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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240
작성일 | 23.03.09
초대교회에서는 사순시기를 현재의 사순 제3주일부터 3주간만을 지냈고(성주간을 포함하면 4주간), 이 기간을 새로운 영세자들을 위한 집중적인 세례 준비 기간으로 지냈다. 통상적으로 사순 제3주일은 세례 준비자들을 위해 첫째 수련식을 거행하는 주일이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부터 지내는 이후 주일의 복음 주제들과 잘 어울린다. ‘다’해를 제외한 ‘가’, ‘나’해에는 이후 3주간 동안 요한복음으로 주일 복음을 듣는다. 올해인 ‘가’해의 사순 제3, 4, 5주일에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샘)→태생소경의 치유(그리스도는 우리의 빛)→라자로의 부활(그리스도는 부활이시며 생명의 주인) 순으로 복음 내용이 전개된다. 이렇게 이번 주부터 이어지는 3주간의 상징어들을 열거하면, “물”→“빛”→“생명”이다. 교회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의 깊은 의미를 더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시는 장면을 묵상하면서 생명수의 은총에 대한 계시를 만나게 된다.(*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신다. 아브라함의 종과 레베카의 만남(창세 24,11-14), 야곱과 라헬의 만남(창세 29,9-11), 모세와 미디안 땅에 살던 사제 르우엘의 딸들과의 만남(탈출 2,15-22) 등 구약성경에서도 우물이라는 배경 아래 여러 다른 사람들이 각각 다른 형태로 만난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 계곡을 따라 유다 지역으로부터 갈릴래아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시는 여정 속에 계신다. 그런데 복음사가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만) 했다.”(요한 4,4)라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길을 잡으신 까닭은 비단 지리적인 필요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것뿐이 아니라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께 순명하기 위해 거룩한 지향으로 그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사명은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하고 몸소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과는 분리되어 있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거부하며 그리짐이라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지었던 사마리아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들이라고 멸시하고 배척하던 이들까지도 만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결정과 행동은 장벽을 허물고자 하신 것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로부터는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하는 것”(요한 8,48), 즉 이스라엘인으로부터는 배신자요 변절자라는 비난이나 모욕, 그리고 고발까지도 감수할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사이에 있었 오랜 불목의 역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이 남南과 북北으로 갈라지는데, 사마리아가 포함된 북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게 점령을 당하였고, 아시리아가 민족 말살 정책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혼혈로 만들어 남왕국이 보기에 사마리아는 이방인의 지역이 된다. 예루살렘이 포함된 남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에게 점령을 당하지만, 민족의 순수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바빌론은 다시 기원전 550년에 페르샤에 점령을 당하는데,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샤 왕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37년에 칙령으로 바빌론에 억류된 유다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한편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축을 허용한다. 이때 유다인들 중에는 70년 이상 억류되었던 이들도 있었다. 나름대로 족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이미 북왕국이 민족의 순수 혈통을 잃었다고 북왕국을 멸시하던 남왕국 유다인들은 성전 재건축에 비용을 보태겠다는 북왕국 사람들의 호의를 무시하였고, 이에 북왕국 사람들이 기원전 432년경 모세가 율법을 선포했다고 알려지는(신명 27,12) 그리짐 산에 별도의 성전을 짓게 되면서 두 지역 사람들 간의 골이 깊어진다. 북왕국은 모세오경만을, 그리고 남왕국은 모세오경과 예언서를 비롯하여 시편까지도 성경으로 인정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유다인인 예수님께서 적대 관계로 결코 지나실 수 없는 “사마리아를 가로질러”(4절) 가시고, 결국 사마리아 지역에서 “이틀”(40.43절)을 체류하신다. 이는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기회가 된다. 이야기는 “물”과 목마름으로 시작하여 “양식”(31-38절)에 대한 주제를 거쳐 마침내 “세상의 구원자”(42절)로 마감된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10절),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19절),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25절),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29절),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42절) 이 구절들을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읽으면 여인과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메시아요 구세주로 알아가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구세주로 알아 모시는 삶의 여정을 산다.

1.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5-42)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참조. 창세 33,18-20)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한참 더운) 정오 무렵이었다.”(요한 4,5-6) 피곤하고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몹시 목이 말랐지만, 두레박이나 다른 수단이 없어서 물을 길을 방도가 없었다. 우물은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삶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우물은 대지의 저 깊은 속마음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시원한 생수를 보존한다. 우물은 홀로 있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선물이며 겸손하고 자유로우며 관대함의 자리이다. 그런데도 우물은 파고 퍼내는 수고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우물은 깊이를 선뜻 짐작하지 못할 만큼 신비스러움을 지니는 조용함의 상징이다. 그런가 하면, 우물은 어느 공동체에나 활력의 매듭이 되고 만남의 자리가 되며 삶이 어우러지는 터전이고, 누군가는 물을 부탁하고 또 누군가는 내어주는 곳이다. 예기치 않았던 사람들 간의 교류가 있는 자리이며 낯선 이가 친구가 되는 자리이고 여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마치 남자들이 마을의 광장이나 성문 앞을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여인들은 우물가를 맴돈다. 우물은 사람들에게 사회생활의 가능성, 경험과 소식의 나눔, 참여와 연대의 결의, 일상사 작은 얘깃거리들의 교환, 즉 기쁨·슬픔·문제·걱정·욕망·꿈·호기심 같은 것들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우물은 사적인 것들이 공적인 것들과 연결되는 자리이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만나는 자리이며, 노동과 여가가 함께 하는 자리이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요한 4,7ㄱ) 아마도 자신의 정숙하지 못한 행실 때문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비난을 받지 않고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없는 가장 한가한 시간대를 골라 우물에 온 것일 터였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나누어)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모든 체면이나 권위를 내려놓고 거지처럼 구걸하며) 말씀하셨다.”(요한 4,7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내면에 있는 샘물을 퍼 올리기 위해 펌프의 ‘마중물’처럼 먼저 다가가 “물을 좀 다오” 하신다. 예수님께서 먼저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요청하시며 여인에게 말문을 여신다. 지극히 평범한 요청이었지만, 그리 단순한 요청이 아니었다. 유다인과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 더구나 집밖에서 외간 여자와 말을 나누는 것이 금지되다시피 한 상황, 남성 본위 사회에서 열등하게 취급되던 여인에게 물을 청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선입견, 편견, 인종차별, 성性 차별, 지역 차별을 타파하신다. 제자들마저 이를 보고 매우 “놀랐다.”(요한 4,27)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목이 마르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목마르다”(요한 19,28) 하신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그러한 파격적인 겸손의 태도를 보면서 놀라고 의아해하면서 예수님께)…‘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8-9)라고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한다. 대화의 물꼬를 그렇게 되받아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즉시 다른 차원의 시야를 제시하신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한 꺼풀씩 내용이 벗겨져 가는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가 열린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하신다. 예수님께서 상황을 바꾸신다. 여인은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조금 부드러워진 어투로 “두레박” 타령을 하고 조상 야곱을 들먹이며, 조금은 더 존경심을 품은 듯이 또다시 반문한다. 그리고는 여인의 입장이 요청을 받았던 처지에서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 4,15)하고 요청하는 처지로 뒤바뀐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여인에게서처럼 늘 어디로 우리를 인도하실지 모르는 여정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가르침인 토라, 율법의 상징인 우물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갈증보다 더욱 깊고 본질적인 갈증이 있다는 것을 단언하듯이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불륜을 저지르고…부끄러운 짓을 저질렀던”(호세 2,7) 사마리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여인이 사마리아처럼 그릇된 방법, 곧 여러 남자를 바꾸어가며 온갖 더러운 물로 갈증을 해소하려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지만, 그녀를 책망하시거나 단죄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 주님께 돌아가자.”(호세 6,1) 하시듯이 “살아계신 주님”(예레 16,14)께 돌아가자고 초대하신다. 예수님의 초대에 여인은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이 물”(요한 4,14), 다시 목마르게 될 물, 모세의 가르침일 뿐인 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셔서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요한 4,14) 그 물을 오히려 예수님께 청하면서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15) 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자신 안에서 결코 다함이 없는, 마르지 않는 물이 솟는 샘이다. 왜냐하면 그 샘은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7-39) 하신 그대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성령이시기 때문이다!(참조. 요한 19,30.34-신 포도주와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2.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 4,5-42)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시던 예수님의 간청이 이제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는 여인의 청원이 된다. 그렇지만 여러 남편과 주인이 있었으면서도 참된 반려伴侶나 신랑이 없었으며 진정한 일치와 통교가 없었던 여인으로서는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만 했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요한 4,16) 하시는 예수님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요한 4,17)라고 대답하는 여인 사이에 대화가 오가면서 여인은 마침내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요한 4,19-20) 한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예언자이심을 알아차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인지 가리짐인지를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 하시면서 예배의 장소가 돌로 만들어진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몸 안임을 밝히신다. 바오로 사도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2코린 13,5)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하면서 누누이 이를 강조하던 바로 그 성전이다.

여인이 “당신이 뭔데?”라고 했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변명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진실을 직면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직면하도록 하시면서 당신을 드러내시기를 즐기신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인간의 속마음을 꿰뚫어 찌르실 때, 인간은 설령 자기 입으로 내뱉어 고백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시편 139,1-7)라고 하던 시편 작가의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심 이런 심정으로 사마리아 여인은 결국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19절)라며 놀라 외친다. 이처럼 신앙의 여정 안에서는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 발견과 하느님을 아는 깊은 지혜가 동행한다. 결국, 하느님 앞에 선 인간들의 질문은 ‘과연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두 개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도 『당신을 알아 저 자신을 알고, 저를 알아 당신을 알아 모시거늘…』이라고 기도했다.

3.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5-42)

예수님께서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4) 하시자 여인은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요한 4,25)라고 응답하는데, 이처럼 여인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깊은 갈증, 곧 메시아에 대한 목마름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확실한 도약을 위해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시며 자기를 밝히시고 당신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 요한 6,20;8,24.28.58;13,19 등에서처럼 당신의 신적 본질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신 “나다”라는 표현 방식을 당신께 적용시키신다.(탈출 3,14-15 호세 1,9)

예수님을 만나 여인은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다. 그리고 증인이자 복음의 전파자가 된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요한 4,29) 하며 외치고 자신이 메시아, 온갖 은총의 샘이신 분을 만났다는 사실을 선포하며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요한 4,39)을 한다. 이는 성령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우리도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신 성령,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분을 증언하도록 하는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요한 4,14),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 솟아 나오는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는”(요한 7,38) 샘을 식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자의 증언으로(39절)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으나 이제 예수님을 만나 “직접 듣고”(요한 4,42) 충만한 믿음에 이른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제 유다인이나 사마리아인에게나를 막론하고 메시아가 되신다.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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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벤지
2023년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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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벽을 허무시고 소통하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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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사순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일반적인 복음화 과정과 한 공동체의 복음화 과정 그리고 한 개인의 복음화 과정을 아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복음화란 단순히 포교활동만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넓은 외연과 내포를 가진 개념입니다. 복음화란 복음정신대로 되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죄 많은 한 여인이 참 신앙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다 한 마을이 통째로 복음화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대화 내용이 열 한번 나오는데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다른 공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오늘 이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입니다. 이 대화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신기로운 감이 없이 읽지 못할 대화입니다. 요즈음 실존주의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대하에는 적라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려 하고 동양의 고전 문학에서는 형식에 사로잡힌 말을 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대사를 보면 시인의 넘치는 지혜를 볼 수 있n 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대화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였습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신비감을 주는 대화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감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이끌어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한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 대화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도 없었고 자녀도 없었습니다. 사는 것이 답답하고 허무하고 우울했습니다. 여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마름은 육체적인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허전함과 갈증을 채우려고 남자를 다섯 명이나 바꿔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의 여인이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당신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특이한 점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 더욱이 여자와 대화하기를 꺼려하던 당시의 관습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신 것입니다. 보통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유대인 남자라면 이 호젓한 시간 정오에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는 대면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보면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 더구나 여인이 유대인 남성인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여자와 하시는 대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같이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위 상황에 따른 대화분석을 해보겠습니다.

대화의 장소적 배경은 유서 깊은 야곱의 우물이고 시간적 배경은 정오 무렵이라고 합니다. 정오는 한 낮이고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픈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걷느라 지쳐 있습니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땅이 마른 곳이요 더운 지방이기 때문에 물을 마시지 않고는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고 없고 예수님 혼자 있을 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옵니다. 이렇게 더운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때 물을 길로 다니는 것이지 이렇게 더운 때에 물을 기르러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주석가들은 여인의 신분이 천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그 여인이 물을 길르러 나온 것은 가난한 사람인 것을 표시합니다. 그 당시 높은 지위에 부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직접 물을 길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이 여자는 혈통으로나 지위로나 신분으로나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버젓하지 못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이므로 유대인의 천시를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혼혈이고 정통 신앙에서 멀어져 있다고 유대인들은 개무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여자를 상대 하셔서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7080 가수 한 대수의 ‘물좀주소’라는 노래 제목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상황은 예수님과 여인인 우물가에서 단 둘이 있게 된 상황입니다.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사마리아 여인과 단 둘이 있는 것 조차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습니다.(요한 4:7,9) 그 당시 일반 종교지도자들이나 정통교회의 지도자라면 이런 천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과는 대면도 안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때 사마리아 여인의 반응은 처음부터 약간의 도전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이 반문 안에는 약간의 비꼬임이 섞여 있습니다. ‘당신은 잘난 유다인이고 나는 천한 사마리아 여자인데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청할 때도 있군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간의 갈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신앙의 순수성과 민족의 혈통성이라는 관점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과의 불가피한 현실적인 차이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그에 저항하고 거부하고 싶은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대답하십니다. 여기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하는 물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물이 서로 다른 물임이 드러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물은 단순히 육신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는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는 생명의 물(l’eau vive)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목마름을 풀어줄 우물물에 대해 말하지만 예수님은 계속 영성과 신앙에 대한 생명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점점 더 억장 무너지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여인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결핍과 약점을 지적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여인은 또 다른 권위에 의지하면서 예수님의 신분을 상대화시켜 끌어 내리고자 합니다.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유대인들이 위대하다고 믿고 있는 성조 야곱을 끌어 들입니다.

거룩한 조상 야곱이 등장함으로써 하나의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 전환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야곱의 권위를 끌어 들임으로써 에수님을 상대화 시키고자 하는 것이 여인이 의도하는바 핵심이겠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의 조상 야곱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여인은 자신의 첫 반응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비꼬는 첫 마디 즉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라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고 우월하다고 내 세우는 근거 중에 하나가 바로 조상 야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자신들은 야곱의 순수한 직계 후손들이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야곱의 직계후손이 아니라 피가 많이 섞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라는 말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싶은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내롭게 대화를 계속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은 마침내 생명수와 영생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끝까지 답답한 소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고 엉뚱한 요청을 합니다. "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 누가 들어도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소리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갈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육적인 갈증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월적인 것에 대해, 신앙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여자는 그것을 자신의 벗어나지 못하는 좁은 시야에서 받아들이고 오해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대화가 계속되면서 여인은 더디지만 차곡차곡 밑바닥부터 다지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육적인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하십니다. 예수님은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갑작스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자의 마음 깊은 곳을 찔렸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내력을 보면, 복음서는 이 여인이 다섯 번이나 남편을 바꾼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샘물을 길으러 나온 것은 이 여인이 발버둥치며 다섯 번씩이나 인생을 바꾸려 애써 보았으나 여전히 목마르더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인의 조각난 인생, 비참한 삶의 자리, 상처와 억압 받은 마음, 사람들로부터 단절된 외로운 상태 등으로 구원에 목말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과거의 행적을 알아맞히자 그는 즉시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어떤 신통력(神通力)을 본 것입니다. 여인은 이미 다섯 남자와 살았고 지금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게 까다로운 질문들을 던집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의 종교관행에 대한 심오한 질문까지 등장합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여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여인은 예수님에게 예배할 장소에 관해 묻습니다. 이 여인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신통력과 사람들이 예배할 장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짐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유대인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이 말에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이것은 예배는 '어디에서 드리는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드리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지성소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유다교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말씀은 폭탄선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배 장소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예배가 무엇인지 밝혀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진실한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보통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사마리아 여인은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신원에 관해 관심을 가집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인은 오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Christ)라고 하는 메시아(un Messie)’가 당신이신가를 간접화법으로 묻자, 예수님은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 동네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해 전합니다. 그리고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마을에 이틀을 머무르시고 난 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많은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le Sauveur du monde)’이심을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의 대화분석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진실입니다.

첫째 진실은 무엇이든 하나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마을 사람 전체가 복음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 명의 사마리아 여인이 회심하고 진실을 깨달을 때 그것이 전염되어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고 믿게 됩니다. 특히 선교에 있어 한 사람에 한 사람이 보태어져서 열이 되고 십이 됩니다. 성장의 출발은 항상 하나에서 출발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셈법에서 둘을 정의할 때 하나에서 출발합니다. 아이들에게 ‘둘’이 무엇인가를 가르칠 때 어떻게 설명합니까? 프랑스 아이들에게는 하나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 둘이라고 하고, 셋은 둘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고, 넷은 셋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셈법은 경제관념에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확천금(一攫千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999금에 일금이 더 보태져서 천금(千金)이 됩니다. 그래서 선교활동에 있어서 제1명제는 1인1명입니다. 인생살이에서 처음의 하나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거기에 하나하나를 보태 나가는 이는 우리 자신입니다.

둘째 오늘 복음의 대화분석에서 알 수 있는
진실은 모든 일에는 단계와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가치 있는 일의 성취와 의미 있는 성장은 출발은 하나에서 출발해서 하나에 하나를 양적으로 더 보태가면서 진행되지만, 이 양적인 축적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질적인 변화가 생기는 변곡점이 있고, 이 변곡점은 다시 정점을 향해 방향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소통의 장애를 점차 제거하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고, 그 분께 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몇 개의 변곡점을 거치면서 성취됩니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처음 물을 청했을 때는 예수님을‘당신, 유대인(Toi, un Juif)’이라고 호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명의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자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Seigneur)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예수님께서 여인의 과거 남성편력을 맞히자 예수님이 예언자(un Prophète)이심을 고백합니다. 여인의 신앙은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간접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오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Christ)라고 하는 메시아(un Messie)’이심을 깨닫습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사마리아 여자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당신, 유대인(Toi, un Juif)’이라고 호칭합니다. 그리고 차츰 사마리아 여자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주님(Seigneur), 예언자(un Prophète), ‘그리스도(Christ)라고 하는 메시아(un Messie)’이심을 단계적으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인은 많은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le Sauveur du monde)’로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 주실 분임을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다시 인정하고 알아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화 받은 여인과 사마리아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42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과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어느 새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마리아 마을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고백한 것은 아닙니다. 점점 믿음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점점 성장해 나가는 것이고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셋째 한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로 오르는 과정에는
항상 몰이해와 장애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잘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대화는 요한 복음사가가 잘 사용하는 아주 특이한 대화 서술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니노데모’와의 대화도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대화의 형식은 현대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에도 아주 잘 알려져 있던 문학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화의 형식으로 쓰여진 탁월한 교리서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박도식 신부님의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혜숙이와 박신부라는 교리서 등이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대화들은 당대의 민중 문학이나 대중철학들이 사용하던 대화의 형식과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 형식의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품, 약방의 감초처럼 빈번히 나타나는 소재 중의 하나는 청중들의 몰이해 혹은 오해입니다. 예를 들면 몰이해, 오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대화자, 문제의 핵심을 엉터리로 파악하고 있는 질문자 등을 등장시키는데 이는 그 당시 흔히 사용되던 문학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TV의 대담 프로그램을 봐도 프로그램 사회자는 아닌 척하면 대개 많은 경우 미리 준비된 각본에 짜여진 질문을 하는데 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본인의 의도를 보충하게 하거나 정확하게 하고 대화가 더 진전되게 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몰이해가 오해나 엉터리없는 질문은 하나의 생각이나 사상을 재검토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구실을 합니다. 원래 전혀 모르는 사람은 물을 것도 없습니다. 질문은 항상 어느 정도의 선이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몰이해와 오해는 요한복음이 생성되었던 그 당시 삶의 자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직면한 몰이해와 오해는 초대공동체가 직면했던 몰이해와 오해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이 생성되던 시대는 한창 복음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던 시기로, 요한 복음을 탄생시킨 초대교회 요한 공동체에는 복음화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논쟁이 있었다고 성서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 살아 생전에 그분은 반대받는 표적이었고 많은 논쟁을 자아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상에서 처형되기에 이러렀던 것입니다. 그런 분을 메시아라고 제자들이 주장하니 논쟁과 갈등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떠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본질을 고수해서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늘 정통성에 있어 의심을 받았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생활을 지도하는데 있어 늘 몰이해와 오해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은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세속적인 가치기준과 잣대로 늘 저울질 당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생성되던 시대는 한창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복음화가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요한 음이 형성 발전되었던 환경을 짐작해보면 많은 갈등과 논쟁이 있었지 않는가 하고 성서학자들은 미루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에수님의 제자들 간의 갈등, 유대인들과 제자들 간의 갈등, 제자들 내부간의 시기심과 질투, 그리고 그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의 도전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는 요한복음이 쓰여지던 시절이 그리스도교의 태평성대 시절이 아니라 위기와 갈등의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와 갈등, 투쟁과 논쟁의 시절에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정체성(lidentité)을 점점 강화해 나갔고 신자들의 올바른 신앙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이 가장 잘 반영된 대목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육신적인 갈증으로 물을 청한 것은 사실이나 에수님의 관심은 늘 영적이고 초월적이고 신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늘 육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동문서답만 서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무지 서로 핀트가 많지 않는 것입니다. 초대공동체가 겪었던 갈등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특히 복음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젊은 교회나 신앙적으로 아직 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아기 공동체에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한 개인이 어떻게 신앙으로 자신을 열어 나가고 있는가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방인으로 몰이해와 오해로 가득차 있던 사마리아 여인도 차츰 차츰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타락한 여성의 마음을 영적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주님(Seigneur), 예언자(un Prophète), ‘그리스도(Christ)라고 하는 메시아(un Messie)’,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구원자(le Sauveur du monde)’로 받아들려 모십니다.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은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은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번민과 갈등 속에서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각자 나름대로 영적 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참된 삶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영을 보내시어 우리 자신들의 내적 복음화를 위해 끊임없이 대화를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내적 복음화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예수님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영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예배’를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바이러스 때문에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대송이나 희생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예배는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비 일상의 예배가 일상의 예배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에서 출발하고 다 단계와 과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상은 비일상을 통해 더 빛나고, 비일상은 일상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육신이 마실 물을 긷던 사마리아 여인의 일상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반짝반짝 빛나는 생명수의 일상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탁하고 비일상의 단계와 과정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잘 소화해 낼 때, 그 비일상의 일부는 반짝이는 창조적인 일상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에 뜬금없이 침범해 온 지금의 이 비일상이 우리의 적극적인 참여로 창조적인 차원에서 변모된 일상 즉 회개된 일상이 되도록 다함께 기도합시다. 아무쪼록 이 번 한 주간도 그 하루하루가 일상을 회복해 나가는 한 주가 되고 또한 일상을 향한 우리의 타는 목마름에 생명수가 내리는 한 주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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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3년 3월 12일
  |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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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는 제3장에서 니코데모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세례를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세례로써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니코데모는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복음서는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이 다르다고 말합니다(3,12). ‘땅의 일’만 아는 니코데모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13)이고 세례는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 곧 하느님의 생명 안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례에 대한 말씀에 이어지는 요한복음서 4장입니다. 여기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물에도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땅의 일로서 물은 사람이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일로서 물은 세례에 사용되는 것으로, 신앙인 안에 샘을 이루고 솟아나는 물, 곧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여인은 땅의 일로서의 물밖에는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일로서의 물을 말씀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마실 물을 주시오’하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당신이 나에게 물을 청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은 반박합니다.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다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물을 떠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의 일로서의 물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 줄을 알았더라면, 그 여인이 예수님에게 하늘의 일로서의 물, 곧 성령을 흐르게 하는 물을 청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물은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이 요한복음서의 믿음입니다(1,33).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여인은 하늘의 일로서의 물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과거를 알아맞히자 그는 즉시 예수를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어떤 신통력(神通力)을 본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예배할 장소에 관해 묻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짐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유대인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우리와 비슷합니다. 물은 사람이 마시는 것이고 세례와 성령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이 여인은 먹고 마시는 일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을 넘어서 열리는 세계, 곧 세례로써 열리는 하늘의 일인, 성령이 하시는 일을 모릅니다. 우리 인간은 먹고 마시는데 지장이 없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땅의 일로써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신통력과 사람들이 예배할 장소입니다. 이 점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우리도 신통력, 곧 초능력을 좋아합니다. 용하다는 철학관을 찾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지관(地官)의 도움을 받아 조상의 묘 자리를 선택하여 자손의 부귀영화를 꾀하기도 합니다. 종교를 빙자하여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인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기도해야 영험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도 생각합니다. 루르드, 파티마, 메주고리에를 비롯해서 국내에도 그와 비슷한 장소들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성황당(城隍堂)이나 산에 가서 빌어서 복을 얻겠다고 생각하던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한 그리스도 신앙은 초능력을 탐하거나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땅의 일을 더 많이 얻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일은 성령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도 베풉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을 잘 바치는 그만큼 하느님으로부터 많이 얻어내어서 잘 살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땅의 일을 하느님으로부터 얻어내는 수단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베품이 하늘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재물도 명예도 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은 땅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베푸심을 실천하다가 당신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 장소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진실한 예배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영과 진리에 대해서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14,26). “그분이 오시면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13). 초기 교회 신앙인들의 믿음 안에 성령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예수님 안에 있었던 진리를 실천하게 하십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성령은 신통력이 아닙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땅의 일을 발생시키는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실천을 상기시키고 같은 실천을 하게 합니다. 하늘의 일을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의 참다운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베푸신 예수님의 삶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보였던 베푸심이 하느님의 일이고 신앙인이 배워 익혀야 하는 진리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바로 그 진리를 발생시키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염원과 욕심은 땅의 일입니다. 그런 것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하느님의 일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하늘의 일은 이 세상과 사람을 외면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여 살면서 하늘의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웃과 함께 사는 우리 삶의 현실 안에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을 위해 베풀면서, 비로소 하느님이 베푸심이라는 사실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참다운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의 일입니다. 참다운 예배가 있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웃보다 더 잘 살겠다, 더 잘 되겠다는 것은 우리의 염원이고 욕심입니다. 이웃과 나누는 마음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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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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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   (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다른 보호자를 보내실 것이다)  [7] 2377
796   부활 제5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131
795   [수도회]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하느님  [2] 2573
794   [청주] 주님의 길  [2] 118
793   [대전]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완전한 유일한 이콘(상)  [2] 2810
792   [인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8] 2562
791   [수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4] 3049
790   [서울]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  [9] 2834
789   [안동] 행복의 길 :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3] 2838
788   [대구] 우리 삶의 네비게이션이신 예수님  [4] 2847
787   [마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2] 2799
786   [부산] 하느님이 하시는 일  [4] 2476
785   [전주] ‘위하여’가 아닌 ‘함께’  [3] 740
784   [광주/제주] 본래의 제 기능  [4] 553
783   [군종]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2] 1810
782   [의정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1] 901
781   [원주]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2] 600
780   [춘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2] 3052
779   (백) 부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 2247
778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성경 말씀 해설  [3] 94
777   [수도회]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6] 2418
776   [인천] 죽을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  [6] 2546
775   [수원]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7]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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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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