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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조회수 | 1,825
작성일 | 08.04.17
▥ 제1독서 :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 사도행전 8,5-8.14-17

그 무렵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15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16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17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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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독서 :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 베드로 1서 3,15-18

사랑하는 여러분,
15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16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17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18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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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 요한 복음 14,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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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딸한테 같은 말을 묻고 또 묻고 계속 물었습니다. 딸이 참다가 화가 나서 아버지께 큰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버지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딸한테 말합니다. “딸아, 나는 네가 어릴 적에 ‘아빠, 이게 뭐야?’ 하고 백 번을 물으면, 백 번을 대답해 주면서도 매우 행복했단다. 그런데 내가 고작 몇 번 물었는데 그렇게도 화를 내야만 하니?”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마치 아버지가 어린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그저 동문서답만 하는 답답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시지도 포기하시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 먼저 이런 인내로운 당신의 사랑과 관심을 행동으로 가르치시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똑같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도 되풀이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귀를 닫고 있어서 답답하기만 한 우리에게 어린아이를 가르치시듯 당신께서 누구신지를 수없이 일러 주십니다. 예수님의 인내와 배려, 이런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사랑은 이렇게 기다려 주고 배려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딸을 키울 때처럼, 예수님의 이런 모습부터 먼저 배워야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도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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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5월 22일
  |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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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벗들과 처음으로 대만을 여행하였습니다. 관광지 가운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지우펀'이라는 옛 광산 마을입니다. 바다가 멋지게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옛 골목과 집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풍치가 그윽한 곳입니다. 전통 찻집에서 좋은 사람들과 우롱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바라본, 막 해가 질 무렵의 바다 경치는 절경이었습니다. 또한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면서 등이 하나씩 켜지는 골목길은 낭만적이면서도 정취가 배어 있었습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지우펀에 가고 싶었던 것은 대만의 역사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의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주 4·3 사건'이나 '5·18 민주화 운동'의 비극과도 비교되는 대만의 '2·28 사태'를 주제로 한 이 영화를 1990년 극장에서 본 기억이 매우 큰 체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지우펀 마을은, 시대의 폭력으로 고통 받고 희생되었으나 이제 숭고한 희생자로 기억되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지금 그곳은 아름다운 관광지로, 느긋한 분위기의 차 한 잔이 어울리고 젊은이들의 즐거운 수다가 골목을 채우는 곳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여기저기서 '비정성시'란 현판을 보기도 합니다.

때가 차서 지난날의 비극의 흔적이 현재의 행복에 자리를 내놓는 것은 순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비극을 망각하고 왜곡하는 것이 지금 행복을 가져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일 것입니다. 기억의 맥박을 잃지 않는 것이 오히려 희생의 자리에서 생명과 번영을 길어 낼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폭력의 악순환이 아니라 화해와 평화의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980년의 광주를 민족의 십자가로 기억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기억만이 화해와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억하지 않는다고 비극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폭력이 순환할 수 있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김준태 시인의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민족의 십자가 광주를 기억합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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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5월 18일
  |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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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 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영원한 가치로 삼지 않은 초기 신자들의 마음에는, 세상의 행복의 가치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적인 약점은 언제나 드러납니 분배가 공정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이내 불평을 터뜨렸는데, 믿는 이들도 팔이 안으로 굽는 인간적인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려고 일곱 부제를 뽑고 그들에게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영적 교회와 제도 교회의 양면성이 엿보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 질서를 유지할 사회적 제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제도가 영적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데, 역사 속에서 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쓸모없는 돌멩이 같은 우리 존재를 하느님께서는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는 살아 있는 돌로 만드신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들지만, 불신은 사람들을 편견과 오해의 걸림돌이 되게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려면, 내 인간적인 약점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의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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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17년 5월 14일
  |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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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은 고별식(13­-17장)에 속하는 고별사(14-­16장)의 시작 부분입니다. 당신이 곧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게 되셨음을 분명하게 알리시면서 동시에 위로와 안심과 당부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난데없는 예수님의 고별 선언(33절)에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베드로는 저승까지도 따라가겠다고 큰소리치지만 현실이 생각처럼 수월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1절) 침착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임박한 이별을 앞두고 발표하신 새 계명(13,31-­35)을 실천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 다스리는 일이 첫째인가 봅니다. 혼란은 믿음에 방해가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믿음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과의 이별은 잠시입니다. 제자들을 고독하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더욱 친밀하게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성숙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라, 안심해라.’ 오로지 믿음으로만 예수님의 부재를 견뎌내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듯 그런 공간적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더라도 제자들과 함께 있겠다는 위로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곧 하느님과도 함께라는 뜻이겠지요. 아버지 곁에 있는 영원한 집에서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2절) 제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한결같이 성실하신 스승의 모습입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승리하신다는 예언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주 드문 재림에 관한 언급입니다.

예수님이 가실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길의 목적지는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6절) 짤막하게 자신의 존재를 계시하십니다. “나는 문이다.”(10,9)와 같은 맥락입니다.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스스로 진리 자체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지만 스스로 생명 자체이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예수님은 전권을 갖고 계십니다. 요한 공동체의 예수께 대한 넘치는 사랑과 존경의 신앙고백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7절)

예수님과 아버지가 불가분의 관계이듯 예수님과 제자들도 끈끈한 결속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분만이 아버지께 대한 지식의 원천이십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8절)

일찍이 모세도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탈출 33,18)라고 청한 적이 있습니다만, 주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 필립보의 요청은 하느님을 뵙고 싶어하는 우리 모두의 바람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깁니다(9-­14절).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절)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신비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10절)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뜻합니다. 보는 것 말고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이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10절).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유대와 친교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직 믿음만이 그 초대에 답하는 길입니다.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절)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표정을 읽으신 듯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12절)

제자들에게 능력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일’일 것입니다. ‘더 큰 일’이란 예수님을 능가하는 일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펼칠 활발한 전도 활동과 풍성한 결실을 내다보셨겠지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절)

믿음과 더불어 기도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하십니다.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을 굳건한 믿음으로 무장시키시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13절) 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고 아울러 기도함으로써 더욱 굳건한 믿음에 이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절대적 일치를 믿고 청한다면 더 큰 예수님의 일,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이 계신 곳에 거처하고 있습니다. 토마스처럼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여(5절)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을 되묻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교에서 멀어질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신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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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숙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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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 ‘어떻게 …….’ 토마스는 ‘어떻게’에 묶여 있습니다. 토마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은 예수님 그분 자체입니다. ‘어떻게’는 토마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일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어떻게’를 찾아 나서는 것은, 지도도 없이 미지를 탐험하는 일과 같습니다. 토마스와 필립보는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실은 자신을 개방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한계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마디가 ‘머물다’입니다.

함께 머무는 것은 경험과 이해의 사전 지식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말 못하는 강아지나 고양이와도 함께 머물 수 있는 우리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함께 머물기가 그리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자문해 봅니다.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 사이에,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통하지 못하는 갈등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반성합니다.

‘너무 믿고, 너무 의지해서, 너무 미워할 수 있다.’라는 말은 신앙생활 안에서도 되짚어 보아야 할 말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믿고, 너무 의지해서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예수님, 자신이 갈망하는 예수님이라는 우상을 부여잡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을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 안에서도 자유로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펼치실 수 있을 때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탄의 행위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작 우리의 편협한 뜻을 이루시려고 육화하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로우실 수 있도록 예수님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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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5월 10일
  |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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