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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론이란 무엇인가?
조회수 | 28
작성일 | 17.11.29
▥ 강론이란 무엇인가?  

『웹스터 어휘백과사전』(New Lexicon Webster’s Encyclopedic Dictionary)은 강론(homily)을 “영적 가치들을 실제적인 주제들에 연결시켜 논의하는 설교”로, 설교(sermon)를 “신부나 목사가 회중을 가르치거나 회중에게 권고할 목적으로 하는 연설”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두 단어의 의미를 서로 바꾸어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학자들과 교회 문헌들이 내린 정의에 따르면, 설교는 그 성격이나 형식상 가르침이나 강의에 가까우며 강론은 권고에 가깝다. 그러므로 강론은 몇몇 실재들을 ‘논의하는’ 담화체로 전달되는 유익한 대화이다.

몇 해 전에 나온 미국의 『새 가톨릭 백과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 제13권은 설교를 “교회 기능과 관련된 모든 훈화나 연설”로 정의했다. 따라서 ‘설교’는 더욱 포괄적인 의미로서, 강론, 성서에 관한 해설, 또는 신앙과 도덕, 전례에 관하여 연단에서 하는 가르침 등 여러 형태가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같은 책 제7권은, 강론에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나누는 대화나 모임 앞에서 하는 격식 없는 연설의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 강론은 훈화

신자들에서 사제에 이르기까지 요즘에는 일반적으로 설교와 강론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 듯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강론’은 연단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연설을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가 된 반면, ‘설교’에는 이보다 더 긴 강의나 교훈적인 연설이라는 의미에 다소 경멸적인 어조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어떤 신부가 어떤 자료를 준비하여, 연단에서 얼마나 길게, 어떤 주제에 관하여 말하든지, 자신은 그것을 강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도 여전히 ‘설교’ 자리에 ‘강론’이라는 말만 넣어 신부들과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다.

“신부님, 제가 어떤 책에서 읽었더니 좋은 강론은 서론과 결론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이 둘이 서로 아주 가까워야(close) 한다고 하더군요.”

“신부님, 강론 참 좋았습니다. 3분밖에 안 걸렸고요. 하긴, 짧은 강론 치고 안 좋은 강론이 있나요?”

‘설교’도 이런 식으로 계속 농담의 소재가 된다.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 설교(Sermon on the Mount)가 가장 유명한 설교 아닙니까? 그런데 신부님들은 주로 돈에 대해서만(on the amount)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강론(homily)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homilia(명사형), homileo(동사형) (부정사형은 homilein, 루가 24,14; 사도 20,11; 24,26 참조)에서 왔으며, 훈화, 대화, 또는 격식 없는 담화나 가르침을 뜻하는 한편, ‘말씀(logos)’이나 형식을 갖춘 연설과는 구분되며,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설교와 그리스도교 저술들을 볼 때, 강론은 영혼의 목자가 그의 보살핌에 맡겨진 사람들에게 하는 격식 없는 훈화, 전례문에 따른 전례 행위 안에서 하는 담화체의 훈화이다. 이것이 적어도 2세기에 유스티노 성인이 미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서기 150년에 그가 자신의 설명을 강론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처음 등장하는, 초기 교부들의 저서에서 보이는 참된 강론의 특징이다.

매우 사목적이며 동시에 매우 성서적인 이러한 형태의 설교는 우리 시대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서기 150년에 유스티노는 말씀 전례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주일에 도시나 시골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곳에 모여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전기와 예언서들을 읽는다. 독서가 끝나고 나면 (전례) 집전자는 이렇게 훌륭한 일들을 본받도록 가르치고 권고하는 말을 하고, 모두 함께 일어서서 기도를 바친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도가 끝나면, 빵과 포도주, 물을 가지고 나와, 역시 집전자가 기도와 감사를 바친다(Johannes Quasten, Patrology1, Westminster, Md., 1950년, 216-217면).

확실한 근거 자료는 없지만, 초기의 강론은 유다교 예식에서 성서를 읽은 다음 덧붙이는 설명의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교의 강론 형태는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었을 수도 있다.

유다교 예식의 일부였던 성서 해설은 더욱 교육적이고 설명적인 성격을 띤 반면(그래서 그 지도자는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불렸다), 그리스도교의 강론은 성서를 바탕으로 한 권고나, 성서를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에 더욱 초점을 두었다(『새 가톨릭 백과사전』, 제7권, 113면).

▬ 강론은 훈계

한 저자는 초기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설교에서 보이는 강론의 형태를 ‘권고의 말’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하고, 그러한 권고는 전형적으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부분은 본보기(exempla), 곧 대개 과거의 예나 성서를 인용하면서 요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다음 이러한 예들을 정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결론(conclusion)을 내리며, 마지막으로 청중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응답하거나 행동해야 하는 결과가 뒤따른다(The Anchor Bible Dictionary, 제3권, 281면 참조).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Homiletic and Pastoral Review에 실은 “강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글(1979년 8-9월호)에서 초기 강론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2세기의 유스티노 이후, 전례적 연설이 완전한 형식을 갖추게 함으로써 강론을 그리스도교 설교의 한 형태로 수립한 사람은 (3세기의) 선구자적 성서 신학자 오리게네스였다.

오리게네스는 거의 날마다 성찬 전례에서 설교를 하였으며, 담화의 방식으로 성서 본문을 설명하면서 그 안에서 영적 교훈을 이끌어내었다. 그 이후 교회 교부들의 황금시대를 거치는 동안 전례 강론은 언제나 매우 유익한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동서방 교회의 교부들의 강론이 실제로 그러했다. 대개 강론은 성찬 모임(eucharistic synaxis)에서 주교(또는 주례자)가 했는데, 동방교회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카파도키아 교부들, 곧 성 대 바실리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가 있었으며, (서방) 라틴 교회의 유명한 강론가로는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레오가 있었다.

교부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강론 중에 성서 본문뿐만 아니라 미사의 전례적 배경이나 축일, 전례시기에 대해서도 설명했으며, 이러한 관습은 지금도 교회 전통 안에서 전례 강론의 기본 원칙이 되고 있다.

교회는 초기 교회의 시대적 배경이 되었던 위대한 그리스로마 문명을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 시대의 형식적인 고전 수사학을 이용하여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오버만(J. Andrew Overman)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그리스로마 고전 수사학의 만남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우구스티노의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일 것이다.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설교자들이 지녀야 할 해석(해석학)과 강론학(방법론)의 기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The Anchor Bible Dictionary, 제3권, 281면)라고 쓰고 있다.

그리하여 3세기 이후 강론은 더욱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으며 이러한 유형의 설교는 교회 교부들의 강론에서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강론 경향은 12세기까지 유지되었으며,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가장 뛰어난 강론가 중의 한 명으로서 전례 강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뒤, 돌아다니며 설교하는 탁발 수도사들이 나타나면서, 강론보다는 주제별로 이야기하는 설교가 점차 더욱 우세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설교가 반드시 전례 본문을 근간으로 할 필요는 없다는 인식 때문에, 전례 설교의 개념은 점점 빛을 잃게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주교와 목자들에게 주일과 축일들에 설교하도록 지시하였지만 ‘강론’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으며 설교가 온전한 강론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고 암시하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든 축일과 대축일에 장엄 미사나 성무일도를 바치는 동안 모국어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계명과 구원의 원칙들을 설명하여야 하며, 불필요한 질문들은 삼가면서 이러한 것들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 주님의 법 안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트리엔트 공의회, 24회기, Decree Concerning Reform(1563년), Chap. VII,
H.J.Schroeder, O.P. Can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197-198면).

본당에서 주일 중심 미사의 설교는 그 날의 성서를 설명함으로써 어느 정도 강론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습과 설교하는 탁발 수도사들, 그리고 교회 교부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선례들 때문에 다른 미사들(심지어 모든 미사)의 연설도 성서에 근거를 두거나 교리교육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때로는 실제로 그렇게 장려되기도 하였다). 이에 1917년 교회법전은 참례자가 비교적 적은 미사들에서 설교자는 “복음이나 몇몇 그리스도교 교리를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권고하였다(『교회법전』(1983년), 제1344조 1항과 제1345조 참조).

▬ 성찬례에 대한 준비

강론이 비로소 그 진면목을 인정받게 된 것은, 유럽에서는 19세기 후반 전례 운동 때, 미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를 앞둔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전례학자들과 성서학자들, 신학자들이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의 내밀한 관계를 새롭게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강론은 이 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함을 다시 깨달았다. 다시 말해 강론은 고립된, 또는 삽입된 형태의 설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말씀 전례의 전례문은 우리가 성찬의 희생제사를 잘 거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기 위한 것으로, 이를 제대로 설명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그 역할을 다할 수 없다. 이러한 설명과 적용의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강론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거룩한 공의회」에서 이러한 강론학 개념을 재정립시켰다.

「거룩한 공의회」는 영혼의 사목자들에게 강론의 의무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강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재평가하고 증진시켰다. “전례주년의 흐름을 통하여 거룩한 기록에 따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들을 해설하는 강론은 전례 자체의 한 부분으로서 크게 권장된다”(52항). 강론은 “구원의 역사 곧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신비는 우리 가운데에 특히 전례 거행 안에 언제나 현존하고 또 작용한다”(35항). 따라서, 강론은 “전례 자체의 한 부분이다”(52.35항). 이것은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을 담고 있으므로 각종 전례서들의 머리말에도 그 지침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강론은 하느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 구원 역사, 그리스도의 신비를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강론은 아무 주제에 관해서 편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과 하느님의 계획,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 구원 계획의 선포여야 한다. 강론은 거룩한 신비의 거행이라는 생생한 맥락 안에 위치한 설교의 직무이다(『새 가톨릭 백과사전』, 제7권, 114면).

강론 자료들을 중요도에 따라 순서대로 꼽아보면 복음, 말씀 전례의 다른 성서들, 그 전례의 (또는 전례가 제안하는) 다른 본문들을 들 수 있다.

1983년에 개정된 『교회법전』에는 설교에 관련된 몇몇 조항들(특히 교회법 제762-772조)이 있다. 그 가운데에도 특히 1917년 교회법에는 없던 부분이 새로 추가된 교회법 제767조 1-4항은 강론의 성서적 전례적 토대와 설교의 권한을 강조하고 있다. 몇몇 교회법 해설가들은 교회법 제221조도 말씀에 대한 강론을 들을 수 있는 신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제274조도 참조). 교회법전은 또한 주교와 사제, 부제들은 지역 직권자의 마땅한 허가를 받으면 어디서나 설교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제762-765조).

▬ 강론에 관한 규범들

교회법 제766조를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평신도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필요하거나 혹은 개별적인 경우에 유익하다면, 주교회의의 규정에 따라서 성당이나 경당에서 설교하도록 허용될 수 있다. 다만 제767조 제1항은 보존된다.” (교회법 제767조는 강론을 사제나 부제에게만 유보함으로써, 평신도들이 강론이라는 특별한 형태의 설교를 통상적으로 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교회법 제766조는, 주교회의들은 교황청과 협력하여 평신도들에게 설교를 허용할 수 있는 규범들을 발표할 것을 상정하고 있다.

지침이 될 만한 교황청 문헌으로는 우선 1964년에 발표된 예부성성 훈령 Inter Oecumenici를 들 수 있다. 사제나 부제가 없을 경우 평신도들은 하느님 말씀의 거룩한 거행에서 강론을 읽도록 허용된다(37항).

1988년 경신성사성은 주교들과 주교회의들이 사제가 없을 경우 주일 기념을 위한 자체 지침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돕는 지침을 발표하였으며, 이에 따라 1994년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일련의 지침을 발표하였다.

이 지침에 따르면, 적절한 교육을 받아 임명된 본당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구장 주교(직권자)나 본당 사목구 주임이 쓴 강론을 읽을 수 있으며, “회중이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도록 독서에 대한 설명이나 독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짧은 침묵 시간을 마련하는 것”도 장려된다.

▬ 강론에 대한 제안

미국 주교회의의 지침은 서품된 이들만 설교하거나 고유한 강론을 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하는 한편, 사제나 부제가 없는 곳의 지역 공동체들도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몇 가지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지침은 사제나 부제의 부재를 다소 광범위하게 정의하여, 질병(목소리 상실까지도 포함하여), 기상 조건, 사목적 재량으로 판단한 비상사태까지도 포함시킨다. 이 지침의 이행 방법과 각 지역 교회의 상황 판단에 관한 권한은 각 교구장 주교에게 있다.

경신성사성이 1973년 11월 1일에 발표한 「어린이 미사 지침」 24항은 어린이 미사에서 평신도가 설교할(‘참여할’이 더욱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수 있는 특별한 경우를 규정한다. “어린이 미사에 참례한 어른들 중에서 본당 주임신부나 어린이 담당 신부의 승낙으로 복음 후에 어린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으며, 특히 사제가 어린이들에게 적합하게 해주지 못할 때에는 이러한 방법이 더욱 필요하다.”

여기서도 또한, 어린이 미사 강론이라는 특별한 종류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평신도가 어린이 미사에서 설교했다.”는 표현은 피해야 한다. 평신도에게 허락되는 부분은 매우 신중하게 정의되고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1997년 8개 교황청 여러 부서들이 공동으로 발표한 평신도의 사제 교역 협력 문제에 관한 훈령도, 강론은 전례 행위의 필수적인 요소이므로 성찬례 거행에서 강론은 서품된 이들에게만 유보되어야 함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 강론자들의 의무

또 다른 교회법 조항도 살펴볼 가치가 있다. “본당 사목구 주임은 사목구 내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선포되도록 배려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특히 주일과 의무 축일에 강론을 하고 교리교육을 전수함으로써 평신도들이 신앙의 진리를 교육받도록 보살펴야 하고 또한 사회 정의에 관한 것도 포함하여 복음 정신을 함양하는 활동을 격려하여야 한다”(제528조 1항).

이 조항이 암시하듯이, 본당 사목구 주임은 가르치는 사람이자 거룩하게 하는 사람이다. 이 말은 뜻하는 바가 크다. 본당 주임은 본당 사목구 안의 모든 사람을 복음화시킬 의무가 있다. 미국의 경우 미사 참례율이 계속 감소하는 추세이므로, 본당 주임은 편지나 방문, 그 밖의 다른 새로운 방법들을 통하여 주일 성찬례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이들에게 다가가 설교하여야 한다.

필요하다면 본당 주임신부는 전례의 완전성을 유념하면서 교리교육으로 강론을 보완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1994년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2033항에서 사목적 책임에 따른 이러한 허용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에서 강론에 관련된 중요한 조항은 65항과 66항이다.

65. 강론은 전례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스도교 생명을 양육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론은 그날 봉독된 성서의 내용 또는 미사통상문이나 그날 미사의 고유 전례문에 대한 설명이어야 한다. 강론을 할 때는 거행하는 신비의 특성이나 듣는 사람들의 특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66. 강론은 원칙으로 주례 사제 자신이 한다. (…) 주일과 의무 축일에 백성이 참석하는 모든 미사에서는 강론을 해야 하며 중대한 사유 없이 생략할 수 없다. 다른 날에도 더구나 대림시기, 사순시기, 부활시기 평일, 그리고 백성이 많이 참석하는 축일이나 특별한 기회에는 강론을 하는 것이 좋다.

1998년 개정판 『미사 전례 성서』에서 강론에 관한 24-27항은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거룩한 공의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교황 바오로 6세의 문헌들, 그리고 경신성사성의 문헌들을 한 페이지에 집약적으로 잘 정리해 놓았다.

▬ 두 가지 중요한 특징

교회 문헌들은 강론의 또 다른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암시하고 있다. 그 하나는 강론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윤리를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미사에서 강론은 그 이후에 이어지는 성찬 전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인 입교 교육이 입증해 왔듯이, 새 신자들에게 신비교육 시간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경이로운 신비를 접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중에서도 성사에 대한 내용은 그 정수라 할 만하다. 사실 일부 고대 문헌들에서는 ‘성사’ 자체를 ‘신비’로 일컬었다.

‘신비와 윤리’는 「거룩한 공의회」 35항에서도 언급된다. “강론은 구원의 역사 곧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신비는 우리 가운데에 특히 전례 거행 안에 언제나 현존하고 또 작용한다.” 또한 52항은 “전례주년의 흐름을 통하여 거룩한 기록에 따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들을 해설하는 강론은 전례 자체의 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강론의 신비교육적 성격은 성체신비 공경에 관한 예부성성 훈령 Eucharisticum Mysterium(1967년)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신자들이 배워야 할 점은 그 안에 전해진 오묘한 일들이 파스카 신비 속에서 절정을 이루고 이를 성사로서 기념하는 것이 미사라는 것이다. 이런 방법 곧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양육된 신자들은 감사 행위에 잠겨 구원의 신비가 주는 풍부한 몫에 다다르게 된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체를 이루는 제단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의 식탁에서도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보양한다”(10항).

우리는 성찬 전례와 관련지어 강론의 정의를 다시 한 번 내릴 필요가 있다. 미사 강론은 거행하고 있는 전례의 배경이나 그 전례문에서 출발하는 설교로서, 구원의 메시지, 곧 구원의 신비와 도덕적 원칙들을 듣는 이들의 필요에 연결시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성찬에 충만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이러한 정의와 관련해서 네 가지 결론 또는 요약적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다.

1) 미사 강론은 구원의 선포를 성찬 행위에 결합시키는, 최상의 ‘형태’의 설교이다.

2) 미사 강론의 주제는 매우 광범위하다. 물론 제1독서와 복음의 공통된 주제가 가장 중요하지만, 제2독서, 화답송과 감사기도(미사 통상문), 전례시기, 그날의 성인, 그 시점에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특별한 필요 등도 풍부한 설교 거리를 제공해 준다.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과 다른 교회 문헌들도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해 준다. 때때로 강론은 그날의 성서구절에 대한 설명보다는 전례의 ‘맥락’ 안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강론의 주안점이 선포에 있든, 신앙 선포(kerygma)에 있든, 교리교육에 있든, 그것은 하나의 유기적 부분으로서 말씀 전례에 연결되기 위한 것이다.

3) 미사 강론은 전례의 가장 창의적인 부분이다. 개정된 로마 전례는 다양성 안의 일치를 그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로마 전례의 고정적인 요소들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강론은 전례 발전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가변적 요소이다. 강론은 짧은 시간에 마음에 남을 만한 주제를 이해시켜야 하며, 성찬례에 잘 통합됨으로써 예식 전체가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한다.

4) 미사 강론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형태의 설교이다. (케이블 방송 종교 채널들의 혜택을 누리지 않는)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공적 설교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론은 매순간이 모두 중요하며 그 토대를 충실히 닦아야 한다. 강론에 신비교육적 방향을 설정하는 것, 곧 미사의 성찬 부분을 지향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다면, 모든 강론을 마칠 때마다 성찬 전례에 대한 특정한 언급을 해야 할까? 어떠한 말로 연결하든 맥 빠지고 지루하게만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가령, 미사의 성찬 전례의 한 구절을 설교(또는 강론) 안에 넌지시 언급하거나, 고유한 강론과는 별도로 신자들의 기도 때나 감사송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신비교육에 관련된 언급을 매주 같은 신자들에게 할 필요는 없으며, 때때로 상기시키는 선에서 하는 것이 좋다.

강론자들이 피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강론 주제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광범위한 입장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 동안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계획하지 못하면 설교자는 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인 생활의 지침이 되는 원칙들을 다 언급하지 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지나친 설교 계획이 전례를 갑갑하게 만들 수 있다면, 완전한 무계획 또한 복음의 축소로 나타날 수 있다. 강론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일정 부분 조금씩 꾸준히 제시하는 것이다. 풍부한 전례 성서와 주제별 성서 구절들이 있지만, 연설을 통해 (우리 신앙의 신비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일 수 있으려면 3년 단위의 전례주기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강론에 관한 일종의 마스터플랜을 세우고자 하는 교구 직권자나 본당신부들은 그러한 계획에 대한 훈령 Inter Oecumenici(55항)의 규정과 더불어, 강론은 전례의 한 유기적 부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정 기간에 대한 미사 설교를 계획할 때에는, 전례주년의 주요 시기와 축일들과의 밀접한 관계, 곧 구원의 신비와의 관계를 조화롭게 보존하여야 한다. 강론은 그 날의 전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 강론자들을 위한 자료

몇 해 전, 미국 주교회의 ‘사제생활과 직무 위원회’는 주일 강론과 관련하여 설교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승인받았다. 그 결과물인 1982년 문서 “경청의 의무: 주일 미사 강론”은, 강론학자들에게 중요한 네 영역, 곧 회중, 설교자, 강론, 강론 방법론을 간략하지만 알차게 다루고 있다.

강론 방법론 부분에는 실용적인 조언들이 가득하며, 강론을 준비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들을 매우 실제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시간 : 일주일에 걸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② 기도 : 준비 과정을 충만하게 해준다.
③ 공부 : 성서 주해, 영적 독서, 교양 독서 등
④ 구성 : 생각을 종합 정리하고 이에 따라 원고를 작성하고 수정한다.
⑤ 구체화 : 모호한 일반화나 지나친 전문 용어를 피하고 구체적이 되도록 한다.
⑥ 평가 : 일정한 절차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건설적인 의견을 수용한다.

지금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설교가 사제들의 중요한 임무이며, 교회의 사명 자체의 필수적인 한 부분임을 강조해 왔다. 강론자들은 이제 설교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위에서 간추려 소개한 여러 문헌들을 고려하면서, 풍부한 지침을 활용하여 새로운 확신을 안고 세상 끝까지 선포하러 나서야 한다.

▤ 마이클 웬싱 미국 브루킹스 성 토마스모어 본당 주임신부

원문__ Michael Wensing, “A Homily is not a sermon”, The Priest, 2004년 2월호, 13-20면, 최문희 편역.

▥ 좋은 강론을 위한 열까지 조언

1.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능력, 은총에 집중한다.

강론자들은 강론 시간에 자주 도덕적 훈계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신자들이 도덕적이고 덕을 갖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능력과 은총으로 이끄는 것은 소홀히 한다. 우리는 종종 강론에서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힘 있고 분명한 선포가 빠져있음을 발견한다. 강론자는 도덕적 질문에 비추어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선포하는 것은 자주 잊어버리게 된다. 신자들이 죄와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향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히 베풀어주고 계신 그분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격려한다.

2.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격려한다.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쉽지 않다. 매일의 삶 안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분을 따르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강론에서 손쉽게 얻는 은총과 편안한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과 인격적이고 신뢰 있는 관계를 맺으며,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도록 격려하라. 이를 통해 신자들의 삶이 변화하고 그들 가정의 유대와 본당 공동체의 삶 또한 돈독해질 것이다.

3.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살아있도록 한다.

이레네오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있는 사람을 통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세례성사와 성사생활을 통하여, 또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매일매일의 결심들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살아있게 된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이웃 안에서 온전히 살아있도록 격려하라. 그리스도 안에 살아있는 생활을 통해 삶이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4. 모든 강론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신자들은 재미를 얻으러 성당에 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힘을 얻고자 온다. 영화나 신문을 통해 얻은 이야기, 친구와 가족의 이야기 등을 너무 많이 인용하다 보면, 복음의 요점과 상관없이 다른 길로 빠지거나,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 이야기가 적절히 들어맞고 훌륭한 요점을 가졌을 경우에만 사용하라.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다음과 같은 예들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5. 성인들의 삶을 예로 든다.

성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교훈적이다. 옛 성인에서 현대의 성인들까지 많은 성인들의 삶이 좋은 예가 된다. 미사 전례서 안에 등장하는 훌륭한 성인들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어떠한가? 미사의 감사기도를 통해 듣게 되는 그들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과 사랑의 모범은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6. 선택된 민족을 통한 하느님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한다.

주일미사의 첫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인류 안에서 한 민족을 어떻게 그분의 곁으로 불러모으셨는지를 회상하게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 야곱, 신실한 룻, 토비트와 안나 등 사랑받는 믿음의 선조들을 잊지 않도록 한다. 또한 훌륭한 이야깃거리들을 찾아내고 싶다면 고대와 중세(또는 현대) 랍비들에게 눈을 돌려보는 것도 좋다.

7. 신심 서적을 읽도록 격려한다.

강론에서 성인들의 전기와 좋은 영성 서적들에 대해 언급한다. 덧붙여 어떻게 그 책들을 구할 수 있는지 자세한 정보도 제공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리 계획을 세워둘 필요가 있다.

8. 성서를 읽도록 격려한다.

성서를 읽기 쉽도록 잘 보이는 곳에 두도록 하며, 날마다 읽을 것을 권고한다. 이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강론이 더욱 성서적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전례에서 사용된 성서 본문을 바탕으로 하되, 다른 구절들도 인용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성서를 가까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9. 사회 정의를 실천하도록 한다.

적절한 기회에 이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아모스서나 야고보서가 봉독되는 날에 이에 대해 중점적으로 강론할 수 있다. 신자들이 본당활동이나 사회봉사를 통해 가난한 이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정의와 그 중요성에 관해 언급한다.

10. 강론이 길어진다고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요한 내용이나 결론이 남았는데도 급하게 강론을 끝내지 않도록 한다. 그렇게 해야 미사성제와 하느님의 말씀, 훌륭한 강론으로 풍성해진 신자들은 미사가 끝나고 “가서 복음을 전할” 준비를 제대로 갖출 수 있게 된다. @ 안토니 보스닉(미국 바오로 가톨릭 복음화협회 국장)

원문__ Anthony Bosnick, “Ten Tips for a Good Homily”, The Priest, 1999년 7월 호, 39-40면, 이준혜 기자 편역.

▥ 강론자의 세 가지 임무

“…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1데살 2,13).

예전에 필자는 강론자를 요리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요리사는 식품 저장고와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고(성경 본문), 식단을 정하여(중심 생각) 음식을 만든 뒤(강론), 이를 제공한다.

그러나 필자가 좀 더 다르게 이해하게 된 점은 바로 강론자는 이미 만들어진 음식이 있는 부엌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 음식들은 주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것이다. 전례는 식단, 조리, 차림을 포함한 주님께서 마련하신 식사이다. 우리는 주님을 거드는 사람이다. 강론자를 포함한 전례 집전자들의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돕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전례 기도의 인도자이시기 때문이다. 강론을 준비하면서(또는 전례를 계획하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겸손되이 주님 앞에 서는 것이다.

▬ 강론자의 세 가지 임무

앞서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강론자의 역할은 세 가지 임무로 요약된다.

(1) 오늘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행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식별한다.
(2) 회중이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3) 이 모든 일을 교회를 대신하여 한다.

1. 오늘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행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식별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책 안에 있지 않다. 다음을 포함하는 전체 사건 안에 살아있다.
- 오늘의 성서 본문(주일에는 4개의 성서 본문이 읽힌다. 곧 독서 3개와 시편)
- 오늘의 전례적 배경(전례시기, 축일 등)
- 오늘의 역사적 시간과 장소(지금 우리 세상과 교회에서 지속되고 있는 모든 것)
- 현재 있는 사람들(강론을 듣는 이들의 실제 삶의 배경)

강론은 물론 성서 주석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그것 이상이다. 우리는 어떻게 오늘의 독서가 지금 여기에서 작용하는지 식별하도록 노력한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강론자들은 자주 “역사적인 예수”를 설교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 곧 강론자들은 과거의 예수님만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다. 또한 가만히 계시지도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향해 활동하고 계시며, 특히 전례 안에 살아계신다. 이러한 성서와 현재 사건의 결합으로 무언가가 촉발된다. 강론자인 우리는 이것을 발견하고 하느님 백성을 위해 이를 열어 보여야 한다.

전례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살아있으며, 결코 재연되지 않는다.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과거에 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아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교리이다.1)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살아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 생명력을 주는 것임을 뜻한다.2) 이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힘을 가진 은총의 말씀이다. 또한 이는 참된 말씀,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말씀을 넘어선다. 곧 전통적 용어를 사용하면, 그것이 가리키는 구원을 가져오는 ‘유효한 표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개인과 교회를 형성한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는 말씀에 이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3)라고 하셨다. 잠시 뒤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

바오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로마 1,16). 강론자들은 은총이며 살아있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이 말씀의 흐름을 식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회중이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주님께서 오늘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식별한 다음, 강론자들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임무는 회중이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3) 강론자들은 많은 일이 이미 강론 전에 일어났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가, 상징, 기도 그리고 하느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흘러들어왔다. 우리의 임무는 이미 이루어진 이 흐름을 돕는 것이다. 강론자들은 그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 55,10-11).

강론자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은총에 의지한다. 그 은총은 강론자의 화술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4)

3. 이 모든 일을 교회를 대신하여 한다.

강론자가 강론을 할 때는 교회를 대신하여 하는 것이다. 곧 강론자는 개인적으로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며, 하느님의 개인적 대변인 역할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우리는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은총에 참여하여, 우리 신앙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신앙을 공유한다. 이것이 바로 강론이 개인적 증언과 다른 이유이다. 개인적 증언을 위한 때와 장소가 있을 수 있지만, 강론은 이보다 넓은 차원의 것이다. 강론자는 주님께서 오늘의 사건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식별한 것처럼 교회 전체의 신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강론자는 인간적인(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방식으로 강론을 해야지, 메시지의 범위를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폭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 몇 가지 결론

앞서 설명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봉사한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1. 준비 과정이 훨씬 즐거울 수 있다.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강론은 더 이상 매주 성서의 말씀을 설명해야만 하는 의무가 아니다. 그 대신 강론자들은 이미 일어나고 있고 매우 훌륭한 어떤 일에 동참하여 그것을 돕는다. 선포된 성서가 넘쳐흐르고, 강론자들은 이를 돕는다. 흐름의 식별은 연구와 기도 그리고 해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전하는 데는 어떤 창조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신에게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

2. 소재 고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다양한 자료들은 일정한 양이 비축되어 있는 기름과 같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마르지 않는 살아있는 물이며 공동체의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살아있는 말씀이 삶과 연관되어 있을 때, 끝없는 풍요로움이 지속적으로 열린다.

3. 매주 새로운 주제를 소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같은 주제를 차례대로 몇 주에 걸쳐서 설교하는 것을 편하게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부활시기에는 그동안 설교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부분인 성령을 중심으로 강론할 수 있다(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활동만 강조한 경향이 있다.). 이번 주일에 성령에 대한 강론을 했다면, 다음 주일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지난주에 이미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새로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강론자는 같은 주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매번 신선한 방식으로 같은 진리를 반복해서 들려줄 수도 있다. 계속되는 주일 강론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아니라 주일마다 살아있는 성서를 비추는 것이다.

4. 좋은 강론은 언변이 뛰어나지 않은 강론자에게서 나온다.

강론자보다는 하느님 말씀에 집중하게 된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존경과 사랑이 드러날 것이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초점은 강론이나 강론자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통찰에 맞춰질 것이다. 강론이나 강론자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에 열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훌륭한 강론은 기본적인 연설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이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강론자가 타고난 이야기꾼, 연예인 또는 외향적인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5. 강론은 훨씬 더 다양해질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나 기도 중에 우리 마음에 떠오른 것을 판단하는 척도로 성서를 이용하다 보면, 각 강론자는 개인 성향, 관심 분야, 자신의 성격 유형 등에 따라 인간관계, 사회 정의, 교회의 가르침 등 자연적으로 끌리는 주제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반면, 성서 앞에 겸손되이 서서, 하느님께서 오늘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들으면, 강론자들은 자신의 내적 성향에 따른 동일한 주제로 강론하지 않게 된다. 이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요한 21,19 참조).

6. 좀 더 직접적으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대해 강론할 것이다.

신자들 가운데 강론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보다는 교회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신자들이 얼마나 자주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런데 이러이러한 것들에 대해 교회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그러면서 그들은 좀처럼 다음과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이러이러한 것들에 관해서 주님께서 뭐라고 가르치십니까?”

7. 우리 신앙의 기초 진리를 강론할 것이다.

성서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판단하는 척도가 아니라) 우리의 안내자이다. 성서는 계시된 진리의 깊이와 인간 생활의 깊이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주제 선택이 강론자의 몫으로 남겨지다 보면, 가장 근본적인 진리 가운데 어떤 것들은 너무 분명하거나 어렵기 때문에 소홀히 다뤄질 수 있다.

이에 대해 오랫동안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근본 진리들, 곧 하느님과 성령 그리고 구원과 은총에 대해서는 설교하지 않는다. 얼마 전 필자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주님의 탄생, 기적 그리고 그분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셨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느님이신지에 대해 물어보자, 놀랍게도 대부분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 책임을 종교교육 프로그램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강론은 어떠했는가?

오늘날 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여자 복사를 허용할 것인지, 하느님을 어머니라 부르면 안 되는지, 누구를 사목자로 부를 수 있는지 등에 관한 논쟁에만 집중한 채,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핵심 진리인 복음을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8. 이러한 강론의 효과는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강론은 개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지는 않을 것이며, 혁신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처럼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점점 더 쌓여 그 모습을 갖출 것이며, 대체로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서 성서 말씀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강력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성서를 더 잘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강론 자체보다 그들 영혼에 흐르는 깊은 통찰에 더욱더 열중할 것이다. 신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일시적인 희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게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건강식의 효과는 바로 다음 날이나 그 주에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며, 좋은 음식이라고 하여 모든 음식을 섭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을 통해서만 우리는 잘 먹은 효과를 느낀다. 이것은 강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맺음말

교회와 각 신자들을 이루는 것은 강론자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힘이다. 강론자의 기술이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이는 강론자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봉사하는 데 사용되는 기술이다.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목자들은 자신들의 설득력이나 영리함 또는 프로그램이나 정책 그리고 조직적 능력으로 봉사하지 않는다. 바로 ‘성사’가 그 빛을 공동체에 쏟고 생명을 비추도록 할 것이며, 사목자는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에 진실되이 봉사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할 것이다. 전 세계 교회에서 하느님 말씀이 그 힘을 잃는 일이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악령에게 소리치시며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으셨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서로 수군 거렸다. ‘그분의 말씀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분의 말씀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그분의 말씀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하는 은총의 말씀이다. / 케네스 운터너 미국 미시간주 사지노 교구 주교 * 출처__ Kenneth E. Untener, Preaching Better, Paulist Press, 11-17면, 한길자 편역.

▬ 각 주

1) 전례에서 선포된 성서의 “살아있는” 글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 「거룩한 공의회」와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에서 분 명히 가르치고 있다.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 당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전례 헌장, 7항).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복음을 선포하신다”(「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9항).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구원의 신비의 문을 열어두신다. 또한 그들의 영혼을 풍부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을 통해 신자들에게 나타나신다”(같은 곳, 33항).

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6,51 참조).

3)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강론이 있어야 하는가?” “그냥 하느님의 말씀만 선포하고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가? ”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행동하신다고 믿는다. 이런 경우 강론자가 이에 해당된다. 따라서 강론자는 우리의 전례 전통에 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4) 살아있는 말씀의 충실한 임무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의미와 함께 나타난다.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1993년에 발표한 문 서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은 현실화(예를 들어, 성서가 현대 시대에 말해야 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와 토착화(예를 들어, 특정 공동체 안에서 그 문화에 맞게 성서를 놓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현실화에 관하여: “사실 교회는 성서를 단순히 자신의 기원을 다루는 역사 문헌들의 모음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는 성서를 자신 과 현대세계 전체에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 현실화가 필요한 이유는 성서 본문의 메시지가 비록 항구적 가치를 지 닌다 할지라도 그 본문이 과거의 환경에 맞게 그리고 다양한 시대적 조건들에 한정된 언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이 를 위하여 본문의 의미를 밝히려면, 본문의 메시지를 현대의 환경에 적용시키고 그 메시지를 우리 시대에 맞는 언어로 표현할 필요가 있 다.”

- 토착화에 관하여: “토착화는 분명히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부유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 다양한 문화 안에 포함되어 있는 보화는 하느님의 말씀이 새로운 결실을 맺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말씀의 빛은 각 문화가 내놓는 것들을 취사선택하여 해로운 요소들은 제쳐놓고 유익한 요소들은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도와준다.”

▬ 사목지 2005년 5월호 ▬

▥ 강론의 여러 가지 측면

강론은 관련 요소와 때로 이질적 요소들을 수반한다. 누군가 강론을 해야 한다면 그 내용에는 언제나 성경을 포함해야 한다. 미사에서 강론할 때 그 배경은 전례이며, 이는 강의나 발표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노력하는 데에는 반드시 회중이 포함되어야 한다. 특별한 상황 때문에 회중이 바뀌는 경우에는 말하는 내용뿐 아니라 말하는 방법까지도 바꾸어야 한다. 강론법은 이러한 모든 필수 요소가 상호 관련성을 가지게 될 때 복잡해지게 된다.

강론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그 하느님의 말씀에 의탁하는 자기 이미지를 더 확고히 가질수록 강론을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이는 종종 가르침의 요소를 포함해야 하는 교사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 만일 강론자가 혼인과 가정, 개인 문제들에 전문가이자 상담자이며, 관리자, 재정 계획자일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제와 종교간 대화, 교회일치에 대해 관심을 가진 종교교사라면, 종종 이러한 일들을 위해 들여야 하는 무수한 시간과 노력 틈에서 강론자로서의 역할은 등한시될 수 있다. 불행히도 이는 대부분의 사목자와 강론자에게 해당되는 경우이다.

▬ 강론자로서 사목자

만일 사목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신자 공동체에 전파하는 일을 우선적 사명으로 여긴다면, 어디에 시간과 에너지를 먼저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에너지와 시간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 모든 본당 신자와 단체가 좋은 강론을 바란다면, 거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고, 다른 요구들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모든 일을 다 잘할 수는 없다. 그러면 강론자로서 사목자는 강론 준비를 위해 어떻게 시간을 계획하고, 또한 어떻게 하면 더욱 효과적인 강론을 할 수 있을까? 전자에 대한 답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바쁜 사목자만이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힌트가 답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강론자는 자신을 살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성찰해 본다. 성격과 지식, 경험, 기술(목소리, 몸짓, 억양 등) 등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강론자로서의 역할에 도움이 되는 성격을 타고났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강론자가 되고자 자신의 몇 가지 성격을 극복해야 한다. 성경과 신자들에 관한 지식 또한 강론자마다 다르다. 성경을 찬찬히 공부할 좋은 기회를 가졌던 사람도 있고, 여러 다른 신자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목자도 있다.

또한 신학교에서 배운 성경에 관한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강론자는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 한 회중 앞에서만 강론하면 한 유형의 회중에 대한 경험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유형의 회중 앞에서 강론을 해보면, 강론하는 사람의 지식이 풍부해지고, 더 효과적인 강론을 하게 된다. 30년간 강론을 한 사목자는 이제 막 강론을 시작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강론의 기술적인 측면은 어떤 이들에게는 쉬운 부분이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노력과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강론의 측면들은 매우 개인적이다. 강론은 강론자가 자신의 개인적 강점과 약점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 강론 내용으로서 성경

강론은 성경에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께 말씀하셨으며,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의 초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기록인 성경은 오늘날 사람들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또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관계에 대하여 배움으로써 하느님과 그들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이해하게 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와 같은 신앙 체험은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적 경험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하느님과 인류, 하느님에 대한 모든 가능한 경험과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이 하나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단지 유다인과 예수님,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들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인간답게 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어떻게 신앙적 차원이 모든 인간생활 안에서 드러나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너무나 흔하게 나타나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부인조차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은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마리를 제공하며, 신앙적 차원이 어떻게 삶의 여러 까다로운 질문들에 더 나은 답을 주는지 알아내도록 촉구한다. 성경은 언제나 강론의 근본적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다.

▬ 강론의 배경 : 전례

강론은 강론자와 신자들의 신앙 표현인 전례 안에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신자들은 강론자이며 집전자인 사제와 함께 기도를 바친다. 전례는 예수님과 그분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살아있는 기억이다. 전례의 의미는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이 쓴 찬양시 ‘오, 거룩한 잔치여(O sacrum convivium)’에 잘 표현되어 있다.

O sacrum convivium in quo Christus sumitur
recolitur memoriae passonis ejus
Mens impletur gratia nobis datur pignus futurae gloria

“오, 거룩한 잔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며,
그분의 수난을 기념하고 은총으로 가득 차며, 다가올 영광의 보증을 받는도다.”

전례를 통하여 과거를 상기하며, 현재는 은총으로 가득 차고, 모든 이가 미래의 영광을 고대한다. 하느님께서는 과거에 사람들에게 선하셨으며, 현재에도 그러하시고,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강론은 이 세 가지 측면, 곧 과거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억(특히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점), 현재 인간의 삶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필요성, 미래에 대한 약속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 신자 공동체

강론은 특정 시간에 특정 신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총칭적인 강론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농촌 신자들과 도시 신자들은 매우 다르며,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하는 강론과 어른에게 하는 강론이 다르다.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하는 강론이 다르고,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은 성경에 대해 그렇지 않은 이들과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요양소에서 하는 강론과 대학 캠퍼스에서 하는 강론이 다르다. 훌륭한 강론자는 회중에 적합한 강론을 한다.

특정한 상황 또한 강론에 영향을 준다. 장례미사인지, 혼인미사인지, 세례성사인지에 따라, 또한 현충일인지, 근로자의 날인지가 신자들이 살아가는 특정한 배경을 형성한다. 또한 이러한 회중 안에서 강론이 살아있게 된다. ‘어머니의 날’에 낙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1월 1일 새해에 관심이 집중된 신자들에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대하여 강론하는 것은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자연 재해 뒤에는 희망과 신앙에 대하여 강론하는 것이 칠죄종에 대하여 강론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 회중 모두가 강론자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하느님 말씀을 실제로 강론하는 데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계시 : 강론의 토대

계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드러냄과 계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이해하고자 할 때 여기에는 관계 맺음이 포함된다. 누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보일 때, 자신의 몇 가지 면들을 드러내는 것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암묵적 제안을 의미한다. 교사는 학생과 교사의 관계를 맺고자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러한 드러냄은 우정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이러한 제안은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한다. 처음에 이러한 다가감이 받아들여지면, 양측에서 점점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게 된다.

하느님의 측면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 제안하신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 의미를 드러내 보이시며, 인간은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한다.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관계 맺음을 제안하신다. 창조 그 자체로 창조주와 관계 맺도록 하는 완전한 선물일 것이다. 개인이 그의 삶에서 신앙적 체험을 할 때 이 또한 관계에서 오는 선물이다. 대부분 많은 이들의 신앙 초기 단계에서 하느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관계 맺음은 매우 개인적이며 내면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 관계는 또한 공적이며 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 체험에 감동하여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면, 그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공적이고 외적인 기준을 충족시킨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 특히 모세를 통하여 유다 민족과 관계를 맺으신다. 모세는 유다 민족과 함께 사막에서 신앙 체험을 하였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의 이러한 관계 맺음의 제안을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하느님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민족이 되었다. 예언자들 또한 각자 하느님 체험을 하였으며, 차례로 하느님과 맺는 관계와 이 관계를 충실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한 체험을 하셨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예수님과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 맺음과 신앙 안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이해하고자 신약 성경으로 눈을 돌린다. 일단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비록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일지라도 각자는 하느님과 그 관계를 받아들이려는 자신의 바람을 연결할 수 있게 된다.

훌륭한 강론자는 성경을 알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건네시는 관계 맺음의 제안과 그에 대한 응답의 기록을 안다. 또한 강론자는 신자들의 필요를 알고 있으며, 이 두 가지를 함께 다룬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갈망과 인관과 관계 맺으려고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제안에 응답하는 데는 도움이 필요하다. 강론자는 바로 이러한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강론은 현재와 앞으로도 영원히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관계 맺고자 하심을 전제로 한다. 계시는 모든 강론의 근본이며,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 맺음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앞선 시대의 사람들의 신앙 체험을 이해하게 될 때,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초대에 더 잘 응답하게 될 것이다. 계시 없는 관계 맺음은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초대와 응답에 대한 설명 없이, 또한 현 시대의 신자들의 요구에 대한 지각 없이 하는 강론은 완전히 실패한다.

처음 생각보다 강론법이 더 복잡해지고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다. 강론자의 개성, 재능과 약점을 고려하여야 하고, 내용은 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전제로 하며, 전례라는 배경이 강론에 색을 입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강론은 하느님의 초대와 하느님과 관계 맺도록 하는 이러한 초대에 대한 개인과 공동체의 응답을 포괄한다. 각각의 요소는 강론의 온전한 의미의 일부분만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함께하면 사람들의 삶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창조한다. 이러한 강론의 임무는 대단한 것이다. 도전적이며, 매우 큰 만족을 주는 것이다. 이 일은 강론자를 통하여 계속해서 관계 맺음의 가능성을 제공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써 가능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러한 작업을 능가하며, 이를 성취한다. 강론자는 단지 그 힘 있는 말씀에 봉사하는 것뿐이다.

▬ 강론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과 만나고 싶어한다. 이러한 만남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시는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일반적인 방법이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모든 인간의 삶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강렬한 체험인 구원을 이루신다. 구원은 죽음 이후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체험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이해,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해는 인간 삶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현존을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성경은 이 구원의 약속이 실제로 경험됨을 보증한다. 강론은 이러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 강론이 아닌 것

강론자나 회중 모두 종종 강론이라는 말에 혼동을 일으켜서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한다. 진정한 강론은 개인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강론자의 개인적 생각이나 의견, 느낌 등을 발산하는 기회가 아니다.

또한 강론은 신학 강의가 아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신학 강좌를 듣기도 한다. 신학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강론은 신학 교수들이 중요한 신학적 견해나 소수의 신학적 견해에 대하여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훌륭한 신학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신학은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것이며, 신학의 열매는 학생들을 통하여 얻어야 한다.

강론이 신학 강의가 아니듯이 강론은 성경 본문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는 말씀의 의미와 본문에 사용된 문학 유형, 각 성경에 대한 신학적 이해, 그리고 각 성경의 상호 연관성에 대하여 알게 한다. 강론은 완전한 성경 해석을 하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 해석학의 기초를 전제로 한다.

때로 강론자는 그의 강론에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포함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공적 생활에서 필요하다 하더라도 강론이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토론하는 장은 아니다. 특별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는 교회의 영역에 속하여 있다. 그렇지만 강론은 사회정의와 정치 참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장은 아니다. 그러나 강론이 정치적 사회적 측면들을 담고 있는 현실 세계와 관련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강론은 윤리에 대한 훈계가 아니다. 삶에 필요한 윤리적 지침들은 종교교육 특히 가정에서 습득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찾아왔을 때, 윤리적 이행은 이미 개인 삶 안에 통합되어 있다. 그렇지만 강론은 윤리적 생활을 북돋우고 언제나 어떤 결심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 강론이란 무엇인가

강론은 매일의 삶을 배경으로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연결하는 성사적이며 상징적인 활동이다. 성사적 활동으로서 강론은 말씀을 통한 하느님의 활동을 담고 있으며, 상징적 활동으로서 강론은 말하고 듣고 응답하는 것을 포함한다. 강론자나 회중 모두 우리의 매일의 삶의 평범함과 관련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하느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의 현존과 마주하도록 이끌린다. 그 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선행되며,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하느님 말씀인 예수님의 현존을 기념하는 데서 그 완전함을 찾는다. 이 과정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전제로 하며, 각각은 다른 것과 연관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거룩한 음식을 받아 모셨을 때, 하느님과 신자들의 일치뿐 아니라 신자들 사이의 일치 또한 이루어진다. 말씀과 성사는 이질적인 실재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실재 또는 같은 실재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이다. 모든 강론은 성사적 활동, 특히 성찬례 거행과 관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론은 인간의 매일의 삶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산다. 이들은 세상을 움직이거나 흔드는 이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삶은 지극히 평범하다. 물론 세계정의나 세계 기아, 세계평화 등과 관련하여 국제적 결정을 하는 데 하느님의 말씀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거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직접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어려워 한다. 사람들은 희망과 느낌, 감정, 다른 이들의 필요에 대한 인식, 계속해서 발전하려는 자의식을 지니며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강론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강론자는 무엇을 하는가? 성경을 알고, 회중을 알며,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받아들이고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도움을 준다. 독서의 의미를 제시하고, 성서적 맥락 안에서 그 의미를 배치시키고, 그것을 신자들의 삶과 연결시키며,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를 이룰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제안한다.

1. 매주 성경을 연구할 시간을 찾으라. 월요일에 다가오는 주일의 성경 말씀을 읽으며, 한 주 동안 그 말씀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해석을 위해 참고 자료들을 찾아본다.

2. 신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하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도록 한다.

3.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신자들이 요즘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도록 하라.

4. 독서와 독서의 배경, 회중의 상태, 바라는 답 등 강론의 외적 부분을 개발하라.

5.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성찬례 안의 하느님 말씀의 현존과 연관시키도록 하라.

6. 강론자로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도록 하라. 강점은 잘 이용하고, 약점은 극복하도록 한다.

7. 무엇보다도 매주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하도록 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론을 하느님과 사람들의 관계 맺음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전하라.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성사 안에서 지금 이 순간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로마 8,32 참조)

원문: John F. O'Grady, “The Many Facets of Preaching”, The Priest(2002. 5.), 34-37면, 이준혜 편역.

▥ 강론자,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라

▬ 들어가며

이 시대 의사소통 형태 가운데 이야기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있을까? 저녁 뉴스를 보거나 아침 신문을 보면 언제나 머리기사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연설 또한 비슷한 유형을 따른다. 감사 인사를 한 다음 연설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연설을 시작한다. 그러나 연설의 목적은 사건 보도가 아니라 청중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 밖의 의사소통 형태로 설교가 있다. 과거의 강론 또는 설교는 일반적으로 설명적이었다. 객관적인 산문 형태로 신앙에 관한 내용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이러한 설교에서 사용되는 서술어는 대부분 “-이다.” 동사 형태이며 주로 연역법이 사용된다. 그러나 오늘날 강론학 교수들은 설명어를 사용한 이야기를 추천하고 있다. 이 방법을 통해 성경 구절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론자들은 자유롭게 귀납적 사고를 하게 되었다. 곧 예화를 들어 회중들을 확실하게 이해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예화(illustration)를 선호하게 된 것은 강론자들이 강론 중에 회중들과 함께 논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개념보다는 이야기를 더 잘 기억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 논평가가 쓴 글에 따르면, 현실에서 우리의 경험은 이야기 형태로 되어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들을 이끌어가시면서 이 과정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시고, 청중들이 하느님 나라의 중요성을 파악하도록 도우셨다.

그러나 이야기가 강론의 진정한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강론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를 모호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이야기는 복음의 중요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함정을 막고자 필자는 강론에서 훌륭한 스토리텔링(이야기 전달)1) 방법과 스토리텔링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시할 것이다. 이 개념은 데이빗 버트릭 교수의 유명한 저서 『강론학: 움직임과 구조』(Homiletic: Move and Structures)를 참고하였다. 10여 년 전에 출판된 이 작품은 미국 내에서 중요한 강론학 지침서가 되었다.

▬ 스토리텔링의 사용 목적

버트릭 교수는 이야기를 사용하는 목적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 외에 전통적인 두 가지를 제시한다. 곧 이야기는 애매한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모호할 수 있는 것에 근거를 제공한다. 강론에서 발견한 개념들은 세속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례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그 변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변화합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다르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층 더 높은 존재의 위치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신임 대통령의 취임 선서식과 같습니다. 대통령 취임 뒤 존 케네디의 친구들은 더 이상 그를 “잭”이라고 부르지 않죠. 그가 성경에 손을 올려놓고 맹세하는 순간부터 그는 “대통령”입니다. 신임 대통령의 겉모습은 변함없지만 분명히 새로운 권위가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안에서 공동체가 함께 모이고 약속이 만들어집니다. 공식적으로 이름이 주어지고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존엄과 함께 성령의 물이 부어집니다.

세례 때 은총이 마음에 충만하다는 말을 하지만, 청중들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짧은 글에서 실제로 변형이 일어나는 방법을 설명할 계획은 없다. 또한 변화가 일어난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버트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야기는 “시간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성서 시대 안에 있는 우리를 상상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시대를 이 시대로 끌어올 수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가운데 대심문관에 관한 장(章)에서 이야기의 이 기능을 활용하였다.

이야기는 또한 “의식 안에 본보기를 세울 수 있다.” 곧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하셨는지 나타내려는 경우, ‘사랑의 선교회’의 설립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강론자는 마더 데레사가 “계획도 없었으며 또한 미리 생각한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라고 한 말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버트릭 교수는 ‘예’(examples)와 ‘예화’(illustration)를 구분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쏟았다. 예는 “회중의 공통의식”에 토대를 둔다. 곧 보편적으로 경험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얼마나 자주 이 단어를 사용하는가. 곧 우리는 이야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한 행동이 어떻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표현하고자 할 때, 생일과 관련된 공통된 경험을 언급할 수 있다. “여러분의 생일날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얼마나 고마워했던가요. 가족들은 선물을 준비하고, 멀리 사는 친구가 축하 전화를 걸어옵니다. 그리고 직장 동료가 점심을 내기도 하죠.” 이처럼 ‘예’는 거의 모든 청중이 공유하는 사건의 한 종류이다.

이와 반대로 예화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범위 밖에서 시작되지만 쉽게 의식에 동화된다. 예화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모래 위의 발자국’과 같은 이야기가 바로 예화의 한 종류이다. 실제로 회중 가운데 한 사람도 두 개의 발자국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모두 그 이야기가 이끄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예화는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이때 각각의 개념에 대하여 하나의 예화를 사용해야 한다. 여러 개의 예화는 청중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강론자는 개념을 분명히 나타내고자 한 번에 두세 개의 예화를 연결시킬 수는 있지만 이러한 예화들의 고리는 결국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버트릭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가장 중요한 개념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만 예화를 사용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예화에서 종말론적 상징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암시를 통해 대중 영화에서 시각적인 내용으로 표현된다.

요한 묵시록의 관찰자인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썼습니다. 그는 텍사스 토네이도보다 훨씬 더 괴로운 고통을 견디어냈습니다. 이제 그는 해방의 광경을 그립니다. 이것은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린을 가득 채운 것과 같은 희망입니다. <타이타닉>은 대서양에 남겨진 싸늘한 시체들의 모습으로 끝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 주인공 로즈를 위해 남자 주인공인 잭이 보여주었던 궁극적인 희생은 결국 부활한 타이타닉 호 위에서 이 둘의 결합을 이끌어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환상일까요?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결국 헌신적인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청중들은 자주 지나쳤던 성서의 중심 개념(묵시 21,1-5)을 이해할 수 있다. 강론자들은 여러 자료에서 예화를 찾아낼 수 있다. 영화 말고도 문학, 역사, 전설, 동화, 뉴스,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 경험에서도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담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처럼 간단한 그림 묘사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산호세 외곽 지역, 공항으로 가는 길을 따라 한 지역 은행의 광고판이 보입니다. 건장한 한 남자가 가슴에 아기를 안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가야!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너를 지켜주마!” 아버지가 아이에게 아이의 안전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끝없이 위대합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폭풍 속에서도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그분의 팔은 훨씬 강하고, 그분의 손길은 멀리까지 펼쳐지며, 그분의 지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우리의 ‘천상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강하신 인류의 아버지로서 능력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청중의 관심을 끈다. 강론자는 쉽게 이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고, 청중 또한 단순히 강론자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회중의 관심과 이에 대한 강론자의 만족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이야기는 성서 구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야 한다. 아쉽게도 강론자들은 강론에 이야기를 하나라도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잘 맞지 않는 강론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혼란이 발생하고 청중의 관심을 잃게 된다.

버트릭 교수는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설명할 개념과 일화가 ‘분명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예화’의 발전 단계와 개념 구조가 평형 관계이어야 한다. 셋째, 적절한 예화를 제시해야 한다. 부적절한 예화는 중심 개념을 훼손시킬 수 있다. 부적절한 이야기의 예를 보도록 한다.

한 유전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를 어떻게 돌보시는지 우리의 이해를 도우려 했습니다. 이 과학자는 초파리를 연구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작은 곤충은 너무 익은 과일에 많이 모여듭니다. 이 유전학자는 한 번에 초파리 수십 마리를 마취시키고 다시 살리는 과정을 통해 초파리 한 마리 한 마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 이 녀석은 부끄러움이 참 많구나. 그런데 이 녀석은 성질이 있네.” 이런 식으로 유전학자는 초파리 한 마리 한 마리와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 각자에게 이와 같은 관심 ─ 끝없이 위대한 관심 ─ 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돌보시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예에서 예화의 발전 단계와 개념 구조가 평형을 이루고 있다(두 번째 기준). 그러나 이 설명은 ‘분명한 유사점’이라는 첫 번째 기준에는 맞지 않는다. 유전학자는 초파리에 관한 지식을 언급하였지만, 고찰해야 할 개념은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을 초파리와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세 번째 기준).

그럼 이 시점에서 훌륭한 스토리텔링 방법과 스토리텔링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 훌륭한 스토리텔링 방법

1. 이야기들을 자주 사용한다.

강론의 모든 단락은 최소한 중심 생각을 분명히 설명하는 구체적인 예 하나를 담고 있어야 한다. 강론자가 강조하려는 강론의 중심 개념은 4-5개의 문장으로 된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림 하나가 천 마디 말보다 낫다.”와 같은 말을 기억하라. 버트릭 교수는 예화와 관련하여 비슷한 주장을 한다. “곧 네 문장으로 된 하나의 예화가 스무 문장으로 된 내용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정곡을 찌르는 예화 하나가 강론 전체를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

2. 공동체 내 체험에서 예화를 찾는다.

책, 영화, 뉴스 기사와 같은 수많은 이야기는 다양한 소재들을 다룬다. 그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는 없다. 곧 ‘공동체’ 이야기는 그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의미를 증대시킨다. 물론 강론자는 정확하게 공동체의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이와 함께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

3. 충분한 해설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구성한다.

최근 들어 강론자들 가운데 강론의 도입부와 결론에서 기본 개념을 나타내지 않고 이야기를 이용하려는 경우가 있다. 사실 어떤 강론학 교수는 강론 전체를 이야기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옹호하기도 한다. 해설 자료를 사용하지 않은 강론은 재미있을 수는 있으나 혼란을 초래하기도 쉽다. 버트릭 교수는 이러한 유행을 피하도록 조언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야기가 길수록 해설 내용이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간결하고 생생한 예화가 가장 만족스러운 역할을 한다.

4. 다양한 소재에서 이야기를 수집한다.

강론자들은 앞으로 있을 강론을 위해 체계적으로 소재들을 모으고 보관해야 한다. 신문 기사 스크랩,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 또는 기사 등을 주제에 따라 분류해 모아놓으면 언젠가 강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5. 스토리텔링에서 독창성을 발휘한다.

갖가지 자료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성화(聖畵)를 묘사할 경우 그 구성 요소와 색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성화의 세세한 모습들이 어떠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보여준다.

▬ 스토리텔링에 불필요한 요소들

1. 강론 내용에서 흐름을 방해하는 일인칭 일화(逸話)는 피한다.

강론자들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불필요하게 그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 설명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또한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어느 날 밤 저는 신작 영화를 봤습니다. 저는 그 영화에서 오늘 강론의 주제인 구원의 의미와 관련하여 영감을 받았습니다. 부상을 당한 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한 조련사가 그 말을 치료했죠. 그런데 더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거친 성격의 말 주인 또한 조련사와 대화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되었습니다.

강론자는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지만, 이 일화는 구원의 의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실 이러한 일화는 강론자 자신의 심리 변화에 관한 부차적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청중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2. 자전적 이야기는 경계한다.

강론자는 자전적(개인적) 이야기를 통해 회중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고, 실생활의 상황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기적인 것이다. 강론자는 성경 해석보다는 자신에 대한 과시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쉽다. 이에 따라 청중이 강론자의 삶에 더욱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예수님의 삶이나 성경 구절이 제시하는 것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된다.

3. 과시용으로 “이름을 언급하는” 방식의 이야기는 피한다.

강론에서 “칼 라너”와 같은 이름을 거론해야 좀 더 지적으로 보이고 듣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이러한 정보는 예화의 본질이 아니다.

강론자들은 인간적인 존경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에 힘을 쏟아야 한다. 진정한 존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나 지식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책임 이행 방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회중들과 매우 친숙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강론자가 제시하려는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4. 이야기를 꾸며내어 그것을 사실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강론자들은 허구의 이야기로 개념을 설명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다. 청중이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강론자들은 신화 등을 잘 모르면서도 그 내용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구성은 적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은 신화의 의미가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번안 내용이 원래 내용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5. 단지 관심을 끌려는 목적으로 유머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름 언급’과 마찬가지로 유머는 강론의 본질이 아니다. 버트릭 교수는 강론자들은 유머를 자주 이용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그 유머를 재미있어 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머를 말하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상기시킨다. 그러나 강론자의 의도와 부합하고 적당하게 사용한다면 유머는 강론에서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활절의 기쁨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온 천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전달될 수 있다. ‘좋은 소식’은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며, ‘나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목요일 밤에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 마치며

뉴멕시코의 민속 마을에서는 스토리텔링을 자주 볼 수 있다. 스토리텔러는 언제나 원주민 여성이다. 그 여성은 전통 의상을 입고 아이들에 둘러싸여 앉아있다. 어린아이들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스토리텔러를 응시하고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강론자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와 같이 청중의 관심을 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복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강론자들은 조심스럽게 이러한 이야기들을 끌어가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강론자의 주관적 관심사와 상관없이 의도하고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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