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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무조건 하느님 앞에 나가자.
조회수 | 242
작성일 | 17.09.20
[인천] 무조건 하느님 앞에 나가자.

몇 년 전에 이집트의 시나이 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갔다가 시나이 산에서 일출을 보고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었지요. 힘들게 정상에 올라갔고, 그곳에서 우리는 일출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해가 빨리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기다림의 시간은 매우 지루했고,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추워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큰 소리로 “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나이 산의 정상에서 바라 본 일출은 너무나도 멋졌습니다. 하지만 일출은 너무 짧아서 기다린 시간에 비해서 너무나 빨리 순식간에 지나가더군요. 그래도 일출의 짧은 그 순간을 보고 나니 얼마나 흐뭇하던 지요. 정상까지 올라갔던 그 시간들이 아깝지 않았고, 춥고 배고프고 졸렸던 그 순간 역시 멋진 일출의 모습을 보고 난 뒤 다 잊어졌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렇지 않습니까? 영광의 한 순간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시련을 잊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가득할 때에는 시간이 참으로 늦게 지나가는 것처럼 생각되지요. 하지만 기쁘고 즐거울 때에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까요?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하루이지만, 나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특히 고통과 시련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싸움을 포기하고 병자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하려하고 또 자신의 일을 남들이 대신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어떻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앞을 헤쳐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은총과 사랑도 충만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조금 불공평하게 일당을 주는 주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주인은 이른 아침에 온 일꾼이나, 9시, 12시, 3시, 그리고 5시에 와서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 역시 똑같이 하루 일당을 나누어주지요. 세상의 눈으로는 정말로 불공평한 처사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주인이 나눠주는 일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즉, 이 품삯을 받아야 하루를 온전히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이지만 그 역시 일 데나리온의 품삯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품삯을 조금만 준다면 그 일꾼은 다음날 쫄쫄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도 오늘 독서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해주시지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상태로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무조건 하느님 앞에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 일꾼들이 그 선한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냥 아무 일 없이 공치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 근처로 나아갔기에 눈에 띌 수 있었고, 공평한(?)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무조건 하느님 눈에 띌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1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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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우리가 주님을 따라 걸어가는 ‘신앙의 길’은 참으로 멀고 험합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 있는 참된 영광의 빛을 찾아 우리는 계속해서 걸어갑니다. 때론 지쳐 쓰러지기도 하지만 나를 잡아 일으켜주는 손길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손길이며 동시에 ‘희망’의 손길입니다.

이 길의 끝에서 내가 얻게 될 부활의 영광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닌 희망입니다. 우리가 지닌 이 희망을 언제나 잃지 않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저는 기도합니다.

본당에서 지나가다가 가끔 듣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나도 그랬었는데 그건 별거 아니야" “내가 신앙생활을 몇 년째 하는 건데"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혼자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제 상태입니다. ‘세상에선 2년차 사제로서 살아가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선 어떠한 모습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선 아직 기어 다니는 어린아이일수 있고 걸어 다니는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나는 지금 어떠한 모습인가’ 하는 것이,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저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하나의 물음입니다. 신앙생활을 10년 15년 20년 동안해도하느님께서 보시기엔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사람과 같은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더 부족한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많은 활동을 해도 사회에서 사악한 모습으로 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요.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당에서 아직은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하고 미사만 드리고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천천히 배워가고 있지만,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봉사하고 도와주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오히려 이 모습이 하느님에게는 더욱 큰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선 더욱 그러하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포도밭 임자로 비유하면서 말씀하섭니다. 밭 임자와 일꾼들은 모두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하죠. 일찍 온 사람도,늦게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일찍 온 사람들 이 투덜거립니다. 고생한 자신들과 똑같이 대우를 해 준다고 말이지요. 자신들은 건강하고 체력이 좋아서 아침부터 불려나왔는데,저 사람들은 약해보이고 아무도 데려가지 않아서 남아 있다가 뒤늦게 불려나온 것이라서 자신들이 저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싫은 것이죠. 그래서 밭주인에게 투덜거립니다. 이에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같은 데나리온을 받겠다고 합의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나는 하느님의 진리를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아무리 오래한 사람일지라도 어린애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나를 어린아이로 인정하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는 더 좋아보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시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 했다고 해서 더 많이 주시는 것도 아니고,짧게 했다고 해서 더 적게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더 오래 하고 더 많이 했는데 왜 나에게는 이만큼밖에 주지 않으시는 것인지 투덜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변하는 시간이 아니라,변치 않는 우리의 모습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더 예쁘다고 해서 더 많이 주시는 것도 아니고 누가 덜 예쁘다고 해서 덜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시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시기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당신의 자녀로서 모두가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제 눈은 높지 않습니다. 저는 거창한 것을 따라 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 부터 영원까지."(시편131)

▥ 인천교구 김도휘 시몬 신부 - 2017년 9월 24일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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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조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집단의 압력에 따라 개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명확한 답을 알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사람들에게 틀린 답이 답인 것처럼 대답하겠습니다. 처음에 몇몇 사람들은 오답을 말하는 사람들을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역시 틀린 답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해서 틀린 답이 정답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저 역시 그러한 체험을 하나 했습니다. 식당에 갔는데 소위 미식가라는 소리를 듣는 한 사람이 반찬 중의 하나를 가리키면서 약간 상한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 역시 살짝 맛을 보더니 “상한 것 맞네.”라고 동조합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호기심 많은 또 다른 사람 역시 상했다고 말했고, 몇몇 사람은 아예 그 반찬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인에게 살짝 물어본 결과 반찬인 나물이 원래 쌉쌀한 맛이 날 뿐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조현상의 핵심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같은 답을 할 때, 그 상황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서 이를 실험했는데, 다른 의견을 가진 소수 집단이 있는 경우 점점 감소해서 동조율이 75%까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지만, 무조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옳다면 사회적 압박을 뚫고서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선택을 통해 이제까지 불합리한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압박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못하면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밭에서 일하는 일꾼을 대하는 밭 임자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침부터 일한 사람, 그리고 계속해서 아홉시, 열두 시, 세 시, 다섯 시부터 일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일당을 계산하는데 이 밭 임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나눠줍니다. 이 모습을 그 누구도 정의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한 양이 다른데 똑같은 임금을 준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밭 임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밭 임자는 당시 사람들이 하루를 먹고 살기에 필요한 한 데나리온을 줘야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에 기초로 생각하시고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소수 집단이라도 형성되어진다면, 점점 세상 사람들이 바뀌고 세상 전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7년 9월 24일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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