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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다른 보호자를 보내실 것이다)
조회수 | 1,931
작성일 | 08.04.24
▥ 제1독서 :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 사도행전 8,5-8.14-17

그 무렵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15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16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17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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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독서 :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 베드로 1서 3,15-18 <또는 4,13-16>

사랑하는 여러분,
15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16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17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18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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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  요한 복음 14,15-21<또는 17,1-1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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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권 변호사가 TV 프로그램에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법 고시에 합격하면 현수막을 걸고 축하를 해 주는데, 사실은 현수막에 ‘근조’(謹弔)라고 해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변호사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죽음처럼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무죄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변론을 할 때 의뢰인과 똑같이 억울하고 손이 벌벌 떨리는 심정이 되어야만이 무죄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변호하는 한 양심 있는 변호사의 마음이 이럴진대, 우리의 변호자이신 성령께서는 더할 나위 있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로마 8,26 참조). 우리의 나약함과 억울함을,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인간 존재가 겪는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같은 처지와 심정이 되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십니다.

진정으로 양심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숨 쉬게 합니다. 우리 내면의 영적 세계에서는 우리의 처지를 다 아시는 성령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숨 쉬며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답답하고 사는 것이 힘들 때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시지 않겠다고 하신 오늘 주님 말씀을 기억하면, 성령께서 우리 곁에 오시어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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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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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계명의 중요성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주일을 휴식과 여가를 즐기는 날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젖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주일을 '지키는' 것이 기쁨이라기보다는 무겁고 성가신 짐으로 느낄 때가 많습니다. 또한 왜 하필 주일마다 반드시 성당에 가야 하는지 짜증스러워하며 의문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과 속내 사이의 괴리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먼저 우리가 주일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설령 머리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주일의 신학'이 우리의 삶과 갖는 연결 고리가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일요일이나 안식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주일'의 의미는 사실 부활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활의 신비에 눈을 뜰 때만이 주일의 소중함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199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반포하신 교서 「주님의 날」은 우리가 부활 신앙을 통해서만 주일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 교서는 교회가 처음부터 부활 주일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모든 주일을 경축하며 '부활의 날'로 이해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19항 참조). 주일에는 사실 구약의 안식일 신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업적을 찬미하고 '신적 휴식'의 의미를 알려 주는 안식일의 신학은 오늘날에도 인간의 존엄을 위한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그럼에도 주일은 근본적으로 부활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주일의 중심이 파스카 제사인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부활의 날인 주일은 과거 사건의 기억일 뿐 아니라, 당신 백성 가운데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생생한 현존에 대한 경축입니다"(31항). "교회는 주일마다 마지막 '주님의 날', 곧 끝이 없는 최후의 주일을 향하여 나아갑니다"(37항).

우리는 주일의 미사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힘을 받습니다. 주일을 통하여 평일이 축복을 받듯이, 주일을 충실히 지낼 때 우리의 일상은 부활의 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생명을 바쳐 내려 주신 선물인 주일의 은총을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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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5월 25일
  |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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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성령’을 ‘성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초월적 신의 의미보다는 ‘바람, 숨결, 기운’과 같은 영의 활동이 성경에서 증언하는 보호자, 협력자로서 우리 곁에 숨결처럼 머무시는 예수님의 영을 적절하게 표현하기에 지금은 ‘성령’으로 부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예수님께서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살아 계신 영이십니다.

초기 제자들의 복음 선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병자들의 치유와 같은 표징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징을 본 것만으로는 믿음을 얻지 못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씀은, 표징을 보고 그저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내적인 회심과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용기를 성령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할 수 있는 증언의 힘은, 지혜의 성령께 의탁하고, 기도의 응답에 따라 세상의 거짓과 위선을 식별해 내고, 예수님 말씀에 담긴 진리와 선을 담대히 따른 체험에서 나옵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쉽게 믿음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을 개인적인 은사의 원리로 여깁니다. 그러나 교회는 개별 신자가 받은 성령의 은사가 언제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에, 누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 사람의 은사는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거짓 은사라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참조). 그 밖의 것들은 악에서 나온 것임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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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17년 5월 21일
  |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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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전하는 공관복음에 비해 요한복음은 그분의 신원과 구원 활동에 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 스스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같은 말씀입니다.

무려 다섯 장에 걸쳐 서술한 고별 담화(13-­17장)는 공동체의 일치와 형제애를 유별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닥쳐올 이별을 앞두고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에게 굳건한 믿음과 기도로 변함없는 사랑을 기약하신 예수님은(14,1-­14), 또 다른 희망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을 지켜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당신이 겪으실 일도 보통 일이 아닌데 두고 가는 제자들 걱정으로 애간장을 태우십니다.

젖먹이를 떼어놓는 어머니 마음 같습니다. 다른 어느 대목 못지않게 예수님과의 긴밀한 친교를 느낄 수 있는 애절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5절)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감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이 따릅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그 효력은 계명 실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유의하여 마음에 깊이 새긴다는 뜻입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계명이 필요합니다.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계명은 단지 의지로 완성할 수 있는 윤리적 요구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계명을 잘 지킨다는 조건 아래 성령이라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16절)

‘보호자(pa퉍vklhto")’는 네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에만 네 번 나오는 낱말입니다.

‘다른 보호자’라면 예수님 말고 또 다른 보호자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곧 우리가 울 때, 남에게 비난받을 때,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져 절망할 때 함께해 줄 협조자 성령을 말합니다.

또한 제자들의 믿음을 키워주고 제자들의 임무 수행을 위해 협조할 것입니다. 고별 담화 내내 강조되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연대성은 사랑과 믿음을 뿌리로 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강화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7절)

진리를 증언하고 제자들을 진리로 이끈다는 점에서 예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세상에 계시하는 것도 성령의 몫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6절).

예수님은 아버지께 건너가시더라도 성령을 통해 계속 활동하시고 제자들과의 친교도 지속하고자 하십니다. 차마 영영 못 떠나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머무시려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17절).

‘세상’이란 예수님을 배척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무리를 대표합니다. 성령으로 인해 믿음의 공동체와 세상이 갈라집니다.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아들일 능력조차 없으니, 세상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8절)

스승 없는 제자들은 고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못내 아쉬워 발길을 떼지 못하십니다. 스승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승 없이도 씩씩하게 살아남는 법, 곧 닥칠 위기에 맞서는 법, 믿음의 공동체를 계속 꾸려가는 법을 터득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19절)

여전히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상과 믿음의 공동체를 구분하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알아볼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다시 예수님을 뵙게 되어 죽음도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 없음을 목격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의 긴밀한 유대 관계는 죽음으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9절)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굳게 다짐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겨내십니다.

재차 반복해서 새 계명을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연결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21절)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하느님과 예수님, 예수님과 사람,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사랑으로 맺어진 복잡한 인연은 이토록 강하게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부활 이후 공동체는 사랑을 바탕으로 세워진 공동체요 사랑에 힘입어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인간에게 가까이 오셨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인간 안에 머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인간의 마음에 머무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내적 힘을 주시는 협조자입니다.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참된 자아를 찾게 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직 미숙한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애타는 심정이 구구절절 묻어나는 본문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계명으로 단단히 무장시키고 또 시키십니다. 제자들이 남아서 할 일들이 예사롭지 않을 뿐더러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똑같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 대신으로 성령을 보내시면서도 다짐을 당부하십니다. 제자 교육에 마지막 열정을 다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바람직한 공동체 모습을 선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짝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이제 작별의 순간이 왔습니다. 제자들이 홀로 설 때입니다. 사랑으로 똘똘 뭉쳐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짝사랑에 보답할 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이 그들이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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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숙 한님성서연구소
  |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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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함께 머무시고 그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이런 일치를 도와주시는 분께서 성령이십니다.

‘보호자’로 번역된 성령께서는 그 말마디의 본디 의미에 따라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불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아 낙담하고 슬퍼하는 1세기 말엽의 신앙 공동체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하여 일깨웁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우리 신앙인의 삶 안에는 홀로 버려지는 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 사이를 ‘알맞은 협력자’로 규정하셨고(창세 2,20 참조), 성령께서는 서로서로 도울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함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사도 2장 참조).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는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정의와 불의의 대립으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선을 지향하되 악을 만나 회개로 이끌고, 정의를 외치되 불의함을 함께 아파하며 고쳐 나가고, 진보의 개혁을 보수의 가치로 함께 고민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 아닙니다.
모든 이가 회개 안에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과 함께 머물게 하시고 함께 살아가게 하시려고 오늘도 성령께서는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가로막는 것은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를 가로막는 것이고,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단죄는 그 일치에 가장 큰 걸림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물리쳐야 할 악마가 아니라 회개와 용서로 보듬어야 할 작은 이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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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5월 17일
  |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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