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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민족
조회수 | 882
작성일 | 10.08.28
한민족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는 민족의 운명에 결코 초연할 수 없었으며,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을 위해 근대화 운동과 반침략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교회는 교육 운동, 언론 계몽 운동 등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 운동의 전개로써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며 실천하였다. 반면에 교회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일부 신자들은 무장 투쟁을 비롯한 반침략 운동을 계속하였다.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던 1880년대 이후 교회는 신학 교육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 착수하였다. 이때 교회 계통 학교의 교육 이념 중에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천의 인성학교는 “보국애인”을 설립 취지로 삼고, 이천의 삼애학교는 “애주, 애국, 애인”을 교훈으로 삼았으며, 안악의 봉삼학교는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과 도덕의 마음을 배양함과 국태민안”을 설립 취지로 내세웠다. 이와 같은 교회 학교의 교훈이나 설립 취지를 살펴볼 때에 당시의 교육 운동은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육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대체로 초등 교육 분야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는 당시의 교회가 대중의 계몽을 소수 지식인의 양성보다 더 시급한 문제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관심은 곧 중등 교육 분야로까지 그 폭을 넓혀갔다. 교회에서 세운 최초의 학교는 1884년 서울에서 개교한 한한학교(韓漢學校)였다. 또한 교회에서는 1885년 원주 부흥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893년의 통계에 따르면 교회 학교는 36개 교에 이르렀고 1904년에는 75개 교로 늘어났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그 침략 과정에서 우민화 정책으로 사립 학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1908년 사립 학교령을 공포하여 교육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 결과로 한일합방이 된 1910년에 천주교 계통의 학교 수는 46개 교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1910년 교구 통계에는 학교 총수가 124개 교로 나타나 있는데, 그 중 78개 교가 사립 학교령으로 폐쇄되었거나 탄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01년에는 제물포와 서울에 여학교를 세워 여성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자 하였으며, 측량 학교와 농업 학교 등을 세워 실업 교육에도 착수하였고, 야학교를 세워 노동자들도 새로운 학문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교회에서는 초등 학교 교사 양성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1년 서울에 숭신학교라 불리던 사범 학교를 세웠으나 1913년에 폐쇄되고, 1911년에 숭공학교를 세워 수준 높은 실업 교육을 시행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쇄되고 말았다. 일제의 지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1910년 이후 교회의 교육 운동은 큰 시련에 부딪쳐 많은 학교들이 점차 폐쇄되고, 동성상업학교, 계성여학교 등 몇 개의 교육기관만을 상징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개화기 천주교회가 전개했던 애국 계몽 운동 중에는 언론을 통한 활동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교회의 대표적 언론 기관은 1906년 10월 19일 창간된 한글 전용 「경향 신문」(주간; 부록 「보감」 발행)이었다. 「경향 신문」은 한일합방으로 인해 1910년 12월 30일 제5권 220호를 발행한 다음 폐간되었으며, 1911년 1월 15일 제6권 221호부터 신자들을 위하여 부록으로 발행하던 「보감」의 제호를 「경향 잡지」로 바꿔 지금까지 발행해 오고 있다(1993년 12월 현재 제85권 1509호 발행). 「경향 신문」은 “참된 개화와 거짓 개화를 분별시키고 올바른 개화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해” 창간되었고, 당시의 신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적극적인 환영을 받아 국내 최고의 발행 부수를 기록하기까지 하였다. 초대 발행인 드망쥬(Demange; 安世華) 신부는 동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진리의 원수들이 출판물을 통하여 퍼뜨리는 거짓 지식을 바로잡아 주며, 필요하다면 참된 진리를 변호하는 것”이라고 「경향 신문」의 간행 목적을 밝혔다. 이 신문은 또한 법률 계몽 운동 등으로 일종의 사회 교육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교회는 또한 1886년 이전부터 “성서출판인쇄소”(현재 가톨릭출판사, 가톨릭인쇄소)를 세워 문서 선교를 통한 계몽 운동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개화기의 교회는 공식적으로 애국 계몽 운동적인 온건한 민족주의를 지지하고 실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일부 신자들은 계몽 운동에만 만족할 수 없어 반침략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천주교회가 반침략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때는 1904년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국토를 침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황무지 개간이란 명목 아래 새로운 침략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서울 명동성당에 모여 황무지 개간령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개최하였으며, 일제에 대항하는 교회의 반침략 운동은 이 기도회를 계기로 촉진되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전국에서 의병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신자들도 이에 참여하여 투쟁하였다.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상태는 일본군에 잡혀 사살될 때까지 묵주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안중근의 의병 활동에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한일합방 직전에 전개된 반침략 운동 가운데 안중근의 의거와 국채 보상 운동은 민족 운동의 발전에 끼친 천주교회의 영향력을 대변해 준다. 안중근은 만주의 하얼빈에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후 “십자 성호를 긋고 대한 만세를 불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애국심과 신앙심의 조화를 드러내고 있다. 의거 이전에 그는 진남포성당에서 교회 학교 운영에 진력하였으며, 간도 지방으로 망명한 후 의병을 조직하여 일제에 저항하였다. 안중근의 의거는 반침략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무장 투쟁이었다. 이에 반하여 국채 보상 운동은 온건한 방향에서 전개된 또 다른 형태의 반침략 운동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국채 1,300만 원을 차관하게 되었는데, 이 차관이 일본의 침략을 촉진하는 것으로 보아, 전국에서 국채를 국민의 힘으로 보상하여 침략을 막아보려던 운동이 일어났다. 이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한 서상돈은 대구 지방의 대표적 신자였다. 그의 주장에 호응하여 전체 교회가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당시 교회에서 간행하던 경향 신문을 통해 이 운동을 촉진시켜 나갔다. 경향신문과 교회를 통한 국채 보상 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일합방이 강행된 후에도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 운동은 계속되었다. 황해도 지방의 유력한 신자인 안명근을 중심으로 한 “안악사건”, “105인 사건”의 천주교 신자 이기당을 중심으로 한 간도 지방의 독립 운동 단체인 “광제회”, 통화현의 “자치회”의 조직을 비롯 “병학교”의 설립은 대대적인 무장 저항 운동의 준비였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에 서울, 강화, 안성, 수원, 평양, 해주, 대구 등지에서 다수의 신자들이 참여하였으며, 서울의 “예수성심신학교”와 대구의 “유스티노신학교”의 신학생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3·1 운동의 실패 후 간도 지방 등에서 무장 독립 운동단체들이 조직되고 있을 때,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단체인 “의민단”이 조직되었다. 방우룡의 지휘를 받던 의민단은 그 무장 규모와 병력수에서 매우 유력한 독립군 단체였으며, 방우룡과 의민단은 그후 상해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 세력으로 편입되어 활동을 계속하였다.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안공근, 곽연성 등의 신자들이 적극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은율의 윤예원 신부는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에 가담하였다. 또한 안학만 신부는 만주의 독립군 단체에 직접 가담하여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당국은 일제의 침략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운동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일부 신자와 성직자들이 자신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민족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던 것이다. 하느님 백성의 보편 공동체인 교회는 협착한 민족주의나 특정 정치 세력을 지향하는 사회 단체가 아니므로, 이 보편성이 바로 민족 가치의 추구에 대한 한계 또는 초월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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