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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영성 교육 중 매우 절박한 문제들에 관한 회람
조회수 | 2,401
작성일 | 07.05.27
교육성성 회람 / 신학교 영성 교육 중 매우 절박한 문제들에 관한 회람 / 1980. 1. 6.


모든 지역 주교들에게


「사제 양성의 기본 지침」(Ratio fundamentalis institutionis sacerdotalis)이라는 문헌이 발표된 데 이어 각 나라의 주교회의에서 각기 자기 나라의 "양성 지침"들을 펴냄으로써 여성 교육은 그 본연의 위치-다시 말해서 영성 교육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그 본연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좀더 진지하고 좀더 깊이 고찰해 보는 것이 시기적으로도 적절할 뿐만 아니라 크나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게 하는 여러 징표들이 오늘날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영성 교육 문제를 좀더 깊이 점검해 보는 것에 대하여 기꺼이 동의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풍부한 결실을 거두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 바이다.

영성 교육에 대하여 체계적이고 완벽하게 연구한 내용을 알려주려고 이 회람을 만든 것은 아니다. 영성 교육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고무적인 징후들을 소개한 다음, 당장 시급하게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몇몇 특정한 분야에 신학교 당국자들이 깊은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촉구하고자 만든 것이다. 따라서 결론 부분에 이르러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의 장래를 위하여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한 가지 제안을 내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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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징표들


본 교육성성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제일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징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소자(예비 신학생)들을 위한 활동 계획"이라고 하는 참으로 각별한 성격을 띤 징표이다.

일전에 주교들에게 "성소자들을 위한 활동 계획안"을 마련해 줄 것을 과감히 요청했었다. 그런데 이 계획안은 우리가 도저히 예상하지도 못했던 빠른 속도로 지금 여기에 도착하고 있다. 더욱이 그 계획안 가운데서도 영성적인 측면들을 다루고 있는 부분을 보면 신앙 생활에서 용기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분위기는 강렬하게 느낄 수가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진작에 영성 분야에 무언가 새로운 시도들을 했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시도들이 결코 헛되이 끝나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각 교구에서 제안한 이러한 계획안들이 단지 그리고 주로 어떤 기발한 방법만을 다루고 있다면 지금 이런 회람을 발표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안들을 보면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하든지간에 기도가 항상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늘 그 모든 것 뒤에서 힘찬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것으로 하느님 은총이 이러한 계획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은 좀더 많은 아낌없는 투신들이 요구되기 때문에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대" 중의 하나를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늘어나는 성소자들


계획과 희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세계 곳곳에서 성소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고 계시며 또한 지금 그 열매를 맺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물론 많은 교구에서, 심지어는 나라 전체가-비록 전체적으로 보면 그 비율이 얼마 안되기는 하지만-아직 이런 추세를 좇아가지 못하고 있어 늘 우리에게 걱정을 안겨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일은 성소자 증가율이 대단히 강한 추세를 보이는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아주 갑작스럽게 치솟듯이 성소자가 증가하는 곳의 주교들을 만나보면 그들이 거의 한결같이 그처럼 성소자들이 불어나게 된 원인이 그 무엇보다도 신학교를 영성적으로 쇄신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신학교에서는 각각 다른 방법으로 영성적인 쇄신을 도모하여 마침내 결실을 맺었겠지만, 우리가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무언가 유익이 되는 것을 거두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속에 어떤 공통점들이 있는가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회 안 어디를 가보아도 심지어는 교회 밖에서까지도 너나없이 진정으로 "기도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한결같이 느끼게 된다. 기도소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사람들은 기도에 대해 배우고 싶어서 기도소에 오기도 하고, 함께 모여 기도하려고 오기도 하며, "기도의 스승"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오기도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기도의 스승을 만나려고 무슨 짓이든지 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길을 잃고 실의에 빠질지도 모를 그런 모험에 뛰어들기도 한다. 어디에선가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줄 것만 같은 기미만 보여도 당장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한번 해보려고 달려드는 추종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의 영성 수준이야 어떻든 간에, 또한 그들이 설사 실패하기도 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실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의 길로 초대하는 초청장을 보냈는데 지금 여러 가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아주 흡족스러운 대답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갈망하고 있는 이러한 현실을, 바꾸어 말하면 신앙을 발전시키라고 하느님께서 교회에게 내려주신 이 흔치 않은 기회를 과연 우리는 지금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 가운데서 전통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참된 "기도의 스승들"을 찾아볼 수만 있다면-다시 말해서 심오하고 뜨겁게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스승들이 가셨던 길을 좇아가면서 영혼들을 이끌어주는 지혜롭고 신중하며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갖춘 사제들, 또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여 응답하는 사제들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기회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흔히 그 기원이 애매모호한 여러 기도 운동들을 판단하는 일과는 아주 다른 성격의 문제이다. 이것은 오히려 당신께서 뽑으신 사제들에게 하느님께서 보내는 초대에 사제들이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들 모두가 "기도의 스승"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가 영성적으로 활기를 되찾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 생활 전반의 흐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지금 막 감동적인 사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긴 터널을 꿰뚫고 나왔구나 하는 느낌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같이 영성적으로 풍부한 의미가 담겨져 있어서 평범한 생각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들은 마치 인간적인 것을 초월한 그 무엇인가의 손길을 눈으로 보고 있기라도 한 듯이 지금 어안이 벙벙해 있다.

놀라울 정도로 장엄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장례식을 보고 어지간히 놀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전세계는 고도로 발달된 이 시대의 통신 매체들을 통하여 교황 바오로 6세의 장례식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뒤이어 있은 교황 선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되어 마침내 만장 일치로 "먼데서 오신" 분이 교황으로 당선되시는 것을 보고, 더욱이 그분이 당신의 그 단순하심과 눈부신 신앙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으시는 것을 보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 속에는 혹시 "특종 뉴스거리"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공의회 이후 파란만장했던 시기를 딛고 그러한 지도자가 출현했다는 것은 사제들도 교황님이 가지신 것과 똑같은 신앙, 곧 기도라고 하는 샘에서 뿜어 나오는 신앙으로 사제들 스스로를 무장하라고 촉구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특별히 마련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젊은 세대들


지금까지 설명한 이 모든 상황에 대하여 젊은 세대들도 그 동안 그들 나름대로 힘써 응답해 왔다는 사실에 이제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젊은이들은 그리스도를 애타게 찾고 있다. 그들은 누군가가 나서서 자기들이 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제들을 두 팔 벌려 기꺼이 환영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바로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남김없이 불사르고 싶어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신학교에서는 마땅히 이와 같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현시점에서 볼 때 교회의 미래는 사제들에게 어떻게 영성 교육을 시키느냐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에서는 결코 그 해답을 얻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삶의 이유를 찾아 헤매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영혼이 영적으로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그 어느 것도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세상은 그저 젊은이들이 삶과 맞부딪치도록 내버려두기만 할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신앙을 통하여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제직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은 일찌감치 이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다른 젊은이들도 어느 정도는 직감적으로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다는 것 그리고 드러나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벌써부터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제직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은 다른 젊은이들도 진리의 충만함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다른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능력을 신학교에서 갖추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생들의 이상(理想)이신 그리스도


젊은 계층의 사람들이야말로 영적인 공허함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공허함은 어떻게 하든지 반드시 메워져야 한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문제를 자포자기식으로-가령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빠진다든가, 마약 복용과 같은 파괴적인 경험을 별 생각없이 마구 하려든다든가, 또는 가정의 간섭이나 윤리적 사회적 제약 등과 같은 모든 제약들을 거부한다든가 하여 결국 아주 극단적인 경우 삶 그 자체까지 포기해 버리는 식으로-해결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대에게 단 하나의 진정한 해답이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심어주게 될 사람들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그 사람 자체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 그리스도야말로 빛이시오 힘이시라는 것, 또한 그리스도야말로 삶의 참된 이유이자 인류가 따라야 할 진정한 모범이시라는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그분께 순종해야 할뿐만 아니라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하신 그 유명한 말씀처럼 그분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어야 할 것이다.

신학교의 기본 임무, 즉 새로운 세대를 위한 미래의 사제들의 기본틀을 만들어 줄 책임을 진 모든 사람들이 맡은 임무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시선을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벌써 그리스도께 자신들의 마음을 아낌없이 모조리 바쳤다. 그것은 사제로서의 기본 자격을 갖추는 데 요구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거기에 필요한 것이라면 그 어떤 희생이든지 기꺼이 따르겠다는 표시인 것이다. 미래의 사제들은 앞으로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이미 벌써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 신학교 생활은 오로지 각자에게 주어진 정도에 따라 이러한 처음의 은총이 완전히 무르익을 수 있도록 짜여져야 한다. 미래의 사제들의 마음은 본능에 의한 것이든 습관에 의한 것이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발전시키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가진 모든 재능은 바로 이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미래의 사제들이 공부를 하고 개인적인 희생을 바치고 극기를 하는 것, 또한 의덕(義德), 용덕(勇德), 절덕(節德), 지덕(智德) 등과 같은 덕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몸에 배도록 힘써야만 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리스도를 알고 구하여 그분을 영원토록 완전히 사랑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아울러 미래의 사제들은 뜨겁고 열렬하게 그리고 꾸준하고 끈기있게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써 성 바오로가 가졌던 그 놀라운 생각처럼(2고린 3,18 참조) 그리스도의 얼굴이 참으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사제들의 얼굴 위에 서서히 새겨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미사 안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끊임없이 당신을 성부께 봉헌하신다. 미래의 사제들이 맡을 직무는 바로 이러한 미사를 집전하는 일이다. 미래의 사제들은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신학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힘으로 성부께 영광을 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나라이어야 하며, 또한 그것이야말로 그들 삶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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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지침


네 가지 지도 방침


미래의 사제들에게 영성 교육을 시키면서 반드시 따라야 할 네 가지의 가장 절박한 방침들을 가르쳐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1. 하느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깊이깊이 사랑할 수 있도록 사제들을 양성해야 한다. 말씀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내적 침묵이 어떤 것인지를 느낄 수 있도록 계발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참된 내적 침묵의 의미를 익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찾아낸다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올바른 교육을 받으며 끈질기게 노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온갖 분심과 장애가 따를지라도 기도의 길을 사랑하고 그 길을 갈망하며 그 길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미래의 사제들은 자신들이 직접 참된 기도를 체험함으로써 장차 자신들을 찾아올 모든 사람들에게, 또는 자기들이 찾아내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릇된 예언자들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의 스승"이 될 수 있어야 한다.

2. 오늘날의 사제들은 장차 자신이 집전하게 될 파스카 신비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최고로 표현되어 있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양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죽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구세주"가 되신 것은 바로 그 신비 안에서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그리스도께 대한 상(像)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딴 사람의 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 바오로는 한마디로 단호하게 이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1고린 1,23; 2,2 참조). 그런데 성찬의 신비 속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현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바로 사제인 것이다. 때문에 신학교는 미래의 사제들에게 성찬의 신비에 대해서는 물론 그들이 짊어진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책임-즉 신자들이 성찬의 신비 안에서 진정으로 친교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책임-에 대해 가르쳐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다름 아닌 신학교 당국이 깨닫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신학교 생활이 판가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우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3. 사제가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욕과 극기를 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특히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참된 의미의 순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사제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양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학교가 그들에게 회개의 의미를 가르쳐주어야 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신학생들에게 고해성사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그것은 신학생들에게 회개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즉 그리스도의 신비에 불성실하게 참여한다거나 그분의 수난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들과,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다운 영혼을 계속 간직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전투에서 적과 맞서 이기고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해주는(성 바오로는 이것을 경기장에서 벌이는 경기에 비유하고 있다<1고린 9,24>.) 여러 가지 덕들을 쌓아나가는 사람들에게는-누구에게나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을 의미한다.

평신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만일 미래의 사제들이 앞으로 자기들 앞에 어떤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또한 극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지 못한다면 그들이 장차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 동안 미래의 사제들이 그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도 깨닫지 못한 채 떠나가도록 그냥 방치해 두었던 신학교가 있었다면 그런 신학교는 자신의 임무를 이만저만 저버린 것이 아닌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신학교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어머니로 내어주신 바로 그분에 대하여 자녀다운 사랑을 키워주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신학교의 영성 교육 끝에 곁들여진 그저 감상적이고 신심적인 차원의 참고 사항 정도로 취급해서는 결코 안된다. 오히려 복되신 동정녀께 기도드리는 것에 맛들이고 그분의 전구에 신뢰하는 것과 같은 습관들을 몸에 완전히 배도록 하는 것을 신학교 영성 교육 프로그램에서 필수 사항으로 편성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각 사항들에 대하여 좀더 철저하게 하나하나 논의해 보기로 하자.

1.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내적 침묵


사제직을 지망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말씀, 곧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에 귀기울이고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나 비그리스도인에게나 반드시 내적 침묵이 요구된다고 우길 필요는 없다. 다만 여기서는 내적 침묵을 얻기 위한 그룹들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과 "기도소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것, 또한 종종 많은 사람들이 내적 침묵에 관한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광적일 정도로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시아의 몇몇 지역에서 얼마간의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여러 기도 양식들 가운데는 내적 침묵에 관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 정도만을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침묵을 얻기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노력들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한다든가 판단을 내리려는 시도 따위는 그만두기로 하자. 여기서는 그저 그 같은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미래의 사제들과 관련된 결론들만을 끌어내기로 한다. 신학교에서는 반드시 미래의 사제들에게 내적 침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미래의 사제들은 내적 침묵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하게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적 침묵의 참된 의미를 전달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춰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제들이 이 침묵에 대하여 정확한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사제들은 침묵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외적인 침묵과 내적인 침묵을 혼동할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적 침묵과 외적 침묵은 얼마간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좀더 중대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내적 침묵에 관해서 다루다 보면 몇 가지 애매모호한 점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동양의 신비주의나 그와 비슷한 활동들과 맞부딪치게 되면 혼란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에서 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그리스도와 한층 더 내적으로 친밀하게 사귈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와 진정한 대화를 좀더 깊이 나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분이 이미 잘 말씀해 주신 바와 같이 참된 내적 침묵은 그리스도를 그 원천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그 목표로 삼는다. 내적 침묵은 바로 살아 있는 믿음과 사랑이 일구어낸 열매이다. 내적 침묵이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몽포르의 성 루이 마리 그리뇽(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fort)의 말처럼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의 감상적인 생각이라든가 기이한 그 무엇"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내적 침묵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서 찾기를 갈망하고 하느님을 향해 완전히 방향 전환한 영혼이 취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태도를 말한다. 때문에 내적 침묵은 우리 몸의 자세를 어떻게 취하느냐 하는 것하고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성령께서 내적으로 현시하시는 것과는 더더욱 무관한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바로 이러한 내적 침묵을 신학생들이 찾아내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생들을 정통 영적 스승들이라고 하는 학교에서 훈령시킴으로써 또한 교회의 공식 기도들을 통하여 교회라고 하는 학교에서 훈련시킴으로써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기도하는 법


내적 침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몇 가지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내적 침묵을 훈련시키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이러한 훈련은 바로 한 사람을 그 사람의 내적인 어떤 성향이라든가 끊임없이 달려드는 세속적인 분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내놓는 갖가지 방법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겉만 보고 주제넘게 속단하는 일도 없어야겠지만 소위 "지름길"이라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런 것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너무 쉽게 약속해 버림으로써 우리를 정상 궤도 밖으로 내동댕이친다. 그리고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이 저절로 굴러 들어올 것만 같은 그릇된 망상에 빠지게 하여 끝없이 잘못된 길로 이끌고 간다. 과연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은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기 위하여 일종의 인간을 흥분시키는 일 같은 것을 하게 된다. 즉 영혼에 해를 끼치는 가혹 행위를 몸에 가한다든가 기도가 잘 되도록 하려고 마음을 현혹시키는 음악을 이용한다든가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신앙을 훈련시키는 일은 험난하고 엄청난 노력이 드는 일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신앙을 제대로 올바로 훈련시키려면 신학생들이 정통의 진정한 스승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며, 끊임없이 인내롭게 기도를 연마할 수 있도록 하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공식 기도에 완벽하고 깊이 있게 참여하도록 이끌어주어야만 한다. 그 밖에도 안내자, 바꿔 말해서 일종의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미래의 사제들이야말로 바로 내일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신앙 생활의 이러한 측면은 진정 신앙 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양성의 다른 측면들과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단련된 신앙을 규칙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적 스승들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일은 이제까지 단 한번도 교회에 "영적 스승들"이 없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만인이 인정하는 그분들의 성덕과 그분들이 펼치셨던 엄청나게 눈부신 활동들을 알게 된다면 우리도 틀림없이 그분들께 이끌리게 되고 그로부터 많은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그분들은 바로 그분들 덕택에 수많은 성인들이 탄생될 수 있었던 바로 그런 "성인들"이신 것이다. 모든 미래의 사제들이 그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는 있겠지만 이들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나 신학교를 떠나기 전에 그런 분들과 만날 기회를 가질 수가 있을까? 과연 몇 사람이나 그런 만남을 가짐으로써 자신들에게 맞는 참된 영적 분위기를 찾아낼 수 있게 되고, 하느님께 맛들이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며, 눈 속임수 같은 것이 아닌 진정한 내적 침묵을 갈구할 줄 알게 되어 마침내 어떤 것이 잘못된 내적 침묵인지를 분별해 낼 수 있게 될까? 모든 신학교에서는 마땅히 여기에 대한 대책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 또한 각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에게 위대한 영적 작가들이 쓴 작품들, 곧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전 작품"들을 읽는 습관을 길러줌으로써 그들이 거기에 맛들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런 고전 작품들을 읽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앞으로도 계속 필수 사항으로 지켜져야 한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기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학생들에게는 반드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신학생들은 기도하는 것이 처음에는 대단히 힘들고 때로는 생각처럼 안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신학교측은 규칙들을 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의 방법을 채택하여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될 경우 신학교에서는 적어도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들을 확실하게 명문화시킨 다음, 신학생들이 개인적인 기도를 양심적으로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지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기도 준비를 절대로 추상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기도할 때는 다른 무엇보다도 복음 읽기에 주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목표들-즉 "그리스도를 구하기", "그분만을 섬기기", "멋진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님을 생각하기",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배우기", "경험을 늘리기보다는 경험한 바를 깊이 있게 다지기" 등-을 세운 다음 그것을 잠시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면 신학생들은 그저 듣기만 하던 단계에서 점차 질문하는 단계로, 아무 말 없이 공경만 하던 단계에서 점차 찬미하는 단계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 신학생들이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의 진전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지도자가 신학생들 마음속에 쉬지 말고 바로 이런 것들을 새겨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도


하지만 교회의 공식 기도에 좀더 깊이 있고 좀더 완전하게 참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없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성찬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도입하는 말씀의 전례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며 (여기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또한 성무일도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편을 기도함으로써 교회의 기도는 더욱 풍요롭게 된다. 교회는 시편들 안에서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영감어린" 말씀들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교회가 인간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걸러내는 "틀"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명을 통하여 말씀들을 제시해 주시고 마음의 꼴을 만들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예수님께서도 시편을 기도하셨다. 그분의 수난 사기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마리아께서도 시편을 기도하셨다. "성모의 노래"(Magnificat)가 그 분명한 증표이다. 성무일도를 혼자서 조용히 하든 공동체가 다같이 하든(뒤의 방법이 더 좋긴 하지만) 단순한 마음으로 내용을 이해해 가면서 마음을 다하여 완벽하게 기도하기만 한다면 성무일도만큼 사람들이 추구하는 내적 침묵, 곧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내적 침묵을 단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기도도 없을 것이다.

외적 침묵


이 모든 것을 실천하면서 외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일은 전혀 도움도 안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것에 신경 안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내적인 침묵을 이루게 되면 자연 외적인 침묵도 하게 된다. 내적인 침묵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적인 침묵이 필요하며 또한 내적인 침묵을 이루게 되면 더욱 외적인 침묵을 지키게 된다. 내적인 침묵 쪽에서 바라보면 외적인 침묵은 내적인 침묵이 겨냥하는 목표들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스승들을 키워내는 준비를 하고 있는 신학교 생활 규칙에는 최우선적으로 여기에 대한 규정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그러한 외적 침묵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라든가 목적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면 외적인 침묵을 지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자연 그것을 제대로 안 지키게 된다. 그러나 내적인 침묵이 깊이 자리잡게 된 곳에서는 외적인 침묵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도 그만큼 더욱더 강력하고 활기차게 나타나게 된다. 외적인 침묵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내적인 침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신학교 전체의 분위기


이제 분명한 사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몇 가지 조건들이 먼저 마련되어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건들이 조성되어 있지 않을 경우 신학교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기도하도록 양성하는 일과 그 밖의 일반 교육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이미 앞에서 말했다. 기도를 하도록 양성하는 일은 결코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생활이라든가, 공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탐구하는 일, 또한 지금도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존재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는 일, 그 모든 일과 연결되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를 훈련시키는 일 역시 나름대로 여러 가지 독특하고 특별한 방법들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도 신학교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주된 임무는 내적 침묵이 이루어진 환경 속에서 학생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치 단결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는 학장에서부터 영성 담당자 및 각 교수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 고유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고리가 깨지게 되면 진정한 양성이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만일 각 신학교 당국자들이 자신들이 바로 이러한 양성을 책임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나 실제로나 깨닫고 있지 못한다면, 또는 양성에 대해서 모두가 힘써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도록 하고 있지 않다면 제아무리 좋은 방법들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전체 분위기가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십자가의 말씀 : 구세주의 희생


희생의 성사


교회의 기도는 성찬의 전례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에 따르면(10) 성찬의 전례는 "정점인 동시에 원천"이다. 실제로 미사는 다름 아닌 주님의 희생으로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그러한 주님의 희생을 다같이 하느님께 봉헌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로 교황 성 비오 10세가 단행한 쇄신은 엄청난 결실을 맺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노력에 새롭게 박차를 가하였다. 미래의 사제들은 이 쇄신 운동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 본연의 방향을 잘 유지해 나갈 줄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의주도한 솜씨와 확고하고 견실한 신학적 감각도 가져야 함은 물론 교회의 규율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하고 개인적으로도 깊이 있고 풍부한 경험을 쌓아야만 한다.

미사는 "구세주의 희생의 성사"이다. 교회는 이 신비에 대해서 그 동안 한번도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가르쳐왔다. 교회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 신비로부터 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신비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인간의 머리로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때때로 감히 인간 이성의 테두리 속에 맞게 하려고 이 신비를 축소시키려 드는 사람이 있게 된다. 또 때로는 그중 한가지 측면을 교묘히 이용하여 나머지 다른 측면들까지 손상시키려는 모험-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앙 구조를 뒤흔들어버리려는 모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학교에서는 여기에 관한 교의를 무엇보다도 가장 정성을 다해서 가르쳐주어야 하고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성찬의 신비 중 어느 한 측면이라도 다른 것들 때문에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매 미사는 십자가상의 제사를 실제로 재현하는 것이라는 트리엔트 공의회 가르침은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성체 안에 정말로 살아 계신다"는 가르침을 신학생들은 온 힘을 다해서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성찬식이 지니고 있는 형제들간의 친교라는 측면을 제 아무리 깊이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근본적인 측면을 퇴색시켜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측면을 떠나서는 성찬의 식탁은 그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오늘날 이 문제를 놓고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탈선 행위들을 결코 우습게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신학교는 미래의 사제들에게 조심스럽게 이러한 실태에 대해서 경고해야 한다. 교의에 바탕을 두지 않는 사목은 결코 유익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성체 공경


성체께 대한 신앙은 수세기를 지내오는 동안 차츰차츰 전례 안에서의 희생이라는 의미를 넘는 어떤 예절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성체 조배가 생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체 조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체 안에 당신을 남김없이 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미사가 끝난 다음에도 성사적으로 현존하시는, 특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노자 성체"로 남아 계시는 것에 대하여 다함없는 감사의 열정으로 그리스도께 바치는 기도인 것이다. 성체를 공경하는 예절이 그 동안 쉬지 않고 발전을 거듭해 왔다는 사실은 교회가 한 체험 중에서도 가장 신묘한 체험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성체를 공겸함으로써 놀라운 성덕이 꽃피어 나게 되고, 성체 공경에 특별히 봉헌된 공동체들이 날로 늘어나는 것을 보면 성체를 공경해야 한다는 생각이 진정 잘못된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막에서 오직 성체만을 모시고 혼자 살았지만 그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세운 "작은 형제회"와 "작은 자매회"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샤를르 드 푸고(Charles de Foucauld) 수사같은 사람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 성체 공경에 대한 가장 뛰어난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성체께 대한 열정이 없는 사제, 성체 공경에 깊이 맛들이지 못한 사제, 또한 성체 공경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능력이 없는 사제는 바로 성체 자체를 배반하는 사제이며 동시에 비길 데 없이 귀중한 보물을 향해 나아가는 신자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사제라고 할 수 있다.

사제직


사제직에 대한 교의는 바로 이런 맥락에다 접목시켜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여러 직무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장려하고 있다고 해서 사제직에 관한 교의에 대하여 의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제직에 관한 교의는 교회가, 특히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미 명쾌하고 확고하게 정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서로 보완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리 평신도의 직무들이 발전했다고 해서 사제직의 고유한 본질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성찬식 때문에 하느님 말씀의 의미와 중요성이 흐려지는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성찬식을 거행함으로써 더욱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들은 미사의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해서 하늘의 양식을 받게 되는데 이 두 가지를 서로 굳게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제이다.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에서 설교하시는 모습을 적고 있는 요한 복음 6장에서도 이 두 가지 측면을 철저하게 결합시켜 놓고 있듯이 성찬식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이 두 가지 측면은 참으로 중요한 것들이다. 사제가 서품을 받는 것은 바로 이 두 개의 성사 양식-즉 말씀의 표지로서의 성사 양식과 빵의 표지로서의 성사 양식-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나누어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직분 사제는 자기 고유의 분야라 할지라도 얼마간의 도움은 필요로 한다. 하지만 아무리 평신도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이 합법적이며 때로는 필요하다고 교회가 인정하고 있다 할지라도 사제는 사제 본연의 책임을 게을리 해서도 또한 포기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평신도에게 설교를 맡길 경우라도 사제는 설교할 사람을 고르는 일은 물론 그가 하게 될 내용까지도 책임을 져야한다. 따라서 설교할 사람을 선정하는 일은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성체 분배라는 특별한 직무를 맡길 사람들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미래의 사제들이 자신들에게 부과된 책임과 그 고유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게 준비시켜 주기 위하여 몇 가지 직무들을 제정하였는데, 신학교에서 그러한 직무들에 대하여 온 힘을 다해 강조해야 하는 것도 다 이 같은 이유에서인 것이다. 예전에는 소품이라고 했던 두 가지의 전례 직무, 곧 독서직과 시종직은 지금은 다소 소박한 면모를 띠게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없어서는 안될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직을 동시에 수여한다든가 해서 그러한 직무들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행위는 바로 첫 번째 직무가 줄 수 있는 유익성을 해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곳에 숨겨진 초자연적이고 교육적인 보물을 신학생들이 찾지 못하도록 치워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성 치쁘리아노가 쓴 감동적인 편지를 거듭거듭 읽어보아야 한다(서간문ⅩⅩⅩⅧ). 성 치쁘리아노는 독서자의 직무를 맡을 사람은 기꺼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을 정도로 자신을 완전히 독서직에 내던진 젊은 그리스도인들이어야만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 치쁘리아노는 독서직이란 좀더 높은 책임, 곧 사제직의 책임을 맡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규율


신학생들이 미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미사에 관한 교회의 규율을 이해하고 철저히 존중하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종종 "창의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제정한 규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기도하는 대로 믿는다"(lex orandi est lex credendi)는 옛 격언도 있듯이 기도하라고 명령하는 규칙들을 신앙과 관련된 규칙들과 똑같은 순명의 정신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믿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교회가 공표한 규칙들은 본질적인 가치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도 사목에 대해서 참으로 엄청난 관심을 쏟는 사람들까지도 곧잘 그러한 본질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신자들은 혼란에 빠져버리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이로 인해 어려운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참기 어려운 분열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제2차 바타칸 공의회이다.

그 동안 수도 없이 증명된 사실이지만 하느님의 백성들이 공의회에서 정한 모든 방침들을 올바로 충실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그러한 방침들 때문에 속썩을 일은 하나도 없다. 공의회에서 정한 모든 방침들은 오직 생경한 것들과 정도가 지나친 것들에 대해서만 반기를 들뿐이다. 가령 공의회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명한 적이 결코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때문에 조직적으로 고집하는 것 못지 않게 비난받아야 할 일인 것이다. 라틴어가 갑자기 모조리 사라진다면 틀림없이 사목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모두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직 점진적인 방법으로 일상의 언어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해야 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들을 혼동하게 될 것이다(1디모 2,13 참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학교에서는 미래의 사제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들이 순명을 사랑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공식적인 지침의 테두리 안에 남아 있기만 한다면 전례에서도 새로운 독창적인 것들을 시도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 : 말씀과 성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같이 가던 수수께기에 싸인 사람이 성서를 설명해 주는 것을 듣는 동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루가 24,32 참조). 그러나 그들은 "빵을 나눌 때"야 비로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매미사 때마다 교회는 바로 그와 똑같은 길을 다시 밟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리스도께서 손수 마련하신 만찬에 잘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당신이 직접 성서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오늘날 전례에서는 참으로 많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는데 이 말씀의 신비는 결국은 성찬식과 깊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고 바로 이러한 사실을 미래의 사제들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항상 깊이깊이 체험해야 한다.

요한 복음 6장에 나오는 계시의 내용도 말씀의 빵에서 성찬의 빵으로 옮겨가듯이 하느님의 말씀도 결국 성찬식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 그 둘은 서로 동떨어진 별개의 "식탁"이 아닌 것이다. 요한 복음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때"에 대해 설명하시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쏟고 계시다. 요한 복음 전체는 바로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때"를 향해서 서서히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전부가 다 백성들이 파스카 신비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말씀의 전례는 우리에게 희생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말씀이 그 완전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성찬식 앞에 나오는 말씀의 전례 안에서이다. 또한 그러한 의미가 제대로 완전하게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찬식과 전례상으로 서로 만나게 될 때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규정하고 있는 "말씀의 전례" 부분에서도 불가피하게 성찬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사제의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사제들은 기도하면서 한 약속을 성찬식 안에서 온전히 실현해야 하고 기도 생활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 역시 성찬식 안에서 완전히 찾아야 하는 것이다.

성직자의 복장


사람들은 신학생들이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그 신학교의 영성적 분위기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성직자 복장은 원래 사목을 더 잘 하기 위하여 생겨났는데도 그 동안 사제들은 너무도 쉽게 성직자 복장에 대하여 등한시해 왔다. 하지만 미사야말로 사람들이 성직자 복장이 지닌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서 절실히 이해하게 되는 장소가 아닐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제들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야 한다고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이야기한 바 있다. 왜냐하면 사제 역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긴 하지만 사제는 심오한 뜻이 담겨진 하나의 표지로서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어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파견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지 않았는가? 사제가 습관적으로 자신의 복장을 소홀히 하면 그것은 신자들 눈앞에서 뿐만 아니라 바로 사제 자신의 양심 속에서 끊임없이 "신앙의 성사들"의 의미를 실추시키는 행위가 되는 것이며 심지어 사제가 그러한 성사들을 집전할 때 그러하다면 그것은 그 의미들을 완전히 세속화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앙의 성사들이란 고해성사, 병자성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체성사를 가르킨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면 흔히는 사제들이 규정된 전례복 조차 입지 않으려는 결과까지 맞게 된다. 이러한 추세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버린다면 그 결말은 아주 비참하고 치명적이 되고 만다. 신학교에서 만일 이와 같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경우 신학교는 결코 강 건너 불 보듯이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신학교 당국은 용기 있게 학생들에게 거기에 대해서 거론하고 설명해야 함은 물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만 한다.

3. 십자가의 말씀 : 영적 희생


우리는 미사 못지 않게 회개에도 중요성을 부여해야 한다. 회개란 말은 그 동안 하나의 성사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을 사제 생활이라는 맥락에서 사용할 때는, 회개란 우리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개인적으로 그분의 수난에 효과적으로 참여하고자 쏟는 노력이란 뜻으로 그 의미를 분명하게 확대시켜야 한다. 사제들은 "기도의 스승들"도 되어야 하지만 그와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회개의 스승들"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회개를 하기 위한 준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고해성사를 저 그늘진 곳으로 밀어내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최근 얼마동안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고해성사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 것처럼 보였다면 그건 정말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회 예절"을 만든 목적이 점차적으로 개별 고백을 없애버리고 "일괄 사죄"로 대치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몇몇 사람들은 일괄 사죄야말로 초대 그리스도교 관행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다. 초대 교회의 공적 참회는 오랜 동안 주교와 개인적으로 접촉을 가져 주교가 잘 알게 된 소수의 특정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공적" 참회라는 것은 그때까지 어떤 통회자가 혼자서 은밀히 참회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이러한 옛 예절과 오늘날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내리는 사죄와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단 말인가? 설사 교회가 필요할 경우 일정한 조건하에서 "일괄 사죄"를 허락하는 때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으로 참회를 하고 신학에서 그 동안 점차적으로 규정하고 설명한 방법대로 시행할 때만이 옛날의 공적 참회와 비슷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회 예절이란 단지 신자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사제에게 개인적으로 고해성사를 볼 마음이 우러나오게끔 도와주는 하나의 아주 좋은 방법일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참회 예절을 통해서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훌륭한 영적 분위기를 경험하게 되고 하느님의 뜻과 그분이 자신들 각자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그릇된 길을 가고 있던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신학교들이 최근 본 교육성에서 발표한 신학교의 전례교육 지침(35항)에 따라 미래의 사제들에게 참다운 회개를 준비시켜 주려면 그들에게 과연 어떤 종류의 훈련을 많이 시켜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교적 양심 구조가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인 양심 구조란 말할 것도 없이 사랑에 그 바탕을 두는 것을 말하지만 아울러 사랑을 고전적으로 표현해서 지덕, 의덕, 용덕, 절덕을 지니고 어떻게 행동으로 바꾸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잘 아는 것을 말한다. 또한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이 이와 같이 묵상하고 탐구한 것들 모두를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맥락 속에다 놓고 볼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침착하면서도 참된 뉘우침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솟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개별 고해성사


이 모든 것을 하게 되면 신학생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사제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다. 회개가 어떤 것인지 마음으로 충분히 알게 된 사람들과 가슴으로 깊이 뉘우치는 사람들이 사제에게 우리가 복음에서 그토록 자주 듣고 있는 말이면서도 죄를 뉘우치는 모든 통회자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말, 곧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라는 바로 그 말을 청하려면 오직 사제와 만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사제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또한 도움이 된다고 생각될 경우에 사제는 여기에다 적절한 충고까지 해줄 수도 있다. 고해성사를 위한 준비를 공동으로 하는 동안에 그리고 다함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 각자가 진정으로 통회할 수 있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고해성사를 각자가 은밀히 보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이 공동 참회 예절을 갖더라도 개별 고해성사에도 맛들일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미래의 사제들이 참된 회개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면 앞으로 그들 스스로 아르스의 성 비안네 신부가 실천하셨던 것과 같은 힘겨운 봉사를 실천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성 요한 보스꼬 역시 아주 최근에 이에 대한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셨다.

영성 지도자들


고해성사를 진실로 마음을 다하여 보게 되면 우리 안에 주님의 빛이 자유롭게 들어오시어 우리를 단순히 용서의 차원을 넘는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유념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많은 경우 고해 신부가 "영성 지도자"가 되게 된다. 고해 신부는 사람들이 어느 것이 주님의 길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가질 수 없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만남을 사제가 그 동안 충분히 갖기만 했다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적어도 상대방에게 성소에 관한 질문을 던져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성소자들을 발견조차 하지 못한 채 놓쳐버리고 말았는지 모른다! 성소자가 두드러지게 감소하게 된 데에는 아마도 점점 개인적으로 고해성사를 보지 않게 된 것도 부분적으로는 그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신학교들은 지금 자신들이 장차 "영성 지도자"가 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수덕(手德)과 생할 규칙


고해성사는 한마디로 각 사람들이 하는 일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참회 예절이란 그것을 준비하는 축복받은 예비 단계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으로 뉘우치는 사람들을 만나러 오시는 것이다. 때문에 참회자는 앞으로도 계속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 오늘날에는 "수덕"이란 말을 거의 들어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수덕이란 말 자체를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수덕은 자기 삶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지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것이다.

사제가 만일 진정한 의미에서의 규범들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제로서 서약한 모든 것들, 특히 독신 서약을 충실히 지킬 수 없다. 신학교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수덕에 대해서, 특히 "생활 규칙"에 대해서 용기 있게 이야기해 주고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만은 아니다. 생활 규칙은 지혜롭고 기품 있으면서도 엄격한 일련의 규칙들로서 장차 학생들이 스스로 생활 규칙을 만들고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지켜야 할 세세한 규칙들이 없다는 것은 사제들에게 끊임없이 많은 문제를 안겨주는 원인이 된다. 사제들은 너무나 쉽게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는 물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갖가지 의무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마침내 점점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제는 사람들이 부부간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희생들을 하고 있는지 늘 명심해야 한다. 사제로서 충실하기 위해서는 이에 못지 않게 살아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제들은 자기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 경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미래의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온갖 희생들을 참아내고 개인이 지켜야 할 규범들을 머리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충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순명


여기서 우리는 잠시 "순명"이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순명"이란 말을 금기시해서는 안 된다.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순명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데(필립 2,8-9 참조), 우리가 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순명한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가 침해받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 뜻을 잘 이해하기만 한다면 순명함으로써 자유를 가장 멋지게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해야 할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순명이란 무엇인지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맡기신 사람들에게 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은 하느님께 순명하고 있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로 권위를 행사하는 쪽에서나 순명을 해야 하는 쪽에서나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 순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순명이란 문제를 다룰 때는 학장이나 신학생들이나 모두 끊임없이 온 마음을 오로지 하느님 뜻에 집중시켜 놓아야 한다. 하느님의 뜻은 신학교의 "공동의 선" 속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학장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러한 "공동의 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정해 주고,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갖고 있는 기발한 생각들과 좋은 지향들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학생들이 혹시나 "공동의 선"에 대하여 아직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동시에 거기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장은 권위를 갖고 주저함 없이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사제들의 의무는 학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학교를 다스릴 사명을 학장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미래의 사제들이 해야 할 또 하나의 임무는 공동의 선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각자의 능력에 맞춰 서로 협력하는 일이다. 공동의 선이란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권유할 수 있는 분위기,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 안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각자가 가진 능력 이상의 것이나 이하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지속시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순명하려면 항상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시에 순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에 기쁨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젊은 사제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순명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그들이 아직 신학교에 있을 때 그리스도 바로 그분 안에서 순명의 뜻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신학생들은 비로소 신학교가 바로 참된 형제애가 넘치는 그리스도 공동체임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 신학교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의지가 싹트게 되어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


신앙이 대상인 마리아의 신비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신학교 생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지 잠깐이라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성 교육이라는 장에서 중대한 사항 하나를 빠뜨리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 "신심"이란 말은 다소 그 뜻이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도 어쩌면 개인적인 문제 내지는 선택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또한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바를 실제로 생활화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그런 문제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육화하셨다. 필요하다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본다면 지금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마리아께서 구원의 경륜에 참여하셨던 어떤 단순하고 일시적인 공로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모 영보는 바로 육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교회는 차츰 마리아의 신비를 더욱 잘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성서에서 마리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다 교회가 나름대로 마리아에 대해 추측해서 마구 덧붙인 것이 결코 아니고 교회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발견해 나가는 여정의 매 단계마다 동정녀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론은 또한 마리아론이기도 하다. 우리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열렬한 마음으로 마리아의 신비를 살고 계시는데 이것은 바로 마리아께 대한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론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역시 이 같은 충성심만 갖고 있다면 충분히 그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갖고 있으면 그리스도 신비의 역사성을 뿌리째 흔들어놓으려고 하는 온갖 것들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 혹시 많은 경우 그리스도의 신비와 육화의 신비를 분명히 그리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를 망설이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은폐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리아께 대한 태도


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모든 것을 의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마리아의 신비를 결코 생활화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물론 그것은 달콤한 감상주의라든가 경박하게 온갖 감정을 표출하는 것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복되신 동정녀와 만날 수 있어야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만날 수 있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교황 바오로 6세의 "마리아 공경"에 대한 사도적 권고의 정신에 따르면 "당신은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라는 말만큼 우리를 믿음의 기쁨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없다. 신학교에서는 절대 망설이지 말고 참된 의미에서의 마리아의 신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동안 교회가 진정한 내적 신심 - 몽포르의 성 루이 마리 그리뇽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인들께서 구원의 "비밀"로서 간직하셨던 그런 진정한 내적 신심 - 에 도달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이용했던 방법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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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맺는말


끝으로 우리는 하나의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차츰 확고하고 지속적인 방법으로 신학교의 정규 관행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지금까지 부분별로 나누어서 말한 이상(理想)을 완벽하게 이루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고 수많은 사상들이 넘치도록 많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 내적인 성찰의 시간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신을 사제직에 봉헌하고자 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바로 그런 세상에 살다가 오는 것이다. 그 동안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신학교 준비하는 기간을 전적으로 영성 교육하는 데 쏟기만 한다면 그 기간은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주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제 지원자들의 수가 갑자기 늘어난 신학교들을 보면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이런 신학교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신학생 수가 증가한 것이 바로 그 같은 시도를 과감하게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학교 지망자들도 이러한 영적 수련기간을 환영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예비 영적 수련기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교구 당국자들인 것 같다. 이것은 사제가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런 훈련을 새로 시작하는 것을 그들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한번 해보기만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 순식간에 알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제안을 꼭 시도해 보라고 계속 주장하는 바이다.

신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준비 기간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실시해야 한다. 그러면 그보다 나중에는, 즉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이루기가 매우 힘들거나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그 어떤 것을 처음부터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신학교에서 하는 훈련은 거의 대부분이 지적 공부가 차지해 버린다. 때문에 학생들은 흔히 진정한 영적 수련을 닦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자유를 갖지 못하게 된다. 이 제안을 실천에 옮긴다면 이 회람에서 말한 내용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풍부한 결실을 맺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항상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회람에서 말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풍부한 생각의 소유자들과 그리스도의 은총이 자신이 하는 일들을 끝까지 도와주고 지속시켜 줄 수 있도록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가능성들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육성성에서
1980년 1월 6일, 주의 공현 대축일에,
장관 가브리엘 마리 가론느 추기경
차관 안또니오 M. 하비에레 오르타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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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제 양성 기본 지침  [9] 24843
8   자유의 전갈 (Livertatis Nuntius)  [12] 2198
7   성체신비 공경 규정에 관한 훈령  [2] 2577
  신학교 영성 교육 중 매우 절박한 문제들에 관한 회람  [3] 2401
5   신학교의 전례 교육에 관한 훈령  [3] 2885
4   미래 사제들의 신학 교육에 관한 서한  [5] 2665
3   독신 생활 양성 지침  [7] 2681
2   세계 정의에 관하여(De Justia Mundo)  [4] 2410
1   성체 신비 공경에 관한 훈령  [3] 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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