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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고통 (Salvifici Doloris)
조회수 | 2,268
작성일 | 07.05.2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 구원에 이르는 고통 / 1984. 2. 11.

Ⅰ. 서론

1.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의 힘을 밝히면서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1)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 역사의 일부를 이루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비추어지는 고통을 통하여 굽이치는 머나먼 길의 마지막에 이르러 발견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기쁨이 따르는 마지막 발견의 가치가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 바오로는 쓰시기를,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2)고 하였습니다. 기쁨은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며, 이 발견은 이 말씀을 적어보낸 다르소의 바오로가 몸소 절실히 체험하셨던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타당한 것입니다. 사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발견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또 그것을 기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도움이 된 것과 똑같이 "고통의 구원적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바로 이 구원적 의미의 측면에서 고통이라는 주제는 교회의 특별한 경축년으로서의 구원의 성년과 때마침 깊이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또한 이 기간 동안에 마땅히 이 주제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실을 제쳐놓고라도 이 주제는 땅 위의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따라다니고 있는 보편적인 주제입니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세상에서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것이며, 끊임없이 거듭 재고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3)고 쓰신 바도 있지만, 또 비록 우리는 동물계의 고통을 알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통'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인즉, 특히 인간의 본성에 본질적으로 관련된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통은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고통이야말로 특별히 그 나름대로 인간에게 고유한 깊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또 특별히 그 나름으로 그것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초월성에 속해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인간이란 어떤 의미에서 인간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도록 "운명 지어져"있으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 초월성을 향하여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고통인 것입니다.

3. 고통이라는 주제는 특별히 구원의 성년이라는 맥락 속에서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우선 첫째로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즉 그리스도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동시에 구원의 성년 동안 우리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에 표현되어있는 진리, 곧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이 교회가 따라걸어야 할 길이 된다."는 진리를 상기하고 있습니다. 4)말하자면 특별히 인간은 자신의 삶이 고통에 처했을 때 교회가 추구하는 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이 인간의 고통은 삶의 여러 다른 순간에 발생하고, 여러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며, 여러 다른 차원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든간에 고통은 인간의 현세적 실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또 사실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현세생활의 여정을 통과하면서 인간이 어떠한 모양으로든 머나먼 고통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진대, 바로 이 길에서 교회는 언제나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더구나 특별히 이 구원의 성년 동안에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의 신비로 말미암아 태어난 교회이기에, 교회는 특별히 인간의 고통의 길에서 인간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만남 속에서 인간이 "교회가 따라걸어야 할 길이 되는" 것이며, 이 길은 가장 중요한 길의 하나인 것입니다.

4. 이것은 또한 바로 이 구원의 성년에 바야흐로 우리가 반성하고 있는 바, 곧 고통에 관한 묵상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그것은 경외심과 특별히 그 나름으로 무서운 위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 속에는 특별히 하나의 큰 신비가 내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형태의 인간 고통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경외심을 전제함으로써만, 앞으로 여기서 표현될 내용이 깊디 깊은 내심의 요청에 의하여, 또한 역시 깊은 심오한 신앙의 명령에 따라 전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이 두 가지 동기는 서로 특별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내심의 요청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겨낼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신앙의 명령이―예컨대 첫머리에 인용된 바오로 성인의 말씀으로 표현된 내용처럼―그 내용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또 신앙의 힘으로 우리는 모든 인간 안에서 그처럼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일로 보이는 그것을 감히 다룰 수 있습니다. 무릇 인간은, 더구나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언제나 결코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주석

1. 골로 1, 24 [△]
2. 위와 같음. [△]
3. 로마 8, 22. [△]
4.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 14. 18. 21. 22항 : AAS 71(1979), 284면 이하. 304, 320, 323면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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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인간 고통의 세계

5. 인간의 구체적이며 되풀이될 수 없는 내면에 내포되어있는 하나의 인격적 사실로서의 주관적인 차원에서 보면, 고통이란 거의 형언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또 아마도 동시에 "객관적인 현실"에서 보면 하나의 뚜렷한 문제점으로서 다루어지고 묵상되며 파악되어야 할 점이 고통처럼 많은 것도 다시 없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고통에 대한 물음과 대답은 근본적으로 제기되고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다루는 문제가 고통에 관한 단순한 설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 고통의 세계에 파고들자면, 설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다른 기준들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자 또한 치료의 기술이기도 한 의학은 인간 고통의 광대한 분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영역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는 고통의 정체가 좀더 정확히 파악되고 있으며, 고통에 "대응"하는 방법(즉, 치료의 방법)이 비교적 더 균형있게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한 가지 영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 고통의 분야는 훨씬 더 넓고 더 다양하며 더 다차원적입니다. 인간은 여러 모양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아무리 전문적으로 발전된 의학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의학이 생각하는 모양으로만 인간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란 질병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입니다. 훨씬 더 복잡한 동시에 훨씬 더 깊이 인간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고통입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구별하는 데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떤 개념을 얻게 됩니다. 이 구별은 인간 존재의 이중적 차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고통의 직접적인 주체로서의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고통"과 "아픔"이라는 낱말이 어느 정도까지는 동의어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 할진대, 육체적 고통이란 어떻게든지간에 "몸에 해로운" 일이 있을 때에 나타나며, 한편 정신적 고통이란 "영혼의 아픔"이 있을 때 나타납니다. 실제로 고통이란 영신적 성격을 띤 아픔의 문제이며, 단순히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이 함께 따르는 "심리학적" 차원의 아픔에 관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확실히 정신적 고통의 광범성과 다양성은 숫자적으로나 형태상으로 육체적 고통보다 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정신적 고통은 이를테면 그 정체가 덜 파악되어있으며 치유의 방법도 덜 성취되어있다고 하겠습니다.

6. 성서는 하나의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입니다. 고통의 표지, 특히 정신적 고통의 표지를 지니고 있는 상황들의 몇 가지 사례를 구약성서에서 인용해보면, 죽음의 위험1)자기 자식들의 죽음2)그것도 특히 맏아들과 외아들의 죽음3)또 그 다음으로는 후손의 결핍4)가 겪은 시련이 그런 것이었다.

고국에 대한 향수5)주위 환경의 박해와 적대6)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조롱과 경멸7)고독과 소외감8)그리고 양심의 가책9)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10)친지들과 이웃들의 불성실함과 무례함11)그리고 끝으로 자기 동족의 비운12)등이 그것입니다.

심리적이며 육체적인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다루면서 구약성서는 흔히 "정신적" 고통을 육신의 특별한 부분, 즉 뼈13)신장14)간장15)내장16)심장17)등의 아픔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거니와,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요소 또는 신체적 요인을 지니고 있으며, 흔히 유기체 전체의 상태로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7. 위에서 인용한 사례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서에서 우리는 인간의 갖가지 고통스런 상황들이 방대하게 열거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열거된 내용들도 물론 "인간 역사의 책" (이것은 오히려 "기록되지 아니한 책"이다)이 고통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말해왔고 끊임없이 되풀이해온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모든 개인 각자의 역사를 통하여 읽혀져온 인류 역사의 책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종류이든 악을 경험할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어휘는 고통과 악이 서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사실 구약성서의 어휘에는 "고통"을 가리키는 특별한 낱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고통받고 있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18)그리스어만이, 또 따라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만이 "파스코"(: 나는……을 겪는다. 나는 고통받고 있다는 느낌을 경험한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사 덕택에, 고통은 이미 직접적으로 악(객관적)과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이 되며, 인간이 악을 경험하고 그래서 고통의 주체가 되는 그런 상황을 표현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통은 실로 능동적인 성격과 수동적인 성격을("patiendo")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고 있을 때에도, 인간 자신이 고통의 원인일 때에도, 이 고통은 여전히 그 형이상학적인 본질에서는 수동적인 것임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심리학적인 의미에서는 특별히 구체적인 "능동성"을 띠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이것은 고통받는 주체가 겪는 고통의 강도에 따라 또 각자의 특별한 민감성에 따라 슬픔이나 실망이나 실의나 또는 심지어 절망등 여러 가지로 주관적인 면에서 세분화되는 그런 고통의 "능동성"을 말합니다. 고통의 심리학적 형태를 이루고 있는 내용의 한복판에 으레 악의 체험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이 각개인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고통이라는 현실은 악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제기합니다. "악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어떤 의미에서 고통이라는 주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반응은, 예컨대 특정한 문화와 종교의 전통들이 존재란 해방될 필요가 있는 악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런 반응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존재란 선이며 존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창조주의 선하심을 인정하며 피조물의 선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것은, 악이란 선의 어떤 결핍이나 제한 또는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로부터 단절되어있는, 또는 자기가 박탈당하게 된, 그런 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물의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그러한 선에 "마땅히" 참여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 인간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적으로 보면 고통이라는 현실은 악을 통하여 설명되며, 악은 언제나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의 선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8. 그 자체로 인간의 고통은 이를테면 하나의 특별한 "세계"를 이루어, 인간과 함께 존재하고 인간 안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때로는 사라지지 않고 경직되어 인간 안에 깊이 뿌리를 박게 되기도 합니다. 이 고통의 세계는 많은, 매우 많은 주체들 속으로 나누어져 들어가서 이를테면 "산재"하고 있습니다. 각개인이 각자의 고통을 통하여 이 "세계"의 작은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가 그 사람 안에 하나의 무한하고도 둘도 없이 유일한 실체로서 현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인간 상호간의 사회적 차원도 있습니다. 고통의 세계는 이를테면 그 고유한 연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운명의 시련을 당하고 있다는 상황의 유사성을 통하여, 또는 이해와 배려를 받을 필요성을 통하여, 또 아마 무엇보다도 고통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통하여 서로가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통의 세계는 "산재"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 안에 소통과 연대라는 단일한 요청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요청에도 따르면서 반성해나가야 하겠습니다.

고통의 세계가 개인적인 의미와 동시에 집단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인즉, 이 인간 고통의 세계가 인간 실존의 어떤 시기와 어떤 기간에는 이를테면 구체적으로 집중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천재지변과 전염병과 파국과 격동과 갖가지 사회적 재난들의 경우에 그렇게 됩니다. 한 가지 예로 흉작을,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또는 여러 다른 원인들과 관련하여―기근을 생각해 보십시오.

끝으로 전쟁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전쟁에 관해서 본인은 특별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특히 지난 양대 세계대전을 언급하고 싶거니와, 그중에도 제2차 세계대전은 훨씬 더 큰 인명 손실과 무거운 인류 고통의 짐을 초래하였습니다. 또한 그 결과로 또 한편으로는 우리네 현대 문명의 과오와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부는 가공할 핵전쟁의 위협이 실로 엄청나게 도사리고 있어서, 인류의 자멸조차 초래할 수 있을 만큼 유래없는 고통의 축적을 생각지 않고서는 우리가 이 시기를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요컨대 인간 각자 안에 그 주체가 있는 그런 고통의 세계가 우리네 시대에는 아마도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하나의 특별한 "세계"로 변형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이 세계는 유례가 없이 인간의 노력을 통한 진보에 의하여 변형되어온 세계인 동시에, 역시 유례가 없이 인간의 과오와 범죄로 말미암아 위험에 처해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주석

1. 히즈키야왕이 겪었듯이(이사 38, 1-3 참조) [△]
2. 하갈이 두려워했듯이(창세 15-16 참조), 야곱이 상상했듯이(창세 37, 33-35 참조), 다윗이 경험했듯이(2사무 19, 1 참조). [△]
3. 토비아의 어머니 안나가 두려워했듯이(토비 10, 1-7 참조). 또한 예레 6, 26; 아모 8, 10; 즈가 12, 10도 참조. [△]
4. 아브라함(창세 15, 2 참조)이나 라헬(창세 30,1 참조)이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 6-10 참조) [△]
5. 바빌론 귀양살이의 애통함이 그런 것이었다(시편 136[137] 참조). [△]
6. 예컨대 시편작가(시편 21[22], 17-21 참조)나 예레미야(예레 18, 18 참조)가 그런 고통을 겪었다. [△]
7. 이런 시련을 욥(욥 19, 18; 30, 1.9 참조)과 여러 시편작가들(시편 21[22], 7-9; 41[42], 11; 43[44], 16-17 참조)과 예레미야(예레 20, 7 참조)와 고통받는 종(이사 53, 3 참조)이 당했다. [△]
8. 이런 고통을 또다시 몇몇 시편작가들(시편 21[22], 2-3; 30[31], 13; 37[38], 12; 87[88],9. 19 참조)이나 예레미야(예레 15, 17 참조)나 고통받는 종(이사 53, 3 참조)은 겪어야 했다. [△]
9. 시편작가(시편 50[51], 5 참조)도 고통받는 종(이사 53, 3-6 참조)도 예언자 즈가리야(즈가 12, 10 참조)도 그런 증언을 하고 있다. [△]
10. 이 점을 시편작가(시편 72[73], 3-14참조)와 코헬렛(전도 4, 1-3참조)은 매우 통감하고 있었다. [△]
11. 욥(욥 10, 19 참조)이나 몇몇 시편작가(시편 40[41], 10; 54[55], 13-15 참조)나 예레미야(예레 20, 10 참조)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고통이었으며, 한편 벤 시라(집회 37, 1-6 참조)는 이 비참한 현실에 대해 깊이 묵상했다. [△]
12. 애가의 수많은 구절들 이외에도, 시편작가들(시편 43[44], 10-17; 76[77], 11; 88[89], 51 참조) 이나 예언자들(이사 22, 4; 예레 4, 8; 13, 17; 14, 17-18; 에제 9, 8; 21, 11-12 참조)의 애절한 대목들을 보라. 또한 아자리야의 기도(다니 3, 31-40 참조)와 다니엘의 기도(다니 9, 16-19 참조)도 보라. [△]
13. 예컨대 이사 38, 13; 예레 23, 9; 시편 30[31], 10-11; 41[42], 10-11. [△]
14. 예컨대 시편 72[73], 21; 욥 16, 13; 애가 3, 13. [△]
15. 예컨대 애가 2, 11. [△]
16. 예컨대 이사 16, 11; 예레 4, 19; 욥 30, 27; 애가 1, 20. [△]
17. 예컨대 1사무 1, 8; 예레 4, 19; 8, 18; 애가 1, 20. 22; 시편 37[38], 9. 11. [△]
18. 이와 관련하여 상기하는 것이 유익하려니와, 히브리어의 어근는 좋은 것(t b)과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나쁜 것을 물리적 의미냐 심리적 의미냐 윤리적 의미냐의 구별이 없이 포괄적으로 가리킨다. 이 어근이 체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ra와 r인데, 이들은 악 자체이거나 악한 행동이거나 악을 행하는 개인이거나를 막론하고 그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용언 형태로는, "악하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가리키는 단순한 형태(qal) 이외에도, "악을 겪게 되다" "해악을 입다"라는 뜻의 재귀 수동형(niphal)과 "악을 행하다" "해악을 입히다"라는 뜻의 사역 능동형(hiphil)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그리스어 파스코(πασχω)의 진정한 동의어가 되는 말이 없으므로, 이 동사 역시 70인역에서는 드물게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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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고통의 의미문제에 대한 해답의 추구


9. 인간이 겪는 모든 형태의 고통 속에서마다, 또 동시에 온 고통의 세계 밑바탕에서부터, 불가피하게 "왜?"라는 물음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고통의 원인, 이유에 관한 물음일뿐더러, 또 마찬가지로 고통의 목적에 관한 물음이며, 요컨대 고통의 의미에 관한 물음입니다. 그것은 비단 인간의 고통에 수반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인간적인 내용을, 무엇이 고통을 바로 인간의 고통이 되게 하는지를 결정짓기까지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픔이, 특히 육체적인 아픔이 동물의 세계에 널리 퍼져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고통 중에 있는 인간만이 자기가 고통받고 있음을 알며 왜 그런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면, 인간적으로 말해서 훨씬 더 깊이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 문제가 어려운 문제임은, 이 문제와 일정하게 밀접한 문제인 악의 문제가 어려운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악은 왜 존재하는가? 어째서 세상에 악이 있는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 때에, 우리는 고통에 관한 물음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물음이 다 어려운 물음입니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물을 때에도 그러하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때에도 그러하며,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느님께 물을 때에도 그러합니다. 흔히는 바로 세계에서부터 인간에게로 고통이 오고 있는 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계를 향하여 묻지 않고, 세계의 창조자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져있다시피, 바로 이 물음과 관련하여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수많은 좌절과 갈등이 일어날 뿐 아니라, 또한 사람들이 사실상 하느님을 부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세계의 존재가 하느님의 존재를 향하여,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과 위대하심을 향하여 이를테면 인간 영혼의 눈을 열어주고 있는가 하면, 또 한편 악과 고통은 이 모습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철저히 근본적인 방식으로, 특히 부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경우와 합당한 처벌이 따르지 않는 수많은 과오라는 일상의 드라마에서야말로 그러합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환경에서보다도 바로 이런 환경에서야말로 고통의 의미문제가 중요하게 드러난다 하겠습니다. 또한 문제 자체를 다루거나 이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한 해답을 다루면서 얼마나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도 드러납니다.

10. 인간은 이 문제를 하느님께 모든 감정을 다하여 또 낙담과 불안에 가득 찬 마음으로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약성서의 계시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이 물음을 예상하고 계시며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욥기에서 이 물음이 지극히 생생한 표현으로 나타나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은 조금도 없이 무수한 고통으로 시련을 당하는 이 의로운 인간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있습니다. 욥은 재산을 잃고 아들딸들을 잃으며 마침내는 자기 자신마저 중병에 걸립니다. 이런 무서운 처지에 빠진 욥에게 오랜 친구 셋이 집으로 찾아와서 저마다 저 나름으로 자기 주장으로 설득시키려 합니다. 욥이 그처럼 갖가지로 무서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음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으레 인간의 범죄에 대한 처벌로서 나타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고통을 보내시는 것이며, 고통의 이유인즉 정의의 질서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욥의 옛 친구들은 비단 악의 윤리적 정의를 그에게 확신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의 윤리적 의미를 자기 자신들에게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고통이란 죄에 대한 벌로서만, 따라서 선을 선으로 갚고 악을 악으로 갚으시는 하느님의 정의라는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주목해야 할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여러 기록들이 고통을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로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현세적 권위도 능가할 정도의 입법자요 심판자이십니다. 계시의 하느님께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주이시며, 그분으로부터 피조물의 존재와 더불어 본질적인 선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선에 대한 인간의 의식적이며 자유로운 침해는 단순히 법에 대한 침해일 뿐 아니라 동시에 최초의 입법자이신 창조주께 대한 배반인 것입니다. 그러한 침해가 성서와 신학이 엄밀한 의미로 말하는 죄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죄의 윤리적 악에 상응하는 것이 벌이요, 벌은 똑같은 초월적인 의미에서 윤리 질서를 보장하며, 이런 의미에서 이 질서는 창조자요 최고 입법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설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또한 계시에 바탕을 둔 종교적 신앙의 기쁜 진리 중의 하나가 도출되어 나옵니다. 즉 하느님은 상선벌악하시는 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일이 옳았으며‥‥당신의 길은 곧바르며 당신의 심판은 언제나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내리신‥‥모든 징벌에서 당신의 판결은 옳았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이런 징벌을 내리신 것은 우리 죄 때문이고 우리는 당신의 징벌을 받아 마땅하옵니다‥‥."1)말라 3, 16-21; 마태 20, 16; 마르 10, 31; 루가 17, 34; 요한 5, 30; 로마 2, 2 참조.'/>

욥의 친구들에 의하여 표현된 의견은 또한 인류의 윤리적 양심 안에서도 발견되는 확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객관적인 윤리 질서는 죄악과 범행에 대한 징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고통은 하나의 "정당화된 악"으로서 나타납니다.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서 설명하는 사람들의 확신은 정의의 질서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것은 욥의 친구 중의 한 사람에 의하여 표현된 확신과도 부합합니다.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2)

11. 욥은 고통의 정체를 죄에 대한 벌로 규정하는 원칙적인 진리에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경험상의 의견을 기초로 이러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그러한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할 짓을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사실 그는 자기 일생 중에 좋은 일들을 행하여왔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 자신이 욥의 친구들의 비난을 나무라시며, 욥은 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욥의 고통은 결백한 사람의 고통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며, 그것을 한 개인의 지능만으로 완전히 꿰뚫어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욥기가 구약과 신약의 계시 전체에 의하여 제시되어있는 바 정의에 바탕한 초월적 윤리 질서의 기초를 침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이 질서의 원리가 배타적이며 피상적인 방법으로 적용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극히 단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통이란 그것이 과오와 연결되어있을 때에는 벌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인가 하면, 모든 고통이 잘못의 결과이며 벌의 성격이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욥이라는 의인상은 구약성서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하느님 자신의 말씀인 계시는 한 결백한 인간의 고통, 즉 죄없이 겪는 고통이라는 문제를 지극히 솔직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욥은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욥이 무참한 시련에 짓눌린 것은 사실일지언정, 욥에게 벌이 내려질 이유란 없었던 것입니다. 욥기의 서두에서 이미 뚜렷이 나타나고 있듯이, 하느님은 이 시험을 사탄의 도발로 말미암은 결과로서 허용하셨습니다. 사탄이 주님 앞에서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께서‥‥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해주셨고 그의 가축을 땅 위에 번성하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3)하고 욥의 의로움에 대하여 도전을 감행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과연 욥을 고통으로 시험하기를 동의하시었다면, 그것은 욥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었던 것입니다. 고통은 이와 같이 하나의 시험이라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욥기는 계시에 있어서 이 문제에 관한 최후의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욥기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하나의 예고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자체로도 욥기는, 어째서 고통의 의미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이 무조건 정의에 바탕을 둔 윤리 질서에만 결부시켜져서는 안되는가를 말해주는 충분한 논증이 됩니다. 그러한 대답이란 한편으로는 기본적이며 초월적인 이유와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또한 동시에 의인 욥의 고통과 비슷한 경우들은 부족한 대답임이 드러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가 계시에서 마주치게 되는 정의의 개념을 사소하고 빈약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2. 욥기는 고통의 "왜"라는 문제를 극도로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으며, 또한 고통이 무죄한 자에게 닥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제시해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도 이미 우리는 고통이 죄에 대한 벌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라는 그런 관념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있는 방향을 주목할 수 있지만, 그만큼 또한 동시에 구약성서는 벌로서의 고통이 지닌 교육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선민에게 내리시는 고통들 속에는 회개시켜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초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징벌은 우리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찍질하시려는 것이었다."4)

이와 같이 벌의 인격적인 차원이 긍정되고 있습니다. 그 차원에 따르면 벌이 의미가 있는 까닭은 단순히 그것이 범죄라는 객관적인 악을 다른 또 하나의 악으로써 응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그것이 고통받고 있는 주체 안에 선을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성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통의 지극히 중요한 일면이며, 구약과 특히 신약의 계시 전체에 깊이 뿌리박혀있습니다. 고통은 주체 안에서 회개에, 즉 선의 재건에 기여해야 하며, 그 주체는 이 회개에의 부르심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참회의 목적은 인간 안에 갖가지 형태로 잠복해있는 악을 극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목적은 또한 인간 자신에게나 타인들과의 관계와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나 선을 강화하는 데에 있습니다.

13. 그러나 고통의 "왜"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얻자면, 우리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궁극 원천인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계시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은 또한 언제나 하나의 신비로 머물러있게 마련인 고통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가장 풍부한 원천입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설명이 부족하고 부당함을 의식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숭고한 사랑을 터득할 수 있는 그만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의 "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의 심오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여러모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 주체를 향하여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계시의 빛을 있는 그대로, 비단 그것이 정의의 초월적 질서를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결정적인 원천으로서의 사랑으로 이 질서를 비추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랑은 또한 고통의 의미 문제에 대한 해답의 가장 충만한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해답이 하느님에 의하여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주석

1. 다니 3, 27-28 이하; 시편 18[19], 10; 35[36], 7; 47[48], 12; 50[51], 6; 98[99], 4; 118[119], 75; [△]
2. 욥 4, 8. [△]
3. 욥 1, 9-11 [△]
4. 2마카 6,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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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사랑으로 고통을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

14.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1)니고데모와 대화 중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바로 핵심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교 구원론, 즉 구원신학의 바로 본질을 갈파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시는데, 바로 그 자체 안에 고통에 관한 결정적이며 절대적인 전망이 담겨있습니다. 동시에 "주신다"("주셨다")는 말씀 자체가 이 해방은 외아들 그분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서는 사랑이 표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외아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이요, 이 때문에 당신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한 사랑, "세상"을 위한 사랑입니다. 즉, 구원적인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함께 반성함에 있어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겠거니와 ―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의라는 한계 내에서 고통의 의미를 추구할 때에 결정되어있던, 어떤 의미에서는 결론지어져 있던 그런 차원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 차원은 구속의 차원입니다. 이 차원을 구약성서에서는, 적어도 불가타 역본에서는 의인 욥의 말이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있음을! 마침내‥‥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2)지금까지 우리의 고찰은 일차적으로 또 어떤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고통의 갖가지 현세적인 차원에(의인 욥의 고통도 또한 그러하듯이) 집중되어있었던 반면에, 위에서 인용한 예수의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고통의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의미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멸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셨는데, "멸망하지 않게"라는 이 말씀은 바로 그 다음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라는 말씀에 의하여 구체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생"을 잃을 때에 "멸망"합니다. 구원에 대립되는 것은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단순히 현세적인 고통이 아니라 결정적인 고통, 즉 영생의 상실이요, 하느님에게 배척당하는 것이며, 영벌인 것입니다. 외아들 그분이 인류에게 주어진 것은 일차적으로 이 결정적인 악에 대항하고 결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의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초월적인 악을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쳐부수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이 초월적인 악의 뿌리들은 죄와 죽음이라는 땅속에 뻗쳐있습니다. 즉, 죄와 죽음이야말로 영생을 상실하는 장본입니다. 외아들의 사명은 죄와 죽음의 정복에 있습니다. 그분은 죽기까지의 순종으로써 죄를 극복하시는 것이며, 부활로써 죽음을 정복하시는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명에 의하여 악을 그 뿌리에서부터 쳐부수신다고 말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즉, 비단 결정적 종말론적인 악과 고통의 타도(그리하여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현세적 역사적인 차원의 악과 고통의 타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악은 여전히 죄와 죽음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또 비록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구체적인 죄들의 결과로 판단하는 데에는 크게 조심해야 하지만 (이 점은 바로 의인 욥의 사례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통을 시초의 죄, 요한 성인이 이른바 "세상의 죄,"3)인간 역사에서 개인적 행동과 사회적 과정의 죄스런 배경에서 분리시켜놓을 수도 없습니다. 직접적 의존관계라는 편협한 판단 기준을 (욥의 세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 적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또한 이에 못지않게 인간 고통의 근저에는 죄와의 복합적인 연루관계가 있다는 비판 기준을 배격할 수는 없다는 것도 진실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은 흔히 현세생활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기다려지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죽음은 육체적 유기체에 있어서나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나 이를테면 파괴 작용의 결정적인 종결을 이룬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심신적 인격 전체의 해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생존하여 육체에서 분리되어 존속하는 반면에, 인류 역사의 태초에 인간이 범죄한 다음에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육체는 점차적으로 분해되어가는 것입니다.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4)그러므로 비록 죽음이 그 낱말의 현세적 의미에서 고통의 한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비록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의 모든 형태를 초월한다 하더라도, 동시에 인간이 죽음에서 경험하는 악은 결정적이며 총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외아들께서는 당신 구원사업에 의하여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십니다. 우선 첫째로는 원죄와 더불어 비롯하여 악령의 영향력 아래 인간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린 죄의 지배를 불식하시며, 그 다음으로는 인간에게 성화은총 속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신 데 이어, 또한 미래의 육신 부활을 시작하는 당신 부활에 의하여 죽음의 지배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영생"의, 즉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결정적인 행복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고통이 완전히 불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의 결과로 인간은 영원한 삶과 거룩함의 희망을 가지고 지상에 실존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가 인간의 삶에서 현세적인 고통을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며, 인간 실존의 역사적 차원 전체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 차원과 모든 고통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빛을 던져주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복음 곧 기쁜 소식의 빛입니다. 바로 이 빛의 핵심에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개진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5)라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역사와 현세적 상황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죄가 태초 이래의 유산인 "원죄"로서나 "세상의 죄"로서나 또 각자의 "본죄"들의 총계로서나 현세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사랑해오신 것이고, 다시 말해서 영원히 사랑하고 계신 것이고, 때가 이르러 마침내는 바로 이 비할 데 없이 드높은 사랑을 통하여 이 아드님을 "주심"으로써, 이분이 바로 인간의 악의 뿌리 자체를 쳐부시고 인간이 참여하고 있는 고통의 세계 일체에 구원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게 하신 것입니다.

16. 이스라엘 한복판에서 메시아로서 활약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의 세계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6)그분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셨고, 괴로운 이들을 위로해주셨으며,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을 귀먹음에서, 눈멂에서, 문둥병에서, 악마에게서, 갖가지 신체적 장애에서 풀어주셨으며, 죽은 이들을 소생시켜주신 일도 세 번 있었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고통이든 영혼의 고통이든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가르침을 주셨고, 그리고 동시에 그분의 가르침에 있어서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여덟 가지 행복의 선언이었는데, 이것은 현세생활에 있어서 갖가지 고통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게 되는 사람들"을‥‥‥.7)마태오에 따르면 이와 같이 되어있거니와, 루가는 아주 분명하게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8)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인간 고통의 세계에 다가오셨는데, 이것은 그분이 이 고통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받아들이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공적인 활약을 하시는 동안에 그분은 비단 피로와 집없는 처지와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일을 겪으셨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더 중대한 사실로서 점점 더 소외를 당하고 적의에 둘러싸이게 되셨으며 자기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음모에 직면하게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셨으며, 자주 제자들에게 고통과 죽음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9)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시며, 바로 이런 방법으로 당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고통을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야 하신 것입니다. 바로 당신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인류 역사와 인간 영혼에 뻗어내려 있는 악의 뿌리를 쳐부수셔야 하신 것입니다. 바로 당신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구원사업을 성취하셔야 하신 것입니다. 이 사업은 영원하신 사랑의 계획 속에서 구속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고 죽을 생각을 버리시게 하려고 하자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10)또 게쎄마니에서 당신이 체포되실 때에, 베드로가 칼로써 당신을 보호하려고 하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11)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12)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복음서의 다른 데서도 거듭 나타나고 있는 바이거니와, 이것은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13)고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미 표명하신 생각이 그리스도께 얼마나 깊이 사무쳐있었던가를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의 구원하는 능력을 의식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고통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나아가시되, 일차적으로는 아버지께서 세상과 세상의 인간을 사랑하신 이 사랑 안에서 아버지께 일치되어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성인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기를,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14)이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17. 성서의 말씀은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메시아에 관한 수많은 대목들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장차 주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분이 겪을 고통들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져있었습니다. 이 모든 대목들 가운데서도 특히 감동적인 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통칭 고통받는 종의 넷째 노래라는 대목입니다. "제5복음사가"라고 일컬어져온 이사야 예언자는 이 노래에서 고통받는 종의 모습을 마치 자신의 육안과 영안으로 바라보듯이 날카로운 사실적 묘사로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구절들에 비추어보면 그리스도의 수난이 복음사가들 자신의 묘사에서보다도 더 인상적이며 감동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그야말로 고통을 겪고 고뇌를 아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 앞에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15)

고통받는 종의 노래에 담겨있는 묘사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각단계와 여러모로 세세한 점에서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체포, 천대, 구타, 침뱉음, 수감자에 대한 멸시, 부당한 선고, 그 다음에는 채찍질과 가시관과 조롱, 십자가를 짊과 십자가에 못박힘과 고뇌 등이 그렇습니다.

예언자의 말씀에서 이 수난의 묘사보다도 훨씬 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리스도 희생의 깊이입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져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짊어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즉, 널리 또 깊이 인간의 모든 죄가 구속자의 고통의 진정한 이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정도란 악을 겪게 되는 정도에 의하여 "측정되는" 것일진대, 그렇다면 우리는 예언자의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짊어지신 고통과 악의 정도를 능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대행적인"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구속적"입니다.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고통을 겪고 고뇌를 아는 사람"이란 참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16)그분이십니다. 홀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분만이 모든 죄의 악을 극복하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써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받아들이실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그분의 고통 속에서 죄들이 불식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라는 영적 공간에서 이 악을 없애시고 선으로 이 공간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적 고통의 주체인 단일한 위격이 지니고 있는 본성의 이중성에 접하게 됩니다.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에 의하여 구속을 이루어주시는 그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외아들이시며 또 동시에 이 하느님과 동일한 본체이신 아드님이 한 인간으로서 고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은 인간의 차원들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또한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심도와 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인간 그 자신이 바로 외아들 그분 곧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의 고통은 인간적인 동시에 또한 비할 데 없이 깊고 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로지 외아들 그분만이 인간의 죄에 내포된 악의 총량을, 즉 지상의 인류가 역사상으로 실존하는 차원들에 따른 모든 죄와 그 모든 죄의 "총계"에 내포된 악을 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8. 위에서 고찰한 바 바야흐로 우리는 이사야서에 담겨있는 고통받는 종의 노래가 성취된 게쎄마니와 골고타로 이를테면 직행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가기 전에 우리는 게쎄마니와 골고타에서의 수난을 예언자답게 내다보고 있는 이 노래의 다음 구절들을 읽어봅시다. 고통받는 종은 ― 이 점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분석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거니와 ― 앞에서 언급된 고통들을 온전히 자발적으로 스스로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17)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해서 고통받으시며 죄없이 고통받으십니다. 당신이 고통을 받으심으로써 그분은 저 욥기에 의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적으로 표현되었고, 사람들에 의하여 누누이 제기된 질문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비단 이 물음을 스스로 지니고 계실 뿐 아니라(더구나 그분은 욥처럼 한 인간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므로, 여기서는 이 물음이 훨씬 더 근본적인 물음이 된다), 이 물음에 대하여 있을 수 있는 최대의 답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를테면 이 대답은 질문이 구성되고 있는 내용 그 자체에서부터 솟아나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단 당신의 가르침, 곧 복음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이 복음의 가르침과 유기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합체되어있는 당신 자신의 고통에 의해서 고통에 관한 물음의 대답과 고통의 의미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 가르침의 최종적 결정적인 말씀, 곧 장차 바오로 성인이 말씀하실 바와 같이 "십자가의 말씀"입니다.18)

이 "십자가의 말씀"은 옛예언에 표현되었던 표상을 참으로 생생하게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공적으로 활약하며 가르치실 때의 수많은 일화들과 수많은 강론들이 처음부터 그분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인 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계심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게쎄마니에서의 기도야말로 여기서 하나의 결정적인 요점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19)라는 말씀과 그 다음의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20)라는 말씀은 여러모로 하나의 웅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며 바치는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당신 고통의 진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고통의 진실을 통한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로 깊은 차원에 있어서의 고통의 인간적 진실을, 즉 고통이란 인간이 그 앞에서 전율하며 악을 겪는 일임을 지극히 단순 명료하게 긍정해주고 있습니다. 무릇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게쎄마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똑같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또한 외아들인 인간만이 경험하실 수 있는 이 비할 데 없이 유일하게 깊고 짙은 고통을 실증해주고 있습니다. 즉, 위에서 인용한 예언자의 말씀이 그 나름으로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그런 깊이와 밀도를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완전히 이해하자면 우리는 그 주체의 신인적 신비를 꿰뚫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적어도 이 말씀에 힘입어 우리는 있을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인간 고통과 신인의 고통과의 사이에 개재하는 차이를 (또 동시에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쎄마니라는 곳은 바로 이 고통이, 예언자가 고통 속에서 겪는 악에 관하여 표현한 모든 진실이 이를테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영혼의 눈앞에 계시되고 있는 장소입니다.

게쎄마니에서의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골고타에서의 말씀은 고통 속에서 경험하는 악의 이 세계사상 유일한 깊이를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비단 구약성서에서, 특히 시편에서 ― 구체적으로 이 말씀의 출처는 시편 21[22]이거니와21) ―여러 번 나타나는 바와 같은 그런 버림받음의 표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버림받음에 관한 말씀은 이를테면 아들과 아버지와의 불가분의 일치관계라는 차원에서 생겨났으며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기"22)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습니다."23)라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을 예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죄가 안고 있는 이 가공할 중대한 악 ―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섬이라는 '온전한' 악 ― 과 아울러, 아버지에 의한 배척이요,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이며, 분리인 이 고통을 그리스도께서는 아들로서의 아버지와의 일치라는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통하여 인간적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고통을 통해서 그분은 속량을 성취하시는 것이며,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이제 다 이루었다."24)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서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고통받는 종의 노래에서 "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25)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즉, 사랑 ―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랑, 선을 창조하는, 고통을 수단으로 하여 선을 이끌어내는 바로 그 사랑 ― 과 연결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구속이라는 최고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부터 이끌어내어지며 그 십자가에서부터 끊임없이 새삼 새출발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비롯하는 샘이 되었습니다.26)그 속에서 우리는 또한 새삼 고통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며, 또 그 속에서, 바로 그 깊은 샘에까지 이르러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석

1. 요한 3, 16. [△]
2. 욥 19, 25-16. [△]
3. 요한 1, 29. [△]
4. 창세 3, 19. [△]
5. 요한 3, 16. [△]
6. 사도 10, 38. [△]
7. 마태 5, 3-11 참조. [△]
8. 루가 6, 21 참조. [△]
9. 마르 10, 33-34. [△]
10. 마태 16, 23 참조. [△]
11. 마태 26, 52. 54. [△]
12. 요한 18, 11. [△]
13. 요한 3, 16. [△]
14. 갈라 2, 20. [△]
15. 이사 53, 2-6. [△]
16. 요한 1, 29. [△]
17. 이사 53, 7-9. [△]
18. 1고린 1, 18 참조. [△]
19. 마태 26, 39. [△]
20. 마태 26, 42. [△]
21. 시편 21[22], 2. [△]
22. 이사 53, 6. [△]
23. 2고린 5, 21. [△]
24. 요한 19, 30. [△]
25. 이사 53, 10. [△]
26. 요한 7, 37-38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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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

19. 이사야서의 고통받는 종의 노래는 다음 구절에 의하여 바로 이 물음과 대답의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주고 있습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여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1)

그리스도의 수난과 더불어 모든 인간 고통이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이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있음을!"2)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마치 이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것과도 같았으며, 마치 자기 자신의 고통을 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구속이 없다 할진대 그 고통의 의미가 그에게 그처럼 충만히 계시될 수는 없었겠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비단 구속사업이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인간 고통 자체가 구속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으시면서도 "죄의 악 일체를"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이 악의 경험이 비할 데 없을 만큼의 그리스도의 고통을 결정지었으며, 이 그리스도의 고통이 구속의 대가〔贖錢〕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사야서의 고통받는 종의 노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봉인된 신약의 증언이 이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3)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내시려고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4)고, 또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5)하고 말씀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과 이와 비슷한 말씀들로써 신약의 증언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된 구속사업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속자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인간 누구나가 구속사업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각자 모두가 구속사업이 성취되게 한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 고통마저 구속되게 한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구속사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인간 고통을 구속의 차원에까지 들어높이셨습니다. 이리하여 인간 각자마다가 자기 자신의 고통을 겪으면서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20. 신약성서는 여러 곳에서 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사도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 그것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6)

바오로 성인은 갖가지 고통, 그리고 특히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함께 나누게 된 고통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들로 말미암아 그 편지의 수신인들은 구속자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구속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죽음의 웅변은 그러나 부활의 웅변에 의하여 완성됩니다. 부활에서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빛을 발견하게 되며, 이 빛의 도움으로 인간은 천대와 의심과 절망과 박해의 캄캄한 어둠 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사도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습니다."7)라고도 쓴 것입니다. 또 다른 데서도 사도는 수신인들에게 위로의 말을 써보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게 해주시기를 빕니다."8)그리고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9)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바로 이것이 이 사도의 표현들에서는 이를테면 이중의 차원을 띠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고통을 인간에게 열어보여 주셨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 자신이 당신의 구속적인 고통 속에서 어떤 의미로는 모든 인간 고통에 참여하는 분이 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을 발견할 때, 또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고통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신앙을 통하여 고통을 재발견하게 되어, 그 고통이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의미를 띠고 풍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발견했기에 바오로 성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히 힘찬 말씀으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10)고 썼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이 말씀의 저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까지 이끌어간 저 사랑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고통받고 죽으시면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셨다 할진대, 그분은 이 고통 및 죽음과 더불어 당신이 이토록 사랑하신 그 사람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 사람 안에, 곧 바오로 안에 살아계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바오로가 신앙을 통하여 이것을 의식하면서 그분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고 있는 그 만큼―살아계시기에, 그분은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곧 바오로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치되십니다. 이 일치로 말미암아 바오로는 같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또 다른, 조금도 못지않게 힘찬 말씀을 써보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11)

2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삶과 특히 인간의 고통에 구원의 빛을 지극히 사무치는 방식으로 던져주고 있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십자가는 부활과 함께 인간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즉, 수난의 신비는 파스카 신비 속에 내포되어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증언은 또한 동시에 그분의 부활에 대한 증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12)사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처음으로 체험했으며, 나중에야 비로소 이 파스카의 빛 속에서 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나누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컨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여정은 분명히 파스카적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일이 부활하신 분에 대한 체험을 통하여, 따라서 부활에 대한 특별한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주제에 관한 사도의 표현조차도 영광이라는 동기가 그처럼 자주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영광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그 발단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언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13)라는 확신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모든 박해와 환난을 당하면서도 잘 견디어내며 믿음을 지켜온 것에 대해서 우리는 ......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장차 그 나라를 차지할 자격을 얻게 되겠으니, 결국 하느님의 심판이 공정하다는 것이 확실합니다."14)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느님의 눈에는,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고통을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지닌 무한한 값을 어떤 의미에서 다시 치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지닌 값은 우리를 구원하는 속전이 되었습니다. 즉, 이 값이 치러짐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새로이 공고해지게 되었으며, 지상에서의 인간 실존에 결정적인 전망이 펼쳐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이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에 감싸인 사람들도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됩니다.

22. 하느님의 나라라는 전망에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시작이 있는 저 영광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한없이 엄청난 고통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흐려져있던 이 종말론적 영광이 부활에 의하여 계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들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이 영광에도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이 점을 여러 곳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썼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15)또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를 읽어봅시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16)베드로 사도는 이 진리를 그의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기뻐서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7)

고통과 영광이라는 동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복음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 성격은 십자가와 부활에 비추어볼 때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부활은 무엇보다도 특히 영광의 드러남이 되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들어 높여지셨음과 상응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심이었다면, 동시에 그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분이 들어 높여지셨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명에 도달하셨고 또 그것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즉,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심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신 것입니다. 약함 속에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으며, 비천함 속에서 당신의 메시아다운 위대하심을 온전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골고타에서 고뇌 중에 발설하신 모든 말씀들이 이 위대하심의 증거가 아닙니까? 또 특히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18)하고 당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가해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야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들이 숭고한 모범의 능력을 띠고 드러나게 됩니다. 고통은 또한 인간의 정신적인 위대함을, 인간의 영적 성숙을 드러내라는 하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이 영적 성숙의 증거가 세세대대를 통하여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의 증거자들에 의하여 주어져왔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9)는 말씀을 그들은 충실히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계시해주었으며, 동시에 "십자가의 자랑스러움"을 확인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통 거기에 숨어있는 영광이며, 인간의 고통 속에서 인간의 영적인 위대함을 나타내는 한 표현으로서 반영되어왔고 또 자주 반영되고 있는 그런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비단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에게 있어서만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때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고통을 겪고 목숨을 바치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인간의 큰 존엄성이 뚜렷하게 긍정되고 있습니다.

23. 고통은 사실 으레 하나의 시련―때로는 매우 혹독한 시련―이며, 이 시련에 인류는 종속되어있습니다. 강함과 약함의 역설이라는 복음의 역설은 성 바오로의 편지들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특히 바오로 사도 자신이 경험했을 뿐더러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역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바오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20)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를 읽어봅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어온 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21)그리고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22)라고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파스카 신비의 첫 단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약점과 무능의 극한에까지 내려오십니다. 참으로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약함 속에서 그분의 들어 높여지심이 성취되어있으며 또 이것이 부활의 권능에 의하여 긍정되어있다고 할진대, 그렇다면 이것은 모든 인간 고통의 약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바로 그 하느님의 권능과 융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고통을 겪는다 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베풀어진 하느님 구원 능력의 역사하심에 특별히 민감해진다는 것, 특별히 거기에 마음을 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고통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이며 자기 비움인 고통을 통하여 활동하고자 하시는 당신 원의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약함과 자기 비움 속에서야말로 당신 능력이 알려지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로써 또한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23)하고 훈계하는 말씀도 설명이 됩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약함 속에서 능력이 태어난다."는 이 주제를 더욱더 풍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시련과 고초 속에서 인간이 이렇게 영적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특별한 소명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24)고통은 이를테면 인간이 인간 자신의 편에서 수행해야 할 덕행에의 소명을 특별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어려움이나 해로움을 낳는 일이든지 견디어내는 인내의 덕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서 개인 각자에게 희망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며, 이 희망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자기를 굴복시키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이, 즉 고통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엄성을,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인식과 결부되어있는 존엄성을 발탁하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 이 인생의 의미야말로 성령의 숭고한 선물인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하심과 더불어 알려지게 됩니다. 이 사랑에 더욱 참여할수록 인간은 고통 속에서 더욱더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즉, 고통 때문에 잃어버린25)줄로 생각했던 "영혼"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24.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사도의 체험은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이를테면 고통과 관련된 영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를 이루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26)그리고 또 다른 편지에서 사도 바오로는 수신인들에게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27)라고 묻고 있습니다.

파스카 신비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의 결합을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이 파스카 신비에서 교회의 신비가 표현됩니다. 즉,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이루어주는 세례성사의 행위에서 이미, 또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성사적으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교회는 끊임없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건설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개인 각자와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또 특별히 고통받는 사람들과 결합되십니다. 위에서 인용한 골로사이서의 말씀은 이 결합의 예외적인 성격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대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자기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 것과 똑같이―비단 그리스도로부터 이미 지적된 그런 힘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고통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적으로 내다보고 있는 눈이 특히 고통의 창조적 성격에 관한 진리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세계를 구속하는 선을 창조하였습니다. 이 선은 그 자체로는 무량하며 무한합니다.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구속적인 고통을 모든 인간의 고통에로 향하여 어떤 의미에서 열어놓으셨습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고 있는 한―세상의 어디에서든 또 역사의 어느때든―그만큼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계의 구속을 성취하신 그 고통을 자기 나름으로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사업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통하여 성취된 구속사업이 인간의 고통 안에서 표현되고 있는 모든 사랑에 언제나 개방된 상태로 있다는 그런 뜻일 따름입니다. 이미 완전히 성취되어있는 구속사업이 이 사랑의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로 계속해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사업을 바로 최대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성취하셨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하나의 종결된 상태에 이르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 구속적 고통을 통하여 세상의 구속사업이 성취된 것이며, 이 구속적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 고통 하나하나에 대하여 당신 자신을 열어놓으셨고 또 끊임없이 그렇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이 끊임없이 완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 고통에 대한 이러한 개방성을 가지고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세상의 구속사업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구속사업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의하여 완전히 성취되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역사 안에서 계속 살아있으며 그나름의 특별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살아있고 발전하고 있으며, 이 차원에서 모든 인간 고통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결합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즉,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완성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그 고통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교회―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그 자체로 완성하기도 하는 그런 몸인 교회―의 신비는 동시에 인간의 고통들이 그리스도의 고통들을 완성하고 있는 공간 또는 맥락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오로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이 범위와 차원 안에서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고 사도가 쓸 때에, 사실인즉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야말로 구속사업의 무한한 원천에 끊임없이 의존하면서 그것을 인류의 삶 속에서 이끌어들이고 있으며, 바로 이 차원에서야말로 그리스도의 고통이 끊임없이 인간의 고통에 의하여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교회의 신적이며 인간적인 본성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통은 교회의 이러한 본성이 지니고 있는 특징에 어느 정도 참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 때문에 고통이 또한 교회의 눈에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어떤 좋은 것이며, 그래서 교회는 구속사업에 대한 깊은 신앙을 다하여 고통 앞에 허리 굽혀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자기 품안에 안고 있는 그런 깊은 신앙을 다하여 그 앞에 허리 굽혀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주석

1. 이사 53, 10-12. [△]
2. 욥 19, 25. [△]
3. 1베드 1, 18-19. [△]
4. 갈라 1, 4. [△]
5. 1고린 6, 20. [△]
6. 2고린 4, 8-11. 14. [△]
7. 2고린 1, 5. [△]
8. 2데살 3, 5. [△]
9. 로마 12, 1. [△]
10. 갈라 2, 19-20. [△]
11. 갈라 6, 14. [△]
12. 필립 3, 10-11. [△]
13. 사도 14, 22. [△]
14. 2데살 1, 4-5. [△]
15. 로마 8, 17-18. [△]
16. 2고린 4, 17-18. [△]
17. 1베드 4, 13. [△]
18. 루가 23, 34. [△]
19. 마태 10, 28. [△]
20. 2고린 12, 9. [△]
21. 2디모 1, 12. [△]
22. 필립 4, 13. [△]
23. 1베드 4, 16. [△]
24. 로마 5, 3-5. [△]
25. 마르 8, 35; 루가 9, 24; 요한 12, 25 참조. [△]
26. 골로 1, 24. [△]
27. 1고린 6,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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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고통의 복음


25. 십자가와 부활의 증거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인류에게 고통에 관한 하나의 특별한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구속자 자신이 이 복음을 쓰신 것이니,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의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심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1)하신 것입니다. 당신 가르침의 생생한 말씀과 더불어 이 고통은 첫 세대의 당신 제자들과 증거자들 가운데서나 또 그후로 세세대대에 이어내려 온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나 예수의 고통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풍부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위로가 될 만한 일로서―또한 복음서나 역사와 정확히 부합하는 일로서―우리는 주목해야 하겠거니와, 그리스도의 곁에는 가장 탁월한 으뜸 자리에 언제나 그분의 어머니가 계셔서 모범적인 증거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녀의 온 삶이 고통에 관한 이 특별한 복음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수많고 진한 고통들이 비단 그녀의 흔들림없는 신앙의 증거가 될 뿐 아니라 만인의 구속사업에 기여하는 일이 될 만큼 한데 어우러져있습니다. 사실, 천사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던 그때부터 이미 그녀는 한 어머니로서의 당신 사명에서 바로 당신 아드님의 사명에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참여할 "운명"을 알아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미구에 베들레헴에서의 예수의 탄생에 따른 사건들에서, 또 날카로운 칼이 그녀의 가슴을 찌르리라는 시므온 노인의 엄숙한 말에서 이에 대한 확인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더욱더 큰 확인을 받게 된 것은 헤로데의 잔혹한 결정으로 말미암아 에집트로 서둘러 피난가시면서 불안과 고초를 겪으실 때였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당신 아드님의 은거와 공생활의 여러 사건들이 지난 다음, 그녀가 가슴 에이는 아픔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났으니, 바로 해골산 위에서야말로 마리아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에 곁들여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그러나 세상의 구속을 위해서는 신비롭고도 초자연적으로 보람찬 그런 짙은 고통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리아께서 해골산 위에 올라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십자가 아래 서계시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당신 아드님의 구속적인 죽음에 참여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들려온 당신 아드님의 말씀들은 온 신앙인 공동체에게 선포될 수 있도록 이 고통의 복음을 전수해주는 일종의 엄숙한 의식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아드님의 수난 현장에 계신 증인으로서, 또 그 수난을 함께 아파하신 참여자로서, 마리아는 앞에서 우리가 인용한 바오로 성인의 표현을 미리 체현함으로써 고통의 복음에 둘도 없는 이바지를 하셨습니다. 참으로 마리아야말로 자기 "몸으로"―이미 마음으로 그랬듯이―"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특별한 자격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견줄 데 없는 표양에 비추이면서 그분 어머니의 삶에 유난히 영롱하게 되비추이면서, 고통의 복음은 사도들의 체험과 말씀들을 통하여 교회사상 끊임없이 이어오는 새세대들을 위하여 무진장한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고통의 복음은 비단 복음서에 고통이라는 주제가 기쁜 소식의 한 주제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에, 또 따라서 교회의 사명과 소명에 고통의 구원적 능력과 구원적 의의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청중에게 고통의 필요성을 숨기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2)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며, "자기를 버린다."3)는 조건 아래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윤리적 성격의 요청을 당신 제자들 앞에 명백히 제시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한"길이라 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멸망에 이르는 넓고 쉬운" 길과 대비시키셨습니다.4)또한 여러 기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증거자들이 많은 박해를 만나게 되리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박해는 비단 로마 제국 치하의 초세기 교회생활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역사상 다른 시기와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현실로 드러났던 것이며, 또 오늘날 우리네 자신의 시대에 와서까지도 여전히 그러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 점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몇 가지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때 어떻게 항변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너희의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잡아넘겨서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5)

고통의 복음은 우선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다고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도 예수 자신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말씀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고통이 닥치리라는 전망을 당신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에게 숨기시지 않고 오히려 아주 솔직하게 드러내놓으시면서, 동시에 초자연적인 도움이 "당신 때문에" 박해와 고난 속에 있는 그들과 함께 있게 되리라고 시사해 주십니다. 이 박해와 고난은 또한 이를테면 그리스도와 닮고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특별한 증거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그 주인보다 더 나을 수가 없다......그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내 제자라 해서 이렇게 대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고 있다."6)"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7)

박해, 즉 그리스도 때문에 겪는 고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이 고통의 복음 제1장은 그 자체 안에 부활의 웅변에 의하여 밑받침되는 용기와 강직에의 특별한 부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수난 죽음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동시에 그분은 당신 고통에 의하여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로 드러난, 저 세상에 대한 승리 속에는 고통이 유독 뚜렷이 등장하여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하신 몸에, 손과 발과 옆구리에 십자가의 상흔을 지니고 계십니다. 부활을 통하여 그분은 고통의 승리하는 힘을 천명하셨으며, 당신이 사도로서 뽑으신 사람들과 또 끊임없이 뽑아서 내보내고 계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8)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26. 고통의 복음의 위대한 제1장이 세세대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겪는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어오는 한편, 동시에 이 복음의 또 하나의 위대한 장이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전개되어오고 있습니다. 이 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받으며 자기들의 고통을 그분의 구원적인 고통과 결합시키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씌어지는 장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수난과 부활의 첫 증인들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함에 관하여 말하고 쓴 것이 성취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복음이 성취되어있으며, 동시에 그들 모두가 저마다 어떤 의미로 계속해서 고통의 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즉, 고통의 복음을 기록하여 세상에 전파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자기네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세대대로 인식되어 내려오고 있거니와, 고통 속에는 인간을 내적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끌어가는 특별한 힘이, 특별한 은총이 감추어져있습니다. 이 은총 덕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여러 성인들이 깊은 회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회심의 결과는 비단 개인이 고통의 구원적 의미를 발견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가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이를테면 자기 온 삶과 소명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발견은 인간 안에서 전혀 비교가 안될 만큼 육신을 능가하는 영의 위대함을 특별히 확고하게 인식하게 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육신이 중병에 걸리고 전혀 무능해져서 그 인간이 거의 살아서 활동할 수가 없을 지경일 때에도, 그럴수록 더욱더 내적인 성숙성과 영적인 위대함이 뚜렷이 드러나서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서의 이 내적인 성숙성과 영적인 위대함은 확실히 특별한 회심의 결과이며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구속자의 은총과 협력한 결과입니다. 바로 그분 자신이 당신 진리의 영을 통하여, 위로하시는 영을 통하여 인간 고통의 한복판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분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바로 영적 생활의 본질 자체를 변형시키시어 고통받는 그 사람에게 그분 자신에게로 다가갈 자리를 가리켜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 자신이 내면의 스승이며 인도자로서, 고통 중에 있는 형제나 자매에게 바로 구속의 신비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이 경이로운 교류를 열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보면 하나의 악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결정적인 선, 즉 영원한 구원이라는 선의 가장 확고한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십자가상의 당신 고통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악의, 죄와 죽음의 뿌리에까지 이르셨습니다. 악의 장본인 사탄을 정복하시고 창조주께 대한 사탄의 영속적인 반역을 타도하신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형제나 자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지평을 열어 서서히 계시해주십니다. 즉, 창조주께로 회두한 세계, 죄에서 해방된 세계, 사랑의 구원 능력을 바탕으로 건설되는 세계의 지평을 점차로 열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효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어떤 의미에서 바로 당신 고통의 한복판을 통하여 이 세계로, 이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 들어가십니다. 무릇 고통의 변형과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밖에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은총이 작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구원적 고통을 통하여 모든 인간 고통 안에 매우 풍부히 현존하시며, 당신 진리의 영, 위로하시는 영의 능력에 의하여 그 고통에 안으로부터 작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인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구속자께서는 구속된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게 으뜸가는 분이신 당신 성모님의 마음을 통하여 모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영혼에 사무쳐 들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치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태어나실 때의 저 모성을 연속시키시듯이, 죽음에 임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께 모든 인간들에 대한 영적이고도 보편적인 새로운 종류의 모성을 부여하시어, 모든 개인 각자가 신앙의 순례 도상에서 그녀와 더불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께 긴밀히 결합되어있도록 하셨으며,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지간에 이 십자가의 능력에 의하여 새생명을 얻어 이제는 인간의 약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내적 과정이 언제나 똑같은 양태를 따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그 시작과 추진에는 큰 어려움이 함께합니다. 바로 출발점 자체조차 서로들 다릅니다. 즉, 사람들은 고통에 대하여 서로 달리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각개인이 고통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전형적으로 인간적인 반항과 "왜"라는 물음이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고통의 의미를 묻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물음을 하느님께, 또 그리스도께 제기하는 일도 자주 있는 일입니다. 더욱이 그는 자기가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대방인 그분 자신이 고통중에 계시며 십자가에서부터, 당신 자신의 고통의 핵심에서부터 그에게 대답을 주고자 하시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답이 내적으로 체인되기 시작하는 데에는 흔히 시간이, 심지어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저 직접적으로 대답을 주시지 않으며, 또 고통의 의미에 관한 이 인간적인 질문 제기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대답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가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적 대답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참여를 통하여, 스승과의 내적인 만남에 의하여 얻게 되는 대답은 그 자체가 고통의 의미문제에 대한 단순한 추상적 해답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의 소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추상적으로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시지 않고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너라! 너의 고통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이 일에, 나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사업에 참여하라! 나의 십자가를 통하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결합시켜감에 따라, 점차로 고통의 구원적 의미가 그의 앞에 열리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이 의미를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이라는 차원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그리스도의 차원에서부터 고통의 구원적 의미는 인간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 자신의 응답이 됩니다. 바로 그때야말로 인간은 자기 고통 속에서 내적인 평화를, 또 영적인 기쁨까지도 발견하게 됩니다.

27.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9)고 바오로 성인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이겨내는 거기서 하나의 기쁨의 샘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 느낌은 때로 인간의 고통 속에 매우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 느낌은 비단 인간 자신을 내적으로 소모시킬 뿐만 아니라 그를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과 협력을 받도록 저주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쓸데없는 인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결합에서 고통의 구원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이 우울한 느낌이 변형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고통 중의 인간 자신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는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즉, 구속사업의 영적 차원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처럼 자기 형제자매들의 구원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봉사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속자의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 정신이 사무쳐있는 그런 고통이야말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좋은 일들의 대신할 수 없는 중개자요 조성자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고통이야말로 인간 영혼을 변형시키는 은총을 위하여 길을 닦아줍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고통이야말로 인류의 역사 안에 구속의 능력이 현존하게 합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바,10)선과 악이라는 영적 능력들 사이의 저 "우주적" 싸움에서, 인간의 고통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과 결합될 때 선의 능력들을 특별히 밑받침해주는 요소들이 되는 것이요, 이 구원적 능력들이 승리에 길을 열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교회는 고통 중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을 이를테면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의 복합적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의 목자들이 바로 그들에게 호소하고 바로 그들에게서 협력과 지원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고통의 복음은 끊임없이 기록되고 있으며, 또 그것은 끊임없이 이 오묘한 역설의 말로써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즉, 바로 인간적 약함 가운데서 신적 능력의 샘들이 솟아난다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기네 자신의 고통 속에 세상의 구속이라는 무한한 보화의 매우 특별한 한 조각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이 보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받고 있는 죄의 위협이 많을수록, 오늘날의 세계가 수반하고 있는 죄의 구조가 무거울수록, 인간 고통이 그 자체 안에 간직하고 있는 웅변은 그만큼 더 큰 법입니다. 또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인간 고통의 가치에 의존할 필요를 그만큼 더 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석

1. 요한 3, 16. [△]
2. 루가 9, 23. [△]
3. 루가 9, 23 참조. [△]
4. 마태 7, 13-14 참조. [△]
5. 루가 21, 12-19. [△]
6. 요한 15, 18-21. [△]
7. 요한 16, 33. [△]
8. 2디모 3, 12. [△]
9. 골로 1, 24. [△]
10. 에페 6, 12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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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착한 사마리아 사람

28. 역시 고통의 복음에 유기적으로 속해있는 것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라는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서 발가벗기고 두들겨맞아 반쯤 죽어 누워있는 사람을 본 그 길의 세 행인 중에서,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그 피해자의 진짜 "이웃"임이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웃"이란 또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가면서도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한 사람은 제관이었고 또 한 사람은 레위였는데도, 둘 다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 가버렸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를 ....... 싸매어주고는 ......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간호해주었다."2)그리고 여관을 떠날 때에는 자상하게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 고통 중의 인간을 여관 주인에게 돌보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비용은 얼마가 들든지 자기가 다 갚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고통의 복음에 속합니다. 그것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 각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지적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관심하게 "지나쳐 가"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곁에 "멈추어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간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 곁에 멈추어서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랍입니다. 이 멈추어섬이란 호기심의 발동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익한 행동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어떤 내적인 마음가짐의 개방과 같은 것이며, 그 나름의 어떤 감정 표현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민감한 개인 누구나에게 적중합니다. 인간의 내면을 잘 알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자비심을 강조하고 계시다면, 이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일체에서 이 자비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 중의 인간에 대한 자비심의 증거가 되는 이 마음의 민감성을 길러야 합니다. 때로는 이 자비심이라는 것이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연대성을 단순히 또는 원칙적으로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저 동정심과 자비심에만 멈추어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동정심과 자비심이 상처입은 그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행동의 자극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결국,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고통 속에서 도움을 가져다주는 사람입니다. 어떤 성질의 고통이든간에 될 수 있는 대로 효과적인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거기에 자기 온 마음을 쏟아 넣으며 물질적인 수단도 아끼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자신을, 바로 "나"를 준다고, 이 "나"를 타인에게 열어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인간론의 관건이 되는 요점의 하나에 접하게 됩니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3)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바로 그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29. 복음의 비유에 따라 우리는 능히 말할 수 있거니와, 우리네 인간 세계에 각양각색으로 존재하는 고통은 또한 인간 안에 있는 사랑을 방출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특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라는 몰아적인 선물을 내어주기 위하여 존재하기도 합니다. 인간 고통의 세계는 이를테면 다른 세계를, 곧 인간다운 사랑의 세계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 덕분에 인간은 마음과 행동을 자극하는 몰아적인 사랑을 얻게 됩니다. 하나의 "이웃"인 인간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도 무관심하게 지나쳐 가버릴 수는 없습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연대성이라는 명분상 그럴 수는 없을뿐더러, 하물며 이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야 더욱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멈추어서야" 하며 "동정심"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비유는 그 자체로 깊은 그리스도교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인간적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흔히 일상의 언어에서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일반적으로 일컬어 "착한 사마리아 사람" 사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 활동은 조직화된 제도적 형태들을 취해 왔으며, 전문적으로 세분화된 하나의 사업 분야를 이루어왔습니다. 의사나 간호원이나 그 밖의 비슷한 전문 직업상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복음적"인 내용을 생각할 때,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하나의 직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세세대대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봉사활동을 수행해온 제도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와서는 훨씬 더 발전되고 전문화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점점 더 관대하고 더 세심하게 이웃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며 점점 더 훌륭한 기술로써 그 고통을 다스리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수용 능력도 전문 지식도 점점 더 커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점을 두고 볼 때 우리는 능히 말할 수 있거니와,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정신 문화와 보편적 인간 문명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지식과 능력에 의하여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갖가지 봉사를 제공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와 치하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 중의 이웃에게 대한 자기 나름의 봉사를 몰아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들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원호활동에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기네 직업 밖에서 자기네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이 일에 바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자발적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 활동, 즉 자선활동은 사회사업이라고 부를 수 있거니와, 이것이 뚜렷이 복음적인 동기에서 수행될 때에는, 특히 교회나 그 밖에 그리스도교 단체와 연결되어 있을 경우에는 또한 하나의 사도직 수행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자발적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 사업은 적절한 환경에서 또는 이 목적을 위하여 창설된 "기구"를 통하여 수행됩니다. 기구를 통한 활동은, 특히 그것이 협동과 기술적 수단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비교적 대규모의 과업을 내포하고 있을 경우에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할동도, 특히 인간 고통의 종류에 따라서는 개인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그 고통을 덜어줄 수밖에 없는 경우에 그런 일을 위하여 더 잘 준비되어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런 일이 수행된다면, 이 또한 못지않게 가치있는 일입니다. 끝으로, 가정을 돕는 일은 같은 가족끼리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과 가정들 상호간의 협력을 모두 다 포함합니다.

교회와 사회에 존재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사업의 모든 형태와 갖가지 환경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들이 숫자적으로 매우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뿐더러, 또 이들 덕분에 인간적 연대성이라는 가치나 그리스도교적 이웃 사랑이라는 가치와 같은 기본적인 정신 가치들이 사회생활과 인간 상호관계의 뼈대를 이루어 타인에 대한 온갖 형태의 증오, 폭력, 잔혹, 멸시 또는 "무감각"과 대결해서, 다시 말해서 자기 이웃과 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대결해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흐뭇함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에 있어서 올바른 자세를 가진다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대목에 이르게 됩니다. 가정과 학교와 그 밖의 교육기관들은 적어도 인도적인 이유에서만이라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모습이 한 상징이 되어있는 그런, 이웃과 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일깨워주고 가꾸어주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도 같은 일을 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교회야말로 더욱더 깊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비유에서 또 복음 전체에서 제시하신 동기들을 최대한으로 교회 자신의 동기로 삼아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또 복음 전체가 말해주고 있는 웅변이란 특히 이것입니다. 즉, 모든 개인 각자가 고통 속에서 사랑을 증거하도록 직접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도들은 매우 중요하며 필요 불가결합니다. 그러나 어느 제도라도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일이 문제일 때에 제도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 인간의 자비심, 인간의 사랑 또는 인간의 자발성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육체적 고통이 문제일 때에도 그러할뿐더러, 갖가지 정신적 고통이 문제일 때에도 또 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이 영혼일 때에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30.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고통의 복음에 속해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교회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과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줄곧 이 복음과 더불어 손잡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고통의 구원적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가 "결코 수동성이라는 자세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완전히 거꾸로가 진실입니다. 복음은 고통 앞에서 수동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이 분야에서야말로 특별히 능동적이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라는 예언자의 말씀대로 당신 사명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넘치게 풍요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명의 이 구원 계획을 수행하시었습니다. 즉,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5)그래서 당신이 하시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 특히 인간의 고통 앞에서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리스도 자신의 행동과 깊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 비유는 그 본질적인 내용을 통하여 저 최후 심판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놓는 이 말씀을 마태오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6)이 모든 일을 자기들이 언제 당신께 해드렸더냐고 묻는 의인들에게 사람의 아들께서는 대답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7)달리 행동한 사람들에게는 이와 반대되는 선고가 내려질 것입니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8)

인간적인 민감성과 자비심과 도움을 만나게 되었거나 또는 그렇게 되지 못한 고통의 여러 가지 형태들을 물론 더 부연해서 열거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든, 최후 심판에 관한 그리스도 말씀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이 조금도 애매한 데가 없이 명시해주고 있거니와 개인 누구에게나 그가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 이웃의 고통을 보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멈추어서서" 그 고통에 대하여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어떤 도움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요긴한 일입니까!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은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계획이거니와, 이 설계에 있어서 고통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음은 사랑을 방출하기 위함이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일들을 탄생시키기 위함이며 인간의 문명 전체를 "사랑의 문명"으로 변형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고통의 구원적 의미가 완전히 성취되며 그 결정적인 차원에 이르게 됩니다. 최후 심판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극명한 복음 안에서 이것을 능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사랑의 활동들에 관한, 인간 고통과 결부된 행동들에 관한 이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고통의 밑바탕에서 똑같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가 그것을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각개인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 그 사람이십니다.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고통 중의 인간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도움이 주어질 때 이 도움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이 일단 결정적으로 모든 인간 고통을 향하여 열리어있는 이상,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이 고통 중의 인간 안에 현존하여계십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이 일단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9)사람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는 마치 모든 이가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도록"10)부르심을 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일거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고통에 의하여 좋은 일을 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 양면에서 그분은 고통의 의미를 완전히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주석

1. 루가 10, 29. [△]
2. 루가 10, 33-34. [△]
3.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24항. [△]
4. 루가 4, 18-19; 이사 61, 1-2 참조. [△]
5. 사도 10, 38. [△]
6. 마태 25, 34-36. [△]
7. 마태 25, 40. [△]
8. 마태 25, 45. [△]
9. 1베드 4, 13. [△]
10. 골로 1,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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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결론

31. 이것이 참으로 초자연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고통의 의미입니다. 고통은 그것이 세상의 구속사업이라는 하느님의 신비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초자연적이요, 그 안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있으므로 또한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고통은 확실히 인간의 신비에 속합니다. 아마도 인간이 그러한 그만큼이나 고통이 특별히 오묘한 신비인 이 신비에 감싸여있지는 않다고 하겠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 진리를 밝혀 "‥‥혈육을 취하신 '말씀'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는다.‥‥‥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그 계시로써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주신다."1)고 갈파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인간의 신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진대, 그렇다면 이 말씀은 또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 고통"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야말로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주신다는 이것은 특별히 불가결한 일이 됩니다. 또한 경험이 입증하듯이 종종 이것은 특별히 극적인 일로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성취되어 인생의 빛이 될 대, 이것은 특별히 복된 일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입니다."2)

바야흐로 본인은 교회가 구속사업의 기념과 관련된 특별 성년을 지내고 있는 해에 고통에 관한 이 고찰을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세상의 구속이라는 신비는 놀랍게도 고통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이 고통은 또한 구속의 신비 속에서 그 가장 확실한 최고의 조회 지점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들과 특별히 결합하여 이 구속의 성년을 지내고자 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믿는 고통 중의 모든 사람들이, 또 특별히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을 믿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마음으로 함께 해골산 위의 십자가 아래 모여와서 자기들의 고통을 바침으로써, 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 기원하신 구세주 자신의 기도의 성취를 촉진해야 하겠습니다.3)이 십자가 아래에 또한 선의의 모든 사람들도 모이게 합시다. 이 십자가 위에는 만대의 만민이 사랑 안에서 자기네 고뇌의 구원적 의미와 모든 자기네 물음에 대한 타당한 해답을 발견하도록 그 모든 이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신 "인간의 구원자," 고뇌의 인간 그분이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 서계셨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4)우리는 현대인의 십자가들 곁에 머무는 바입니다.

세세대대로 특출하게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해오신 모든 성인들께 본인은 간구하는 바입니다. 그분들이 우리를 받쳐주시기를 청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고통 중의 여러분 모두에게 본인을 받쳐달라고 청하는 바입니다. 바로 약한 여러분이야말로 교회와 인류를 위하여 강함의 샘이 되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우리네 현대세계가 우리 눈앞에 드러내고 있는 선과 악, 양 세력들 사이의 가공할 싸움터에서, 여러분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합하여 승전을 거두기를!

충심으로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본인의 사도적 축복을 보내는 바입니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교황 재위 제 6년, 1984년 2월 11일,
루르드의 성모 기념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석

1. 사목헌장, 22항. [△]
2. 위와 같음. [△]
3. 요한 17, 11. 21-22 참조. [△]
4. 요한 19, 25. [△]
  |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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