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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이후 주교님들께 보내는 공개 서한 - 5
조회수 | 1,207
작성일 | 14.09.20
내가 교회의 '쓰레기'일까, 반성하는 성직자

페르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이야기꾼인 사아디(Moshref Al-Sa Al-Shirazi, 1213-1291)가 지은 우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느 젊은 나그네가 배에서 내렸는데 마을사람들은 그의 슬기롭고 경건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고 마을수도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수도원 식구들은 젊은이를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수도원장이 젊은이에게 말했죠. “자네, 이 수도원에서 쓰레기를 좀 치워주겠나?” 그날 젊은이의 종적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아마도 청소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여기고 넘어갔습니다.

이튿날 수도승 하나가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그를 발견하고 불러 세웠습니다. “원장님이 시키신 일을 그렇게 물리치다니? 자네 참 어리석은 짓을 했네. 자네가 오르려는 사다리가 남을 섬기는 일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는 사다리인 줄 몰랐던가?” 이 말을 듣고 젊은이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형제여,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쓰레기를 치우라는 말씀에 사방을 구석구석 살폈지만 어디에서도 쓰레기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원장님이 치우라고 하신 쓰레기가 바로 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를 치워 그곳을 깨끗한 장소로 만들려 했던 겁니다.”

주교님,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겸손함이 있기를 기대해도 좋을까요? 스스로 성찰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우는 데 부지런한 사제들을 기대해도 좋을까요? 자신을 때로 ‘교회의 쓰레기가 아닐까?’ 의심하는 주교를 기대해도 좋을까요? 이처럼 교회를 하느님께 봉헌할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버릴만한 용기와 진정성을 소유한 성직자를 기대해도 좋을까요?

저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라는 교회언론을 시작할 때 언론이 쓰레기를 치울 수는 없어도 무엇이 쓰레기인지 식별할 눈을 지니고 마을 수도원장처럼 “쓰레기를 치우라”고 청할 수는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저희들 역시 이 젊은이처럼 반성의 능력을 지녀야 하겠지요. 충분히 비판받을 마음을 먹고 비판하는 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제가 공무원?...교회는 관료사회
거래와 흥정의 상업주의...형제와 친구는 사라졌나?

이 편지를 쓰면서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은 우리 교회가 점점 공무원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칼 라너는 성직자들을 ‘종교 공무원’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사제들에게 영성을 기대하기는 이미 글러먹었고 최소한 신자들의 세금(헌금)으로 먹고사는 만큼만이라도 성실하게 종복 노릇을 하라고 기대하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프란치스코 교종처럼 여전히 꿈을 접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소임을 맡고 있는 주교며 추기경이며 교황이라는 직함을 얻더라도 다만 ‘자기 백성들에게 더욱 잘 봉사하기 위한 것’이지 ‘출세’타령이나 하자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로마의 주교’라고 겸손하게 불렀던 프란치스코 교종은 방한 기간 중에 한국교회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다른 동료 주교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꽃동네에서 만난 평신도 단체 지도자들에게는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교계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형제와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해관계가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거래와 흥정이 없는 관계가 형제이며 친구입니다. 고단하고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만나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고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입니다. 여기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됩니다.

그런데 현실 속의 교회는 흥정과 거래의 상업주의가 깊숙이 배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입맛에 맞는 교설을 전하고 신자들은 구미가 당기는 종교 상품만 소비합니다. 주교는 사장처럼 사제들에게 업무지시를 내리고 사제들은 중간관리자처럼 행동하며 주교와 신자들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성과지표’를 들고 있는 주교 앞에서 사제들은 때로 복음적 열정마저 감추어야 하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들은 ‘가난’을 즐겨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면 안 됩니다. 부유한 신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비난을 받기 쉬운 까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더 나가서 “제가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저도 실천해야 하므로 교황직 쇄신에 대해서도 생각한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주교들, 출세주의 조장하는 사제들 줄 세우기 그만 두어야

이 정도 결기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 싶지만 교회개혁은 교종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주교들이 먼저 따라 주어야 하고 사제들이 주교를 따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뜻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혁에 나설 주교들도 많지 않거니와 사제들도 엉거주춤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이미 교회는 상업화 못지않게 충분히 관료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종 말마따나 복음적 열정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직자들에게 남은 것은 이해타산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야심 있는 이들, 주교직을 노리는 이들을 조심하라”고 교황대사들에게 당부한 바 있습니다. 주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의 출세지상주의를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종이 바라는 주교는 “신자들 가까이 있는 사목자, 온유하고 인내심 있으며 자비로운 아버지요 형제”라고 말합니다. 교종은 ‘군주’로 군림하지 않고, 영적이며 “실제적인 가난”을 사는 주교를 바라는 것이지요.

이런 게 주교직이라면 앞 다투어 주교가 되려는 이들도 많지 않을 텐데 주교직 자체가 지닌 교회법상 특혜와 권한이 막강하다보니 사제들은 ‘주교’가 되려하고 주교들은 ‘추기경’이 되려 하는 것이겠지요. 오죽하면 프란치스코 교종이 추기경 시절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대-라틴아메리카 신학교 학장인 랍비 아브라함 스코르카와 나눈 대담에서 “지금도 교회는 음모와 책략에 뒤엉켜 있다”고 말했겠습니까. 출세주의에 빠진 자들이 주교직에 오르고 그런 교구장이 ‘통치’하는 교구는 관료사회로 변질됩니다.

이런 관료적 교구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악습이 ‘줄세우기’입니다. 어느 주교, 어느 유력한 사제 뒤에 줄을 잘 서느냐에 따라서 출세가 보장받기도 하고 변방으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제일수록 변두리 본당만을 전전해야 하는 상황은 ‘줄을 잘못 선’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최근에야 이런 관행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교구장에게 인사권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교구장 주교와 주변 인물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결국 주교가 맑으면 주교의 주변부터 시작해서 교구 전체가 맑아지고 주교의 안목이 흐려지면 교구 전체가 탁해집니다.

정훈 지침서인 ‘성경’, ‘전투교본’인 ‘사회교리’
“모든 본당이 변방이다”

가장 좋은 것은 변방으로 나가려는 사제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굳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신 말씀이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유다의 변방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가련한 처녀에게서 시작된 것처럼 변방에 있어야 복음이 주변부 인생들에게 복음이 된다는 말씀이 가슴을 뛰게 만드는 교구야말로 가장 복음적인 교회입니다. 교구장이 이런 사제들을 격려하고 스스로 변방에 나아가 사제들을 동반하는 교구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변방이란 굳이 공단이나 빈민지역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모든 본당이 변방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문제 없는 지역이 없고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습니다. 교종이 우리시대의 우상으로 지목했던 경제권력은 어디서나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 배제와 차별, 불평등에 대항하는 싸움은 어디서나 벌어집니다. 본당은 이 영적 싸움을 위한 교두보입니다. 영적 싸움에 지친 이들이 고단한 영혼을 다독이고 다시 몸을 추슬러 나아가 싸우는 ‘하느님의 집’이며 ‘영원한 성채’입니다. 이 집에서 성모 마리아가 품을 내어주시고 ‘복음화의 별’을 신자들에게 나눠주십니다. 본당은 문을 걸어 잠그고 신자들끼리 모여서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사교장이 아니라 영적 전투를 준비하는 상황실이며, 야전병원이며, 사랑의 학교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정훈 지침서인 ‘성경’도 있고 ‘전투교본’인 ‘사회교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내부에 있다는 말이 맞습니다. 이미 진영 안에 들어와 있는 상업주의와 관료주의가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지적한 가장 큰 병폐는 ‘영적 세속화’겠지요. 하느님 이름으로, 신앙 이름으로 제 잇속을 챙기는 성직자들과 유력한 평신도. 그리고 교묘하게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들먹이면서 사실상 복음과 상관없는 정치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교종이 마피아들을 파문한 것처럼 교회는 교회 안에 침투한 비복음적 요소들을 도려내야 합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은 없습니다.

여전히 희망의 한끝을 쥐고 있는 주교들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

그러니, 다시 교구장 주교들의 입장이 중요해집니다. 주교들의 분명한 사목적 태도가 요청됩니다. 복음과 사회교리에 대한 충분한 설명, 그리고 이에 다른 명확한 사목지침을 정해야 합니다. 강론 때마다 교구장 주교가 추상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관심’을 운운한다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사회복지 예산을 조금 더 상향조정하거나 기금마련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등 ‘돈’으로 때우려는 이미지를 통한 기업홍보의 논리를 가져올 뿐입니다. 사목정책 자체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혁신되어야 합니다. 본당 단위까지 일관성 있게 관철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위한 청사진이 제시되야 합니다. 아직 아니라면, 지금부터 준비하면 됩니다.

가장 구체적인 사례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낳은 원주교구의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지학순 주교의 사목정책을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이동화 신부는 “지학순 주교의 대사회적 측면의 방향성이 ‘정의구현’이었다면, 교회 안에서 가장 근본적인 방향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였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학순 주교는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라는 1973년 사목지침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조직하고 학습시켜 협동조합 활동을 전개하고 이를 위해 각 본당 사제와 본당 단체 지도자들이 본당과 공소에 등록되어 있는 가난한 교우들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신앙과 실천이 통합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서 간추림’을 신자들에게 교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한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 초판본은 대부분 원주교구에 보급되어 신자들은 이 책자를 소지하고 읽고 외우도록 격려되었습니다. 이 책은 성경과 사회교리와 교부들의 가르침을 사회문제와 관련해서 엮은 것입니다.

지학순 주교는 사제들에게는 사회과학과 사회교리를 학습케 하고 각 본당과 공소에서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했으며 이 평신도들이 지역문제를 신앙 안에서 해결하도록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신자뿐 아니라 그 지역사회 자체에 복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생활협동조합운동이 원주에서 뿌리내리고 이 힘으로 원주를 한국 민주화 운동의 메카가 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교회만을 위한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다릅니다. 지역을 위한 교회, 사회 안에서 함께 고난 받으며 희망을 나누는 교회가 되는 길을 찾았습니다.

공교롭게도 2014년 올해는 지학순 주교가 양심선언으로 구속된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동료 주교님들께 다시금 간청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꿈을 더불어 꾸어 보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그렇다면 1973년에 지 주교님이 발표하셨던 그 사목교서를 먼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문헌이고, 요즘처럼 물신화와 세속화가 교회마저 삼켜버린 듯한 시절에는 더욱 요긴한 문헌이 될 것입니다. 이른바 한국에서는 ‘오래된 미래’가 될 문헌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마저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는 마음에 담아두셨지만,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엄두를 내지 못하셨습니다. 그래도 김수환 추기경은 지학순 주교를 기꺼이 동반하셨습니다. 우리 주교님들도 그리 하시면 어떨까, 안타까운 심정으로 글을 올립니다. 교계제도가 완강한 지금, 여전히 주교님들이 희망의 한끝을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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