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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인간 : 하느님 만나는 기회, 장소
조회수 | 1,566
작성일 | 08.06.26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회’요 ‘장소’이다. 특히 하느님께서 전교사명을 통해 특별히 존재하는 사람들 즉 ‘예언자’나 ‘옳은 사람’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제1독서: 2열왕 4,8-11.14-16a: 엘리사와 수넴의 여인

수넴의 여인은 그 지방을 지나다녔던 예언자 엘리사를 극진히 환대하고 남편에게도 그것을 설득한다(9-10절). 하느님께서는 이 여인의 열성을 엘리사를 통해 갚아주신다. 즉 그 여인은 아들이 없었고 남편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가 없는 나이였는데도 아들을 갖게 되리라고 예언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14-17절).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지닌 행위이다. 그것은 ‘생존여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나그네 대접을 받지 못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의 행위이며,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나그네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고 계시다.

제1독서의 ‘나그네 대접’에는 인간적 차원 외에 ‘거룩한’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수넴의 여인은 그 점을 확언하고 있다. “틀림없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9절). 이제 ‘신앙’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나그네 대접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해줄 것이다.

복음 : 마태오 10,37-42: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박해를 야기할 뿐 아니라, 복음선포 사명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력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37-39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면 끊어버려야 할 인간관계의 범위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신앙 안에서 심리학적 측면이나 광신적 행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8절). 또한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단순한 가정이 아닌 분명한 현실로서의 십자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느님과 진리에 충실하신 그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형제들을 위해 행동하셨던,

그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역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분의 길을 철저히 따라야하기 때문이며, 생존을 위한 타협이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의 힘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수께서는 당시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합법적인 ‘대리권’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물론 파견 받은 자와 파견하신 분은 다르다.

선교사명에 있어서도 주관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명 자체에는 ‘연속성’이 있다. 이 ‘대리권’외에 다른 원리는 사도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복음선포를 돕는 사람은 복음선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41-42절).

여기서 ‘맞아들이다’는 말은 물질적 차원에서의 ‘맞아들이기’ 즉 수넴의 여인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나그네 대접’의 의미이기도 하다. 즉 물질적 의미 외에 ‘신앙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의 도구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예언자’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 사도로 사명을 받지 못했지만 사도들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사도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옳은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들’(41-42절)은 모두 복음 선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연계된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요구되는 ‘성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선포 사명이다. 자신은 죽음을 당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셔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철저한 자기 포기이다.

제2독서: 로마 6,3-4.8-11: 세례를 받고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에 대해서 세례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세례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활’에 참여케 해준다. 십자가는 십자가로만 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3-4.11절).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11절).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과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윤리적 행위의 개념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과 생명 두 순간이 동시적(同時的)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말한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는 죽음과 생명이 끝없는 투쟁을 벌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의 십자가를 안겨준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

우리는 모두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복음 선포자들에게 협조함으로써, 그들이 더욱 복음을 선포하는데 잘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을 받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선포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없애면서 절대가치이신 그리스도를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도, 이 사회도 아름답게 변화되어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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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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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더 값진 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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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인 동시에 ‘교황 주일’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을 떠나 보내고 새로운 교황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도 큰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교황님의 서거는 우리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주었지만 또한 신앙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해 주었습니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마지막으로 신자들에게 남기신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또한 장례 미사가 슬픔 속에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성인의 탄생을 맞이 하듯이 기쁨 속에서 치러진 모습은 우리 신앙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교황님의 탄생은 우리와 전 세계에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신자들과의 첫 만남에서 “저를 여러분의 기도에 맡깁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죽음 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 인간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는 모습이 바로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파견설교 마지막 부분입니다.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수넴의 여인이 엘리사를 극진히 대접하고 축복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에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하신 말씀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그 당시에 행해지던 ‘나그네 대접’이라는 전통을 신앙으로 한 단계 더 들어 높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세상적으로 낯선 곳에서 도움이 필요한 나그네를 돕는 것 뿐만 아니라 신앙 때문에, 하느님 말씀 때문에 나그네를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 신앙인의 행위의 근거가 바로 하느님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간혹 ‘희생이나 보속’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부님, 보속으로 선행 한 번을 받았는데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니 좋은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이것도 보속이 될까요?”

물론 착한 본성에서 행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보속’이라면 ‘지향’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곧 선행을 하기 전에 분명한 지향, ‘이 선행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아니면 ‘나는 하기 싫지만(내키지 않지만)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행합니다’ 또는 ‘신앙이기 때문에 행합니다’라는 분명한 지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을 세상적인 차원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신앙의 차원으로 끌어 올릴 때 ‘더 값진 예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세상의 어떠한 가치보다 하느님의 가치가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보다 앞서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의 가족과 나의 생명도 하느님보다 앞설 때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축복이 되지 못하고 화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이 먼저 선택될 때 모든 것은 올바른 가치를 얻게 되고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가야 하겠습니다. 매 순간이 모두 주님께 올리는 ‘더 값진 예물’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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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창훈 스테파노 신부
  |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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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리스도인 = 받아들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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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는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입문 성사인 세례 성사에서 제일 먼저 거행되는 예식은 “예비 신자로 받아들이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 안에서 주례자는 “여러분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면서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라며, 세례자의 결심을 요청합니다.

삶을 하느님께 맡기는 사람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곧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분을 받아들이는 사람”(마태 10,40)인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성사’로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여성령의 궁전이 됩니다. 특별히 ‘성체 성사’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고해 성사’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여 그분과 화해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사로 우리는 이처럼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이러한 성사는 단순한 예식 거행이나 참여가 강요된 제도적인 형식을 넘어서서, 우리 자신의 온 삶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여 그분의 거룩한 자녀가 되고, 우리가 받아들인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곧 하느님을 받아들임은 전례 안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하느님의 제자라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로 살아가는 이야말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 바로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 안에서 만나는 이웃 형제자매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들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인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용서와 화해, 위로와 치유, 평화와 용기를 주시는 것처럼, 하느님을 받아들인 우리도 이웃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요청을 기억하며, 일상 안에서도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먼저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하느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셨음에 감사하도록 합시다.

먼저 받아들여진 우리가 이제는 우리 이웃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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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기정만 에제키엘 신부
2020년 6월 28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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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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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나를 진정 사랑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이용하려 다가오는 사람도 사실 자신이 그런 줄 모르는 때도 있습니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다가오지만, 자신의 본성이 아직 저급한 상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내가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이 구분을 잘하지 못하면 모기에게 속아서 피를 빨리느라고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중에,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전에 다니던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하다가 저의 치아를 갈라지게 한 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기세였습니다. 제가 사제라고 말하니까, 신자가 아님에도 자신의 남편의 친구 중에 사제가 있다고 하며 문밖에 나갈 때까지 저에게 관심을 주었습니다. 우선은 갈라진 치아를 임시로 붙여서 크라운을 씌웠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치아가 조금 아파서 같은 치과에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를 대하는 것도 이전과는 딴 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치아가 갈라져 있으니 빨리 뽑고 임플란트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해 놓고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제 치아를 이렇게 갈라지게 한 분이 당신입니다.”라고 말하여 기억을 되살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그때 찾아왔던 신부입 ... .”

그분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늘 뽑고 가실래요?”

자신의 의도가 너무 앞서니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제 치아와 이별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며 그 치과를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 치과에 가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치아를 정상적으로 잘 쓰고 있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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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려면 나의 말을 경청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때는 나의 말을 잘 들으려 합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듣거나 듣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으면서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저는 몇 년 동안 제 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여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나가는 것은 무엇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말을 듣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에 관심이 없으면 그 말하는 사람에게도 사실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관심이 생겨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게 됩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일화라고 합니다.
버나드 쇼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각가 로댕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귀한 로댕의 그림 스케치를 구했다고 하며 그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로댕을 좋아하는 그 친구들은 그 그림만 보며 예술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때 버나드 쇼가 “아, 미안합니다. 이 그림은 로댕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것이었네요.”라고 말했을 때 장내는 정적만이 흘렀다고 합니다. [출처: ‘말의 품격’, 이기주, 유튜브 ‘책 읽는 다락방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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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도 싫게 들립니다.
모든 것이 싫게 들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을 바꾸어 잘 보이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지난 복권을 사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빨리 포기하고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 삶을 허비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물론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참아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쫓아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 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으면 아버지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 파견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도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내가 예수님을 더 좋아하는지, 아니면 이용하기 위해 다가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파견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파견한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이고, 교회가 하는 말과 가르침에 관심이 없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신자들은 모이면 주로 누구에 대해 말을 많이 하나요? 아마 본당의 사제와 수녀님들에 대해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잘하면서도 뒤돌아서면 그분들을 굳이 안 좋게 말하는 신자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주님께서 왕으로 뽑으셨다는 것 하나 때문에 끝까지 그를 공경하였습니다.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결코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며 자신의 원수지만 용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태도는 그분이 파견하신 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파견하신 이도 사랑합니다. 그 인품에 상관이 없습니다. 인품이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분이 파견하신 분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라도 공경한다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매번 인사이동 때마다 주님께서 파견하시는 이들 앞에서 주님께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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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6월 28일
  |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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