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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죽을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
조회수 | 2,212
작성일 | 08.04.12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보통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가난하든, 부자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주면서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움켜 쥐어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하고 후회를 합니다.

둘째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서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내가 옳다고, 최선이라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나보니 좀 더 참을 수 있었고, 좀 더 여유를 가졌으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하고 후회를 합니다.

셋째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왜 그리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리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또한 이런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합니다.

살아간다는 건 역설적으로 죽음을 잘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입니다.  죽음의 순간, 바로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삶을 잘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연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사는 것”입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린 그저 목적없이 내던져진 사람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속에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살아갈 때 죽을 때의 3가지 후회를 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때,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해’ ‘참지 못한 것에 대해’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신자라면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되보고 싶은 마음을 한 번쯤은 가져봤을 것입니다.  전 신부가 된지 1년이 되었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깜짝 깜짝 놀라곤 합니다.  ‘어. 내가 신부가 됐구나.’  꿈을 이뤘다는 기쁨도 있지만, 중요한건 제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른다는 것에 놀라곤 합니다.

또 결혼을 성소로 주님의 부르심으로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가정은 사제나 수도 성소의 기본이 됩니다.  실제 사제나 수도자는 가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성장합니다.  가정 안에서 부모님의 신앙이 자녀들의 성소를 결정합니다.  부모님의 신앙을 통해 사제나 수도자가 나올 수 있고, 또한 훌륭한 남편과 아내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다시 태어나도 또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부르심을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보증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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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서성만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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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속리산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이야 제주도다 해외다 하면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지만, 저희 때만 해도 좀 잘 가는 학교가 경주로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에는 중학교 때에도 속리산, 고등학교 때에도 속리산으로 가는 어떻게 보면 불운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지요.

아무튼 두 번째도 속리산으로 가니 등산을 하는데 그렇게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처음 가보는 친구들은 신기하게 이곳저곳을 보면서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서 열심히 등산을 했지요. 하지만 저처럼 두 번째로 속리산 등반을 하는 친구들은 한번 가본 곳이라고 하면서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마음대로 이곳저곳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들의 이런 모습을 아신 선생님께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상관없지만, 자신이 부르면 찾아올 수 있도록 멀리 떨어져 있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런 말씀까지 들었기에 저희는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서 길이 아닌 곳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서 꽤 멀리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길이 보통 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간단하고 편한 산으로만 생각했지만, 꽤 험난한 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는 길을 잃었습니다. 가면 갈수록 길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가만히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가 나는 곳에 사람이 있을테니 그쪽 방향으로 가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희는 어떻게 했을까요? 뭘 어떻게 했겠습니까? ‘사람살려!!’를 외쳤지요.

선생님께서는 저희에게 분명히 경고하셨지요. 부르면 얼른 찾아올 수 있는 거리에 있으라고. 그러나 우리들은 한번 와 본 산이라는 생각에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로 성소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미하지요. 물론 여러 가지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겠지만, 오늘은 특별히 사제성소의 증진을 위해서 정해진 주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현 상황은 그렇게 밝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욕심 그리고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제 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만, 우리 모두의 성소를 위해서도 기도했으면 합니다. 즉, 우리 모두가 빠짐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부르심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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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성소주일에..

혜화동 신학교에는 성벽을 따라 산보하기 좋은 오솔길이 있다. 가을에 단풍이라도 들면 너무나 분위기가 좋은 길이다. 그 길을 신학생들은 ‘착한 목자의 길’이라고 불렀다. 오솔길의 초입에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상’이라는 제목으로 신자들이 바라는 사목자의 모습에 대한 글이 적혀 있다. 그 내용을 일일이 적지는 못하겠지만 겸손하고 기도하는 사제, 신자들을 사랑하는사제, 주님의 뜻에 한결같이 살아가는 사제 등을 평신도는 바란다는 내용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결심도 하지만 한쪽으로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소(聖召), ‘거룩한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다짐하는 날이다. 흔히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성소라는 단어를 붙이기는 하지만 성소가 사제와 수도자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성소가 있다. 가정을 성화해야 할 성소, 이웃들에게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야 할 성소, 신앙과 교회의 정신으로 봉사해야 할 성소,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아야 할 사랑의 성소….

그래서인지 어떤 신부님께서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상’에 빗대어 ‘사제들이 바라는 평신도상’이라는 글을쓰신 것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겸손하고 기도하는 평신도, 주님의 뜻을 잘 따르는 평신도, 신앙과 교회에 충실한 평신도 등의 내용이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상’과 별반 다름 없어 보인다. 결국 성소란 사제이던 평신도이던 함께 이루어가야 할 하느님 나라를 향한 모습이며 노력이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성직자들의 잘못된 행실때문이던, 성직자들을 존경하지 않는 평신도들의 자만의 문제이던 불행한 일이다. ‘왜 저 정도밖에 안될까’하면서 손가락질하기 전에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그 정도 되나? ’

성직자는 예수님이 착한 목자이신 것을 닮아서 평신도들을 사랑해야 한다. 착한 목자가 양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것처럼…. 평신도들도 성직자를 사랑해야 한다. 양들이 목자를 떠나지 않듯이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김대건 신부 같은 훌륭한 성직자가 계셨기에 냄새나는 그의 시신을 메고 밤을 도와 미리내까지 간 이민식 빈첸시오가 있을 수 있었다. 반대로 이민식 빈첸시오 같은 속깊은 신자가 있었기에 김대건 신부같은 참 목자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나에게 주신 성소를 잘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날이다. 성직자는 성직자의 성소를, 평신도는 평신도로서의 성소를 더 잘 키우고 실천하기로 약속해 보자. 그럴 때에야 삶이 기쁘고 행복해질 것이다.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지막 말씀처럼 우리도 마지막 순간에 “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인천교구 이재학 신부>
  |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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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르심과 따름의 삶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자 ‘생명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성소’(聖召)란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성소자란 넓은 의미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교 모든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 모두와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그 삶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만나는 예수님께서는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하나하나를 모두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성스럽고 거룩한 이유는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길로 부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르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그 부르심이 어떠한 것이든 성스럽고,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주일을 맞아 특별한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 모두를 하나하나 부르고 계시다는 분명한 사실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을 ‘양들의 문’이라고 하시며, 모든 양들이 당신에게로 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오는 양들에게는 구원과 푸른 풀밭을 약속하십니다. 또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약속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시고 단지 부르실 뿐입니다. 설령 양들이 낯선 이의 목소리에 이끌리는 위험에 처해도 예수님께서 양들을 억지로 끌지 않으시는 이유는 양들에게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를 수 있는 기회인 바로 자유의지에 대한 기쁨을 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주관자이시자 우리를 이끄시는 목자. 이 착한 목자인 예수님께서 양들을 이끄는 방법은 다름 아닌 ‘부르심’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당신의 백성인 우리들이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억지로 당신께로 향하는 것을 바라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들 하나하나를 당신께서 친히 마련하신 푸른 풀밭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자 우리들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에 대한 하느님의 커다란 사랑이고 따뜻한 배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백성은 모두 거룩한 부르심, 성소를 받은 ‘성소자’(聖召者)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어떠한 길로 부름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따르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따라야 할 참된 목자이시자 당신 양떼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계속되는 목자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따뜻한 사랑은 사람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머무는 모든 곳에서 드러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에 집착해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삶의 여정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이 받은 성소의 의미를 되새기는 성소주일입니다.

다시금, 우리들 모두를 하나하나 불러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면서, 거룩하고 성스러운 부르심을 성실한마음으로 받들고 따르는 ‘성소자’로 거듭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하선호 스테파노 신부 : 2017년 5월 7일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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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것이 잘 안 될 때면 저는 커피숍에 갑니다. 커피숍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집중도 잘 되고 그래서 글도 훨씬 잘 써지는 것 같아서 종종 이용하곤 하지요. 며칠 전에도 혼자 커피숍에 가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 테이블에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1시간 가까이 있었지만 둘이 서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싸우거나 다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싸운다면 서로를 노려보거나 화를 내는 말 등이 있어야겠지만, 둘은 서로 나란히 계속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 둘이 정말로 무엇을 하는지 살짝 쳐다보았습니다. 바빠서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이 둘은 나란히 앉아서 휴대전화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지요.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인으로 함께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관심어린 시선과 대화가 아니라, 스마트폰 게임에 집중하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튼 함께 있지만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하고 있는 모습이 과연 올바를까요? 이는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스마트폰을 들고서 자기 좋아하는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화도 나누면서 식사하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고 말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할 얘기도 없어요.”

왜 할 이야기가 없을까요? 함께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순간적인 재미와 만족을 주는 스마트폰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들은 신앙인들 사이에서 그대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미사와 기도 생활 안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제의 강론 때문에? 기도 생활의 지루함 때문에? 어쩌면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양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따라가기보다 인도하며, 양들이 헤매게 두지 않고 그들을 모아들입니다. 그리고 양들은 자기들 목자의 소리만 들을 뿐 낯선 이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주님과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전히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데, 우리들은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이 우리를 따라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불평불만 속에 살고 있을까요? 이러한 마음속에서 목자이신 주님과의 간격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로 성소주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해보는 날이지요. 성직자, 수도자로의 부르심도 있고, 가정을 이루는 결혼 성소도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르심에 얼마나 잘 듣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와 함께 하는 착한 양인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착한 목자가 원하는 모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7년 5월 7일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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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로의 기도 안에서 위로를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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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나 수녀를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이 자리에서 정말 솔직히 말해봅시다. 사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결코 사제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남몰래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입니다. 집에 들어왔을 때 촛불을 켜고 묵주기도하시는 어머니를 보았을 때, 내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 그 옆에서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보았을 때, 밤에 촛불이 켜져 있는 그 앞에 어머니가 앉아계실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들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사제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큰 힘이 되고, 또 그러한 모습을 볼 때 참으로 좋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제가 되어 달라고 말합니다.

사제가 기도할 때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물론 사제인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본당을 위해서, 교회 전체를 위해서 그리고 그 교회를 가꾸어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아플 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또한 미사 안에서 많은 기도를 해주기를 청합니다. 내가 집을 샀을 때, 차를 샀을 때, 가게를 차렸을 때 등등, 많은 일에 있어서 사제가 함께 기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도로 많은 위로와 위안과 때론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서 그래 앞으로 좀 더 잘해보자는 결심과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시지 않습니까?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우분들은 사제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어쩌다 한 번 기도한 것을 가지고 나도 기도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사제 또한 사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교우분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가장 큰 기쁨과 그 안에서 사제인 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돌아볼 수 있고, 반성하며, 다시금 주님께서 말씀하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선한 목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결심을 새로이 하는 큰 힘이 된다라는 것을 사제로서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사제가 진정한 힘을 얻는 곳은 하느님의 사랑과 어머니의 기도하시는 뒷모습과 교우 여러분들의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시는 그 두 손의 모습에서 힘을 얻습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이시겠죠. 어떻습니까? 사제도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성소자이고 교우 여러분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정을 성가정으로 이끌어야 하는 성소로 불리움을 받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하느님을 위해 살도록 불리움을 받는 성소자입니다.

서로의 성소를 위해서, 우리 모두의 성소를 위해서 서로 끊임없이 아낌없이 서로 기도해 주는 모습을 이제 서로에게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제는 교우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우분들은 사제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 벌써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의 분위기가 그려지지 않습니까?

사제가 신자들이 밉다고 해서, 기도하기를 그만두거나, 신부이기를 포기하고, 떠나버리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내 안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이 우선적으로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이며, 열심히 기도하시는 교우분들의 기도하는 두 손을 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제가 밉더라도 끊임없이 기도해 주십시오. 그 모습에서 사제는 변화하고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는 것에 있어서 하느님의 다음으로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이게 어디 사제의 마음뿐이겠습니다. 교우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제를 원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그 모습에서 위안과 기쁨, 그리고 여러분의 모습을 추스르는 데 큰 힘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성소주일에 서로에게 큰 위안과 기쁨과 힘을 주면서 합심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함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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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장기용 세례자 요한 신부
2020년 5월 3일 인천교구 주보에서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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