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교회법

교회사

공의회

문   헌

담화문

사목교서

♣ 현재위치 : 홈 > 문헌 자료 >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한국교회의 창설

한국의 격동기 교회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0 22.8%
성장의 둔화와 교회의 진로
조회수 | 960
작성일 | 10.08.28
한국은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총독부에서는 선교사에 대한 회유 정책과 함께 교회 활동에 대한 억압 정책을 전개해 가고 있었다. 즉, 교육이나 언론, 문화 관계의 입법을 통하여 교회 활동을 간접적으로 규제하고, 1915년에는 이른바 포교 규칙(布敎規則)을 제정하여 교회 활동을 직접 견제하였다. 포교 규칙에 의해 선교사나 성직자는 물론이고 공소의 회장들까지도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선교를 못하게 되었다. 또한 성당이나 공소의 신설까지도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고, 설립 허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 설립 이유나 유지 방법이 충분하다고 인정되어야 했다. 이 포교 규칙으로 본당 설립이 큰 지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헌병 경찰들은 포교 규칙의 시행 여부를 조사하고 감시한다는 구실 아래 수시로 교회에 출입하며 성직자와 신자들을 괴롭혔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총독부 당국에 포교 규칙의 철회를 강력히 요청하였으나, 3.1 운동 이후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불합리한 간섭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한편, 3.1 운동의 여파로 총독부는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으나, 이는 한민족의 말살을 목적으로 한 고도의 정보 정치였으며, 교회 활동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이 결코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교회는 민족이 해방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한일합방 당시 한국 교회는 73,517명의 신자가 있었고, 비교적 높은 신자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공언하는 총독부의 회유 정책 아래서 교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예견하며 교구를 분할하였다. 즉, 1911년 조선교구의 명칭을 서울교구로 바꾸고, 여기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관할 지역으로 삼는 대구교구를 분할 설정하였다. 그러나 교구 분할 이후 신자의 증가는 급격히 둔화되어 갔다. 즉,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19년 3.1 운동에 이르기까지 신자수의 연평균 증가율은 2.10%로서 개화기의 증가율 6.98%에 비해 현격하게 둔화되었다. 연평균 증가율 2.10%는 당시 인구의 자연 증가율보다 조금 웃도는 숫자에 지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로는 종교열의 감소, 종교 활동에 대한 일제의 규제, 민족의 장래에 대한 희망의 상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려 했던 교회 당국자의 태도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도 교회는 미미하게나마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새로 서품된 한국인 성직자들의 노력이 보태지고 있었다. 이미 1896년에 “예수성심신학교”를 마친 강성삼, 강도영, 정규하가 사제로 서품되었고, 1900년에는 한국인 사제 12명이 교회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0년에는 한국인 사제 숫자가 15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1944년에 이르러서는 한국인 성직자의 수가 132명으로 늘어나서,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 102명보다 선교 활동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1920년에는 베네딕도수도회에서 관할하는 원산교구가 새로이 설정되고, 여기에서 연길교구, 함흥교구, 덕원면속구가 분할되어 나갔다. 1927년에는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가 관할하는 평양교구가, 성골롬반외방선교회가 관할하는 광주교구가 1937년에, 춘천교구가 1939년에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1920∼30년대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에 대거 입국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인 교구장이 관장하는 전주교구가 1937년에 비로소 탄생되었다. 전주교구의 설정은 한국 교회가 선교사 위주의 교회 운영으로부터 한국인에 의한 교회 관리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교구의 증설과 함께 한국 교회에서는 각종 신심 활동과 문화 사업, 사회 사업들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나타냈다. 이때의 한국 교회에는 박해 시대 이래 계속되어 온 성체성사, 예수 성심,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강조되어, 매월 첫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첫첨례 5,6,7)에는 이러한 신심을 돈독히 하는 특별한 기도와 의식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의 교회에서는 자신의 자랑스런 전통을 이루고 있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무엇보다도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었다. 순교자 현양은 1925년에 거행된 한국 순교 복자 79위의 시복식 이후로 더욱 커갔다. 또한 1931년에 거행된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경축대회는 한국 교회의 뿌리와 전통을 재확인하고 선양하기 위한 행사였다. 식민지 백성의 하나에 지나지 아니하였던 당시의 신자들이 한국 교회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순교 복자에 대한 신심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문화 운동을 활발히 진행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교회는 중앙 출판부를 설치하여 문서 전교와 한국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톨릭 청년」, 「별」, 「천주교회보」, 「가톨릭 연구」(가톨릭 조선) 등 정기 간행물을 간행하여 신자들의 재교육과 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데에 활용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교회는 “가톨릭 운동부”를 두어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시도하였고, 소년 운동, 여성 운동의 분야에도 활발히 진출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의 발생은 한국 교회의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전쟁 기간에 많은 신자들이 징집과 징용을 강요당했고, 교회 시설은 침략 전쟁의 도구로 징발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는 미국의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아일랜드인 성직자들도 연금시켰다. 그리고 프랑스인 선교사들도 극도로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각 교구의 교구장마저도 일본인 성직자로 바꾸려 하여, 1942년에는 대구교구장 무세 주교가 사임하고 일본인 성직자가 교구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압력 속에서 노기남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일제는 한국 교회에 대해서도 황국화 정책을 강행하여 신자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25년 「교리 교수 지침서」를 통하여 신사 참배는 이단이므로 이를 금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신사 참배 문제로 교회와 총독부가 대립하는 동안, 일본 천주교회는 신사 참배가 종교 의식인지 국민 의례인지에 관한 정식 회답을 요구하고, 일본 정부는 신사 참배가 국민 의례의 일종임을 강조하는 답변을 하였다. 이 답변을 근거로 교황청은 1936년 일본 주재 교황대사에게 보낸 훈령을 통하여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허용하였다. 이 결정에 근거하여 한국 교회에서도 신사 참배를 용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었고, 이 때문에 수명의 성직자가 구속되기도 하였으나, 그 저항은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파에 비해 미약한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 통치가 막바지에 이르러 총독부는 한국 교회에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해왔다. 그들은 가사가 불온하다 하여 몇몇 성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교회에 대하여 반전 사상을 선전한다는 혐의를 씌워 신자들을 구속하기까지 하였다. 일제는 성당에서 바치는 공식 기도마저 일본어로 하도록 강요했고, 교회 출판물도 일본어로 간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황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도를 강요하고, 교회 내에 “국민정신총연맹”의 지부를 결성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한국 교회는 인고의 시기를 지내며 민족의 해방과 세계의 평화를 기도하고 있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참고)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1   한국교회와 세계의 교회  [3] 965
10   한국교회와 민족  883
  성장의 둔화와 교회의 진로  960
8   개화기의 교회  796
7   격동기 교회의 시대적 배경  945
6   박해의 원인과 의미  1099
5   신자들의 신심생활  862
4   순교자와 증거자의 시대  799
3   초기 교회사의 전개  730
2   한국교회의 창설과정  791
1   한국교회의 창설배경  619
1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