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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사의 전개
조회수 | 730
작성일 | 10.08.28
서울 명례방에서 창설된 한국 천주교회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 등을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해 나갔다. 그리고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은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고, 유항검은 전주에서 신앙을 전파해 갔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기쁘게 실천해 나갔고, 교회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온 힘을 바쳤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천주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1785년 봄에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적 신자들이 종교 집회를 가지고 있을 때 형조의 관리들에게 검거되었다. 그러나 당시 형조는 양반들의 범죄를 다스릴 수가 없어, 체포된 양반 출신 신자들 대부분은 방면되었다. 그렇지만, 중인 출신인 김범우는 고문을 당하고 귀양 가 살던 중 고문의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그는 이땅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죽음을 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1786년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는 등 조직을 다져나갔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가성직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관하여 북경 주교에게 문의를 하고, 1790년에 도착한 북경 주교의 답변에 그 부당성이 지적되어 이 제도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아니하였다. 이 답변과 함께 북경 주교는 조선에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하고, 교회의 조상 제사 금지를 분명히 하였다. 조상 제사가 금지됨으로써 양반 출신 신자들 중 상당수가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조상 제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양반으로서 명망과 특권을 버리고, 친척과 동료로부터 버림 받게 됨을 의미하였다. 교회 창설 초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양반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탈락되어 나갔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에 순교하게 되었고, 그들의 순교는 양반층 신자들의 탈락을 더욱 촉진시켰다.

한편, 북경의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794년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였다. 중국인 성직자인 그의 노력과 신자들의 열렬한 전교 활동으로 교회는 크게 발전하고 신자수는 1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신자들은 주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신자들은 명도회(明道會)와 같은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鐘)이었다. 그는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교요지」(主敎要旨)란 제목의 교리서를 손수 편찬하였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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