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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진리의 영(靈)만이…
조회수 | 2,599
작성일 | 08.04.24
오늘은 부활 대축일 후 36일째다.
주님께서는 부활 후 40일간 여러 차례 발현하셨다(사도 1, 3). 주님 승천을 4일 앞둔 상황이다. 이 기간은 비록 짧지만 주님 부활 신앙이 점차로 확인되고 확대됨으로써  교회는 새로운 장(場)이 열린다. 주님 부활의 증인들은 사도들을 포함하여 숫자는 적지만, 놀라운 활동으로 예수님께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왔고, 그분을 통해서만이 구원이 가능함을 믿고 선포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이 기간에 변함없는 후원과 현존을 약속하시고 특히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한 20, 22). 과연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즉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사도 8, 17).

사도들의 성령체험이야말로 빠른 시간 안에 이처럼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행하신 기적이다. 기적의 원동력은 사도들의 끊임없는 기도였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성령강림을 위해 기도하라고 분부하셨다. 복되신 성모님께서는 사도들의 모후로서 사도들과 함께 성령강림을 위해 기도하시고 지휘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3천년기를 살고 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와는 큰 시간 차이를 느낀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세상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은 눈부시게 발전한다. 세상이 곧 천국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세상은 한계가 있다. 결코 진리의 영과는 일치할 수 없는 운명이다.

주님은 우리가 계명을 지키면 결코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오늘날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모범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고, 주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상태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있다. 이민의 날을 맞아 외국인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자. 사랑은 주님의 계명이다. 진리의 영으로써만 인류는 존재할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고 구원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인류의 생존과 번영은 진리의 영에 달려있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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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전세권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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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보호자이신 성령

어릴 적 초등학교 곁에는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저희 반에도 고아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고아원 친구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빡빡 깎았으며 반 친구들은 그 같은 고아원 친구들을 놀려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고아원 친구들은 함께 놀다가도 늘 기가 죽게 마련이었고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특별히 소풍을 가거나 학교 운동회 때에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오시면 그 같은 슬픈 모습이 더욱 확연히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때에는 고아원 친구들이 많이 불쌍하다거나, 내게는 부모님이 계셔서 크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주 가끔 그때의 고아원 친구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슬픈 뒷모습만 떠오를 뿐입니다.

사제가 되어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나 부모님들이 멀리 떠나있는 아이들을 볼 때, 고아원 친구들을 생각해 봅니다. 정말 그들은 얼마나 고독해 하였을까? 얼마나 많이 그들을 버리거나 잃어버린 부모님을 그리워하였을까?

감히 비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명절 때든, 대축일 미사가 끝나고 그 많던 교우들이 일순간 사라져 버리고 텅 빈 사제관에 홀로이 있게 될 때 저도 가끔은 고아가 된 심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신자들을 부를 때가 많았고, 기도가 아닌 세상일로 혼자임을 잊을 때도 많았습니다.

양로원의 어르신들의 가장 큰 고통은 고독이라고 합니다. 미움보다 더 큰 죄는 무관심이라는 말도 소외와 고독이 주는 고통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이 홀로 무인도에 버려진 잊혀진 존재, 무서운 고독의 엄습에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 인간 사랑의 열망은 성령의 약속으로 현실이 됩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

예수님의 이 같은 희망의 약속에 우리가 어둔 밤길에서도,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도, 아무도 내 곁에 없는 홀로인 방에서도 혼자가 아님을 느끼며 삶에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그 같은 약속에 위로 받지 못하고 휘청거릴 때, 주님께서는 희망을 잃을까 또다시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 16).

사랑의 성령께서는 진정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우리 보호자입니다.

진리이신 성령

참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세상이 주는 그릇된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실로 세상은 온갖 현혹된 지식들로 가득 차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같은 지식은 더욱 교묘히 위장하여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며 무신론을 합리화 시키려 듭니다.

많은 부모님들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이 고등학교까지는 성당에 열심이었는데, 대학에 가서부터 성당을 멀리 한다는 아픈 마음을 듣곤 합니다. 학문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하느님과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지는 현실에 가슴 답답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이 주는 안락한 배부른 빵의 유혹, 권력의 유혹, 자기중심적인 유혹은 하느님을 끝내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그 같은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음은 다른 평신도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막고,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믿음의 의혹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다시 희망이신 성령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 17).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여러 잡다한 일들에 얽매여 가장 소중하신 주님의 현존을 잊고 살았습니다. 세상 것이 전부인 양 살면서 고통을 잊으려 하였는데, 그리고 하느님을 떠나 세상의 자유 속에 살려 몸부림쳤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 한 편의 공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늘 비어있는 외로움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떠난 가련한 자녀들에게 또다시 기쁨의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그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께서 우리 곁에 머무를 때 비로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 32)하시며 참된 진리의 자유 안에 우리를 이끄시고 초대하십니다.

끝내 죄 많은 인간을 내치지 않으시는 지극히 애절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 같은 성령의 약속 안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인간 사랑의 결정체이십니다.

배광하 신부
  |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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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신앙 엄마 테스트

“스마트한 시대에 스마트한 신앙 부모 되기” 라는 주제로 부모교육을 위한 특강이 있었다. 강의를 듣다가 참으로 씁쓸한 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 10대 청소년의 사망원인 첫 번째가 자살이라고 한다. 20대 청년도 자살, 30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40대는 암이다.’ 이런 얘기를 청소년들에게 해주었더니 어떤 여학생이 ‘10대, 20대, 30대의 공부, 취업 등의 힘겨운 시기를 죽지 않고 억지로 버텨내도 결국은 40대가 돼서 암으로 죽고마네요.’ 하더란다.

인생에 있어 미래를 희망하며 생기발랄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할 청소년들이 너무 일찍 인생의 허무함을 알아버린 것 같아 마음 아프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어릴 적 품었던 소중한 꿈을 시간이 지나면서 포기하게 된다. 그 대신 ‘돈과 세속적 성공’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떠밀려 획일적인 입시 교육에 매인 채 학교와 학원을 밤낮으로 오가는 동안 ‘성적 비관과 왕따’ 에 따른 죽음의 유혹 속에 방치되어 있다. 또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없는 청소년들은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으로 게임과 만화를 즐기다 어느새 중독의 세계에 빠져 ‘변질된 자유’ 를 갈망하며 몸부림친다.

과연 청소년들을 그대로 두고만 볼 것인가? ‘세상의 부모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세속의 가치관에 따라 똑같이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라며 체념하듯 지낼 것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2독서의 말씀처럼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 부모들은 달라야 하고 다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가늠해 보고자 특강 때 강사 신부님이 하셨던 ‘신앙엄마 테스트’를 모든 주일학교 부모들에게 소개한다.

① 나는 내 자녀가 ‘하느님의 선물’ 임을 믿는다.
② 성모님께 자녀의 보호를 청하며 묵주기도를 바친다.
③ 나는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항상 식사 전 기도와 식사 후 기도를 바치고 있다.
④ 나는 아이에게 “성당 안가도 된다.” 고 허락한 적이 없다. 항상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모범을 보이고 있다.
⑤ 나는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거나 성경에 대해 이야기 해 준 적이 있다.
⑥ 내 자녀의 책상 위에는 십자고상이나 성모상, 성화가 있다.
⑦ 나는 내 자녀의 축일과 그 성인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의 축일을 생일처럼 챙겨준다.
⑧ 나는 내 아이의 성사생활(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견진성사)을 살핀다.
⑨ 나는 아이와 다투고 나서 아이가 잠들면 아이의 방에 가서 아이를 위해 기도해본 적이 있다.
⑩ 나는 자녀가 신부님 혹은 수녀님이 되고 싶다면 기꺼이 지지해 줄 자신이 있다.

과연 열 손가락 중에서 몇 개가 꼽아지는가? 신앙의 가치 속에서 자녀를 온전하게 기르고자 끊임없이 노력할 때, 험난한 세상의 유혹과 그릇된 가치 속에서도 청소년들이 방황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과 교회 공동체의 지지 안에서 꿋꿋하게 성장하여 신앙을 바탕으로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사회인으로 자리매김하리라

▥ 춘천교구 최창덕 프란치스코 신부 : 2017년 5월 21일
  |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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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문을 두드려라!” (마태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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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배려하며 도와줍니다. 사랑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느냐?’ 합니다. 서로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왜 마음을 열지 않느냐?’ 합니다.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쉬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설 때 마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하시면서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아버지께 청하여 다른 보호자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으로 영원히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이십니다. 사랑의 관계로써 일치를 이룹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드러나는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마음을 열고 사랑의 일치를 이루며 함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여 함께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모시려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요한묵시록에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라고 합니다.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 문 앞에 서 계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맞이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지식이나 생각만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지식과 생각만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하느님과 통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저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저버린다면, 성령을 모시지 못하며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에 허영심과 탐욕, 증오와 질투, 안일무사와 이기심 등이 가득차 있으면, 구원자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갈등과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편, 우리 마음에 구원에 대한 열정과 믿음, 희망, 사랑 등이 가득차 있으면, 예수님께 문을 활짝 열어드립니다.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마음의 방을 깨끗이 정리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을 새롭게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과 함께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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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박우성 사무엘 신부
2020년 5월 17일 춘천교구 주보에서
  |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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