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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 바오로는 왜 신령한 언어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조회수 | 2,653
작성일 | 09.09.05
바오로는 ‘신령한 언어’(공동번역은 ‘이상한 언어’-옮긴이)에 대해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신령한 언어는 성령의 선물이 아닌가? 바오로는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성령의 은사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현상을 반대한다. 잘못된 자랑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령한 언어’란 외국어가 아니라 기쁨이 흘러넘치는 상태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소리나 말’을 가리킨다.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성령의 은사의 목적이라는 포괄적 질문에 답변하면서 이 논제를 깊이 있게 설명한다. ‘신령한 언어’를 적절한 문맥에서 살펴보기 위해 12-14장에 소개된 코린토 공동체의 문제를 살펴보자.

바오로는 코린토 공동체가 파벌로 갈라진 것을 크게 우려했다. 공동체의 분열은 경쟁심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저마다 자신이 가진 성령의 은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바오로는 이런 은사들에 대해 세 가지 주요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모든 은사는 같은 성령에서 나오고 목적은 공동체의 건설을 위한 것이다.(1코린 12,4-11; 14,26; 로마 12,3-5) 따라서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둘째, 모든 성령의 은사가 중요하다. 가르침이든 예언이든 치유는 또는 신령한 언어든 진정한 성령의 은사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1코린 12,11; 로마 12,6-8) 따라서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을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 성령의 은사에는 순위가 있다. 모든 것이 참되지만 어떤 성령의 은사는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한다.(1코린 12,28-31)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신령한 언어와 같은 성령의 은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설명할 수 없는 영적 현상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며 공동체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데서 이런 태도가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모든 성령의 은사가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으나 장엄한 사랑의 찬가(13장)에 표현된 것처럼 으뜸가는 은사는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은사를 완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다면 신령한 언어는 어디에 사용되는가? 바오로는 예언이 신령한 언어보다 더 중요한 은사라고 말한다.(14,2-5) 신령한 언어의 본래 목적은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지만 예언의 목적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령한 언어란 인간의 소리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성령의 탄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바오로가 신령한 언어 현상을 적절한 문맥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령한 언어가 자신보다 공동체를 가르치거나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쓰여야 함을 알고 있었다. 신령한 언어르 f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위대한 분이심을 드러내지만 다른 은사들보다 우월하지는 않다.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보다 신령한 언어를 더 잘 말할 수 있지만, 공동체를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해할 수 없는 신령한 언어로 일만 마디를 말하느니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를 말하겠다고 고백한다.(1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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