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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조회수 | 3,121
작성일 | 07.05.30
그리스도교의 사랑에 관하여 주교와 신부, 부제, 남녀 수도자 모든 평신도에게 보내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 2004.12.25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서론

1."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요한의 첫째 서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곧 하느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의 모습과 여정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 성인은 같은 성경 구절에서 그리스도인 생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말로 자기 삶의 근본적인 결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 사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사랑의 중심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을 간직하는 동시에 거기에 새로운 넓이를 부여하였습니다. 독실한 유다인은 날마다 자기 삶의 핵심을 드러내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계명과 레위기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마르 12,29-31 참조)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묶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1요한 4,10 참조),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계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사랑의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때때로 복수나 심지어 증오와 폭력의 명분에 하느님의 이름을 결부시키는 오늘날, 이러한 메시지는 시의 적절하고 중요합니다. 따라서 저는 제 회칙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에 대하여, 이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이 회칙 제1부와 제2부의 핵심 내용이며, 이 두 부분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부는 다소 이론적입니다. 그것은, 교황직을 시작하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신비로운 방식으로 거저 베풀어 주시는 사랑에 관한 몇몇 본질적인 사실들과, 그 사랑과 인간 사랑이 본질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 회칙에서 밝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2부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 대한 교회의 실천을 다루기 때문에 더욱 구체적입니다. 이는 복잡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 회칙의 목적상 길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저는 몇 가지 기본 요소들을 강조하여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인간이 응답하도록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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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창조와 구원 역사에서

사랑의 일치

언어의 문제

2.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삶에 근본 물음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이시고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곧바로 언어의 문제와 맞닥뜨립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오늘날 가장 자주 사용되고 전혀 다른 의미들로 오용되고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회칙이 주로 성경과 교회 전승 안에 나타난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문제를 다루겠지만, 사랑이라는 말이 여러 문화와 오늘날의 언어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사랑’이라는 말이 지닌 폭넓은 의미를 상기해 봅시다. 조국에 대한 사랑, 직업에 대한 사랑, 친구 간의 사랑, 일에 대한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의미 가운데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나뉠 수 없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고, 마다할 수 없는 행복에 대한 약속이 인간에게 드러납니다. 이는 뛰어난 사랑의 원형처럼 보여, 다른 온갖 사랑은 그와 비교할 때 빛을 잃어버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이 모든 형태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여서, 사랑은 참으로 다양하게 드러나지만 결국 사랑은 유일한 실재인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의 낱말을 사용하여 전혀 다른 실재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에로스’와 ‘아가페’- 차이와 일치

3.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로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어 구약 성경에서는 에로스라는 말이 단 두 번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신약 성경에서는 이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사랑과 관련한 그리스어의 세 단어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우애), 아가페(agape) 가운데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어에서는 거의 잘 사용되지 않던 아가페라는 말을 선호하였습니다. 우애를 나타내는 필리아는 요한 복음서에서 그 의미가 심화되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로스라는 말을 삼가고 아가페라는 말로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표현하려는 경향은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에는 어떤 새롭고 본질적인 것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점점 더 과격해진 그리스도교 비판에서, 이 새로운 요소는 철저히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에로스를 독살하였으며, 에로스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더라도 점차 악한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1) 여기에서 이 독일 철학자는 널리 퍼져 있던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곧 교회가 그 모든 계명과 금기로 삶의 가장 고귀한 것을 쓰디쓴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창조주의 선물인 기쁨이 우리에게 신적인 것을 어느 정도 미리 맛보게 해 주는 행복을 주는 바로 그 순간에 교회가 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닌가?

4.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교가 정말로 에로스를 파괴해 버린 것입니까? 그리스도교 이전 세계를 한번 살펴봅시다. 다른 문화들에서처럼 그리스인들도 에로스를 주로 일종의 도취로, 곧 ‘신적인 광기’로 이성((理性)을 압도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광기로 인간은 유한한 삶에서 벗어나 신적인 힘에 사로잡혀 지고의 행복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과 땅의 다른 모든 힘은 이차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베르길리우스는 ‘목가’(Bucolicis)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고 말하며, “우리도 사랑에 굴복하자(et nos cedamus amori).”고 덧붙입니다.2) 종교에서 이러한 태도는 다산 숭배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신전에서 횡행하였던 ‘신성한’ 매춘이 여기에 속합니다. 따라서 에로스는 신과 사귀는 신적인 힘으로 찬양되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유일신 신앙에 반대하려는 강한 유혹인 이러한 형태의 종교를 종교 타락으로 여겨 강력히 맞섰습니다. 그러나 결코 에로스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곡되고 파괴적인 형태의 에로스를 물리치고자 하였습니다. 에로스를 그릇되게 신격화하는 이러한 행위는 사실상 에로스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에로스를 비인간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신적인 도취를 가져다주어야 했던 신전 매춘부들은 인간이나 인격체로 대우받았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신적인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여신이 되기는커녕 착취당하는 인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무분별한 도취의 에로스는 ‘황홀경’에서 신을 향해 오르는 상승이 아니라 추락이며 인간의 타락인 것입니다. 에로스가 인간에게 단순히 순간적 쾌락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절정, 곧 우리의 온 존재가 열망하는 지복을 어느정도 미리 맛보게 해 주려면 에로스는 절제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5. 에로스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개념을 간략히 살펴보면 두 가지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첫째는, 사랑과 신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무한과 영원을 약속합니다. 사랑은 우리 일상의 삶보다 휠씬 더 위대하고 또 전혀 다른 실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본능에 따르는 것만이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도 보아 왔습니다. 정화와 성숙이 요구됩니다. 이는 또한 포기의 길을 거칩니다. 정화와 성숙은 에로스를 거부하거나 ‘독살’하기보다는 에로스를 치유하고 그 진정한 위대함을 회복시켜 줍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긴밀히 일치될 때에 진정 그 자신이 됩니다. 이러한 일치가 이루어질 때에 에로스의 도전은 진정으로 극복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순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기만을 갈망하고 육체를 단지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려 한다면, 영혼과 육체 모두 그 존엄을 잃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영혼을 거부하고 물질, 곧 육체를 유일한 실재로 여긴다면, 마찬가지로 인간은 인간의 위대함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쾌락주의자인 가상디는 데카르트에게 “오 영혼!”이라는 익살스러운 인사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오, 육체!”라고 대답하였습니다.3)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영혼만도 육체만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통합된 피조물, 곧 인간인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두 차원이 진정으로 일치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온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사랑, 곧 에로스는 성숙하여 그 진정한 위대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과거의 그리스도교가 육체에 적대적이었다는 비판을 자주합니다. 그러한 경향이 언제나 있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육체를 찬양하는 방식은 기만적입니다. 에로스는 단순히 ‘성’으로 전락하여 상품화 되었고, 사고파는 단순한 ‘물건’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이 상품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육체와 성을 단순히 마음대로 사용하고 착취하는 자신의 물질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무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즐기고도 문제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대로 인간 육체의 타락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육체는 더 이상 우리 존재의 총체적 자유 안에 통합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의 전 존재를 생생하게 드러내지도 못하고 순전히 생물학적 차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육체에 대한 표면적 찬양은 금방 육적인 것에 대한 증오로 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언제나 인간을 이원성 안의 일치로, 곧 정신과 물질이 하나로 융합되고 그리하여 정신과 물질이 모두 새로운 고귀함에 이르게 되는 하나의 실재로 보아 왔습니다. 에로스는 ‘황홀경’의 상태에서 신에게로 올라가고,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로스는 상승과 극기, 정화, 치유의 길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6. 구체적으로, 이 상승과 정화의 길은 무엇을 내포하는 것입니까? 사랑이 그 인간적 신적인 약속을 충만히 실현할 수 있으려면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여야 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신비주의자들에게 알려진 구약 성경의 아가에서 으뜸가는 중요한 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에 따르면, 이 책 속에 담긴 시들은 본래 유다인의 혼인 잔치를 위해 만들어진 연가였으며, 부부 사랑을 드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가에서 ‘사랑’을 지칭하는 두 가지 다른 히브리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매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도딤(dodim)’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아직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찾아 헤메는 사랑을 나타내는 복수형입니다. 이 말은 곧 ‘아하바(ahaba)’라는 말로 바뀌는데, 그리스어 구약 성경에서는 이 말을 그와 비슷한 발음의 아가페로 옮겨졌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가페는 성경에서 사랑의 개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이 됩니다. ‘찾아 헤메는’ 불확실한 사랑과 대조적으로, 이 말은 이전에 풍미하였던 이기적 성격을 뛰어넘어 다른 이를 참되게 발견하는 사랑의 체험을 드러냅니다. 사랑은 이제 다른 이를 염려하고 배려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은 더 이상 자기를 찾는 것도 아니고 행복의 도취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은 포기가 됩니다. 사랑은 희생하겠다는 각오이고, 바로 그 희생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은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고 내적으로 정화해 가며 이제 결정적인 사랑이 되고자 합니다. 결정적인 사랑이란 두 가지 의미, 곧(오로지 이 사람뿐이라는) 배타의 의미와 ‘영원’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랑은 시간을 비롯한 온 삶을 끌어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약속은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은 영원을 바라봅니다. 사랑은 참으로 ‘황홀경’입니다. 도취 순간의 황홀경이 아니라, 자기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줌으로써 자아를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참으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여정인 황홀경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 33)라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십니다(마태 10,39; 1625; 마르 8,35; 루카 9,24; 요한 12,25 참조).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에 이르는 당신 자신의 길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것은 땅에 떨어져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 말씀으로, 사랑의 본질과 인생의 보편적인 본질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당신의 희생과 당신 안에서 완성된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7.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서두의 이러한 다소 철학적인 고찰은 그 내적 논리를 통하여 이제 우리를 성경의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이 지닌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대립되는 의미들이 어떤 근본적인 심오한 일치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의미들은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과 교회 전승이 우리에게 선포한 사랑의 메시지가 사랑에 대한 인간의 공통 체험과 상응하는 점이 있는지, 아니면 그 체험과 반대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근본적인 두 낱말을 숙고하였습니다. 곧 ‘세속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낱말인 에로스와, 신앙 안에 뿌리를 박고 신앙으로 형성되는 사랑을 드러내는 아가페입니다. 이 두 개념은 흔히 ‘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으로 대비됩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구분으로, 가지려는 사랑(탐욕의 사랑, amor concupiscentiae)과 내어 주는 사랑(호의의 사랑, amor benevolentiae), 그리고 여기에 때때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랑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철한적 신학적 토론에서, 이러한 구분들은 종종 서로 명확히 대립될 정도로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내려오는 사랑, 주는 사랑, 곧 아가페는 그리스도교의 전형인 반면에, 올라가는 사랑, 가지려는 사랑, 탐욕적인 사랑, 곧 에로스는 비그리스도교 문화, 특히 그리스 문화의 전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조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핵심 관계들과 단절되어, 하나의 동떨어진 세계, 찬미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 삶의 복잡한 구조에서 결정적으로 떨어져 나간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에로스와 아가페-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측면의 이 두 사랑이 사랑의 동일한 실재 안에서 올바르게 일치하면 할수록, 일반적으로 사랑의 참된 본성은 그만큼 더 잘 실현됩니다. 에로스가 처음에는 커다란 행복을 약속하는 매혹으로서 탐욕적이고 올라가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의 행복은 더욱더 추구하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을 점점 더 염려하고, 자신을 내어 주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가페의 요소가 이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로스는 타락하여 그 고유의 본성조차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인간은 내려오는 사랑, 주는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줄 수만은 없으며,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선물로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이, 분명히 인간은 생수의 강들이 흘러 나오는 샘이 될 수 있습니다(요한 7,37-38 참조). 그러나 그러한 샘이 되려면 그 원천에서 흘러 나오는 새 물을 끊임없이 마셔야 합니다. 그 원천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창에 찔린 그분의 심장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 나옵니다(요한 19,34 참조).

야곱의 사다리 이야기에서, 교부들은 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 하느님을 추구하는 에로스와 받은 선물을 전해 주는 아가페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족장 야곱이 꿈에서 그가 베고 자던 돌 위로 나 있는 층계가 하늘에 닿아 있고,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가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읽습니다(창세 28,12; 요한 1,51 참조). 교황 대 그레고리오가 ‘사목 규칙’(Regula Pastoralis)에서 제시한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에 따르면, 착한 목자는 관상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떠안고, 그 요구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나약함을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Per pietatis viscera in se infimitatem caeterorum transferat).”4) 이러한 맥락에서 그레고리오 성인은 바오로 성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하느님의 가장 드높은 신비에까지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내려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2코린 12,2-4;1코린 9,22 참조). 그는 또한 모세의 예를 들기도 하는데, 모세는 여러 번 거듭 장막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장막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백성에게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관상으로 드높여지지만, 밖에서는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한다(Intus un contemplationem rapitur, foris infomantium negotiis urgetur).” 5)

8. 이리하여 우리는 앞서 제기된 두 가지 물음에 대하여 다소 일반적인 대답에 이르렀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은 서로 다른 차원을 가진 하나의 실재입니다. 때로는 이 차원이, 또 때로는 다른 차원이 더 명확히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차원이 서로 완전히 분리될 때, 기묘한 모습이 되거나 가장 빈약한 형태의 사랑으로 전락합니다. 종합적으로 보아, 성경의 신앙은 사랑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현상과 다른 대립 세계나 평행 세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신앙은 인간이 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에 개입하여 그 사랑을 정화하고 동시에 인간에게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줍니다. 성경 신앙의 이 새로움은 두드러진 자리, 곧 하느님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 안에서 주로 드러납니다.

성경의 신앙이 지닌 새로움

9. 먼저, 성경의 세계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제시합니다. 주변 문화들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신들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불명확하고 모순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앙이 발전하면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기도(Shema)의 내용이 점점 더 명확하고 분명해졌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의 하느님이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존재하십니다. 이 말에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곧, 다른 모든 신은 하느님이 아니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고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창조의 개념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만, 그분께서는 다른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비로소 명백해집니다. 우주 전체가 그분의 창조적 말씀의 힘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분의 피조물은 그분께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바라셨고 또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중요성은 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최고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성찰을 통하여 인식하고자 노력하였던 신성은 사실 모든 존재가 열망하고 사랑하는 그 무엇이지만- 사랑을 받기에 이 신성은 세계를 움직입니다.6) -,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사랑받을 뿐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믿는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격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그분의 사랑은 선택하는 사랑입니다. 곧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인류를 치유하려는 목적에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분명히 에로스라 할 수 있지만, 또한 전적으로 아가페이기도 합니다.7)

예언자들, 특히 호세아와 에제키엘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열정을 묘사할 때 대담한 관능적 표상들을 사용합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약혼과 혼인의 은유를 이용하여 묘사됩니다. 따라서 우상 숭배는 간음과 매춘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 보았듯이 다산 숭배와 그 에로스의 남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봅니다. 그러나 또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느님 사이의 충실한 관계에 대한 묘사도 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펼쳐진 사랑의 역사는,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토라(Torah)를 주시어 인간의 참된 본성에 눈을 뜨게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참된 인간애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역사는, 인간이 한 분이신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통하여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진리와 정의 안에 사는 기쁨, 자신의 근원적 행복인 하느님 안에 사는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십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시편 73[72],25.28).

10.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에로스 또한 전적으로 아가페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아무런 공로 없이도 완전히 거저 주어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특히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이 아가페적인 차원이 거저 주어지는 측면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간음’을 했고, 계약을 깨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과 관계를 끊어 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복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8-9). 당시 백성에 대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열정적인 사랑은 동시에 용서하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 사랑은 너무도 위대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스르시고, 그분의 사랑이 그분의 정의를 거스르게 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신비를 어렴풋이 미리 엿볼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위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이 되심으로써 죽기까지 인간을 따르시고, 그리하여 정의와 사랑을 일치시키신 것입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주목하여야 할 철학적인 차원과 종교사의 관점에서 이 구절이 갖는 중요성은, 한편으로 우리 앞에 제시된 하느님의 모습이 완전히 형이상학적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근원이십니다. 그러나 창조의 이 보편 원리, 곧 제1인성인 로고스는 동시에 참사랑의 모든 열정으로 사랑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로스는 최고로 드높여지지만, 동시에 아가페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정화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가가 성경의 정경에 받아들여진 이유는, 이 사랑 노래들이 결국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와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명확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가는 그리스도교 문헌과 유다 문헌에서 동시에 성경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는, 신비로운 지식과 체험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은 인간의 원초적 꿈인 하느님과의 결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합은 신성의 바다 속에 이름도 없이 가라앉는 침몰이거나 어떤 혼합이아니라, 사랑을 창조하는 일치인 것입니다. 그 일치 안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으로,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 있지만, 완전한 하나가 됩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하듯이,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11. 성경 신앙의 첫번째 새로운은, 앞에서 보았듯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이와 본질적으로 연관도니 두 번째 새로움은 인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첫 사람인 아담이 혼자여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협력자를 주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서 아담이 필요로 하는 협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온갖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그들을 온전히 그의 삶의 일부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제 아담은 자신이 필요로 하였던 협력자를 얻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여기에서 우리는 예컨대 플라톤이 언급한 신화에도 나오는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자족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본래는 둥근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만심에 대한 벌로, 제우스는 인간을 둘로 나누어 버렸고, 그래서 이제 인간은 자신의 다른 반쪽을 갈망하고, 자신의 온 존재로 그 반쪽을 소유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완전성을 다시 회복하려 애쓴다는 것입니다.8) 성경의 이야기는 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이 다소 불완전하며, 본능적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한다는 생각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이성(理性)과 일치를 이룰 때에만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아담에 대한 예언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창세 2,24).

이 이야기에서 두가지 측면이 중요합니다. 먼저, 에로스는 어느 정도 인간의 본성 자체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아담은 여자를 찾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는”, 찾는 사람입니다. 함께 여야만 둘은 완전한 인간성을 드러내며 ‘한 몸’이 됩니다. 두 번째 측면도 이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에로스는 인간을 혼인으로, 곧 유일하고 결정적인 유대로 인도합니다. 그렇게 하여, 또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에로스는 그 가장 심오한 목적을 달성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부합하는 것이 일부일처제 혼인입니다. 배타적이고 결정적인 사랑에 토대를 둔 혼인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상이 되고, 반대로 그 관계가 혼인의 표상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은 인간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혼인과 에로스 사이의 밀접한 관계와 비길 만한 것은 그 밖의 어떤 문헌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강생하신 하느님의 사랑

12.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구약성경에 대하여 언급해 왔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한 경전인 두 성경이 서로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이미 명백해졌습니다. 신약성경의 실질적인 새로움은 새로운 개념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개념들에 살과 피를 부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에 있습니다. 이는 유례없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경의 새로움은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고 어떤 면에서는 전례 없는 하느님의 활동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활동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길 잃은 양’, 고통받는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 방탕한 아들을 보고 달려 나가 안아 주는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이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십니다. 그 비유들은 그분의 존재와 활동 자체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위 죽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슬러, 인간을 들어 높이시고 구원해 주시고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행위의 절정입니다. 그것은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요한 19.37 참조)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 회칙의 출발점으로 삼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살아가고 사랑하여야 할 길을 찾아냅니다.

13.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바치는 이 행위가 영원히 현존하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당신 자신, 곧 새로운 만나(요한 6,31-33 참조)인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심으로써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 하셨습니다. 고대 세계는 인간의 참된 음식, 곧 참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음식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지혜인 로고스임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로고스가 이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한 양식이 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행위에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우리는 강생하신 로고스를 단지 정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역동적인 행위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혼인에 대한 표상은 이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전에 그 혼인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봉헌에 동참하고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눔으로써 하느님과 결합하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 낮춤에 토대를 둔 성사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작용하며, 인간의 모든 신비주의적 고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우리를 들어 높여 줍니다.

14.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차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곧 이 성사의 ‘신비’가 사회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사의 친교, 곧 영성체를 통하여 나는, 성체를 받아 모시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하듯이,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든 사람과 이루는 일치이기도 합니다. 나는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 그리스도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거나 모든 사람과 일치를 이룰 때에만 그분께 속할 수 있습니다. 영성체는 내가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분을 지향하도록,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과 이루는 일치를 지향하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한 실존안에 완전히 결합된 ‘한 몸’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제 참으로 하나가 됩니다. 강생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두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어떻게 아가페가 성찬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에서 하느님 자신의 아가페가 몸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이고 성사적인 토대를 명심할 때에만 우리는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부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넘어가신 것, 또 이 핵심 계명을 신앙생활 전체의 바탕으로 삼으신 것은 단순히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또 성사 예식을 통한 신앙의 표현과 나란히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예배의 관습(ethos)은 서로 얽혀 있는 단일한 실재입니다. 그 실재는 우리가 하느님의 아가페와 만남으로써 구체화합니다. 이때 예배와 윤리의 흔한 대립은 그대로 무너지고 맙니다. 성찬의 친교인 ‘예배’ 자체 안에는 사랑받는다는 사실과 그에 이어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반대로, 아래에서 더 상세히 고찰 하겠지만, 사랑의 ‘계명’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먼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15. 이 원칙은 예수님의 위대한 비유들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부자(루카 16,19-31 참조)는 저승에서, 궁핍하고 가난한 이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기 형제들이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도움의 호소를 우리가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도록 도와주는 경종으로 삼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웃’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자기 동포와 이스라엘 땅에 정착한 외국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단일 국가나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긴밀한 공동체를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제한이 이제 없어진 것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나의 이웃인 것입니다. ‘이웃’의 개념은 이제 보편화되었지만, 구체적입니다. 이웃의 개념이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되었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며 커다란 의무를 지지 않는 사랑의 표현으로 격하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하도록 내게 요구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관계를 언제나 새롭게 해석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위대한 비유(마태 25,31-46 참조)를 특별히 언급하여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사랑은 한 인간의 삶이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안에서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16. 사랑의 본질과 성경의 신앙에서 사랑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고찰하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태도에 관하여 두 가지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고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명령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하여, 이 질문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그 누구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랑은 명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있거나 말거나 하는 하나의 감정이지, 의지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첫 번째 이의에 힘을 실어 주는 듯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그러나 이 구절의 전체 문맥은 그러한 사랑이 명백히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 주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너무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이웃에게 폐쇄적이거나 이웃을 미워한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 됩니다. 요한 성인의 말씀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을 만가게 해 주는 길이며,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17. 실제로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보이지 않는 분은 아니십니다.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앞에서 인용한 요한의 첫째 서간(4,10 참조)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1요한 4,9)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4,9 참조). 사실 하느님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에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의 마음을 얻고자 하십니다. 최후 만찬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위에서 심장에 찔리시기까지, 부활하신 뒤 나타나시기까지, 사도들의 활동을 통하여 태어나는 교회의 길을 인도하신 그 위대한 행위들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후의 교회 역사에서도 계속 현존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반영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사들을 통하여, 특히 성체성사를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교회의 전례에서, 교회의 기도에서, 살아 있는 신자 공동체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그 현존을 깨닫는 법을 배웁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계속하여 먼저 사랑하십니다.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감정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알고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사랑 또한 우리 안에서 응답으로 꽃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차츰 발전시켜 나갈 때,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감정은 오고갑니다. 감정은 만나자 마자 일어나는 놀라운 불꽃일 수 있지만, 그것이 완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는 에로스를 완전히 그 자체가 되게 하는, 말 그대로 사랑이 되게 하는 정화와 성숙의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잠재력을 불러일으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온 존재와 관련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들을 만날 때, 사랑받고 있다는 체험에서 솟아나는 기쁨의 감정이 우리 안에서 일깨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은 또한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지성을 모두 요구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은 사랑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며, 우리의 의지가 그분의 의지에 순응함으로써 우리의 지성과 의지, 감정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의 행위 안에서 결합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완성되지도 않습니다. 일생에 걸쳐 사랑은 변화하고, 성숙하며, 사랑 그 자체에 충실합니다. 같은 것을 바라고 같은 것을 싫어하는 것(Idem velle atque idem nolle) 9)이 옛사람들도 인정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면, 의지와 사고의 공유에 이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는 사고와 감정의 일치 안에서 이러한 의지의 일치가 자라나, 우리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가 점점 더 일치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지가 내게는 더 이상 계명을 통해 외부에서 강요되는 낯선 의지가 아니라, 실재로 하느님께서 나 자신보다 더 깊이 내안에 현존하신다는 것10)을 깨달음으로써 내 자신의 의지가 됩니다. 그리하여 점점 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것입니다.(시편 73[72],23-28 참조).

18.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과 내밀한 만남을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러한 만남은 의지의 친교가 되어, 내 감정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는 순전히 내 눈과 감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친구는 곧 나의 친구입니다. 다른 사람의 겉모습을 넘어서 나는 사랑과 관심의 행위를 보여 달라는 그의 내면의 열망을 깨닫습니다. 이를 어떤 정치적 필요로 받아들여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 기관들을 통해서만 그에게 관심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게 될 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외적인 필요보다 휠씬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갈망하는 사랑의 눈길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요한의 첫째 서간이 힘주어 강조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의 필연적인 상호 작용이 드러납니다. 나의 삶에서 하느님과 그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 다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 이상의 것을 전혀 볼 수 없으며, 그에게서 결코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삶에서 오로지 ‘열심해지려고’, 또 ‘종교적 의무’를 다하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면, 나와 하느님 관계 또한 메말라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사랑이 없는 관계입니다. 기꺼이 내 이웃을 만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만 나는 하느님께도 마음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봉사할 때에만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는지,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인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복자의 예를 생각해 봅시다.- 은 성체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 이웃 사랑의 힘을 끊임없이 길어 올렸으며, 거꾸로 그 만남은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더욱 생생해지고 심오해졌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뉠 수 없으며, 하나의 계명을 이룹니다. 그러나 둘 모두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외부의 ‘계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부에서 얻는 사랑의 체험에서 생겨납니다. 이 사랑은 본질상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통하여 자랍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기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치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은 우리의 분열을 뛰어넘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 바로 ‘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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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카리타스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랑 실천

삼위일체 사랑의 표현인 교회의 사랑

1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을 보면 삼위일체를 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11) 앞의 성찰에서, 우리는 창에 찔리신 분(요한 19,37;즈카 12,10 참조)을 바라보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요한 3,16 참조)외아들을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하게 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을 알수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이야기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요한 19,30). 그것은 부활하신 다음에 성령을 보내 주시리라는 예고였습니다(요한 20,22 참조). 이것은 성령의 분출을 통하여 믿는 이들의 마음에서 흘러 나올 ‘생수의 강들’(요한 7,38-39 참조)에 대한 약속을 실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시키며, 몸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요한 13,1-13 참조)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기까지(요한 13,1;15,13 참조)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처럼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는 내적인 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성자를 통하여 인류를 한 가족이 되게 하시려는 성부의 사랑을 세상 앞에서 증언할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이십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활동은 역사상 흔히 영웅적인 방식으로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인간의 복음화를 추구하며, 인간의 다양한 삶과 인간 활동 분야에서 인간의 진보를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교회가 물질적 요구를 포함한 인간의 요구와 고통에 끊임없이 부응하려는 봉사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가 이 회칙의 제2부에서 숙고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봉사입니다.

교회의 본분인 사랑

20.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박은 이웃 사랑은 무엇보다도 신자 개개인의 본분이지만, 또한 온 교회 공동체의 본분입니다. 이는 지역 공동체에서 개별 교회, 보편 교회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차원에서 그러합니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사랑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공동으로 하는 체계적인 봉사가 되려면 조직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본분에 대한 인식은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4-45). 루카는 이러한 말씀으로 교회에 관한 일종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충실성과 ‘친교(koinonia)’, ‘빵을 떼어 나눔’과 ‘기도’(사도 2, 42 참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친교’의 요소는 본래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곧 신자들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가운데에서는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나 더 이상 구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사도 4,32-37도 참조).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철저한 물질적 친교는 사실상 지속될 수 없었지만, 그 근본 핵심은 보존되었습니다. 곧 신자 공동체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품위 있는 삶에 필요한 것을 거절당하는 어떠한 빈곤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21. 교회의 이러한 근본 원칙을 신천으로 옮길 방법들을 찾는 어려운 과정에서, 부제직의 기원이 되는 일곱 봉사자를 뽑은 것(사도 6,5-6 참조)은 결정적인 발전이었습니다. 실제로, 초기 교회에서는 과부들에게 날마다 배급을 주는 일과 관련하여 히브리계 사람들과 그리스계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기도(성찬례와 전례)’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도록 세워진 사도들이 ‘식탁 봉사’까지 하기에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주요 임무만 자기들이 맡기로 하고 교회에 필요한 다른 일들은 일곱 봉사자들에게 위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봉사자들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배급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사도 6,1-6 참조)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해야 했던 사회 봉사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영적인 봉사였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교회의 본질적인 책임, 곧 체계화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참으로 영적인 직무였습니다. 이 일곱 봉사자 집단을 세움으로써 공동으로 질서 있게 수행하는 이웃 사랑의 봉사인 ‘부제직(diaconia)’이 교회의 기본 구조 안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22. 세월이 흐르고 교회가 더 널리 퍼져 나가면서 사랑의 실천은 성사 집전과 말씀 선포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인 영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과부와 고아, 죄수, 병자들과 온갖 궁핍 속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성사 집전과 복음 선포만큼 교회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성사와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듯이 사랑의 실천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유스티노 순교자(†165년경)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일 거행에 관하여 말하면서, 성찬례와 관련지어 사랑의 활동을 언급합니다. 곧,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힘닿는 대로 각자 바라는 대로 봉헌을 하면, 주교는 이 봉헌을 고아와 과부, 병자, 그리고 죄수와 이방인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씁니다. 12) 위대한 그리스도교 저술가인 테르툴리아누스(†220년 이후)는 온갖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이교인들을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이야기합니다. 13) 또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117년경)은 로마 교회를 “사랑(agape)의 수좌”14)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인이 이러한 정의로 어떤 의미에서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자선 활동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23. 여기에서 교회 안의 사랑의 봉사와 관련된 초기의 법적 구조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4세기 중반 무렵 이집트의 각 수도원에는 모든 구호 활동, 이를 테면 사랑의 봉사를 전담하는 기구인 ‘디아코니아’가 발전하였습니다. 6세기에 이르러 이 기구는 완전한 법적 지위를 갖춘 단체로 발전되어, 국가 당국도 국민들에게 배급하는 곡물의 일부를 이곳에 맡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각 수도원뿐만 아니라 개별 교구도 자체의 ‘디아코니아’를 갖추게 되었고, 이 기구는 동방과 서방으로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604년)는 나폴리의 ‘디아코니아’를 언급하고 있으며, 로마에서는 7~8세기부터 ‘디아코니아’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은 로마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당연히 교회의 본질적인 부분이었으며, 그 토대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칙입니다. 라우렌시오 부제(†258년)의 경우가 이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라우렌시오의 비극적인 순교 이야기는 암브로시오 성인(†397년)에게 전해졌는데, 그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성인의 참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의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책임자로서 라우렌시오는 교황과 라우렌시오의 동료 부제들이 체포된 다음, 교회의 재산을 모아 국가 당국에 넘기도록 얼마간의 시간을 허락받습니다. 그는 나누어 줄 수 있는 재산은 무엇이든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의 진정한 보화로 제시하였습니다. 15)이 이야기의 역사적 신빙성이 어떠하든, 라우렌시오는 교회의 사랑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로 언제나 교회의 기억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24. 초세기 교회가 조직적인 사랑의 실천을 얼마나 중시하였는지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3년)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율리아누스는 여섯 살 때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 황궁의 근위병들에게 암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지만, 이 잔학 행위를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확실히 믿지 못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황제가 되자마자 율리아누스는 고대 로마 종교인 이교를 복구시키기로 하고, 이를 개혁하여 제국의 추진력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계획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증진하도록 관구장과 사제의 교계를 세웠습니다. 그는 한 서간에서, 16) 그리스도교에서 감명을 받은 유일한 측면은 교회의 사랑 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교에도 교회의 사랑 실천을 위한 체계와 나란히 그에 비길 만한 그 나름의 활동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에 따르면, ‘갈릴래아 사람들’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본받고 나아가 능가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처럼 황제는 사랑 실천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의 결정적인 특징이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25. 그러므로 우리의 성찰에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가) 교회의 가장 깊은 본질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kerygmamartyria), 성사 거행(leitourgia), 그리고 사랑의 섬김(diakonia)이라는 교회의 삼중 임무로 드러납니다. 이 임무들은 서로를 전제로 하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교회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도 되는 일종의 복지 활동이 아니라 교회 본질의 한 부분이며, 교회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데에 필수적인 표현입니다. 17)

나) 교회는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이 가족 안에서는 필수품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카리타스-아가페는 교회의 울타리 밖으로 확대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연히’ 마주치는(루카 10,31 참조) 가난한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기준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보편적 사랑의 계명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교회의 가족 안에서 어떤 구성원도 가난으로 고통받지 않게 하여야 할 구체적인 의무도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가르침은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좋은 일을 합시다”(6,10).

정의와 사랑

26. 19세기 이래 교회의 사랑 활동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일어났고, 곧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활동이 아니라 정의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수한 주장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사랑의 활동- 자선(eleemosynae)-이 실제로 부자들이 정의를 위하여 일할 의무를 회피하고 양심의 짐을 더는 수단이 되어, 그들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개별적인 자선 활동을 통하여 현상(status quo)유지에 기여하는 대신,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이룩하여 모든 사람이 세상 재화 가운데 자신의 몫을 받고 더 이상 자선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도 어떤 진리가 없지는 않지만, 오류 또한 많습니다. 정의의 추구가 국가의 근본 규범이 되어야 하며, 정의로운 사회 질서는 보조성의 원칙에 따라 공동체의 재화에서 각 개인의 몫을 보장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사실 입니다. 이는 국가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교회의 사회 교리가 언제나 강조해 온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집단의 정의로운 질서 문제는 19세기 들어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새로운 차원을 띠게 되었습니다. 근대 산업의 발전은 낡은 사회 구조를 붕괴시켰으며, 임금 노동자 계층의 성장은 사회 조직을 급격히 변화시켰습니다.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권력의 새로운 원천이 된 자본과 생산 수단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노동 계층의 권리를 억압하고 노동자들의 반발을 낳게 되었습니다.

27. 교회의 지도자들이 정의로운 사회 구조의 문제에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매우 더디게 깨달았던 사실을 인정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인츠의 케텔러 주교(†1877년)와 같은 몇몇 선구자들이 있었으며, 점점 더 많은 집단과 단체, 연맹과 연합, 그리고 특히 빈곤과 질병의 퇴치, 더 나은 교육을 위하여 19세기에 설립된 새로운 수도회들이 구체적인 요구들을 충족시켰습니다. 교황 교도권의 개입으로 1891년에 발표된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movarum)를 들 수 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 1931년에는 비오 11세가 회칙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을 , 1961년에는 교황 요한 23세 복자가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her et Magistra)을 발표하였으며, 바오로 6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ssio, 1967년)과 교황 교서 ‘팔십주년’(Octogesima adveniens, 1971년)에서 당시에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심각했던 사회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저의 위대한 선임자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우리에게 사회 회칙 삼부작을 남겨 주셨습니다.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1982년)과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oi socialis, 1987년), 마지막으로 ‘백주년’(Centesimus annus, 1991년)입니다. 새로운 상황과 문제들에 직면하여 가톨릭 사회 교리는 점진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교황청 정의 평화평의회에서 2004년 펴낸 ‘간추린 사회 교리’(Comperdium sociale Ecclesiae doctrinae)안에 포괄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 혁명과 그 준비를 사회 문제의 만병통치약으로 보았습니다. 혁명과 그에 따른 생산 수단의 집단화는 즉시 더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사라졌습니다. 특히 경제의 세계화를 비롯한 오늘날의 복합적인 상황에서, 교회의 사회 교리는 교회의 영역 밖에서도 유효한 접근법을 제시하는 일련의 기본 지침이 되었습니다. 계속하여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인류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모든 이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맥락에서 이 지침들을 제시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8. 정의를 위한 투신과 사랑의 봉사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정의 내리려면 두 가지 근본적인 상황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가) 국가와 사회의 정의로운 질서는 정치의 핵심 임무입니다. 아우구스티노가 말하였듯이, 정의에 따라 다스리지 않는 국가는 도적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의에서 멀어진 국가란 거대한 강도떼가 아니고 무엇인가(Remota itaque iustitia quid sunt regna nisi magna latrocinia)?” 18)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합니다(마태 22,21 참조). 다시 말해, 교회와 국가의 구분 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대로, 현세 사물의 자율성19) 입니다. 국가는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되지만, 종교 자유를 보장하고 여러 종교인들의 화합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그 나름대로 그리스도 신앙의 사회적 표현으로서 고유한 독립성을 지니며, 국가가 인정하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 신앙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이 두 영역은 서로 구분되지만 언제나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의는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입니다. 정치는 공공 생활의 규칙을 제정하는 단순한 장치 이상의 것입니다. 정치의 기원과 목적은 정의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정의는 본질상 윤리와 관련됩니다. 국가는 ‘어떻게 하면 지금 여기에서 정의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 필연적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휠씬 더 근본적인 물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 문제는 실천 이성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성이 올바르게 작용하려면 끊임없는 정화를 거쳐야 합니다. 이성은 특수한 이해관계와 권력의 현혹으로 야기되는 어떤 윤리적 맹목의 위험에서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치와 신앙이 만납니다. 신앙은 그 고유한 본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 곧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는 만남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또한 이성 자체를 정화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견지에서, 신앙은 이성을 그 맹점에서 해방시켜 그 자체로 더욱 완전해지도록 도와줍니다. 신앙은 이성이 더욱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그 고유한 목적을 더욱 명확히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가톨릭 사회 교리는 바로 이러한 자리에 있습니다. 이는 국가에 대한 권력을 교회에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고유한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강요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목적은 단지 이성의 정화를 도와 정의로운 것을 지금 여기에서 인정하고 실현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이성과 자연법을 토대로, 곧 모든 인간 존재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을 토대로 삼아 논의합니다. 교회는 사회 교리에 정치적으로 힘을 부여하자는 것이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교회는 정치 생활에서 양심을 형성하도록 돕고, 정의의 참된 요구에 대한 통찰력을 더욱 키우며, 그 요구가 개인의 이익과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도 정의에 따라 기꺼이 행동하도록 촉구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는 정의로운 사회 질서와 국가 질서의 건설은 모든 세대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가장 중대한 임무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임무로서 교회의 직접적인 책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인간의 가장 중대한 임무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성의 정화와 윤리 교육을 통하여 정의의 요구를 이해하고 정치 영역에서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자기 나름대로 이바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정치 투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이성적인 토론의 길로 그러한 투쟁에 들어서야 하며, 그 정신적인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한 힘이 없으면,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는 정의는 구현될 수도 없고 진보할 수도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교회가 아닌 정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동선의 요구에 마음을 열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도록, 교회는 정의 증진을 위한 활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 사랑ㅡ카리타스ㅡ은 언제나 필요하며, 가장 정의로운 사회에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의 봉사가 필요 없을 만큼 정의로운 국가 질서는 없습니다. 사랑을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도 그렇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위로와 도움을 찾는 고통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외로움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형태를 통한 도움, 곧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상황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20) 모든 것을 제공해 주겠다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국가는 결국 고통받는 사람, 곧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심을 제공해 줄 수 없는 관료체제가 되고 말 것 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국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조성의 원칙에 따라 다양한 사회 세력의 활동을 관대하게 인정하고 지원하는 국가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활동으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활기찬 세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성령께서 불러 일으키시는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이 사랑은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흔히 물질적 지원보다 훨씬 더 필요한 도움으로 영혼을 돌보고 그 힘을 북돋아 줍니다. 결국, 정의로운 사회 구조가 사랑의 활동을 필요 없게 만들 것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물질주의적인 인간과, 곧 사람이 ‘빵만으로’(마태 4,4; 신명8,3 참조)살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고유한 모든 속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29. 우리는 이제 교회 생활에서, 한편으로는 올바른 국가와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할 임무와,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화된 사랑 실천의 관계를 더욱 저절하게 규명할 수 있습니다. 정의로운 체제의 구축은 교회의 직접적인 의무가 아니라 이성을 자율적으로 활용하는 정치계의 의무임이 드러났습니다. 교회는 이 일에서 간접적인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이성의 정화에 이바지하고 도덕적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이러한 힘이 없으면, 정의로운 체제가 이루어 질 수도 없고 오래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위하여 일할 직접적인 의무는 평신도들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국민으로서 평신도들은 개인 자격으로 공공 생활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경제, 사회, 입법, 행정, 문화 등 수없이 많은 여러 분야에서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하는”21) 참여 의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의 사명은 사회생활의 정당한 자율성을 존중하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신의 책임을 다하면서 다른 국민들과 협력하는 가운데 올바른 사회생활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22) 교회의 고유한 사랑 실천을 국가 활동과 혼동하여서는 안되지만, 평신도들의 삶 전체와 “사회적 사랑” 23)을 실천하는 그들의 정치 활동이 언제나 사랑에 젖어 들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입니다.

또한, 교회의 사회 복지 기구들도 교회의 고유한 활동(opus proprium)을 합니다. 교회는 곁에서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 주체로서 교회의 본질에 부합하는 활동을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조직화된 활동인 사랑의 실천에서 결코 면제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 각자의 사랑 실천이 불필요한 상황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정의만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며, 또 언제나 사랑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사회 환경에서 사랑의 봉사의 다양한 구조

30. 인간에게 봉사하는 교회의 활동들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전에, 저는 여기에서 오늘날 세계에서 정의와 사랑을 위한 노력이 전반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가) 오늘날 대중 매체는 우리 지구를 더욱 축소시키고 여러 민족과 문화들 사이의 거리를 급속하게 좁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함께함’은 때때로 오해와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의 요구를 거의 즉각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상황과 어려움도 함께 나누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진보에도, 물질적 정신적인 온갖 빈곤 때문에 세상에는 아직도 많은 고통이 있음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가난한 우리 이웃들을 돕자는 새로운 각오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더욱 편리해지고 인간들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극복되어 전세계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된 현대에, 자선 사업과 활동은 …모든 사람과 온갖 빈곤에 다 미칠 수 있고 또 미쳐야 합니다.” 24)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화 과정의 긍정적이면서도 도전적인 한 가지 측면을 보는데, 우리는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인도주의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수단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음식과 의복을 분배하고 주택을 제공하며 보호를 해 주는 현대적이 체제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은 국가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점차 전 세계로 그 영역을 넓혀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바로 보았습니다. “이 시대의 징표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날로 커 가는, 막을 길 없는 모든 민족의 연대 의식입니다.”25) 국가 기관들과 인도주의 단체들 모두 연대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 기관들은 주로 세금 감면이나 보조금을 통하여, 인도주의 단체들은 막대한 자원을 활용하여 연대를 증진합니다. 그러므로 국가 사회가 보여주는 연대는 개인이 보여 주는 연대를 훨씬 능가합니다.

나) 이러한 상황은 국가와 교회 기관들 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협력을 낳고 발전시켜 왔으며, 또 열매를 맺어 왔습니다. 교회 기관들은 그들의 투명한 운영과 충실한 사랑의 증언으로 국가 기관들에게 그리스도교 정신을 보여 줄 수 있으며, 상호 조정을 모색하여 사랑의 섬김의 효과를 상승시킵니다. 26) 사랑과 박애의 목적으로 수많은 단체들이 설립되어 왔으며, 이들은 시대의 사회와 정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인도주의적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우리 시대에는 또한 다양한 봉사를 제공하는 책임을 맡은 여러 유형의 자원 봉사 활동이 성장하고 확산되고 있습니다. 27) 저는 여기에서 어느 모로든 자원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감사와 치하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광범위한 참여는 연대를 가르치고 물질적 도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내어 주도록 가르치는 인생의 학교가 됩니다. 예컨대 약물 사용 등에서 드러나는 죽음의 반(反)문화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잃겠다’(루카 17,33과 다른 구절들 참조)는 각오로 그 자체가 생명의 문화임을 보여 주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맞설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 안에도 새로운 형태의 자선 활동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다른 오래된 활동들도 새로운 생명과 활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들을 통하여 복음화와 자선 활동이 서로 유익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저의 위대한 선임자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28) 에서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재확인 하고자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톨릭 교회가 다른 교회와 공동체들의 사회 복지 기구들과 기꺼이 협력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근본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목적, 곧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고 그러한 존엄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참된 인도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는, 더 나은 세상을 이룩하고자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비천하며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권리와 요구를 존중”29) 하려는 노력으로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호소가 전 세계의 수많은 활동들을 통하여 폭넓은 공감을 얻게 되어 기쁘게 여깁니다.

교회의 사랑 실천의 고유한 형태

31. 인간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이 증가하는 것은 결국 창조주께서 인간의 본성 자체에 이웃 사랑의 계명을 새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세상에 그리스도교가 현존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흔히 시대의 흐름 속에서 몹시 흐려진 이러한 명령을 끊임없이 되살리고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시도한 이교의 재건은 이러한 효과를 보여 주는 최초의 사례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경계를 넘어 퍼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랑 실천이 그 모든 광채를 간직하며, 단순히 일반적인 사회 복지를 위한 기관 가운데 하나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교적이며 교회적인 사랑의 본질을 이루는 근본 요소들은 무엇이겠습니까?

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은 무엇보다도 긴급한 요구와 특수한 상황에 무조건 응답하는 것입니다. 굶주린 이를 먹이고, 헐벗은 이를 입히며, 병자들을 돌보고 치유하며, 감옥에 갇힌 이들을 방문하는 것입니다.(교구, 국가, 국제 차원의) 카리타스 기구를 비롯한 교회의 사회 복지 기구들은 이러한 활동에 필요한 자원과 무엇보다도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을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합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섬기려면 우선 전문적인 역량을 갖추여야 합니다. 협력자들은 올바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양성되어야 하며, 지속적으로 돌보는 임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역량이 일차적인 근본 요건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대하고 있으며, 인간에게는 언제나 적절한 전문적인 도움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인간애가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사회 복지 기구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시적인 요구만 충족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여, 그들이 풍부한 인간애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사실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가들에게는 전문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마음의 양성(cordis fomatio)’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만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이웃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이른바 외부에서 강요되는 계명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곧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참조)의 귀결이 될 것입니다.

나)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은 당파와 이념에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실천은 세상을 이념적으로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며 세상의 전략에 일조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한 사랑을 지금 여기에 현존하게 하는 한 방법입니다. 현대에는, 특히 19세기 이래로 다양한 진보 철학 사조들이 있어 왔으며, 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형태가 마르크스주의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전략 가운데 하나가 궁핍화 이론입니다. 곧, 불의한 권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선 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불의한 제도를 적어도 어느 정도 견딜 만한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그러한 제도에 기여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혁명 가능성을 더디게 하여,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선 활동은 현상 유지를 위한 수단이라는 공격을 받고 거부됩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비인간적인 철학입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미래, 그 효과적인 실현이 지극히 의심스러운 미래의 ‘몰록(Moloch)’에게 희생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인간답게 행동하기를 거부해서는 더욱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당파적인 전략과 원칙에서 벗어나, 기회가 닿는 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온전히 헌신하여 지금 직접 선행을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더나은 세상을 위하여 무언가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원칙이며 예수님의 원칙인 그리스도인의 원칙은 ‘보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사랑의 활동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보고 거기에 따라 알맞은 행동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공동체 행위로서 사랑을 실천할 때에는, 개인의 자발성에 더하여 계획과 전망, 다른 비슷한 기관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다) 사랑은 오늘날 개종 권유라고 하는 어떤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30) 그러나 이것은 이를테면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접어 두고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전인격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고통의 가장 깊은 원인은 바로 하느님의 부재입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결코 교회의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언임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여야 할 때와 침묵하며 사랑만을 보여 주어야 할 때를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1요한 4,8참조)것을 알고, 우리가 오로지 사랑을 실천하는 바로 그때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앞에서 제기한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그리스도인은 사랑에 대한 멸시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멸시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하느님 없이 행동하려는 시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을 가장 잘 방어하는 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교회의 사회 복지기구들의 책임은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의식을 강화시켜, 그들의 활동을 통하여ㅡ 또한 그들의 말과 침묵과 모범으로ㅡ 그들이 그리스도의 믿을 만한 증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 실천을 위한 책임자들

32.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 자선 활동의 책임자들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앞의 성찰에서 이미 분명해졌듯이, 사랑의 봉사를 수행하는 다양한 교회 단체들의 참된 주체는 본당에서부터 개별 교회, 보편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의 교회 자신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의 존경하는 선임자 바오로 6세께서는 가톨릭 교회가 추진하는 사회 복지 활동과 기구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조정하는 교황청 책임 기구로 사회복지평의회를 세우셨습니다. 주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 구조에 따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개별 교회 안에서 사도행전에 제시된 계획들(2,42-44 참조)을 수행하는 첫째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가족인 교회는 도움을 주고받는 곳인 동시에, 교회 밖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주교 서품 예식에서, 축성에 앞서 후보자는 주교 직무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드러내고 앞으로 주교직의 의무를 상기시켜 주는 몇 가지 물음에 대답하여야 합니다. 주교 후보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와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친절하고 자비로이 돌보겠다고 분명히 약속합니다. 31) ‘교회 법전’은 주교 직무에 관한 조항들에서 사랑의 실천을 주교 활동의 구체적인 한 분야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사도직 활동들을 그 고유한 성격을 마땅히 존중하면서 조정할 주교의 책임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2) 그러나 최근에 발표된 주교들의 사목 임무를 위한 지침 ‘사도들의 후계자’(Apostolorum Successores)는 전체 교회와 각 교구의 주교에게 주어지는 책임인 사랑의 의무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으며, 33) 사랑의 실천은 교회의 행위이며, 말씀과 성사에 봉사하는 직무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교회 사명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34)

33. 교회 안에서 사랑의 일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책임자들과 관련하여, 그들은 세상을 개선하려는 이념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며,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참조)을 따라야 한다는 그 핵심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랑에 마음을 사로잡혀 이웃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5,14)라고 한 말씀이 그들의 활동에 영감을 주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음을 깨달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서 살며, 또 그분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가 점점 더 그리스도에게서 흘러 나오는 사랑의 도구가 되고 표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가톨릭 사회 복지 기구에서 일하는 협력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도록 교회와 함께, 따라서 주교와 함께 일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사랑 실천에 동참하여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기꺼이 선행을 하고자 합니다.

34. 협력자들은 교회의 보편적 차원에 내적으로 열려 있어, 다양한 형태의 요구를 돌보는 다른 단체들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섬김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며 봉사하여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사랑의 찬가(1코린 13장 참조)에서 사랑은 언제나 단순한 활동 이상의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럽게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3절). 이 찬가가 모든 교회 봉사의 대헌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 찬가는 이 회칙에서 제가 말씀드린 사랑에 관한 모든 성찰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나 커 가는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 보여 주지 않는다면 실천적 활동만으로는 언제나 부족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고통에 몸소 깊이 동참하는 것은 나 자신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나의 선물이 그들에게 굴욕이 되지 않게 하려면, 내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도 주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선물 안에 나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35. 이러한 올바른 봉사는 도와주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 이웃이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봉사를 받는 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곧 십자가를 선택하셨으며, 이러한 철저한 겸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언제나 우리를 도우러 오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남을 돕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도움을 받는다고 깨달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공덕도 성과도 아닙니다. 이 임무는 은총입니다. 남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면 할 수록,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루카 17,10)라고 말하라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는 더욱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잘났거나 휠씬 뛰어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봉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과도한 요구와 우리 자신의 한계 때문에 낙담할 수 있는 시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때에, 우리가 결국 주님 손에 들린 도구들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더 나은 세상을 이룩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지나친 자만을 버리게 해 줍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며, 그 나머지는 주님께 겸손하게 맡겨 드릴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만큼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힘을 다해 봉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힘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착한 종을 재촉하는 과업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36. 다른 사람들의 방대한 요구들 생각할 때, 한편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세상 다스림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지금 하겠다고 하는 이념, 곧 모든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이념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결국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여겨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실제로는 파괴적인,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에 빠지지 않고, 또 이웃에 봉사하는 사랑을 가로막는 체념에 굴복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계속 가려면, 그리스도와 맺는 살아 있는 관계가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언제나 새로운 힘을 이끌어 내는 수단인 기도가 실질적으로 또 절실히 필요합니다. 상황이 절박하여 행동만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기도하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심은 이웃의 가난과 비참을 퇴치하려는 노력을 약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캘커타의 데레사 복자의 모범은, 하느님께 기도하며 바치는 시간은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효과적인 봉사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봉사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1996년 사순 시기에 데레사 복자는 평신도 동료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느님과 이러한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어떻게 맺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37. 사랑의 활동에 참여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증대하는 세속주의와 행동주의에 직면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여야 할 때입니다. 분명히,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다거나 하느님께서 예견하신 일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만나고자 하며,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에 성령의 위로와 함께 하느님의 현존을 간청합니다.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뜻에 의탁한다면 인간의 품위를 잃거나 광신과 테러의 교시에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종교적인 정신은, 하느님께서 가난을 없애지 않으시고 당신 피조물에게 연민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비난하면서 인간이 감히 하느님을 판단하려 들지 않게 해줍니다. 사람들이 인간을 옹호하고자 하느님께 대든다면, 인간의 활동이 무력한 것으로 들어날 때 누구에게 의존할 수 있습니까?

38. 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명백히 부당한 세상의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불평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 중에 울부짖었습니다. “아, 그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기만 하면 그분의 거처까지 찾아가련마는,…..그분께서 나에게 어떤 답변을 하시는지 알아듣고 그분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련마는, 그분께서는 그 큰 힘으로 나와 대결하시려나? ....그러니 그분 앞에서 내가 소스라치고 생각만 해도 그분을 무서워 할 수 밖에, 하느님께서는 내 마음을 여리게 만드시고 전능하신 분께서는 나를 소스라치게 하신 다네”(23,5.5-6.15-16).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 27,46)하고 울부짖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기도의 대화를 통하여 이러한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합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10)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의 고통에 신앙의 대답을 줍니다. “그대가 이해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아니십니다(Si comprehendis, non est Deus).” 35) 우리의 외침은 하느님께 도전하거나, 하느님 안에서 잘못이나 약점이나 무관심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는 하느님께서 힘이 없으시거나 ‘잠이 들어’(1열왕 18,27 참조)계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우리의 울부짖음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가장 깊고 철저하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혼란스럽거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티토 3,4)를 믿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복잡하고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흔들림 없이 믿습니다.

39.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희망은 실패에 직면해서도 선한 일을 계속하는 인내의 덕과,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고 어둠의 때에도 하느님을 믿는 겸손의 덕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내어 주셨음을 알려 주며,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참된 진리에 대한 승리에 찬 확신을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내하지 못하고 의심 많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당신 손안에 두고 계시다는 희망, 묵시록 말미의 비극적인 표상이 가리키듯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마침내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승리하신다는 확실한 희망을 갖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심장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는 믿음이 사랑을 낳습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어둠에 싸인 세상을 언제나 밝혀 주고 우리에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빛, 유일한 빛입니다. 사랑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체험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의 빛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게 하십시오. 이것이 제가 이 회칙을 통하여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권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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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40. 마지막으로, 모범적으로 사랑을 실천한 성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특별히, 군인이었다가 수도자가 되고 투르의 주교가 된 마르티노 성인(†367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개인적 증언의 가치를 보여 주는 표상과도 같습니다. 아미앵 성문 앞에서 마르티노는 자기 외투의 절반을 잘라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 외투를 입은 모습으로 마르티노의 꿈에 나타나시어 복음 말씀의 영원한 유효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너희가 내 형제들이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6.40). 36) 교회 역사에서 사랑을 증언한 다른 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안토니오 아빠스 성인(†356년)으로 시작된 모든 수도원 운동은 언제나 이웃에 대한 큰 사랑의 봉사를 천명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대면’하면서, 이 수도자는 자신의 온 생애를 하느님은 물론 이웃에게 바쳐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낍니다. 이는 사람들을 맞아들이고 보호하며 돌보아 주는 이처럼 위대한 구조가 어떻게 수도원에서 탄생했는지 설명해 줍니다. 또한 인류의 발전과 그리스도교 교육을 위한 수많은 활동들을 펼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서, 처음에는 수도회와 탁발 수도회들이, 그리고 나중에는 교회의 역사에 걸쳐 여러 남녀 수도회들이 헌신하여 왔습니다. 몇 분의 이름만 들어 보더라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천주의 성 요한, 가밀로 데 렐리스, 비첸시오 드 폴, 루도비카 드 마릴락, 주세페 B.코톨렝고, 요한 보스코, 루이지 오리오네, 캘커타의 데레사와 같은 성인들이 선의의 사람을 위하여 사회적 사랑의 영원한 모범으로 우뚝서 있습니다. 이 성인들은 역사 안에서 참된 빛을 비추는 분들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41. 성인들 가운데에도 가장 탁월한 모범은 주님의 어머니이시며 모든 성덕의 거울이신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사촌 엘리사벳과 “석 달 가랑”(1,56)함께 지내시면서 출산이 가까워진 사촌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시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Magnificat anima mea Dominum).” (루카 1, 46)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성모님께서는 일생의 모든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곧,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고 기도와 사랑을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세상이 좋아집니다. 성모님의 위대함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들어 높이시고자 한 사실에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겸손되이 그저 주님의 종이 되기를 바라실 뿐입니다(루카 1,38.48 참조).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오로지 하느님의 계획에 온전히 당신을 맡김으로써 세상 구원에 이바지하리라는 것을 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희망의 여인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셨기 때문에, 천사의 방문을 받고 이러한 약속에 결정적인 봉사를 하시도록 부름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음의 여인이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믿으셨으니, 복되시나이다.”(루카 1,45 참조)하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성모님 영혼의 초상인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는 온전히 성경의 실, 하느님 말씀에서 자아낸 실로 짜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모님께서 하느님 말씀에 얼마나 익숙해 계신지, 그 말씀들을 얼마나 속속들이 알고 계신지가 드러납니다. 하느님 말씀이 그분의 말씀이 되며,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 말씀에서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생각이 얼마나 하느님 생각을 따르고, 성모님의 의지가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일치되는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말슴에 온전히 젖어 계셨기 때문에 강생하신 말씀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여인이십니다. 어찌 그러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는 신앙인이시니, 성모님께서 사랑하는 여인이 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보이는 그분의 고요한 몸짓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시고 예수님께 알려 드리는 그분의 섬세함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드님께서 새로운 가정을 세워야 하신다는 것을 아시고, 어머니의 때는 예수님의 참된 때(요한 2,4;13,1 참조)인 십자가와 더불어 올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뒤로 물러나 계신 겸손함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달아날 때,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요한 19,25-27 참조). 나중에 오순절 때에는 이 제자들이 성모님 주변에 함께 모여 성령을 기다립니다(사도 1,14 참조).

42. 성인들의 삶은 지상에서의 일생이 아니라 죽은 다음 하느님안에 살며 활동하는 것까지 다 관련됩니다. 성인들에게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은 인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으로 인간에게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성모님에게서 이를 가장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당신 제자에게, 곧 요한과 그를 통하여 모든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라고 하신 말씀은 모든 세대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집니다.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모든 믿는 이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은 그들의 온갖 요구와 바람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함께 모일 때에나 성모님의 어머니다운 자애와 동정녀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성모님의 자애로운 은총을 체험하고 언제나 그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무한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모든 대륙과 문화에서 성모님께 바치는 감사의 증언들은 자기를 찾지 않고 오로지 자비를 베푸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또한 신자들의 신심은 그러한 사랑을 어떻게 가능한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직관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하느님과 이루는 가장 내밀한 일치를 통하여 영혼이 완전히 하느님으로 충만해질 때에 가능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의 샘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마신 이들이 다시 “생수의 강들이 흘러 나오는”(요한 7,38) 샘이 되게 합니다.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끊임없이 새로운 힘을 얻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성모님께 교회를, 교회의 사명을 그리고 사랑의 봉사를 맡겨 드립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어머니께서는 세상에 참된 빛을,
당신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주셨나이다.
어머니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시어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선의 샘이 되셨나이다.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소서.
저희를 예수님께 인도해 주소서.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어
저희도 참된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목마른 세상 한가운데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되게 하소서.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1년
2005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주석
1. ‘선과 악을 넘어서’(Jenseits von Gut und Bose), IV, 168 참조.
2. X, 69.
3. 데카르트, ‘전집’(Euvres), V, Cousin 편, vol, 12, 파리, 1824년, 95면 이하 참조.
4. II. 5, ‘그리스도교 원전’ (SCb) 381, 196.
5. 위의 책, 198.
6. ‘형이상학’(Metapbysics), XII, 7 참조.
7. 아레오파고스의 위 디오니시우스는 ‘하느님의 이름들’(De divines nominibus), IV, 12-14. ‘그리스 교부 총서’(PG) 3, 709-713에서 하느님을 ‘에로스’이며 동시에 ‘아가페’라고도 부른다.
8. 플라톤, ‘잔치’(Symposium), XIV-XV, 189c-192d.
9. 살루스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De coniuratione Catilinae), XX, 4.
10.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Confessiones), III, 6, 11,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CCL)27, 32.
11. ‘삼위일체론’(De Trinitate), VIII, 8, 12, CCL 50, 287.
12. ‘첫째 호교서’(I Apologia), 67, PG 6, 429 참조.
13. ‘호교론’(Apologeticum), 39, 7, ‘라틴 교부 총서’(PL) 1, 468 참조.
14.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Epistula ad Romanos), PG 5, 801.
15. 성 암브로시오, ‘성직자들의 의무’(De officiis ministrorum), II, 28, 140, PL 16, 141 참조.
16. ‘서간’(Epistula) 83, J . Bidez, ‘율리아누스 황제, 전집’(L’Empereur julien, Euvres completes), 파리, 1960/2, v. I, 2a, 145면 참조.
17. 교황청 주교성, 주교들의 사목 임무를 위한 지침 ‘사도들의 후계자’(Apostolorum Successores), 2004.2.22., 194항, 바티칸, 2004년, 213면 참조.
18. ‘신국론’(De Civitate Dei), IV, 4, CCL 47, 102.
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36항 참조.
20. ‘사도들의 후계자’, 197항, 바티칸, 2004년, 217면 참조.
21. 요한 바오로 2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Cbristifideles laici), 1988.12.30., 42항, ‘사도좌 관보’(AAS) 81(1989), 472면,.
22. 교황청 신앙교리성,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생활 참여에 관한 교리 공지’, 2002.11.24., 1항,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2003. 1.17., 6면 참조.
23.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bismus Catbolicae Ecclesiae), 1939항.
2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Apostolicam Actuositatem), 8항.
25. 평신도 교령, 13항.
26. ‘사도들의 후계자, 195항, 바티칸, 2004년, 214-216면 참조.
27. ‘평신도 그리스도인’, 41항, AAS 81(1989), 470-472 면 참조.
28. ‘사회적 관심’, 32항, AAS 80(1988), 556면 참조.
29.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mum sint), 43항, AAS 87(1995), 946면.
30. ‘로마 주교 예식서’, 주교 서품 예식, 40항.
31. 교회법 제394조; 동방 교회법 제203조 참조.
32. ‘사도들의 후계자’, 193-198항, 212-219면 참조.
33. 위의 책, 194항, 213-214면 참조.
34. ‘설교집’(Sermo) 52, 16, PL 38, 360.
35. 슬피키우스 세베루스, ‘성 마르티노의 생애’(Vita Sancti Martini), 3, 1-3, SCb 133, 256-2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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