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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성령
조회수 | 2,287
작성일 | 08.04.24
주님께서는 이제 보다 심오한 현실을 영의 선물로 통교해야한다고 압니다. 이 영이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아버지의 실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 안에 있고 성자 성령 모두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파라클리토의 기능은 이중성을 지닙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그리스도 파라클리토께서 세상의 죄와 죄들에 대한 심판에 변호자이며, 사제로서 죄를 사해주시고 당신 피로 죄를 없애시는 능력의 변호자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사랑하다/믿는다, 행동한다/계명을 준수한다, 등 다양한 어휘들이 나타납니다. 이는 예수님의 행동과 활동의 영역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한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파라클리토(협조자)를 제자들이 부여받는다는 것입니다. 파라클리토는 누군가를 도와주려는 목적으로 가까이 불리움을 받는 협조자입니다.

법정용어로 피고인을 위한 변호사 또는 증인입니다. 보다 활동적인 의미에서 위로자 내지는 중재자입니다. 마치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과 같은 동행자, 보조 협력자, 후원자입니다. 진리의 영이란 칭호는 진리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없고 믿음의 내적 관계 안에 제자들에게 전달된 것이입니다. 결론을 내리면서 말합니다. 예수-아들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제자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진리의 영의 후원과 협력이라는 선물레 감사하며 주님의 일을 믿음으로 계속하도록 불리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을 계시한 것 처럼 제자들은 예수-아들을 세상에 계시하도록 불리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그 시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을 진실로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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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곽승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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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9일, 대흥동 본당에서 부활성야 미사를 함께한 후, 옷을 갈아입고 성당 마당으로 나오다가 저 멀리서 교복을 입은 학생을 보는 순간 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너무나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전 대전역 광장에서 노란 리본 행사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또 다시 고개를 숙였습니다. 리본을 가슴에 달기는커녕 그 리본 근처에 가는 것조차 죄송하였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저도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어른 중 한 사람입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 앞에서 원인이 무엇이고, 누가 잘못을 저질렀다며 비판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제 안에 먼저 탈출한 선장이 있었고, 제 안에 선박을 개조한 사람이 있었고, 제 안에 화물을 엉성하게 결박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한 제 안에 탁상 행정과 정치적 쇼까지 자행하며 언론을 통제하는 정부가 있었고, 제 안에 이 시대 대통령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단 한명이라도 살아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일말의 양심이 밉기까지 합니다.“ 왜요, 왜? 잘못은 우리가 했는데...”를 수없이 되새겨 봅니다. 컴퓨터를 켜면 온 세상을 뒤덮은 뉴스가 세월호 사건 이쯤 했으면 됐으니 이제 그만 이야기 하고 선거 이야기를 하자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눈물이 납니 다. 마치 모두에게 버림을 받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이 이 말을 해 줍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일이면 달라질 세상의 가치 속에 파묻혀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의 고정된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명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 해 주고 계십니다. 아직은 제 고집이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이 너무 커서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이 들지만, 용기를 내어 믿음으로 일어서고자 합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오신다’는 말씀 이 그냥 귓전에 흘러가는 또 한 차례의 바람이 아니라 이 작은 가슴에 깊이 새겨지기를 바라는 마음 가져봅니다.

그러면서 저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부탁 말씀 딱 한 가지만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 청소년들이 청소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정말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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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박진훙 요셉 신부
  |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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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주님 안에서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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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암시로 그분이 우리 곁에 계심을 알려주십니다. 사람은 세상의 삶을 정리할 때가 되면 진심 어린 말을 전하게 됩니다. 수난 전날 주님께서는 당신이 비록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지라도 제자들은 결코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과 함께 하지만, 우리 눈에는 직접적으로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동행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하느님의 손에 의지하여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쉬울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있기에 험난한 길에서도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세상을 올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진리란 ‘인간이 어떠한 가치로 살아야 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하면 더 편하고 쉽게 살 수 있을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 판단은 물신 주의를 만들고 함께 살아가는 삶이 아닌 무한경쟁만을 부추깁니다. 한적하게 길을 걷거나 멍하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조차 없는 삶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치는 말로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드냐?’라는 넋두리를 우리는 무의식 중에 던지게 됩니다.

험난한 인생의 길속에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도‘이 말이 과연 맞는 이야기일까?’ 머리는 재빠르게 회전을 하며 일단 의심부터 갖는 중병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도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렇게 말 해 야겠다.’라고 머릿속 복잡하게 다음 말을 준비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리 없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이 해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너무나 생각이 많은 것은 아닐까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저에게도 남의 말을 끊는 나쁜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게 됩니다. 내 생각이 맞고 내 말을 들어야 된다는 큰 병을 안고 사는 중환자입니다.

뒤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들이 참 많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어떤 것에 즉시 반응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진실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가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 되고, 사랑을 한다면 주님 안에서 침묵 중에 조용히 머물러야 됩니다.

요즘은 주님 안에서 침묵의 시간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간다고 하면서 주님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를 침묵 중에 느끼신 적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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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최견우 사도 요한 신부
2017년 5월 21일 대전교구 주보에서
  |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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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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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신부' 낯선 표현이지만, 수업 시간에는 선생으로 다른 시간에는 신부로 살아가는 저를 잘 표현해 주는 단어입니다. 그런 제가 가르치는 과목이 종교학입니다. 종교학 교과서는 '초인간적인 또는 보이지 않는 세계나 힘을 상상하고 믿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이지만, 내심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려고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얻어내는 것이 종교라는 설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의 신앙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상상하거나 단순히 믿는 것을 넘어서서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1베드 3,15)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누군가를 상상하고, 그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고, 그토록 사랑하셨던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끝내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첫머리와 끝머리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 곧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저는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 '사랑'에 방점을 두고 싶습니다.

그동안 예수님 없이 의무감과 두려움으로 계명 지키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 때문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교황님께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무엇하는 사람인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헛된 말이나 이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살아계신 분, 곧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을 사랑하고,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더욱 가까워져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2003년 청소년주일 담화 참조).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고 친구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언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그분에게서 얻어내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지키지 않으면 큰일이 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이 명하신 것도 순종하며 따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뜻이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그 뜻을 실천합니다(1베드 3,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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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정동수 야고보 신부
2020년 5월 17일 대전교구 주보에서
  |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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