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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와 십자가
조회수 | 1,642
작성일 | 04.10.04
성탄 날 우리는 왜 저 초라한 구유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일까?
나를 구원할 구세주,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탄생하신 곳이기에?
구유 안에 눕혀 있는 저 무력한 아기 앞에 무릎을 꿇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기에?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면 '나'의 구원, '나'의 행복 이전에 고귀하신 하늘의 존재가 자신을 낮추어 비천한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면 인류의 행복을 위해 당신의 고귀함을 포기한 하느님의 애절한 마음 때문이다.
이 하느님의 마음 앞에 인간은, 위대한 구세주를 기다리던 인류는 드디어 초라한 구유에 탄생한 가련한 아기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
가난 앞에, 비천함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무릎을 꿇는 자에게만 구세주는 육화(강생)하여 탄생하실 것이다.

구유는 십자가의 다른 모습이다.
구유 앞에, 십자가 앞에 무릎 꿇으며 당신에게 물어 보라.
왜 당신은 괴로울 때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는가?
저 고통스런 십자가가 당신의 괴로움을 씻어 줄 수 있을까?
왜 울적할 때 고독할 때 저 십자가를 바라보는가?
저 외로운 십자가가 당신을 위로할 수 있을까?
저 절망의 십자가가 당신의 삶에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제 목숨 하나 구하지 못한 저 비참한 죽음이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할 수 있을까?
왜 사랑을 받고 싶을 때 저 십자가 앞에 꿇어 눈물을 흘리는가?
저 불행한 최후가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을까?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온갖 의문스런 물음들을 고스란히 안고 서 있는, 아니 세워져 있는 저 수동의 십자가, 누워 있는, 아니 눕혀 있는 저 수동의 주검....
그 앞에 우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왜일까?

인생의 비극은 어쩌면 저 초라한 구유 앞에, 저 고통과 슬픔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기를 피하고 저 불행한 죽음과 주검을 거부하려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행복은 무엇인가?
인생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저 십자가를 피하고 저 주검을 모면하는 것?
희생도 포기도 다 없애버린 인생에 핀 꽃은 과연 어떤 꽃일까?
사랑은 무엇일까?
십자가 앞에, 고통 앞에, 괴로움 앞에, 죽음 앞에 무릎을 꿇는 자만이 이에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희생이 사랑임을 알기에.
초라한 구유 앞에, 완전한 상처, 완전한 패배, 인간으로서 완전한 절망을 묘사하고 있는 저 십자가 앞에, 피에타 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만이 진정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평화를 기원할 수 있을 것이다. / 마산교구 이제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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