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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 구원받으려면 선행을 해야 하지 않는가?
조회수 | 1,696
작성일 | 09.09.05
이 질문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논쟁거리가 되어온 주제를 건드린다. 여기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기보다 선행을 함으로써 우리가 받는 대가라는 뜻이 강하다. 이런 태도는 선행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선행 또는 의로운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얻은 구원에서 흘러나온다.

만일 바오로가 윤리적으로 의로운 삶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서간의 그토록 많은 부분을 윤리 문제에 할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쟁의 핵심은 선행과 신앙에 따른 의화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오는가이다. 선행은 신앙에서 흘러나오며 그 외에 다른 방식은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올바르게 살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과 행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진보한다. 신앙과 행동은 나란히 가지만 은총은 신앙이나 행동보다 먼저 온다.

오늘날에만 이 주제가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신앙에 대한 바오로의 가르침은 사람들 사이에 오해의 소지를 남겼다. 야고보 서간은 믿음과 실천의 상호 관계에 대한 열띤 논쟁을 담고 있는데, 이는 바오로의 신앙 개념을 오해했거나 잘못 적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에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선행이 구원을 대가로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선행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고 요구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주겠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야고보가 바오로와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배타적 처지에서 바오로와 야보고가 논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바오로와 야고보를 오해하는 것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이끌고, 반대로 올바른 행위는 사랑에 뿌리내린 행동을 하는 사람들 안에 진실로 신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이 분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발생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분열은 다행히도 공식적인 교회 일치의 대화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1999년 10월 31일(종교개혁의 날), 루터교와 가톨릭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이 주제에 대한 상호 이해를 개괄한 선언문에 서명했다. ‘의화 교의에 대한 일치 선언’은 약 400년 이상 개신교의 종교 개혁과 그 후에 이어진 반종교개혁이 낳은 깊은 견해 차이를 마무리하는 44개 공동 선언을 담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더 깊은 대화와 뚜렷한 설명이 필요한 몇 가지 개념에 대해 주의를 주긴 했지만 두 교파 사이에 공통된 신앙의 표현으로 선언문 출판을 동의했다. 민간 차원에서 벌어진 간격을 메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오늘날 성경의 연구 결과는 선입견 없이 바오로가 가르친 관점에서 문제를 보게 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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