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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은혜로운 하느님
조회수 | 148
작성일 | 17.09.24
[수도회] 은혜로운 하느님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오늘 말씀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자비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말합니다.“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또한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 지를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비유에는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첫째>는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인다는 점입니다.<둘째>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준다는 점입니다.<셋째>는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서,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서민가정의 하루 식비였다고 합니다.

밭 임자가 품꾼을 구하러 아침 9시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한 일꾼들이 있어서,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12시, 3시, 5시에도 일이 없어 서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보내어 일하게 합니다.

이처럼, 포도원 주인은 도대체가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의 실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계산이라고는 아예 모릅니다.사실, 이는 주인이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이라기보다, 그들을 살게 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불쌍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어진 은총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인 것입니다.
주인은 저녁에 품삯을 주면서, 늦게 온 사람들에게서 시작하여 아침 일찍 온 사람들까지 같은 일당을 쳐 줍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관념으로 보면,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굳이 늦게 온 이들부터 같은 품삯을 주는 이유는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비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능력이 없는 까닭에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꼴찌”가 먼저 자비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느님님의 자비는 우리의 공로에 준해서 베풀지는 것이 아니라 자비가 필요한 곳에 먼저 부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포도원 주인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먼저 온 품꾼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는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던 것입니다. 사실, 주인은 품삯을 셈해줌에 있어서,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셈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베푸심입니다.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이유’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온 이든, 나중 온 이든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인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2-13)

사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첫째라고 뻐기거나, 혹은 꼴찌라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할 일입니다. 우리의 가멸은 처지를 슬밉다 하지 않으시고, 비천한 신세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일에 있어 첫째가 되어야할 일입니다.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7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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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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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순간순간입니다.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희생을 딛고 우리가 존재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가지 않기에 직접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여전히 포도밭 바깥에 있는 우리를 포도밭 안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주님을 통해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싹트게 됩니다.

우리가 합의한 한 데나리온은 가장 좋으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힘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이른 아침과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모두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에게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 나라는 허송세월로 하루를 보내는 우리들에게 삶의 가치를 만나게 합니다. 모두에게 똑 같이 준한 데나리온에서 주님의 마음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힘들게 주어진 이 소중한 하루에 진정 감사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이 하루는 생명의 예수님께서 당신 생명을 빌려주신 소중한 하루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7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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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은총은 본래 후한 법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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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 연중 제 25 주일은 정의와 공평에 대한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차이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오늘 본기도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늦게 온 일꾼이나 일찍 온 일꾼이나 똑같은 품삯을 주시어 아버지의 길은 저희 길과는 크게 다름을 드러내시니,”

그런데 이런 하느님, 곧 당신 포도밭에 일찍 와 일하거나 늦게 와 일하거나 똑 같이 품삯을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아예 의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는 잘해주고 누구에게는 잘못해주는 것만 공평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잘해주고 모두에게 후해도 공평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온갖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났는데 비해나는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것이 공평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는 하느님이 똑같이 주셔도 공평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내가 더 많이 했는데도 똑같이 주셨다고 생각키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생각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내가 더 많이 일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내가 더 많이 했다고 생각지만 누가 더 많이 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고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설사 내가 더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적게 했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품삯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품삯은 은총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상선벌악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와 빛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긴 하지만 빛을 거부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그 은총과 사랑을 받아 살아간 사람과 거부하고 반대의 삶을 산 사람이 똑같은 상과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은총과 사랑을 거부하고 죄와 악의 삶을 거듭하던 사람이 뒤늦게라도 회개하고 은총과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때는 같아집니다. 은총과 사랑을 먼저 받고 산 것과 늦게 받고 산 것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태중교우로 일생 십계명 어기지 않고, 다시 말해서 죄 짓지 않고 사느라 일생 쪼들리며 고생고생하며 살았는데 일생 맘대로 흥청망청 살다가죽을 때 세례 받고 죽는 사람이 똑같이 천당에 간다면 공평치 않다고. 일생 이렇게 산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참으로 불행하게 신앙생활 한 것입니다. 은총과 사랑의 삶을 누구보다 일찍 산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계명과 의무의 삶을 힘들게 그리고 억지로 산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살아야 합니다. 계명을 살지 말고 은총을 살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 것이 아니라 그저 은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은총을 살고자하면 은총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 은총을 살 수 있는지 알아야겠지요.

우선 은총은 공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총은 나의 공로와 노력과 정성의 대가가 아닙니다. 사실 아무리 열심히 산 사람일지라도 죄인 아닌 사람 어디 있고 하느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은총은 본래 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공짜로 주시고 사랑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언제나 후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아침부터 아버지의 포도밭에서 일한 수고가 헤아릴 수 없는 영예임을 깨닫게 하소서.”라는 본기도처럼 이 은총을 일찍부터 살게 된 것을 영예와 행운으로 생각하며 살도록 합시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레오나르도) 신부 - 2017년 9월 24일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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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늦게라도

우리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루 이틀 하고 끝낼 그 무엇이 아니라,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할 긴 여행길, 즉 여정(旅程)입니다. 여행하다보면 힘겨운 오르막길이나 만만치 않은 돌밭길도 만나지만, 때로 평탄한 지름길이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길’도 만납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 뜨거운 사막도 거치지만, 때로 가슴이 확 트이는 천국같은 초원도 만납니다. 활활 타오르는 꽃같은 젊음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급격히 쇠락하는 노년의 순간도 맞이합니다.

주님 뜻에 맞갖은 정직하고 충실한 길만을 걸어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때로 그릇된 길로 접어 들어 갖은 방황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아주 늦게야 주님을 만나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대체로 의기소침해하며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주님도 무심하시지. 왜 이토록 늦게야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가? 이토록 늦은 나이에 이런 방향 전환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포도밭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오전 6시에 온 일꾼들에게도 하루 일당 10만원을 지불해주시지만, 오후 세시뿐만 아니라 오후 5시에 일하러온 지각생 일꾼들에게도 똑같이 일당 10만원을 손에 쥐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늦게라도 주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그분의 포도밭을 향해 초스피드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감지덕지하게도 똑같은 일당을 주시는 주님께 백번 천번 감사드리며,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주님 보시기에 멋지고 아름답게 계획하고 장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노화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됩니다. 각 가정에서는 급격히 늘어난 수명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합니다. 수도회·수녀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거의 모든 수도회·수녀회들이 회원들의 노령화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분주합니다.

노년기에 직면해야 하는 도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예측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삶의 기쁨이나 희망은 급격히 감소되어가는 반면, 고통과 외로움, 슬픔과 번뇌는 점점 커져감을 실감합니다. 몸도 예전같지 않아 이런 저런 질병에 시달립니다.

인생의 무대에서 물러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힙니다. 하루하루 뭔가가 내 안에서 소멸되어간다는 느낌에 우울감도 커져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란 존재의 사라짐,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네 삶과 신앙생활 전체를 흔들어놓습니다.

생각할수록 헛되고 허무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란 것을 파악하고 실망하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이승의 삶을 얼마나 불꽃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원 없이 달릴 곳을 다 달렸으면, 이런 고백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살든지 즉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곧 이득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리피서 1장 20~23절)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어떻게 이런 고백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그리스도를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고,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물렀기에 그런 용감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지상의 것을 줄이고 천상적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상에서부터 천상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용감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스테파노) 신부 - 2017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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