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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성령의 약속 : “아버지께 구하면 성령을 보내겠다”
조회수 | 2,617
작성일 | 08.04.24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그들에게 지극한 사랑과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고,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 곧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셔서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숭고한 사랑일수록 상대방 위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사랑이 치열할 수록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자기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그것이 물질이건 명예건 정이건 몸마저 주고 싶어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하므로써 보람을 느낀다.

아기를 낳아서 키워본 엄마들은 누구나 다 체험했을 것이다. 자기가 낳지는 않았지만 누가 문밖에 버리고 간 아기를 얼마동안 키우다가 홀트 아동복지재단에서 외국인에게 입양시키겠다고 아기를 데리러 왔을 때 그동안 정이 너무 들어 아기를 키우던 여인도 울고 아기도 가기 싫다고 여인을 붙들고 우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았을 때 나도 덩달아 울어버린 기억이 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농촌에서 살았는데 5일마다 찾아오는 시골장날에는 아직 젖을 빨고 있는 송아지를 팔고 싶은 사람은 엄마소를 끌고 오면 송아지는 제발로 엄마를 따라 소시장으로 오곤 했다. 그러다가 누구엔가 송아지가 팔려 고삐를 매고 끌려갈 때면 엄마소도 울고 팔려가는 송아지도 몸부림치면서 우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팔려간 후에도 며칠동안은 엄마소도 송아지도 계속해서 우는데 애처롭기 그지 없었다. 엄마소 생각은 송아지 뿐이고 송아지 생각은 엄마소 뿐이기 때문이었다.

『어미된 자로서 누가 자기의 젖먹이를 잊겠는냐? 설사 너희는 잊을지라도 나는 결코 너희를 잊지 않겠노라』고 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자체 이시기 때문에 우리 생각뿐이시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당신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고까지 하셨겠는가? 너희는 악할지라도 너희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너희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성자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하셨고, 예수께서도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셔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시어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에게 주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당신의 어머니마저 주셨고, 당신의 몸과 피까지 우리의 먹이로 주셨을뿐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는 다락방에 모여 있는 사도들에게 발현하시어 성령을 받으라 하시며 당신의 입김 즉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 또 오순절에는 협조자이신 성령을 태풍과도 같이 강하게 불혀와도 같이 뜨겁고 밝게 우리위에 쏟아 부으심으로써 당신의 신비체인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한 동네에 살면서 서로 서로 사랑은 하면서도 겉으로는 사랑한다는 내색 한번 해보지 못한채 마음에도 없는 다른 배우자와 결혼한 갑순이 머리속에는 갑돌이뿐이고, 또 갑돌이의 머리속에는 갑순이뿐이었기에 결혼한 첫날밤에 그토록 울었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사랑이 당신의 본질이신 아버지의 마음은 당신의 자녀뿐일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예수님은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버지한테 보고 들은 것만을 가르치셨고 아버지께서 시키시는대로 따르셨고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만 하심으로써 예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성부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과 내 마음과 성령께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가 아버지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안에 있고 내가 너희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전에 젤뚜르다 성녀께서 수녀님으로 생활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기도를 부탁하곤 하였는데, 기도해 주겠다고 약속만 해놓고 깜빡 잊고 못했는데도 기도를 부탁한 사람이 찾아와 기도해주셔서 일이 잘 풀렸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날 기도중에 예수님이 환시로 나타나셔서 수녀님이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더니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내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한 날부터 나는 네뜻대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하시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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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허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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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계명 실천으로

부활6주를 맞이하는 교회는 부활축제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두움과 절망의 끝에 서서 모든 희망을 포기하려 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산을 넘어서야 하는 단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삶의 전부이신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절망감이 찾아오는 그 순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제촉 하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심지어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할 순간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가질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당신과 성령께서 늘 함께 하여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선포된 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번째 고별 담론을 통해 성령의 보내심과 주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만이 그 제자 됨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일치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힘이 된다고 하십니다(15절). 즉 예수님의 계명은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천, 제자들이 체험한 사랑의 실천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계명에 따라 사랑을 실천한다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힘겹고 마치 멍에처럼 피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마치 계명의 실천이 나의 자유와 의지를 구속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변명을 준비해두고 일탈의 삶에서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늘 소극적으로 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더 크고 완전한 자유의 삶을 선물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을 통한 진정한 친교는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고 축복되게 합니다.

사랑을 살지 않는 이에게는 계명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멍에이지만, 사랑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라면 계명은 너무나도 가볍고 편한 멍에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선포함에 조금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필립보는 낮선 사마리아지방으로 달려가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복음을 선포함에서 더 큰 기쁨을 알게 하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1독서).

우리는 생명에로 초대받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증거만이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은 늘 우리의 사랑 고백보다 먼저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장효강 안토니오 신부
  |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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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신앙인들과 어떤 관계 안에 계시는 지를 말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시던 실천을 배워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실천들이 하느님의 생명을 원천으로 한 일이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같은 실천으로 같은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요약하여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하시던 실천이 살아났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안에 모습을 드러낸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의 죽음 후, 많은 사람들 안에 확산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은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실천하신 삶이 나타나게 하고 그것이 우리 삶의 진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제자들의 실천 안에 예수님이 돌아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그분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생명의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은 신앙인의 실천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일을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동물은 먹이를 얻어서 자기 개체를 유지하고 또한 종족을 유지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무자비하고 포악해도 비난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육강식의 질서 안에 삽니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기에 같은 질서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어느 동물학자는 인간의 동물적 생태를 기술하면서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에게 동물 본연의 질서만 있다면 당연한 이름입니다. 인간 사회는 법을 만들어서 인간의 동물적 약육강식과 포악함에서 인간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약육강식하고 포악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무자비하게 지배하고 각종 횡포를 하는 것,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상대를 중상하는 것, 돈 몇 푼을 위해 인색하고 사람을 기만하는 것 등은 ‘털없는 원숭이’들의 합법적 약육강식의 포악한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포악함으로 인간은 인간다워지지도 않고, 인간다운 사회가 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비록 자기 한 사람 희생하더라도 더 큰 진실을 위해 헌신할 때 인간으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이 있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순국선열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엄숙할 수밖에 없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생존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도 일종의 살신성인입니다. 모든 부모가 다 하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 된 사람들의 희생이 있어서 인류역사 안에는 아름다운 인간 사랑이 지속됩니다.

인류역사 안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이라 부릅니다. 그 신앙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서 자기 한 사람 더 잘 되겠다는 약삭빠른 수작이 아닙니다. 한 번씩 나타나는 종말에 대한 광신도 집단의 주장과 같이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빠져나가, 내세에 가서 잘 살겠다는 수작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다는 말은 예수님의 실천 안에 인간 삶의 최종적 보람을 본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안에서 보람을 찾는 존재입니다. 재물을 많이 쌓아 놓는 데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큰 권력을 잡아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에 보람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놓은 부모의 흐뭇한 보람이 있고, 제자를 아끼고 사랑해서 유능한 인재로 키운 스승의 보람이 있습니다. 사업이나 자기 직장에 충실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느끼는 보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안에 삶의 보람을 심는 노력을 우리는 헌신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에게 헌신할 수도 있고, 하느님이 아끼시는 인간 생명에 헌신할 수도 있으며, 재물 혹은 권력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신앙인은 예수님의 헌신이 하느님 생명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헌신을 모든 순간에 하신 분이었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병자를 고쳐주고, 죄인이라 소외당한 사람을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우는 이,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염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누구도 버려지거나 불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물과 권력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헌신은 인간생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헌신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아끼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헌신을 보면서 그것이 그분 안에 계셨던 하느님의 생명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발생하는 모든 헌신의 삶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봅니다. 그 생명을 성령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은 아버지께서 “다른 협조자인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협조자”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깨닫는데 먼저 예수님의 역할이 있었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할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인 것은 헌신이 하느님 생명의 진리이고, 성령은 그 헌신의 진리가 우리 안에 발생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능력과 여건은 다릅니다.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헌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처한 여건에서 최대의 헌신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다.” 신앙인의 삶 안에 그분의 일이 보인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서공석 신부
  |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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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주님의 믿음

어느덧 5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전례력으로도 부활 제6주일이 되었습니다. 부활 시기 동안 자주 들었던 말씀 중에‘생명의 양식’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오묘하고도 참으로 어려운 말마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간과하고서는 결코 부활의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공생활은 물론이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고, 이 생명의 양식을 이해하고 삶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 나라도, 구원도, 부활의 기쁨도 비로소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여전히 쉽지가 않습니다. 사실 말마디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믿어주고, 이해하고, 인내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 부활의 삶이고, 이로써 생명의 양식을 얻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힘이 되시고, 위로가 되시는 보호자, 진리의 영을 미리 약속하십니다.

또한 교회는 오늘을‘청소년 주일’로 지냅니다. 이는 오늘 복음 말씀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러하듯 우리도 청소년들을 교회의 미래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은 지금의 어른들 곧 부모님 세대를 이어 세상과 교회를 짊어지고 나아갈 이들입니다. 그런데 흔히 기성세대들은 이들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문화, 사고방식, 행동양식에 걱정을 넘어, 불신의 눈으로 보고는 합니다. 저 역시 기성세대의 눈으로 그들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해봅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닮고 어른을 흉내 내면서 자라지요! 기성세대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판단하기보다는 우리에게도 있었던 그 시절, 그 세대의 눈과 마음으로, 신뢰를 하고, 보아주고 격려하는 그런 기성세대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말입니다. 혹시 그들이 어설픈 점이 많다 하더라도, 주님 보시기에 우리들의 부족함만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하고, 겁 많고, 믿음 안 가는, 그래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리에게 세상을 맡겨주시고, 하느님 나라의 미래를 맡겨주셨습니다.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보호자, 진리의 영을 보내주시고 함께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부정적 비난이나 불신, 걱정보다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하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용서와 사랑, 거기에 부족한 세상과 인간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 신뢰와 사랑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우리가 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합시다.

<부산교구 김종엽 바르나바 신부>
  |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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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

주님의 승천을 앞둔 부활 제6주일의 복음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우리들에게 주실 선물인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활은 세상과 인류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선물이었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세상과 인류에게 더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과 죽음으로 이루어 낸 부활의 영광은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하고 이것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을 지속시킬 원동력이 오늘 복음의 주요 내용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지속되고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약한 인간의 본성(로마 8, 3 참조)이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죽음에서 이기고 부활하셨고, 하느님을“아빠, 아버지”로 부르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로마 8, 16 참조)해 주셨습니다. 부활을 진심으로 믿으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용기는 약한 인간의 본성이 낳은 불행을 주님 부활이라는 행복으로 이끄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주님의 승천 후 보내주실 협조자는 주님 부활을 더 확실하게 밝혀 주실 것이고, 주님 부활의 신비를 우리가 잊지 않게 하시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위와 품격을 지켜주시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 알려주신 하느님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요한 14, 26 참조)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복음은 주님의 승천 후에 오실 성령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실지에 대한 구체적인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계명을 지키고,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주님을 알아보고 믿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주님 말씀을 받아 지키는 삶으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내는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을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우리에게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그 협조자를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들이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할 때(에페 6, 18 참조) 주님의 부활은 항상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인류의 선물이라면 우리는 이 선물을 성령과 함께 세상 끝날 때까지 그 영광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 부산교구 조동성 신부 : 2017년 5월 21일
  |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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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들을 들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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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들을 들려주리라." 오늘 화답송의 후렴처럼 주님 부활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당신 자신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바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과연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죽음을 영원히 쳐 이기고 또한 악과 불의까지도 전능하신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시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유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며 감정을 전하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서로 같은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야 사랑이 소통되어 행복한 사랑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유한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소통하려면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를 알고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모든 것을 예수님의 그 사랑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 -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을 지키는 일입니다.

특히 요즈음, 미사 때마다 독서에서 제자들의 용감하고 활기찬 모습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말 그대로 죽음이 두렵지 않은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유다인들이 무서워 방문마저 잠그고 있던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변화는 실로 놀랍습니다.

변화되는 계기를 성경은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기 때문이라 전하며,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감싸 인 제자들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였습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서도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보내셨던 성령을 우리 모두에게 보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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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성규 안드레아 신부
2020년 5월 17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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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9   [의정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  150
768   [춘천] 주님은 겁나게 좋으신 분  148
767   [전주] 두려워하지 마라  [1] 157
766   [광주] 사랑의 품격  148
765   [안동] “사랑받는 이로서의 당당함”  140
764   [원주] “내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148
763   [인천] 예수님은 우리의 자랑  [2] 1443
762   [부산] 두려워하지 마라  [3] 2073
761   [군종] 두려워 하지 마라  [1] 2073
760   [대전]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는 하느님  [3] 1926
759   [마산]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  [1] 2073
758   [수원] 박해 : 신앙에서 필연적인 것  [5] 2104
757   [대구] 고통받는 예언자  [1] 1658
756   (녹) 연중 제12주일 독서와 복음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2] 1691
755   [수도회] 진리이신 성령이여, 오십시오  [5] 2298
754   [대구] 하느님의 협조자 파라클리토  [3] 3489
753   [청주] 성령, 한계 없는 사랑의 기운  [1] 195
752   [마산] 신부님, 사제관에 불 좀 켜 놓고 사이소!  [3] 2849
751   [수원] 협조자 성령의 약속  [6] 2690
750   [인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5] 2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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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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