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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조회수 | 2,481
작성일 | 08.04.2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신자 여러분들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한다면 얼마만큼 사랑하십니까? 사람마다 사랑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100%라면 10%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50%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100%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주님께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 반성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알아봐야 합니다.  

우리들은 혹시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약 성경 야고보서 2장 17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사랑에 있어서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죽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두 가지를 지키고 실천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과의 만남(미사와 기도)과 주님께 정성을 드리는 봉헌 예물(돈)입니다.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일주일이면 168시간입니다. 이 시간 중에서 우리는 얼마나 주님과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미사와 기도는 주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의 시간입니다. 특히 주일 미사는 주님과 만나는 약속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주일 미사에 빠진다면 그것은 주님께 대한 실천으로 사랑을 드리지 못하는 행동이 됩니다. 친구와 술 마시는 시간은 있으면서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있으면서 주님과 대화 나누는 만남의 시간이 없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관심이 없다는 것도 됩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또한 주님과의 사랑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사와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물 봉헌도 마찬가지로써 우리는 정성을 드려서 임해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다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려드리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교무금과 미사 헌금, 미사 예물을 정성을 들여서 봉헌해야 합니다. 교회의 의무니까, 마지 못해서 하는 마음, 아까운 마음으로 하는 봉헌 예물은 사랑의 표현이 아닙니다. 자신과 가족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돈을 쓰면서 주님께 인색한 사람은 사랑의 표현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한 달에 술값은 얼마나 냅니까? 담배 값은 얼마나 냅니까? 화장품 값은 얼마나 냅니까? 이쁘고 화려한 옷값은 얼마나 냅니까? 회식비는 얼마나 냅니까? 그렇지만 우리들을 매일 같이 사랑하고 계시는 주님께는 얼마나 봉헌하며 살아가십니까? 주님을 사랑한다면 결코 예물 봉헌에 대해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예물 봉헌에 인색한 사람은 주님께 대한 사랑도 인색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말뿐이 아니라 실천이 뒤따라야 하고 그 실천은 바로 주님과의 만남인 미사와 기도 그리고 예물 봉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즉, 주님과의 만남과(미사와 기도) 봉헌 예물(돈)은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표현이며 계명입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100%입니까? 50%입니까? 10%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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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유창우 암브로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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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일하면서 필요한 다른 보호자, 곧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에 자연의 모든 생명을 낳아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이시며, 인간의 자연생활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드높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십니다.

이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게 해 주시는 작업을 성령께서 맡아 주신다는 약속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보호자로 제자들에게 주실 성령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맥락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과 함께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평생 예수 그리스도와 삶을 같이 해오며, 그분을 알아보고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그 참됨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세상은, 현세 생활에 눈이 어두워져 그분의 성령을 볼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며 영적으로 변화된 제자들 안에서 성령이 함께 사시면서 모든 것을 안내하실 것입니다. 그 보증으로 예수님께서는 갔다가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에는 제자들은 성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가 같은 생명 안에서 일치하며, 제자들도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하는 것은 예수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킴으로써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표이며, 사랑하는 것만이 참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주님 안에서 참다운 삶을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인천교구 김재영 요셉 신부>
  |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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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처럼 어떠한 상황에 따라서 마음가짐이 달라질 때가 참 많지요. 예를 들어, 보행자가 되어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에는 파란 신호등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짜증내고, 운전자가 되면 왜 이렇게 빨간 신호등이 자주 켜지고 길다고 짜증냅니다. 이제 얼마 뒤에는 지방선거가 있는데, 정치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국민을 위하고 대한민국을 위한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자그마한 것에도 서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타협을 하지 못합니다.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자그마한 문제로 서로 틀리다고 하면서 다신 안 볼 것처럼 싸우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시각이 틀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입장이 다를 뿐입니다. 다른 입장이다 보니 견해차가 생기는 것뿐이지요. 틀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를 뿐인데 왜 서로를 원수 대하듯이 할까요? 문제는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입장에서는 내가 맞고, 상대방에서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맞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다름을 큰마음으로 인정해주면 어떨까요? 사실 주님께서도 이 큰마음을 보여주셨지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십니다. 그런데 복수하셨습니까? 아니면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보이셨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성령이라는 커다란 선물까지 주시는 큰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들의 다름을 인정하셨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고 더 큰사랑을 베풀어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이러한 ‘큰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할 수 있는 ‘큰마음’ 말이지요. 이 큰마음을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바뀝니까? 오늘 독서에 나오듯이 주님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합니다. 자신들과 다르다며 박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위협에 무서워 벌벌 떨었던 예전의 나약한 모습을 버리고, 그들 역시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면서 용기 있게 거리로 나가 주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 참 행복이 어디에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행복론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낸 ‘칼 히티’라는 사상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책을 보면, 어느 한 군데에서도 건강하고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 옆에는 누가 있는가를 보아라.’고 말합니다. 즉, ‘당신이 불행에 빠지고, 외로울 때 묵묵히 옆에 있어 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으로 당신이 행복한가 아닌가를 결정하라.’고 말합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높고 위대하신 분,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 옆에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제자들은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이 있음을 발견했기에, 세상에 주님을 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옆에 계신 주님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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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있는 그대로

어쩌면 요즘 세상에서 가장 흔한 말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그런데 흔한 말인 사랑이 인간이 겪는 최고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고,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충만함을 느끼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상실감도 느낍니다. 사랑의 척도가 저마다 다르기에 저마다 사랑의 모습도 다르고 자신이 느끼고 있는 사랑의 무게 또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또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에 있으면서 스스로 약속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청소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때로는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그 사랑이 저를 변화시키고 제가 만나는 청소년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다른 무엇보다 유독 ‘사랑’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받아 지켜야 할 계명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들여 지키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사랑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니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던 사랑, 그 조건 없는 사랑에서 보듯이, 바로 그 누구라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 그 분의 모습대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아니 그 밖의 제가 만나는 사람들의 많은 조건을 따지며 입으로만 부지런히 사랑을 말할 때가 많고, 어쩌면 머리로만 열심히 사랑을 생각할 때가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오늘 다시 한 번 누구나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부족한 저의 사랑 역시 변화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인지, 있는 그대로의 사랑이 아닌 그저 말만으로 혹은 머리로만 머무는 사랑은 아닌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바로 있는 그대로 오늘도 사랑하기를 희망해 봅니다. 사랑은 흔한 말이 아니라 나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소중함을 보여주기에, 있는 그대로의 그 예수님 사랑이 제가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드러나길 오늘도 기도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인천교구 유종선 시몬 신부 : 2017년 5월 21일
  |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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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내게 오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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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오늘 복음 14장 21절의 말씀인데, 우리 스승께서는 이 말씀을 참되게 지키고 계시죠.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랑이 그들의 한계점에 도달할 때 당신의 모습을 기꺼이 드러내셨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스테파노가 제자들 가운데 첫 순교를 당할 때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6)

이번에는 꼭히 순교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만 나타나신 것은 아닌 경우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 성인전들을 읽어 보면 그분들에게도 꽤 많이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막의 성자라고 불리는 안토니우스 성인이나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뚜렷한 주님 체험 말고도 재미있는 주님 체험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아르스의 성자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이 겪은 일입니다.

신부님은, 성당 신자들 가운데 한 농부가 일하기 위해 들판에 오고 가면서 늘 성전 앞에서 잠깐씩 침묵을 지키며 묵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농부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거기서 그렇게 오랫동안 무엇을 하는 건가요?” 그 농부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하느님은 저를 바라봅니다.”

이 농부의 대답은 저에게 있어 마치 하느님과 밀어를 주고받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속삭임처럼 들립니다, 아주 아주 달콤새큼한 솜사탕 맛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과의 관계가 이런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 이냐시오는 만레사 동굴에서 수행을 하는 과정에 체험한 주님의 손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무렵 하느님께서는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다루듯이 그를 다루셨다.’

이 글은 마치 꼬맹이 손을 붙들고 비틀비틀 내려가는 글씨를 따라가 주는 선생님과 학생의 표정을 상상하게 합니다. 늦은 나이에, 그리고 세속에 잔뜩 찌들어 제자의 길에 들어선 꼬맹이 신입생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선생님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연인, 선생님과 같은 주님과의 관계. 이에 하나의 재미있는 관계를 더 보았으면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묵상기도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분과 홀로 자주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우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수녀님은 주님과의 관계를 친우들이 느낄 수 있는 ‘우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당신이 만난 주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주님을 ‘홀로’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정을 나눈다’는 이 말씀들이 참으로 포근하고 따뜻하게 들립니다.

사랑하는 연인, 존경과 존중이 넘치는 사제관계, 그리고 모든 허물을 덮고 오직 그와 함께하는 것만을 기억하는 벗의 우정-오늘 주님은 이런 모습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다가서며 말을 거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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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덕원 토마스 신부
2020년 5월 17일 인천교구 주보에서
  |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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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진은 호텔 청소원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에만 청소가 건강한 삶을 위해 미연방 의무감이 추천하는 일이라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두 집단은 똑같이 청소 작업을 했지만 4주 후 자기가 하는 일이 건강에 좋다고 믿은 집단에서만 체중, 혈압, 체지방, 허리-엉덩이 비율, 체질량 지수가 모두 감소했습니다.

생각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도 체중을 줄이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임했을 때
좋은 결과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에는
신체를 지배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렇게 놀라운 힘을 하느님께서 넣어주셨습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마음으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단어의 선택부터 다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노래를 진짜 못해요.”라는 말보다는,
“아직 노래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라는 식으로
관점을 바꿀 수 있는 말이 필요합니다.

자기 불신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긍정적이고 성장 가능한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해 이제 더는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십니다.

성령은 아들과 다른 방식으로 위로하십니다.
성자와 성령, 두 분의 본성은 같지만, 보호자요 위로자이신 성령은 특별히 고통받는 이들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즉, 성령을 통해 위로를 받아 불신의 마음을 종속시키고 대신 긍정적이고 성장 가능한 마음을 갖게 하면서 희망으로 나아가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성령의 선물이 우리 안에 드러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나가게 될 때 가능합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지요.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가치 있는 것을 주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성령의 활동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마음부터 변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로써 이 세상 안에서 희망을 간직하면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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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0년 5월 17일
  |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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