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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하느님 사랑
조회수 | 121
작성일 | 20.06.26
[전주] 하느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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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고통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연인을 사랑하는 것도, 더 나아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희생과 고통이 없이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나 자식이나 부모님보다도 하느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알아야 하고,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되고, 미천하고, 버림받고, 보잘것없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께 사랑을 실천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마태 25,31-45 참조)

강도를 맞은 사람을 치유하고 이웃이 되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우리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이웃으로 우리가 살아가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희생과 고통이 함께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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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상섭 모세 신부
2020년 6월 28일 전주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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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과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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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오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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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세속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세속적인 것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소홀히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은, “내가 주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표현이 아니라 뜻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오 6,24).”라는 가르침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가족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사랑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예수님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가르침도 아니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이고, 신앙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또 가장 옆에 있는 영적 동반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2) 무조건 잘해 주고, 좋아하고, 아끼고, 보살피는 것,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선을 바탕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고, 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입니다. (선의 실현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집착일 뿐입니다.) 따라서 악을 물리치고 선만 지향하는 것,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만일에 가족이 어떤 죄를 짓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죄 속에서 살면서 멸망을 향해서 갈 때, 가족을 따라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족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고, 선과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3) 구원은 일차적으로 ‘내가’ 받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내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서’ 받고, ‘나 혼자서’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가족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또 이웃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 갖지 않고, 자기 혼자서만 구원받으려고 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얻은 구원은 구원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만 있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받아야 하고, 영원한 생명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특히 가족과 함께 받아서, 가족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족을 맺어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오 10,38).”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구분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또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우리가 보기에 십자가처럼 보이는 고난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인내와 고행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은 다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만일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들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날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십자가들을 만나게 되고, 그 십자가들이 무겁든지 가볍든지 간에, 또 크든지 작든지 간에, 그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신앙생활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십자가들이 싫어서 피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꼭 십자가가 필요한가? 예수님의 십자가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십자가 없이 그냥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1서 1,7).”

이 말은, “사람마다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정화하고 단련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어떻든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만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10,39).”

이 말씀의 뜻은, “현세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집착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집착이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세의 삶과 현세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본성을 누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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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0년 6월 28일
  |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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