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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우리 안에 사랑의 영으로 부활을
조회수 | 68
작성일 | 20.03.27
Isle of Purbeck.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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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우리 안에 사랑의 영으로 부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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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사순의 막바지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말씀을 오늘 듣게 됩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남유다 왕국이 유배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다시 무덤을 열어 살려 주시겠다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이나, 우리 모두가 죄 때문에 죽지만 그 죽을 몸을 그리스도의 영께서 다시 살리시리라는 바오로 사도의 희망의 말씀이나,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 기적의 말씀이나 모두 다시 살아남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결국 살아있을 때 거듭되는 부활의 체험이 죽음 뒤에도 부활을 가능케 함을 배우게 됩니다. 지금 여기, 살아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체험 되어지는 부활의 반복된 삶이 끝 날에도 부활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연쇄 살인범 유영철에게 아무 이유도 원한도 없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4대 독자인 아들까지 잃은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님은 살인범 유영철을 용서합니다. 용서를 넘어 그를 양아들로 삼아 때때로 유치장에 면회를 가 위로하고 감옥 안에서 필요한 것을 사라고 영치금까지 넣어 줍니다. 살인마 유영철도 다시 살았고, 용서해준 고정원 형제님도 깊은 원한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부활은 무덤에 묻힌 썩은 뼈에 살이 붙어 걸어 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내 자신의 아집과 고집과 이기심의 껍질을 깨뜨릴 때, 진정한 부활이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분노와 울분과 체념의 나락에서 다시 일어나 믿음의 희망으로 살아갈 때에 부활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의 크고 작은 도움으로 쓰러진 형제들이 기쁨으로 다시 일어설 때 그도 나도 부활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생활을 바꾸고 열정적인 기쁨으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그 같은 부활이 현재의 삶 안에서 거듭될 때 끝 날에 반드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시작은 여기에서부터입니다. 부활은 죽은 뒤에야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현재를 부활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채근담’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새벽 꿈에 갓 깨어 세상 만물 조용한 시간, 우리들 깨어날 때이다. 이때를 타서 잠시 자신의 내면을 살피시라. 그러면 비로소 깨달으리니, 이목구비 모두가 내 마음을 얽어매는 장애물이요, 정욕, 욕심 전부가 내 본심을 해치는 방해물임을.” 이기심과 욕심의 세상적 미몽에서 깨어남이 진정한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시편의 옛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사람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
들의 꽃처럼 피어나지만
바람이 그를 스치면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에 머무르고
당신의 의로움은 대대에 이르리라”(시편 103, 15~17).

우리의 죽을 육신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이같이 끝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자들이 부활을 살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반에서 거듭 확인되고 우리에게 ‘들으라’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고달픈 우리 인생의 여정에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함께 동행 하시겠노라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저 유명한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약속인 것입니다. 그 같은 희망과 사랑 안에 사는 삶이 부활의 시작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부활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 11).

결국 사도의 말씀은, 우리 안에 사랑의 영께서 계셔야 우리 또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6).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의 현존을 믿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때, 부활을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헨리 데이벗 소로우’는 신학자 ‘해리슨 블레이크’에게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가 생의 이 짧은 시간을 긴 시간의 법칙, 영원의 법칙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영원의 시간 속에 살아야 하는 부활의 참된 법칙은 하느님 사랑 안에 사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는 삶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은 부활의 영원한 삶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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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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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새로운 삶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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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인은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썩어서 냄새가 날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존재이지만 오늘 복음의 기쁜 소식은 주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력으로 부활을 이룰 수 있는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이것은 죽어서 부활하리라는 암시가 들어있는 희망이지만, 육신을 가지고 있는 현실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에게 현실적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기적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기적이 일어난다는 루르드 성지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정말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을까” 하는 기대에 차서 떠났습니다. 그곳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며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열성을 다해 순례를 마쳤습니다. 그런데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죄가 많아서 그런가?” 하며 자신을 반성하기도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기적을 기대하고 그곳을 찾아 갔으나 돌아 올 때는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고 부족함을 느끼며 돌아왔습니다.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는 본당신부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본당신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에게 루르드의 기적은, 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아니라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향하게 되었으며 자신을 반성하게 했던 그것이 바로 더 큰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그런 큰 기적은 다시 재현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타와 마리아가 고백했듯이 생명이신 하느님 부재 체험 같은 죽음은 항시 존재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내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의 소식을 듣는 순간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는 더 큰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26) 라는 말씀을 믿는 우리들도 새로운 생명의 마음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라자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죽음에서 벌떡 일어났듯이 우리도 그분의 소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육체에 끌려 살았던 죽을 운명에서 영으로 살아가는 부활의 생활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어 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벌떡 일어 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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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송병철 야고보 신부
  |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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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라자로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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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주인이시고, 모든 생과 사의 주관자이신 주님 앞에는 생과 사의 구별이 없다. 그 분 앞에는 죽었다하더라도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있는 것은 그대로 영원히 살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 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라고 했다. 하느님 앞에 죽음은 없다. 그 분은 시작의 그 어느 순간 전에도 살아계셨고, 마침의 어느 순간도 뛰어넘으시는 분이니까, 원래 살아있는 분이니까 그렇다. 생명은 하느님의 원래 모습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여주셨다.

오늘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언젠가 죽겠지만, 또 저렇게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예수께서는 라자로 뿐만 아니라 과부의 외아들도 살리셨고,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다 틀렸다고 사람들이 손을 내저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아이는 잠을 자고 있다’ 고 하셨다.

생과 사에 얽매여 살던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생과사의 주인이신 그 분 앞에 이 소녀는 이미 살아있는 것이다. 생명이신 주님 앞에는 죽음이 어울리지 않는다.

서기 125년 경에 씌어진, 그리스의 어떤 철학자가 당시 자기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발견된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신자들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새 종교집단이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그들의 신 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이 시체를 들고 묘지로 행렬할 때, 마치 소풍이 나가듯이 즐거이 노래를 부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며 행진 을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기고 갔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남겨주고 갔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는다. 때로는 하루하루가 너무 버겁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무슨 희망인가? 주님 안에 우리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이다.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는 생명이신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음에서부터 생명으로 걸어 나온다. 우리는 어쩌면 아직도 죽음의 세계에 갇혀 사는지 모른다. ‘주님, 저를 생명으로 불러내 주십시오’ 하고, 우리는 기도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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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오상현 요한 보스코 신부
2017년 4월 2일 춘천교구 주보에서
  |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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