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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조회수 | 1,807
작성일 | 08.06.26
오늘의 복음말씀 요지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우수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스승과 제자를 결합시키는 관계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지적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주 단순하게 『나를 따르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서에 나오는 「따르다」라는 동사는 단지 예수님의 인격에 귀의하는 것을 표현한다(마태 8, 19 이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과거와의 절연을 의미하며, 따라서 참된 제자가 되려면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행동 양식을 따르고, 그분의 교훈을 경청하며, 구세주의 삶에 자기의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마르 8, 34~35; 마태 19, 21; 루가 18, 22).

유다교 학자의 제자들은 일단 율법에 규정된 교육을 끝낸 다음에는 스승을 떠나 독자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과는 달리 하나의 가르침에 매이지 않고 그분의 인격에 매여있기 때문에, 자기 부모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스승을 떠날 수 없었다(마태 10, 37; 루가 14, 25~26).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의 운명을 함께 나누기로 불리움을 받았다. 즉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마르 8, 34; 마태 16, 24; 루가 9, 23), 그분의 잔을 마시며(마르 10, 38~40), 마침내 그분께로부터 왕국을 받기로(마태 19, 28~29; 루가 22, 28~30; 요한 14, 3) 불리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그가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물 한잔만이라도 주는 이는 누구나 제 상급을 잃지 않을 것이나(마태 18, 6; 마르 9, 41) 반대로 이 미소한 형제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단죄될 것이다(마르 9, 42; 마태 18, 6; 루가 17, 2).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다교의 제자들과 구별된다면,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당신 독생 성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유다교의 스승들은 때때로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무효화할 위험이 있는 인간적 전승만을 가르칠 따름이나(마르 7, 1~3),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그들 영혼의 안식을 약속하시는 강생하신 하느님의 지혜이시다(마태 11, 29).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며,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요한 6, 45).

예수께서 강생하신 목적은 인류 구원이지만 구원에로 이르는 길은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이기에 우리의 심신을 무겁게 하고 우리의 발걸음을 무디게 하는 제물이건 명예건 권력이건 직책이건 사람이건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집착하지 말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엘리아는 자기를 따르려는 엘리사에게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먼저 하러 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먼저 치르고 따르겠다는 요청마저도 거절하시고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까지 가혹한 요구를 하셨다.

또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온 부자 청년에게는 그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며 돌아간 후에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쉽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그 청년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사도들은 에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즉시 가족과 재산과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과거의 많은 성인 성녀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이나 동굴로 주님을 찾아갔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보다 더 완전하고 안전하게 주님을 따르고자 복음 삼덕의 길을 택하여 자신의 순결을 봉헌하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직분에 대한 집착과 소유권을 봉헌하고, 자신의 자유 의지마저 봉헌하여 완전히 빈 껍데기가 되어 홀가분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고 빈 껍데기가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빈 공간을 당신 자신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에 그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착하고 충실한 길잡이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도 현재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 드리고 우리는 단지 관리자의 위치로 내려와 주님의 충실한 청지기로 최선을 다하여 삶음으로써 주님의 성실한 제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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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허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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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들으면,
예수님의 제자는 부모도 자녀도 외면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복음서는 2천 년 전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면 표현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녀를 외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부모, 또는 하느님과 자녀를 대립시켜 놓고,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나 자녀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우리는 천륜(天倫)이라 부릅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사실을 전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모와 자녀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인연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시선에서 새롭게 생각할 것을 권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비로소 부모와 자녀의 천륜이라는 관계가 올바르게 이해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넓은 인연의 세계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셨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봉양(奉養)하는 것도, 자녀를 양육하는 일도, 모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부모에 대한 우리의 효성도,
자녀를 위한 우리의 사랑도 맹목적 애착의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워질 때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주로 생각합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자녀에 대해서도,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체면을 위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생각에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좁은 시야 안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으로 열리는 넓은 시야에서 부모도, 자녀도 새롭게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좁은 시야가 원하는 바를 포기하는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목숨을 잃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이라는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존재도, 자기를 감싸고 있는 주변도, 모두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사람의 병을 고친 다음,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했소”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느님은 생명을 베풀고 살리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자기도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이 살리시는 분이라서 자기도 살리는 노력을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실천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인간 윤리의 요구에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신앙의 강력한 동기가 첨가됩니다.

자녀 교육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위한다고 하면서 흔히는 우리의 욕구와 욕심을 충족시키려 합니다. 자기가 하지 못했던 것, 혹은 자기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자녀에게 강요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키우지 못하게 합니다. 경쟁하면서 많은 것을 외우는 아이들만 키우고 있습니다. 학교로, 학원으로 다니면서 지식이라는 먹이를 게걸스럽게 먹고 이웃과 경쟁하는 아이들입니다. 이웃을 이해하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보면서 이웃에게 양보하는 인간의 마음은 점점 그들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점수, 좋은 학교, 많은 재물, 높은 자리를 위해 계속 경쟁해야 합니다. 아이의 머리가 따라 주지 않으면, 치맛바람도 좋고 촌지 봉투라도 좋습니다. 하여튼 내 자식이 잘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야수가 그 새끼를 키우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에서 자녀를 보는 눈은 다릅니다. 이 넓은 인연 안에서 자녀를 보는 신앙인에게 자녀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특별히 맡겨주신 생명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욕구 충족을 위한 존재도 아니고, 부모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수단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삼가 키워야 하는 소중한 생명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라,
우리의 자녀도 그분의 살리는 힘을 연장하여 실천하며 살도록 키워야 합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최대의 보람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키워야 합니다.

이런 노력에는 십자가가 따릅니다.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고 자녀를 사람답게 키우려면,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이어서 복음은 또 말합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좁은 시야에
보이는 자기의 현세적 삶 하나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 매진하면, 부모도, 자녀도, 세상도 모두 그 참된 의미를 잃는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주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넓은 인연의 세계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알아듣지 못한 세계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서 당신의 삶을 내어줌과 쏟음이라는 말로 요약하셨습니다. 그 내어줌과 쏟음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의 세계 안에 보이는 생명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내어주고 쏟으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입니다. 나 한 사람의 목숨이 가장 소중한 이기적 인연의 세계에서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부모도 자녀도 자기 자신을 성취하기에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중심이신 넓은 세계 안에서 부모도 자녀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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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6.26
459 0.4%
[부산] 예수 신앙, 예수 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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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관해 일반역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실들〉

• 예수는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의 사망 무렵에 태어났다.
• 그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갈릴래아 지역의 소읍 나자렛에서 보냈다.
• 그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 그는 “하느님 나라" 를 설교했다.
• 그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마하는 갈릴래아인이었다.
• 그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불러 세웠다.
• 그는 이스라엘 내에서만 활동했다.
• 그는 약 30세에 과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갔다.
• 그는 성전과 관련된 논쟁을 벌였고, 성전 영역에서 소요가 있었다.
• 그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눴다.
• 그는 유대 관료들, 특별히 대제사장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 그는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명령으로 예루살렘 외곽에서 로마 당국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 그의 제자들은 처음에 도주했다.
• 제자들은 그가 죽은 이후에 그를 보았다고 증언한다.
• 그 결과로 제자들은 그가 다시 와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리라고 믿었다.
• 그들은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를 이루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하느님의 메시아로 믿도록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 적어도 일부 유대인들은 이 새로운 운동을 핍박하고 박해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 이후에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자연히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고 예수가 메시아임을 널리 선포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핍박과 박해가 시작되었고 온갖 장애물들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나온말이 오늘 복음 내용이다.

혈육의 관계보다
예수 메시아 신앙, 예수 메시아 추종이 더 우선적이다. 예수 메시아 신앙, 예수 메시아 추종하려면 십자가 추종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순교할 각오도 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 추종으로 이승의 목숨을 잃은 이는 영생(하느님의 생명)을 얻고, 십자가 추종을 저버려 이승의 목숨을 지키는 이는 영생을 잃는다.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추종을 지켜나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는 메시아(그리스도)라는 확신이다. 최초의 제자들은 이 확신이 너무나도 명백했다. 자 우리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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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민 미카엘 신부
2020년 6월 28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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