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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조회수 | 129
작성일 | 20.10.23
[전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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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마태오 복음 22장 37절-38절)는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안의 버팀목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 작은 자를 크게 쓰십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비록 작은 자라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크게 쓰십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마음으로 준비된 자이며, 마음으로 열린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대한 헌신으로 마음이 열린 사람은 늘 아침마다 주어지는 하루에 감사하며, 매일을 새롭게 여는 사람들입니다.

요즈음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로 힘든 데다 많은 일들에 지쳐있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공부에 지쳐있고 얽매여 있습니다.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취업문제로 많이들 힘들어합니다. 어른들도 힘들어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돈 문제,
직장 문제, 건강 문제 또 가정의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나이드신 분들대로 아프고 외롭고 힘들어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먼저 헌신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믿고, 이 사랑으로 모든 일들을 헤쳐나가고, 이겨나갑니다. 이 사랑으로 가족들과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살면서 낙심할 일도 생기고, 걱정할 일도 생깁니다.

“주님께서 친히 네 앞에 서서 가시고 너와 함께 계시며 너를 버려두지도 저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니, 너는 두려워해서도 낙심해서도 안된다.”(신명기 31장 8절)라는 말씀대로 늘 주님의 크신 사랑 안에 또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 안에 머무르는 복된 삶이었으면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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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한병헌 필립보 신부
2020년 10월 25일 <전주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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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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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빛’을 선물로 주시려고 우릴 부르십니다. ‘진리 안에 사랑’으로 자유를 누리게 해주십니다. 사랑의 문화를 가꾸기 위해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돕는 소명에 응답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느님은 ‘자비의 얼굴’이십니다(탈출기 22장 26절).
주님께서는 이방인, 과부나 고아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주십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을 보호해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하고 미소한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테살로니카 교회의 모습을 전합니다(제2독서).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와 형제애를 나누는 삶이 그리스 지역교회(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신자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기다리는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랑의 교회입니다.

세기 초 이스라엘의 종교단체였던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율법의 준수를 지상 생명으로 여겼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가 주님과 부활 논쟁 끝에 말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파가 한데 모였습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대표로 주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유다 율법(모세 오경, 토라)에 기록된 계명에
밝은 율법 학자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요? 바리사이파는 토라에 613개의 계명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가운데 행하라는 명령은 우리 몸의 뼈와 장기의 수(248)와 같고, 해서는 안 되는 금령은 한해의 날 수(365)와 같답니다. 어느 누가 이들 계명의 법정신과 상대적 중요성을 알고 기억하겠습니까?

율법 교사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은 ‘하느님 사랑’(신명 6,5)입니다. 둘째 계명인 ‘이웃사랑’(레위기 19장 18절)도 이와 같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마태오 복음 22장 40절) 하시며 정설을 펴십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양한 인간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입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십계명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는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공동체 생활의 근본 규칙입니다. 초기 교회의 모습에서 보듯이 신앙의 조상들은 그룹 중심으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느님의 이미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모른 채 충실한 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회의 성사와 기도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친교 속에 한 분이신 것처럼 기도와 성사로 친교를 이루는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보답하라고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 15장 12절).”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22장 39절).
이웃사랑은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서 13장 9절)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마태오 복음 5장 17절)입니다. 사랑의 손길이 이웃에 따뜻이 전해질 때 사랑은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루카 복음 10장 29절 이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생 여정에서 주님께서 만나게 해주시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주님께서는 “
너희가 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40절).”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웃사랑의 기준은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많은 사람이 참된 자신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존심의 결여나 열등의식, 자기학대나 비하와 증오도 문제이지만,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매사에 자기 것만 챙기는 탐욕과 일등에 집착하는 ‘자기중심’에 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묵상집 「사랑」을 읽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예의 바른 행동이고, 이웃을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줍니다. 우상에 사랑을 빼앗기지 않고 이웃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희생이며, 마음의 문을 열고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용서하고 화해합니다. 사랑은 영원하기에 인내하는 가운데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성덕의 길로 나아가는 여정임을 마음에 새깁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코린토 2서 6장 16절)입니다.
기도와 성사로 사랑의 계단을 오르고,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내려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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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요한 세례자 –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2020년 10월 25일 <가톨릭신문>에서
  |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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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 마태오 복음 22장 34절-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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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오 복음 22장 34절-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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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나’ 사이의 사랑이 곧 신앙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절대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
또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계명의 근본정신’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 번째, 두 번째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랑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계명’은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계명의 근본정신’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즉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인데,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면서 너희를 사랑하시니 너희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요한 1서 4장 9절-10절).”

아버지와 아드님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일은, 당신 자신을(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신 일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라는 뜻입니다.)

1) “나는 지금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마음이 자꾸 다른 곳을 향하거나,
쓸데없는 것들이 마음속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거나, 두 마음을 품거나, 마음이 불순한 것들로 오염되어 있지는 않은가?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의 예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덤불’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오 복음 13장 22절).”

여기서 말씀의 숨을 막아버린다는 말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심각하게 방해한다는 것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걱정거리들 쪽으로 쏠려 있거나 유혹들 때문에 흐려져 있으면, 여러 갈래로 마음이 흐트러지게 되고,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서 7장 15정. 19절. 21절-24절)”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머리로는(생각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데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자꾸만 다른 쪽으로 가는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내 의지대로 통제가 안 되고, 이성과 마음이 충돌하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비참한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해법으로 ‘믿음과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서 7장 25절).”

이 말에는, 굳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느님(예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성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상태를, 또는 걱정들과 유혹들을 믿음과 기도로 극복할 수 있고, 그러면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흐트러져 있어서 기도를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기도를 하란 말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도가 안 된다면, 그럴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마귀가 끈질기게 방해하겠지만, 그 방해를 이기려면, 또 그 마귀를 물리치려면 우리 쪽에서도 더욱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마르코 복음 9장 29절).>

<살다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가 있고, 그런 일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가 기도할 때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 하느님의 힘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다면, “믿음이 부족하니까 걱정한다.”같은 무정한 말만 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2) “나는 지금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목숨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죽을 것처럼 힘든 사람은 “힘들어 죽겠다.”라는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을 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덜 힘들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체력이 약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이고, 사랑이 부족한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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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0년 10월 25일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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