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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증언하였다”
조회수 | 97
작성일 | 20.01.18
[청주]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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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복음에는 ‘보았다’라는 말이 3번이나 나옵니다. 과연 세례자 요한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첫 번째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요한1,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방문을 받으셔야 할 주님이, 몸소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분이, 몸소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은 몸을 굽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고자 했으나, 오히려 예수님이 먼저 몸을 굽히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만남입니다. 지상의 겸손과 하늘의 겸손이 만나고,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이 손을 맞잡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또한 매번 미사 영성체 때마다 이러한 신비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요한처럼 겸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오십니다. 우리를 만나기 위해 주님이 몸소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 ‘보고’ 있습니까? 미사 때마다 먼저 다가서고 먼저 찾아와 주시는 주님의 그 사랑과 겸손을 알아 ‘보고’ 있습니까? ‘예’라는 답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2. 두 번째로, 세례자 요한은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주님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요한 1,32) 처음에 예수님의 오심을 보았던 세례자 요한은, 이제 성령께서 오심을 봅니다. 비둘기 형상을 보자마자 그는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인류를 생명의 땅으로 인도했던 비둘기가(창세 8,11), 이제 영원한 생명이신 분께로 인류를 다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멸망과 죽음의 시대가 지나가고, 생명과 정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가 지나가고, 일치와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고 있음을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되니 세례자 요한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3. 세 번째로, 세례자 요한은 성부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요한 1,34).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라는 명을 받으면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계시를 받았습니다. 곧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이 오시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내려와 주님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목격한 순간, 성부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환희에 차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여러분은 성당에 오실 때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성자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보이십니까? 성령께서 주님 위에 머무르시는 것이 보이십니까? 성부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보이십니까?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가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고 증언하는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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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최법관 베드로 신부
2020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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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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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시기에 기린 ‘주님 공현 대축일’과 ‘세례 축일’은 강생의 신비와 구원의 보편성을 알립니다. 연중 제2주일에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종의 노래’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밝힙니다. 오늘 미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친교로 주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소명을 가슴에 새깁니다.

‘주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사야 예언자(기원전 8세기)는 메시아의 소명인 구원계획(이사 42장)을 시작으로 네 번에 걸쳐 ‘종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그 종은 바로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이스라엘(이사 49,3)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그 둘째 노래(49장)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구원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록 당신 종을 모태에서부터 빚으시어 ‘민족의 빛’으로 세우십니다. 셋째 노래는 주님을 신뢰하고 모든 고난과 박해를 이겨내는 종의 모습(이사 50장)이고, 마지막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는 어린양의 죽음이 승리한 생명의 길(이사 53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지만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종의 모습’(필리 2,7)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성령과 함께하시는 주님(마태 12,18; 요한 1,32)께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넘어 세상을 구원하시는 모든 민족의 빛(이사 49,6)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1코린 1,1-3)에서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사도로서 자신의 소명을 밝히며 인사합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 안에서 거룩한 삶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비록 생각과 행동이 달라도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일치(교회 헌장 28)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메시아 시대를 알리는 ‘선구자’요 ‘광야의 소리’인 요한 세례자는 빛을 증언하러 온 인물(요한 1,7-8)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요한 5,35)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심을 증언합니다.

구약시대에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속죄를 위해 주님 제단에 바쳐진 파스카 축제의 어린양이고, 속죄일에 하느님과 화해의 희생제물(탈출 12, 레위16)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의 표상입니다. 넷째 종의 노래에 나오는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수난받는 종(이사 53장)과 종말에 승리하실 어린양(묵시 5-7장; 17,14)이 연상됩니다.

요한 세례자는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며 강생의 신비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창조주요 말씀(창세 1,1; 요한 1,1)이시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심을 밝힌 것입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말할 정도로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가 친척이라는 전통적인 이해조차도 불식합니다. 지중해의 문화적 맥락에서 증언은 삶의 자리에서 감명 깊게 발견한 진실을 개인의 느낌과 생각과 소망을 담아 말과 행실로 밝히는 것입니다.

요르단강에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던 요한은 거룩하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이유를 증언합니다. 주님의 계시(요한 1,33)대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널리 알려지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그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요한 1,32)”이 요한이 본 표지입니다.

바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요한 1,34)이십니다. 공관복음(마태 3,17; 마르 1,11; 루카 3,22)은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어 하느님과 인간과 화해시켜주십니다.

죄는 세상을 죽음의 수렁으로 빠트립니다. 죄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성과 진리와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 죄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거나 업신여기는 탐욕의 삶이 죄의 뿌리입니다. 나 중심의 이기주의,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공동선에 대한 무책임이 세상을 진홍빛으로 물들입니다.

요한은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증언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는 생명을 구하는 새 계약의 표지입니다. 오늘 미사에서 영혼의 양식인 성체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그분 따라 사랑의 삶을 살기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한 신앙인을 봅니다. 그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니 행복하다고 합니다. 매일 미사와 성사 생활로 영적 힘을 얻고, 거룩한 독서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의 애송 기도는 ‘하느님의 어린양’이고, 강생의 신비와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하여 삼종기도와 봉헌기도를 끊임없이 바친다고 합니다. 그의 모습이 성령 안에서 새 삶을 사는 복음화의 길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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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가톨릭신문 2020년 1월 19일
  |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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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하느님의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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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해 주십니다. 그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 시간 사랑이신 주님의 희생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서 보면, 어린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사 때 제물로 사용된 동물입니다. 제물로서의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졌고, 그때 제물의 피는 속죄의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죄의 용서를 청한 것입니다.

둘째는 파스카의 어린양(탈출12,3-13)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때 이집트 왕 파라오가 완고하게 말을 듣지 않자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이의 죽음이었습니다.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맺돌 앞에 앉은 여종의 맏아들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들이 모조리 죽을 것이다.”(탈출11,5)

이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여 살리기 위하여 한 집에 한 마리씩 새끼 양을 잡아 제사 지내고 그 피를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도록 하여 이스라엘이 죽음의 재앙이라는 심판을 면하고 노예생활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에게 어린양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건너뛰다.”라는 의미의 파스카 축제가 지속되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희생양을 파스카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주님의 종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깍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53,7))을 얘기합니다. 여기서는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실 주님의 종이 도살자의 칼 아래 죽음을 당하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비유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언되신 주님의 종이 바로 그분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3.6)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의 죽음이 지닌 속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의 양이자 파스카의 양, 곧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없애시는 참된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의 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1요한4,10)

미사 안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찾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사제가 축성된 빵을 나누는 동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절한 청원과 평화를 갈망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기 직전 사제는 성체를 높이 들어 외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그리고 우리는 응답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이 말씀 안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죄의 용서와 평화의 선물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영성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의 삶을 오늘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속죄와 희생양이 되신 어린양을 모시는 우리의 행위에는 우리도 어린양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그러므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신심을 가지고 모시도록 하십시오.”

어떻게 보면 우리를 위해 밥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웃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는 내 밥이야!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며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내가 “네 밥이 되어 줄께!”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천치가 되는 세상입니다. 자기 이익과 권리만 주장하고 남의 권리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이 팽배해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똑똑한 사람은 넘쳐나고 갈수록 각박하고 메마른 사회가 되어갑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마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희생은 핀 한 개를 줍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다가오는 희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길만이 세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음을 믿고 희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어린양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자주 주님 앞에 무릎 굻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구원자이시며 희생제물이 되신 주님은 살아있는 성교회의 심장인 감실 안의 성체로 현존”(교황 바오로 6세)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루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바오로 사도를 봅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8-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 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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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20년 1월 19일
  |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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