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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조회수 | 2,040
작성일 | 07.05.2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 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 1981. 9. 14.


노동을 하여(Laborem Exercens) 인간은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하고시편 127(128),2; 창세 3,17-19; 잠언 10,22; 출애 1,8-14; 예레 22,13 참조. 과학과 기술의 끊임없는 진보에 이바지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한 가족인 형제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의 문화적, 도덕적 수준을 끊임없이 들어높이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노동이란 그 성격이나 환경이 어떻든간에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어떤 행위를 뜻한다. 즉, 인간성 자체로 인하여 그리고 본성으로 타고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수많은 행위들 가운데 노동으로 인식될 수 있고 또 인식되어야 하는 인간의 어떤 활동을 뜻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볼 수 있는 우주 안에 창조되었으며,창세 1,26 참조. 땅을 다스리도록 그 안에 안배되었다.창세 1,28 참조. 그래서 태초부터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노동이다. 다른 피조물들이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행동은 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노동을 할 능력이 있으며, 오직 인간만이 노동을 하며, 동시에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지상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은 인간과 인간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시이며, 인격체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움직이는 개개의 인격체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리고 이 표시는 인간의 내면적 특성을 결정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본질 자체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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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는 오늘날의 인간 노동


1. 1981년 5월 15일은 위대한 교황 레오 13세의 사회 문제에 관한 회칙, 즉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말로 시작되는, 극히 중대한 회칙이 반포된 지 90주년이 되는 기념일이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본인은 이 문헌을 인간의 노동에, 나아가 광범위한 노동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바치고자 한다.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본인의 봉사직을 시작하며 펴낸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헤아릴 수 없는 구원의 신비 때문에 인간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이다."1) 그래서 이 길로 끊임없이 돌아와야 하며, 다양한 양상들 속에서 항상 새롭게 그 길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양상들 속에서 그 길은 모든 부와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든 노고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노동은 이러한 양상들 가운데 하나로, 항구하고 근본적인 것이며, 항상 적절한 것으로서 새로운 관심과 결정적인 증거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다. 새로운 질문들과 문제들이 늘 솟아나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희망이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인간 실존의 기본 영역에 따르는 새로운 두려움과 위협도 있다. 인간의 생활은 매일 노동으로 이루어지며, 노동에서 인간은 그 독특한 존엄성을 얻는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은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노고와 고통을 동반하고, 또한 개별 국가와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악과 불의도 안고 있다. 제 손으로 일하여 얻은 빵을 먹는다2)는 것도 진리이지만`─`이 말은 육신 생활을 영위시켜 주는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과학과 발전, 문명과 문화의 양식도 뜻한다`─`"이마에 땀을 흘려"3) 얻은 이 빵을 먹는다는 것도 영원한 진리이다. 말하자면 개인적인 노력과 노고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각 사회와 또한 전인류의 생활을 어지럽게 하는 긴장과 충돌 그리고 위기들 속에서 얻는 빵을 먹는다는 말이다.

기술, 경제, 정치적 여건에서 새로운 발전이 일고 있는 이즈음, 우리는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경축하고 있다. 이 새로운 발전은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대로 지난 세기의 산업 혁명 못지 않게 노동계와 생산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일반적인 특성으로 볼 때 많은 요인들이 있다. 여러 생산 분야에 점증적으로 도입되는 자동화, 에너지 및 원자재 가격 상승, 천연 자원의 고갈과 심각한 오염 현실의 증대, 수세기 동안 남에게 예속되어 왔던 민족들이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국제 협상에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정치적 부상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과 요구들은 현대의 경제 구조 및 노동 분배 구조를 재정립하게 하고 재조정하게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변화는 수많은 숙련공들에게 실직을 안겨줄지도 모르고, 비록 일시적이나마 재훈련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가 더욱 발전된 국가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저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원인이 될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가난 속에서 수모를 겪으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

이러한 변화가 인간 사회에 끼칠지도 모르는 결과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천명하고 그러한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들을 고발하여, 위에 언급한 변화들을 이끌어 인간과 사회의 참된 진보를 보장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사회 활동과 사회 교리의 유기적인 발전에 관해서


2. 인간에 관한 문제인 노동은 확실히 '사회 문제'의 핵심을 이룬다. 위에서 말한 「새로운 사태」가 반포된 이래 거의 백년 간, 교회의 사도적 사명에 관련된 가르침과 많은 시도들이 특히 이 사회 문제를 향해왔다. 노동에 관한 이 회칙도 다른 노선을 따르겠다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가르침과 활동에 대한 교회의 모든 전통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반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본인은 복음의 보고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기"4) 위하여 복음의 규범에 따라 노동에 관한 반성을 하고 있다. 인간이나 인간의 지상 생활이 옛 것이듯 확실히 노동은 옛 것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 문화, 문명 등의 그 다양한 양상들 속에서 연구 분석된 현대 세계의 전체적인 인간 상황은 인간의 노동에 관한 새로운 의미들을 찾아낼 것을 요구한다. 달리 말해서 이 분야에서 개인과 가정, 각 국가와 온 인류, 마침내는 교회 자신이 당면한 새로운 과제의 형성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사태」 반포 이래 사회 문제는 끊임없이 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역대 교황들의 많은 교서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문헌들, 각국 주교단의 성명서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국제적인 차원이나 지역 교회의 차원에서 정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교황청의 주도하에 있는 여러 기구들의 활동들을 들 수 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문제에 관해 표명한 모든 선언들과 그 투신은 여기서 상세하게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다. 이 분야의 모든 일을 조정하는 기구인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Pontificia Commissio a Justitia et Pace)가 공의회의 결과로서 발족되었는데 각국의 주교회의는 이에 부응하는 기구들을 갖추고 있다. 이 기구의 이름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사회 문제가 전체적이고도 통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세계에서 정의에 대한 투신은 평화에 대한 투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이중의 투신은 지난 90년 동안 많은 유럽 국가들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다른 대륙의 국가들을 괴롭힌 양차 대전에서 얻은 쓰라린 체험으로 확실히 뒷받침되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점증하는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그로 말미암아 무시무시한 자기 파멸에 대한 전망은 이 이중의 투신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최상 교도권으로 반포한 문헌들이 발전되어 온 주요 노선을 살펴본다면 바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언명들이 그 안에 명백히 천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세계의 평화에 관한 문제라면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 그 주요 핵심이 있다. 누구든 사회 정의 문제에 대한 발전상을 연구하려면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첫 시기는 회칙 [새로운 사태]가 반포된 때부터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주년] (Quadragesimo Anno)가 반포될 때까지로, 이 시기의 교회의 가르침은 '노동자 문제'를 각 국가들 내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 다음 시대에는 같은 가르침이 그 지평을 더 넓혀 '노동자 문제'가 전세계 안에서 다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빈부의 불균형한 분배, 발전된 국가와 대륙 그렇지 못한 국가와 대륙 간의 차이는 평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모두에게 정당한 발전이 보장되도록 그 방법을 찾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요한 23세의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그리고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등에 나타나는 가르침의 골자이다.

이와 같이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과 임무가 발전되어 온 추세를 살펴보면 사태의 상황을 매우 적절하게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계급 문제가 사회 문제의 핵심으로 특히 부각되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세계 문제로 그 강조점이 바뀌었다. 그래서 이제는 계급에 관한 것만이 주의를 끄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불평등과 불의에 관한 것들이 주의를 끌게 되었다. 그 결과 계급 문제뿐 아니라 현대 세계에서 정의를 구현시키기 위해 이행해야 할 임무에 관한 문제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대두되게 되었다. 현대 세계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사회의 불의에 대한 종전의 분석 의미를 더욱 심원하고 더욱 충만하게 드러낸다. 지상에 정의를 구현시키도록 노력하는 일이 오늘에 주어진 과제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불의한 구조들을 감출 것이 아니라 더욱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검토하여 변혁시키는 일이 요청된다.

노동 문제는 사회 문제의 관건


3.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을 진단하든지 복잡 다단한 사회 문제의 영역에서 교회가 그 가르침을 펴든지 이러한 모든 과정들 속에서 인간의 노동에 관한 문제는 자연히 빈번하게 대두된다. 이 문제는 사회 생활에서도 교회의 가르침에서도 이제는 불변의 요소가 되었다. 더욱이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 속에 노동 문제가 언급된 것은 훨씬 오래된 일로 최근 90년 동안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실상 교회의 사회 교리는 그 근원을 성서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특히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에 두고 있다. 처음부터 사회 문제는 교회의 가르침에 속해 있었다. 교회는 사회 속에서 인간과 생명을 인식했으며 특히 각기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 사회 윤리를 다루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유산은 「새로운 사태」를 필두로 하여 현대의 '사회 문제'에 관한 교황들의 가르침에 의해 상속되고 발전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노동 문제에 관한 연구는 영원하다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진리가 유지되는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본 회칙에서 이 문제에 관해 다시 한번 거론하는 것은─어쨌든 이 문제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다룰 뜻은 없다─교회가 이미 가르쳐온 것을 단지 총정리하고 반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쩌면 전보다 더 이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문제를 인간의 선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인간의 노동은 사회 문제 전체에 대한 관건, 아니 어쩌면 본질적인 핵심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발생하고 날로 복잡해지는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 또는 점진적인 해결책을 "인간의 생활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5)는 명제 아래 찾아야 한다면 그 핵심인 인간의 노동은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주석


1.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 14항: AAS 71(1979), 284면. [△]
2. 시편 127(128),2 참조. [△]
3. 창세 3,19. [△]
4. 마태 13,52 참조. [△]
5. 사목 헌장, 38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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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노동과 인간


창세기에 나타난 노동


4. 노동은 인간의 지상 실존에 있어 근본적인 영역이라고 교회는 확신한다. 인간에게 공헌해 온 많은 학문의 온갖 유산들을 보아서도 교회는 이러한 확신을 더욱 굳힌다. 인간학, 고생물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등 많은 학문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교회의 이러한 확신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성의 확신인 동시에 신앙의 확신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여기서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교회가 인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인간에게 자신을 표현하는데, 단지 역사적 체험에 비추어서만도 아니고, 다양한 학문적 인식 방법의 도움을 받아서만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표현할 때,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창조주요 구세주인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과 탁월한 섭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노동이 인간의 지상 실존에 있어 근본적인 차원이라고 확신하는 근거를 창세기의 맨 첫 장에서 발견한다. 때로는 그 표현 방법이 진부하기는 해도 이 대목을 분석해 보면 바로 창조의 신비를 서술하는 맥락 속에 인간에 대한 근본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진리들은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결정적인 것이며, 동시에 원초적인 정의로운 상태에서나 인간과 맺은 하느님의 원초적인 창조 계약이 범죄로 인해 파기된 후에나 이러한 진리들은 인간의 지상 실존에 중요한 선을 긋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남자와 여자로"1) 창조된 인간이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2)는 말을 듣는데, 이 말들은 노동에 관해 직접적으로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세상에서 인간이 수행할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참으로 이 말들은 극히 심오한 깊은 노동의 본질을 드러낸다. 적어도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다. 이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은, 모든 인간 존재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의 행위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타동' 활동, 즉 주체인 인간에 의해 시작되어 외적인 객체를 지향하는 행위로 파악되는 노동은 '땅'에 대한 인간의 특별한 지배를 전제로 하며 동시에 이 지배를 확인하고 발전시킨다. 성서에 나오는 '땅'이란 단어는 우선 인간이 거주하는 볼 수 있는 우주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분명히 이해된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볼 때 이 단어는 인간이 영향력을 발휘하며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세상 전체를 내포할 수도 있다. "땅을 다스리라"는 표현은 무한한 영역을 가리킨다. 그 표현은 땅(간접적으로는 볼 수 있는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들, 즉 일시적인 활동을 통해 인간이 찾아내 그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들은 변함없이 적절한 것이다. 이 말들은 과거의 문명과 경제뿐 아니라 현대의 현실 전체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발전의 양상까지를 다 포용한다. 이 미래에 펼쳐질 발전의 양상이란 어느 정도는 이미 암시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에게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인류 또는 각 국가들의 경제 생활과 문명화에 관하여 '가속화'의 시기라고 말하는데, 과학과 기술의 발전, 특히 사회 경제 생활을 위한 결정적인 발명들과 연결시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가속화' 현상들은 아주 오래된 성서 텍스트가 말하는 본질적인 내용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점점 더 땅의 주인이 되며 또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볼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굳혀가지만, 인간은 이러한 과정이 어떠한 경우에나 어떠한 단계에서 이루어지든 창조주의 원초적인 명령 안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필수 불가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동시에 이러한 과정은 보편적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존재를 포용하고, 모든 세대, 모든 양상의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발전을 포용한다. 동시에 그것은 개개의 인간 존재 안에, 개개의 의식적인 인간 주체 안에 일어나는 과정이다. 동시에 모든 개인은 거기에 포용된다. 개개인 각자는 모두 합당한 영역에서, 또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땅을 다스리는' 인간으로서 그 거대한 과정에 참여한다.

객관적 의미의 노동: 기술


5. '땅을 다스리는'과정에 대한 이러한 보편성과 동시에 다양성은 인간의 노동을 조명한다.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노동으로, 노동에 의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 의미로서의 노동이 부각되는데 그 표현은 여러 세기의 문화와 문명에서 발견된다. 동물들을 순화시키고 사육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음식과 옷을 얻으며, 땅과 바다에서 여러 가지 천연 자원을 얻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인간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땅을 경작하기 시작하여 거기서 얻은 것을 자신의 용도에 맞게 변형시킬 때 비로소 본래 의미의 '땅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농업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경제 활동의 첫번째 장이 되며, 생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한편 공업은 천연 자원이든 농산물이든 또는 광산품이든 화학 원료이든 간에 지상의 부를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인간의 노동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항상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이른바 서비스 산업 분야나 순수 이론적이거나 응용적인 연구 분야에 있어서도 옳은 이야기다.

공업과 농업에서 인간이 하는 일은 이제 대부분이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인간의 손과 근육의 노고를 덜기 위해 점점 더 완벽하게 기계화되기 때문이다. 공업뿐 아니라 농업에서도 점차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이 이루어놓은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산업 시대'의 시초부터 최근의 전자 기술이나 정밀 공업 기술과 같은 새로운 기술들을 통해 계속 이루어진 발전 양상까지를 통틀어 볼 때 이러한 사실은 문명화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산업 과정에서 마치 기계가 '일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인간은 단지 기계를 관리하고 작동시키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계를 유지시켜 나가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산업적인 발전이 새로운 양상으로 인간의 노동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터전이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노동자 문제를 야기한 최초의 산업화나 그 뒤를 이은 산업 시대와 후기 산업 시대의 변혁은 '노동'이 더욱더 기계화된 시대에도 노동의 합당한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란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산업 및 그와 관련된 분야인 현대의 전자 기술, 특히 소형화 작업과 관련하여 통신 및 원거리 통신 기술 등의 발전은 인간의 지성에서 나오는 노동의 협조자로서의 기술이 노동의 주체와 (넓은 의미의) 객체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 얼마나 막중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기술을 노동의 가능성이나 유용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노동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의 총체로 본다면, 기술은 의심없이 인간의 협조자이다.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수월케 하고 완전케 하며 신속하게 하고 증대시킨다. 기술은 과학 발달을 촉진시켜서 노동 생산의 양을 증가시키고 그 질도 향상시킨다. 그러나 예컨대, 노동의 기계화가 인간을 '밀어내고' 개인의 모든 만족감이나 창의력이나 책임감을 빼앗아버리거나, 많은 노동자들의 직업을 빼앗아버린다면, 또는 기계에 대한 과신으로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전락시킨다면, 기술은 인간의 협조자가 아니라 그의 적이나 다름이 없을 수도 있다.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을 산업 시대와 후기 산업 시대를 포함한 현대 전반에 걸친 맥락에서 알아듣는다면, 그 말씀은 또한 의심없이 기술과 관련을 맺으며, 인간의 재능으로 이루어진 노동의 산물이요 인간의 자연 정복에 대한 역사적 확신이기도 한 기계화된 세상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현대는, 특히 하나의 사회라는 의미의 현대는 기술을 경제 발전에 작용하는 주요인으로 당연히 평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는 바로 인간이 그 주체라는 점에서, 인간의 노동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들이 따라다녔고 지금도 항상 따라다닌다. 이 문제들은 특히 윤리적이고 윤리 사회적인 특성의 내용과 긴장을 안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들은 수많은 종류의 기구들, 국가들과 정부들, 그리고 체제들과 국제 기구들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며, 또한 교회에까지 도전한다.

주관적 의미의 노동: 노동의 주체인 인간


6. 땅을 다스리는 일이 인간의 의무라는 성서의 말씀과 관련 있는 노동에 대한 고찰을 계속하기 위해 우리는 객관적 의미에 기울였던 것보다도 주관적 의미의 노동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다방면에서 자신의 전공에 따라 학문을 하는 학자들과 노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에게 밀접하고 상세하게 알려진 광범위한 문제들만을 겨우 다루어왔을 뿐이다. 이 분석에서 우리가 언급하는 창세기의 구절이 객관적 의미의 노동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또한 주관적 의미의 노동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절은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또한 중대한 의미를 가득 지니고 있다.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서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천부적인 이성적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고 또 자신에 대해 결정을 할 수 있으며 자기 완성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이므로, 인간은 노동의 주체가 된다.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일을 하고 노동 과정에 속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수행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 객관적인 내용과는 별도로 인간의 인간성을 구현시키고, 바로 그 인간성 때문에 인간에게만 고유한 인격체로서의 소명을 완수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진리들은 최근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특히 인간의 소명을 다루는 제1장─에서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는 성서 문맥의 이 '다스림'이란 말은 노동의 객관적인 면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노동의 주관적인 면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인간과 인류가 땅을 다스리는 과정으로 이해되는 노동은, 그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다스리는 유일한 자로 확신할 때라야 비로소 성서의 이 근본 개념과 부합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다스림은 객관적인 차원보다는 주관적인 차원에 더 관계되며, 이 차원은 노동의 윤리적 본질 자체를 결정한다. 인간의 노동이 고유한 윤리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윤리적 가치를 성취하는 것이 인격체이며, 의식적이며 자유로운 주체, 즉 자신에 대해 결정하는 주체라는 사실과 명백하게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노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근본적이고 영원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진리는 모든 시대를 특징짓는 중대한 사회 문제들을 규정하는 데 있어 일차적인 의미를 지녀왔으며 지금도 지니고 있다.

고대에는 인간이 하는 일의 유형에 따라 인간을 여러 계급으로 구별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다. 노동자의 육체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육체 노동은 자유인에게는 무가치하다고 여겨 노예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전반적인 복음 메시지의 내용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 이미 구약에 속해 있는 몇 가지 양상을 확장시킴으로써 이 면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3)분이 지상 생활의 대부분을 목수의 작업대에서 육체 노동을 하면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그 자체가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노동의 복음'으로, 인간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근본이 우선적으로 노동의 종류가 어떤 것이냐에 있지 않고 노동을 하는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의 존엄성은 그 근거를 객관적인 차원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주관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볼 때 인간을 그 하는 일에 따라 여러 계급으로 구분했던 예전의 방법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것은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의 노동을 평가할 수 없다거나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노동의 주체인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여기에는 윤리성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결론이 즉시 따라온다. 즉, 아무리 인간이 일할 운명을 타고났고 소명을 받았다 해도 우선적으로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 누구나 당연히 노동의 객관적 의미보다 주관적 의미가 더 현저하게 부각됨을 깨닫게 된다. 상황을 이렇게 파악해 볼 때 인간이 하는 여러 가지 일들에 크든 작든 객관적인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의 주체, 즉 일을 성취하는 개인인 그 인격체의 존엄성을 척도로 삼아 각각의 노동은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노동이 그 활동에 대한 목적─때로는 대단히 요청되는 것이지만─을 지닌다 해도 모든 인간이 하는 노동과는 별도로 이 목적만으로는 아무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사실 결론적으로 분석해 볼 때, 어떤 노동이든 인간이 하는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사회 통념상으로 단지 '서비스'로서의 가치밖에 없거나 대단히 단조로워서 소외된 노동으로서의 가치밖에 없다 하더라도 노동의 목적은 항상 인간인 것이다.

가치 전도의 위협


7. 노동에 대한 바로 이러한 중요한 명제들이 풍요한 그리스도교적 진리로부터, 특히 '노동의 복음'에 관한 메시지 자체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와 새로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산업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 노동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유물론적이고 경제주의적인 사상을 지닌 여러 가지 동향들에 반대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는 어떤 사람들은 노동을 일종의 '상품'으로 이해하고 취급했다. 노동자, 특히 산업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팔리는 것으로 본 것이다. 고용주란 동시에 자본주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생산을 가능케 하는 모든 노동 도구와 수단을 소유한 자를 뜻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특히 19세기 초반에 널리 퍼졌다. 그 뒤에 이런 종류의 노골적인 표현들은 거의 사라지고 노동에 대해 더욱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노동자와 생산 도구 및 수단 사이의 상호 작용은 여러 가지 형태의 집산주의와 병행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자본주의에는 새로 구체화된 상황들과, 노동자의 조합들과 공공 기관의 활동들, 그리고 대규모의 다국적 기업들의 출현 등으로 인해 생긴 또 다른 사회 경제적인 요인들이 개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재화 생산을 위한 특별한 종류의 '상품'이나 또는 어떤 비인격적인 '힘'(흔히들 '노동력'이라 표현한다)으로 취급할 위험이 항상 따른다.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유물론적 경제주의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질 때 위험이 항상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평가하기 위한 체계적인 기회(어떤 의미로는 자극)가 일방적으로 물질 문명으로만 치닫는 급격한 발전 과정에 의해 마련된다. 그래서 노동의 객관적인 영역에 일차적으로 중요성을 부여한다. 반면에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노동의 주체와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주체는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와 같은 모든 경우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모든 사회 상황 속에서는 맨 처음부터 창세기의 말씀으로 규정된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심지어는 전도되기조차 한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노동과 독립하여 홀로 노동의 실제적인 주체요, 만든 자, 창조한 자로 대접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화 생산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취급된다.4) 그 계획이나 이름이 어떻든 거기서 발생하는 바로 이러한 질서의 전도는 정당하게도 '자본주의'라 일컬어지는데 아래에서 더 충분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반대되는 하나의 체제, 즉 경제 사회적인 체제로서 명백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제 과정`─`생산 구조에서 우선적인 것은 노동이다`─`에 대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분석해 볼 때 초기 자본주의의 오류가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 오류란 인간이 물질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을 말하는데, 즉 물질적인 생산 수단의 총체로서, 하나의 도구로서 취급되며 자신이 하는 노동의 참된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인간이 주체요 만드는 자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생산 과정 전체의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취급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관련된 말씀에 비추어본 인간의 노동에 관한 분석이 어찌하여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의 참된 핵심에 이르는가를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개별 국가들이나 더 크게는 국제 관계나 대륙간의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경제적인 정책의 양상 전반에 걸쳐 중심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 특히 세계 속에서 느끼는 동서 진영의 긴장뿐 아니라 남북간의 긴장을 생각할 때에 더욱 그렇다. 이와 같은 현대의 윤리, 사회적인 문제의 영역에 관하여 요한 23세는 회칙 「어머니요 스승」에서 그리고 바오로 6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특별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다.

노동자들의 결속


8. 인간의 노동을 그 주체라는 차원, 다시 말해서 노동을 하는 것은 인격체인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루려한다면 [새로운 사태] 반포 이후 90년 동안 노동의 주관적인 영역과 관련하여 발전되어 온 것들을 적어도 개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비록 노동의 주체는 항상 동일하게 인간이지만, 객관적인 면에서는 폭넓은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의 주체라는 이유로 볼 때 노동은 하나의 단일한 것(하나이며 매번 반복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 객관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보면 많은 노동이 있다. 즉, 노동의 종류는 다양하다는 것을 수긍하게 된다. 문명의 발달은 끊임없이 이 분야를 넓혀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노동 형태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들은 사라졌다는 것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 원리로 보아 이러한 것은 으레 있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혹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어떤 불규칙적인 요소들이 끼어들지 않았는지, 끼어들었다면 얼마나 끼어들었는지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이 같은 광범위한 변칙 사태가 때로는 '프롤레타리아 문제'라고 기술되기도 하는 이른바 '노동자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문제와 이와 관련된 문제들이 정당한 사회적 반발을 야기시켰으며, 노동자들 특히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 대단히 돌발적인 결속을 이루게 하여 격렬한 위험 사태로 몰고 갔다. 노동자들 특히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려는 산업 현장에서 더욱더 전문화되고 단조로우며 비인격화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결속할 것을 요청하고 단체 행동을 할 것을 요청한 것은 사회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하고 설득력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지위 하락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노동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임금의 착취와 전대 미문의 노동 조건, 노동자에 대한 사회 보장 문제 등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반발은 노동 세계를 커다란 결속력을 지닌 하나의 공동체로 결합시켰다.

[새로운 사태」나 그 후에 반포된 교회 교도권의 수많은 문헌들이 주장하는 노선을 따른다면,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던 당대의 노동자들이 하늘을 향해 복수를 요청하며5) 자기네들을 무겁게 짓누르던 부당하고 악랄한 체제에 대해 반발한 것은 사회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당한 처사였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태는 '경제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적인 사회 정치적 체제에 유리하였다. 이 체제는 단지 자본가들에 의해서만 경제의 주도권이 강화되고 보호되는 체제였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은 단지 생산의 도구이며, 자본이 생산의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요인이요 목적이라는 것을 근거로 내세워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체제였다.

그때부터 노동자의 결속은 더욱더 명백해지고 더욱더 분명해진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각성과 더불어 많은 상황에서 대단히 큰 변화를 초래했다. 신자본주의 또는 집산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여러 가지 새로운 체제들이 안출되었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고 생산 관리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 사실상 그렇게 한다. 노동자들은 적절한 조직을 통해 노동의 조건과 보수, 또한 사회법 제정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사상 체계나 권력 체제 그리고 사회의 여러 계층에서 생겨난 새로운 관계들이 극도의 부조리를 그대로 용인하거나 새로운 부조리를 만들어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문명과 통신의 발전은 전세계적으로 인간의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에 대한 더욱더 완전한 진단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노동 세계에서 특별한 결속을 위해 노동자들 사이에 일치를 자극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한 다른 형태의 불의도 드러냈다. 이것은 산업 혁명의 과정을 치른 나라들에서 있었던 사실이다. 또한 농업이나 그와 유사한 일을 주요한 노동 영역으로 삼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있었던 사실이다.

노동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결속(이 결속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협력을 배제하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운동은 상황이 다른 집단들과 관련을 맺을 필요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집단들은 전에는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체제와 생활 조건이 바뀜에 따라 사실상 무산 계급화(Proletarianization)라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거나, 비록 명칭이야 그렇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그런 명칭을 붙일 만한 '무산 계급' 상태에 이미 현실적으로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하는 '지식 계급(Intelligentsia)'으로 이루어진 어떤 부류나 집단에게도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교육받을 기회가 늘어나고 해당 분야에서 학위나 자격증을 얻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될 때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와 같이 지식인들의 실직이 생기거나 늘어나는 것은 그들이 받은 교육이 사회가 참으로 필요로 해서 요청하는 고용이나 봉사 형태에 맞지 않거나, 또는 교육 내지는 전문 교육을 요구하는 노동의 수요가 육체 노동의 수요보다 적을 때, 또는 보수가 적을 때이다. 물론 교육은 그 자체로 항상 가치 있는 것이고, 인간의 인격을 풍요롭게 하는 중대한 요소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산 계급화'의 과정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동의 주체와 그 주체의 생활 조건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 도처에서, 여러 나라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사회 정의를 구현시키려면 노동자들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항상 새로운 결속 운동이 필요하다. 노동의 주체에 대한 사회적 지위 격하,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그리고 빈곤과 기아 지역의 증가는 이러한 결속이 현실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교회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한다. 교회는 이를 자신의 사명이며 봉사요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는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시간에 나타난다. 많은 경우에 가난한 이들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존엄성이 침해된 결과로 나타난다. 인간의 노동을 위한 기회가 실직의 결과로 제한되거나 또는 노동과 그에 따른 권리, 노동자 자신과 그 가족의 부양을 보장하는 권리가 평가 절하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생긴다.

노동과 인간의 존엄성


9.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맥락 안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존엄성을 더욱 밀접하게 규정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적어도 대략적으로라도 다룰 때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들이 노동의 특수한 도덕적 가치를 더욱 충분히 특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땅을 정복하여라"6)라는 성서의 말씀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의 주권을 노동을 통해서 행사해야 한다는 창조주의 뜻이 이 말씀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과의 원초적인 계약을 깨뜨리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7)는 말씀을 듣게 되었어도, 하느님의 모습대로 그분과 비슷하게 창조된8)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의도는 철회되거나 취소되지 않았다. 하느님의 이 말씀은 그때부터 인간의 노동에 따르는 때때로 힘든 노고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노동이 땅을 '주도하는' 자로서의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세상에 대한 지배를 성취시키는 도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노고는 누구나 체험하는 것이라서 누구나 다 안다. 노고는 때때로 예외적인 노동 조건에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노고는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헤치며'9) 땅을 가꾸는 일로 긴 나날을 보내는 농부들뿐 아니라, 광부들, 석공들,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일하는 제련공들, 주택 및 기타 건설 현장에서 자주 상해 내지 죽음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익숙해 있다. 또 비슷하게는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들, 과학자들,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릴 책임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노고는 밤낮으로 환자들의 병상을 지키는 의사와 간호원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노고는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자신들의 역할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가정과 자녀 양육의 책임과 매일매일의 무거운 짐을 지는 여성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노고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친숙한 것이며, 노동이 보편적인 사명이기 때문에 노고는 모두에게 친숙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노고 때문에 노동은 인간에게 좋은 것이다. 성 토마스의 결론대로 노동은 비록 힘든 선10)이란 특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노동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노동은 그것이 유용하거나 즐길 만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좋은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 달리 말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부합하는 것,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높여주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좋은 것이다. 노동의 윤리적 의미를 더 명백히 정의하고자 한다면 누구나 이 진리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노동이 인간에게, 인간의 인간성에 좋다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을 자기 필요에 따라 이용하면서 자연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기 완성을 이루어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더 인간답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이 없이는 근면이 덕이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고, 더군다나 왜 근면이 덕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덕이란 하나의 도덕적 관습으로서 인간을 인간으로서 선하게 만드는 것11)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노동으로 물질은 가치를 얻게 되나 인간 자신은 존엄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12) 하는 정당한 걱정을 떨쳐주지 못한다. 또 잘 알려진 바로는, 인간을 거슬러 여러 가지 형태로 노동을 이용할 수 있고, 고립된 집단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이란 체제로 인간을 처벌할 수 있으며, 노동이 인간을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노고, 달리 말해서 노동자를 착취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노동의 사회적 질서와 함께 덕으로서의 근면과 관련된 도덕적 의무를 긍정적으로 요청한다. 이 도덕적 의무는 노동으로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기력이 쇠진될 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특히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이나 주체성이 파괴되기 때문에라도, 노동으로 인간성이 격하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과 사회: 가정과 국가


10. 인간의 노동에 관한 개인적 차원에 대해 이렇게 확인했으니, 우리는 노동에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제2의 가치 영역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노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이며 소명이기도 한 가정 생활을 이루는 기본이다. 이 두 가지 가치 영역─하나는 노동에 연결되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생활에서 가정이라는 성격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다─은 올바르게 일치되어야 하고 올바르게 서로 스며들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노동은 가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되는데, 그것은 가정이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정상적으로 얻는 생활 유지 수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노동과 근면은 또한 가정에서의 교육 과정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이가 다른 일들 가운데 노동을 통해서 '인간답게 되고', 인간답게 되는 일이 엄밀히 말해서 교육 과정 전체의 주요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노동의 두 가지 국면이 여기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하나는 가정 생활과 그 유지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의 목적들, 특히 교육의 성취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의 두 가지 국면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많은 점에서 상호 보완한다.

가정이 인간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윤리적 질서를 형성하는 데 막중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점을 상기하고 인정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항상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이 회칙에서 우리는 이 문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가정은 노동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인 동시에 누구에게든 집안에 있는 노동을 배우는 최초의 학교가 된다.

노동의 주체라는 이러한 관점에서 파생하는 제3의 가치 영역은 특별한 문화적 역사적 연관을 기초로 하여 인간이 속해 있는 대사회(大社會)와 관계가 있다. 국가라는 성숙한 형태를 아직 갖추지 않았을 때라도 이러한 사회는 각 개인이 가정 안에서 어떤 특정 국가의 문화를 결정하는 내용과 가치를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도 각자에게 위대한 '교육자'일 뿐 아니라, 또한 모든 세대에 걸쳐 노동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인간성과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자신의 노동으로 동료들과 함께 공동선의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이 전인류,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유산 증대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세 가지 영역은 그 주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의 노동에 항상 중요하다. 그리고 이 차원은, 달리 말해서, 노동자의 구체적 현실은 객관적인 차원보다 우위에 놓인다. 주관적인 차원에서 창세기의 말씀대로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계에 대한 '지배'가 우선적으로 실현된다. '땅을 다스리는' 바로 그 과정, 즉 노동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특히 금세기에 거대한 발전을 이룩한 기술적인 수단으로 표시된다. 이 발전은 노동의 객관적 차원이 인간의 품위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박탈하거나 감소시키지 않고, 주관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 한 유익하고 긍정적인 현상이다.

주석


1. 창세 1,27. [△]
2. 창세 1,28. [△]
3. 히브 2,17; 필립 2,5-8 참조. [△]
4. [사십주년], 55항: AAS 23(1931), 221면 참조. [△]
5. 신명 24,15; 야고 5,4; 창세 4,10 참조. [△]
6. 창세 1,28 참조. [△]
7. 창세 1,26-27 참조. [△]
8. 창세 3,19. [△]
9. 히브 6,8; 창세 3,18 참조. [△]
1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II, q.40, a.1,c.; I-II, q.34, a.2, ad 1 참조.
11. [신학대전], I-II, q.40, a.1,c.; I-II, q.34, a.2, ad 1 참조. [△]
12. [사십주년], 55항: AAS 23(1931), 221-222면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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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역사의 현단계에서 본 노동과 자본의 투쟁


투쟁의 차원


11. 위에서 살펴본 노동의 기본 문제들에 대한 개관은 성서 첫 대목에서 착상을 얻은 것으로, 어떻게 보면 이는 다양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전세기를 내려오며 변하지 않았던 교회 가르침의 근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새로운 사태] 반포를 전후로 하여 얻은 체험은, 그 가르침에 특별한 의미와 실질적인 영향력을 부여하는 배경을 형성한다. 요컨대, 노동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는 막중한 실재로 인식된다. 노동은 바로 노동의 주체인 인간과 인간의 이성적 행위에 밀접히 연결된 실재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이라는 이 실재는 인간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고 그 가치와 의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노고와 노력이 따른다 해도 노동은 역시 좋은 것이며, 그래서 인간은 노동을 사랑함으로써 진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교육적이고 가치 있는 인간 노동의 특성은 오늘날 인권의 영역에 관한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도 그 기조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노동이 지닌 이러한 특성은 노동에 관한 국제적인 선언들과 여러 나라의 입법부에서 제정한 노동법 안에 그리고 노동 문제에 관한 사회적, 사회 과학적인 활동에 전념하는 기구들이 마련한 '노동 규약'들 안에 명백히 나타난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일을 강화시켜 나가는 기구가 국제 노동 기구(ILO)이며, 이 기구는 국제 연합(UN)에서도 아주 오래된 특별 기구 가운데 하나이다.

적어도 노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주요한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서, 본인은 비교적 자세하게 이 중대한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본인은, [새로운 사태」의 반포로써 상징적인 시대 구분이 지어진, 최근에 형성된 교회 가르침의 주요 문제들을 무엇보다도 먼저 취급해야 한다.

아직 다 지나가지 않은, 이 시대 전체에 걸쳐 노동 문제는 산업 발달의 시대에, 산업 발전과 더불어 부각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커다란 투쟁의 바탕이 되어왔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이란, 소수이지만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기업주나 생산 수단을 지닌 사람들의 집단과, 생산 수단을 갖지 못해 단지 노동으로만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대다수 사람들 사이의 투쟁을 말한다. 이 투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기업주들의 자의에 맡긴 반면, 기업주들은 최대 이윤 추구의 원리에 따라 고용인들의 노동에 대해 가능한 한 최저 임금을 책정하려고 하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게다가 여기에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건강과 생활 조건에 대한 보장의 결여 그리고 노동 안전 시설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다른 착취 요소들도 있다.

사회 경제적 계급 투쟁으로 해석되는 이러한 투쟁은 자본주의라는 이념으로 이해되는 자유주의 그리고 노동 계급과 전세계적 무산자들의 대변자로 행세한다고 공언하는 이론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이해되는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이념적 투쟁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실제적인 투쟁은 하나의 조직적인 계급 투쟁으로 바뀌어 이념상의 수단뿐 아니라 주로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역사와 양측의 주장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철학에 근거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 투쟁이야말로 사회의 계급적 불의를 제거하고 계급 자체를 없애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생산 수단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집단적인 차원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인간의 노동을 착취로부터 보전할 수 있게 한다는 생산 수단의 집단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이 투쟁 목표이며 이 투쟁은 이념 수단만이 아니라 정치 수단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산자의 지배라는 원칙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따르는 정당으로서의 집단은 혁명 세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생산 수단의 사유를 배제하고 집단 체제를 도입하기 위하여 모든 사회의 권력 독점을 추구하고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국제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나 이념가들에 의하면, 이러한 행동 강령의 목표는 사회 혁명을 성취시키고 사회주의를 도입하여 결국은 전세계를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현대의 사회, 경제, 정치, 국제 생활의 전반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세한 부분까지 다룰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방대한 문헌들과 체험을 통해서 그러한 문제들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엽적인 문제들보다는 차라리 이 회칙의 주제인 인간의 노동에 대한 근본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이처럼 중대한 문제, 즉 인간의 지상 생활과 그 소명에 대한 근본적인 차원을 이루고 있는 이 문제는 현대의 전체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할 때에 비로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의 우위성


12. 오늘날의 상황 구조는 인간에 의해 야기된 수많은 투쟁들이 현저하며 인간의 노동이 만들어낸 기술 수단은 이 같은 구조 안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 능력을 지닌 핵전쟁으로 인한 전세계적 파멸의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우리는 우선 교회가 항상 가르쳐왔던 원칙, 즉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원칙은 생산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다. 생산 과정에서 노동은 항상 주요 동인(Efficient Cause)이 되지만, 생산 수단의 집적인 자본은 다만 하나의 도구 또는 도구인이 될 뿐이다. 이 원칙은 인간의 역사적 체험의 총체에서 얻은 명백한 진리이다.

인간은 땅을 지배해야 한다는 성서의 첫 장을 읽을 때, 우리는 이 말씀이 가시적인 세상에 내재해 있고, 인간의 임의에 맡겨진 모든 자원에 관한 언급이라는 것을 안다. 어쨌든 이 자원들은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소유권 문제는 맨 처음부터 노동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자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자원을 자기 자신과 남을 위해 이용하도록 하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노동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이 자원들이 어떤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지하, 해양, 지상, 우주 등 자연의 다양한 부 가운데 작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자기의 일터로 끌어들여 차지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노동을 위하여 자연의 부를 소유하는 것이다.

동일한 원칙은 이러한 과정의 후속 단계에도 적용되는데, 그 첫단계는 인간이 자연의 자원 및 부와 항상 관련을 맺게 한다. 이 부들을 발견하고 인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할 목적으로 지식을 얻으려 하는 이 모든 노력이 가르쳐주는 바는, 그것이 노동이거나 생산 수단의 총체 또는 (노동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산 수단에 관련된 기술이거나 간에 경제적인 생산 과정 전체를 통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의 부와 자원을 전제로 하는데, 이 부와 자원은 인간이 발굴해 내는 것이지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생산 과정에서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이미 인간을 위해 준비된 부와 자원을 발굴하는 것이다. 인간은 노동의 모든 발전 단계에서 자연에 의해, 달리 말해서 궁극적으로 볼 때 창조주에 의해 마련된 선물의 주역이라는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인간의 노동에는 처음부터 창조의 신비가 작용한다. 이 확언은 이미 서두에서 말한 것이고, 이 회칙 전반을 이끌어가는 근간이며, 마지막 부분에 가서 더욱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겠다.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면 할수록, 우리가 마침내 익숙하게 지칭하게 된 자본에 대한 인간 노동의 우위성을 우리는 더욱 확신하게 된다. 자본의 개념은 인간이 자의로 쓸 수 있는 자연 자원만이 아니라 인간이 이를 자기의 필요에 따라 변형시키는(어떤 의미에서는 자원을 인간화시키는) 수단의 총체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수단들은 인간의 노동이 이룬 역사적 유산의 결과라는 점이 즉각 드러나게 된다. 원시적인 단계에서부터 초현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 수단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온 것은 바로 인간이고, 인간의 경험과 지성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주 간단한 농기구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하여 기계, 공장, 실험소, 컴퓨터같은 더욱더 현대적이고 복잡한 기구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노동에 기여하는 모든 것, 즉 현 기술 수준에서 최고도로 완벽한 '도구'를 이루는 모든 것은 노동의 결과이다.

이런 거대하고 강력한 도구─어떤 면에서는 '자본'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생산 수단의 총체─는 노동의 결과이며 인간 노동의 표징을 지니고 있다. 현재와 같은 기술 발전의 시대에 노동의 주체인 인간은 생산 수단인 현대적인 도구들을 모아 이용하고자 할 때, 이러한 도구들을 발명하고 계획하고 만들고 또 완전케 하고 또 계속 사용할 사람들이 이룬 노동의 결과를 잘 알고서 이용해야 한다. 노동 능력, 즉 현대의 생산 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은 더욱더 치밀한 준비와 무엇보다도 적절한 훈련을 요구한다. 그러나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은, 그가 비록 어떤 특별한 훈련이나 자질이 필요치 않은 노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생산 과정에 있어서 진정하고도 유효한 주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은 모든 도구가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단지 인간의 노동에 종속되는 도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교회의 가르침이 남긴 유산의 일부로서, 노동 제도에 관한 문제와 전반적인 사회 경제 체제와 관련해서 항상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강조하고 역설해야 할 점은 생산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우위, 즉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본이라는 개념에 속하는 모든 것은 다만 사물의 집적일 뿐이다. 인간은 노동의 주체로서 그가 하는 노동에서 독립하여, 인간 홀로 인격체이다. 이 진리는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경제주의와 물질주의


13. 위에서 말한 이 진리에 비추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본이 노동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된다. 결코 노동이 자본에 대립되거나 자본이 노동에 대립되는 것일 수 없으며,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더구나 이러한 개념의 이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될 수는 없다. 노동 문제의 본질과 부합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내적으로 참되고 윤리적으로 정당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올바른 노동 제도라고 할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즉, 위에 개진된 원리에 상응하려는 노력을 통해 근본적으로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을 극복할 때이다. 이때의 원리는 노동의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우위성, 인간의 노동에 대한 주체성, 노동자가 하는 노동의 성격에 관계없이 전 생산 과정에 있어서 효과적인 참여의 원리이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은 생산 과정의 구조나 경제 과정의 구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경제 과정은 노동과 우리가 항용 자본이라 부르는 것이 서로 얽혀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드러낸다. 어떤 일터에서 일하든지, 그 일이 비교적 원시적이든 초현대적이든 가리지 않고,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두 가지 유산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유산이란 자연 자원을 통해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고, 또 주로 기술의 발달, 즉 노동을 위해 더욱 완벽한 온갖 도구를 생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자원을 토대로 이미 발전시켜 놓은 유산이다. 인간은 또한 노동으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참여하게 된다."1) 우리의 지성에 의해,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인도되는 신앙에 의해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인간 노동의 국면과 과정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변치 않는 관념이며, 인본주의적이고 동시에 신학적인 것이다. 이 관념에 따라 인간은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그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만물의 주인이다. 만일 노동 과정에서 어떤 종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된 모든 자원을 '주시는 분'에 대한 종속이고, 우리 자신의 노동에 있어서 완전해지고 증가된 가능성을 그 노동과 창의력으로 안겨준 인류에 대한 종속이다. 우리는 생산 과정에서의 모든 것, 즉 '사물'과 도구 그리고 자본의 총체가 인간의 노동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총체가 마치 비인격적인 '주체'이기나 하듯이 인간과 인간의 노동을 종속적인 위치에 놓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을 엄격히 유지시켜 주는 이 변치 않는 관념은 실생활에 있어서 오랜 잠복기를 거친 다음에 인간의 사상 속에서 파괴되었다. 이러한 파괴는 노동이 자본에서 분리되어 반대의 입장에 서고 또 자본이 노동과 상치되어 일어났다. 마치 두 개의 비인격적인 힘이기나 하듯이, 동일한 '경제적' 전망 안에 있는 두 생산 요인이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 진술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내포되어 있는데, 인간의 노동을 단지 그 경제적인 목적에 따라서만 고려하는 경제주의의 오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근본적인 오류는 경제주의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물질의 우위성과 우선권에 대한 확신을 내포하고 또 인간의 행위와 도덕적 가치 등과 같은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물질에 예속시킨다는 점에서 물질주의의 오류라고 불릴 수 있고 또 그렇게 불려야 한다. 이는 완벽한 의미에서의 분명한 이론적 물질주의는 아니지만, 실천적 물질주의이다. 실천적 물질주의는 유물론자의 이론에서 나오는 전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특별한 방법, 즉 물질적인 것에 대한 즉각적이고 커다란 매력에 근거한 재화의 어떤 서열에 따라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경제주의의 범주에 드는 사고의 오류는 물질주의 철학의 발생과 병행하였는데, 물질주의 철학은 가장 기초적이고 통속적인 단계(정신적 실재를 피상적 현상으로 격하시키려 하기 때문에 통속적 유물론이라고도 불린다)로부터 변증법적 유물론이라 불리는 단계까지 발전되었다. 어쨌든 현재의 이 고찰로 볼 때 경제주의는 인간의 노동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녔던 것 같다. 특히 노동과 자본을 분리시켜 위에서 말한 경제주의적인 관점에서 두 가지 생산 요인으로 서로 대립되도록 했고, 물질주의 철학 체계보다 먼저 이 문제를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진술하는 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것은 변증법적 형태를 포함한 유물론이 인간의 노동에 관한 사고를 위해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유물론은 자본 도구에 대한 인간의 우위와 사물에 대한 인격의 우위를 적절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확증하고 지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도 인간은 무엇보다도 노동의 주체가 아니며, 생산 과정의 동인도 아니고, 다만 물질적인 것에 예속되어, 주어진 기간에 목적을 달성하는 경제적이고 생산적인 관계에서 '결과'를 내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고 취급될 뿐이다.

확실히 여기서 본 노동과 자본의 모순─어떤 의미로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노동이 마치 경제 과정 속에서의 여타의 요소들처럼 단지 하나의 요소이기나 하듯이 자본과 분리되어 반대 입장에 서게 되는 모순─은 단지 18세기의 철학이나 경제 이론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의 경제 사회적 실상의 총체에서 발생했다. 그 시대는 산업화가 시작되어 급격한 발전을 이루면서 다만 물질적 부와 수단의 증대 가능성에만 주력하고, 산업화의 목적인 인간, 즉 그 수단의 혜택을 받아야 할 인간을 도외시한 때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에게 타격을 주고,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윤리적으로 당연한 사회적 반응을 야기시킨 것은 이러한 실제적인 오류였다. 만일 사람들이 똑같은 이론과 실제를 전제로 사고한다면, 초기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관련되었고 이제는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동일한 오류가 시대와 장소만을 달리한 환경에서 되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있다고 여겨지는 단 하나의 기회는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의 적합한 변화, 즉 사물에 대한 인격의 우선권 그리고 생산 수단의 총체로서의 자본에 대한 인간 노동의 우선권을 철저하게 확신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 변화를 통해서이다.

노동과 소유


14. 여기서 간단히 진술한 역사적 과정은 확실히 그 초기 단계를 넘어서 있으나, 아직도 일어나고 있으며, 국가와 대륙 간의 관계 속에서 참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확실히 우리는 노동과 자본 간의 대립에 대해서 말할 때 단지 어떤 추상 개념이나 또는 경제 생산에서 작용하는 '비인격적 힘'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두 개념의 이면에는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즉, 한편에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는 아니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기업주로 행세하며 생산 수단을 소유하거나 소유자들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소유 또는 재산 문제가 처음부터 이 복잡한 역사 과정 전체에 개입된다. 사회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는 [새로운 사태] 역시 이 문제를 강조하였다. 사유 재산권이 생산 수단의 문제가 되었을 바로 그때 사유 재산권과 소유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확인한 것이다. 회칙 [어머니요 스승」도 같은 문제를 강조했다.

당시에도 교회가 천명했고 지금도 교회가 가르치는 위의 원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주창하는 전체주의의 강령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 반포 후 수십 년 간 여러 나라에 실천되어 왔다. 동시에 이 원리는 자유주의와 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는 정치 체제가 실행하는 자본주의 강령과도 다르다. 자본주의의 경우, 소유권이나 재산권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이 권리를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결코 고집하지 않았다. 반대로, 창조된 모든 재화를 사용하는 것은 모든 이의 공동 권리라는 넓은 의미에서 항상 이해해 왔다. 즉, 사유 재산권은 재화가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공동 사용권에 예속된다.

더군다나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소유권이 노동에 있어서 사회적 투쟁의 배경을 형성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 적이 없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재산권은 노동에 기여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을 통하여 얻어진다. 이는 특별한 방법으로 생산 수단의 소유에 관련된다. 이러한 수단을 개인의 재산으로 고립시켜서 '노동'에 대립되는 '자본'의 형태로 만들거나 더구나 노동을 착취하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이러한 수단과 그 소유의 본질 자체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 수단은 노동을 거슬러 소유될 수 없고 한갓 소유를 위한 소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소유─그것이 개인 소유이든, 공공 소유이든 아니면 집단 소유이든 간에─에 대한 정당한 명분은 오로지 노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고, 노동에 기여함으로써 이 질서의 첫번째 원리, 즉 재화의 보편적인 목적과 재화의 공동 사용권을 성취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노동과 인간을 위한 재화에의 공동 접근에 대해 고려한다면, 어느 누구도 적절한 조건하에서의 어떤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배제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태]가 반포된 지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 교회의 가르침은 항상 이 모든 원리들을 상기시켜 왔는데, 이미 오래된 전통에서 형성된 논리, 예컨대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에 나타나는 저 유명한 논리2)에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인간의 노동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이 문서에서는, 노동의 우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리고 사회 생활 특히 역동적인 '전체 구조'의 주체로서 인간의 품위를 보증하기 위하여, 언제나 분투해 왔고 계속 분투하고 있는 교회 가르침의 모든 노력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극단적' 자본주의의 입장, 즉 경제 생활에 있어서 생산 수단에 대한 절대적인 사적 소유권을 불가침의 '신조'로 주장하는 입장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노동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은 사적 소유권이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건설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생산 수단의 총체인 자본이 동시에 여러 세대에 걸친 노동의 산물이라는 점이 옳다면, 자본은 이 모든 생산 수단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창조되는 것이며, 이 수단들은 현세대의 노동자들이 매일매일 일하고 있는 하나의 큰 일터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또한 옳다. 분명히 우리는 여기서 종류가 서로 다른 노동, 즉 이른바 육체 노동뿐 아니라 사무직과 경영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정신 노동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 비추어볼 때, 가톨릭의 사회적인 가르침에 있어서 전문가들과 교회의 최고 교도권3)에 의해 제기된 많은 제안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 또는 이윤에 참여하거나 이른바 노동에 의한 주권 소유 등 노동 수단의 공동 소유를 위한 제안들이다. 이 다양한 제안들이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든 없든, 생산 과정에서 노동과 노동자의 정당한 위치에 대한 인식은 생산 수단에 대한 소유의 권리에 있어서 다양한 적응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는 지난날의 상황에서뿐 아니라, 이른바 제3세계와 특히 아프리카와 그 외의 지역에서 과거에는 식민지였다가 최근에 독립한 수많은 신생국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금세기 후반의 여러 문제들과 전체적인 상황을 비추어볼 때 더욱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즉 광의의 인권과 인간 노동에 관련된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개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고정' 자본주의의 입장은 계속적으로 수정되어야 하지만, 이 많은 간절한 개혁들은 생산 수단의 사유에 대한 원천적인 제거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그 동일한 관점에서 천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단지 소유자의 손아귀에서 생산 수단(자본)을 빼앗는 일이 만족할 정도로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충분히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생산 수단은 어떤 사회 집단, 즉 사유자의 재산에 그치지 않고 조직된 사회의 재산이 되며, 다른 집단, 즉 소유하지는 않지만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전국적 지역적 경제의 차원에서 생산 수단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지배와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권력 집단은 노동의 우위성이라는 관점에서 그 임무를 만족스럽게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집단은 스스로 생산 수단의 관리와 임의 사용권을 독점하고 심지어는 기본 인권의 침해까지도 서슴지 않아 자신들의 임무를 그릇되게 처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전체주의 체제에서의 단순한 생산 수단 국유화는 그 재산의 '사회화'와는 전혀 다르다. 오로지 사회의 주체적 특성이 보장될 때, 달리 말해서 각자가 자신의 노동을 근거로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노동하는 커다란 일터에서 자신도 하나의 소유자라고 온전히 생각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할 수 있는 한, 노동을 자본의 소유에 연관시키는 일이며, 가능한 한 경제, 사회, 문화적인 목적을 지닌 광범위한 중간 집단들을 형성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중간 집단들은 공권력에 대해서 진정한 자율성을 누려야 하고, 상호간의 진정한 협력과 공동선의 요구에 따라 그들 고유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이 집단들은 각기 집단의 구성원들이 인격체로서 대우받고, 그 집단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고무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명실상부한 살아 있는 공동체들이 되어야 한다.4)

'인격주의' 논거


15. 그리스도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 원리'는 사회 도덕 질서의 전제 조건이다. 이는 생산 수단의 사유 원리 위에 이룩된 체제에서뿐 아니라 이런 사유권이 철저하게 제한된 체제에서도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보든 노동은 자본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결코 자본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단지 경제적인 전제의 결과로서 근세기에 인간의 생활을 억압해 왔던 생산 수단에 대한 분리와 대립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모든 생산 수단을 사용해서 노동할 때 이 노동의 결과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쓰여지기를 바라고, 또한 책임성과 창조성을 나누어가진 자로서 자신이 일하는 일터에서 바로 그 노동 과정에 참여할 수 있기를 원한다.

여기서부터, 노동의 의무에 상응하는 노동자 고유의 권리들이 발생한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다음에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개괄적으로 보아, 노동을 하는 인격체가 자신의 노동에 대해 다만 정당한 보상만을 원할 뿐 아니라, 또한 노동을 하는 중에 그것이 비록 공동 소유라 하더라도 '자신을 위해서' 노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대비책이 생산 과정 안에 갖추어지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아 인식은 지나친 관료적 중앙 집권 체제 안에서는 사라져버린다. 이 체제 안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위에서부터 조종되는 거대한 기계 안에 있는 한낱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고 또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지닌 노동의 참된 주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순한 생산 수단이라고 느끼게 된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의 노동이 경제뿐만 아니라 특히 인격적인 가치에도 관계가 있다는 강력하고도 깊은 확신을 항상 표명해 왔다. 경제 체제 자체와 생산 과정은 이러한 인격적 가치가 온전히 존중될 때 틀림없이 이익이 된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에 따르면,5) 이것이 바로 생산 수단의 사유권을 옹호하는 주요 이유가 된다. 우리가 비록 사유권의 원리에 따를 수 있는 예외`─`이 시대에도 '사회화된 소유권'이라는 체제가 도입되는 것을 본다`─`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인격주의적인 논거는 원리 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면에서도 여전히 그 효력을 지닌다. 생산 수단에 대한 어떠한 사회화라도 그것이 타당하고 또 좋은 결과를 내려면 이 논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체제에서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을 한다는 자의식을 항상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온갖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만일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경제 과정 전체에 헤아릴 수 없는 폐해가 불가피하게 생기게 되고,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에 대한 폐해를 가져오게 된다.

주석


1. 요한 4,38 참조. [△]
2. 재산권에 대하여 [신학대전], II-II, q.66, a.2와 6; De Regimine Principum, 제1권 15.17장; 재산권의 사회적 기능에 관해서는 [신학대전], II-II, q.134, a.1, ad 3 참조. [△]
3. [사십주년], 29항: AAS 23(1931), 199면; 사목 헌장, 68항 참조. [△]
4. [어머니요 스승], 71항: AAS 53(1961), 419면 참조. [△]
5. [신학대전], II-II, q.66, a.2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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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 76%
IV. 노동자의 권리


인권의 광범위한 맥락 안에서


16. 노동은, 그 모든 의미에 있어서, 하나의 책임 즉 의무이며, 이는 노동자 편에서 볼 때 권리의 원천이 된다. 이 권리들은 인간 권리 전체로서의 광범위한 맥락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인권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며, 다양한 국제 기구들에 의해 수많은 인간 권리들이 천명되었고 각 국가들이 자국민들을 위해 인권을 보장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인권의 존중은 현대 세계의 평화를 위한 근본 조건이 되고 있다. 그 평화란 특히 회칙 [지상의 평화] 이래 교회의 교도권이 수차례 강조한 것으로서 개별 국가 사회뿐 아니라 국제 관계의 평화를 말한다. 노동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권은 인간 기본권의 광범위한 맥락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 안에서, 노동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권은 위에서 개설한 대로 인간 노동 특유의 본질에 상응하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특성을 염두에 두고 그 권리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미 말한 대로, 노동은 인간의 편에서 볼 때 하나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그 말이 지닌 모든 의미에 있어서 이는 진실이다. 인간은 노동을 해야 한다. 우선 창조주가 노동을 명령했기 때문이고, 또 그 유지와 발전을 위해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인간 자신의 인간성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에서 특히 자기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위해, 자신이 태어난 국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한 구성원으로 있는 전인류 가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수많은 세대에 걸친 노동의 상속자이며 동시에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의 뒤를 따라올 사람들이 이룩할 미래 건설의 참여자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그 넓은 의미로 이해되는 노동의 도덕적인 의무를 이룬다. 우리가 노동과 관련하여 각자가 이러한 의무에 상응하는 도덕적 권리를 지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면, 우리는 노동하는 모든 주체의 노동이 잘 드러나는 광범위한 영역 전체의 관련 문제에 항상 유념해야 한다.

우리는 노동의 의무와 이에 따르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말할 때 우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勞使關係)를 생각한다.

직접 고용주와 간접 고용주 사이의 구별은 노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방법과 노동 현장에서 정당하거나 또는 부당한 관계들의 성립 가능성을 고려할 때 아주 중요하게 여겨진다.

직접 고용주는 노동자가 일정한 조건에 따라 직접 노동 계약을 맺는 사람이거나 단체이므로, 우리는 직접 고용주와는 달리 많은 요인들, 즉 노동 협약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동 현장에서 정당하거나 부당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을 간접 고용주로 이해해야 한다.

직접 고용주와 간접 고용주


17. 간접 고용주라는 개념은 개인들과 다양한 단체들뿐 아니라 그 개인들과 단체들이 규정하여 전 사회 경제 체제를 결정하거나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집단 노동 계약과 행동 원리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간접 고용주'라는 개념은 다른 많은 요소들과 관련을 맺는다. 간접 고용주의 책임은 그 단어 자체가 책임이 한층 덜 직접적임을 지적하듯이, 직접 고용주의 책임과는 다르지만 진정한 책임을 지니는 것만은 사실이다. 즉, 간접 고용주는 여타의 노동 관계 국면을 실질적으로 규정하므로, 구체적인 조건하에서 실제 노동 협약과 노동 관계를 규정하려는 직접 고용주의 행동에 제약을 가한다. 이는 직접 고용주 자신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행동을 규제하는 전반적인 영향력에 주의를 환기시킬 뿐이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노동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영향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노동자의 객관적 권리들이 충분히 존중될 때 비로소 그 정책은 올바른 것이 된다.

간접 고용주라는 개념은 모든 사회에, 우선적으로는 국가에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국가가 정당한 노동 정책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재의 세계적인 경제 체제에서 개별 국가들 사이에 다양한 유대가 맺어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수출입 과정, 즉 원자재이든 반제품이든 완제품이든 간에 경제적인 재화의 상호 교환 속에서 그 유대가 맺어지고 있다. 이러한 유대는 또 상호 의존을 유발시켜 그 결과 어느 나라에서든, 아무리 경제 강국이라 해도, 완전한 경제 자립 또는 자급 자족을 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호 의존 체제는 그 자체로는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또한 여러 가지 유형의 착취나 불의의 기회로 쉽게 이용될 수 있으며, 그 결과 개별 국가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 노동의 정당한 주체인 개개의 노동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들과 나아가 대규모의 산업 생산 수단들을 운용하는 기업들(이른바 다국적 기업 또는 국제 기업들)은 자기네들의 생산품 가격을 가능한 한 최고 가격으로 책정하는 반면에 원자재나 반제품에 대해서는 최저 가격을 책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국가간의 소득 불균형을 점점 더 크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대단히 부유한 국가들과 극도로 가난한 국가들 사이의 격차가 줄어들거나 현상이라도 유지하기는커녕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어, 가난한 국가들을 명백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분명히 그 격차는 각 지역의 노동 정책과 경제적으로 불리한 사회에 있는 노동자의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그러한 여건하의 체제에서, 직접 고용주는 노동자들의 객관적인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노동 조건을 정한다. 특히 직접 고용주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에서(또는 생산 수단의 소유가 '사회화된' 상황하의 자영 기업으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의 이윤을 얻으려고 할 때 그런 노동 조건을 설정한다.

간접 고용주라는 개념과 관련된 이러한 의존 형태의 구조가 극히 광범위하고 복잡 미묘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구조는 기존 사회와 국가의 경제 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든 요인들뿐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의존 관계와 그 형태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노동자의 권리 추구를 단순히 대규모든 소규모든 최대 이윤이라는 기준에 의해 운용되는 경제 체제의 결과라고만 운명지울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노동자 즉 육체 노동자이거나 정신 노동자이거나 또는 공장 노동자이거나 농업 노동자 등 모든 형태의 노동자의 객관적인 권리에 대한 존중은, 개별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든 경제 정책과 거기서 파생되는 국제 관계의 모든 체제 안에서, 전체 경제를 형성하는 타당하고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국제 연합을 필두로 해서 이에 관심있는 모든 국제 기구들은 이러한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국제 연합의 국제 노동 기구와 국제 식량 기구(FAO)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단체들 또한 이 점에 관해서 새로운 공헌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각국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행정 부서나 공공 기관은 물론 다양한 사회 단체들이 설립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노동자의 온전한 권리 존중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간접 고용주가 중요하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권리는 모든 사회 도덕 질서의 핵심인 것이다.

고용 문제


18. '간접 고용주', 즉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노동 정책의 수립 과정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고찰하자면, 우리는 먼저 근본적인 문제, 즉 일자리를 찾는 문제, 달리 말해서, 노동력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적절한 고용 문제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분야에 있어서 정의롭고 올바른 상태에 대립되는 것은 실업 상태, 즉 노동 능력이 있는 사람을 위한 일자리가 없는 상태이다. 이는 전반적인 실업 문제일 수도 있고 어떤 분야의 노동에만 국한되는 실업 문제일 수도 있다. 간접 고용주라는 이름에 속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실업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실업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죄악이며, 실업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실제로 사회의 재앙이 될 수 있다. 특히 실업이 문화적이고 기술적인 준비와 직업적인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공동체의 경제 사회적 발전에 책임 있게 참여하겠다는 젊은이들의 각오와 일을 하려는 그 진지한 소망이 비참하게 좌절되는 것을 보기란 고통스러운 일이다. 실업 수당을 제공해야 할 책임, 즉 실업자와 그 가족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적절한 구호금을 마련해야 할 의무는 이 영역의 도덕 질서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재화의 공동 사용 원리 또는 다른 간단한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과 생존의 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업의 위험에 대처하고 완전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서, '간접 고용주'로 정의된 사람들은 기존 사회의 경제 생활뿐 아니라 문화 생활까지도 형성해 가는 다양한 종류의 노동에 관한 전반적인 계획을 마련하여야 한다. 그들은 또한 그 노동을 올바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조직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결국 이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국가가 져야 하지만 이 말은 공권력에 의한 일방적 중앙 통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의롭고도 합리적인 조정이 문제이다. 그러한 조정의 구조는 인간 노동의 주체성에 관하여 앞에서 얘기한 바를 유념하면서, 개인이나 자유 집단, 지역의 노동 단체나 산업 단지의 자율성을 보장하여야만 한다.

여러 사회와 국가들의 상호 의존과 다양한 협력의 필요성이 의미하는 것은 사회와 국가가 그 사회 안에서 노동을 계획하고 조직하는 현장에서 각기 그 주권을 보존하면서도, 이 중요한 분야에 있어서 국제 협력 차원의 행동이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또한 이런 조약이나 협약의 기준은 더욱더 모든 인간의 기본 권리로 간주되는 인간 노동이라는 기준이어야 한다. 즉, 노동은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슷한 권리를 주며, 이러한 방법으로 다른 사회에 있는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에 있어 부당하고 또 폭력 반응까지 유발하기 쉬운 현저한 격차들을 점점 더 축소시킬 것이다. 이러한 분야에서 국제 기구들이 할 일은 막중하다. 그러한 기구들은 복잡 다단한 상황과 자연적이고 역사적이며 민족적이거나 또는 이와 비슷한 다른 환경이 일으키는 영향을 정확히 진단하여 스스로 그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국제 기구들은 또한 공동으로 결정한 행동 계획들과 관련하여 더욱더 효과적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 계획들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어야 한다.

이런 방향에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지침에 따라, 보편적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알맞는 발전 계획의 실행은 가능하다. 이 발전에 있어서 건설적인 요소는 인간 노동의 지속적인 재평가이다. 또한 교회가 천명해 온 정의와 평화, 이를 위해 모든 개인과 모든 민족의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기도해 온 정의와 평화의 정신으로 그 발전을 평가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모든 노동의 객관적인 목적성에서 그리고 모든 노동의 주체, 즉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지속적인 재평가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발전이란 인간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인간 안에서 그 결실을 맺어야 한다. 이러한 발전의 시금석은 노동의 목적에 대해 점차로 성숙해지는 인식 그리고 노동의 주체인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여 노동에 내재하는 권리에 대해 점차로 보편화되고 있는 존중이 될 것이다.

각 사회와 국가에 어울리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합리적인 계획과 올바른 조직은 다양한 고용, 즉 농업, 산업, 기타 용역 분야의 노동과 정신 노동, 학문적이거나 예술적인 노동 사이에서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리고 각기 사회와 인류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다양한 고용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노동이 지닌 많은 가능성에 따른 인간 생활의 조직은 적절한 교육 체제에 걸맞는 것이어야 한다. 교육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성숙을 목적으로 하며 또한 사회적으로 분화되어 있는 광범위한 노동 세계에서 적당한 일자리를 유리하게 얻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특별히 준비시킨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전세계 인류 가족 전체를 볼 때, 우리를 극도로 당혹하게 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실이란 현저한 자연 자원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실직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별 정치 공동체 안에 그리고 대륙적 세계적 차원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극히 중대한 핵심 문제인 노동과 고용의 조직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는 사실이다.

임금과 기타 사회적 혜택


19. 인간의 노동이란 관점에서 양도할 수 없는 인권에 대한 존중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노동자들에게 고용의 기회를 배려해야 하는 중대한 역할을 살펴보았으므로, 요컨대 노동자와 직접 고용주 사이의 관계 안에 형성되어 있는 이 권리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위에서 간접 고용주란 주제에 관해 다룬 모든 것은 이 관계들을 간접적으로 형성하는 다양한 조건들을 열거함으로써 이 노사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고찰은 단지 서술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관한 소론도 아니다. 이것은 의무적이고 도덕적인 국면을 강조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사회 윤리의 핵심 문제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 문제이다. 현재의 상황 아래서, 노동에 대한 보수는 올바른 노사 관계를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생산 수단이 사유화된 체제나 생산 수단의 소유가 어느 정도 '사회화'된 체제에서 노동이 이루어질 때, 고용주(우선적으로 직접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는 임금, 즉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토대로 하여 해결된다.

또한 사회 경제 체제의 정의와 어떠한 경우든 그 체제의 정의로운 기능은 결국 그 체제 안에서 인간의 노동이 정당한 보상을 받느냐 하는 데에서 평가된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윤리적 사회적 질서 전체의 제1원리, 즉 재화의 공동 사용 원리로 되돌아간다. 모든 체제에 있어서, 체제 내 자본과 노동의 근본 관계와는 무관하게, 임금 즉 노동에 대한 보수는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 재화든 가공 재화든 공동 사용을 지향하는 그 재화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실제적인 수단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보수로 받는 임금을 통해서 그 재화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정당한 임금은 사회 경제 체제 전체의 정의를 실증하는 구체적인 수단이며, 또한 어떠한 경우이든 그 체제가 정의롭게 운용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이 된다. 정당한 임금은 판단의 수단일 뿐 아니라 특별히 중대한 수단, 즉 핵심 수단이 된다.

이 판단 수단은 거의 모든 가정에 관련된다.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성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란 가정을 꾸려 적절히 유지하기에 충분하고 가정의 장래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보수를 의미한다. 이러한 보수는 이른바 가족 임금, 즉 가장의 노동에 대한 보수로 다른 배우자가 가사 이외에 다른 유급 직업을 갖지 않아도 가족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단순 임금이거나, 또는 가족 수당이나 가사에만 전념하는 어머니들에게 주어지는 배우자 보조금 같은 다른 사회 조처를 통해 주어질 수 있다. 이러한 보조금은 자신의 생활에 상응하는 책임을 질 위치에 있지 않는 동안은 실질적인 필요, 즉 부양 가족의 수에 상당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머니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경험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에 따르는 노고, 그리고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숙성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책임있는 인격체로 자라날 수 있도록 애정어린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는 요구도 역시 재평가되어야 한다. 어머니가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고 심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지 않으며, 또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여 아무런 열등 의식도 느끼지 않으면서, 자녀들의 나이에 따른 다양한 요구에 맞추어 자녀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데 헌신할 수 있게 한다면 이는 그 사회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가정 밖에서 보수가 따르는 노동을 하기 위해 이러한 과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와 가정의 선익이라는 면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사명이라는 근본 목적에 반대되거나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1)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전체 노동 과정은 각자의 필요와 생활 유형, 특히 가정 생활을 고려하고, 연령과 성별을 참작해서 조직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이 더욱 일반적인 차원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실상 많은 사회에서 여성들은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노동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 본성에 맞게 그들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차별 대우를 받지 않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서 제외되지 않고, 또한 그들 가족의 염원이 무시되지 않고 남자들과 더불어 사회의 선익에 공헌하는 여성 본래의 역할이 충분히 존중되는 가운데 여성들은 그 임무를 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참다운 지위 향상이 이루어지려면 그 지위 향상을 위해 여성 본래의 것을 포기하거나, 어머니로서의 둘도 없는 역할을 지니고 있는 가정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노동이 조직되어야 한다.

임금 외에도,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생활과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 보장이 여기서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건강 보호를 위한 비용, 특히 노동 중에 일어나는 사고의 경우, 의료 혜택이 노동자를 위해 쉽게 베풀어져야 하며, 가능한 한 그 혜택은 저렴하거나 무상이어야 한다. 사회 보장의 다른 측면은 휴식의 권리와 관련된 분야이다. 우선 휴식의 권리는 적어도 일요일을 포함한 정기적 주간 휴식과 장기간의 휴가, 즉 1년에 한 번의 연가 또는 가능하다면 연중 수차례의 단기 휴가를 포함한다. 사회 보장의 셋째 분야는 연금의 권리와 노후 대책 그리고 산업 재해 보험에 대한 권리이다. 이러한 기본 권리들의 영역 안에서, 노동에 대한 보상과 더불어 노사 관계를 결정하는 전체적인 특수 권리 체계가 발전되어 나온다. 이러한 권리들 가운데서 노동자의 신체적인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에 손상을 끼치지 않는 노동 환경과 작업 과정에 대한 권리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노동 조합의 중요성


20. 이 모든 권리들은 노동자들의 자기 보호를 위한 필요성과 더불어 다른 또 하나의 권리, 즉 단결권을 갖게 한다. 여러 직업 분야에 고용되어 사람들의 생존 권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제단체를 형성할 수 있는 권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체들을 노동 조합이라 부른다. 노동자들의 생존 권익은 어느 정도 모든 노동자들에게 공통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러 노동 형태와 직업 형태는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이러한 단체들은 이를 특별히 고려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노동 조합은 그 기원을 중세 장인들의 동업 조합(Guild)에 두고 있는데, 그 단체들은 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노동을 토대로 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노동 조합과 동업 조합은 본질적인 점에서 서로 다르다. 현대의 노동 조합은 노동자들─일반 노동자들 그러나 특히 산업 노동자들─이 기업가들이나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들과 맞서서 그들의 정당한 권리들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해 왔다. 이 노동 조합들의 임무는 노동자들의 권리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그들의 실존적인 권익을 보호하는 일이다. 역사의 체험은 이러한 형태의 조직들이 특히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 있어서 사회 생활의 불가분의 요소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분명히, 이는 오직 산업 노동자들만이 이런 형태의 단체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직업의 대표자들은 그들 고유의 권리 보장을 위해 그러한 단체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농업 노동자들의 농민 조합, 정신 노동자들의 조합, 또한 고용주 단체들도 있다. 위에서 이미 말한 대로, 모든 단체들은 각기 구체적인 직업의 전문화에 따라 단체 또는 소단체로 세분된다.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노동 조합들이 단지 사회의 '계급'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라거나 불가피하게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계급 투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 조합들은 노동자들의 개별 직업에 따라, 참으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을 대변하는 것이다. 어떻든 이 투쟁은 정의로운 선을 '위한' 정당한 노력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현재의 사정으로는, 직업으로 결합된 노동자들의 요구와 그 공헌에 상응하는 선을 위한 정당한 노력이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투쟁이어서는 안된다. 비록 투쟁은 다른 사람들과 반대 성격을 드러낸다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사회 정의의 선을 지향하려는 것이지, '투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거나 반대자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성격은 우선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데 있다. 여기에 노동의 사회적인 힘, 즉 공동체를 건설하는 힘이 있다. 결국에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생산 수단을 경영하거나 소유하는 사람들이 어떻든 간에 이 공동체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의 이러한 기본 구조에 비추어서─결국 어떤 사회 체제에서든 노동과 자본은 생산 과정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라는 사실에 비추어서─명확한 것은 비록 노동의 필요성 때문에 노동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결합했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조합은 사회 질서와 결속의 건설적인 요인이라는 사실이며, 이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같은 직업으로 연합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정당한 노력은 국가의 전반적 경제 상황에 따른 제약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

노동 조합의 요구가 비록 생산 수단 소유 체제와 생산 수단 경영 방식에서 발견되는 모든 결함에 대한 시정을─사회 전체의 공동선이라는 관점에서─목표로 할 수 있고 또 이를 목표로 해야 하나, 노동 조합이 일종의 '이기주의' 집단 내지 계층으로 전락될 수는 없다. 사회 생활과 사회 경제 생활은 확실히 '연결 기관'의 조직과 같아서, 특정 집단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모든 사회 활동은 이 체제와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 조합 활동은 분명히 공동선에 대한 지혜로운 관심으로 이해되는 정치 분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노동 조합의 역할은 오늘날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표현으로서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 조합은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정당의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노동 조합은 어느 정당의 결정에 예속되거나 정당과 너무 밀접하게 유착되어서는 안된다. 실상 이런 상황에서는, 조합이 그 고유한 역할, 즉 사회 전체의 공동선이라는 틀 안에서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역할을 쉽게 상실하고, 그 대신에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개별 직업에 따라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한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물론 개별 직업에 있어서 무엇이 노동의 주체적 성격을 결정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것이 노동 주체의 고유한 품위를 규제하는가에 유념해야 한다. 노동 조합의 활동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많은 가능성들을 열어주고 있으며, 그 활동은 노동자들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며 또 노동자들의 자기 교육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이러한 활동 분야에서 발전해 왔으며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교육 사업, 즉 노동자 대학 또는 공민 대학으로 알려진 학교나 직업 연수 과정 등은 치하할 만한 일이다. 그러한 노동 조합들의 노력에 감사하며, 항상 바라는 것은 노동자들이 더욱 많이 소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이 모든 면에서 더욱더 충분히 인간성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 조합이 조합원들의 정당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은 상대 집단 특히 고용주들에게 대항하는 최종 수단으로서 파업 또는 작업 중지가 있다. 이 방법은 올바른 조건과 정당한 한도내에서는 합법적인 것이라고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인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은 파업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따라서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여 어떠한 개인적인 처벌이나 규제를 받아서는 결코 안된다. 파업이 합법적인 수단이란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파업이 어떤 의미에서는 극단적인 수단이란 것을 강조해야 한다. 파업이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 파업을 남용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인 공동체 봉사가 문제될 때, 필요하다면 적절한 입법 수단을 통해서라도 그러한 봉사는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파업 무기의 남용은 사회 경제 생활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으며, 이는 노동 자체의 본성에 따른 사회의 공동선의 요구에 상반되는 것이다.

농업 노동의 존엄성


21. 노동의 품위와 인간 노동의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차원에 대해 이토록 길게 얘기한 모든 것은 농업 노동의 문제와 들에서 땀을 흘리며 땅을 가꾸는 사람들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농업 노동은 이 지구상에서 대단히 광활한 분야로, 어떤 대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또 발전과 진보가 이미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사회에만 제한된 것도 아니다. 농업 세계는 사회가 매일 그 유지를 위해 필요로 하는 재화를 공급해 주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농촌 인구와 농업 노동의 조건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농민들의 사회적 지위는 나라마다 다르다. 이는 농업 기술의 발달 수준뿐 아니라 또한 그 이상으로 농업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에 대한 인정, 그리고 결국에는 노동의 사회적 윤리에 대한 인식 수준에 달려 있다.

농업 노동은 심각한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 어려움으로는, 회복 불가능하고 때로는 소멸되어 버리는 육체 노력과 사회의 무관심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농민들은 자신들을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느끼게 되고,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집단 탈출하는 이농 현상을 가속화하게 되며, 불행하게도 그들의 생활 여건은 더욱 비인간화되고 있다. 적절한 직업 훈련이나 마땅한 장비가 부족하고, 일종의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으며 또한 객관적으로 불의한 상황이 농업 노동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어떤 개발 도상국들에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남의 땅의 소작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한치의 땅이나마 소유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대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 농업 노동자들 자신과 그 가족들이 노년이나 질병 또는 실직의 경우에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도 없다. 오랜 기간의 어려운 육체 노동에 대한 보수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지주들은 경작할 수 있는 땅도 방치해 두고 있다. 다년 간 직접 경작해 온 작은 땅덩이에 대한 법적 소유권도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의 '토지 소유욕' 앞에서는 무가치해지거나 무력해진다. 과학적 연구와 기술의 발달 그리고 국가 정책으로 농업을 매우 유리한 수준에까지 올려놓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들까지도 농업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봉사와 관련한 결정에 참여할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또는 농민들이 그들의 정당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을 목표로 하여 자유롭게 단체를 형성하는 결사의 권리를 거부함으로써 노동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근본적이고도 긴급한 변혁이 요구되고 있다. 농업─그리고 농촌 사람들─의 가치를 사회 공동체 전체의 발전 안에서 건전한 경제의 근간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변혁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 모든 노동 특히 농업 노동의 존엄성을 천명하고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 농업 노동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땅을 '정복'하여 가시적인 세상에서 인간의 '다스림'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노동


22. 최근에 국가 단체와 국제 기구들은 노동에 관련되는 또 하나의 문제이면서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문제인 장애인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장애인들 또한 천부적이고 신성하며 침해할 수 없는 권리에 상응하는 온전한 인간 주체이며, 그들의 육체와 기관에 미치는 어떠한 제약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분명히 인간의 존엄과 위대함을 드러낸다. 장애인들도 모든 권리를 가진 주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 그들의 능력에 따라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장애인은 우리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에 온전히 참여한다. 그래서 기능이 온전한 사람들에게만 공동체 생활을 허락하여 노동을 하게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당하며, 만인에게 공통된 인간성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한다는 것은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 약하고 병든 사람에게 실제로 심각한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된다. 객관적 의미로서의 노동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성, 즉 노동의 주체에 종속되어야 하지 경제적 이익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노동계와 관련된 여러 단체들, 즉 직접 고용주와 간접 고용주 모두 효율적이고 적절한 조치로 장애인들의 직업 훈련이나 노동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여, 장애인들이 그들에게 알맞는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 점에서 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이 법적인 면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생겨난다. 그러나 공동체, 즉 공권, 단체나 중재 집단, 기업과 그리고 장애인 자신이 그 생각과 힘을 다하여 포기할 수 없는 목표, 즉 장애인들에게도 그들의 능력에 따라 노동이 주어질 수 있다는 목표를 달성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목표는 인격체로서, 노동의 주체로서의 그들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 공동체는 이런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또는 적절한 직업을 제공하는 공기업이나 사기업에서 그리고 이른바 '보호' 기업이나 그 주변에서 일터를 찾아주거나 만들어주는 적당한 제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다른 노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애인들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노동 조건과 그들에게 주어지는 정당한 보상, 그들의 지위 향상 가능성, 그리고 여러 가지 장애의 제거 등에 특별한 배려를 해야 한다. 이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는 않으나, 주체적 의미로서의 노동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게 되기를 바란다. 장애인들이 노동계에서 동떨어져 있지도 않으며 사회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유익하고 온전한 노동의 주체이며, 인간 존엄성을 존중받는 자로서, 그들 특유의 능력에 따라 가정과 공동체의 진보와 복지에 기여할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노동과 이민 문제


23. 마지막으로, 일자리를 찾는 이민의 문제에 관해 간단하게나마 언급해야 하겠다. 이것은 대단히 오래된 현상이면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왔고, 복잡한 현대 생활의 결과로서 오늘날에는 더욱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현상이다. 다른 지방에서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찾기 위하여, 인간은 여러 가지 동기에서 고향을 떠날 권리와 또한 다시 귀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확실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없지는 않다. 우선 그가 뒤에 두고 떠나는 나라에서 보면 이민은 일반적으로 상실을 뜻한다. 그것은 역사와 전통과 문화로 결속되었던 큰 공동체의 한 구성원인 인간이 떠나는 것이며, 그가 다른 문화와 흔히 다른 언어로 결합된 다른 사회의 한가운데서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노동의 주체 하나를 잃는 것이다. 그 주체는 심신의 노력으로 고국의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었을 터이나, 그 노력과 기여를 어떤 의미에서는 고국보다 열등한 권리밖에 없는 다른 사회에 바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민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악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환경에서는 말 그대로 필요악이 된다. 이 물질적인 악이 더 큰 도덕적 손실을 수반하지 않도록 모든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물론 현재까지 확실히 많은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실제로 이민자의 고국과 이민국은 그 개인과 가정, 사회 생활에 이익을 보장하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분야의 많은 문제들은 정당한 법, 특히 노동자들의 권리와 관련되는 법에 달려 있다. 확실히 정당한 법에 대한 문제는 특히 노동자들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현재 고찰하고 있는 맥락 속에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일은 고향을 떠난 노동자가, 영구 이주자이든 계절 노동자이든 간에, 노동의 권리라는 문제에 있어서 그 사회에 있는 다른 노동자들과 비교해 볼 때 불이익의 처지에 놓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일자리를 찾아나서는 이민이 결코 재정적 사회적 착취의 기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노동 관계에 있어서도, 해당 사회의 다른 모든 노동자들에게처럼 이민 노동자들에게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노동의 가치는 동일한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지, 국적이나 종교 또는 인종에 따라 달리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커다란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민들 스스로 느끼는 절박한 처지를 착취에 이용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 상황은, 물론 특성이 고려된 후에, 인간의 존엄성에 밀착되어 있는 노동의 근본 가치에, 절대적으로 양보해야 한다. 즉, 한번 더 기본 원리를 반복해야 하겠다. 가치 질서와 노동 자체의 깊은 의미는 자본이 노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이 자본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주석


1. 사목 헌장, 67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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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노동의 영성


교회의 특별한 임무


24.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이하여 인간의 노동에 관하여 고찰해 온 이 반성의 마지막 부분을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노동의 영성에 할애하는 것이 옳겠다. 노동은 그 주체적인 면에서 볼 때 항상 인간의 행위(Actus Personae)이다. 따라서 영과 육의 전인간이 노동에─육체 노동이든 정신 노동이든─참여한다.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말씀, 즉 구원의 복음 메시지 또한 전인간을 지향하고 있다. 이 메시지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노동에 관한 많은 점을 발견하며, 복음 메시지는 인간의 노동을 특별히 조명해 준다. 이러한 점들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인도를 받는 인간의 영혼 편에서의 어떤 내적인 노력은 이러한 점들을 통하여 개개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 앞에서 가지는 의미를 부여받게 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 때문에 노동은 그와 관련된 다른 정상적이고 특별히 중요한 요소들과 동등하게 구원 과정 안에 들어간다.

교회는 노동에 관하여, 노동의 인간적인 가치와 노동에 속하는 도덕적 질서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며, 교회는 이를 복음적 메시지 전체를 전하는 봉사의 중대한 과제 가운데 하나로 본다. 동시에 교회는 노동의 영성 형성을 특별한 의무로 인식하고 있다. 이 노동의 영성은 사람들이 노동을 통하여 창조주이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며,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하게 한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웅변적으로 가르치는 대로, 사제요 예언자요 왕이신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에 신앙을 통하여 실제로 참여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깊게 해줄 것이다.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


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대로, "인간이 세기를 통하여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노력해 온 이 거대한 노력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한다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명백한 일이다. 과연,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의롭고 성스럽게 우주를 통치하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며 자신과 전우주를 하느님께 바쳐드리라는 명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전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1)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역량의 한계 내에서 어떤 의미로는 창조주의 활동을 계속 발전시키고 우주 만물 전체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와 자원을 발견하여 이를 더욱더 진보시키고 그 창조 활동을 완성시킨다는, 근본 진리로서 심오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성서의 첫 장인 창세기에서 발견하는데, 창조 활동 자체는 하느님께서 '엿새'동안 하신 '일'2)과 일곱째 날의 '휴식'3)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게다가 성서의 마지막 책은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4) 하고 선포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적인 '노동'을 통하여 이룩하시는 업적에 관하여 동일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하루 하루 창조의 날에 대한 묘사를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5)라는 진술로 결론을 내리는 창세기와 비슷하다.

창세기 맨 첫 장에서 발견되는 창조에 대한 이러한 서술은 또한,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노동의 복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의 존엄성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만이 홀로 하느님을 닮았다는 독특한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자신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창세기는 가르쳐주고 있다. 하느님 자신이 당신의 창조 활동을 '노동과 휴식'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그리고 휴식을 하면서 하느님을 닮아가야 한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6) 하고 증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이러한 창조 활동은 이 세상에서 항상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무에서 존재에로 부르신 세상의 실존을 창조하시는 힘으로 일하시며, 태초부터 당신 '아버지의 집'7)에서 '당신과 일치하여 쉬도록'8) 운명지어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구원하시는 힘으로 일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동도 단지 '일곱째 날'9)마다 한 번씩 쉬기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은 단지 외적인 행동으로 인간의 힘을 사용하는 것만일 수는 없다. 인간의 노동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더욱더 인간 본연의 존재가 되어 주님이 당신의 종과 친구들을 위해 마련한 '휴식'10)을 누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공의회의 가르침대로 "지극히 일상적인 활동"에까지 고루 미쳐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와 가족들의 생활 유지를 위하여 노동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는 남녀는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속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에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11)

노동의 이러한 그리스도교 영성은 모두가 나누어갖는 유산이어야 한다. 특히 현대에서 정신과 마음이 긴장되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노동의 영성은 성숙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낸 것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을 가진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 인간의 능력이 커질수록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의 책임도 더욱 확대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우주 건설에서 인간들을 외면시키거나 동료들의 복지에 무관심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12)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창조 사업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여러 분야에서 노동을 받아들이는 아주 심원한 동기를 이룬다. 교회 헌장에서 우리는 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피조물 전체의 깊은 본질과 그 가치와 하느님의 찬미를 위한 그 목적을 인정하고 세속 활동을 통해서도 더욱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로써 세상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젖을 것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누리며 스스로의 목적을 더욱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 내적으로 고양되어 세속의 분야에서 그들의 역량과 활동을 통하여 힘차게 노동을 해야 한다. 그러할 때 창조주의 섭리와 그 말씀(성자)의 비추심을 따라, 인간의 노동과 기술과 문명으로써, 창조된 재화를 완성시킬 수 있다."13)

노동하는 인간, 그리스도


26.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 자신의 활동에 참여한다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강조하셨다. 나자렛에서 그분을 처음 본 청중들이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14) 하고 놀라워하였던 그 예수님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원한 지혜의 말씀인 '복음'을 말로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셨다. 그것은 또한 '노동의 복음'이었다. 복음을 선포한 그분 자신이 나자렛의 요셉처럼 노동하는 인간, 즉 장인이셨기 때문이다.15)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서 노동을 하라는 특별한 명령은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오히려 어느 기회에 노동과 생활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금하신 것을 볼 수 있다16)`─`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노동하는 세상'에 속해 있으며 인간의 노동을 이해하고 존중하신다는 것을 그분의 분명한 삶이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참으로 그분은 인간의 노동과 그 여러 형태를 사랑으로 대하셨고, 노동의 여러 형태 안에서 각기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닮은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셨던 것이다.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7) 하고 말씀하신 분, 창세기를 비롯하여 구약의 모든 전통 안에 이미 표현된 노동에 대한 근본 진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가르침 안에 담으셨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 아닌가?

구약의 성서들은 인간의 노동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수행하는 각각의 직업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사18) 약제사,19) 목수 또는 장인,20) 대장장이21)`─`이 말은 오늘날의 주물공에 해당될 수 있다`─`옹기장이,22) 농부,23) 학자,24) 선원,25) 건축가,26) 음악가,27) 목자,28) 그리고 어부29) 등이다.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찬사는 잘 알려져 있다.30)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인간의 노동에 대해 언급하신다. 즉 목자,31) 농부,32) 의사,33) 씨뿌리는 사람,34) 관리인,35) 종,36) 청지기,37) 어부,38) 상인,39) 일꾼40) 등의 노동이다. 그분은 또한 여러 가지 형태의 여성의 노동41)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분은 사도직을 추수하는 사람들42)이나 어부들43)의 육체 노동에 비유하신다. 또한 학자들의 노동44)에 대해서도 언급하신다.

나자렛 시절 당신의 삶으로써 모범을 보이셨던 그리스도의 노동에 관한 이 가르침은 특히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서 생생하게 반향되고 있다. 바오로는 자신의 노동하는 직업(그는 아마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을 것이다.)71)을 자랑하며, 사도이면서도 자기가 먹을 것을 벌 수 있게 한 그 노동에 감사하였다.45) "우리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46) 그래서 그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권고와 명령의 형식으로 노동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썼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권고합니다. 말없이 일해서 제 힘으로 벌어 먹도록 하십시오."47) 실제로 "게으른 생활을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의 일에만 참견하는"48) 사람들을 보고 사도는 같은 맥락에서 주저없이 이렇게 말한다. "일하기 싫어 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49)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격려했다. "무슨 일이나 사람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듯이 정성껏 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으로 받게 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50)

이방인들의 사도는 인간 노동의 도덕성과 영성에 관하여 그 핵심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사도의 그러한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51) 안에서, 그분의 생애와 비유들 안에서 드러나는 신중하고도 위대한 노동의 복음을 보완하는 중대한 내용이다.

교회의 원천 자체이신 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이 빛을 근거로 하여, 현대어로 표현되어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교회는 항상 가르쳐왔다. "인간 활동은 인간에게서 나오듯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은 활동을 통하여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자기 능력을 기르며 자기를 벗어나 자신을 초월한다. 이 같은 성장은 바로 이해한다면 외적 재산의 축적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따라서 인간 활동의 규범은,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그 뜻을 따라 인류의 진정한 복지에 부합하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전 무결하게 추구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52)

이 같은 인간 노동의 가치에 관한 전망, 또는 달리 말해서 이 같은 '노동의 영성'은 올바른 진보의 의미에 관해 공의회의 사목헌장이 같은 항목에서 말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다. 마찬가지로, 더 나은 정의와 더 넓은 형제애와 더욱 인간다운 사회 관계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기술의 발전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이런 기술의 발전이 인간 향상에 물질적 바탕은 마련할 수 있지만 그 힘만으로 인간 향상을 실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53)

진보와 발전의 문제─현대의 사상을 지배하는 주제이다─에 관한 이러한 가르침은 오직 인간 노동에 관한 확인된 영성의 결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 가르침은 실현될 수 있고 또 실천될 수 있다. 이것이 '노동의 복음'에 뿌리를 박은 가르침이며 또한 하느님의 계획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비추어본 인간의 노동


27. 인간의 노동에는 또 다른 한 국면이 있는데, 그것은 노동의 본질적인 차원으로서 복음에 근거한 영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노동은 불가피하게 노고와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는 이를 매우 예리한 어투로 표현하고 있다. 노동에 관한 원초적인 축복은 바로 창조의 신비 안에 들어 있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들어올려진 인간의 고양과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죄악이 가져온 저주와 대조를 이룬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54) 노동과 관련된 이 고생은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활 방식을 나타내는 동시에 죽음의 선고를 이루고 있다.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55) 이 말을 반향이라도 하듯 지혜 문학서들 가운데 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손으로 한 모든 일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은 결국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56) 지상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이 말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일에 관한 또 다른 표현인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 안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인간 노동의 영성에 있어서 이토록 중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 부활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그분의 순명을 포함한다. 이 순명을 사도 바오로는 태초부터 지상의 인간 역사를 짓눌러온 불순명과 대비시키고 있다.57) 이 신비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성령의 힘으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돌아오시는 그리스도의 고양도 포함한다.

인류의 현재 상황에서 노동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땀과 노고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받은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러 오신 일에58) 사랑으로써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구원 사업은 십자가 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 참아냄으로써, 인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협력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으로 받은 일들에서 매일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59)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죄인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시며 당신 표양으로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어깨에 육신과 세속이 지워주는 십자가도 져야 한다고 우리를 가르치시며," 동시에 "당신 부활로써 주님이 되시어 천상 천하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들 마음속에서 이미 활동하고 계시며`… 스스로의 생활을 더욱더 인간답게 만들고 현세적인 모든 것을 이 목적에 종속시키려는 인류 가족의 간절한 소망을 일으켜주시고 정화하시고 북돋아주신다."60)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노동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작은 부분을 발견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은 구속의 정신으로 그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를 비추어주는 그 빛으로, 우리는 노동 안에서 항상 새로운 생명의 서광을 발견하고 새로운 선의 서광을 찾는다. 그 서광은 분명히 노동에 따르는 노고를 통하여 인간과 세계가 참여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61)의 선포일 것이다. 노고를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할 수 없다.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 노동의 영성 안에서 십자가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확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이 노고로써 이루어지는 십자가는 노동 자체로부터 솟아나오는 새로운 선(善)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선은 노동의 깊은 의미와 그 모든 국면 안에서 이해되고 노동을 떠나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노동에서 솟아나온다.

인간 노동의 결실인 이 새로운 선은 이미 정의가 깃들어 있는 '새 땅'의 한 작은 부분이 아닌가?62) 인간의 노동에 수반되는 여러 형태의 노고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새로운 선과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관계인가? 공의회는 계시된 말씀의 원천에 비추어서 이 물음에 답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루가 9,25 참조)는 경고를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켜야 할 것이다. 이 지상에서 이미 새로운 시대를 어느 정도 암시해 주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세적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63)

인간의 노동에 관한 이 고찰에서 우리는 인간 노동의 본질을 모두 강조하려고 하였다. '인간 활동의 결실'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가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이 지상에서 증대되어야64) 하기 때문이다. 기도하고 일하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노동이 지상의 진보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발전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알아야 한다. 성령의 능력과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받고 있다.

이러한 반성을 마치면서, 본인은 여러분 모두에게,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기꺼이 사도적 축복을 보내드리는 바이다.

본인은 이 문헌을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인 지난 5월 15일에 반포하려고 준비했으나, 퇴원 후에야 이 문헌을 마지막으로 손질할 수 있었다.

카스텔 간돌포에서,
교황 재위 제3년,
1981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석


1. 사목 헌장, 34항 [△]
2. 창세 2,2; 출애 20,8.11; 신명 5,12-14 참조. [△]
3. 창세 2,3 참조. [△]
4. 묵시 15,3. [△]
5. 창세 1,4.10.12.18.21.25.31 [△]
6. 요한 5,17 [△]
7. 히브 4,1.9-10 참조 [△]
8. 요한 14,2 [△]
9. 신명 5,12-14; 출애 20,8-12 참조 [△]
10. 마태 25,21 참조 [△]
11. 사목 헌장, 34항 [△]
12. 사목 헌장, 34항 [△]
13. 교회 헌장, 36항 [△]
14. 마르 6,2-3 [△]
15. 마태 13,55 참조 [△]
16. 마태 6,25-34 참조 [△]
17. 요한 15,1 [△]
18. 집회 38,1-3 참조 [△]
19. 집회 38,4-8 참조 [△]
20. 출애 31,1-5; 집회 38,27 참조 [△]
21. 창세 4,22; 이사 44,12 참조 [△]
22. 예레 18,3-4; 집회 38,29-30 참조 [△]
23. 창세 9,20; 이사 5,1-2 참조 [△]
24. 전도 12,9-12; 집회 39,1-8 참조 [△]
25. 시편 107(108),23-30; 지혜 14,2-3a 참조 [△]
26. 창세 11,3; 2열왕 12,12-13; 22,5-6 참조 [△]
27. 창세 4,21 참조 [△]
28. 창세 4,2; 37,3; 출애 3,1; 1사무 16,11 등 [△]
29. 에제 47,10 참조 [△]
30. 잠언 31,15-27 참조 [△]
31. 예를 들면 요한 10,1-16 [△]
32. 마르 12,1-12 참조 [△]
33. 루가 4,23 참조 [△]
34. 마르 4,1-9 참조 [△]
35. 마태 13,52 참조 [△]
36. 마태 24,45; 루가 12,42-48 참조 [△]
37. 루가 16,1-8 참조 [△]
38. 마태 13,47-50 참조 [△]
39. 마태 13,45-46 참조 [△]
40. 마태 20,1-16 참조 [△]
41. 마태 13,33; 루가 15,8-9 참조 [△]
42. 마태 9,37; 요한 4,35-38 참조 [△]
43. 마태 4,19 참조 [△]
44. 사도 18,3 참조 [△]
45. 사도 20,34-35 참조 [△]
46. 2데살 3,8. 성 바오로는 선교사들이 부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1고린 9,6-14; 갈라 6,6; 2데살 3,9; 루가 10,7 참조 [△]
47. 2데살 3,12 [△]
48. 2데살 3,11 [△]
49. 2데살 3,10 [△]
50. 골로 3,23-24 [△]
51. 사도 1,1 참조 [△]
52. 사목 헌장, 35항 [△]
53. 상동. [△]
54. 창세 3,17 [△]
55. 창세 3,19 [△]
56. 전도 2,11 [△]
57. 로마 5,19 참조 [△]
58. 요한 17,4 참조 [△]
59. 루가 9,23 참조 [△]
60. 사목 헌장, 38항 [△]
61. 2베드 3,13; 묵시 21,1 참조 [△]
62. 2베드 3,13 참조 [△]
63. 사목 헌장, 39항 [△]
64. 상동 [△]
  |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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