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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 사랑의 셈법
조회수 | 235
작성일 | 17.09.20
[수원] 하느님 사랑의 셈법

많은 사람이 정의를 말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한만큼 능력만큼 그에 합당한 보수 혹은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의 골자입니다. 세상의 냉정한 셈법으로 이 말은 분명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지나치게 내 몫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면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자비’라는 더 소중한 보물은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멈추어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리고 훗날, 연민과 자비를 잃고 나서 내게 남아 있을 것이 정의 말고 또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한 사람도 품을 수 없을 만큼 좁고 차가워진 마음과 누구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날카로운 시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20,7). 이 짧은 대답 속에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의 절망과 희망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에 아무런 보탬도 쓸모도 되지 못하고 있는 존재라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할 수 있고 그래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존중받고 싶은 간절한 희망이 이 한 마디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희망을 눈여겨보시며 응답하십니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경쟁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에서 소외되고 배척받고 있는 한 인간을 연민의 마음으로 품으시며 건네신 따뜻하고 자비로운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존귀한 존재이며, 세상의 기준과 평가를 넘어선 고유하고 존엄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생각은 언제나 세상의 논리와 방식에 이끌려 사는 사람의 생각 위에 드높이 있기에(이사55,9 참조), 그분 앞에 그분 안에 있을 때 우리 삶의 참 가치와 정체성을 되찾게 됩니다. 그런 하느님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한 데나리온(마태 20,9 참조)’의 품삯입니다. 이는 경제논리로는 분명 불의함 혹은 부당함이지만, 한 사람 한사람이 존재 자체로 존엄하다는 ‘하느님 사랑의 셈’으로는 의롭고 정당한 품삯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하느님 사랑의 셈법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셈법을 따른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그분의 ‘너그럽고 자애가 넘치는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 곧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수고하고 받은 품삯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다른 사람의수고와 삶을 두고 시기하거나 투덜거리지 않고 인정해 주는 넉넉한 마음, 누구든지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한 모든 수고와 열심과 희생의 합당한 몫을 주님을 통해서 흡족하게 받을 수 있다는 든든한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나의 바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 4,21.23 참조)’ 라고 한 바오로 사도처럼, 자기 삶의 목적과 충만한 가치가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채워질 수 있는지를 알아 복되게 살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강희재 요셉 신부 - 2017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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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시는 주님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고 무한히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는 은총은 그분의 사랑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제1독서: 이사 55,6-9: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제1독서에서는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가게 될 행복감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의 표지가 드러나기를 바라시면서 마음의 ‘회개’를 요구하신다.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감정은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고향에 돌아온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으로 정치적이 아니라, 종교적 사건인 것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그분의 모습을 만나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회개’는 적극적으로는 ‘주님을 찾는 일’(호세 5,6; 아모 5,4참조)이며, 소극적으로는 ‘죄를 떠나는 일’(7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역사적 사건의 ‘영적인’ 차원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그들의 생각과 삶을 바꾸라고 권고하신다.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8절).

복음: 마태 20,1-16: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요?

오늘 복음 역시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가치판단과 행동이 완전히 다른 분이심을 전해주고 있다. 모든 일꾼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주인의 행위는 더 오래 일한 사람들에게 불평을 야기하고 있다. 이 비유를 보면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각기 다른 시간에 불러들이고 있다.

주인은 그들에게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였다. 그리고는 12시와 오후 3시쯤에 그리고 오후 5시쯤에도 그와 같이 하고 있다(1-7절). 이렇게 하루 종일 일꾼을 부른 것은 일이 급해서였겠지만, 일하는 시간은 완전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막판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12절) 사람도 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주인은 관리인을 시켜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한 데나리온씩 주게 한다. 그래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계약한 것보다 더 받으리라 기대를 하지만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되어 실망을 함과 동시에 불평을 털어놓는다(8-12절). 그러나 주인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 불평을 일축한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3.15절).

주인의 행동은 계약상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 주인의 ‘선한 마음’은 더 많이 일한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의 ‘선성’이 차별을 야기한다면 그것 역시 ‘불의’의 한 형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주인의 ‘의로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행위는 우리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고 완전히 무상적이며 모든 장벽을 없애시고 요구보다는 항상 무엇인가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도 사실은 주인의 초대에 의한 것이며, 그들이 더 많이 일했다면 그 자체가 은총이며 자비 때문이기에 그 원망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배척받고 소외당했던 사람들을 받아들이셨다. 반면에 사회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제쳐놓으신 것 같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지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그리하여 어느 때라도 모든 사람이 당신의 포도원에 들어오도록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당신 자신을 변호하신다. 그러나 마지막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 때문에 먼저 온 사람들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그들의 특권의식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탕자인 작은 아들에게 큰 배려를 하지만, 이 때문에 큰아들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았다.

초기 교회에서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오늘의 비유는 이에 대한 ‘교회론적’ 의미를 취하고 있다. 마지막 ‘시간’에 온 사람들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을 말하며, 무엇인가 더 보상을 받고자하는 먼저 온 사람들은 유다인들을 말한다. 복음사가는 그들의 헛된 주장을 무시하고,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한다.

하느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그분 앞에서 특권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마지막 자리에 두실 것이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16절). 어떤 면에서는 유다인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무상이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나 공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중요한 것은 일이나 봉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과 신뢰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수고에 대한 어떤 보상을 요구하는 입장에 있게 된다면, 우리는 ‘자녀’가 아니라, ‘고용된 일꾼’의 신분이 되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의 멍에를 지고 만다.

제2독서: 필립 1,20c-24.27a: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자신의 영적 특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의 포도원에 늦게 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구원이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로마 9,16)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를 사도로 불러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될 때, 즉 주님의 사랑에 완전히 잠길 수 있을 때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어떤 장벽으로도 막히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자신을 깨닫는 것이다. 바오로는 여기서 더 형제들에게 보다 유익한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는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무상적 사랑이 바오로 사도로 하여금 형제들을 위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치도록 강력히 부추기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사람들도 특별한 상급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느님만이 주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상급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하느님의 무상적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보상이나 특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형제들을 위해 살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기도하여야 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17년 9월 24일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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