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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23
작성일 | 23.02.16
▬ 사랑하라는 계명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은 이미 구약 시대에 생활의 근본 규범으로 제시되고, 하느님과 참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여부를 가리는 유일한 척도로 여겼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내용을 더 깊게 하고 그 범위를 모든 사람과 온 인류에게로 넓히셨다. 그리고 사랑만이 죄악과 죽음을 이겨내고 없앨 수 있음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추상적인 어떤 윤리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인류와 그리고 인류 역사와 맺는 올바른 관계를 말한다.

▬ 모든 사람을 네 몸처럼 아껴라.

인간집단을 올바른 인간사회로 만들려는 열망이 구약 성경 전체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특히 개인적인 복수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18절), 공동체가 미움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음을 역설했다(17절). 어떻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연대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야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집단적 선익과 개인적 선익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18절). 그렇게 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바라시는 거룩함이 실현된다(2절). 그 거룩함은 그냥 외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의 거룩함이 아니고, 하느님께 온전히 속한다는 뜻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며, 형제자매인 모든 사람과 맺는 친교로 증명되고 표현되는 거룩함이다. 형제자매인 모든 사람과 맺는 친교의 정도가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정도를 규정한다.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어떤 추상적인 원리에서 나오지 않고, 사람 자신 안에서 그리고 형제자매인 모든 사람과 맺는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나온다.

▬ 원수를 사랑하여라

구약 시대에 점차로 발전되어온 사랑의 개념과 범위를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확정짓고 넓히신다. ‘산위에서 행하신 설교’에서 율법을 순전히 겉으로만 지켜서는 아무 쓸모가 없고, 아주 새로운 생활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폐지를 주장하지 않고, 율법의 외형을 넘어서 그 내적인 깊은 요구를 채울 것을 바라신다. 그분은 사랑 속에 온갖 율법이 들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사랑의 범위를 인간성 자체에 기초를 두고 온 인류에게까지 넓히신다. 사람이라면 하나도 빼지 않고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 하나하나에게까지 미치는 사랑이라야 그리스도다운 사랑이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실천하신 사랑의 핵심이다. 때리면 같이 때려주고, 싫어하면 같이 싫어지고, 미워하면 같이 미워지고, 무정하면 같이 헐뜯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아니면 이해해주고 감싸주고 위로하고 참아주고 견디고 손해보고 용서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정말 사람다운 인정이가? 개인이나 소수 사람의 집단이 자기의 죄책감을 질식시키고 마비시킨 채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여지없이 짓밟고 그들의 땀과 피와 생명을 빼앗아갈 때, 그들이 취해야 할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소유인 재화와 능력을 자기 것인 양 거의 독점하고 욕심 사납게 소비하면서 또 계속 더 그러기 위해 군사력을 이용하여 경제적인 팽창주의와 패권주의를 강행하는 인정 없는 부자들과 불의한 부강국들을 앞에 두고 수탈당하는 인류 대부분인 가난한 사람들이 취해야 할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답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여라.”이다. 소극적으로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을 삭이고 폭력의 유혹을 뿌리치는 일이고, 적극적으로는 인정 없고 불의한 그들도 시공 안에 살아 있는 한 구원받아야 할 귀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들을 사람으로서 사랑하고 그들을 이기심의 마수에서 빼내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그리스도답게 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위력을 발휘하는 길밖에 없다. 세상의 죄를 대신 지고 없애는 어린 양이 되는 길 밖에 없다. 무작정 비굴하게 당하는 게 아니라 용기를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네 권익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면서 그리스도처럼 생명을 바치는 길밖에 없다. 이때 목적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의한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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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학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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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레위기 19,1-2.17-18) 해설

▪ 모든 사람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레위기 17-26에 수록되고 수집되어 있는 율법들을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9,2) 라는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율법을 ‘거룩한 율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장에 나오는 행동 규범 가운데 사랑하라는 계명이 들어 있다(17-18절). 사랑하라는 계명에는 부정문도 들어 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적의를 품지 말고 복수심을 불태우지 말라고 금하고 있다. 또 긍정문도 들어 있다. 즉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17ㄴ절)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ㄴ절)고 말한다.

사람들이 서로 형제자매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은 에제 3,17-19를 상기시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곧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고 살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유명한 말씀은 자기 동족 아끼기를 자기 자신 아끼듯 하라는 뜻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 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말씀을 인용하신 의도는 사람 모든 사람・온 인류를 껴안는 보편적 사랑에 있다. 예수께서 내리신 사랑하라는 계명은 내 자신・내 가정・내 지방・내 나라의 울타리를 없애고 뛰어넘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사실 온 인류를 화합하게 하고 전쟁을 끝내는 원리는 예수님의 사람사랑, 인류사랑 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가장 가까운 부모・자식・남편・아내를 진정으로 위해주고 아껴주는 길도 사람사랑・인류사랑과 연결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신명 6,5에 나오는 하느님사랑에다 사람사랑을 한데 묶어서 온갖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요약하신다.

▬ 시편 102 해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니

주님의 계명은 무지막지한 추상적 명령이나 강요가 아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은혜로이 개입하여 계약을 맺어주고, 그 계약에 따라 당신의 계명을 지키면 당신 사랑을 받고 당신 자신을 모시게 되는 무한한 행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형제자매인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인류공동체를 당신의 보편적 사람사랑의 원리로 화해하게 하고 일치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치셨기 때문에 우리도 인류 화합을 위해 생명을 바쳐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 제2독서(1코린 3,16-23) 해설

▪ 모든 것이 너희 것이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다

농사(6-9절)와 건축(9-15절)을 비유로 들면서 바오로는 구원을 선포하는 일에서 설교자들이 가진 역할과 그 한계를 분명히 밝힌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집단으로 일하는 일꾼에 지나지 않으며(9절), 하느님의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그 성전 안에 성령께서 거처하신다고 말한다(16-17절).

복음 선포의 직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개별로 제멋대로 그 직분을 수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서 집단으로 그리스도를 가운데 모시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 그 직분을 다양한 모양으로 또 시대와 장소와 상황에 맞추어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신자들도 파벌을 만들어 갈라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서 사회와 인류가 하나로 뭉치는데 누룩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개별로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신비스런 한 몸을 이루어 전달한다. 이 때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에 속하는 사람들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게 살아갈 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요 하느님 성전인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느님・그리스도・성령의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내세우고 전달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재물에 눈이 어두워지거나 그릇된 권력과 손잡는 일을 피할 수 있다.

▬ 복음(마태 5,38-48) 해설

▪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 대목은 예수께서 ‘산위에서 행하신 설교’의 종결 부분이다.

38절에서는 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에 나오는 보복에 관한 율법을 자유스럽게 인용한다. 예수께서는 이 율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신다. 이 예수님의 입장을 역설적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고 신비스럽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43-48절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신다. 모든 사람을 돌아서게 하여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느님의 포부요 구원경륜이다. 깜박거리는 호롱불을 저버리지 않고 꺾인 갈대를 잘라내지 않는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데 살아 움직이는 목적이 있다. 사람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감싸주고 용서해야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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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학연구소 제공
  |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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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기존의 모세 율법에 대해 심화하여 재해석해 주신 여섯 가지의 반대 명제 중 나머지 두 가지의 말씀을 지난주에 이어 듣는다.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문형이 계속 반복된다.

1.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오 5,38-48)

우선 오늘 복음의 첫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마태 5,38-39) 하신다. 초점은 ‘폭력’을 가해오는 이에게 어떻게 맞설 것인가에 관한 말씀이다. 구약에 있는 이른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고 알려지는 일종의 상호주의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폭력을 가해오는 이에게 몇 곱절의 폭력으로 갚아 주려고 쉽사리 달아오르는 것을 통제하고 예방하기 위한 법이다.

우리는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3ㄴ-24) 하고 야만적인 복수를 자랑스러워하던 노래를 기억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두고 동태복수법은 폭력에 대한 일종의 제한선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도 전쟁이나 종족분쟁, 혹은 테러리즘에서 몇 배로 응징한다는 복수의 현장을 목격할 때 오늘 말씀이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니다. 동태복수법 이외에 모세 시대의 대다수 부족은 ‘가족복수법’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정의 일원이 부당하게 살해되었을 때 그의 친족 가운데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 기회를 틈타 살인자를 죽이는 복수를 한다는 것이었다. 모세는 당시 그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던 다른 많은 법을 취하면서 이 법도 취했다.(참조. 민수 35,19)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온유와 겸손, 그리고 자비를 전제로 하는 비폭력의 실천 제안이자 역설逆說적으로 적극적인 저항을 뜻하시는 말씀이다. 이것만이 폭력의 연쇄반응을 멈출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비폭력의 저항에 관해 ‘뺨 맞는’ 실제 상황을 예로 드시면서 제자가 되고 싶다면 “다른 뺨을 돌려대어라” 하신다. 물리적인 실행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가해오는 이에 대한 마음가짐, 태도나 정신 자세를 역설力說하고자 하는 셈족 언어 식의 표현이라고 해도 상당히 과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근동에서는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는 것이 가장 모욕적인 행위이다. “다른 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약함이나 굴복, 혹은 비굴함이 아니다. 오히려 적을 무장해제 시키는 또 다른 힘이다. 내적인 강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제4복음서에서 성전 경비병 하나로부터 뺨을 맞으신 예수님께서 다른 쪽 뺨을 돌려대시지 않으면서도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하고 인내와 온유함으로 응대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제자에게 당부하신 이 말씀은 폭력에 직면하여 순진하거나 수동적일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항상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라는 말씀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 5,40) 하신다. 구약에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겉옷”을 빼앗지 말라는 약자 보호법(참조. 탈출 22,25-26 신명 24,10-13)이 있었다. “맞서다”는 직접적이든 개인적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일컫는다. ‘반대하고 나서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루카 21,15 사도 13,8 로마 13,2 갈라 2,11 야고 4,7 1베드 5,9에서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예수님께서는 불의가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라거나 그저 체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공격을 가해오는 이가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듣도록 하고 느끼도록 창조적인 태도를 보이라는 말씀이다. 부당한 일을 당할 때는 도망치지도 말고 침묵하지도 말아야 하며, 폭력이나 공격을 포기하면서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하는 말씀 그대로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길에서 로마 점령군들이 종종 요구하듯이)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1-42) 하신다. 복음의 논리는 악에 선을 행함으로 응대하고,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긍정적으로 응하는 것이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오 5,38-48)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반대 명제로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43)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말을 토라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는 없지만, 성경에는 원수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정당한 것이며 사실 요구되기까지 하는 내용이 있다. 특별히 개인적인 원수가 하느님의 원수로 느껴질 때는 당연히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종교인들의 전형적인 악덕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많은 종교인이 개인적인 원수가 있을 때 하느님이 자기 편이므로 당연히 그 원수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미워할 권리가 있다며 저주를 노래하기까지 한다. “주님,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가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거역하는 자들을 제가 업신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할 수 없는 미움으로 그들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원수가 되었습니다.”(시편 139,21-22) 하는 내용은 상징적인 한 예이다. 자칫하면 하느님의 지지를 받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종교인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쉽게, 더 잔혹하게 다른 이들을 미워할 수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꿈란의 문서가 『빛의 자녀들을 사랑할 것이며 어둠의 자녀들을 미워하여라.』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마치 알고라도 계시는 듯, 다른 이에 대한 미움 자체를 아예 차단하시듯이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하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과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22,39)라는 명령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원수요 적일지라도, 심지어 위해危害를 가해오면서 모욕을 줄 지라도, 그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기를 기도하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하신 대로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예외와 차별 없이 해(생명)를 비추시고 비(결실)를 내리시거늘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찌 그 누구를 두고 원수라고 분류하여 그를 미워할 수 있을 것인가. 바오로 사도는 이를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신명 32,35)’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잠언 25,21-22)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 12,19-21)”라고 풀이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구약의 논리를 뒤집는다. 구약의 시편에서는 원수를 대적하여 증오하며 기도한다고 하지만(참조. 시편 17,13;28,4;69,23-29 등),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8)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를 요청하시는 것은 이것이 하느님의 행위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로마 5,8.10)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유다인이나 이방인들과 다른 점이고, 예수님을 믿는 그분의 제자가 그분을 믿지 않는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것, 상호성이나 호혜성의 논리를 벗어나 사랑하는 것,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악을 선으로 갚는 용기를 가지며, 원수까지도 포용하는 사랑을 살고, 자기를 공격해오는 이들을 위해서까지도 그들의 행복과 선익과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한다. 독실한 정통 유다인 학자였으면서도 예수님에게 매료되었던 데이비드 플러서David Flusser(1917~2000년)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야말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유토피아로 남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명령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역사 안에서는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죽어가면서까지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하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로부터 수많은 이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행위(참조. 루카 23,34)를 반복해왔다.

3.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5,38-48)

예수님께서는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 하신다. 다시 말해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하는 이들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마태 5,45ㄴ), 모든 이를 그저 사랑으로 대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체험을 한다.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16)이시니 그분처럼,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인 ‘텔레이오이(τέλειοι, teleioi 완전한 자, 목표의 끝에 도달한 자)’가 될 수 있다. “완전하다(τέλειος, teleios)”라는 형용사는 4복음서 가운데에서 오직 마태오 복음에만 3회(마태 5,48;7,27;19,21) 등장한다. 토라에 있는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참조. 1베드 1,16)라는 내용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으로 재해석된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최상의 정의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를 의미심장하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땅에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는 말로 정리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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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이고자 한다면, 우리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그 응답으로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하였으므로 지체없이 다른 이를 먼저 사랑하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은혜롭게도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선에서 우리의 이익을 추구하지 말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설적이고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43) 하고 고대의 법을 인용하시고,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44ㄱ) 하시면서 엄숙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중하고 정확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입니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지 않고, 우리 친구들이나 우리 편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경계나 장벽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하도록 용기를 가지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잣대는 눈금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여느 사람들처럼 똑같이 그렇게 살면서 이러한 (예수님의) 요청을 얼마나 소홀히 했는지요! 그분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은 단순한 도전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핵심입니다. 보편적인 사랑의 계명에 관한 한 변명하지 말고 그럴듯한 말로 치장하지 맙시다.…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극단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극단주의라는 그리스도교의 유일하게 합법적인 극단주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이 미사와 미사 후에 우리 자신에게 반복하고, 또 우리를 나쁘게 대하는 이들, 우리를 귀찮게 하는 이들,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들, 조용한 우리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에게 적용하면서 잘 실천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봅시다. “내가 내 삶에서 나의 원수들에 대하여, 나를 싫어하는 이들에 대하여 진정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다른 이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 여러분들을 나쁘게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여러분 마음의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원수가 없습니다.…“이상향을 이해는 하지만 인생이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야. 사랑하고 용서만 한다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모두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라면서 충분히 반대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논리나 사물을 보는 방식이 패자(루저)의 논리란 말입니까? 세상의 눈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하느님의 눈으로는 승자의 논리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3,18-19)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시고 이기는 법을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은 오직 선으로써만 이길 수 있음을 아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칼이 아니라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정복자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으로 우리 믿음을 지키려고 하면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인간성의 기준을 높이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목표라면 주님께서 그렇게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사랑할 힘을 주시라고 청합시다. 하느님께 “주님, 사랑하도록 저를 도우소서. 용서하도록 저를 가르치소서.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고 말씀드립시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장애물이나 어려움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형제요 자매로 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도움이나 필요를 간청하면서도 사랑하는 법을 위해서는 얼마나 자주 기도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복음의 본질을 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자주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저녁에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을 받을 것”(십자가의 성 요한, 빛과 사랑의 말, 57)이기 때문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평화의 국경인 지중해-성찰과 영성을 위한 모임’을 위한 방문지 바리Bari에서의 미사 강론, 2020년 2월 23일, 영문에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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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3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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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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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7주일입니다.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613개나 되던 율법의 개수는 양적으로 줄이시고 그 질적인 내용은 더욱 심오하게 하시면서 율법을 법고창신하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주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사법제도와 구약의 율법제도를 더욱 완성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하느님의 인간 사랑과 교차 접속하여 더욱 심화시키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벌을 다루는 형벌제도를 단순히 권선징악의 민담수준이나 혹은 실정법의 수준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신앙적(信仰的)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완성시키십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옛 계명들을 인간의 성성과 완전성의 차원에서 그 내용과 외연을 압축하고 팽창시켜 격(格)을 높이십니다.

토마스 머튼이 남긴 영성적 명언에 ‘거룩한 사람, 거룩한 한 사람의 힘은 불타는 지옥 전체의 힘보다 더 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한 사람’이 누구인가? 물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아니고도, 누군가 거룩한 한 사람이 있으면 전체 지옥의 힘보다 더 셀 수 있습니다. 그만큼 거룩한 사람의 영성적인 힘은 숫자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룩한 한 사람의 힘도 이렇게 크면 거룩한 여러 사람의 힘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아무튼 우리가 지옥의 세력을 쳐 이기려면 우리 중에 거룩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오늘 전례말씀은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주제의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제2독서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시니 너희 모두는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내용을 단순히 병렬식으로 나열해보면 이렇습니다.

제1독서에서 레위기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삶이 거룩하지 못하면 그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레위기는 계속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답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영세 받은 모든 사람은 전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고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영께서 함께 계신다고 선포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처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의 몸과의 일치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은 성전답게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단순히 나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궁전이고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고린 3,23) 우리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진리를 오늘 복음에서는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됨(마태 5, 45)으로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하라고 권고합니다. 성전인 공동체가 파괴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내세우지 말고, 또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특별히 바오로 사도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성전을 건물로 생각하였는데 바오로 사도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의 공동체나 그 공동체의 지체 즉 가지를 살아있는 움직이는 성전(聖殿)으로 봅니다. 옛날에는 성전을 건물적인 개념으로 봤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경향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백성 자체 혹은 그리스도의 신비체 자체를 성전으로 보고, 그것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성스러움을 보존하는 아주 중요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성전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전이 우리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에서 강조되는 것은‘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놀랍게도 그 완전성의 기준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거룩함’과 ‘완전함’은 그 뉘앙스로 보면 얼핏 거의 같은 뜻을 의미하긴 합니다. 전자는 종교적인 용어이고 후자는 철학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범한 죄와 존재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거룩함과 완전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성과 완전성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인간이 금수(禽獸)와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이 거룩함의 영역입니다. 이 신성함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체험은 한편으로는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항상 가슴 떨리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명령들을 연속적으로 몇 가지 언급하십니다. 이것들은 정말 지키기 힘든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동형동태복수법을 폐기합니다. 동형동태복수법이란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것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뼈에는 뼈’입니다. “법전 196조,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으면, 그의 눈도 멀게 되어야 한다. 197조,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렸으면, 그의 뼈도 부러져야 한다. 200조, 만일 어떤 사람이 그와 동등한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으면, 그의 이빨도 부러뜨려야 한다.”그리고 구약에서는 그것이 이렇게 나옵니다.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출애 21, 23-25)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함과 완전함은 전례를 통해 드러나는 경건함만이 아니라 인간의 복수심과 폭력성을 가능한 한 최대치로 극복하는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에는 눈’이라고 하는 복수법은 너무 가혹한 것 같지만, 복수의 악순환과 폭력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합리적인 고육지책입니다. 당하기만 하면서 그냥 참고 아무런 리액션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사적 보복은 금지되고 국가에서 공적으로 처벌한다는 원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의와 공정을 세우고 한풀이를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어디까지나 재발방지와 예방이 그 주된 목적입니다. 더 큰 복수와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만한 것을 던지면 이만한 것이 날아오고 이만한 것을 던지면 저쪽에는 바위덩어리가 날아옵니다. 그래서 과잉보복이나 권력남용을 하지 말고 복수를 딱 알맞게만 하라는 뜻입니다.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이런 합리적인 법이 없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지경이 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괘씸죄에 걸려있는 머슴이 고약한 사또의 고귀한 삼대독자인 아드님의 손톱을 다치게 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 미운 머슴은 어떤 처벌을 받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사또는‘네 죄를 네가 알렸다’하면서 주리를 틀고 곤장을 칠 것입니다. 전혀 형평에 맞지 않게 심지어 죽여 버릴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 세상은 깃발을 찢어 완장을 만들어 찬 갑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문명화된 요즘도 힘 약한 사람은 억울하게 당합니다. 당해보지 않은 갑(甲)들은 세상이 얼마나 불공정하고 부조리한지를 모릅니다. 바로 이러한 과잉 복수와 권력남용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 동형복수법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만민은 법 앞에 평등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동형복수법 마저도 예수님께서는 폐지하십니다.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점점 어려운 말씀을 강도를 높여 발화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것도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이 원수가 나를 그만 박해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는 있겠지만 ‘이 원수가 더 잘 되고 나를 더 잘 박해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형용모순입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원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수라는 개념 안에는 사랑이 파고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동그라미이면서 삼각형 혹은 따뜻한 냉커피와 같은 상호모순적인 개념입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원수입니다. 농담으로 할머니가 할아버지 신랑에게 ‘평생웬수’라고 할 때의 ‘웬수’는 용서할 수 있는 ‘원수’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갖가지 해꼬지를 한 원수는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가 위선적이지 않는 이상 나의 권리를 짓밟아 만신창이로 만든 내 원수를 용서하기는 어렵습니다. 개념상 원수와 사랑은 서로 길항적 관계이기에 원수는 사랑할 수 없기에 원수이고 사랑할 수 있다면 원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먹어서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원수가 아닙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원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을 원수라고 하지 용서되는 사람이면 이웃이고 형제자매입니다. 원수’라는 개념은 단순히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해꽂이를 행하는 사람들,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44절)이 원수입니다. 전쟁에서 우군이 아닌 적이 원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용서할 수 없는 원수를 오히려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원수는 가까이 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원수가 되기도 어렵습니다. 용서할 수 없고 꼭 원수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원수입니다. 내가 복수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충분한 이상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용서하고, 박해하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고 원수는 혼노지에 있습니다. 원수는 혼노지(혼노사)에 있다는 말은 전국시대를 배경으로하는 실제 사건에서 유래하는 일본 속담입니다.

'원수는 집에 있다'라는 라틴어 속담도 있습니다. 집에 가서 가까이 있는 웬수를 사랑하려고 한 번 해 보십시오. 사랑하려고 노력하다가도 그냥 하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한 번은 억지로나마 위선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화법의 동사형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진리를 동반하는 현재형 시제이며 명령형어법입니다. 언제나 항상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고 정말 어려운 명령입니다.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고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갖다 대줄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하다가는 남아 날 뺨이 없을 것입니다. 내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줄 수 있습니까? 속옷 내주고 겉옷마저 내어주면 알몸입니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다보면 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지꼴 면하지 못합니다. 알거지가 됩니다. 천 걸음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 같이 가 줄 수 있습니까?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까? ‘저 사람이 나를 더 이상 박해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를 계속 잘 박해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거나 그 사람을 참으로 축복해주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강론하기도 어렵습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복수하지 마라고 하는데 복수를 안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힘이 약하거나 복수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복수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끔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복수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복수를 안 하는 것은 위선적이거나 힘이 없거나 사법제도에 따라 나도 역시 처벌받을까 두려워서 못하는 것이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당한 것을 복수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원수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를 말하는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노? 깊은 회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정말 엄중하다는 것을 또 한 번 크게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비교의 척도를 직접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취해야 할 ‘성성’은 결코 끝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어려운 원수 사랑의 근거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하심, 즉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이심을 밝혀줍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마태 5,45) 하느님의 사랑의 모범을 따라 편협한 마음이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실천하기 힘든 이웃사랑의 계명입니다.

다른 한편,‘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대목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볼 것은 ‘완전하다’라는 이 성서적 표현입니다. 완전한(텔레이오스, Teleios)이라는 형용사는 목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텔로스(τέλος, Telos)라는 명사의 활용입니다. 따라서 텔로스를 우리말로 번역하다보니 ‘완전한’으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말에 ‘온전한’이란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좀 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 ‘온전한’이란 상황적이고 기능적으로 ‘완전한’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텔렐이오스는 철학에서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이에 비해 어른이 텔레이오스이고, 학생에 비해 스승이 텔레이오스라고 하는데 그 관념은 관계적(relationel)입니다. 관계적이라 함은 상대적(relative)인 것과는 구별됩니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고 생성소멸(生成消滅)하는 우주 안에서 하느님 백성을 향한 신적 구원경륜의 각 단계에 따라 그 때 그때의 목적과 본질이 완수되면, 그것이 하나의 흠 없는 텔레이오스 즉 ‘온전함’이 됩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한 인간이 노마드의 유랑인생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회개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순간의 특이점(Le point singular)이 다 바로 텔레이오스입니다. 텔레이오스의 어근이 되는 그리스어 텔로스는 원래 끝, 한계, 마지막, 목적, 목표, 과녁, 표적, 본질, 완전(完全), 온전함, 사용료, 요금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쓴 성서 특유의 과장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문제에 관해 활쏘기와 교차하여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활쏘기를 자주 봅니다. 우리가 사격이나 양궁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활을 쏠 적에 그냥 허공에다 막 쏘는 것이 아닙니다. 과녁을 정해 놓고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쏩니다. 군대생활하신 분들은 사격을 해 봤을 텐데, 사격할 때도 표적을 정해 놓고 총을 쏩니다. 이렇게 과녁이나 목적을 정해놓고 거기에 딱 맞추어 나가는 적중(的中) 과정을 성서에서는 완전하게 되어가는 과정으로 표현합니다. 원죄와 각종 죄악으로 물든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목표로 삼아라’‘과녁으로 삼아라’하는 것은 그야말로 완전성을 적(的)으로 삼아 적(敵)을 적중(的中)하도록 노력할 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적(適)을 적(的)으로 삼아 가끔 적중(的中)시키는 것이 목표이지, 본인이 적(的)자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과녁으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的中에서 적은 과녁 적(的)자입니다. 그리고 중은 가운데 중(中)입니다. 그래서 적중은 과녁을 제대로 겨누어 그 한 가운데를 정확하게 맞힌다는 의미입니다. 적중하기 위해서는 겨눠야 할 과녁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포착한 후, 온 몸의 촉과 신경을 모아 거기에 역량을 제대로 집중해야 합니다. 화살을 쏘았는데 적중할 수도 있고 적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적중시키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야 합니다. 집중해야 적중됩니다. 우리가 거룩함이나 완전함에 적중하여 성취를 한 번 완수하였다 하더라도 겨누기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적중은 적당(的當)의 문제가 아니라 적확(的確) 혹은 적부(的否)의 문제입니다. 적당히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단계로 이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중에 실패하였다면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 다시 정성을 다하여 탈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해현경장해야 합니다.

성서적 ‘온전함’은 철학적 ‘완전성’과는 결이 좀 다릅니다. 온전함 즉 톨레이오스는 조금도 결여나 결핍이 없는 동그라미와 같이 절대불변의 화석 같은 박제된 완전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마드로서의 인생관과 그 과정에서 노력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 완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각각의 누빔점에서의 기능적으로 적중하는 온전함이 강조됩니다. 사격이든 양궁이든 빗나갈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목적을 향해서 쏘아 적중하고자 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고 인간학적 관점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다른 한편, 오늘 제2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 뺨마저 대주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사람에게 그 갑절인 이천 걸음을 함께 가주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명령들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신 예수님의‘십자가의 어리석음’앞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 ‘바보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돌아가신 차동엽 신부는 ‘바보예찬’을 노래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 분들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짊어지고 ‘바보들의 행진’에 참여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을 따라 조금이라도 거룩해지고 완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쪼록 예수님의 말씀들이 실생활에서 지키기 어렵더라도, ‘원수를 사랑하라,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과녁으로 삼아 놓고 그것에 적중하려고 노력하는 바보들의 행진을 해 나가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매 순간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느님을 닮아 우리의 삶도 조금이라도 더 온전해지고 거룩해지는 그런 시간이 되면, 그것 자체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축복이겠습니다.

은총의 질서에서는, 내가 쏜 화살이 과녁에 완전하게 적중(的中)하는 것이 아니라 과녁이 내가 쏜 화살에 날아와 온전히 맞아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다 완전히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원수사랑이라는 과녁을 향해 나름대로 겨누고 또 겨누고, 쏘고, 빗나가더라도 또 쏘고 적중해도 또 쏘는 바보같은 삶을 살면 은혜로운 한 주간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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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3년 2월 19일
  | 02.16
528 43.6%
원수를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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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오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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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사적으로 앙갚음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이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라는
가르침입니다(로마서 12,17-21).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고,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인간 세상의 일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라는 교회 격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바로 그 일을
본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구약시대 율법은
원래는 과잉 처벌을 방지하기 위한 율법이었습니다.
처벌은 죄에 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은 구석기시대의 관습 같은 것이었습니다.
진보된 사회에서 사법제도를 제대로 운용하기 전의
낡은 사고방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악인의 악행을 처벌하는 일은, 개인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공적인 사법제도에 맡겨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의의 실현’은 외면하고 ‘사랑의 실천’만 강조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약탈당하는 일이 없는 세상,
또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악법을 만들어서
횡포를 부리는 일이 없는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악을 조장하고 방관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악이 됩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한 폭력이 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악인에게 악으로 맞서지 마라.”입니다.
우리는 악에 맞서야 하고, 악을 물리쳐서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선이어야 합니다.
실제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나를 대하시는 사랑”으로 바꿔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곧바로 처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나를 대하십니다.
‘나의 죄’를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내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심판과 처벌이 내릴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오 5,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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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 때의 ‘원수’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유대교를 박해하는 이방 민족들이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은 구약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은 많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에 우상 숭배를 미워하라고 가르친 것은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우상 숭배자들과 박해자들뿐만 아니라
사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앞에 있는 “악을 선으로 갚아라.” 라는 가르침과
같은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든 누구에게나 미운 건 미운 거고, 싫은 건 싫은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감정’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신앙인의 실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원수 같은 자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도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곧바로 천벌을
내리신다면, 아마도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갑작스럽게 어떤 사고를 당하거나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천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가끔,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로데처럼
천벌을 받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사도행전 12,23).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5,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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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랑에는 차별도, 차이도 없어야 하고, 울타리도 없어야 합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는 일 자체를 하면 안 됩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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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3년 2월 19일
  | 02.17
528 43.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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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말씀으로 저희 삶을 비춰 주소서.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 103,1-2) 오늘 화답송인 이 시편은 저의 애송 시편입니다. 이 시인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은총 가운데 있거나 죄를 지었거나 하느님이 저에게 해주신 일을 기억하면서 제 상황과 상관없이 한결같이 자비로운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이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가르칩니다.

■ 복음의 맥락

사순시기를 앞둔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마태 5-7) 절정에 해당합니다. 복음은 두 단락(5,38-42; 5,43-48)으로 이뤄지는데 주제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사랑하고 용서하라 입니다. 마태오의 청중은 대부분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종교적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척도는 ‘마음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사랑으로 행동했는가?”보다 “나는 율법에 순종했는가? 어떤 규칙을 어긴 적은 없는가?”를 질문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율법주의를 넘어 그리스도인의 특성인 참된 사랑을 실천하라고 초대합니다.

■ 폭력을 포기하여라

예수님은 먼저 고대의 ‘동태 복수법’에서 출발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무한하신 선하심과 자비’를 삶의 방향으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늘나라 선포로 가능하게 됐습니다. 폭력을 포기한 것은 예수님이 수난에서 보여 주신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태도는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놀라운 교육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지점에 이르는 첫 단계는 폭력에 폭력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 비폭력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느린 여정을 요구합니다.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며 훈련, 절제, 분노의 본능과 미움의 유혹을 거스르는 투쟁, 식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 안에서 동태 복수법은 폭력을 완화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과 나약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서 악을 근본적으로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모욕에 아예 응답하지 않는 것, 가장 수동적인 행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아십니다. 이렇게 해서 악의 탄생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는 자신이 겪는 큰 어려움 안에서도 자신이 이미 받은 하느님 사랑의 관점에서 모든 이의 선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응답합니다.

■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어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이웃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 가족, 친구, 동료, 동족, 넓게는 타자도 포함됩니다. 이웃은 한 마디로 ‘나의 사람들’입니다. 나와 가까운 이들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인데 왜 굳이 지켜야할 계명으로 정해놓고 항상 지키게 했을까요? 아마도 우리가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나의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수는 집 안에 있다”라는 라틴 속담이 있습니다. ‘나의 사람들’을 존경과 예의로 대하기보다 내 만족과 필요에 따라 그들을 대하지는 않습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내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초대입니다. 내 이웃을 거룩한 ‘주님의 성전’(1코린 3,16-23), 고유한 소명과 은사를 가진 하느님 자녀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진정한 이웃 사랑이 태어납니다. “나는 우리 안에서 우리 편에서 먼저 행함이 없이 세상 밖에서 세상을 향상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네덜란드 작가 에티 힐레줌).

■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은 이웃만이 아니라 박해하는 원수들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원수’에 해당하는 원어는 ‘미움, 적대, 반대’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서 박해자, 이교인, 우상숭배자,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변질시키는 사람들인데 온갖 형태로 우리를 미워하고 반대하면서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이를 상징합니다.

‘사랑하다’(아가파오(?γαπ?ω)라는 동사는 신약에서 개인의 감정적인 사랑보다는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봉헌하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교육 받고 훈련돼야 하는 사랑입니다. 지식(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악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것, 말의 신중함, 현실 관계에서 적응하는 능력)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 사랑입니다.(필리 1,9-11)

나아가 예수님은 원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기도와 연결하십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 은총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신비에 비춰서, 완전하고 흠 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내적으로 가장 큰 에너지, 즉 신앙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되어라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랑의 계명을 아버지의 모범과 연결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완전한’(텔레이오스(τ?λει??)이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완성한, 이룬’이라는 뜻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모델로 삼아 우리도 이 지상에서 사랑을 완성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 때문에, 말과 행위로 하느님의 완전함을 보여주신 것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랑에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완전한’이라는 말은 ‘거룩한’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인간에 대한 자비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어떤 의무를 강요하기보다는 우리 존재의 뿌리, 우리가 하느님 자녀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유다 교육 철학의 모토는 “너희 창조주를 본받으라”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인 복음서에서 오늘도 사랑의 수업을 받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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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가톨릭신문 2020년 2월 23일
  | 02.17
528 43.6%
제1독서(레위 19,1-2.17-18)는
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계명은 다른 모든 계명들의 뿌리로서, 레위 19장에서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의 반복(15번)에서 드러나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이자 요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뜻을 담기 위해 하느님처럼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 닮아야만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라는 것으로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근본 바탕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몸소 그 거룩함과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실 테니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이 실천해야 한다는 일종의 계약조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수민족으로서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신을 섬기는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죄인인 인간이 하느님을 뵙기를 원한다면(이사 6,5) 거룩해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간직할 수 있는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미움과 앙심이 아니라 꾸짖음과 사랑을 앞세워야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게 되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오로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복음(마태 5,38-48)은
여섯 가지 계명에서 마지막 두 가지를 반명제로 대조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무리한 요구로 들리겠지만,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악습에 물들지 말고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고, 하느님을 본받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말하는 동태복수법(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이 아니라 네 가지 행위를 제시하면서, 어디까지 견뎌내야 하는지 때로는 모호하지만,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맞는다는 것은 왼손이나 오른손의 손등으로 맞는 것으로서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불명예와 치욕을 안겨준다는 뜻입니다(애가 3,30; 이사 50,6).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뺨을 때릴 때 다른 뺨을 내밀지 않으셨고, 당신께서 잘못했다는 증거도 없으면서 왜 뺨을 때리냐고 저항하셨습니다(마르 14,65; 요한 18,23). 그런데도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는 것은 혹시 잘못이 있다면 선처를 구하라는 것이며,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옷을 달라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라시는데 겉옷은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옷입니다. 율법에 따른다면 가난한 사람의 겉옷을 담보물로 잡아둔 채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 되며, 가난한 이가 겉옷을 덮고 잘 수 있게 돌려주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탈출 22,26; 신명 24,12-13). 가난한 이들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밤에 잠을 자기 위해서는 이부자리 역할을 하는 겉옷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천 걸음을 가자는 것은 아마도 채권자가 위험한 지역으로 여행할 때 채무자에게 동반을 요구한 것 같습니다. 조금 비굴함을 느끼게 합니다만, 당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강자의 난폭함에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앞의 세 가지와는 달리. 마지막으로 재산을 가진 이들에게 자신의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고 합니다. 결국 무자비하게 앙갚음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어디에도 “네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라는 말은 없는데 왜 그러셨는지 의문이지만, 이 말씀은 레위기(19,16-18)의 배경을 밝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사랑의 한계를 정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면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5,20), 하느님 아버지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되라고 하십니다. 또한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라는 것이며(레위 19,2), 하느님의 자비만큼 그런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며(루카 6,36),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그들을 이기기가 어려우므로 하느님께서 그들을 변화시켜주시도록 기도하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운 일일지라도, 이렇게 이웃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정의는 결국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당신(5,17)께서 먼저 실천하실 것입니다.

제2독서(1코린 3,16-23)는
이웃사랑의 근거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 사랑이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는(로마 8,9)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고, 그런 이들이 모인 공동체 역시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분열되어서는(1,10) 안 된다고 합니다. 코린토에 여러 봉사자(바오로, 아폴로, 예루살렘의 추천받은 이들: 2코린 3,1)가 와서 복음을 선포했으면, 남는 것은 복음과 기쁨뿐이어야 하는 데, 봉사자들의 인간적 매력에 이끌려 공동체가 분열된 것을 바오로는 하느님의 성전이 파괴된 것이라고 합니다. 코린토 공동체의 분열과 무질서는 얄팍한 세속적 지혜와 인간적 지식에 의존해서 생긴 파벌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데도(1,25),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2,14). 또한 복음 선포자들의 인간적 매력은 순간적이고 세속적임에도 그것에 이끌려 공동체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것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분이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코린토 공동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거룩한 성전이라서 만일 파괴된다면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지 않으므로 혼돈과 무질서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간직하지 못하거나, 완전하게 되려고 하지 않거나, 자비를 베풀지 못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머무르실 성전인 우리를 떠나실 것이고, 남는 것은 분열과 혼란뿐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는 성전(제2독서)이 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처럼 거룩하게 되라면서(제1독서) 그 근거를 하느님의 자비(복음과 화답송)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를 겪더라도 복수는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복수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레위기 19,18). 비굴함을 느낄지라도 복수가 아니라 사랑으로 갚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악인들의 난폭함에 당시에 만연되었던 방식(동태복수법), 즉 율법대로 맞서지 말라시는 데, 폭력으로는 계속되는 악행을 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로 대사제 종의 귀를 잘라 버리자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면서 폭력을 반대하셨습니다(마태오 26,51-54).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비폭력적이라야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라는 것은 완전하게 되라는 것이며(마태오 5,48),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루카 6,36),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요한13,34; 15,12.17). 완전하게 되려는 사람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갈라지지 않으려 애쓰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비록 힘들더라도 예수님을 닮으려고 무척 노력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보다 훨씬 더 의로워지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마태오 5,20) 사랑을 실천하면서 거룩해지려는 것입니다. 양의 옷차림이지만 이리 같은 사람이 되지 않고(마태오 17,15),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합니다(마태오 7,21).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는 사람이라면 거룩하기에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정의에 바탕을 두어야 하므로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는 꾸짖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성전인 코린토 공동체가 인간적인 매력에 얽매인 나머지 파벌을 만들어 서로 헐뜯고 분열되었듯이, 우리도 인간적 아픔이나 분노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거룩하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자기를 미워하는 이들까지도 사랑할 구실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의지하면서 돌려받을 것이 아니라 돌려받지 못할 사랑을 실천하도록 애를 써야 하겠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기에 거룩하므로 미움이나 다툼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간직하기 위해 세속적인 악습에서 벗어난 특별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이들이 사는 가정도 역시 거룩한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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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3년 2월 19일
  | 02.18
528 43.6%
[수원] 율법과 예수님의 사랑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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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도 모든 율법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드높은 정의 즉 사랑의 법에로 모아지고 있다. 즉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의 모범을 따라 편협한 마음이나 감정에 사로잡힘이 없이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신약성경의 핵심 부분을 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은총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우리가 실현시킬 수 있는 어려운 복음이기도 하다. 이 계명은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그 가르침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1독서: 레위 19,1-2.17-18: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제1독서에서는 “나, 주 너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2절)는 일반적인 권고의 말씀이 이웃사랑의 내용에 앞서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은 복음의 결론 부분에서 의미 깊게 재조명하고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 말씀은 성성에 있어서는 비교의 기준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성성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성성은 인간을 내면으로부터 변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내적인 윤리적 요소이다. 복수심에 찬 앙심을 버리고 충고를 한다는 것이(17-18절) 이미 성성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절)는 말씀에서 이 이웃은 신앙의 혹은 종족의 의미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확대시키실(마태 22,37-40 참조) 최고 영성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성성의 모델이시며 사랑의 모델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모두 사랑하시고 또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니, 그 자녀들 역시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 마태 5,38-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38-42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입은 손해나 상해에 대한 보상은 실제로 해를 입은 정도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동태복수법(탈출 21,24-25; 레위 24,17-20; 신명 19,21 참조)을 폐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법을 역설적으로 뒤엎으시며 비폭력적인 법을 끌어들이신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39절)뿐만 아니라 폭력을 제압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그가 요구하는 것 이상을 양보하는 것이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39-40절)

이 말은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닐까?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자기 목숨을 다해서라도 기꺼이 들어주려고 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거기서는 폭력의 의미가 상실되고 만다. 즉 사랑으로 정의의 차원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모두 더욱더 사랑한다면 인간적인 정의의 법정이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43-48절) 여기서 원수라는 개념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 또한 신앙상의 이유로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44절)이다. 신앙인들은 그들에 대해 자비와 이해심을 가져야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미워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4-45절)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제시하신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는다면 그분의 자녀이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산다면 우리는 그분을 닮아 그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사랑은 원수에 대한 사랑에서 최고로 표현된다. 이 사랑을 통해 신앙인다운 특징이 드러난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을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46절) 그리스도인들은 이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고유한 특징을 드러내며,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분될 것이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요한 바쉘레라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저의 부친을 해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복수가 아니라 용서하게 하시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게 하심으로써 흠없는 정의를 이루게 하소서.”

제2독서: 1코린 3,16-23: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코린토 교회는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서로서로 적대시하며 싸움에 휩싸여있었다. 그리하여 코린토 공동체는 그리스도께 의존하지 않고 바오로나 베드로 같은 인간들에게 더 의존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함으로써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의지할 때 하느님의 성전은 서 있지 못하고 만다. 반대로,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그리스도께 맡길 때 구원될 수 있다. 또한,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선물이 될 것이다.

오늘의 많은 신자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원수들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원수들을 새롭고도 근본적인 자세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그 사랑을 교회 공동체 생활의 본질적 차원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이때 코린토 교회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어려움이 극복될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21.23절)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하느님의 계명 율법이 더 적극적인 삶으로 은총의 복음이 되도록 주님의 가르침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구원의 복음이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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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0년 2월 23일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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