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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교회
조회수 | 796
작성일 | 10.08.28
한국 사회는 문호 개방 이후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사회상의 여파는 천주교회에도 미치고 있었다. 즉, 개항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병인박해로 인한 파탄 상태에서 벗어나 점차 신앙의 자유를 획득해 나갔다. 개항 직후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에 선교사를 다시 파견하였다. 개항의 여파로 인해 조정에서는 개화를 주장하는 정치 세력과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지식인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1877년에는 평양에 척사기적비(斥邪紀蹟碑)가 세워졌고, 1881년에는 척사윤음(斥邪輪音)이 다시 반포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령이 전국에 포고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박해의 움직임은 개항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박해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계속 입국하여 흩어진 신자들을 다시 모으고(1880), 성당을 건립할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였다(1883). 1882년 서울에 본당이 창설된 데 이어 1890년대를 전후하여 제물포, 부산, 대구, 전주, 원산, 약현(현재 서울 중림동) 등지에 본당이 세워졌다. 샬트르성바오로수도회가 1888년에, 베네딕도수도회가 1909년에 진출하여, 한국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교회는 사회 사업과 교육 사업에 착수하였으며, 가난에 찌들린 신자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누에고치의 새로운 품종이나 포도 등 특용 작물의 재배 기술을 도입 보급시켰다.

개화기 한국 교회사에 나타나는 비교적 높은 신자 증가율은 신자들의 자발적 전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희생적 봉사가 이룩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일부 신자들 가운데는 교회의 그늘 아래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했거나 그 밖에 현세적 이득을 위해서 입교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발생한 “교안”(敎案: 신자와 지방 관리 또는 지방민 사이의 분쟁)도 상당수에 이르고 그 양상도 복잡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불행한 교안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 수 있다. 700여 명의 신자와 예비자들이 희생된 이 사건은 군대의 출동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의 원인을 검토해 보면 폭정에 대한 제주도민의 저항 그리고 정부 관리들과 결탁한 일부 신자들의 위압적 행동이 서로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행했던 사건의 마무리 과정에서 교회는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한 피해 보상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교회와 제주도민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오랫동안 치유되지 못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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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교회와 세계의 교회  [3] 965
10   한국교회와 민족  883
9   성장의 둔화와 교회의 진로  961
  개화기의 교회  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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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박해의 원인과 의미  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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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기 교회사의 전개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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