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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세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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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세계의 교회
조회수 | 965
작성일 | 10.08.28
한국교회의 시대배경

한국 현대사의 기점은 1945년 8.15 해방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 민족은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국제 냉전 체제의 성립과 이에 편승한 국내의 분단 지향적 세력들에 의해 남북한의 분단 시대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민족의 해방은 한국 천주교회에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으나, 민족의 분단으로 교회도 분단되었으며, 교회는 남북한 당국의 종교 정책들이 드러내고 있던 특성에 따라 각각 위축과 발전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교회는 6.25 동란이라는 동족 상잔의 전쟁 과정에서 고통 받은 남북한의 민족과 더불어 큰 피해를 받았으며, 휴전 이후 남북한의 교회도 서로 상이한 길을 걸어왔다. 북한 교회는 시달리며 이른바 “침묵의 교회”로 전락했고, 남한의 교회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장족의 발전을 이룩해 갔다.

한편, 해방 이후부터 서구 문물의 무분별한 수입은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를 촉진시켰으며, 전쟁은 새로운 사회상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휴전 이후 남한 사회에서는 전쟁 피해의 복구와 민주주의의 신장이 최대의 과제였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거쳐, 군사 정권이 수립되어 개발 독재론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주류는 1960년대 말엽부터 권위주의 정권과 대치하는 가운데 인간 존엄성과 기본권의 보장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여 정부 당국의 탄압을 받아야 했지만, 한국 천주교회에는 새로운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1962년에는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어 종전의 대목구들이 교구로 승격되었고, 교구장 주교들은 공의회 등에 참석하여 세계 교회의 주요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화”(Aggiornamento)를 기치로 내걸었던 1962∼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쇄신과 선교적 역할 그리고 민족 사회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해방 이후 개발 독재를 통한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하는 동안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 등 많은 사회 문제들이 쌓여가고 있었으며, 교회는 사회 정의의 구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979년의 10.26 사건과 12.12 쿠데타를 거쳐 제5공화국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게 되었으며, 다시 1987년 6월의 민주 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5, 6공화국의 정치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한국 교회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1981년)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1984년)을 기념하고,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시성식을 바로 한국에서 거행하게 되었으며, 제44차 세계성체대회(1989년)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세계 교회에 자신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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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의 개막과 한국교회 (1945-1962)

교회의 쇄신과 정의실현

1962년 3월 10일 드디어 한국 교회에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또한 이 해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교회의 쇄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전환기에 처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고, 자신의 쇄신과 봉사의 자세를 다시 점검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수에서 1950년대와 같은 급격한 증가율을 기록할 수는 없었지만, 점진적인 증가 현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공의회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는 민족과 사회 문제에 대한 능동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일치 운동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는 1962년 이후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한국인의 마음 안에 자신의 터전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한국에 3관구 11개 교구의 교계제도(덕원면속구 별도)가 설정된 것은 한국 교회의 성장과 능력을 로마 교황청에서 확인한 결과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전교지 교회의 미숙한 단계를 청산하고 세계 교회 공동체의 성숙한 일원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제도적 발전은 1966년 주교회의의 정식 조직(1967년 12월 4일 주교회의 규약 교황청 인준 발효, 의장단 정식 취임)과 1968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으로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의 주요 문제에서 그 참여와 연대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수원, 원주, 마산, 안동, 제주 등 새로운 교구의 증설이 계속되었으나, 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면속구는 북한의 교회로 남아 있다.

휴전 이후 1950년대에 연평균 16.5%라는 높은 신자 증가율을 기록했던 한국 교회는 1960년대에 이 증가율이 연평균 6.2%로 급속히 하락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더욱 둔화되어 5.2%로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1970년대의 한국 교회에 선교 정책의 일대 전환이 요구되고 있음을 뜻한다. 1970년대 교회는 자신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며 민족의 현실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사회 발전을 위한 정당한 노력을 드러내주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땅에서도 천주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일치 운동의 기운을 일으켜, 신학적 입장에 대한 상호 이해는 물론 사회 개발과 인권 문제 등에서 협력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서의 공동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한국 교회는 인권 문제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사회 발전을 위한 교회 고유의 역할을 모색해 나가며,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올바른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다. 한국 주교단에서는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계기로 하여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공동 사목교서를 발표하였다. 이 교서의 발표는 한국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사건이었다. 그 이후 교회에서는 사회 문제를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즉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가톨릭농민회’가 조직되어 농민의 권익 향상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대사회 활동에는 외부의 탄압과 압력이 뒤따르게 되었으며, 교회는 이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해 나갔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한국 정치는 ‘3선 개헌’과 ‘유신 헌법’의 제정, ‘긴급 조치’ 등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 시도로 점철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재에 반대하는 운동들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정부에서는 정보 정치와 인권 유린 사태를 자행하였다. 이에 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주교단에서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1971.1.11.)는 공동 교서를 발표한 것도 바로 이러한 교회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의 구속(1974.8.26.) 사건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1970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아픔을 대변하고 치유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도 인권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1970년대 한국 교회가 전개한 인권 운동은 별다른 준비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난 것이었으나, 한국 교회는 이 운동 과정에서 국민 대다수와 정신적 일체감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민족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여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 교회에서는 한국 문화와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에서 설립 운영하는 교육 기관으로는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심여자대학교’, ‘효성여자대학교’ 등의 종합 대학교와 단과 대학 및 전문 대학들이 있다. 그리고 유아 교육, 초등 교육 및 중등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하고 있다. 한편, 현대의 교회는 의료 봉사 부문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기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병원들은 전국 병원 침상 수의 1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의료를 통한 사회 복지의 향상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는 각종 보육원, 양로원과 그 밖의 사회 사업 기관들을 통해서 민족에 대한 봉사의 자세를 뚜렷이 하고 있다. 민족을 위한 교회의 봉사는 사회 개발 부문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는 6.25 동란 이후 전재민의 구호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왔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기부터 교회의 봉사 활동은 단순한 구호 활동보다 사회 개발의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주민 생활의 향상을 위한 간척 사업, 소규모 도로와 교량의 설치 등과 같은 사업들이 교회의 원조로 전개되었다. 이 사업의 추진에는 ‘가톨릭구제회’의 기여가 컸던 것이다. 한편, 교회는 주민들의 자립 정신을 키우기 위해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회가 주도했던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이제 한국 사회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서민 대중의 경제난 해소에 큰 기여를 하였다. 현재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와 각교구의 사회복지위원회를 통하여 사회 개발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사회복지위원회는 단순한 구호 사업뿐만 아니라 광산촌의 개발, 농축 산업의 발전 등과 같은 부문에까지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사회 개발 사업의 어떤 부분들은 아직까지도 외국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 시기의 한국 교회는 영적 쇄신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평신도 운동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창설되었다(1968.7.23.). 가톨릭 학생 운동도 4.19 혁명과 공의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어, 일반 학생 운동과 호흡을 같이하며 전개되어 나갔다. 이와 같이 전국적 조직의 평신도 단체들이 등장하여 활동함으로써 교회에 새로운 활력이 부여되었고, 이들의 활동은 교회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따라 우리말로 미사를 봉헌하면서부터(1965.1.1.), 한국 교회에서는 토착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신앙의 토착화를 통하여 한국 사회에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안들을 모색해 온 것이다. 또한 개인 구령을 목적으로 하는 비조직적인 신심 운동도 중요한 전환을 이루어, 1960년대 후반기에는 각종 신심 운동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도입된 레지오마리애를 비롯 꾸르실료 운동, 기초 공동체 묵상회, 훠콜라레 운동, 성령 운동, 각종 성서 연구 모임 등이 조직적 성격을 가지고 전개되어 한국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전통적 신심 중의 하나인 순교자 신심은 1968년의 병인 순교 복자 24위의 시복식을 계기로 하여 다시 한번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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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쇄신과 정의의 실현 (1962-1983)

1962년 3월 10일 드디어 한국 교회에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또한 이 해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교회의 쇄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전환기에 처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고, 자신의 쇄신과 봉사의 자세를 다시 점검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수에서 1950년대와 같은 급격한 증가율을 기록할 수는 없었지만, 점진적인 증가 현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공의회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는 민족과 사회 문제에 대한 능동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일치 운동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는 1962년 이후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한국인의 마음 안에 자신의 터전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한국에 3관구 11개 교구의 교계제도(덕원면속구 별도)가 설정된 것은 한국 교회의 성장과 능력을 로마 교황청에서 확인한 결과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전교지 교회의 미숙한 단계를 청산하고 세계 교회 공동체의 성숙한 일원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제도적 발전은 1966년 주교회의의 정식 조직(1967년 12월 4일 주교회의 규약 교황청 인준 발효, 의장단 정식 취임)과 1968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으로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의 주요 문제에서 그 참여와 연대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수원, 원주, 마산, 안동, 제주 등 새로운 교구의 증설이 계속되었으나, 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면속구는 북한의 교회로 남아 있다.

휴전 이후 1950년대에 연평균 16.5%라는 높은 신자 증가율을 기록했던 한국 교회는 1960년대에 이 증가율이 연평균 6.2%로 급속히 하락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더욱 둔화되어 5.2%로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1970년대의 한국 교회에 선교 정책의 일대 전환이 요구되고 있음을 뜻한다. 1970년대 교회는 자신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며 민족의 현실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사회 발전을 위한 정당한 노력을 드러내주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땅에서도 천주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일치 운동의 기운을 일으켜, 신학적 입장에 대한 상호 이해는 물론 사회 개발과 인권 문제 등에서 협력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서의 공동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한국 교회는 인권 문제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사회 발전을 위한 교회 고유의 역할을 모색해 나가며,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올바른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다. 한국 주교단에서는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계기로 하여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공동 사목교서를 발표하였다. 이 교서의 발표는 한국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사건이었다. 그 이후 교회에서는 사회 문제를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즉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가톨릭농민회’가 조직되어 농민의 권익 향상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대사회 활동에는 외부의 탄압과 압력이 뒤따르게 되었으며, 교회는 이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해 나갔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한국 정치는 ‘3선 개헌’과 ‘유신 헌법’의 제정, ‘긴급 조치’ 등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 시도로 점철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재에 반대하는 운동들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정부에서는 정보 정치와 인권 유린 사태를 자행하였다. 이에 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주교단에서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1971.1.11.)는 공동 교서를 발표한 것도 바로 이러한 교회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의 구속(1974.8.26.) 사건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1970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아픔을 대변하고 치유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도 인권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1970년대 한국 교회가 전개한 인권 운동은 별다른 준비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난 것이었으나, 한국 교회는 이 운동 과정에서 국민 대다수와 정신적 일체감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민족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여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 교회에서는 한국 문화와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에서 설립 운영하는 교육 기관으로는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심여자대학교’, ‘효성여자대학교’ 등의 종합 대학교와 단과 대학 및 전문 대학들이 있다. 그리고 유아 교육, 초등 교육 및 중등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하고 있다. 한편, 현대의 교회는 의료 봉사 부문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기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병원들은 전국 병원 침상 수의 1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의료를 통한 사회 복지의 향상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는 각종 보육원, 양로원과 그 밖의 사회 사업 기관들을 통해서 민족에 대한 봉사의 자세를 뚜렷이 하고 있다. 민족을 위한 교회의 봉사는 사회 개발 부문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는 6.25 동란 이후 전재민의 구호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왔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기부터 교회의 봉사 활동은 단순한 구호 활동보다 사회 개발의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주민 생활의 향상을 위한 간척 사업, 소규모 도로와 교량의 설치 등과 같은 사업들이 교회의 원조로 전개되었다. 이 사업의 추진에는 ‘가톨릭구제회’의 기여가 컸던 것이다. 한편, 교회는 주민들의 자립 정신을 키우기 위해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회가 주도했던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이제 한국 사회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서민 대중의 경제난 해소에 큰 기여를 하였다. 현재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와 각교구의 사회복지위원회를 통하여 사회 개발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사회복지위원회는 단순한 구호 사업뿐만 아니라 광산촌의 개발, 농축 산업의 발전 등과 같은 부문에까지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사회 개발 사업의 어떤 부분들은 아직까지도 외국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 시기의 한국 교회는 영적 쇄신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평신도 운동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창설되었다(1968.7.23.). 가톨릭 학생 운동도 4.19 혁명과 공의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어, 일반 학생 운동과 호흡을 같이하며 전개되어 나갔다. 이와 같이 전국적 조직의 평신도 단체들이 등장하여 활동함으로써 교회에 새로운 활력이 부여되었고, 이들의 활동은 교회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따라 우리말로 미사를 봉헌하면서부터(1965.1.1.), 한국 교회에서는 토착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신앙의 토착화를 통하여 한국 사회에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안들을 모색해 온 것이다. 또한 개인 구령을 목적으로 하는 비조직적인 신심 운동도 중요한 전환을 이루어, 1960년대 후반기에는 각종 신심 운동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도입된 레지오마리애를 비롯 꾸르실료 운동, 기초 공동체 묵상회, 훠콜라레 운동, 성령 운동, 각종 성서 연구 모임 등이 조직적 성격을 가지고 전개되어 한국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전통적 신심 중의 하나인 순교자 신심은 1968년의 병인 순교 복자 24위의 시복식을 계기로 하여 다시 한번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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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성장과 세계교회(1983년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되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우리 나라 사회의 여러 상황들이 영향을 미쳤다. 교회 창설의 첫번째 배경으로는 천주교회의 동양 선교와 한역 천주교 서적의 전래를 들 수 있다. 동양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16세기 말엽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천주교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의 활동이 우리 나라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마태오 리치 신부였다. 그는 천주교 신앙이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줄 수 있다는 보유론(補儒論)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천주교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와의 관계를 밝힌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을 지었다. 또한 17세기에 들어와서 그 밖의 여러 선교사들도 천주교 신앙을 소개하는 많은 종류의 책을 지었다. 당시 중국을 왕래하던 우리 나라의 사신들이 가져온 한문 서적들 가운데는 중국 선교사들이 지은 책들이 있었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 책들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세기 초, 천주교 책들이 전해지자 우리 나라의 학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이를 읽어나갔다.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거의 200여 년 동안 천주교의 책들을 읽고 검토해 왔다. 그 가운데서 천주교를 새로운 인생 철학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곧 천주교를 새롭고 참다운 종교로 믿고 실천하게 되었다. 이러한 천주교 서적의 연구는 이 땅에 교회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지게 된 첫번째 배경이다.

그 두번째의 배경으로는 당시 우리 나라 사회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조선 왕조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이끌던 사상은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性理學)이었다. 그러나 18세기를 전후하여 성리학은 조선 왕조의 사회와 정치를 이끌어나갈 힘을 잃어버렸고, 일부 지식인들은 성리학 대신에 새로운 가르침을 찾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보려던 일부 관리들과 지식인들은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편, 조선 왕조의 사회는 양반, 상민, 노비와 같은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차별을 강요하고 있었으나, 18세기에 이르러서 이와 같은 신분 제도가 급격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아무런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기근과 전염병의 주기적인 발생, 양반 관료들의 민중 수탈 등으로 인해 불안한 생활을 하던 많은 이들이 각종 신흥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다.

또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18세기의 사회에서는 실학 사상(實學思想)이 발전하고 있었다. 몇몇 실학자들은 중국의 유교 철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공맹 당시의 유학 사상에 있던 천(天) 또는 상제(上帝) 관념에서 천주교의 유일신 사상 이해에 도움을 받았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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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와 세계의 교회  [3] 965
10   한국교회와 민족  883
9   성장의 둔화와 교회의 진로  961
8   개화기의 교회  797
7   격동기 교회의 시대적 배경  946
6   박해의 원인과 의미  1100
5   신자들의 신심생활  863
4   순교자와 증거자의 시대  800
3   초기 교회사의 전개  731
2   한국교회의 창설과정  792
1   한국교회의 창설배경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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