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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고통은 바로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조회수 | 1,627
작성일 | 08.06.26
어쩌다 초대 교회사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순교자들의 사화를 읽을 때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가슴이 조여 옵니다. 십자가형이 그렇게도 가혹하고 비참했던가를 지금도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로마 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십자가 형벌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형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야말로 최후 한 방울의 피까지 모두 흘리면서 며칠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시달리다가 마침내 신음 소리와 함께 죽어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인은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까지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며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십자가’란 곧 피와 땀과 고통을 대신하는 말마디로 알아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이제 십자가는 우리의 온갖 고통과 우리 인생 행로의 가시밭길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는 곧 고통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바로 고통이기에 고통을 원하지 않는 우리로서는 십자가는 달갑지 않으며,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고, 그 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외면한 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야말로 피하거나 등질 것은 못되며 오히려 자신이 짊어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역설적으로 강조하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도록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불란서의 유명한 문학가 뽈끄로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십자가의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면 행복도 원하지 말라’ 참으로 고통 즉 십자가만이 하느님의 참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되며, 겸손되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며 영원한 행복에로 향한 희망 속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십자가는 결코 하느님의 저주가 아니라 당신에게로 부르고 계시는 신비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를 고통 중에 버려 두시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는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 없이 많은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질병과 고통, 빈곤, 불안과 절망의 상태, 그 중에도 명예와 권력과 쾌락의 유혹이 노도같이 덮쳐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쉽게 십자가를 내던지거나 외면한 체 고통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희망과 행복의 포기이며 예수님을 외면한 것이어서 결국에는 자멸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실망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고통을 주시되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고통을 주시되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갈 충분한 힘과 용기가 주어 졌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포기할까봐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의 좁은 가시밭길을 오르심으로써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감히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편태로 시퍼렇게 멍든 등에 십자가를 지시고 비틀거리며 골고타의 자갈길을 오르신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셨으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이렇게 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지극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십자가를 외면하고 원망하며 저주하면서까지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방덕한 사람이며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뿌리치는 행위이며, 자기가 지금 어떠한 죄를 저지르고 어떤 추악한 짓을 거듭하고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뉘우침도 없이 무관심 속에서 가련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종말에 행복하기보다는 틀림없이 멸망할 비운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도 십자가를 외면한 체 고통을 피하고 오히려 쾌락만을 찾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즉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꿇어 잘못을 용서 청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매일의 고통이 원망스럽고, 하나의 숙명적인 멍에로 생각되어 질질 끌려가는 상태라면, 스스로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고통에 굴복하고 자포자기 상태로 십자가를 등진 체, 멋대로 온갖 유혹에 끌려 죄악의 상태로 살고 있다면, 즉시 용기를 내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러러보고 자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매일 매일의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려움들을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극복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쾌한 나날의 유혹과 괴로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용기와 희망을 갖고 끝까지 달려가는 곧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심한 것이며, 십자가는 억지로 지고 갈수록 더욱 무거워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같이 만남의 고통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질 때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 하며 때려 칠 때마다 매를 자원하여 기쁘게 맞아야 한다”고 외친 어느 성인의 말을 생각하면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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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형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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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면서도 공감이 가는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환천의 '체중계2' 라는 시입니다.

외제차도 아니면서 밟는만큼 잘나가네'

저만 체중계에 올라가기 싫은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입니다.
가만히 체중계의 숫자를 보면서 저는 조금 비뚤어진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세상은 존재의 가치를 수치화 한다'라고 말입니다.
신체의 미학을 몸무게로 평가하고,
점수와 등수로 사람의 순위를 매기며,
실적 데이터를 통해서 그 사람의 능력을 재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과연 우리의 존재가 점수나 등수와 같은 수치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러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합당하다는 말, 그리스어로 '악시오스 Axics'입니다.
이는 '합당한' 뿐 아니라 '가치가 있는', '비교할 수 있는' 뜻도 함께 지닙니다. 또 양팔 저울의 중심을 맞추듯, '균형을 맞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합당한' 이란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양쪽이 비교할 만큼 동등한 가치를 지님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합당한 사람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한쪽 저울에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을 놓고 다른 쪽 저울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놓았을 때 균형이 맞는 사람, 또 자신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양쪽 저울에 각각 놓았을 때 동등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 가치와 우리의 존재 가치를 동등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 증거로써 성자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치는
결코 수치나 데이터 그리고 점수나 등수와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성자 하느님의 가치와 합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하느님의 가치로 여기며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가 오늘 교황주일로 특별히 기억하고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예수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도 그 뒤를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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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류지명 가브리엘 신부
2020년 6월 28일 광주대교구 주보에서
  |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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