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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십자가가 다가올 때면
조회수 | 1,556
작성일 | 08.06.26
갑작스런 호출을 받고 심야에 병자성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죄송한데요, 지금 위독하신데, 신부님을 모실 수가 없어서요." 사제들에게는 담당구역이 확실하기에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병자성사는 관할 본당 신부님들이나 원목신부님들께 부탁하도록 안내합니다. 그러나 정 상황이 안 될 때는 사제 양심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장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데…. 신속히 가방을 챙기고, 재빨리 시동을 겁니다. 신호도 어깁니다.

병자성사를 드리러 부랴부랴 집중치료실에 도착해보니 한 형제분께서 거의 임종 직전에 도달해 계셨습니다. 온 몸은 응급조치를 위한 각종 호스며 전선들로 복잡했습니다. 얼굴에는 핏기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연신 숨을 가삐 몰아쉬고 계셨습니다.

숨이 너무도 가쁜 나머지 괴로워 어쩔 줄 모르는 환자분을 바라보는 가족들 역시 함께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제발 저 답답한 호흡곤란 증세를 완화시켜 주셔서 마지막 가시는 길,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계신 형제님,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던 형제님 얼굴에 예수님 얼굴이 겹쳐졌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도 지독한 호흡곤란 증세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꽝꽝' 대못이 박힌 손과 발의 통증도 이루 말로 다 표현 못할 고통이었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체중이 아래로 쏠리는 현상으로 인한 심장 압박, 그로 인한 호흡곤란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호흡이 곤란했던 예수님께서는 그때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힘을 다해 온 몸을 위로 뻗으셨습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호흡곤란 증세가 완화됐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다시 내리누르는 체중 압박으로 되풀이되는 호흡곤란…. 십자가 위에서 몇 시간은 정녕 혹독한 고통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세상이 통곡하던 그 성 금요일로 되돌아가 봅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셔서 호흡곤란에 헐떡이시는 예수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전지전능하셨던 분, 죽은 사람마저도 다시 살리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비극적 죽음, 피하고자 마음 먹었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그 고독한 길, 죽음과도 같은 형극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십니다. 그 치욕의 십자가 위에 자진해서 매달리십니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을 단 한치 오차도 없이 실천하신 예수님, 그분의 순명으로 세상 구원이 왔습니다. 우리 죄인들도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결국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자기희생을 동반한 십자가 외에 천국으로 향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한세상 살다 보면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십자가들, 절대로 바라지 않았던 십자가들이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어떤 십자가는 지독하게도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체를 휘감습니다. 어쩌면 평생 우리가 지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물론 한평생 십자가를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무작정 십자가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십자가의 가치 인정' '십자가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 대범해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십자가를 친구처럼 여기자는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의 길 그 도상 위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고 가는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의미부여가 가능합니다.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가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치욕의 십자가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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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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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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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대접 못 받는’ 모욕의 순간은 우리가 정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혹은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그들이 판단했을 때) 발생합니다.

받아들여지지 않고 환대받지 못하며 그래서 존재가 부정되고 마는 비극은 우리의 일상 도처에 기생(寄生)하는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환대’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인지를 설명해줍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복음서는
크게 5개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복음은 그 두 번째 ‘파견 설교’에 속해있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을 언급하시는데 첫 시작부터 가히 파격적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혹은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27)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유대로 묶일 수밖에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을 부인하는 듯한 말씀이 억지스러운 위협과 심각한 독선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이러한 난처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본문을 복음서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큰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본문의 역설도 조금은 수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박해를 각오하라’(10,16-25)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10,26-33)는 말씀 다음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가족’을
모티브로 한 단락에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듯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시며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설 것’이라고 예견하시고 급기야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10,34-36)라고 까지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적 말씀 바로 다음에 오늘 복음의 첫 부분(“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마태오복음서가
제작되던 시대의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이해 가능한 구절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완성되었는데, 당시 유다 내부사회는 계급간의 갈등과 부패로 심각한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결국 로마군이 주둔하여
사태를 정리하는 계엄 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저항하던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파국적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의심과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 때문에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칼을 주러왔고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 때문에 감수해야했던 가족으로부터의 소외와 버림받음을 암시적으로 언급한 내용입니다.

■ 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대립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내용으로서는 가장 먼저 등장하는 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문장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문장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한다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 위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가치가 없다.”입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
“사랑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필레오’로서 누군가에게 매력과 호감을 느끼고 애착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초성적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동사 ‘아가파오’에서 파생)와 구별되는 감정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
애착의 위험성과 집착이 수반하는 속박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착할 때 발생하는 불안, 질투, 실망, 미움은 인간을 파괴하는 치명적 무기가 되며 집착에서 벗어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인간은 훨씬 더 풍요롭고 안전하며 충만한 유기적 공존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복음의 후반부는
한 사람에 대한 집착을 접고, 대신 주변 이웃들을 ‘받아들임’과 그 결과로 ‘받게 되는’ 보상(40-41절)에 대해 언급합니다.

“받아들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데코마이’이며
이는 ‘환영하다, 인정하다, 인내하고 참아주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를 환대하고 존중하며, 그의 모든 것을 인내하고 참아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게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큰 환대로 보상받게 되는데 특별히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42절)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작은이들”은 스스로 보상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보상하시는 것입니다.

■ 환대와 보상

이러한 환대와 보상의 상호성은 제1독서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넴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한 여인은 엘리사 예언자가 그 지역을 지날 때 마다 자기 집에 모셔 음식을 대접하고 환대합니다. 이는 그녀가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2열왕 4,9)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사람을 환대한 것은 곧 하느님을 환대한 것이 됩니다.

결국 이러한 환대는,
나이 많은 남편과 자식 없이 살고 있던 여인의 임신으로 보상받게 됩니다. “부인은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16절)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집착은 주변의 “작은이들”에게 다가가야 할 우리의 진심과 선의를 무기력하게 하는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을
예수님 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은, 사실 부질없는 집착이나 애착을 넘어서는 넓은 사랑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렬하고 충실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 되고 맙니다. 폐쇄적이기에 치열하고, 치열할수록 맹목적인 가학성을 띨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를 포기하거나 버림을 의미하지 않고 ‘믿음’을 의미합니다. 상대를 믿지 못할 때 불안하고 초조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되고 결국 그런 놓을 수 없음이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믿을 때
자유로울 수 있고 관대하며 유쾌하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결속과 연대의 미명아래 자행되는 배타적 집착에서 벗어나 다름과 낯섦을 인정하고 서로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존중하는 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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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김혜윤 수녀
2020년 6월 28일 가톨릭 신문에서
  |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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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오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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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13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파견한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숙소를 제공하고 대접한 수넴 여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자비를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함께 죽고 묻혔으니, 그분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는 특히,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들에게는 상이 베풀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

이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당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당신의 이름으로 파견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 안에는 하느님이 계셔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파견한 제자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나아가 당신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당신의 제자를 제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제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파견 받은 이들, 곧 예언자들과 의인들과 제자들은 핍박을 당하면서도 섬기는 “작은이들”로 간주하며, 이 “작은이들”을 받아들이고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에게는 “상”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저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정말 작은이로서 제자인가? 제자로서 작은 자인가? 곧 섬기는 이가 아니라 섬김 받기를 좋아하지는 않는가? 또 핍박당하고 거부되는 것을 못 견뎌하고 오히려 상대를 윽박지르고 짓누르지는 않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받아들여 대접해주는 신자들의 선의를 마치 정당한 권리인 영 당연히 여기고 오히려 기대하고 즐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대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대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진정, 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인가?

오늘 <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 당신의 제자 혹은 파견 받은 이가 지녀야 할 태도와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로서 합당하지 못한 태도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오 10,37)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오 10,38)

부모나 자녀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은 가족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혈연의 자연적 인간적인 사랑(φιλεω)보다 신적인 사랑(αγαπαω)을 앞세워 우선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예수님을 ‘앞세워 먼저’ 더 사랑하는 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겪게 될 시련과 치욕을 지고서 따르라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곧 당시의 십자가는 죄수 중에도 노예죄수나 반란죄를 지은 이의 처형도구였듯이, 대단히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까지도 지고 따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 합당한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10,39)

이 말씀은 박해에 대한 제자들의 자세를 당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삶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주님 안에서의 생명의 상실은 오히려 더 귀한 생명의 얻음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잃는다면, 결국 자기의 영혼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역시, 오늘의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앞세워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
또 제 십자가 지기를 기꺼이 하는가,
오히려 피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내 자신을 따르며 내 뜻을 실현하고 있지는 않는가?
진정 내 목숨을 내어놓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며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 온갖 안전과 보호 장치를 꾸미고 있지는 않는가?
정말,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마태오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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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저녁처럼 그저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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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6월 28일
  | 06.28
459 15.6%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는 합당하지 않다.(마태오 10,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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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더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해야 할 우리 사랑입니다. 우선순위를 새롭게하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에서 오늘도 십자가를 질 힘을 얻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너무나 잘 가르쳐줍니다. 사랑 없이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십자가와 사람의 길은 모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뒤바뀐 사랑의 순서를 바로잡는 사랑의 멋진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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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6월 28일
  | 06.28
459 15.6%
참 멋진 주님 제자의 삶

-사랑, 추종,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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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론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참 멋진 주님 제자의 삶’입니다.

제 요즘 취미가 뭔지 아십니까?
휴대폰 사진찍기입니다. 하여 자칭 제 별명을 ‘사랑의 사진사’라 부릅니다.

참 멋진 사진을 찍으면 지인들과 나누곤 합니다. 어제도 멋진 청년이 가족과 함께 자동차 축복차 방문했기에 자동차 축복후 요셉상 앞에서 가족 사진을 찍은후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전송했습니다.

“모두 멋지고 평화로워 보이네요! 멋지고 평화롭게 사세요!”

‘멋지다’를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썩 훌륭하다 였고 우아하다와 비슷한 말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아름답다와 더불어 참 좋은 말마디로 요즘 제가 참 많이 쓰는 어휘이기도 합니다.

엊그제 저는 참 멋지게 산 분의 부음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의 대표 생태운동가, 회색문명, 녹색으로 맞선 생태적 인간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별세’란 기사엔 감동적이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녹색평론은 제가 정기 구독해 보는 유일한 국내 격월간 나오는 잡지입니다. 전북 진안에서 생태마을 공동체를 운영하는 최종수 신부의 추모사에 나오는 두분의 우정도 멋졌습니다.

-“신부님, 힘드시죠. 우리 신부님이 큰 일을 하고 계십니다. 농촌이 희망입니다. 생태적인 삶, 자급자족 생태공동체가 대안입니다. 흙과 함께 단순소박하게 사는 것이죠. 내가 도울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통장 번호 문자로 주이소.”

“아버님,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후원을 하셨어요. 녹색평론 발행도 쉽지 않는데요. 너무 큰 금액이라 손가락을 세 번이나 확인했어요. 아버님 큰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아버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이고 그리 많지 않아요. 생태마을 초창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겠나. 밑빠진 독에 물붓기 아닌가요. 종자돈 알지요. 힘내고 용기 내라고 보낸 겁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우정입니다.
제 주변에는 참 멋진 삶을 살아가는 꽃같이 예쁜, 별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꽃을 선물할 때 저절로 나오는 싯귀입니다.

“꽃을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방금 부른 화답송은 얼마나 멋집니까? 제가 참 좋아하는 화답송으로 산책때 마다 노래로 되뇌이며 바치는 짧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누구나 ‘멋지다’라는 찬사를 받으면 좋아할 것이며 믿는 이들이라면 참 멋진 제자의 삶을 살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참 멋진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그 방법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려드립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이요 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방향이자 중심이자 의미이신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비단 우리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이들에 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세상과 이웃에 대해 집착에서 초연한, 눈밝은 사랑에 참 멋진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가족만을, 세상만을 사랑할 때 눈먼 맹목적 사랑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무엇이 참사랑입니까?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없는 무사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이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수행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기도의 수행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을 평생,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시편공동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를 바칩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기도의 수행이 공동체의 일치는 물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날로 증진시켜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며 참 멋진 제자의 삶을 형성합니다.


둘째, 추종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합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인생 여정입니다. 다 각자 고유의 인생여정이지만 함께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여정입니다. 길은 다 달라도 방향과 목표는 일치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영원한 방향이자 목표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무수한 정신질환도 여기 서 기인합니다. 아무리 빨리 가면 뭣합니까? 제대로 제방향으로 가야지요.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생각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주절주절 말할 수는 있어도 생각없이 글을 쓸수는 없습니다. 글쓰는 습관이 생각을 키우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주님을 생각없이 제 십자가 없이 추종할 때 말짱 헛일입니다. 비교하여 우열과 호오를 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내 인생 내 어깨에 지고’, 누가 대신 져줄수도 없고 내려 놓을 수도 없는 십자가입니다. 참 사람됨의 표지가 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여 지고 가야합니다. 참으로 제 책임의, 제 운명의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참 멋진 제자들입니다. 마지막 천국의 열쇠도 각자의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추종도 원활해 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발적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바오로의 말씀처럼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힘의 원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바로 세례성사와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을 통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사랑의 샘, 생명의 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을 항구히 추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역시 역설적 영적진리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어가는 삶같지만 오히려 목숨을 얻는자기실현의 구원과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얻다’에서 얻다의 그리스어의 일차적 뜻은 '발견하다'라 합니다. 그러니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그래도 자기를 잃어가면서, 비워가면서 참 자기를 발견해가는 ‘발견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환대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입니다. 환대의 반대는 냉대입니다. 참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는 냉대의 추억일 것입니다. 환대의 제자들, 참 멋진 주님 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분도회의 정주서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환대 영성임은 다음 고백시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환대의 영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손님들을 받아들임에 대한 제53장 서두의 말씀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새삼 환대의 영성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와 제1독서 열왕기 하권 내용도 환대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웃을 환대함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또 환대에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을 확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환대의 사람치고 잘못되는 경우는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바로 사람 환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환대 자체가 고귀한 덕이자 그 자체가 보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녹색평론의 편집인 고 김종철님이 꿈꿨던 세상이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였고,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는 물론 교회가 꿈꾸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지극 정성 환대하는 수넴의 한 부유한 여자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 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하며 마침내 한 아들을 안게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도 받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환대의 영성입니다.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환대의 모범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과, 주님을 환대하는 우리가 만나는 참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자 교황주일이기도 합니다. 참 멋진 제자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시대의 예언자,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신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멋진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주셨으니 바로 사랑과 추종, 환대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참 멋진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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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6월 28일
  |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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