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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십자가를 꽂고
조회수 | 1,563
작성일 | 08.06.26
요즘 반딧불이가 한창인 우리 수련원에는, 위쪽 동산에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현양동산은 한국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동시에, 지친 영혼의 쉼터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현양동산에서 유난히 내 맘과 눈이 머무는 곳이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현양당 앞에 있는 무명순교자상이다. 언뜻 보면 고인돌로 보이는 무명순교자상은, 사람이 단두대 위에 목을 올려놓고 있는 형상의 돌 구조물로, 내 목을 빨리 치라는 듯이 서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가슴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관통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십자가가 그의 가슴을 뚫고 땅바닥까지 꽂혀있다. 가슴에 칼을 맞고 피 흘리는 예수성심상이나, 가시관을 눌러쓴 십자고상보다 훨씬 더 섬뜩해 보인다.

그 앞에서 김을 매다가 문득 십자가가 하필이면 왜 등에 걸쳐 있지 않고 가슴을 관통해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혹시 그 무명순교자는 자신이 그 십자가를 떨쳐버릴 것을 두려워해서 자기 가슴에 꽂아버린 게 아닐까? 전장의 병사가 갑옷을 벗지 못하도록 꿰매 입듯이 말이다. 무명 순교자는 어느 순간, 어느 고통 앞에서 예수를 버리고 배교의 길을 걷게 될까봐 걱정스러웠던 게 아닐까?

지금은 열심히 하지만, 혹은 늘 습관처럼 당신의 길을 따르겠노라고 말하지만, 그 다짐이 강하면 강한만큼 더욱 더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이치를 잘 알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그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미덥지 못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가슴에 꽂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리라.

그래서 그 순교자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가슴에 꽂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고 몸으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교자상 앞에는 ‘그대의 이름은’이라고 씌어있다. 우리는 대부분 어느 성지에 가던지 그 곳이 어느 성인의 성지인지, 어느 분이 태어난 곳인지, 돌아가신 곳인지 등을 묻게 된다. 그런데 그 무명순교자상은 오히려 우리에게 이름을 되묻고 있는 것이다. 요즘 내가 살아가는 모습, 인간관계, 나의 위치, 나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게다.

그것도 십자가를 가슴에 꽂은 채 아무 말 없이 묻고 있다. 큰 소리로 강하게라도 질문해온다면 변명거리라도 궁리해보련만, 무명순교자상은 언제나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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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종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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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나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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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리교사가 어린 학생들에게 사순 시기에 대한 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사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돌아가셨을까요?”
그런데 그 질문에 답을 하는 학생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조금 당황한 교사가 다시 학생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떻게 돌아가셨을까요?”
또 답을 하는 학생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개구쟁이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 교사는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대답을 하겠다고 손을 드는 그 친구가 너무 반가워서 말했습니다.
“그래 우리 친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떻게 돌아가셨을까요?”
그러자 그 친구가 엄청 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붙어서 돌아가셨어요.”

그냥 의미 없는 재미난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 의미를 잊고 바라본다면,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희생과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 붙어 계신 모습인 것입니다. 어쩌면 그 친구의 대답은 바로 나의 신앙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십자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실제 내 주변에는 수많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거실에 걸려 있는 십자가, 책상 한구석에 서 있는 십자가, 차량에 붙어 있는 십자가, 룸미러에 달려 있는 묵주에 딸린 십자가 등.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의 의미를 얼마나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 장식 소품과 같이 거실을 예쁘게 꾸미고자 달아 놓은 십자가에서, 어떠한 사고에서도 나를 지켜줄 것 같은 부적과도 같은 차량의 십자가에서, 주머니 혹은 가방에 습관처럼 지니고 다니는 묵주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나의 필요에 의해서 지는 십자가가 아닌, 더 큰 선물을 받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과정이 아닌, 당신이 직접 지고 살아가신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습니다만, 그 십자가의 삶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었음에 그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을 때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십자가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먼지가 쌓이고 때가 낀 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참된 마음을 느껴봅시다.

십자가는 또한 우리 삶 곳곳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어려운 사건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도구여야만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로 향한 이 희망의 목적지가 없다면 나의 십자가는 견뎌내고 지나가야 하는 상처의 상징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우리 자신이 그 십자가를 통해 하늘과 더욱 가까워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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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규남 마티아 신부
2020년 6월 28일 인천교구 주보에서
  |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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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모래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공사장에 쌓여 있는 모래 더미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모래성을 쌓으며 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한참 동안 쌓아 올린 모래성을 발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놀면 안 돼. 이곳은 위험하니 나가 놀아.”

같이 놀고 있던 친구와 그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우리는 이 아저씨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정성을 다해 쌓고 있는 모래성을 발로 부쉈다면서 말이지요.

어른이 된 지금, 아직도 그 무너진 모래성을 안타까워할까요? 이제는 별것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공사판에서 노는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아저씨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아까워하고 억울해하는 일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일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닌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는 어떨까요? 부족함이 전혀 없는 만족으로 가득한 곳에서 지금의 아쉬움은 특히 별것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현재 아까워하고 억울해하는 일을 비롯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장차 갈 하느님 나라에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하신 주님의 말씀에 더욱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보다 가족 사랑을 앞에 두지 않도록, 즉 모든 관계에서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족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보다 하느님 사랑이 더 위에 있으며,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죽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인간적인 이익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신의 몸과 함께 죄스러운 버릇과 즐거움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하느님께 두는 사람에게 합당한 상이 주어집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힘듦이 사라지는 나라, 더는 억울하지도 않고 아까워할 것이 없는 나라, 커다란 기쁨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 이 나라를 향한 우리의 노력을 늘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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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0년 6월 28일
  |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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