 봉사직무를 수행한다. 이 가르침은 성서에 근거한 것이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서 완전히 부각되어 교회생활을 크게 이롭게 만든 가르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삼중 직분, 사제(司祭)요 예언자(預言者)요 왕(王)으로서의 직분에 참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26) 우리는 지상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의 사회이며 공동체에서 봉사의 대상이 무엇인지 보다 더 의식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우리 각자가 교회의 이 사명과봉사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 것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 교회는 진리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교회는 신적 진리(神的眞理)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회적 주체(社會的主體)로 나타난다. 우리는 "내가 너희에게 들려 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27)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깊이 동감한다. 우리 스승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계시된 진리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는가? 이 진리는 원래 하느님의 "소유"(所有)이며, 따라서 "아버지의 품안에 게신 외아들"28)이신 스승마저도 예언자요 교사로서 이 진리를 전수(傳授)하실 때에는 당신이 이 진리의 신적 인 원천에 온전히 충실하게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셔야겠다는 필요를 느끼셨다. 교회가 이 진리를 가르치실 때에도 고백할 때에도 같은 충실이 교회신앙의 본질적 품성이 되어야 한다. 신앙(信仰)은 인간 정신에 주부(注賦)된 특수한 추자연적(超自然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계시된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써 하느님의 지식에 참여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신앙을 고백하고 가르치실 때에는 신적 진리를 엄밀히 고수하여야 하며,29) 그것을 "이성(理性)과 조화되는 순종"30)의 생활 태도로 재표현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진리에 재표현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진리에 대한 이 충실을 고려하셔서 교회에 진리의 성령의 특별한 가호를 언약하셨고, 그 진리를 전수하고 가르치라는 명을 내리신 이들31)에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명백히 정의하고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재반복한 바와 같이,33) 무류성(無謬性)의 선물을 주셨으며,34) 나아가서 하느님의 전 백성에게 특수한 신앙심을 태워주셨다.35)

그런즉 우리도 예언자 그리스도의 이 사명을 나누어 지게 되었으며 이 사명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안에서 신적 진리에 봉사하고 있다. 그 진리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힘씀을 뜻하니, 이는 그 진리의 구원 능력과 광채가 심원함과 아울러 단순함을 우리가 속속들이 가까이 하고남들도 가까이 하게 하기 위함이다. 진리에 대한 이 사랑과 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 염원은 반드시 손을 맞잡게 되니 이것은 교회내의 성인(聖人)들의 역사에 의해서 입증된다. 성인들은 신적 진리를 빛나게 하고 하느님의 질재 자체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참 빛을 가장 환하게 받은 분들이다. 그분들은 경외(敬畏)와사랑을 갖고 이 진리에 가까이 갔기 때문이니, 그 상은 먼저 신적 진이의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향한것이고 그 다음은 복음서에 실려있는 그분의 인간적 표현(人間的表現)과전통(傳統)과 신학(神學)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다. 오늘에 와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아직도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신학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사명에 창조적이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 신학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었고 지금도 차지하고 있따. 그러므로 신학자들이 신적 진리에 봉사하는 사람들어서 그 진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한 연구와 노력에 종사할 때에는자기들의 봉사가 교회내에서 갖는 의미, 즉 "신앙의 이해"(Intelectus fidei)라는 개념을 간과할 수 없다. 신앙의 이해라는 이 개념은 말하자면 이중 기능을 한다. 성 아우구스띠노의 표현에 따라, "믿으려면 이해하라(Intelege, ut credas), 이해하려면 믿어가(crede, ut intellegas)"36)는 것이다. 신앙의 이해가 올바르게 행사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신학자들이 교도권(敎道權) -교도권은 교회 내에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교계적 상통(敎階的傳統)의 유대로 결합된 주교들에게 위임되어 있다-에 봉사하고자 노력할 때, 신학자들이 가르침과 사목 활동에 대한 배려에 응할 때,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사도적 투신에 응할 때이다.

이전 시대처럼, 아니 이전 시대보다 더 신학자들과 교회의 모든 지식인들은 오늘날 신앙을 확문 및 지혜와 합일시키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교회학자(敎會學者) 성 알베르또 기념일의 전례에 나오는 기도문대로 신앙과 학식 및 지혜가 상호 융합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학문과 방법론, 세계와 인간에 관한 지식의 성취에 있어서 진전이 놀랍기 때문에 오늘날 이 과업은 참으로 중대해졌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신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지적한 철학 뿐만 아니라37) 정밀과학과 인문과학에도 해당한다.

인간 지식의 이 분야는 날로 광범해지고 세분화되고 있는데, 이 분야에도 신앙이 깊이 침투되어 계시된 신비의 원대함을 과시하고 진리의 이해를 향해 계도하여야 하겠으니, 무릇 진리는 하느님에게 최고 원천을 두기 때문이다. 이 방면에서 이루어질 엄청난 작업으로미루어 방법론상의 다원주의(多元主義)를 고려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고 심지어 바람직하다고는 하지만, 그 작업이 목적으로 삼는 신앙과 도덕의 가르침에 있어서의 근본적 일치에서 이탈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신학은 교도권과 긴밀히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신학자는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38)고 하신 말씀의 의도를 각별히 의식하여야 하겠다. 그러므로 아무도 신학을 단순히 자기 개인 사상의 집합으로만들 수는 없으며, 모든 이는 교회가 책임지고 있는, 진리를 가르치는 사명에 자신이 밀접히 결속되어 있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예언직(豫言職)에의 참여는 교회 전체의 생활을 그 근본 차원에서 성격 짓는다. 이 직책에 대한 특별한 참여는 교회 사목자들에 속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敎理)를 가르치고 부단하게 또 다양하게 선포하고 전수한다. 이 가르침은. 그 선교적(宣敎的) 측면에서나 통상적(通常的) 측면에서나, 하느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주위에 모이도록 돕고, 성체성사의 참여를 준비시키며, 성사생활(聖事生活)의길을 가리켜 준다. 1977년의 주교 시노드는 현대 세계의 교리교육(敎理敎育)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시노드의 결의와 경험과 제안은, 시노드 참석자들이 채택한 건의안에 입각하여, 머지않아 교황 특별 문서에서 밝혀질 거시다. 확실히 교리교육은 교회 활동의 영속적이고도 근본적인 형태이다. 교회의 예언적 카리스마, 곧 증언하고 가르치는 일이 한데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사제들을 이 말을 하지만, 자기의 신적 스승을 위하는 사랑으로 교리교육 활동에 헌신하고 있는 수많은 남녀 수도자들을 언급하지 ㅇ낳을 수 없다. 끝으로 이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과 사도적 책임을 표현하고 있는 무수한 평신도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걸음 나아가서, 가정 교리교육 즉 부모에 의한 자녀의 교리교육이라는 기본 영역에서 시작하여 여러 영역에서 여러 형태로 실시되고 있는 교리교육이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그리스도의 예언지에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명확한 증거가 되도록 점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 사실과 관련하여 신적 진리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모든 이가 갖가지 방법으로점차 나누어지도록 해야 하겠다. 이 시점에서 가게의 전문가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대표하는 이들, 의사, 법률가, 예술가와 기술자, 전문분야와 직급이 다른 교사들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들은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의 예언 사명과 신적 진리에 대한 봉사에 자기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니, 소속 분야가 어디든지 간데 라른 이들을 진리로 교육하고 사랑과 정의에 숙성해지도록 가르침으로써 다른 어떤 방도보다도 진리에 대한 솔직한 태도를 갖고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진리에 중요 지점(地點)의 하나여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소명을 결정하는 기본 요구 사항의 하나이기도 하다. 현대 교회, 진리에 대한 책임에 인도되는 교회는,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성령을 받아라"39)는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께로부터 친히 오는 예언적 사명에 관한 자기의 고유한 본성에 끝까지 충실하여야 한다.

▶ 성체성사와 고백성사


20. 구속의 신비,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있어서 교회는 말씀과 진리의 봉사에 충실함으로써 스승의 복음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희망과 사랑에 찬 순종으로 그리스도의 구속행위(救贖行爲)의 능력도 함께 나눈다. 이것이 성사적 형태로 특히 성체성사로 표현되고 간직된다.40) 성체성사는 성사생활의 중심(中心)이자 정점(頂点)이며, 그 성사를 통해 각 그리스도 신자는 세례의 신비로 비롯된 구속의 구원능력을 받게 된다. 사도께서는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묻혔으며 그리하여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고 가르치신다.41) 이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교회와 각 그리스도 신자의 성사생활 전부가 왜 성체성사로 정점과 충만에 이르는지 그 까닭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 성사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아버지께 바치신 자기 희생(自己犧牲)의 신비가 계속해서 재현(再現)되기 때문이다. 그 희생제사를 아버지께서는 받아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42) 당신 아드님의 전적인 자기 증여(自己贈與)에 대한 보답으로 당신의 자부적(慈父的) 선물을 주셨으니, 이것이 부활에 의한 불사불멸하는 새 생명의 보장이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태초부터 생명의 첫째 원천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육체가 입은 영광과 관련된 그 새 생명은 인류에게 보장된 새로운 선물을 이루어 주는 표지(標識)가 되었다. 이 선물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누리고 계시고 아드님에게 주시는43) 그 신적 생명(神的生命)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합일된 모든 인간들에게 베풀어진다.

성체성사는 이 합일을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가장 완전한 성사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지상에 계시고 또한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전구(傳求)하시는 그리스도와 합일된다.44)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일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희생제사의 구속적(救贖的) 행위를 통해서이니, 그 희생제사를 통해서 그분이 우리를 구속(救贖), 즉 "값을 치르고 우리 몸을 사셨다."45) 우리 구속의 "값"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가치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우리의 존엄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46) 양자(養子)47)가 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비슷해져서 "한 왕국이 되고 사제가 되었으며" "왕의 사제직"48)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아드님이자49) 참 사람이신 분에 의해서 한번이자 마지막으로인간과 세계를 아버지께 되돌아가게 만든 유일무이하고 돌이킬 수 없는 회복(回復)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었다. 성체 성사는 우리의 새 존재가 가장 완전하게 표시되는 성사이며, 우리 각자가 하느님과의 자녀다운 화해의50) 결실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스도 친히 증거하시는 성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친히 성취하셨고, 교회의 봉사 직무를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시는, 하느님과의 자녀다운 화해의 결실을 우리가 -구속의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성령 안에서 부단히 또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우리 영에 증언하신다.51)

성체성사가 교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근본 진리이니, 교의상의 진리일뿐만 아니라 생활의 진리이기도 하다.52) 성체성사가 건설하는 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의 참다운 공동체이며 신자들의 집회이며 주님의 사도들과 첫 번 제자들이 나누던 일치의 표적을 그대로 간직하는 집회이다. 성체성사는 이 공동체와 일치를 늘 새롭게 건설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근본으로 하여 이 공동체를 늘 건설하고 다시 탄생시킨다. 왜냐하면 그 희생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는 대가(代價)인 신바가상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3) 따라서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어느 면에서는 주님의 몸과 피의 신비 자체를 다루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의식에 쓰이는 말로도 알 수 있으니, 제도에 의해서, 교회의 이 봉사직무에 부름받은 사람이 그 말을 사용하여 성체성사를 끊임없이 거행하게 되었다.

교회는 성체성사에 의해서 살아간다. 이 성사의 충만함에 의해서 살아간다. 이 성사의 놀라운 의미와 내용에 관해서는 아주 옛적부터 최근에54) 이르기까지 교회 교도권에 의해서 누누히 피력되어 왔다. 그렇지만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가르침이 신학자들의 정확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가르침이 신학자들의 정확한 지식과, 신앙이 깊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인간들과, 수덕가(修德家)들과 신비가(神秘家)들에 힘입어서 성체신비에 온전히 충실하게 표명은 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겉표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체성사가 참으로 무엇인지, 그것으로 무엇이 표명되는지, 무엇이 그 속에서 이루어 지는지는 파악할 수도 없으려니와 말로 옮기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체성사는 형언할 수 없는 비사(秘事)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그 근본 투신과 가견적 은총 및 초자연적 힘의 원천을 성체성사 생활과 성체 신심에서 끊임없이 길어내고 향상시키도록 되어 있으며, 성체성사의 분위기 속에서 온전히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이유로도, 참으로 지극히 거룩한 이 성사로부터 그 위대함과 그 본질적 의미를 제거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 이 성사는 동시에 희생(犧牲)의 성사요, 친교(親交)의 성사요, 쳔존(現存)의 성사이다. 성체성사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인간적 형제애(兄弟愛)를 가장 깊이 계시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계시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성사가 그 형제애를 드러내기 위한 "기회"(機會)로만 간주될 수는 없다. 주님의 몸과 피의 성사를 거핼할 때에는 신적 신비의 위대함이 온전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시고 영해지며 영혼에세 은총과 장차 올 영광의 담보가 주어지는 이 성사적 표지의 뜻 전체가 존중되어야 한다.55) 전례 규정을 엄수할 의무와, 하느님께 바치는 공동체 예배를 나타내는 모든 것을 현저하게 준수할 의무가 여기서 비롯된다. 각별한 이유를 든다면, 하느님이 이 성사적 표지에서 우리에게 한없는 신뢰를 기울이시어 마치 우리의 인간적 나약, 우리의 무가치함, 관습의 힘과 판에 박힌 행동, 심지어 모욕과 끼쳐드릴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도 전혀 안중에 주시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성원,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주교와 사제는 이 사랑의 성사가 하느님의 백성의 생활에 중심을 이루도록 노력할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 합당한 예배의 온갖 표현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사랑"으로 다시 봉헌되고 참으로 "우리 영혼의 생명"56)이 되시게 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로서는 성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한다."57)

사도의 이 경고는 간접적으로나마 성체성사와 고백성사의 밀접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첫 말씀, 기쁜 소식인 복음의 첫 구정이 "회개하고(metanoeite)이 복음을 믿어라"58)는 말씀이었을 진대, 수난과 십자가와 부활의 성사가 우리 영혼에 이 부르심을 전혀 특수한 모양으로 강화하고 공고히 할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의 정신과 참다운 그리스도교 생활의 정신에 입각한 본연의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는 어느 면에서 긴밀히 연결된 두 차원을 이룬다. 성찬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참회를 권하시며 "회개하라"59)는 말씀을 거듭하신다. 회개하려는 끊임없이 새로운 노력이 없다면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일에 구속적 효과가 영적인 희생제사60) -우리는 이 희생제가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양식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를 바치려는 우리의 각별한 마음 자세가 상실되거나 적어도 약화될 수 우려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제직이 그분의 희생제사, 아버지께 드린 자기증여(自己贈與)와 연결된다. 그리고 그 희생제사가 한계가 없는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서, 수많은 한계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 인간 존재로서는 늘 보다 성숙한 모양으로, 또 항구하고 늘 보다 깊이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난 여러 해동안 교회의 실천에 있어서 참회, 특히 고백성사의 공동체적 측면이 크게 강조되었는데 이것은 교회의 가장 오래된 전통과도 부합한다. 그렇지만 회개라는 것이 특히 깊은 내적 행위라는 사실을 망각할 수 없다. 그것은 타인들이 대신해 줄 수도 없으며 공동체가 대신해 줄 수도 없는 것이다. 참회예식에 신도들의 형제적 공동체가 참여하는 것은 갱니의 회개 행위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결국 이 행위에서는 개인 당사자가 자기 양심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죄책감과 하느님께 신뢰하는 마음으로, 시편 작가처럼 하느님 대전에서 "당신께 죄를 얻은 몸"61)이라고 고백하는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수세기에 긍한 고백성사의 관습은 개인 각자가 인격적인 통회와 행실을 고치며 보상하겠다는 각오를 세우고서 개별적인 고백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 관습을 충실히 고수함으로써 교회는 인간 영혼의 개인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인간이 화해의 성사의 집전자를 통해서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셔서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62)고 하시고, "어서 돌아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63)하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와 보다 인격적인 만남을 가질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편에서도 당신께 구속받은 각 사람에 대한 권리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와 용서의 순간이라는 한 영혼의 생활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 각자와 만나 보실 권리가 있으시다. ㅛ회는 고백의 성사를 옹호함으로써 구속의 신비를 살아있고 생명을 주는 실재(實在)로 믿는 그 믿음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니, 이것은 인간의 내면의 진리와도 부합하고 인간의 죄책(罪責)과도 부합하며 아울러 인간 양심의 소망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64) 고백의 성사는 구원자께로부터 친히 오는 의(義)를 갖고서 인간이 만족시키는 수단이다.

특히 오늘날은 교회가 특별히 성체의 주의에 모이고, 진정한 성체의 공동체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보다 성숙해 가는 일치의 표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한 교회에서라면 응당, 성사적 측면에서나65) 덕(德)으로서의 참회에 있어서나, 참회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야 마땅할 것이다. 덕으로서의 참회에 관해서는 바오로 6세께서 사도적 권고 [회개하라](Paenitemini)66) 177-198).'/>에서 별도로 천명하신 바 있다. 이 문헌의 가르침을 실천에 올믹게 하는 일이 교회 과업의 하나가 되겠다. 그리고 공동성찰을 통해서 이 주제를 보다 깊이 연구해야 하겠다. 또 사목적 공동성(司牧的共同性)의 정신에 입각해서 이 문제에 관한 각이(各異)한 전통들을 존중하고 현대인이 살고 있는 각이한 환경을 고려하면서 보다 많은 결정이 내려져야 하겠다. 그러나 새로운 대림절을 맞은 교회, 주님의 다시 오심을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는 교회는 성체성사와 고백성사의 교회여야 한다. 교회의 생활과 활동을 이러한 영성적 측면에서 볼 때에만 교회는 신적 사명을 받은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의 본질로 천명한 그대로 "사명수임(使命受任)(in statu missionis)"중인 교회로 나타날 것이다.

▶ 봉사(奉仕)와 왕직(王織)에 부름받는 크리스챤 소명


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상(敎會像)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근본부터 재정립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삼중(三重)으로 제시하면서 그 사명에의 참여를 통해서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였다. 공의회의 이 가르침에서 그리스도교 소명의 특성 가운데서 "왕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대목은 가히 절정에 이룬다. 공의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풍부한가를 제시하려면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의 여러 장(章)과 항목(項目)을 인용해야 하고 공의회의 그밖의 문헌들을 예거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풍부한 요소들 가운데서 한 가지가 더욱 빼어나게 보인다.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명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가히 "왕직"이라고 일컬을 만큼 우리 소명의 특별한 존엄성을 우리 자신에게서와 타인들에게서 재발견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존엄성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신"67) 그리스도의 모을 명심하여 남에게 봉사하려는 준비 자세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의 이 태도로 미루어 본다면 "왕이 된다"는 것은 "종이 됨"을써만 가능하며, "종이 된다"는 것은 "왕이 된다"고 할 정도로 고귀한 영성적 성숙( 性的成熟)을 요하는 일이다. 보람있고 효과적으로 남에게 봉사하려면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제어(制御)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제어를 가능케 하는 덕(德)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명, 즉 그분의 "왕다운 직분(munus)"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인간 윤리의 모든 분야와 밀접히 연관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의 상(像)을 완벽하게 제시하고, 그 백성 속에 사람들 -사제와 평신도, 교계(敎階)의 대표자들과 봉헌된 생활을 하는단체에 속하는 사람들- 이 차지하는 위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공의회가 이 교회상을 사회학적 전제(社會學的前提)에서만 연역해낸 것은 아니다. 교회가 인간 사회(人間社會)인 만큼 학문들이 여타 인간 사회에 적용하는 범주에 의거해서 교회를 검토하고 기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 범주는 충분하지가 않다. 하느님의 백성의 공동체 전체로 보아서도, 성원 개개인으로 바아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구성원 자격(構成員資格)"이 아니다. 개개인에게와 모든 이에게 근본적인 것은 특수한 "소명(召命)"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사릴 "그리스도의 신비체"68)이기도 하다. "신비체"란 앞서 언급한 대로 성 바오로의 가르침에 나타났었던 것을 비오 12세께서 이 놀라운 용어(用語)로 표명하신 것이다. 이 몸의 구성원 자격은 은총의 구원 역사(役事)와 결부된 특수한 부르심에서 연원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광범위하고 천차만별한 하느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어느 모로 이 공동체의 모든 성원에게 "나를 따라오너라"69)고 말씀하시는 그분께 시선을 모아야 한다. 교회는 제자(弟子)들의 공동체이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때로는 분명한 의식으로 항구하게, 때로는 의식이 분명치 않고 변덕스럽게 여러 길로 그리스도를 따라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사회의 깊은 "인격적" 측면과 차원을 보여준다. 이 사회는. 인간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공동체 생활의 온갖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엄연한 공동체이다. 모든 성원들이 그리스도 신자라는 지울 수 없는 인호(印號)를 자기 영혼에 간직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만이라도, 그리스도를 모시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자들과 신앙고백자(信仰告白者)들로 이루어진 이 "존재론적(存在論的)" 공동체가 어떻게 하여야만, "인간적" 견지에서까지, 자체의 생활과 활동을 각성하고 있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었다. 공의회는 이 분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 노력은 시노드, 성좌(聖座) 및 기구(機構) 단위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이니시어티브가 교회의 진정한 쇄신에 이바지하고 그리스도라는 참 빛70)을 비추는 데 기여하려면 그것이 어디까지나 개개 그리스도 신자의 소명에 대한 의식(意識)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하며, 각 신자가 하느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도록 부여받은 독특하고 유일무이하며 반복될 수 없는 이 은ㅊㅇ에 대한 책임 의식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실천 전체, 그러니까 사목적 사도적 실천, 내면생활과 사회생활의 실천 전부의 근본 규범이 되는 이 원칙은, 그에 맞갖는 정도로, 인류 전체와 인간 각자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교황도, 각 주교도 자신에게 이 원칙을 적용시켜야 한다. 사제와 수도자도 이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기혼자, 부모, 사회의 최고 위치에 있는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극히 단순한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르기까지, 각종 직업과 여건에 처한 남녀들도 이 원칙 위에 자기 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왕다운 봉사"의 원칙이다. 이 봉사는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의 표양을 본받아 우리가 불리운 것이 어떤 일인지,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우리 소명에 응답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께 여쭈어 볼 의무를 지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소명에 충실하자면 교회에 대한 공동책임도 져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책임감이다. 사실 성령의 역사(役事)에 지도받는 하느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각 사람은 성 바오로의 가르침대로,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받고 있다.71) 이 "선물"이 한편 개인의 소명이고 교회워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또한 타인들에게 봉사하고, 지상의 다양한 인간 생활 영역에 교회와 형제적 공동체들을 건설하기도 한다.

자기 소명에 대한 충실, 다시 말해서 "왕다운 봉사"를 수행하겠다는 철저한 준비 자세가 특별한 의의를 띠는 분야가 이 형제적 공동체들의 건설이니, 그중에서도 더욱 시급한 것은 우리 이웃과 사회 전체의 생활에 영향이 큰 공동체들의 건설이다. 기혼자들은 결혼의 성사적 제도가 띠는 불가해소성(不可解消成)이 요구하는 바와 같이, 자기의 소명에 대한 성실에 있어서 특히 뛰어나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제들은 신품성사가 자기 영혼에 박아주는 지울 수 없는 인호(印號)에 비추어 뛰어나게 자기의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 라틴 교회에서는 이 성사를 받음으로써 알면서 자유롭게 독신생활(獨身生活)을 하기로 투신하는 것이니,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이 선물에 감사드리고, 종신토록 받아들인 그 속박에 성실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다. 사제는 기혼자가 하는 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혼자들은 사람의 증거로 가족 공동체를 건설하며 새로운 세대의 남녀를 교육함으로써 자기들의 혼인의 결합을 항구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힘껏 노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생활 전체를 자기네 소명에, 다시 말해서 "왕다운 봉사"에 바칠 수 있게 된다. 이 봉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범과 가장 아름다운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우리 모두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모범에 바탕을 두고72)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얻어 주신 은총에 협력함으로써 우리가 "왕이 되게" 만드는 데에, 달리 말해서 우리 각자 안에 성숙한 인간성을 생성해내게 만드는데에, 교회의 존재 의의가 있다. 성숙한 인간성이란, 창조주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당신과비슷하게" 인간을 존재로 불러내셨을 때에, 인간이 창조께 받은 자유의 선물을 온전히 상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 선물이 완전히 실현되는 경지는 인간이 자기의 전인격을 남김없이, 마치 배우자처럼 사랑의 정신으로 그리스도께 바치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적 권고(福音的勸告)에 따라 당신에게 전적으로 봉헌된 남녀 인간들을 만인에게 파견하신다. 이것이 수도생활의 이상(理想)이니, 오래되었거나 최근에 생긴 성식허원수도회(盛式許願修道會)들과 단식허원수도회(單式許願修道會)들 및 재속수도단체(在俗修道團體)들에 의해서 이 이상이 추구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자유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를 행사할 때에 자유롭다는, 이것이 개인생활과 사회 생활에서 추구되어야 할 목표라는 잘못된 주장이 종종 대두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우리의 참다운 선(善)인 모든 것을 위해 자유를 의식적으로 상용할 줄 알 때에만 자유가 위대한 선물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유의 최고 선용(善用)은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으며, 이 사랑은 자기증여(自己贈與)와 봉사(奉仕)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바로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73)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계시다. 교회는 이 원천에서 그칠줄 모르는 영감을 길어내며, 모든 인류에 대한 사명과 봉사에로의 부르심과그것을 수행할 힘을 이끌어 낸다. 인간의 자유에 관한 온전한 진리가 구속의 신비 안에 지울 수 없게 새겨져 있다. 교회가 꾸준한 조심과 열렬한 사랑 그리고 숙성한 투신으로 이 진리를 수호할 때에 교회는 진정 인류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자기 공동체 전체에 이 진리를 전수하고, 각 신자의 자기 소명에 대한 성실을 통해서 이 진리를 구체적 형태로 인간생활에 부여할 때에, 교회는 진정 인류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이야 말로 교회의 일상생활이 따라 걸어야 할 "길"이며 또 항상 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 우리가 신뢰하는 어머니


22. 새 교황직이 시작될 때에 나의 생각과 마음이 인간의 구원자께로 향한 이래로 나는 교회 생활의 가장 깊은 흐름 속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간파하고 싶었다. 교회에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항상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충성하게 되는 것이다.74) 그분에게 있어 이 풍성한 생명은 동시에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구속의 신비의 온갖 풍요한 내용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써 산[生]사람들의 교회가 된다. 산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진리의 성령"75)의 역사하심으로 내면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 그 사랑을 입었기 때문이다.76) 교회 내의 봉사는 그것이 사도적 봉사이든 사목적 봉사이든, 사제의 봉사이든 주교의 봉사이든, 일체가 구속의 신비와 인간 각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 역동적 유대를 염두에 두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과업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교회가 어머니77)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교회가 언제나 그랬고 더욱이 현대에 각별히 어머니를 한 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 잘 이해할 것 같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니,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 이 진리를 표명하고 그 속에 마리아 교리를 풍부하게 담아 두었기 때문이다.78) 바오로 5세께서 그 가르침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의 모친을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하셨고,79) 그 칭호가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 그분의 부당한 후계자인 나로서도 교황 직무의 초기에 적절히 발표한 이 고찰을 끝마치면서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가당하리라고 여긴다.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시다. 영원하신 아버지의 형언할 수 없는 선택을 받고80) 사랑의 영의 특별한 역사하심을 힘입어81) 하느님의 아들에게 인간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이 그분을 위해서 있는"82) 분이시며,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그분에게서 은총과 존엄한 선택을 받았다. 마리아의 아드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셨을 때에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어머니의 아들로 지정하심으로써83) 모든 영혼과 마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신 모친의 모성(母性)을 널리 개방해 놓으셨다. 우리 주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은 마리아께 영감을 베풀어 다락방에 머물러 계시면서 사도들과 함께 기도와 기다림 속에 오순절까지 기다리시게 하였다. 그날 교회는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볼 수 있는 모양으로 탄생을 하였다.84) 후대에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사랑하는 제자들의 모든 세대(世代)들은 요한 사도처럼 영적으로 이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셔 왔다.85) 이렇게 마리아는 애초부터, 그러니까 영보(領報)의 순간부터 구원의 역사와 교회의 사명에 포함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세대를 이루는 우리들은 마리아께 특별히 일치하기를 희구한다. 우리의 엣 전통에 충실히 애착하면서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성원들을 준종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 일치를 희구한다.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에 이 일치를 희구한다. 교회 역사와 인류 역사의 이 어렵고도 책임이 큰 시점에서, 구속의 신비에 입각하여 교회의 주님이시오 인간 역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하야하겠다는 특별한 필요성을 우리가 느끼는 이상, 이 신비의 신적이고 인간적인 차원 속에 들어가게 해주는 데 있어서 마리아보다 나은 분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마리아만큼 하느님께 이끌려 이 신비 속에 깊이 들어갔던 분이 없다. 신적 모성(神的母性)의 은총의 예외적인 특성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 모성의 품위가 인류 역사에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 모성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신비를 통한 하느님의 인간 구원 계획에대한 마리아의 활동도 그 활동의 깊이와 서열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것이다.

나자렛의 동정녀께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는 말씀을 되뇌이셨을 때에 그분의 품속에 구속의 신비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부터 성령의 특별한 작용에 의해서 동정녀요 어머니의 품인 이 마음은 아드님의 사업에 항상 뒤따랐으며, 그리스도께서 다함없이 사랑으로 포옹하시고 앞으로도 포옹하실 모든 인간들에게 정을 The으셨다. 바로 그 이유에서 마리아의 마음은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느님의 모친께서 구속의 신비와 교회 생활에 간여하시는 모성애(母性愛)의 특수한 성격이 발로되는 것은 그 모성애가 인간과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특별히 가깝다는 사실에서 이다. 여기에 어머니의 신비가 있다. 전혀 독특한 사랑과 희망을 품고 마리아를 우러러보는 교회는 이 어머니의 신비를 보다 심원한 양상으로 자신의 신비로 삼고자 한다. 또 그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자기가 일상생활에 따라 걸어야 할 길이 곧 모든 인간임을 인전하게 된다.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이 이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 각 사람에게 가까워지고 각자가 보다 쉽게 알아듣고 가까이 할 수 있는 모양을 띠게 되었따. 아버지의 그 사랑은 아버지께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86) 우리에게 주신 아드님을 통해서 인류 역사속에 나타나셨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내내 교회의 일상생활에 함께 하심에 틀림없다. 마리아의 어머니 다운 현존을 통해서 교회는 자신이 스승이시오 주님이신 분의 생활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며, 구속의 신비의 생명을 주는 깊이와 완전함 그대로를 살려서 그 시비를 생활하고 있다는 신념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현대 인류 생활의 여러 다채로운 분야에 뿌리를 내려온 교회는 그 현존으로 자신이 인간과 가깝고 모든 사람과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어느 모로 체험하게 된다. 자신이 모든 사람의 교회요 아느님의 백성의 교회임을 확인하고 체험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에 줄곧 대두되고 있는 과제와, 바오로 6세께서 당신의 교황직의 첫 회칙에서 분명하게 지적하신 실에 관해서 고찰하였고, 이 모든 길에 잠복해 있는 온갖 난관들도 이해하였다. 차제에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결속의 필요를 더욱 느낀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떠나서는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87)고 하신 말씀이 우리 내부에 메아리치고 있음을 듣는다. 전 교회가 크고 진지하고 더 많은 기도를 올려야 할 필요를 느낄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정언적 명령(定言的命令)임을 깨닫는다. 연달아 발생하는 이 크나큰 과제들과 난관들이 위기(危機)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막고, 오히려 2천년대의 종막이 가까워오는 역사의 이 시점에서 약속의 땅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 편에서 보다 성숙한 성취(成就)를 이루는 기회와 심지어 토대가 되는 것은 기도 뿐이다. 기도하라는 따뜻하고 겸허한 초대로 이 고찰을 매듭지으면서 나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주님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했던 것 처럼,88) 교회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89) 이 기도에 몰두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교회의 천상 어머니 마리아꼐, 당신의 외아들 신비체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와 뜻을 합하시어, 인류의 새로운 대림절의 기도를 함께 바쳐 주시기를 간구한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을 받게 되고,90) 오순절에 예루살렘의 다락방을 뛰어나온 그들처럼 "땅 끝에 이르기까지"91)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사도적 축복을 보내는 바이다.

▶ 주석


1. [사목헌장], 22항. [△]
2. 참조 : 고린 전 6,15; 11,3; 12,12-13; 에페 1,22-23; 2,15-16; 4,4-6; 5,30; 골로 1,18; 3,15; 로마 12,4-5; 갈라 3,28. [△]
3. 베드 후 1,4 [△]
4. 참조 : 에페 2,10; 요한 1,14.16 [△]
5. 요한 1,12 [△]
6. 참조 : 요한 4,14 [△]
7. 갈라 4,4 [△]
8. 요한 11,25-26 [△]
9. 위령미사 감사송 (1) [△]
10. 요한 6,63 [△]
11. [고백록] Ⅰ, 1 [△]
12. 마태 12,30 [△]
13. 참조 : 요한 1,12 [△]
14. 갈라 4,5 [△]
15. 갈라 4,6; 로마 8,15 [△]
16. 참조: 로마 15,13; 고린 전 1,24 [△]
17. 참조 : 루가 11,2-3; 사도 2,38 [△]
18. 참조 : 갈라 5,22-23 [△]
19. 성신강림 대축일의 [성신 송가] [△]
20. 참조 : [교회 헌장], 16항. [△]
21. 상게서, 1항. [△]
22. 참조 : 로마 8,15; 갈라 4,6. [△]
23. 참조 : 로마 8, 15. [△]
24. 참조 : 로마8,30. [△]
25. 마태 10,28. [△]
26. [교회 헌장], 31-36항. [△]
27. 요한 14,24. [△]
28. 요한 1,18. [△]
29. 참조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Dei Verbum)], 5,10,21항. [△]
30. 참조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Dei Filius)], 제3장 신앙. [△]
31. 참조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제1 교의 헌장(Pasor Aeternus)];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25항. [△]
32. 참조 : 마태 28,19. [△]
33. 참조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제 1 교의 헌장]. [△]
34. 참조 : [교회 헌장], 18-27항. [△]
35. 상게서, 12,35항. [△]
36. 참조 : 성 아우구스티띠노, [설교집(Sermo)] 43,79(PL 38, 257-258). [△]
37. 참조 : [사목헌장], 44, 57, 59, 62항;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um Totius)], 15항. [△]
38. 요한 14, 24. [△]
39. 요한 20,21-22. [△]
40. 참조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acrosanctum Concilium)], 10항. [△]
41. 참조 : 로마 6,3-5. [△]
42. 필립 2,8. [△]
43. 참조 : 요한 5,26; 요한 1서 5,11. [△]
44. 히브 9,24; 요한1서 2,1. [△]
45. 고린 전 6,20. [△]
46. 요한 1,12. [△]
47. 참조 : 로마 8,23. [△]
48. 묵시 5,10; 베드 전 2,9. [△]
49. 참조 : 요한 1,1-4,18; 마태 3,17; 11,27; 17,5 마르 1,11; 루가 1,32.35; 3,22; 로마 1,4; 고린 후 1,19; 요한 1서 5,5.20.; 베드 후 1,17; 히브 1,2. [△]
50. 참조 : 요한 1서 5,5-11. [△]
51. 참조 : 로마 5,10.11; 고린 후 5,18-19; 골로 1,20.22. [△]
52. [교회 헌장], 11항; 교황 바오로 6세, [1965년 9월 15일자 담화](Insegnementi di Paolo VI, III <1965> 1036). [△]
53. 참조 : [전례 헌장], 47항. [△]
54. 참조 : 교황 바오로 6세, [성체 성사에 관한 회칙(Mysterium Fidei)] (AAS 57 <1965> 553-574). [△]
55. 참조 : [전례 헌장], 47항. [△]
56. 참조 : 요한 6,51.57; 갈라 2,20. [△]
57. 고린 전 11,28. [△]
58. 마르 1,15. [△]
59. 상동. [△]
60. 참조 : 베드 전 2,5. [△]
61. 시편 50(51), 6. [△]
62. 마르 2,5. [△]
63. 요한 8,11. [△]
64. 마태 5,6. [△]
65. 참조 : 신앙 교리 성성, [공동 사죄에 관한 사목 지침(Normae Pastoales circa Absolutionem Sacramentalem GeneraliMado Imperiendam)] (AAS 64 <972> 510-514); 교황 바오로 6세, [미국 주교단 일원의 성좌 정기방문시에 행한 연설](1978년 4월 20일자: AAS 70 <1978> 328-33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카나다 주교단 일원의 성좌 정기방문시에 행한 연설](1978년 11월 17일자 : AAS 71 <1979> 32-36). [△]
66. 참조 : [회개하라(Paemitemini)] (AAS 58 ㅡ1966 [△]
67. 마태 20,28. [△]
68. 교황 비오 12세,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i Corporis)] (AAS 35 <1943> 193-248). [△]
69. 요한 1, 43. [△]
70. 참조 : [교회 헌장], 1항. [△]
71. 고린 전 7,7. 참조 12,7.27.; 로마 12,6; 에페 4,7. [△]
72. 참조 : [교회 헌장], 36항. [△]
73. 갈라 5,1. 참조 : 5,13. [△]
74. 참조 : 요한 10,10. [△]
75. 요한 16,13. [△]
76. 참조 : 로마 5,5. [△]
77. 참조 : [교회 헌장], 63-64항. [△]
78. 참조 : [교회 헌장], 8장 (52-69항). [△]
79. 교황 바오로 6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페막 연설](1964년 11월 21일자 : AAS 56 <1964> 1015). [△]
80. 참조 : [교회 헌장], 56항. [△]
81. 상동. [△]
82. 히브 2, 10. [△]
83. 참조 : 요한 19,26. [△]
84. 참조 : 사도 1,14; 2장. [△]
85. 참조 : 요한 19,27. [△]
86. 요한 3, 16. [△]
87. 요한 15,5. [△]
88. 참조 : 사도 1,14. [△]
89. 참조 : 사도 1,13. [△]
90. 참조 : 사도 1,8. [△]
91. 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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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베네딕토 16세 : 교황들(Summorum Pontificum)  6172
23   베네딕토 16세 : 교황 선출 규정의 일부 변경에 관하여  4152
22   베네딕토 16세 : 1970년 개혁 이전의 로마 전례 사용에 관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  [2] 2985
21   베네딕토 16세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3] 3212
20   구원에 이르는 고통 (Salvifici Doloris)  [7] 2379
19   가정 공동체  [11] 2111
18   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5] 2040
17   성체의 신비와 흠숭에 대하여  [3] 2641
16   그리스도교적 지혜 (Sapientia Christiana)  [3] 2318
  인간의 구원자 (Redemptor Hominis)  [3] 2713
14   현대의 복음선교 (Evangelii Nuntiandi)  [9] 2462
13   마리아 공경 (Marialis Cultus)  [5] 4653
12   팔십주년 (Octogesima Adventiens)  [4] 2390
11   사제 독신생활에 관한 회칙  [9] 3061
10   민족들의 발전 (POPULORUM PROGRESSIO)  [5] 2527
9   신앙의 신비 (Mysterium Fidei)  [7] 2535
8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  [5] 2599
7   어머니요 스승 (MATER ET MAGISTRA)  [7]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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